본문 바로가기

제 3회 글알못 팬픽대회

망상향 - 반짝반짝

...그리고 비가 내렸다. 모자를 앞으로 비스듬히 기울이듯 더욱 푹 눌러 썼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시선을 끌고 싶지 않아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대로 있었다간 코와 입, 그리고 목으로도 울어버릴까봐? 평소라면 그런 대답으로도 좋았을 것이다. 하나 지금 그 머리는, 그 눈에서 흐르는 빗방울, 하늘의 빗방울과는 본질적으로 달라져버린 그 물방울이야말로 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이어주는 유일한 것임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잔뜩 깨져버린 바닥에 주저앉아 그저 울고 싶은 충동에도, 애써, 어쩌면 아무런 자각 없이, 뺨을 가로지르는 순수를 열심히 팔로 받아냈다. 하늘에서 추락해 바닥의 균열을 메우고 넘쳐 흐르는 중오염수와, 자신의 순수가 섞이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일 것 같았다. 그녀가 그 사실을 깨닫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으로 좋았다. 굳이 깨닫지 않아도 좋았다. 그 편이 오히려 좋았다. 만일 그녀가 머리로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냉철한 부류의 인간이었더라면, 그녀는 십수년도 더 전에 그녀의 고향을 어리고 어린 망상으로 치부하여 냉동참치같은 눈깔을 하고서는 무색무미의 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지금 그 주위를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톱니바퀴들처럼.

 

*
*
*

 

무언가 깨지고, 부서지고, 밴시가 울부짖는 듯한 날카로운 고성이 귓전을 때리어 그녀는 눈을 떴다. 비슷한 방식으로 아침을 맞이한지 3일만이다. 3일이면 그래도 상당히 오래 지났지, 생각하며 아무렇게나 놓인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는다. 옷을 챙겨입고, 세안을 함에 따라 정신도 조금씩 맑아진다. 정신이 맑아짐에 따라, 무의미 소음의 나열이 점점 형태를 갖추어 자신을 소개하는 듯하다. 경찰이오, 조사에 협조해 주시오. 이제와서 무슨 조사를 한단 말이야. 쨍그랑 깽창. 이러면 곤란하오. 과연 그렇네요 이래서야 애써 온 의미가. 네들이 농땡이만 피우지 않았어도 말이야. 최근에 이 근처에 경찰이 엮일만한 일이 무엇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본다. 백조를 볼 때 다리를 보지 않는 것처럼, 관심사 밖의 것은 희미하게나마 기억한다면 놀라운 일이다. 며칠 전 밤에 그녀가 거처에 들어왔을 무렵, 옆집인지 옆옆집인지의 출입문이 부서져있어 내부가 들여다 보였던 기억이 있다. 피로 가득한 웅덩이, 아마 난도당한 거주자의 사체, 살아남기 위한 저항의 흔적인지 떨쳐낼 수 없는 가난의 흔적인지 뚜껑이 닫힌 채로 프레스기에 짓눌린 병처럼 잔뜩 박살난 가재도구와 벽. 그리고 아마 그것보다 훨씬 전에 온몸, 특히 실리콘을 가르고 그 스키마 사이로 엿보듯이 삐져나온 왼팔의 크롬 뼈대에 피를 잔뜩 묻힌 남성...여성... 아무튼 인간이 헐레벌떡 달려가는 모습을 보았던 것도 같다. 척 보기에도 어설펐다. 경찰이 정말로 잡을 생각이 있었더라면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붙잡혔을 것이다. 애초에 이 쪽에는, 경찰이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다. 다만 들리는 소리로 미루어 보건대, 전화로든, 직접 찾아가서든 저 시끄러운 괴성을 계속해서 노발대발 질러대는 탓에 형식적으로나마 나타난 것이리라. 부우우우웅 하는 전자 부유음이 고막에 섞여든다. 무심코 창 밖을, 네온을 잔뜩 두른 건물 너머 하늘을 쳐다보았다. 비행선의 옆면에 매달린 광고 스크린이 눈에 들어온다. 경찰은 시민의 친구라느니, 치안은 완전하다느니하는 류의 공익광고가 위스키 병에 붙은 라벨처럼 큼지막하게 흘러가고 있다. 어쩌면 경찰이 나타난 건 저 괴성때문이 아니라 스크린을 흐르는 저 캠페인때문이 아닐까 하는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타이밍 좋게 날카롭던 소리가 둔탁한 소리로 바뀐다. 빠악. 뻐억. 이딴 곳에 찾아와 준 걸로 감사할 줄 알아야지. 너무 심한 것 아니오. 그러나 그 말만은 옳소. 옳긴 뭐가 옳단 말이야. 뻐억. 경찰은 중심을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인력 부족이오. 그런데 이런 곳까지 경찰이 그것도 두 명이나 온 것이오. 그게 당연하단 말이야. 이 놈이 그래도. 뻐억. ... 이래서야 조사를 계속할 수가 없지 않겠소. 그냥 돌아가시지요. 음. 뚜벅뚜벅뚜벅... 소란이 진정되자 그녀는 창 옆에 걸린 달력에 살짝 시선을 주었다. 2039년 3월 23일. 나름대로 조사를 시작한지 얼마나 지났는지 떠올리려다 그만 머리가 복잡해진다. 난잡한 생각을 한숨으로 내보내고 그녀는 문을 나섰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람이 있다. 아까 소란의 주역 중 하나일 것이다. 목 중앙에서 약간 왼쪽에 뚫린 구멍에 자그마한 스파크가 우는 듯한 소리를 내며 튀고 있다. 경찰? 아니다. 그런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저렇게 쩨쪠한 구멍을 뚫을 만큼의 정성을 쏟을리도 없다. 인터넷에 중추신경을 직접 연결하기 위한 케이블 구멍일 것이다. 이 시대, 또 이 구역에는, 태어난 그대로 인간의 몸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녀 혼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 시대에 이르러 인류의 과학 기술, 문질 문명은 그 정도로 무궁하게 발전해 있었다. 그것이 급작스러웠는지, 점진적이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기술의 발전에 비례하여 인간성은 그 모습을 감추었다는 것이다. 주로 이 거대한 도시의 가운데에는, 고개를 들면 어디서나 보이는, 온갖 빛을 아름답게 반사하는 유리 빌딩들이 옹기종기 모여 솟아있다. 거대 기업의 임원진, 유력 정치인;말하자면 가장 부패한 정치인, 졸부나 그 자식들이 지위를 과시하는 거주 구역이다. 그 안에는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너구리나 고양이, 까마귀따위의 동물들이 보존되어있다는 소문도 들린다. 치안은 말할 것도 없다. 하나 그녀를 비롯한 절대다수의 거주지는 군데군데 뼈대가 보이는 녹슨 건물이다. 뼈대가 드러나지 않은 곳은 9할 가량이 극채색의 외설적인 네온 간판으로 뒤덮여있어, 그 음울함을 더한다. 길거리의 동물들은, 쥐들조차도 그녀가 기억하던 모습을 거의 남기고 있지 않다. 잡초나 야생화, 죽순따위의 여러 식물은 불길한 형광빛을 내는 것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의 관심사는 그 따위 것이 아니다. 불평등이니 환경오염이니 하는 것은, 안락의자 하나만큼의 공간에서 얻을 수 있는 전자적 쾌락이라면 순식간에 잊을 수 있는 것이다. 옆 집에 무슨 일이 생기든, 주거단지의 중앙정원이 이상한 색으로 빛나든, 살인마따위의 범죄자가 쾌락형 생계형을 가리지 않고 얼마가 늘어나든, 그저 빨리 출근해 일을 끝내고, 의자에 파묻혀 사이버 스페이스에 뛰어드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다. 이제와서는 쾌락이라고도 하기 힘들 정도로 무미건조한 경험이 되었을 테지만, 그것이라도 없으면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마모된 것이 이 시대의 사람들인 것이다. 그럼 저 칙칙한 극채색의 네온은 무엇인가. 당연히, 물리적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한 강렬하고 자극적인 서비스, 즉 뇌를 마비시키는 가공할 연예사업과 성산업의 흔적 기관이 그런 네온과, 그 간판 아래에서 옷이라고 하기도 미안한 실오라기의 집합을 두르고 호객하는 여인들이다. 그런 여인들과, 또 손님들의 몸뚱이는 대개 4할 정도는 기계로 대체되어, 보통이라면 할 수 없을 쾌락을 제공하고, 또 받아들인다.

 

바깥 세계의 물질 문명보다 우수한 요괴의 정신 문명... 골프 우산 두 개 반 가량 너비의 골목길을 걸어나가며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그 말에 깊게 공감하고 있었다. 옛날부터 바깥 세계의 허울뿐인 지식을 혐오했고, 경계의 너머에 감추어진 진실을 보고 겪은 사람이 그녀이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사진을 찍어댄 것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고향이 단순한 망상이 아님을 증명해줄 것이. 그러나 차마 자신이 그런 두려움을 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기에, 여기저기 뿌려버릴 용도라며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아마 그 대요괴는 그런 걸 어느정도 꿰뚫어봤던 모양이고, 그래서 아직까지 자신의 숨이 붙어있는 것이리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 것도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알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이 어쩌고 하는 심심한 이유때문은 아니다. 그녀가 그것을 깨달은 이유는, 그 꿈, 마음의 고향이 치기어린 망상은 아니었을까 하는 두려움을 직시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바깥이 칙칙해질수록, 그녀가 환상향에 찾아가고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은, 삶에 지친 회사원이 귀향을 꿈꾸는 것만큼이나 당연했다. 어떤 날은 일부러 수면제를 복용해보기까지 했다. 그 정도로 그 곳은 편안했다. 그러나 어느 날인가부터, 아무리 애를 써도 환상향에 갈 수가 없었다. 처음 이상을 느끼고 다시 찾아갈 수 있던 것은 3달만이었다. 일전의 3주간의 일이 떠올라 무슨 이변이라도 있었던 것인지 물어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3달이었다는 말 뿐.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그 이후로 몇 달간은 다시금 환상향에 문제 없이 찾아갈 수 있었기에 대충 넘겼다. 그러나... 지금은 마지막으로 환상향에 들른지 수 년이 지났다. 최후의 방문 이후 반년 뒤, 그녀는 자신의 목숨이 붙어있는 이유를 생각해냈다. 그리고, 그 때 시간이 있을 때 좀 더 자세히 알아볼 걸 하는 후회와 함께 정말이지 오랜만에 집을 나섰다. 그 날 처음으로 그녀는 이 세상이 얼마나 부패했는지 직시했다. 분명 마지막으로 나갔을 때는, 팔 하나 갈아끼우는 것, 생체 케이블 하나를 몸의 말단부에 뚫는 것조차 막 소개되었던 시기였는데-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혐오스러웠지만-어느샌가 사람들이 모두 참치가 되어버린 것이다. 원하는 꿈을 꾸지 못하게 되더라도 그녀의 능력만큼은 강해졌으면 강해졌지, 결코 약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자그마한 원룸 정도의 공간에서 의식주를 모두 해결하며, 종이 위, 또 온 벽면과 바닥을 그녀의 고민으로 고스란히 채우며 잠드는 시간만을 기다릴 수 있었다. 즉 밖에 나갈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그녀가 세상의 변화에 크나큰 충격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대요괴들의 협의든, 결계의 자기방어적 기재든, 기술의 발전에 따라 결계가 더 강해진 것이라고 생각해 예전 자신이 이변을 일으켰을 때처럼 결계를 부수려는 생각도 해 보았다. 혹은, 구시대, 그녀가 살던 시대나 그보다 이전 시대의 흔적들을 모은다면, 굳이 부수지 않고도 자신이 들어갈만한 자그맣고도 순간적인 구멍을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직 그녀에게 빛나는 듯한 전능감과 무모한 행동력이 남아있던 날들이었기에 그녀는 금방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구시대의 흔적을 모으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지만, 또 생각만큼 쉽지도 않았다. 어딘가의 골동품 가게나 쓰레기장, 혹은 박물관의 구시대 코너에서 잠시 '빌려'오는 것은 그녀의 초능력(을 쓰는 정도의 능력)이라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모을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명확했음을 머지않아 깨달았다. 기술의 발전에 반발하여 구시대의 테크놀로지 등을 숭배하고, 또 모으는 컬트 집단들이 대거 출현하여, 절대다수의 구 테크놀로지를 점유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안 시점에서 그녀는 쓸모없는 것들답게 동태눈깔이나 되어버리지, 왜 이렇게 날 힘들게 하는 것이냐며 모순된 모멸감을 강하게 느꼈다. 그래도 그녀는 필사적이었다. 이대로 이 바깥 세계에 버려지고 싶지 않았다. 하여 때로는 교섭으로, 때로는 슬쩍 빌려서, 때로는 게임의 퀘스트처럼, 때로는 파괴공작으로 온갖 컬트 집단을 헤집고 다니며 닥치는 대로 쓸어모으고, 그렇지 않은 날에는 환상향과 연결될 법한 스팟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결계를 뚫고 들어갈 방법을 고심했다.

 

다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결계를 넘어갈 방법은 중요치 않았다. 어느 순간, 그보다도 결계가 아직까지 존재하는지부터 확답을 내릴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언젠가 마치 담배 연기의 테두리처럼 이쪽과 저쪽의 경계가 희미한 장소들을,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다시 한 번 쭉 돌아보기로 했었다. 그 첫 걸음이 하쿠레이 신사로 향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신사 내부는 언제나와 같이 낡았고, 비어있었다. 그 무렵은 아직, 미약한 형광빛을 내는 담쟁이덩굴이 조금은 이목을 끌던 시기였다. 특별한 수확 없이 신사를 나서려고 했을 때, 풀이 밟혀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철그렁철그렁치리링치리링하며 가벼운 금속이 잔뜩 부딪히는 소리, 광신도들이 신께 기도드리듯 토해내는 함성과 신음이 섞인 듯한 소리가 그녀가 향하던 방향에서 잔뜩 몰려왔다. 옛날이었다면 소리가 들리지 않는 반대쪽으로 길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날은, 비단 그 날 뿐이 아니지만, 그녀는 너무나도 지쳐있었다. 하여 그녀는 신사 안에서 숨을 죽이고, 무슨 일인지 살펴보기로 결정했다. 구시대, 연도를 3자리수로 세야할 것만 같은 시대의 유물로 몸을 덮고, 비교적 현대의 유물을 지팡이나 옷, 모자 따위에 감아 마구 흔들어 소리를 내는 인간들이 풀숲을 헤치고 나타났다. 이런 곳까지 찾아오는 컬트 집단이 있나, 하며 짜증을 내면서도 저 정도로 옛날의 유물을 신봉하는 집단은 듣지도 못했고, 찾아볼 생각도 못했기에 나름 신선한 자극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이후에 찾아올 충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기도를 올리는 존재는 무녀였다. 붉은 무녀복을 입고, 불제봉과 부적, 또 음양의 상징이 새겨진 거대한 태양으로 악인과 이 세상을 멸할 무녀. 그들의 기도를 듣고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붉은색. 재앙의 상징. 묵시록의 용. 피의 색. 무녀. 신사의 주인. 곡옥. 부적. 태극. 전통적인 이미지. 보편적인 상징. 엽기적인 종말론의 단골 소재이자, 열 몇살만 되어도 연관지을법한 직관적인 아이템. 놀랄 것 없다. 그러나 그녀의 머리는 오로지 하나의 이미지만을 내놓았다. 홍백의 무녀. 하쿠레이 레이무.

 

말도 안 된다. 바깥에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있기는 한가. 단순한 우연이다. 온갖 미신과 상징의 짜깁기가 전통적인 이미지와 결합했을 뿐이다. 환상향은 잊힌 존재들의 낙원.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가능성을 부정했다. 그러고자 애썼다. 마치 한여름 아스팔트에 내던져진 조그마한 물고기처럼. 하지만 그녀는 그녀가 나고 자란 이 먹물같은 검회색으로 변해버린 도시, 네온이 처발린 문명 세계가 자신의 고향임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다. 즉 이성적이라고는 부르기 힘든 사람이다. 그녀에게 있어 이 다년간의 조사와 수집, 탐험은 실성한 사회부적응자의 방황이 아니라, 폐쇄된 귀성길의 흔적을 더듬는 일이다. 그녀는 가능성을 부정하는 대신, 그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길에 나섰다.
그래, 그 때부터였지. 하며 그녀는 화려한 간판 쪽으로 꺾일 듯이 굽은 노란 형광빛을 내는 태양같은 해바라기무리를 보았다. 이 사이비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던 게....  불량한 패거리에게 살해당한 노숙자의 눅눅한 피는, 해바라기에 튀어 그 녹색 줄기와 어우러져 화려한 붉은 스커트를 유독 연상케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머리를 흔들어 머리에 떠오른 여성을 털어냈다.
지금껏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뿐, 생각 이상으로 구시대의 미신을 계승하고, 의존하는 사람의 수는 많았다. 일본에만 그런 집단이 수십 수백이었다. 그럼 인원수로 따지면 얼마나 될까? 아시아로 본다면? 세계 전체로 본다면 그 수는 어떠할 것인가? 대다수의 교리와 신화는, 각기 그녀의 머릿속에 단 하나씩의 이미지만을 퍼올렸다. 산, 땅의 아래, 하늘 위, 숲, 대나무.... 그들의 이야기는 놀라울 정도로 그녀가 기억하는 풍경과 같았고, 그 풍경과 떼어놓을 수 없는 이름들만이 등장했다.
잊힌 존재들이 흘러드는 낙원. 그 망각의 시효가 끝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누구도 믿지 않고 알지 못하던 지난날의 꿈이 모두에게 퍼진다면, 그 이야기는 어느 쪽에 속할 것인가. 그녀는 먼저 그 답을 찾고 싶었다.

 

오늘은 어디를 향해야 하나 하릴없이 걷다 보니 그녀는 대로변에 도착했다. 언제든, 이 끔찍한 거리의 풍경은 달라지는 법이 없다. 사이버네틱스로 대체한 부분, 혹은 태어난 그대로인 부분을 가리지 않고 새겨진 온갖 흉터로 그 삶을 나타내는 범죄자들. 그 근처를 수행하는 야쿠자, 마피아, 갱단, 그런 하위 구성원들. 조금은 능숙한 듯한 선배 샐러리맨 등 뒤를 어린아이처럼 쫓아다니면서도 선정적인 차림의 호객꾼들을 열심히 훔쳐보는 사회 초년생들. 간신히 사이버 단자나 몇 개 뚫어 놓은 없는 집안의 탈선 청소년. 혹은 그보다는 형편이 좋은 집안의, 눈에 확 띄도록 크롬칠을 한, 그래서 오히려 나이를 가늠할 수 있는 작은 덩치의 탈선 청소년. 그리고... 그녀는 지난 수년간 미친듯이 헤집어 찾던 익숙한 소리의 근원지로 발걸음을 향했다. 교차로의 한 부분을 점거하고 교리를 설파하는 구시대적 종말론자들. 이러한 '일반인'들이 늘 북적북적거리는 것이 늘 보이는 풍경이다. 진정 사회의 뒷세계와 연관된 이들은 으슥하디 으슥한 골목길처럼 눈에 띄지 않는 장소나, 축시처럼 불길한 시간대에 주로 나타난다. 그들은 소수의 기막힐 정도로 타고난 미치광이와, 초거대기업들을 상대로 털어먹기나 협상이 가능한, 혹은 그 기업들에 고용된 초인-초인이라고 해서 그녀같은 초능력자는 아니다. 말하자면 마법사와 마술사, 클락 켄트와 브루스 웨인의 차이이다.-들이다.

 

뭐, 물론 예외는 있는 법이지, 하며 그녀는 시야에 들어온 종말론자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나마 봐 줄 법한 일반인이다. 고향을 떠올리게 해 주는 존재인 것이다. 오늘은... 사슬을 매달고, 뿔 달린 모자에 가끔 한냐 가면을 쓴 놈들이 섞인 걸로 봐서 오니 관련이네. 땅을 어떻게 하느니 떠들어 대는 건 신교 쪽인가. 벌써 그렇게 시간이 지났나. 대숲에 대한 이야기가 듣고 있자면 조금은 편해지는데 말이야... 쓸쓸해지기도 하지만. 특별한 감흥도 없이 그녀는 생각했다. 물론 그녀가 단순히 그들의 신앙이 궁금해서 굳이 발을 옮긴 것은 아니다. 그 정도야 이제는 듣기만 해도, 날짜만 보고도 얼추 알 수 있다. 그저 시끄러워서는 더더욱 아니다. 바로 그 종말론자들이, 마침 그녀가 생각하던 그 '예외'에 속하는 부류이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저 속에 그 예외가 섞여 있다. 대부분의 종말론자들이 거리를 떠날 때, 남아있는 이들, 또 거기에 합류하는 이들이 있다. 물론 지금처럼 시끄럽게 떠들어대지는 못한다. 그럴 필요도 없다. 단순히 음습하게 자리를 잡고 앉거나 선 채로 시간을 보내거나, 가끔 가까운 이를 붙잡고 한두마디를 건내는 정도면 충분한 것이다. 그런 때, 그런 장소에는, 대개 그런 이들만 모습을 드러내는 까닭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 사실들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 그것도 이렇게 자세하게? 당연히, 그녀 또한 예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초인이나 미치광이들에 대해서도 그다지 자세하게 아는 것이 아니다. 그 쪽은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다. 말했듯 그녀의 관심사는 결계가 아직 존재하긴 하는지, 잊힌 신앙이 부활하여 널리 퍼진다면 어떻게 될지에 대한 나름의 해답이다. 즉 그녀가 예외에 속하기 시작한 것은, 저 구세기를 신봉하는 컬트 집단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녀는 사회의 두 면을 누비며 수많은 교단을 찾아내고, 테러를 감행하고, 협상하거나 때로는 신의 대리인 행세를 하기도 했다. 다른 세상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다른 세상에 뛰어들 필요가 있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건 참 틀림없는 법칙이라고.

 

...그래서 나는 혼자로 충분했던 거야. 그녀의 생각은 끝없이 뻗어나갔다. 혼자... 생각은 그녀의 학창 시절까지 가지를 뻗었다.

 

오로지 그녀만이 숨겨진 진실에 귀 기울일 수 있었다. 오로지 그녀만이 그럴 자격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떻게든 주변과 거리를 두었고, 그것은 성공적이었다. 다른 한심한 것들과 어울려 스스로의 가치를 낮출 생각따위 없었다. 올림포스의 신들이 구태여 인간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는가? 아킬레우스가 굳이 왕에게 고개를 조아려야 하겠는가?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범죄 중 하나였다. 그녀가 지금 주위에 바글거리는 인간들을 보면서도 동정하거나 개탄하기보다도, 내심 자신의 판단이 이전부터 옳았다는 일종의 자부심과 저들에 대한 모멸감을 느끼는 것은 그런 까닭도 있을 것이다. 입면 후의 환상향만을 기다리는 것과 퇴근 후의 사이버스페이스만을 기다리는 것의 차이도, 그녀는 그런 식으로 납득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기어이 자신이 동경하던 다른 세계에 발을 디뎠다... 그 세상, 그 주민들은, 그녀에게 걸맞은 생물들이요, 그녀가 꿈꾸던 세상이었다.

 

그 땐 정말 최고였지. 그녀는 회상했다. 마치 저 하늘에 또렷이 빛나는 북극성과도 같은 전능감, 오감으로 자신의 특별함을 확인했을 때의 짜릿함. 나의 황금 시대는 두말할 것도 없이 그 때였을 거야. 내 친구에 어울리는 각양각색의 인요들, 그 아름다운 세계. 그 곳에서 내가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놀라지 않았을 거야. 아니, 두 손을 들고 환영했을 걸. 이런...

 

촤아아아악. 질주하는 자동차의 바퀴가 큰 소리를 내며, 신난 어린아이가 물장구를 치듯히 도로변에 고인 중금속 산성비를 그녀에게 쏟아부어, 그녀를 현실로 끌어당겼다. 과거의 영광에 잠겨있었음에도 다행히 그녀의 반응은 늦지 않아, 망토를 휘감아 직격만은 피했다. 이런 끔찍한 세상을 고향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듯,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신경질적으로 망토를 강하게 털어 물기를 쫓아냈다. 그녀가 지쳐가고 그 감정이 피폐해질수록, 그녀는 계속해서 환상향과 그 곳에서의 날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어머니를 찾고, 늙고 지쳐 은퇴한 보안관이 고향을 찾듯 당연한 이치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현실은 그 박탈감을 더더욱 강렬하게 때려박는다. 그녀는 갈 곳도 정하지 않고 때마침 도착한 도색이 다 벗겨진 낡은 대중교통 버스에 올라타 얼마 남지 않은 좌석을 차지했다. 이렇게 자신의 황금기를 떠올렸다가 깨어날 때마다 오른쪽 옆구리를 도려낸, 자신의 몸에 처음으로 새겨진 탄환의 흉터가 쑤셔대는 것이다. 컬트 집단을 조사하는 과정과 도심의 불청객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무력다툼은 필수불가결하며 그녀는 신이 아니다. 상처 입는 일도 당연히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옆구리의 흉터보다도, 더욱 빠개질 것 같고 끈적한 안개가 낀 것만 같은 것은 그녀의 가슴이다. 한심한 인간들 따위에게 상처입었다는 느낌만으로 그녀가 그렇게 괴로워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정도로 괴로운 일은 아니다. 그저, 상처가 늘어날 때마다 자신, 또 자신의 특별함이 마모되는 것만 같은, 이 극채색의 회색 도시의 일부로 녹아드는 듯한 감각이 쌓여 이런 때에 끝내기처럼 몰아치기 때문이다. 북극성?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떠올린다. 녹슬고 부스러져 떨어져나간 인공위성이다. 아니, 어쩌면 떨어져 나간 잔해 쪽이 지금의 자신에게는 더 어울리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비속어를 속으로 삼켰다.

 

여지껏 이런 일로 그런 말을 내뱉은 적은 없었는데. 그녀는 분함을 참지 못해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아이처럼 인상을 쓰며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다고... 그녀는 마침 정차한 버스를 앞문을 통해 내리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안 그래도 아침부터 머릿속에서 뭔가 내 생각을 읊어대는듯 울리는 통에, 짜증나고 어지러워 죽겠는데, 그녀는 소란스러운, 구시대 컬트 집단의 종말론자가 틀림없을 소음을 향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이쪽은 와 본 적이 많이 없는데, 대숲이랑 관련된 놈들이면 좋겠네. 그 놈들이면 그래도 듣다 보면 조금 괜찮겠지.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두 세 명으로 이루어진 축시에나 보일 법한 소규모의 집단이었다. 뭐야, 이 시간에도 저런 소규모 사이비가 있나? 거기다 처음 보는 복장인데.

 

어떤 지역의 어떤 요괴가 모티브가 된 건지 맞추어보는 것도 고통과 박탈감을 쫓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며 그녀는 그들의 복장부터 살피기 시작했다. 복장의 색은 평범한 검은색. 가끔 흰 색이 섞여있지만, 그렇게 눈에 띄지는 않는다. 멀리서 보면 로브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펑퍼짐한 치마를 입고, 다들 손에 빗자루인지 지팡인지를 들고 있다. 그녀의 머리속에 떠오른 것은 당연히, 흑백의 평범한 금발 마녀이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그렇다면 어떤 교리나 신화를 떠들어대며 이목을 끌 것인지 추측해보기 시작했다. 숲? 버섯? 화력? 그녀는 확실히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그녀의 귀는, 주변의 무의미한 소음을 점차 사람의 언어로 맞추어 정리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추측이 어디까지 맞았을지를 기대하며 그녀는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녀의 추측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그 내용은 마녀의 위험성을 강조하고, 그들이 충분히 힘을 모아 인류를 멸할 것이다, 중세 마녀사냥이 일어난 이유는 그 위험함을 깨달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은 마녀는 그것을 기억하고 똑같이 복수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우리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평범한 종말론이었다. 보통이었다면, 적어도 숲과 식물에 대한 언급은 나왔을 것이다. 못해도 알록달록한 별하늘이나 그걸 가로지르는 레이저;분노 정도로 치환되었겠지만 그 정도는 나왔어야 했다. 수년만에 그녀의 조사에 위배되는 일이었지만, 그렇게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이런 특이 케이스야 얼마든지 있는 법이며, 이번 것을 합쳐도 한 손으로 셀 수 있으므로. 오히려 그녀는 마리사가 그런 식으로 복수하는 장면을 상상하려고 하니 실소가 나올 것 같았다. 마리사가 사람을 겁박해 달군 쇠판을 걷게 하고, 물에 던져넣고, 별의 별 고문을 한다. 그녀에게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초등학생인 여자아이가 한 국가를 제패하는 상상을 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참 재밌는 얘기네,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게나 말이야, 바깥 녀석들의 상상력은 참 풍부하다구. 꽁해서 쌓아놨다가 그대로 복수한다니 그렇게 시답잖은 소리도 없잖아."



"뭐?"



갠 듯 했던 머리와 가슴이 다시 쑤시기 시작했다. 더 심해진 것도 같았다. 이상한 소리,감각은, 이전까지가 학교 종소리였다면 이제는 제야의 종처럼 울려대는 것 같았다. 자신에 대한 의심이 피어올랐다. 어쩌면, 자신은 한 번 잘못된 가설을 세우고도, 다시 원하는 정보만 찾아다녔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목소리는 분명 그녀가 아는 것이었다. 아무리 못 들은지 오래되었다 한들 잊을 리가 없다. 고향의 소리. 하지만 그게 왜? 그 목소리가 왜 저 사이비 녀석에게서 들린 것인가? 그녀는 소리의 근원지로 성큼성큼 다가섰다. 종말론자는 자신의 설법이 사람을 끌어들였다고 생각했는지, 이빨을 드러내어 웃으며 뭐라뭐라 지껄였다. 분명 교단에 들어오겠느냐는 이야기였겠지만, 그녀, 스미레코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그 목소리는 아까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믿을 수 없었다. 잘못 들은 것일까? 그 흑백 녀석 또한, 환상향에, 잊힌 자들의 낙원에.... 하지만 그 목소리는 너무 선명했다. 그녀는 종말론자의 모자를 들추고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녀의 동요와 더불어 머릿속을 울리는 소리도 더욱 선명해졌다. 소리. 그녀의 생각을 꿰뚫어보는 듯한 소리. 누군가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자신이 환상향에 방문하는 원리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도플갱어와 의식을 공유함으로써 환상향에 방문한다. 말하자면 한 몸에 두 개체가 들어있는 것이다. 그녀의 머리가 발광하며 수십년만에 초고속으로 회전하기 시작한다. 도플갱어는 거의 완전히 똑같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플갱어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합쳐진다면? 잊힌 존재가, 환상으로 분류되어, 환상향에 끌려들어가듯이. 되살아난 존재가, 현실로 분류되어, 육체는 갈 곳을 잃고 의식만이 바깥 세계로 끌려들어온다면? 육체까지 통째로 넘어오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그녀는 생각하지만, 물리적 육체를 가진 채로 그 규모의 녀석들이 몸을 숨기고 사는 게 가능할리가 없다. 전산상으로야 가능할지 몰라도, 소문이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그렇다면 의식뿐인 것이다. 당연히, 각각의 개체에 해당하는 도플갱어가 있을 리 없다. 랜덤으로, 그나마 적합한 인간에 달라붙어, 방금처럼 잠깐 튀어나온다... 그리고, 주민들이 모두 바깥으로 끌려나온 환상향은, 그 존재가 희미해져 자신도 넘어갈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의 도플갱어가 끌려나왔다면, 당연히 자신에게 달라붙었을 것이다. 아침부터 울리던 머리도 설명이 된다. 바이러스가 잠복 기간을 가진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억측이다. 고향에 대한 망집이 빚어낸 비정상적인 비약. 하지만 그녀의 주먹은, 그렇게 내놓은 답이나마 지금 한 순간이라도 움켜쥐어야겠다는 듯이 부들부들 떨리며 꽉 쥐어져있었다. 아니다, 주먹 뿐이 아니다. 그녀의 온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고, 입술을 꽉 깨문 채로 자기 눈 앞의 무언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종말론자는 이젠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을 짓고 멍청하게 서 있었다. 화가 났다. 그 근원에는 분함, 박탈감, 또 온갖 감정들이 깔려 있었을 테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런 것까지 살펴볼 여유는 없었다. 저 멍청한 표정. 고향의 사람, 그 마법사는 저딴 표정을 짓지 않는다. 자신의 이론 또한, 저런 멍청한 표정으로 보답받아야 할 것이 아니다. 그녀는 종말론자를 거세게 밀쳐 넘어뜨리고는, 어디론가 달려나갔다. 얼마나 달렸을까, 그녀는 속도를 늦추고 걷기 시작했다. 얼굴이 바닥을 향하고, 그 어깨가 살짝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가 내렸다. 모자를 앞으로 비스듬히 기울이듯 더욱 푹 눌러 썼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시선을 끌고 싶지 않아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대로 있었다간 코와 입, 그리고 목으로도 울어버릴까봐? 평소라면 그런 대답으로도 좋았을 것이다. 하나 지금 그 머리는, 그 눈에서 흐르는 빗방울, 하늘의 빗방울과는 본질적으로 달라져버린 그 물방울이야말로 활기와 전능감으로 북극성처럼 빛나던 과거의 자신과 조각난 인공위성처럼 초라한 지금의 자신을 이어주는 유일한 것임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잔뜩 깨져버린 바닥에 주저앉아 그저 울고 싶은 충동에도, 애써, 어쩌면 아무런 자각 없이, 뺨을 가로지르는 순수를 열심히 팔로 받아냈다. 하늘에서 추락해 바닥의 균열을 메우고 넘쳐 흐르는 중오염수와, 자신의 순수가 섞이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일 것 같았다. 그녀가 그 사실을 깨닫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으로 좋았다. 굳이 깨닫지 않아도 좋았다. 그 편이 오히려 좋았다. 만일 그녀가 머리로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냉철한 부류의 인간이었더라면, 그녀는 십수년도 더 전에 그녀의 고향을 어리고 어린 망상으로 치부하여 냉동참치같은 눈깔을 하고서는 무색무미의 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지금 그 주위를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톱니바퀴들처럼. 물론 그녀는 톱니바퀴는 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그 대요괴들의 콧등을 납작하게 눌러주고 뻐기어 대면서 술잔을 기울이리라 다짐하며 미소짓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소망이 이루어질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지금은 그저, 그 마음을 팔로 받아가며, 그녀의 황금 시대에 대한 기록이 빼곡한 작은 은신처로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다른 글들 보니까 이거 글잘알대회같은데 왜 거짓말 했음??? 납븐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