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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회 글알못 팬픽대회

환상은 한낱 봄꿈 - 대공분실우산마술

 

"유령도, 수호신이나 악령도, 신도 이제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두 죽어버렸습니다. 이 세상은 전기와 증기, 그리고 숫자의 세계가 되어버렸습니다. 이건 정말 허무한 일입니다."

 

-코이즈미 야쿠모, 1893, 메이지 26년.

 

 

 

 

 

 

 

 

달이 밝은 날 벚은 흐드러이 피었다. 란이 매일같이 신경 쓴 덕이다. 달빛을 함뿍 머금은 꽃잎들은 은백색으로 반짝였다. 봄을 시샘하는 속삭임이 조금 쌀쌀맞게 귓전을 스쳤다. 이내 꽃잎들은 몸을 뒤집으며 유유히 헤엄치다 천천히 가라앉았다. 마당에는 때아닌 탄막놀이가 펼쳐졌다. 그 풍경이 툇마루에 전부 보였다.

 

마쓰오 바쇼가 말했던가, 보이는 것 모두 꽃, 생각하는 것 모두 달이라고. 실로 그러했다.

 

 

 

"이런 밤엔 조금 떠들썩한게 어울리는데 말이야."

 

 

 

 

야쿠모 유카리는 중중거리며 잔을 기울였다. 홍마관의 와인은 요새 어째션지 구하기 꽤 힘들었다. 바깥 세계에서 가져온 포도주는 홍마관의 것과는 사뭇 다른 맛이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옅은 혈향 대신 갖가지 견과류 향이 났다. 느긋히 색다른 취기를 음미하는 순간은 더없이 즐거웠고, 동시에 서글펐다.

 

"란."

 

"예, 유카리님."

 

이름을 부르면 그녀는 어느샌가 옆에 있었다. 주인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되, 언제든 응할 수 있게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역시 충실하고 유능한 식신이었다.

 

"연회가 열고 싶어."

 

"연회… 말입니까. 그러고 보니 저번 연회 이후로 시간이 꽤 지나긴 했군요."

 

"그래, 그러니까 마을에서 장을 보고 오렴."

 

란은 잠깐 하늘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시간이 늦었습니다. 가게들은 전부 문을 닫았을 테고, 마을 인간들도 거진 자고 있을 텐데요."

 

"하지만 난 지금 당장 연회를 열고 싶은걸."

 

"…………"

 

 

 

 

 

유카리는 란을 빤히 쳐다봤다. 부담스러운 시선을 받은 란은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매대에 돈을 두고 오면 되겠죠. 알겠습니다."

 

"그래, 잘 다녀오렴."

 

유카리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조금 억지스러운 명령이었건만 란은 잘 따라주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시간이 흘러 다시 봄이 오고 벚이 핀다면,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때도 식신은 어김없이 주인이 원하는 바를 행할 것이다. 하쿠레이 대결계가 생기기도 전부터 그래왔고, 앞으로도 숨을 다할 날까지.

 

유카리는 오늘따라 그 당연한 사실이 더없이 고마웠다. 그래서 그녀는 비단처럼 부드럽고 자애롭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언제나 고맙단다, 란."

 

"예, 유카리님."

 

란은 영혼 없이 대답하며 대문을 나섰다. 유카리는 살짝 더 슬퍼졌다.

 

 

 

 

 

환상향에서 연회의 최소조건은 두 가지다.

 

첫번째, 술과 음식.

두번째. 인요.

 

첫 번째는 란이 해결해 줄 테니 두 번째는 유카리 자신의 몫이다. 틈새를 열어둔 채 유카리는 턱을 괴고 어디로 향할지 고민했다. 그러던 도중 빈 와인잔이 눈에 들어왔다.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고, 유카리는 눈을 감았다 떴다. 틈새도 그러했다.

 

 

 

 

 

수면과 지면의 경계가 넘실댔다. 물이 푸르고 깊었다. 눈이 쌓였다가 녹아내린 지도 한참 지난 호숫가엔 겨우내 잠들어 있던 초목들이 앞다퉈 고개를 치켜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돌아보면 큰 저택이 우뚝 서 있었다. 포도가 영글기는커녕 아직 넝쿨에 꽃도 피지 않았건만 정원은 해 저문 여름 하늘처럼 보랏빛이었다. 문지기가 자러 갔는지 덩그러니 선 대문을 넘어 몇겹의 문을 더 지나쳤다.

 

연회의 첫번째 손님은 그곳에 있었다.

 

"어머, 여기엔 무슨 일로 온 걸까?"

 

"달이 아름다워서 말이야."

 

"그거, 무슨 의미?"

 

"말 그대로야. 이런 좋은 밤을 연회도 없이 그냥 보낸다는 게 슬프지 않아? 붉은 달의 흡혈귀 씨."

 

 

 

 

 

레밀리아 스칼렛은 찻잔을 지그시 내려놓았다. 지금 창틀에 걸려있는 것은 유리창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바다에 가까워 보였다. 파도에 산란된 월광은 식탁보처럼 테이블을 수놓았다. 확실히, 아름다운 밤이었다.

 

"뭐 그래, 아쉽긴 하네. 그래서 온 거야? 둘이서 마시자고?"

 

"아니, 한명 더 부를 예정이야. 이 밤에 깨어있을 만한 사람으로."

 

"좋아.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이미 준비는 끝난 모양이네."

 

"실은, 술이 조금 더 필요해. 너희가 가져온 술을 마지막으로 마셨던 게 언젠지 기억도 안나기도 하고."

 

레밀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 이쪽에 와인 셀러가 있어."

 

 

 

 

둘은 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지하실로 들어가는 나선형 계단은 비좁지만 꼿꼿한 품위가 있었다. 잘 닦인 타일은 반들반들하게 윤이 났다. 아마 흡혈귀의 시종이 남긴 자취이리라.

 

"생각해보니 왜 네가 직접 내려가는 거지? 평소대로라면 네 메이드를 시켰을 텐데."

 

"사쿠야가 화분증에 걸려서 도통 냄새를 구별하질 못하더라고. 저번엔 화이트 와인을 가져오랬더니 사과식초를 가져오질 않나. 그래서 당분간 술이나 홍차 관련 일은 시키지 않기로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혀가 얼얼하거든."

 

'그건 실수가 아닌 거 같은데'

 

유카리는 그 말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 대신 다른 화제를 떠올렸다. 그녀가 이곳에 오게 된 첫번째 이유.

 

"흐음, 요즘 와인을 영 구하기 힘든 이유가 그 때문일까. 양조와 숙성을 맡을 사람이 없어져 버려서?"

 

"반은 맞고 반은 틀려. 향은 맡지 못해도 시간은 가속할 수 있거든. 물론 잘 익었는지 판단은 내가 하지만 말야."

 

"그럼 어째서?"

 

"이렇게 된 김에 내가 여러가지 실험을 해보고 있어서 그래."

 

"실험?"

 

저기 마법의 숲에 사는 마법사면 모를까, 도서관의 짐짝 마법사나 요괴에게 뇌 따윈 필요 없다고 말하는 흡혈귀에게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었다.

 

"그래, 실험. 저기 호수에 사는 요정을 잡아와서 안개를 뿜게 한다던가, 파체한테 불 없이 열을 내는 마법을 걸게 한다거나. 실패하면 술 다 버리는 일이지."

 

"그건… 예상치 못한 이유네. 왜 그런 일을?"

 

 

 

 

어느새 계단이 끝나고 작달막한 나무 문 하나가 있었다. 레밀리아가 문고리를 돌리자 묘하게 야릇한 향취가 코에 강렬하게 파고들었다. 덜컥거리며 세월을 표현하는 문 너머에는 와인 배럴들이 벽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와인은 예민한 술이야. 숙성되는 환경은 포도즙 그 자체만큼이나 중요해."

 

그렇게 말하며 레밀리아는 천천히 걸어나갔다. 어쩐지 유카리에게는 그 모습이 평소보다 우아하고 고고해 보였다.

 

"습도, 온도, 진동, 외부 환경, 공기의 유입, 방 안에 배인 냄새, 벽과 바닥의 재질… 그 모든 것이 영향을 미쳐. 이것들 중 일부만 바뀌어도 그 전과는 다른 와인이 만들어지지."

 

"이 결계 안으로 들어오기 이전과 이후. 맛과 향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어. 물론 여전히 홍마관의 포도와 와인 셀러는 최고급이지만."

 

"그래서 실험을 한 거네. 예전의 와인이 그리워서."

 

"맞아. 내가 이곳에 오기 전 있던 곳. 메이링의 고향은 이곳보다 훨씬 습하고 따뜻한 곳이었거든. 그래서 그곳의 환경을 재현해 보려고 여러모로 노력하고 있는 거야."

"당신이 아니라 그 문지기의 고향?"

 

"상하이 조계지. 난 거기서 꽤 오래 살았어. 환상향에 들어오기 전까지 계속. 멋진 곳이었지."

 

 

 

 

레밀리아는 벽 쪽으로 다가섰다. 이리저리 살피다가 찾았다는 듯 어떤 캐스크를 어루만졌다.

 

"그럼 바깥 세계에서 가져오면 되는 것 아니니? 거기에서 만들어진 와인이 분명 있을 텐데."

 

"아니, 달라. 역시 넌 아무것도 모르고 있네."

 

 

 

 

레밀리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진열대에서 배럴을 가볍게 뽑아냈다. 그걸 옆에 있던 탁자에 올려놓고선 금속 관 같은 것을 꺼내들었다.

 

"내가 살던 시절과 지금의 그곳은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없어. 내 메이드가 항상 말하듯이, 시간과 공간은 서로 결부되어 있으니까."

 

"인간들의 전쟁. 난 그 끔찍한 광경을 다 봤어. 내 문지기도, 메이드도 거기에 휘말려서 크게 다칠 뻔 했다고. 그 전과 그 후는 환상향과 바깥 세계만큼이나 다른 세계야."

 

유카리는 그 시기를 잘 알고 있었다. 그땐 환상향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았다. 끝내 신의 태양은 인간의 태양에 꿰뚫려 떨어졌다. 일본에서 제일 위대했던 신위는 추잡하게 몰락하고 현인신에서 한낱 인간으로 추락했다. 백택조차 그 역사를 먹어치울 수 없었다.

 

 

 

 

언젠가 결계 바깥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1945년 이전의 와인에 세슘 따위는 들어있지 않았다. 지구상에 그런 물질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인류가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했을 때, 지금까지 자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던 물질이었던 세슘-137이 전 지구의 대기로 퍼져나갔다. 공기 중의 세슘-137은 식물의 들숨에 섞여들어가, 덩쿨을 타고 맺힌 열매와 그 과즙까지 전해졌다.

 

그래서 1945년 이후의 와인에는 전부 세슘이 극미량 포함되어 있다.

 

그 차이가 의미있는 것이던 아니던, 십자가에 매달린 성자의 피는 그 자식들의 오만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변했다. 되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따진다면 이 곳에서 만드는 와인도 그때와 같을 순 없는걸. 환상향이라도 시간이 흐르지 않는 건 아니라고. 알고 있니?"

 

인류가 결코 최초의 핵폭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듯, 세상의 모든 것 또한 마찬가지.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시간은 전진한다. 과거를 흉내낼 순 있어도 결코 복제할 순 없었다. 유카리, 아니, 환상향의 현자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도리어 빈정거렸다.

 

 

 

 

레밀리아는 대꾸하지 않고 금속 관을 배럴에 꽂아 구멍을 냈다. 능숙한 손길이었다. 끝에 투명한 호스를 꽂자 이내 붉은 빛이 차올랐다. 유카리는 틈새를 열었다.

 

"잔 여기 있어."

 

"주제에 센스는 있네."

 

건네받은 잔이 조르르 채워진다. 레밀리아는 그 광경을 응시하다가 잔을 집어 들었다.

 

레밀리아는 얼굴 붉힌 나그네 홀리듯 잔을 몇번 흔들었다. 잠시 후 입술과 테가 맞닿았다. 음미하듯 눈을 감고, 뜬다. 눈동자는 여전히 붉었다.

 

"네 말이 맞아. 아무리 애써봐야 그저 모조품일 뿐. 바깥 세계로 돌아가는 것도, 그 시절의 와인을 다시 마시는 것도 불가능해."

 

"하지만 최소한, 이곳은, 내가 사는 곳은…"

 

"홍마관은 그때와 같아. 그거면 충분해."

 

조금 낡긴 했지만. 그렇게 말하며 레밀리아는 쿡쿡 웃었다.

 

"그래서 너에게는 감사하고 있어. 어찌 됐던 부지를 제공해 준 셈이니까. 그 재수없는 태도만 어떻게 좀 고치면 좋을 텐데."

 

유카리는 입가에 부채를 가져다 댔다.

 

"천만에."

 

 

 

 

인간들에겐 더이상 그들을 존재케 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야쿠모 유카리는 모형 정원의 문을 걸어닫았다. 쉴새없이 몰아치는 역사의 급류를 막아줄 넓고博 아름다운麗 방벽을 세웠다. 아직 남아있는 환상들을 위해서. 누구처럼 시간을 멈출 수는 없어도 시대를 멈춰 세우는 것 정도는 가능했으니까.

 

유카리의 평소와 다른 표정을 보고 무언가 생각하던 레밀리아는 와인을 한잔 더 따라 마셨다.

 

"맛 괜찮네. 그래도 얼추 비슷한 느낌은 낼 수 있었던 것 같아. 이걸 가져가면 될 거 같은데, 당신도 맛볼래?"

 

"거절할게, 지금은 다음 손님을 부르러 가야 해서 말이야."

 

"그럼 이쪽은 하쿠레이 신사에서 기다리고 있을까."

 

 

 

 

 

 

 

하쿠레이, 하쿠레이.

 

명계와 현계의 경계가 잠시 흔들렸다. 야쿠모 유카리는 돌계단을 오르며 그 익숙한 이름을 혀 위에서 굴렸다. 사실 하쿠레이 대결계가 세워지고 환상향과 그 외부가 완전히 단절되기 전에도, 환상향과 바깥 세계를 가르는 결계는 있었다.

 

환상과 실체의 결계. 전국시대에 세워진 그 결계는 일본 열도를 넘어 전 세계에 걸쳐 있었다. 1차 월면전쟁은 돌이켜 보면 말도 안되는 공상이었지만 요괴확장계획은 달랐다. 바깥에서 인간들의 힘이 강해질 수록 환상향의 요괴들도 강해진다. 인간들의 수는 확실히 늘었지만 그들은 무지했다. 비상식이 되어버린 환상은 환상향에 흘러들었다. 하지만 나머지 환상들은 여전히 방대한 상식의 영역에 남아있었다. 인간들은 그들보다 강대했으나, 여전히 두려워했다.

 

유카리는 그 시절이 계속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인간들은 더이상 믿지 않으며 속지 않았다. 그 변화는 눈 깜짝할 새 온 세상을 뒤덮었다. 요괴의 소행과 신의 은덕이란 새빨간 거짓말은 드높은 이성과 과학의 기치 아래 하나 둘씩 흉측한 민낯을 드러냈다. 비는 신의 축복이 아니라 수증기의 응결이었고 지진은 신의 진노가 아니라 지각의 응력 분출이었다. 응당 타당한 추론이었고 또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배신이었다. 인간들의 배신. 애초에 신과 요괴와 유령들을 창조해 낸게 누구인가? 인간이었다. 그들이 멋대로 자연 현상과 세상의 순리를 넘겨짚고 신이 숨겼다느니 요괴가 잡아먹었다느니 제 마음가는대로 해석한 끝에 그 파편들은 원인으로써 실존하게 됐다. 그래놓고선 진실이니 계몽이니 하는 장황한 변명을 늘어놓고 용도폐기한 것이다.

 

실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유카리에게 그것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났다. 장수하는 요괴에겐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서구에서 가장 강대한 요괴중 하나였던 흡혈귀조차 영화 필름 속 광대로 전락했다. 스칼렛 가문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그저 부쿠슈레티와 런던보단 상하이가 환상향에 더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제 바깥에 환상은 멸절했다. 그 잔재들만이 이따금 보일 뿐.

 

레밀리아가 말했듯, 그때의 바깥 세계와, 지금의 바깥 세계는 같은 장소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사무쳤다. 유카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느새 계단이 끝났다. 유카리는 문지방을 넘어 정원에 발을 디뎠다.

 

백옥루는 그저 반석을 구름 삼아 쉬고 있는 천인처럼 그곳에 앉아 있었다. 요란스런 장식 없이도 고귀했다. 입을 열지 않고도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마치 제 주인처럼.

 

 

 

 

그 주인은 역시나 툇마루에 앉아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번째 손님이었다.

 

"왔구나, 유카리."

 

사이교우지 유유코는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마냥 대답했다.

 

"그래, 유유코."

 

사방에 벚잎이 날았다. 영원히 피어나선 안될 하나의 요목을 빼고 명계는 만개했다.

 

"오랜만에 연회를 열까 하는데, 오지 않을래?"

 

턱 하고 유유코 옆에 걸터앉은 유카리는 대뜸 본론부터 꺼냈다.

 

"연회? 정말 그것 때문에 온거야?"

 

유유코는 고개를 비뚜름하게 들었다. 진짜로 궁금해서 묻는다기보다는 어째서 그렇게 말하냐는 추궁에 가까웠다.

 

"그럼 이렇게 고즈넉한 밤에 연회가 없을 순 없잖아?"

 

"고즈넉하기보단 쓸쓸한 밤처럼 보이는데 말이야."

 

"그건 네가 반령 아가씨도 잠든 밤에 홀로 있었으니까."

 

"글쎄, 난 너를 보고 말한 건데."

 

 

 

 

유카리는 입을 다물었다. 예전부터 유유코는 마음을 꿰뚫어 보는 재주가 있었다. 사실 머리색 비슷한 사토리 요괴가 아닌지 의심한 적도 있을 정도로. 본인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살아있을 적부터 그랬다. 죽어서도 여전하다. 숨길 의미도 이유도 없었다.

 

"그래, 연회 때문에 온 것도 맞지만, 다른 용무도 있어."

 

"한번 들어 볼까나."

 

유카리는 허심탄회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이곳에 오기 전, 그 시절의 일이 떠올랐지 뭐니."

 

"어머나, 그 정도로 진지한 이야기일 줄은 몰랐는데."

 

"인간들은 모두 요괴를 두려워했었지. 너는 조금 예외였지만."

 

"그 영광이 그리운 거야?"

 

"그 시절이 그리운 거야."

 

"생자필멸에 성자필쇠라."

 

"알고 있단다, 그 정도는. 그래도 감정은 어쩔 수 없어."

 

"내 눈엔 지금의 너도 충분히 즐거워 보였는걸. 그때보다 지금이 불행하니?"

 

 

 

 

그건 아니었다. 근세기의 환상향은 지금까지의 여느때보다도 평화로우면서도 적당히 북적거렸다. 스펠카드 룰과 이변이 끝난 후의 연회가 그것을 보장했다. 낙원 안으로만 한정한다면 아직 아무것도 부서지지 않았다. 많은 것들이 아직 온전히 남아 있었다.

 

"그건 아니고."

 

"후훗, 그럼 문제 없는 거네, 뭐."

 

"……………"

 

유유코는 그렇게 말하며 휘영청 뜬 달을 거울처럼 바라보았다.

 

"있잖아, 유카리."

 

"내가 살아 있을 때에도, 이렇게 둘이 같이 꽃을 보곤 했었어?"

 

유카리는 추억의 한 모퉁이를 잘라냈다. 살짝 아팠지만 선명했다.

 

"……그랬었지, 그땐."

 

"그럼, 지금 바깥 세상의 벚나무는 그때랑 다른가?"

 

달랐다. 욕심 넘치는 인간들은 만족하지 못했다. 교접에 교접을 연이었다. 꽃망울의 수는 늘었고 그 색은 더 붉어졌다. 이제 바깥 세계의 벚꽃은 바람이 불면 벼에서 쌀알 털듯 분홍빛 을 온 사방에 펼쳐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벚나무였다. 형태가 바뀌고 색채가 바랜 그것은 같지 않되, 다르지도 않았다.

 

"아니. 그때보다도 더 아름다웠을까."

 

"그럼 바깥 세상에서도 때가 오면 여전히 꽃놀이를 하겠네. 나야 기억나지 않지만서도."

 

"너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의도를 잘 모르겠는데."

 

"그러면 최소한 그건 그리워 할 필요 없잖아?"

 

유카리는 그 말을 이해했다. 꽃놀이는 그립지 않았다. 유카리가 원한다면 그녀와 그 친구는 한창 꽃다울 나이의 소녀인 체 하며 밖에서의 일장춘몽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환상향에도 꽃은 남아 있었으니까. 그건 바깥 세계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바뀌지 않았다.

 

 

 

 

그건,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인간들은 이제 요괴를 두려워하며 신에게 공물을 바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꽃놀이를 즐겼고 달을 바라보며 술을 마셨다. 울고, 웃고, 기뻐하고, 화냈다. 삶을 향해 발버둥치고 죽음으로부터 도망쳤다.

 

모든 것이 바뀌었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애초에 돌아갈 필요도 없었다.

 

가장 근원적인 것이 바뀌지 않았다면, 그들은 남겨지고 버려졌되 사라지지는 않았다.

 

단지 시대가 흘렀을 뿐. 따라잡기는 힘들겠지만 시도는 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마워, 뭔가 좀 정리된 것 같네."

 

"그렇다면 다행이네. 말을 많이 했더니 슬슬 출출한데, 연회에 음식은 많이 준비했니?"

 

"물론, 그럼 조촐한 연회를 즐기러 가볼까."

 

 

 

 

하쿠레이 신사의 밤은 조용했다. 곤히 잠든 무녀는 새전함의 꿈을 꾸는지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요괴신사에 기꺼이 참배하러 올 인간은 오늘도 없을 싶성했다.

 

지금 당장 세 봐도 인요가 넷이나 있었으니 말이다.

 

흡혈귀, 망령, 그리고 틈새 요괴와 그 식신. 가진 공통점 하나 없어 보이는 그들은 술잔을 나누며 추억을 들이켰다.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이들은 어느샌가 달아오른 취기를 식히려 등을 땅에 대고 하늘을 바라봤다.

 

천문박명의 때 쯤엔, 깨어있는 이는 단 하나뿐.

 

 

 

그녀는 문득 신사 뒤편을 바라봤다. 환상향을 감싸고 있는 결계. 그녀의 작품이었다.

 

 

 

"가끔씩은 괜찮겠네, 결계 밖에서의 꽃놀이도."

 

 

 

 


십수년 만에 돌아온 고향에는, 그때 그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성냥갑 아파트와 아스팔트 도로만 가득 들어차 있는 법입니다.

 

유카리는 환상향의 그 누구보다도 바깥 세계에 많이 방문하고, 관심이 많아 보입니다. 스펠 카드의 이름, 황프 외전 격겜의 공격 방식들, 향림당에서 훔쳐온 게임보이... 그러나 과연 그것들이 유카리가 그리워 하던 것들일까요. 어쩌면 유카리는 열심히 애쓰고 있는 걸지도 모르죠. 신도, 유령도, 요괴도 남기지 않고 변해버린 고향을 좇기 위해서.

 

원래 영원정 파트가 있을 예정이었는데 시간관계상 잘라내 버렸습니다. 감정선도 미처 다듬지 못해서 글이 추레해졌네요. 그래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