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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회 글알못 팬픽대회

토끼, 토끼 - 민씨

 대체 왜 내가 가겠다고 했을까-

 

 " 아무래도 그 때 내가 미쳤던 게 분명하다, 우사. "

 

 토끼소녀가 돌덩이에 걸터앉아 턱을 고인 채 중얼거렸다. 자소의 말은 누구에게도 닿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이 투명한 유리막에 막혀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주위엔 누구도, 아니, 무엇도 없으니까. 공기조차도.

 

 축 처진 기분에 그녀의 자랑인 복슬복슬한 귀도 같이 축 내려앉는다. 시선도 마음의 무게만큼 가라앉아 발 끝에 내려꽂힌다. 보이는 것은 하얀 먼지투성이 흙바닥, 못지않게 하얀 우주복의 발.

 

 무려 그 달의 두뇌가 '현대 인체공학기술을 집대성한 최첨단 복장'이라고 자랑하지 않았던가. 그 말이 맞았다. 우주복은 호흡, 취수, 배뇨- 기본적인 생명유지 기능을 넘어 쾌적하기 짝이 없는 맞춤온도까지 제공해주고 있었다. 참 기분좋은 온도였다. 여기가 우주만 아니었다면, 자꾸 상기시키는. 울적한 기분 탓에 더없이 불쾌한 쾌적함이었다.

 

 고개를 든다. 펼쳐진 새하얀 돌, 모래, 사막. 하얀 수평선을 선명히 끊어내는 까만 하늘, 반짝이를 뿌린 듯 총총히 빛나는 점들. 하늘이라지만 파란 색이라고는 저기 저 반달모양 지구 뿐이었다.

 

 저기 어디쯤에 환상향이 있겠지. 환상향의 어디쯤엔 영원정이 있겠지. 영원정에는 귀찮다며, 바쁘다며 날 이 곳으로 보내버린 공주님도, 사부님도 있겠지. 으득. 으드득.

 

 " 으아아아아아! "

 

 갑자기 열이 받아 달려가서, 몸이 붕붕 뜨는 탓에 달-려-가-서 하찮은 아무 돌멩이를 걷어찬다. 지구에 있었다면 너는 월석이라며 귀물이 되었겠지만 여긴 달이잖아. 발에 채이도록 굴러다니는 것이 귀한 물건이겠니. 돌멩이는 부-우-우-웅 떠서 한참 뒤에야 톡, 톡, 데구르르- 땅수제비가 되었다.

 

 돌을 걷어차는데 자그마치 10초가 걸렸다. 남은 어이마저 탈탈 털어내는 광경에 테위는 이마를 탁…… 치려 했다. 성공했을 것이다. 그녀가 살아 숨쉬도록 하는 유리막만 아니었다면. 실패한 대가로 스스로의 헬멧을 퍽. 예상치 못한 자학에 머리부터 뒤로 고꾸라져 흙바닥에 대자로 팍. 눈치없이 최첨단인 우주복이 넘어지는 충격을 흡수해줬다.

 

 " 우사… 우사……. "

 

 테위는 정말로 울고 싶었다. 장하게도 차오르는 울음을 잘 삼켰다. 유리에 김이 서리지만 않는다면 아마 펑펑 울었을 것이다. 집에 가서 달콤한 당근 주스를 마시고 싶다. 사과를 넣고 꿀을 탄 녀석으로.

 

 

 

 

-

 

 

 

 

 사막을 지난 테위는 산을 건너, 바다 위를 걷고 있었다. 사막과 산과 바다가 모두 똑같은 재질이라는 것만 빼면 보람찬 여행이 되었을 게다. 우주복을 입어 무거운, 사실 1/6의 무게라서 무거운의 ㅁ쯤만 남아 불편하기만 한,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디를 얼마나 걸어가도 같은 풍경이다. 변하는 것이라고는 까만 하늘을 건너가는 무심한 지구와 별들 뿐. 

 

 찬란하다는 달의 도시는 어디에 세워져 있는가. 대단하신 월인님들은 어디에 계신가. 달에 가면 볼 수 있다던 떡방아 찧는 달토끼는 어디에 갔단 말인가! 그래, 달토끼! 멍청이 겁쟁이 달토끼! 내가 여기에 온 목적!

 

 테위는 이 곳에 올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지구에서 달을 바라보기만 할 때에도, 그 겁쟁이 토끼가 제 고향을 자랑해댈 때에도 그랬다. 하나도 부럽지가 않아. 지금 기분이 이래서 하는 말이 아니다. 한 일주일 전, 레이센에게 예비군 병력동원소집 통지서가 날아올 때만 해도 실컷 비웃지 않았던가.

 

 아무리 봐도 군인 체질은 아닌 레이센이었지만, 진짜 군인이긴 했나보다. 편지를 받은 녀석이 덜덜 떨리는 눈동자로 한 줄 한 줄 읽어나갈 때마다 실시간으로 변하는 낯빛을 보고 얼마나 웃었던지. 

 

 레이센은 '탈영병을 예비군에 소집하는 군대가 세상에 어디에 있냐'며 공주님께 매달렸지만, 공주님은 '필요하니까 부르는 것 아니겠니', 사부님도 '고향에 잘 다녀오렴, 안부 전해주고'. 자기 일이 아니라고 쉽게도 말했었고, 나도 같이 신나게 놀려댔었다. 젠장, 그 때 비웃을게 아니었다. 나도 똑같이 달에 오게 될 지 누가 알았겠냐고.

 

 스읍, 후우- 오르막길을 걷다 보니 조금 목이 탄다. 쯔으읍. 턱 밑의 최첨단-친환경-종이취수관을 빨아서 물을 한 모금 삼킨다. 당근 주스를 넣어달라고 할 걸. 시야의 왼쪽 끝자락에 걸린 초록색 불빛이 주황색으로 변했다. 여러 기능의 표시등 중 하나다. 달에 온지도 꽤 시간이 지난 모양이다. 절망하고 있던 시간을 빼면 네 시간 쯤 걸었을까.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정확하겐, 길을 잃을 수 없댄다. 달의 핵을 중심으로 달의 도시에 완벽히 점대칭인 극점에 착륙할테니, 어느 방향이든 방향을 틀지 않고 계속 나아가면 반드시 달의 도시에 도착한다고 했었다. 무슨 소린진 잘 모르겠지만, 사부님이 하신 말씀이니까 맞겠지. 사부님은 완벽하시니까. …그렇게 똑똑한데 애초에 달의 도시에 착륙할 생각을 못했단 점만 빼고.

 

 놀려먹을 바보가 하나 줄어서 아주 조금 심심해졌을 무렵, 사부님은 생각보다 너무 늦으니 누군가 가서 데려와야겠다고 하셨다. 공주님은 달은 껄끄러우니 귀찮다고 하셨고, 사부님은 바쁘다고 하셨지. 테위는 달에 가는 위험한 짓 따윈 할 생각이 없었다. 공주가 보상을 내걸기 전까지는.

 

 카구야 공주는 테위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무사히 레이센을 데려오면 자기가 가진 것들 중 무엇이든 하나 골라 가져가도 좋다고 했다. 불쥐의 옷, 제비의 자안패, 용수의 구슬…. 카구야 공주의 보물들 중엔 귀한 것이 참 많지. 공주가 던진 미끼를 확 물어챈 테위는 콜을 외쳤었다. 잠시 미쳤었던게 분명했다.

 

 이제는 머리 위에 선 푸른 반원을 바라보며 환상향을 떠올린다. 예전에 마을에서 아낙들에게 죽순을 팔 때, 2개를 사는 대신 1개를 사면 1개를 공짜로 주는 파격적인 행사를 했었다. 파격적인 행사이니만큼 가격은 2.5배로. 그 때 지나가던 초록색 무녀가 '그렇게 욕심을 부리다간 언젠가 제 욕심에 넘어갈 거에요'라고 했었는데 그 말이 맞았다. 이상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상하지만 신통한 사람이었구나.

 

 그 말대로 욕심의 대가를 치르는 가 보다. 달의 표면이 보이기 시작할 때 쯤, 멀쩡하던 달 착륙 로켓이 폭발했다. 통신기 너머 사부님의 '아 맞다 대기압이 다르-'를 종언삼아, 궤도는 화려하게 틀어져 로켓은 대회전을 시작했고, 창 밖으로 지표와 하늘이 무녀의 음양옥마냥 흑백을 그리며 회전하기 시작했을 때 긴급탈출 버튼을 눌렀다. 그리곤, 쿵, 피융, 펑. 분명 로켓에 식량과 당근도 있었는데. 배도 고파왔다.

 

 통신은 무슨, 돌아갈 로켓이 우주를 떠다니는 불붙은 고철더미가 되었다. 덕분에 달에 도착하자 마자 우주 노숙자가 되게 생겼다. 다시 열이 오르지만, 돌멩이를 차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돌아가면 어떤 걸 내놓으라 할 지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최대한 곤란한 것을 요구해야 성이 풀리지 않을까. 그러려면 일단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레이센을 찾아야 한다. 달의 도시에 가서, 레이센을 찾고, 돌아갈 길을 모색해야한다.

 

 그래, 달의 도시.

 

 이름모를 달의 산마루에 섰다. 발 아래 창백한 달의 도시가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

 

 

 

 

 잠들어 있다는 말이 아주 맞았다.  

 

 의외로 생경한 풍경은 아니었다. 저 멀리 첨예히 우뚝 솟은 초고층 건물들 말고는, 벽과 처마를 가진, 인간 마을의 큰 거리나 부잣집들과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은 양식의 건물들과 거리들이 펼쳐진다. 그럼에도 테위는 말단으로부터 전신을 달리는 섬짓한 무언가를 가라앉히려 부단히 노력했다.

 

 차가웠다. 냉금속 특유의 싸늘함이 도시 전체에 감돌고 있었다. 실제로 매끄러운 금속재질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우주복은 여전히 최고의 쾌적함을 제공하고 있다. 이 차가움은 방바닥의 냉기 따위가 아니란 소리다.

 

 거리를 나누며 구획을 그려내고 있는 벽들이 지나치게 정교했다. 바라보는 이의 마음마저도 깎아내는 듯 완벽한 평면, 그리고 직각. 생명체의 자연스러운 곡선, 그리고 생명체가 만들어낼 수 있는 서투른 직선 따위가 아니었다. 한 차원 위의 존재가 자로 대고 그었을까 싶은.

 

 분명 앞을 보고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바둑판을 무한히 늘여낸 듯한 직선들과 교차점들 사이를 계속, 계속 걸어가고 있는 자신을 보고 있는 듯. 하늘 위에서 스스로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의미심장한 꿈을 꿀 때의 기묘함과 같았다.

 

 …그 무엇보다도 소름돋는 것은, 그 냉기를 녹일 어떠한 온기도 없다는 사실이다. 넓디넓은 도시에 들어선 지도 꽤 되었는데 어떠한 움직임도 느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날카로운 직교들이 만들어낸 도시의 정적인 풍경에, 대기가 만드는 바람조차도 없으니, 그야말로 완벽한 정적속에 홀로 숨쉬고 있었다. 사람이 가득 있어야 할 한낮의 저잣거리에 사람만이 모두 사라진다면 이런 느낌이겠지.

 

 " 레이센, 어디에 있는거야……. "

 

 심장이 낮게 쿵, 쿵, 쿵. 차라리 달의 군대가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나친 적막함에 은근한 떨림이 기어다닌다. 배고픔은 잊혀지고, 목이 탔으며, 요의가 차올랐다. 빨리 이 곳을 뜨고 싶다. 가까워지는 날카롭게 높은 건물들에 조금씩 나아갔다. 분명히 저 곳이 달의 도시의 최심부일 것이다. 그 곳엔 레이센이 있겠지? 있어야지. 바보 멍청이 달토끼 같으니라구. 돌아가면 장난 500배야.

 

-

 

 " 후우, 후우. "

 

 벽에 기대어 숨을 몰아 쉬었다. 우주복의 표시등에 하나 둘씩 붉은빛이 차오르고 있었다. 너덜너덜해진 종이 빨대를 빨아대도 더 이상 물은 나오지 않았고, 이제는 숨 쉬기조차 불편해져 왔다. 방금 들어온 표시등은 산소 농도였나 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자신 있는 잔머리를 최대한 굴려, 가장 생존 확률이 높은 선택지를 골라야 했다. 

 

 최심부로 들어설수록 익숙함과는 거리가 먼 건물들이 거리를 채웠다. 사람이 사는 듯한 건물이 아닌, 맨들거리는 광장들과 하늘을 찔러대는 마천루들. 차갑고 매끈한 금속 벽들과 시리게 투명한 유리들로 된 온갖 기하학적 형상의 건물들.

 

 건물들을 모두 뒤져볼 수는 없는 마당이니, 입구 근처까지만 조사해서 중요해 보이는 건물을 정해 조사하기로 했다. 몇 건물들을 뒤진 끝에 한 곳을 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선택한 이 건물은 인간 마을의 스즈나안…보다도 홍마관의 대도서관 같은 곳이었다. 책이 가득 꽂힌 책장처럼, 신호등을 반짝이며 선으로 연결된 기기들로 가득한 선반들이 대열을 맞추어 방 안 가득 이어져 나갔다.

 

 선택에 확신을 얻은 증거는 1층의 천장에 매달린 표시판이었다. 층계를 향하는 화살표 아래 적힌 '정보 보관실'. 이 곳을 뒤져서 필요한 정보를 얻어갈 생각이었다. 레이센이 어디에 있는지, 아니 애초에 무슨 이유로 여기에 온 건지. 그리고 도시 전체가 왜 이렇게 고요한지. 무엇이라도 알아야 레이센을 추적할 수 있다. 숨 고르기를 마쳤으니, 자. 해보자.

 

 선반 사이를 누빈다. 무엇이라도 눈에 띄는 것은 훑어보며 다닌다. 방의 끝자락에 도달했을 때 쯤, 손길에 반응하는 물건을 찾았다. 금속으로 된 판 같은 것이었는데 손이 닿자 빛을 발하며 글자를 표시했다. 몇몇 까만 글씨들을 손가락으로 누르자 책처럼 펼쳐지며 글자가 나열된다.

 

 넘기고, 넘기고, 넘기다 느낌표가 뜬 글씨를 발견했다. (!)현 상황 관련 전파. 이거다. 흘러내린 땀을 닦고 싶었지만, 우주복이 전신을 감싸서 어쩔 수 없이 심호흡만 하고는, 손을 댔다.

 

 

 --요약하여, 현재 달의 도시에 미지의 침략자가 활보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파악된 침략자의 특성 상 시민들, 뿐만 아니라 달의 어떤 지성체이든 더 이상 그것과 마주쳐서는 안됩니다. 더 많은 '조우'는 그것의 위험도를 더욱 강화시키기에 더 큰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미 오염된 이들은 격리중에 있으며, 치유책을 찾고 있습니다. 또한, 달의 모든 지성체들은 더 큰 피해를 낳지 않기 위해 대피해야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대책위원회에서 현재 해결책을 논의중이며--

 

 

 …달의 도시에 무언가가 있다. 마주치는 것만으로 위험한 무언가가 돌아다니고 있다. 그래서 레이센이 소집된 건가? 그 침략자를 상대하기 위해서? …달에서도 상대하지 못했는데?

 

 잠깐. 당장 나도 위험한 것 아닌가? 아니, 그럼, 레이센은? 생각이 미친듯이 휘몰아친다. 배가 땡기듯 아파오며, 심장이 빠르게 뛰어, 가빠진 호흡에 유리막이 흐려졌다 맑아지기를 반복한다. 이럴 때가 아니다. 뒤돌아 서려는 순간-

 

 

 

 무엇인가

 

 어깨를

 

 툭.

 

 

 

 

 " 테위? "

 

 ……레이센이었다. 

 

 우주복 오른편의 표시등이 새로운 빛으로 반짝거렸다. 밝은 노란 빛이었다.

 

 

 

 

-

 

 

 

 

 " 멍청이 달토끼. 맨날 민폐만 끼쳐. "

 

 " 하하하… 미안, 미안해. "

 

 " 쓸모없는 느림보, 바보야. 빨리 돌아왔으면 내가 여기까지 올 일도 없었잖아. "

 

 " 미안해 정말. 나도 그것을 찾는 데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어. 이제야 겨우 마무리 지었다구. "

 

 부끄러움을 숨기려 끊임없이 투정섞인 비난을 쏟아내며 걸어간다. 미묘하게 가까운 거리에서. 

 

 모종의 이유로 입을 수 없게 된 우주복을 대신해, 테위는 레이센과 똑같은 제복으로 - 어떤 무녀가 교복이라며 좋아했던 - 갈아입은 상태였다. 달의 도시 안쪽에서는 달토끼, 월인들과 더불어 여러 생물들도 살고 있댄다. 굳이 우주복이 없어도 생명유지엔 문제가 없었다고. 혼자 오해했다는 사실이 민망함을 더 배가시켰다.

 

 " …그게 뭔데? 괴물 같은거야? "

 

 " 으음. 어렵네. 괴물은 아닌데. "

 

 달토끼가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땅토끼는 그 얼굴이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재촉하듯 팔을 툭 쳤다. 그래도 설명하기 어렵다는 듯 눈만 살짝 찡긋대는 레이센.

 

 " 말 안 하겠다면 됐어. 네가 멀쩡히 돌아왔으니 대단한 건 아니겠지. "

 

 " 아하하, 그래그래. "

 

 " 지금은 어디로 가는데? "

 

 " 나는 결과를 보고드리러 사구메님께. 그리고 너는…. "

 

 " 나는? "

 

 레이센이 걸음을 멈춘다. 한 박자 늦게 테위도 멈춰서서, 레이센을 바라본다.

 

 레이센이 씩 웃어보인다. 

 

 " 한 번 만나봐야지, 그거. "

 

 방금보다 더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표정에, 이번엔 배를 퍽 친다.

 

 

 

 두 토끼가 큰 문 앞에 섰다. 

 

 " …저기, 진짜 괜찮은 거지? "

 

 " 괜찮다니까. 네 입으로 대단한 거 아니라며? "

 

 " 레이센 주제에 건방진 말투야. "

 

 말과는 달리 불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

 

 " 에이, 진짜 괜찮아! 금방 만나고 와, 나는 돌아갈 준비를 해 둘테니. "

 

 한 쪽에서 등을 팡팡 두드린다. 한 쪽은 한숨을 푹 쉰다.

 

 " 다녀올게. 무슨 일 있으면 정말 가만 안 둘꺼야. 멍청아. "

 

 " 네에, 네에. 어서 들어가기나 하셔요. "

 

 테위가 문을 열고 들어선다. 천천히 열리는 문. 그리고 그 곳은,

 

 " 여긴… "

 

 영원정이었다.

 

-

 

 너무나도 익숙한 복도를 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긴 영원정이 맞았다. 셀 수 없이 봐온 그 복도와 그 방들이다.

 

 대체 어떻게 달의 도시 한복판에 영원정이 있단 말인가. 죽림 곁을 꾸며둔 소정원이 잘 보이도록 트여진 복도까지 똑같은 것을 보고 허, 헛숨을 들이켰다. 영원정 주위를 감싼 대나무 향만이 아니고, 햇빛과 푸른 하늘에 바람까지 느껴졌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연의 정취에 감동이 느껴질 지경이다. 긴장을 안 했다면 거짓말이지만, 이젠 긴장감은 무슨 허탈함마저 느껴진다.

 

 " 이게 뭐야 대체. "

 

 어찌되었든, 무언가를 '만나봐야' 뭐라도 알 수 있을 테지. 이젠 빨리 해치우고 떠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발놀림이 더 빨라진다.

 

 볼 수록 더더욱 똑같은 영원정의 모습에 감탄하며 나아간다. 여기는 공주님이 지내는 방 앞이다. 열어봤지만, 누군가 있지는 않고 분재만이 초연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카구야의 방이 분명한, 정리하지 않은 이부자리.

 

 더 걸어간다. 코 끝에 걸리는 바람내음에 무언가가 섞여있다. 달큰하고 진득한 약재 냄새다. 사부님의 약방 근처다. 드르륵, 미닫이 문을 열고 진료실에 들어선다. 익숙한 배치. 한 켠에 있는 침대, 책상 위 놓인 여러 종이들과 공책, 필기구 따위. 한 켠에 놓인 선반에 가득한 여러 약들. 안켠의 약방 또한 원래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인기척이 없을 뿐.

 

 바로 근처에 에이린의 조수인 레이센이 머무는 방이 있었다. 마찬가지다. 다른 점 없이 다만 휑할 뿐이었다.

 

 떠오르는 곳은 다 돌아다녔으나 소득이 없었다. 마지막 한 곳을 향한다.

 

 손님들이 머무를만한 빈 방들이 있다. 그리고, 그 방들이 이어진 복도 끝에 테위 본인의 방이 있었다.

 

 드르륵, 마찬가지로 모든 게 영원정과 똑같았다. 그 방에 테위가 있다는 사실까지. 테위가 무표정하게 방에 서 있었다.

 

 " 나, 나잖아…! "

 

 제복을 입고 있는 테위와, 원래 입던 옷을 입고 있는 테위.

 

 당황한 표정인 쪽이 아닌 쪽에게 다가간다.

 

 " 뭐, 뭐야. "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테위를 쳐다보는 테위.

 

 " 앗? "

 

 무표정하던 테위가 연녹색 땀을 흘린다. 땀을 따라 피부가 조금씩 흘러내리더니, 이내 진득한 액체 덩어리가 된다. '테위였던 것' 뿐만이 아니고, 영원정 전체가 조금씩 흘러내린다. 그리고는 테위였던 것에 모두 뭉쳐 꾸물거린다.

 

 갑자기 녹아내린 모든 것에 당황한다. 어느새 문 밖과 같은 금속재로 변한 방. 꾸물거리던 액체는, 형상을 빚어간다.

 

 " …당근 주스? "

 

 탁, 테위의 앞에 놓인 당근 주스 한 잔. 주황색 빛깔이 퍽 먹음직스럽다. 잔을 들어 살펴보지만, 어딜 살펴봐도 당근 주스.

 

 " 비슷하긴 하지만, 변하는 걸 보고도 먹겠냐고…. " 

 

 거부 당한 당근 주스는 이내 다시 연녹색 액체로 되돌아간다. 또 다시 꾸물거리며 형상을 빚어나간다. 황당함을 넘어 흥미롭다. 그리고 빚어진 형상은- 레이센이다.

 

 " 이번엔 레이센이구나. "

 

 볼을 쿡, 찔러본다. 귀를 쫑긋, 만져본다. 레이센과 똑같은 말랑함이다. …잠깐 한 500가지 정도의 나쁜 장난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지만, 손을 저어 걷어낸다.

 

 " 완성도는 나쁘지 않아. 하지만 나한텐 진짜가 있다구. 가짜는 필요없어. 우사. "

 

 그 말을 들은 레이센의 표정이 의기소침해진다. 다시 흘러내려, 연녹색 액체로 변한다.

 

 " 그냥 그대로 있어. 네가 그 침략자구나? 따라쟁이. "

 

 연녹색 액체는 꾸물거리며 다가와선, 테위의 발밑에 착 달라붙는다. 애교를 떠는 듯 살살 발가락을 간지럽힌다. 이런 녀석한테 당하다니, 달 녀석들도 바보들이구나. 레이센의 고향이 맞는 것 같아. 말랑거리는 녀석을 만지고 있자, 문 너머에서 레이센의 목소리가 들린다.

 

 

 

 

-

 

 

 

 

 " …그래서 내가 혼자 걸어다니게 된 거라구. 몇 시간이나 걸었는지 알아? 지루해 죽는 줄 알았어. "

 

 " 아하하, 뭔가 사부님다운 실수네. 완벽하신데 가끔씩 엉뚱하시잖아. "

 

 달이 휘영청, 구름께에 걸쳐서는 죽림을 비추고 있었다. 마루에 앉아 떠드는 달토끼와 땅토끼. 매번 투닥대는 둘이지만 오늘 밤만은 모험담을 꽃피우며 떠들고 있었다. 달에 별 거 없니, 땅이 더 별 거 없니 하며 잡담들을 떠들어댄다.

 

 마루 끝자락에서 무언가를 품에 안고 걸어오는 여인의 형상. 야고코로 에이린이다.

 

 " 조사를 마쳤어. 달에서도 당황할 만 했네. "

 

 " 앗, 사부님 오셨어요? "

 

 " 응. 너는 설명을 조금 들었겠지만, 테위가 궁금해 할테니 들려줄게. "

 

 레이센의 왼쪽에 앉아 말랑거리는 액체를 내려놓는다. 자연스럽게 무릎 위에 액체를 올리는 레이센, 레이센의 손길을 받으며 이나바 토끼로 변하는 액체.

 

 " 녀석은 화성에서 온 생명체인 모양이야. 마티안(Martian), 혹은 마션이라고 부를 수 있겠네. "

 

 " 그리고 이 친구들은 조우한 상대가 떠올리는, 혹은 필요로 하는 것으로 변하는 성질이 있죠. "

 

 한 마디 거드는 레이센.

 

 " 그래, 그래서 너를 봤을 때 영원정과 테위로 변한 거야. 우리 겁쟁이 제자는 괴물 생각에 무서워져서 집과 친구를 생각했던 거지. "

 

 " 아앗, 사부님 진짜! "

 

 새빨개진 얼굴로 허둥지둥하는 레이센, 지켜보며 후후 웃는 에이린. 가만히 고갤 끄덕이며 듣고 있던 테위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문을 표한다.

 

 " 잠깐, 그러면 달 녀석들은 대체 왜 레이센을 부른거야? 별 거 아니었잖아? "

 

 " 아, 그것도 중요한 얘기지. 레이센 네가 처음 만났을 때 이 말랑이는 어떤 모습이었어? "

 

 " 음. 어떤 모습…. 어떠한 모습이라고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인간의 형상인 듯도 하고, 짐승의 모습이기도 하고… 동시에 생물이 아닌 사물 같기도 했어요. 끊임없이 알아볼 수 없는 형태로 변하고 있었죠. 형태가 맞는지도 의문이에요. "

 

 " 그래. 월인들이 생각한, 필요로 했던 것의 모습이겠지. "

 

 " 끄응… 대체 그게 뭐야? 뭘 필요로 했길래? "

 

 이야기를 들을 수록 아리송해진 테위가 질문한다.

 

 " 월인들은 더러움을 싫어하지. 생에 대한 갈망, 추구… 그 모든 것을 포함해서. 살아가는 생명이면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혐오하는 그들이 바라고 필요했던 것은 영원하고, 절대적이며, 위대한… '완전한' 정신에 가까운 것이지. "

 

 " …마치 신처럼 들리는데? " 

 

 " 맞아. 사구메님이 말씀해주셨어. 완전성의 편린을 따라한 이 녀석이, 더 많은 월인들을 마주할 수록 더 완전성을 키워서- 일부분이지만 완전신의 반열에 올랐다고 했어. "

 

 " 다양한 개념에서 절대적인 그것은 월인들을 매혹시키는 무엇이 되었지. …정신적으로 오염시키는 일종의 위험한 종교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봐도 좋겠구나. " 

 

 " 아하, 그래서 달의 생명으로는 어쩔 수가 없었구나. 그래서 지상의 존재를 불렀던 거고. "

 

 " 응. 저번 순호의 습격때와 마찬가지로, 월인들은 꿈의 세계로 대피시키고 이 녀석을 약화시킬 방법으로 날 부른 거지. " 

 

 에이린이 작게 미소를 띄고 끄덕인다.

 

 " 테위 너도 마주했다고 했지? 넌 어떤 모습을 봤니? "

 

 " 음, 나? 내가 본 건 당근 주스랑… "

 

 -레이센. 말을 뱉기 직전에 흠칫, 말을 삼킨다. 레이센을 봤다고 죽어도 말 못한다.

 

 " …당근 주스. "

 

 " 뭐야, 당근 주스 엄청 좋아하는구나 너. "

 

 " 몰라, 멍청아. 우사. "

 

 하하하, 정겨운, 머쓱한 웃음이 번진다. 

 

 " 저기…. 이 쯤 되면 날 왜 불렀는지 알려줄 때가 되지 않았나? "

 

 """ ? """

 

 한 켠에서 모닥불을 피워 고구마를 굽고 있던 모코우가 말했다.

 

 " 너는 이제 공식적으로 내 소유니까 그냥 여기에 있으면 돼. 우사. "

 

 " 대체 뭔……. "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모코우가 죽림 너머의 한 켠을 바라본다. 후지야마 볼케이노보다 뜨거운 시선이 느껴진다. 하. 작게 웃고는 다 구워진 고구마를 챙겨 하나씩 나눠주고는 테위의 오른쪽에 앉는다.

 

 " 뭐, 어찌됐든 저 자식이 꼴받아 하는 것 같으니 나쁘지 않네. "

 

 봉래인과 봉래인, 그 사이 토끼, 토끼.

 

 달 아래 나란히 앉아서.

 

 


 

 

막차탔네 감평받으러옴 ㄳ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