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섭 결렬
“설명해봐, 레이무.”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듯 레이무는 당당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태도에 유카리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고 말을 이었다.
“인간 마을 말이야.”
“마을이 왜?”
질문을 바꿔보아도 돌아오는 대답은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무성의한 대답에 유카리는 버럭 화를 낼까 생각도 해봤지만, 하쿠레이의 무녀가 요즘 마을 돌아가는 꼴을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또 한 번 관용을 베푼다.
“최근 마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젊은 인간들은 퇴마사의 집을 찾아가 비술을 배우려고 하질 않나, 몇몇은 죽창에 농기구를 들고 마을 바깥을 어슬렁거리질 않나. 그러면서 ‘요괴를 몰아내자’라는 구호를 외치고 돌아다니고 있어.”
“아아, 그거라면 알고 있어.”
“알고 있어- 라니, 그걸로 끝이야?”
“그럼?”
“이변이라고, 레이무. 지금이야말로 하쿠레이의 무녀가 나서야 할 때잖아.”
“으음….”
레이무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고개를 두어 번 젓고는 유카리를 또렷이 쳐다보았다.
“그게 이변인가?”
“뭐?”
“들어봐, 유카리. 나는 누구지?”
“하쿠레이 레이무잖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레이무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유카리는 나지막이 몇 마디 말을 덧붙였다.
“낙원의 멋진 무녀, 환상향의 수호자.”
“그래. 새전 몇 닢으로 연명하면서 요괴들로부터 인간을 지키는 멋진 무녀님이란 말이지.”
이쯤 되니 유카리도 레이무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인간의 편이니, 인간이 무엇을 꾸미든 신경 쓸 바가 아니다?”
“그런 셈이야.”
구겨진 미간은 오늘 안에 펴질 낌새가 없다. 하지만 유카리는 그런 사소한 것에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레이무, 하쿠레이의 무녀는 단순히 인간의 무녀가 아니야. 인간 이전에 환상향의 명운을 짊어진 존재라고. 너도 알잖아? 인간이 요괴를 부정하는 순간 환상향은…”
“알아. 아는데, 이 일만은 내가 나설 수 없다는 거야. 아니면 내가 지금 당장 마을로 내려가서 낫이며 쟁기며 다 부러뜨리고 올까? ‘너희는 요괴의 밥으로 태어났으니 제 본분을 잊지 말고 얌전히 잡아먹혀라.’ 라고 덧붙여 주면서?”
“잘 생각해봐. 내가 직접 나서게 될 수도 있어.”
“그 때 너를 퇴치하는 게 하쿠레이의 무녀가 해야 할 일이지.”
레이무는 잘못된 것 따위는 아무것도 없다는 당당한 눈빛으로 유카리를 응시했다. 유카리는 한동안 손가락을 툭툭 두드리다가, 곧 스키마 너머로 모습을 감췄다.
※사랑하고 사랑하라
무라사 미나미츠는 눈을 가늘게 뜨고 광장의 무언가를 응시했다. 그리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두세 번 비적이고 제 옆에 자리한 소녀를 툭툭 건드렸다.
“야, 도교.”
“도교가 아니다! 아니 도교는 맞지만, 모노노베노 후토라는 제대로 된 이름이 있지 않은가!”
“알았으니까 저거 한 번 봐봐.”
무라사의 손끝이 광장을 향했다.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긴 후토는, 무라사가 그러했듯 눈을 가늘게 떴다.
“별일이 다 있구나.”
“별일이 다 있지.”
별일, 별일. 무엇이 별일인고 하니, 광장 한복판을 어슬렁거리는 낯익은 인간을 두고 하는 이야기였다.
“사랑하라!”
금발에 황안. 그 성격을 나타내듯 제 멋대로 곱슬어진 긴 머리의 소녀. 평범한 마법사 키리사메 마리사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무언가를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들어라! 우리는 무지로부터 태어나 서로를 증오하며 요괴에게 잡아먹힐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매일을 살고 있다. 그 나약함은 인간 본연의 것이며 당연한 것이니 나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허나 낯선 존재를 향한 두려움은 곧 혐오가 되고, 최후에는 분노의 형태로 타인을 향한다. 인간은 증오의 결정체다. 우리의 일생은 혐오와 분노로 점철되어 있으니 탁한 소용돌이 속을 맴돌던 그 혼은 죽어서도 구원받을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 부정의 굴레를 빠져나갈 방법을 알고 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네 가족을 사랑하고 네 연인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 그리고 그 끝에 다가서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 모든 인요가 서로를 보듬어준다면 세상에 분쟁 따위는 사라지고 인간은 비로소 진정한 강함을 얻는다! 인간이 인간을 초월하여 새로운 경지에 다다를 것이다! 인간이여 사랑하라!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그 우스꽝스러운 연설을 진지하게 듣는 이는 없었다. 관중들은 이야기꾼이 찾아왔나 발길을 멈춰 서다가도 그 내용을 듣고는 귀를 후볐다. 개중 몇몇은 그녀에게 돌을 던지거나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저 마법사 원래 저런 캐릭터였나?”
“으음, 요란한 인간이라곤 생각했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다르군.”
“요괴와 인간의 화합에 대해 말하는 걸 보면 왠지 히지리가 떠오르는데.”
“인간이 인간을 초월한다는 이야기는 태자님의 말씀과 비슷한 맥락이 있군.”
무라사는 저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언젠가 히지리가 들고 왔던 서양의 이교에 대한 가르침이 담긴 책. 히지리는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다를 지라도 배울 점은 있다며 그 내용을 명련사의 가족들에게 들려주었다. 저 어린 마법사도 그 경전을 읽고는 무언가를 깨달아 저런 말을 하고 다니는 걸까.
“어느 쪽이든 엉터리지만.”
그게 다른 종교의 교의든, 뱌쿠렌이나 태자의 말이 되었든, 누구 하나 설득하지 못하는 마리사의 모습은 그저 광대놀음에 지나지 않았다. 무라사는 재미나 좀 보겠다는 생각에 하염없이 마리사를 쳐다보았다.
시간이 어느정도 지나니, 하늘에서 홍백색 무녀복을 입은 레이무가 마리사의 앞에 내려앉았다. 그 얼굴에 섞인 짜증을 읽지는 못했는지 마리사는 해맑게 웃으며 레이무를 맞이했다.
“오오, 누군가 했더니 나의 친애하는 벗, 레이무 폰 하쿠레이 양 아니신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마리사?”
“보는 바와 같이 세상에 사랑을 전하고 있지!”
“장난 칠 기분 아니야. 뭐 하고 있냐고 묻고 있잖아.”
“음, 좋은 질문이군! 하지만 나는 장난을 치는 것도, 공연히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닐세! 내가 깨달은 진리만이 환상향을 구할 유일한 길임을 깨달은 거지!”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 내겠다- 뭐 그런 거야?”
“몇 번을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같다네. 나는 그 누구도 섬기지 않아! 다만 이 세상이 나아가야 할 길을 깨닫고, 그 길을 전파하기 위해 애쓸 뿐이야!”
“너 정말….”
거기서 말을 더 이어보려던 레이무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
마리사는 멀어져가는 레이무의 뒷모습을 서글프게 바라보다가, 다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설법을 시작했다.
“거기 지나가는 청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고 요괴를 사랑하라!”
“꺼져, 미친년아!”
“사랑하라!”
듣는 이 하나 없어도 제 할 일을 하겠다는 마리사의 태도에 무라사는 조소를 넘어서 연민의 감정을 느낄 지경이었다. 저 인간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 사랑을 부르짖는 걸까.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구나.”
후토 역시 혀를 차며 마리사에게 동정어린 시선을 보냈다.
“숲의 버섯을 잘못 먹은 모양이지. 그대도 조심하게나.”
툭툭. 후토가 넉살좋게 무라사의 등을 두드렸다. 무라사는 그런 그녀를 잠시 동안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뭐… 뭔가?”
후토는 당황한 듯 무라사의 등에 댄 손을 떼었지만, 무라사는 여전한 태도로 후토를 바라보았다. 다만 무라사의 시선은 후토의 걱정만큼 불길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정신을 묶어둔 것은, 언젠가 마리사가 말하는 대로 인간이 요괴를 사냥하는 날이 온다면 나와 이 꼬맹이는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시답잖은 상상이었다.
“으… 말해두겠는데 내가 사랑하는 건 태자님뿐일세!”
“킥.”
후토가 정조의 위협을 느낀 듯 제 몸을 감싸자 무라사는 코웃음을 쳤다. 뭐 이런 웃기지도 않은 상상을 했담.
“서로 사랑해야지.”
무라사는 후토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천천히 자리를 떴다.
※어느 날의 예탄정
오쿠노다 미요이가 자리 잡은 이 가게는 예탄정이라는 이름이 붙기 전부터 수많은 주인을 거쳤다. 누군가는 도구점으로, 누군가는 대장간으로, 가끔은 새로 개업을 하겠다고 건물 전체를 뜯어고친 적도 있었으나 미요이는 줄곧 이 곳에 터를 잡고 있었다. 삶의 목적 따위는 없다. 일생의 소원도 없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예탄정 만이 세상의 전부였고, 다만 내일도 웃는 얼굴로 손님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미요이는 자시키와라시로서 다양한 인간군상을 관찰했다. 대낮부터 찾아와 술을 마시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술잔에 혀끝만 대어도 얼굴이 붉어지는 인간이 있다. 사실은 주량도 세지 않은 주제에 남들과 어울리려고 억지로 술을 마시는 인간, 비실비실하게 들어와서는 나갈 때는 취객을 업고 나가는 인간도 있다. 그 수백 개의 얼굴은 때로 원숭이처럼 기뻐 날뛰고, 때로는 성난 호랑이처럼 독을 품는다. 모든 것이 익숙해진 미요이로서는 아무래도 좋을, 고마운 손님들. 하지만 가끔 그런 군중 사이에도 미요이의 관심을 끄는 존재가 숨어있다.
“어머, 오랜만이네요. 무라…”
“쉿, 쉿.”
“에헤, 죄송해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혹시나 제 이름이 들릴까 두려워하는 이 요괴는 무라사 미나미츠. 삿갓을 쓴 채 잔뜩 긴장하고 있는 걸로 보아, 오늘도 몰래 절을 빠져나와 예탄정을 찾은 모양이었다. 미요이는 익숙한 동작으로 무라사가 남겨둔 술병을 꺼내 들어 잔을 채웠다.
“요즘 들어 발걸음이 뜸했네요.”
“아아, 히지리가 눈에 불을 켜고 잡으러 다니거든. 덕분에 이치린이랑 쇼우도 볼이 홀쭉해졌어.”
한숨을 푹푹 쉬는 무라사를 보며 미요이는 소리죽여 웃었다. 쇼우 씨는 어제, 이치린 씨는 엊그제 예탄정을 들렀다는 사실을, 이 요괴는 알고 있을까.
“그간 별일은 없으셨고요?”
“뭐, 나야 늘 똑같지. …아.”
늘상 익숙한 대답을 들려주던 무라사는, 한동안 기억 속에 잠들어있던 흥미로운 안주거리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재밌는 일이 있었는데, 미요이 너 혹시 키리사메 마리사라고 알아?”
“마리사… 아아, 그 인간 마법사를 말하는 거죠?”
“응, 글쎄 얼마 전에 광장에서 노닥거리고 있었는데…”
“그 요괴 새끼들!”
술안주 대신 시작되려던 무라사의 이야기는 별안간 들려온 고함에 묻혀버렸다. 술독에 절은 그 불쾌한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는 건가 싶었던 두 요괴는 깜짝 놀라 건너편 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이것 봐. 그놈들이 안 되겠다 싶었는지 내 팔을 죽기 살기로 물어뜯더라니까!”
“그래서 형님은 어떻게 했소?”
“아 어쩌긴, 바로 쟁기로 머리통을 찍었지. 뭣도 아닌 게!”
“어따 남자답소. 형님 뒤에만 붙어 다니면 조만간 요괴 놈들 씨가 마르겠구먼요.”
뼈가 보이도록 뜯겨나간 팔을 무공훈장이라도 되는 듯 치켜드는 덩치 좋은 남성, 그 옆에 붙은 졸개들은 입술이 부르터지도록 그 업적을 칭송했다. 자신에게 한 말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음에도 불쾌함을 참지 못한 무라사는, 혀를 차며 삿갓을 눌러 썼다.
“…죄송해요. 예탄정에서 흉한 꼴을 보여 버렸네요.”
“뭐, 여긴 인간의 가게니까.”
무라사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술이 고팠다고는 해도 때가 안 좋았던 모양이다.
“최근 들어 저런 손님이 많아졌어요.”
“최근?”
“한 석 달 전쯤부터일까요. 마을 밖에서 요괴를 잡은 이야기를 하거나 예탄정을 요괴 퇴치 전의 결의 장소로 삼기도 하고….”
“너도 고생 많구나.”
“그래도 손님이니까요.”
손님이라면 그것이 살인귀라도 나찰이라도 개의치 않는다. 다만 그 불똥이 예탄정에 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이 사태를 두고, 얼마 전에 레이무 씨와 유카리 씨가 담화를 나눴다고 해요.”
“레이무… 아아, 그 깡패무녀.”
“인간 대표와 요괴 대표의 만남이라면 좋은 결과를 기대할 법도 한데, 둘 사이의 의견 차이는 좁혀지지 않고 분위기만 험악해졌다나 봐요.”
“저마다 입장이라는 게 있으니까.”
무라사는 잔을 비우며 며칠 전에 보았던 키리사메 마리사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녀는 독버섯을 먹고 날뛰는 광대가 아니라 두 세력 사이에 끼인 새우 한 마리가 아니었을까. …아무렴 어떠랴. 무라사는 불편한 기분을 털어 넘기고자 술잔을 들었다.
시간이 지나니 예탄정에 전세를 낸 듯 고래고래 떠들던 외팔이 덩치는 떠났다. 이어서 무라사도 자리를 일어서다가, 잠시 균형을 잡지 못해 비틀거렸다.
“괜찮으시겠어요?”
“아아, 괜찮아.”
괜찮지 않았다. 분명 이 상태로 명련사에 돌아가면 히지리에게 반쯤 죽을지도 모른다. 그 빌어먹을 외팔이 자식. 그 놈만 없었더라도 이렇게 끈덕지게 앉아있을 마음은 없었다는 듯, 무라사는 연신 술에 절은 콧김을 내뿜었다.
“잘 먹었어, 미요이 양.”
“매 번 감사합니…”
익숙한 손길로 동전을 받던 미요이는, 돌연 자신의 손을 꼭 쥐는 무라사를 보며 당황했다.
“무, 무라사 씨?!”
“미요이 양도 조심해.”
손을 단단히 잡고 자신을 응시하는 무라사를 보며, 미요이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이내 무라사가 예탄정을 완전히 떠난 후에야 그 공허한 시선이 예탄정의 입구를 향할 뿐이었다.
그로부터 몇 명의 손님을 더 맞이하니 예탄정의 밤은 끝이 났다. 혹은 예탄정의 밤이 시작되었다 해도 좋으리라. 점주가 문을 걸어 잠그고 떠났음을 확인한 미요이는 스리슬쩍 점주의 자리에 서서 작은 촛불에 불을 붙였다. 전등이 꺼진 암흑속의 예탄정은 요괴들의 것이다. 오늘은 누가 찾아올까. 술 좋아하는 오니인 스이카일까, 그것도 아니면 변신의 귀재인 마미조일까. 행복한 상상에 잠겨 있는 사이 문 두드리는 소리가 예탄정을 울렸다.
“거 미요이 양 있는가!”
“아, 마미조 씨.”
오늘밤의 손님은 마미조였다. 늘 예탄정에 도움을 주는 고마운 둔갑너구리. 허나 어딘가가 이상했다. 밤의 예탄정은 소수의 요괴들에게만 알려진 극비. 문을 살짝 두드리는 정도로 충분할 텐데, 문 밖에서 들린 마미조의 목소리는 어딘가 요란스러웠다.
“어서오세…”
“푸하아!”
마미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둘러 문을 닫았다.
“미요이 양, 나 좀 숨겨주시게!”
“갑자기 무슨…”
“이익!”
마미조는 황급히 예탄정 안쪽으로 달려 들어가, 나뭇잎을 얹고 공중제비를 돌았다. 이내 조그마한 지장보살상이 된 마미조는 미동도 하지 않고 조용히 숨을 죽였다.
“점주 양반 계시오!”
이어 성이 잔뜩 난 남성의 목소리가 들리고, 한 인간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남성은 죽창을 쥔 채 씩씩거리며 예탄정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저… 죄송하지만 오늘 영업은 끝났는데요.”
미요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남자를 부르자, 남자는 그제야 미요이의 존재를 확인한 듯 고개를 돌렸다.
“미요이 양, 혹시 이 근방에서 요괴너구리를 본 적 없어?”
“요괴… 너구리요?”
“아아, 인간 같은 모습을 하고는 큼직한 꼬리를 달고 다니는 녀석이야. 분명 이 근처로 도망쳤는데.”
“…잘 모르겠어요.”
우물거리며 목소리를 낮추는 미요이의 모습에,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예탄정 내부를 한 번 더 훑어보더니 짜증 섞인 욕지기를 뱉고 성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엔 없다! 저 쪽을 찾아!”
남자의 목청에 뒤따르듯 여러 사람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곧 바깥의 불빛도 함성도 잦아드니, 마미조가 둔갑을 풀고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거, 미안할 짓을 해버렸구먼.”
“뭐, 뭔가요, 저 사람들은?”
“자경대라고, 요즘 들어 마을 안에서 요괴를 잡으려고 혈안이 된 놈들이여. 밤이 깊었다고 둔갑을 풀고 다닌 게 화근이 됐구먼.”
마미조는 안일했던 자신을 책망하다가도, 두려움에 벌벌 떠는 미요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은감?”
“…네에.”
“미안허이.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을 텐께.”
“…”
지금 그녀에게 마미조의 위로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딱히 듣고 싶지도 않았다.
자시키와라시에게는 세상을 걱정할 지혜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예탄정은 그것이 손님이라면 살인귀라도 나찰이라도 개의치 않는다.
다만 그 불똥이 예탄정에 튀지 않기를, 내일도 웃는 얼굴로 손님을 맞이할 수 있기를, 오쿠노다 미요이는 바랄 뿐이었다.
※인간으로 변신하는 둔갑너구리
“나도 조심해야겠구먼.”
마미조는 멀어져가는 인간 마을을 바라보며 짧게 읊조렸다. 늦은 밤이라고는 해도 둔갑을 풀고 마을을 활보한 건 마미조의 실책이었다. 거기에 시국이 시국이지 않은가. 하쿠레이의 무녀와 틈새요괴가 돌아섰다는 말을 들었으면서 그렇게 안일하게 행동해서는 안 됐다. 당분간 야밤중에 예탄정을 찾는 일은 자중하는 게 좋으리라.
“마을에는 코스즈 양도 있고 이래저래 재밌는 게 많은데 말이지.”
늘 둔갑하던 모습으로 거리를 돌아다녀야 하나, 어쩌면 마을의 자경대라는 것들이 마미조의 둔갑을 간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완전히 새로운 둔갑술을 익히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마을에 들어가지 않을 순 없지 않은가.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마미조는,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우뚝 멈춰 섰다.
“…”
아담한 체구에 검은 옷. 샛노란 단발에 깜찍한 리본을 묶은 소녀. 뒷모습만으로도 어둠의 요괴 루미아 임을 어림할 수 있었다. 오독오독. 무언가를 씹는 소리가 마미조의 귀를 스쳤다. 들짐승을 잡아서 식사중인 걸까.
“아가, 뭘 그렇게 맛있게 먹고 있나?”
“아.”
그 목소리에 루미아가 고개를 돌렸고, 마미조는 그 자리에 뻣뻣이 굳었다. 피칠갑이 된 소녀의 얼굴 너머에 있는 것은 한 쌍의 다리와 한 쌍의 팔. 6척쯤 되어 보이는 장신에 이미 명을 다한 듯 허공을 응시하는 얼굴. 마미조가 잘 알고 있는 동물의 시체였다. 아니, 감히 동물이라 부를 수 없었다.
“꼬리. 너구리 귀.”
루미아는 마미조의 꼬리에 한 번, 귀에 한 번씩 손가락질을 하더니, 이내 밝게 웃으며 손에 쥔 살점을 뜯었다.
“요괴 너구리!”
“그랴, 그랴. 제대로 봤구마.”
마미조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야 인간의 시체를 봤으니 조금 놀랐지만, 요괴가 인간을 잡아먹는다는 게 잘못된 일은 아니다. 여유를 되찾은 마미조는 루미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째, 맛은 있고?”
“응, 뇌가 말캉말캉해.”
루미아의 말을 따라 시체를 흘겨본 마미조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꾸덕꾸덕한 뇌수가 바닥에 엉겨 붙어 차마 못 볼꼴이었다.
“요즘 이런 인간이 많아서 행복해.”
“이런 인간이라 허믄?”
“마을 밖을 어슬렁거리다가 갑자기 루미아한테 달려드는 인간들.”
“아항.”
마미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자신을 쫓던 놈들과 비슷한 부류의 인간이었던 모양이다. 마을 주변에서 잡요괴를 몇 마리 잡더니 자신감이 붙어 이 깊은 산속까지 들어왔을 터. 인과응보이니 별 수 없는 일이지만, 죽은 시체를 보니 마미조도 마음이 착잡해졌다. 어쩌면 이 인간의 죽음으로 인간 마을이 더 예민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미조도 마냥 웃을 수는 없었다.
“최근엔 인간 마을도 꽤나 어수선한 모양이여.”
“응.”
“뭐, 먹지 말라고는 안하겠다마는, 모쪼록 즉당히….”
위화감.
무언가 잘못 되었다 느낀 그 순간, 마미조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니여. 신경 쓰지 말그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루미아를 뒤로한 채 마미조는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이내 루미아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마미조는 아예 작정하고 달려 그 자리를 도망쳤다. 한참동안 달려 숨이 턱 막힐 즈음, 마미조는 나무 그루터기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제 입을 막고 벌벌 떨었다.
“…즉당히 먹으라꼬?”
그게 할 말인가?
요괴가 요괴에게?
인간에게 미움 받을까 봐?
후타츠이와 마미조는 대체 뭐란 말인가?
그 대답을 들려줄 수 있는 이는 없다. 일찍이 느끼지 못했던 공포에 마미조는 흐느껴 울었고, 그날 밤 악몽을 꿨다.
※생존과 사는 것의 차이
루미아는 눈앞의 시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시체라고 해야 할까. 살갗도 눈알도 없이 눈구멍만 남은 그 공허한 두개골은, 목이 뜯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한 태도로 루미아에게 덤벼들었다. 뭘 잘못 먹었는지, 아니면 그 허접한 날붙이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건지, 식사를 눈앞에 둔 루미아로서는 기쁘면서도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최근 들어 이런 일이 꽤 잦았다. 겁도 없이 자신에게 덤벼드는 인간들.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용맹한 행위. 최후의 발악으로 덤벼드는 인간은 많았지만, 그들의 눈동자에 비치는 감정은 루미아가 익히 알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들을 지배하는 것은 눈앞의 요괴를 향한 두려움 따위가 아니었다. 공포를 초월해 타인에 대한 증오를 원동력으로 의지를 발하는 감정. 그것은 분노에 가까웠다. 인간들은 어째서 분노한 것일까. 무엇이 그들을 사지로 내몰았는가. 아직 어린 루미아로서는 그것을 알 수 없었다. 그보다는 내일 일을 생각하며 근심에 잠길 뿐이었다.
명련사의 여승은 어린 요괴들을 모아두고 인요의 화합을 이야기했다. 사탕 몇 줌에 혹해 설법을 듣는 루미아의 입장에서 그런 생각은 어찌되든 좋았지만, 설법 중 시체 냄새를 풍겨서는 곤란했다. 여승은 촉이 좋다. 하룻밤을 꼬박 새어 냄새를 뺀다 한들 그 여승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리라. 그런 루미아의 생각은 다음날 정확히 들어맞았다.
“루미아, 또 인간을 먹었군요?”
“으.”
루미아는 손가락을 배배 꼬며 시선을 회피했다. 그런 루미아의 마음을 읽었는지 여승은 기어이 루미아에게 다가가 억지로 눈높이를 맞춘다.
“제가 말하지 않았나요. 무의미한 살인은 업이 될 뿐입니다.”
“하지만.”
“맛있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약속했잖아요?”
“…”
약속이라. 사탕에 꾀어 얼떨결에 손도장을 찍은 것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저기, 스님.”
“말씀하세요.”
“왜 인간을 먹으면 안 된다는 거야? 나는 요괸데.”
단순하지만 꽤나 근원적인, 입장에 따라서는 그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할 수도 있는 질문. 그 물음에 곤란할 법도 한데, 일생을 이 일에 바쳤던 여승은 어렵지 않게 말을 이었다.
“시대가 변했기 때문이에요.”
“시대?”
“요괴가 인간을 사냥하는 시대는 이미 끝났어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하지만 요괴는 인간을 잡아먹지 않고는 살 수 없잖아?”
“음… 꼭 그렇지는 않아요. 요괴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두려움’의 산물 같은 존재니까요. 요컨대 직접 인간을 잡아먹지 않더라도 그 두려움만 취할 수 있다면 족하는 거죠.”
두려움. 그래, 두려움이다. 여태껏 루미아를 마주한 모든 존재가 눈동자 속에 담고 있던, 그러나 이제는 보이지 않았던 그것.
“여차하면 루미아도 코가사 양처럼 마을 사람들을 놀래키는 건 어떨까요?”
“…”
그런 가벼운 농담으로는 납득할 수 없다. 여승의 말은 어딘가 이상했다. 아니 틀렸다. 그 모순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지만, 어린 루미아로서는 자신의 생각을 다듬고 입 밖으로 낼 능력이 없었다.
“살기 위해 공포를 주는 게 아니라 공포를 주기 위해 사는 거잖아.”
답답했던 루미아의 머릿속을 맑게 개어주는 목소리. 하지만 그건 루미아 본인의 말도, 눈앞의 여승이 내뱉은 말도 아니었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그 불길한 목소리는, 누구도 닿지 않을 보랏빛 차원을 넘어 명련사의 마당에 닿았다.
“유카리 씨?”
“오늘도 고생이 많네.”
야쿠모 유카리는 우아한 걸음으로 두 인요에게 다가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여긴 어쩐 일이시죠?”
“별건 아니고, 꽤나 재밌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구나 싶어서.”
상냥한 가면 너머에 비추는 그 불온함을 느낀 히지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히지리는 유카리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근래에 퍼지기 시작한 소문에 의하면, 유카리는 인간이 요괴를 퇴치하는 만큼 요괴에게 인간을 사냥하도록 독려했다. 바깥 세계에서 터전을 잃은 요괴들을 한데 끌어 모았다. 그리고 그 끝에 뜻을 함께하는 요괴들을 모아 인간 마을을 정벌할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어디서부터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거짓인지는 알 턱이 없었으나, 그녀에 관한 소문이 하나같이 인간에게 부정적인 이야기뿐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당신은 요괴와 인간이 화합할 수 있다고 믿는 거지?”
“유카리 씨의 입장에서는 허황된 이야기처럼 들리겠죠. 하지만 저는 제 길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인간과 요괴의 화합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는 그저 섣부른 단정일 뿐이에요.”
“아아, 그래, 그래.”
유카리는 질색을 하며 입을 내밀었다.
“루미아 양은 대견하네. 난 어려운 말 같은 건 한 귀로 흘려보내는 성격이거든.”
유카리는 루미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 지 이해하지 못한 루미아는 유카리의 손길을 따라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렇지. 그럼 대견한 루미아 양을 위해서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줄까?”
“재밌는 얘기?”
“응, 재밌는 얘기.”
유카리는 서글픈 표정을 짓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샤도쿠로.”
그 이름을 꺼내는 건 얼마만일까.
※사막의 이름 없는 해골
야쿠모 유카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한때 돗토리 사구에 터를 잡았던 거대한 해골의 존재를. 자신을 가샤도쿠로라 칭하던 그 해골은 그 모습을 감히 한 눈에 담을 수 없었고, 일대의 사구는 자신의 본래 육체가 썩고 남은 먼지덩어리라고 주장하던 거물 중의 거물이었다.
-꺼져라, 야쿠모 유카리.
해골은 야쿠모 유카리를 증오했다. 아니, 그건 증오라기보다는 비웃음에 가까웠다.
-요괴의 낙원, 요괴의 낙원이라. 도망쳐 도착한 곳에 어디 낙원이 있단 말이냐.
-당신은 아직 이해하지 못할 거야.
-지레 겁먹고 도망치는 것을 이해라고 부르는 요괴는 이 세상에 없다. 아니면 뭐냐. 아직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공포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은 게냐? 인간의 공포로부터 태어난 우리가?
-인간은 당신 생각보다 강해. 나는 알고 있어.
-그것은 네가 약하다는 반증이다. 저 발끝의 때만도 못한 인간들이 그렇게 두려운가? 그렇다면 강해져라. 인간의 공포를 먹고 성장해라. 인간이 요괴를 두려워하는 한 요괴의 시대는 끝나지 않는다.
야쿠모 유카리는 가샤도쿠로의 이해를 구할 수 없었다. 그 후로도 몇 번이고 그 요괴를 찾아갔지만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지금이야 우스꽝스러운 일화일 뿐이지만, 헤이안 시대엔 가샤도쿠로 같은 요괴가 꽤 많았다. 누에는 헤이안쿄를, 슈텐도지는 오에산을 제 집 삼아 날뛰었다. 요괴라는 두 글자가 식은땀을 자아내던 시대에 그들이 두려워하던 것은 없었다. 분명 그랬을 터였다.
하지만 누에는, 슈텐도지는, 가샤도쿠로는 알지 못했다. 인간의 두려움에서 태어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수백 년이 지나 전국시대에 이르러, 야쿠모 유카리는 다시 돗토리번을 찾았다.
-이름을…
야쿠모 유카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둥그렇게 떴지만, 곧 모든 것을 이해했다.
-젊은 처자… 이름을 불러주시오. 나는… 내가… 내 이름이 기억나질 않소.
눈앞의 해골은 바닥을 질질 끌며 야쿠모 유카리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그 부서진 코뼈를 특정하지 못했더라면 유카리조차 그 해골을 알아보지 못할 뻔 했다.
-당신은 가샤도쿠로.
-오, 오오….
-그리고 나는 야쿠모 유카리야.
-야쿠모… 유카리.
제 이름을 되찾고 희미한 기억을 떠올린 가샤도쿠로는, 그 앙상한 손뼈로 사구의 모래를 잡고 부르르 떨었다. 모래는 그런 가샤도쿠로의 손길을 거부하듯 뼈마디 사이로 흘러내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인간이… 나를 잊었다.
인간이 가샤도쿠로를 잊었다. 혹은, ‘가샤도쿠로가 인간에게 잊음 당했다.’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거대한 해골 요괴에게 골머리를 썩던 돗토리번의 영주는 영지의 현자들을 모아 불러 비책을 떠올렸다. 요괴가 인간의 두려움에서 태어난다면 인간이 요괴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영주는 그 날을 기점으로 가샤도쿠로에 관한 서적과 자료를 모조리 불태웠다. 그 존재를 언급하는 이들을 참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공포정치를 펼쳤다. 증오의 대상을 가샤도쿠로에서 이웃 나라로 옮겨 전국시대의 전쟁에 몸을 담았다. 인간이 인간을 두려워하기를 수백 년, 가샤도쿠로는 자신의 원동력이었던 인간의 공포를 부정당했다. 대를 거듭하여 영주의 자리를 이은 이조차 그 존재를 잊게 되니, 마침내 일본 최대의 악귀는 자신을 잊었다.
-유카리… 야쿠모 유카리.
-듣고 있어.
-네가 옳았다. 인간을… 요괴는 인간을 이길 수 없다.
모래 알갱이가 흩날린 손끝을 기점으로 가샤도쿠로의 몸이 점차 부서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샤도쿠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말을 이었다.
-인간은 뭐든 될 수 있다. 그 나약한 고깃덩이에 어느 요괴보다도 강력한 악의를 담을 수 있다. 헤이안쿄의 누에는 요리마사의 활을 맞아 죽었다. 오에산의 슈텐도지는 술에 취해 목을 베였다. 세상 어느 요괴가 사자의 원념을 화살에 담고, 제 동족을 창녀로 내세워 슈텐도지를 홀릴 수 있다는 말이냐? 나는… 나는 두렵다. 그들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독을 삼킨다. 제 힘에 취해 날뛰는 요괴 따위가 어찌 인간을 이길 수 있겠느냐. 우리는 죽기 위해 태어났다. 인간이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발판에 지나지 않았단 말이다! 듣고 있느냐, 야쿠모 유카리! 나는… 내 이름은….
이윽고 쉴 틈 없이 움직이던 턱뼈마저 가루가 되니, 더 이상 돗토리 사구에 가샤도쿠로라는 요괴의 흔적은 없었다.
다만 그는 먼 훗날 그 이름을 되찾아 요괴대백과라는 우습지도 않은 책속을 노닐 뿐이었다.
“자, 이 이야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가샤도쿠로는 왜 돗토리번을 치지 않은 거야?”
의문에 돌아온 것은 정답이 아닌 또 다른 의문. 야쿠모 유카리는 루미아의 머리를 너그러이 쓰다듬고 말을 이었다.
“가샤도쿠로는 돗토리번을 공포에 떨게 한 요괴였지만, 반대로 돗토리번의 인간들이 없다면 가샤도쿠로는 존재할 수 없는 거야. 두려워해줄 인간이 없다면 죽고, 인간이 자신을 잊어도 죽는다는 가련한 운명을, 그 해골은 몰랐던 거지.”
그건 모든 요괴들이 태어나며 부여받은 숙명. 인간의 두려움에서 태어나 인간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어처구니없는 모순. 헤이안 시대에 그 미래를 예측한 것은 야쿠모 유카리 뿐이었다.
“인간이 세상의 구조를 파악할수록 요괴는 설 자리를 잃게 돼. 그건 요괴가 탄생한 순간 정해진 자연의 이치야. 하지만 멸종하지 않을 수는 있지. 나는 수천 번의 시행착오 끝에 답을 찾았어. 요괴의 종 보존을 위해서는 한정된 공간에 필요한 만큼의 인간을 보존해두고 끊임없이 공포를 심어주면 돼.”
그 결과물이 바로 이곳, 환상향이다. 누군가는 도망쳐 도착한 낙원이라 비웃던 곳. 이제 와서는 아무도 비웃을 수 없는 잊혀진 것들의 고향.
“극단적인 이야기네요. 유카리 씨는 요괴와 인간을 결코 화합할 수 없는 관계로 여기고 있어요.”
“여기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런 거야.”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분명 길은 있습니다. 츠쿠모가미인 코가사 양은…”
“코가사가 정말 인간을 놀래키는 것만으로 연명하고 있다고 생각해?”
“예…?”
“놀래키기. 아하하, 놀래키기라.”
유카리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기 위해 입을 가렸다. 그리곤 올바른 길을 제시해주겠다는 듯 히지리의 턱에 부채를 댔다.
“해악을 끼치지 않고 어떻게 공포를 얻을 수 있다는 걸까?”
※삶의 이유
히지리 뱌쿠렌은 알고 있었다. 소망은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소망이라는 것을. 요괴는 인간을 해하기 때문에 요괴였고 인간은 요괴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인간이었다. 그 지고지순한 인요의 기원을 부정하는 것이 바로 ‘화합’이라는 단어. 천 년 전의 히지리는 그 사실을 깨닫고 절망했다. 제 안의 모순을 부정하고자 수백, 수천 번 고뇌했다.
그 결과가 이 모양이다. 요괴의 현자가 내놓은 간단한 질문에 일언반구도 하지 못하는 작태라니. 무언가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논리와 신념을 확고하게 쌓아야 한다. 하지만 인간과 요괴의 화합은 구름위에 쌓는 성과도 같아, 그 끝이 아름다울지언정 결코 닿을 수 없는 이상이었다. 어쩌면 이 인생은 한평생 종점 없는 선로를 위를 달리는 무의미한 걸음이 아니었을까.
“언니.”
“아… 이치린.”
히지리가 고개를 드니 젊은 승려가 걱정스러운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자신을 언니라 불러주는 그 요괴는 쿠모이 이치린. 숨긴다고 숨겼는데, 그녀 앞에서는 소용없는 모양이었다.
“객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렇죠. 슬슬 움직이지 않으면.”
“괜찮으신가요? 온종일 기운이 없어 보여서…”
“잠을 조금 덜 잤거든요.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순간 히지리는 이치린에게 이 고민을 털어놓을까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이것은 히지리 뱌쿠렌이라는 인간이 한평생 쌓아온 업이다. 인요의 화합. 그것이 그릇된 소망임을 알았음에도 함께 걸어온 명련사의 가족들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고민을 들어주는 이가 상담을 받아서야 쓰겠는가. 히지리 뱌쿠렌은 걸음을 옮겼다.
명련사는 가르침의 일환으로 고민상담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장지문 너머 익명을 희망하는 사람들의 고민을 신도와 일반인을 가리지 않고 상담 받았다. 그것이 이교의 고해성사와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음은 알고 있었으나, 히지리는 개의치 않았다. 서로 추구하는 바는 다를 지라도 배울 점이 있다면 유연하게 받아들인다. 그것은 일생을 화합이라는 단어에 바친 그녀의 존재증명이었으며, 그녀가 안은 거대한 모순의 편린이기도 했다.
옆집 농부가 내 밭을 망쳤다. 최근 들어 쇳값이 올라 죽을 지경이다. 아무래도 좋을 시답잖은 이야기임에도 히지리는 최선을 다해 사람들의 고민을 들었다. 이런 작은 고민 하나하나로 세상은 이루어진다. 인내하고, 귀 기울이며, 성실하게 답해준다면, 그보다 좋은 수행은 없다.
“오늘은 이 정도일까요.”
쿠모이 이치린은 굽어진 다리를 펴고 어깨를 어루만졌다. 몇 시간이고 지루한 고민을 듣는 것은 대답해주는 히지리 뿐 아니라 그 곁을 지키는 이치린에게도 고역이었다.
“매일같이 느끼는 거지만, 인간의 삶이라는 것도 별 거 없네요. 밭이 어떻고 쟁기가 어떻고.”
“그런 작은 고민이 모이고 모여 인간이 되는 거겠죠.”
애써 포장하고는 있었지만, 히지리 또한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고민은 사소할지언정 분명한 목적성을 띄고 있었다. 장지문 너머 어느 누구도 스스로의 삶을 의심하지 않았다. 정녕 나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망상에 인생을 허비한 것일까. 내 삶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걸까.
“상담을 하고 싶은데.”
그런 자책을 깨부수겠다는 듯,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문 너머에서 여린 소녀의 윤곽이 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음, 너무 늦었나?”
“앉으시지요. 명련사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답니다.”
그 말을 들은 소녀의 윤곽은 툇마루에 앉아 한참동안 말을 골랐다. 그 모습은 당당한 듯 어딘가 안절부절 하여, 문 너머로도 그 망설임을 느낄 수 있었다.
“살다 살다 명련사에 고민상담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 아, 너희를 못 믿는다는 게 아니야.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괜찮습니다. 평소 명련사를 꺼려왔던 분이라면 이 또한 귀한 인연이 될 수 있겠죠.”
“…그래.”
히지리의 나긋한 목소리에 위안을 얻은 걸까. 소녀의 윤곽은 한결 편안해진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심호흡을 마친 소녀가 입을 열었다.
“스님, 스님도 알고 있지? 그, 요즘 들어 환상향이 조금 어수선하잖아.”
“네, 마치 헤이안 시대를 보는 것 같죠.”
“다들 무언가 증오할 대상을 찾듯이, 눈에 불을 켜고 다닌단 말이야.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내 나름대로 해결을 해보려고 했는데… 제대로 해결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소녀는 우물우물 말을 망설이다가, 잠시 후 허공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 있지, 내가 과연 올바른 행동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나는 세상을 제대로 보고 있는 걸까? 그냥 되는대로 살아왔기에 이제 와서 그 벌을 받는 건 아닐까? 어쩌면 레이무가 옳았을지도. 어쩌면 유카리가 옳았을지도. 나는 어른스러운 답을 내놓지 못한 채, 그저 광대처럼 춤추고 있던 건 아닐까.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어. 내 자신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어.”
“…”
이 소녀는.
“…당신은 자신이 오래도록 찾아온 답을 구하지 못해 번민하고 계신 거로군요.”
“응.”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맞아.”
분명 그런 것이다.
“언니…?”
이치린은 들릴 듯 말 듯 가느다란 목소리로 히지리를 불렀다. 눈앞의 현상을 이해하지 못해 당황했으리라. 하지만 히지리는 개의치 않았다. 개의치 않고 울었다. 그것은 슬픔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이 아니었다.
그녀는 틀리지 않았다.
응당 세상의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이 소녀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오늘 당신을 만나 다행이에요. 당신은 그저 불안을 떨치고자 저를 찾아왔지만, 저는 당신을 만나 비로소 구원받았답니다.”
히지리는 눈물을 닦고 가볍게 웃었다.
“고민할 것은 없습니다. 인간이 되었든 요괴가 되었든, 살아있는 모든 것은 제 앞길을 알지 못합니다. 때로는 저조차 제 길을 의심한답니다. 그것은 당신이 무지하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에 정해진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키리사메 마리사. 당신이 무엇을 떠올렸든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다면 그 길을 나아가세요. 할 수 있는 만큼의 선을 베푸세요. 그것이야말로 당신이, 혹은 제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삶의 이유입니다.”
장지문 너머 희미한 윤곽으로도 소녀의 몸부림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놀랐다고 할까 당황했다고 할까, 어쩔 줄을 몰라 손을 이리저리 휘젓던 소녀는 이내 달아나듯 그 자리를 떠났다.
※광대의 가르침
하쿠레이 레이무는 대지에 섰다.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인간을 등 뒤에 둔 채로. 대대로 요괴퇴치를 생업으로 삼던 음양사. 요괴라는 두 글자가 지긋지긋했던 혈기왕성한 젊은이. 농부. 대장장이. 사냥꾼. 그들의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인간의 수호자이기에, 하쿠레이의 무녀이기에, 레이무는 유카리의 앞에 섰다.
야쿠모 유카리는 대지에 섰다.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요괴를 등 뒤에 둔 채로. 과학의 발전으로 거처를 잃은 카마이타치. 인간의 살결이 그리웠던 굶주린 나마하게. 스즈카곤겐. 비비. 고획조. 그들의 의지가 정당하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따라 경계의 요괴로서, 환상향의 기원으로서, 유카리는 레이무의 앞에 섰다.
“결국 이렇게 되고야 말았네.”
“레이무가 내 말을 들었다면 이렇게는 안 됐을 텐데.”
“말도 안 된다는 거, 알고 있지?”
유카리는 딱히 반응하지 않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녀가 허공에 부채를 펼치니, 곧 육안으로 가늠하기 힘든 무수한 눈알이, 경계가, 환상향의 하늘을 뒤덮었다.
“절반 정도만 할게. 다 죽어버리면 그것도 곤란하니까.”
“해봐. 환상향이고 나발이고 요괴의 씨를 말려줄 테니까.”
레이무도 지지 않겠다는 듯, 눈을 감고 경건한 자세로 불제봉을 흔들었다. 곧 인간의 신앙을 담은 수십, 수백의 신이 어렴풋한 형체를 드러냈다.
“…”
“…”
어쩌면 이보다 나은 해결책이 있지 않았을까. 이 꼴이 나기 전에 인요의 불안을 잠재울, 그런 방도가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다가, 레이무는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 줄 간단명료한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걸 추구하는 이는 엉터리에 사이비일 뿐이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인간은 요괴를, 요괴는 인간을 증오할 수밖에 없다. 오늘을 넘기지 못한다면 언제가 되어도 환상향은 멸망할 운명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레이무는 부적을 꺼내들었다.
“멈춰라!”
만마와 영력이 부딪히는 거센 폭풍 사이를 빗자루 한 대가 가로질렀다. 누군가는 그 모습에서 구원자를 찾았고, 누군가는 그 모습에서 재앙을 떠올렸다.
“서로를 믿지 못해 의심암귀에 사로잡힌 가련한 중생들이여! 생존을 위해 도의를 저버린 가엾은 인요들이여! 모두 멈추어라! 멈추어 내 말을 들어라!”
“마리사?”
“저 꼬맹이.”
“나의 벗 레이무 양! 그리고 내가 요괴 중 어느 누구보다도 신뢰하는 유카리 양! 그대들은 어찌하여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가!”
“…물러서 있어, 마리사.”
“레이무의 말이 맞아. 아무것도 모른다면 차라리 빠져있는 편이 좋을 거야.”
“물러나라? 허면 그대들은 나를 아무것도 모르는 광인으로 여겼다는 말이로다! 하지만 광인에게는 광인의 눈이 있다! 그대들이 나를 광인으로 본다면 나 또한 그대들을 광인으로 바라볼 뿐이니!”
그 어이없는 언동을 처음 본 유카리는 표정을 구겼다. 곧 이어 레이무에게 ‘얘 왜 이러는 거야?’라고 묻듯 눈짓을 보냈으나, 두어 번 그런 꼴을 봤던 레이무라도 마리사의 뜻을 헤아릴 수는 없었기에 고개를 저었다.
“그저 속세의 흐름을 따라갈 뿐인, 삶을 구속당한 어리석은 중생들이여! 내가 너희를, 환상향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섰다! 너희는 들어라!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다! 증오는 파괴를 낳지만 사랑은 우리를 굳건히 한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사랑받아 마땅하며 너희는 그 방법을 알고 있다!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기에도 바쁜 일생을, 어찌 증오로 보낸다는 말이냐! 레이무! 유카리! 그대들이 증명하라! 아직 늦지 않았음을, 인간이 요괴를, 요괴가 인간을 사랑할 수 있음을 보여라!”
“마리사, 마지막 경고야. 물러서.”
“얌전히 유카리의 말을 들어. 여기 네가 설 자리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마리사를 타이르려던 레이무는, 돌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 변화에 의문을 느낀 유카리가 고개를 돌리니, 레이무가 그러했듯 그녀 역시 뻣뻣이 굳어버렸다.
“마리사, 너…”
두 인요의 눈에 들어온 것은 마리사의 우스꽝스러운 예복 너머로 삐져나온 선홍빛 물체. 붉은 원통은 그 윤곽만으로 불온한 기운을 뿜어냈고, 그 끝에 자리한 심지는 불안한 상상에 선명히 못을 박았다. 이내 마리사가 미소를 지으며 겉옷을 벗어 던지니 그 정체가 만천하에 드러나고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인요에게서 비명이 흘러 나왔다.
“다이너마이트?!”
“그거… 장난감 맞지?”
“안심해. 탄막놀이용 장난감도, 겉만 그럴싸한 모조품도 아닌 진짜배기 화약이니까. 이 정도 양이면… 너희들이 말한 대로, 여기 모인 인요들 중 절반 정도는 사라지지 않을까?”
“제정신이야?”
“여기 제정신인 놈이 어디 있는데?”
곧 이제까지의 어색한 말투를 벗어던진 마리사는 이죽이죽 웃으며 유카리와 레이무에게 어깨동무를 걸었다.
“너희들, 여태까지 나를 호구로만 봤지?”
선홍빛 화약을 얼굴에 댄 채 파닥거리는 두 인요에 개의치 않고, 마리사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래, 레이무에게는 인간을, 유카리에게는 요괴를 지킬 의무가 있잖아. 그런 짐을 짊어진 존재라면 자신을 의심할 겨를 따위는 없지. 하지만 말이야. 이런 나라도 세상을 똑똑히 볼 수는 있어. 가진 것이 없으니까, 어느 누구에게도 구애받지 않으니까, 나는 오래도록 고민하고 나만의 답을 찾았어. 그리고 나 또한 이 길이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아. 이게 키리사메 마리사가 찾아낸, 환상향을 구원할 유일한 길이야.”
툭- 하고, 마리사는 어깨동무를 풀고 레이무와 유카리를 강하게 밀쳤다. 딱히 힘이 모자라지 않았음에도 눈앞의 상황에 정신을 놓은 둘은, 엉덩방아를 찧고 마리사를 바라볼 뿐이었다. 바라만 봐서 어쩌겠다는 걸까. 마리사는 싱긋 웃으며 성냥갑을 꺼내 들었다.
“잠깐, 스톱! 스톱!”
“멈춰!”
그제야 정신을 차린 두 인요는, 차마 마리사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며 발만 동동 굴렀다.
“알겠으니까! 그, 일단 성냥은 내려 놔!”
“유카리 말 들어. 그래, 뭐라고 했더라? 아, 싸우지 말라고 했지? 응. 자, 봐봐. 악수, 악수! 제대로 화해했다고!”
“그런 미적지근한 걸 보고 화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너희 둘 뿐일걸.”
마리사는 고개를 저으며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키스해.”
“…어?”
“키스하라고. 그 정도는 되어야 여기 모인 모두가 사랑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거 아냐?”
“아니 그렇게 말해도…”
그건 좀 아니라는 듯 머뭇거리자, 참다못한 마리사는 기어이 성냥에 불을 붙였다.
“와악!”
“키스하라고!”
마리사는 고개를 돌려 두 소녀 너머 마을 입구에 모인 인요들을 부추겼다. 키스해. 키스해. 마리사의 어거지 연호 아래에 인요들은 망설이다가도, 곧 저 소녀의 몸에 둘둘 말린 화약 무더기를 상기하고는 이를 악물고 호응하기 시작했다.
“키… 키스해!”
“키스해!”
“키스해!”
키스해, 키스해. 흐트러진 소리는 그 길을 잡고 점차 퍼지기 시작했다. 레이무와 유카리는 넋을 놓고 서로를 둘러싼 인요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눈앞의 화약갑주를 맨 인간을 두려워하는 듯, 어딘가 즐거워 보였다.
“…진심이야?”
“일단 살고 봐야 할 거 아녀! 뽀뽀해, 이 년아!”
“너희들….”
“유카리 님! 저는 죽어도 이렇게 죽고 싶진 않습니다!”
연호는 그칠 기색이 없었고,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레이무는 허탈하게 웃었다.
광인에게는 광인의 눈이, 내가 상대를 광인으로 본다면, 상대도 나를 광인으로 볼 뿐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키리사메 마리사가 본 풍경이란 말인가. 이것이 그녀가 바라본 환상향이란 말인가.
“이야, 독하다 독해. 이래도 못 하겠다?”
“무드도 없이 퍽이나 하고 싶겠다. 이 미친년아….”
어딘가 음습하지만, 그런 불안조차 날려버릴 정도로 안일하고 두루뭉술한 세상. 오직 마리사만이 이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었구나.
“넌 이따가 죽었어, 마리사.”
레이무는 입술을 꽉 깨물고 유카리에게 다가섰다.
※Pulp Fiction
레이무는 반듯이 날이 선 신문을 집어 들었다. 붕붕마루. 평소 같으면 눈길도 안 줄 싸구려 신문이지만 오늘 하루만은 불티나게 팔리리라.
“요괴와 인간 두 세력 간의 응어리에서 시작된 이번 분쟁은 용감한 마법사 키리사메 마리사의 개입으로 간단히 해결되었다. 마리사는 수백 명의 인요를 뚫고 지나가 레이무와 유카리의 앞을 막아섰고… 이야, 완전 영웅이 되어 버리셨네, 마리사 폰 키리사메 양?”
“우우우….”
평소 같으면 가슴을 팡팡 치며 자신의 위대함을 전파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그 소녀는, 오늘따라 전혀 기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콧물을 삼키며 흐느껴 울고 있었다. 아무렴. 그런 꼴을 보인다면 사흘 밤낮은 집에 쳐 박혀 있고 싶으리라. 레이무는 그 이유를 다시 들려주겠다는 듯 기사의 나머지 부분을 천천히 읽어 내렸다.
“사태를 마무리한 키리사메 마리사는 넋을 놓고 두 인요를 쳐다보다가 성냥불을 심지에 대어 버렸다. 심지가 타들어 가는 소리를 들은 키리사메 마리사는 아연실색하였고,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인요가 도망치고 서로 밟으며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다행히 야쿠모 유카리는 기지를 발휘해 키리사메 마리사의…”
“거기까지! 더 이상 말하지 마!”
“…옷을 잡아 뜯어 스키마 너머로 던져버렸고, 키리사메 마리사는 모든 인요 앞에 그 빈약한 몸을 드러내며 주저 앉…”
“와악!”
마리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레이무에게 달려들어 신문을 북북 찢었다. 그러고는 또 바닥에 눌러 붙어 흐느꼈다.
“이제… 시집 못 가.”
“너 그런 걸 신경 썼구나?”
“나는 여자도 아냐?!”
“남녀를 불문하고 자기 몸무게보다 많은 화약을 두르고 자살쇼를 벌이는 인간은 없을 걸.”
마리사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레이무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홱 돌려 방바닥을 쓰다듬었다.
“됐어. 그냥 죽어 버릴 거야….”
“그러게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고는…”
레이무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이런 꼬맹이가 환상향의 구세주라면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이런 마리사였기에 환상향을 구할 수 있었던 걸까.
“고생했어.”
레이무는 마리사에게 다가가 상냥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평온한 분위기 속에, 붕붕마루 한 귀퉁이를 차지한 후타츠이와 마미조의 실종 사건 따위는 잊혀진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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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동방 프로젝트 갤러리 단편선 팬픽대회 출품작.
인요의 갈등. 그 갈등을 받아들이는 다양한 동방 프로젝트 캐릭터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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