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의, 내가 땅을 땅이라 부르던 시절의 기억이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는 거야, 마리사?”
반세기 짧은 시간동안 나를 따라다니던 금발의 마녀. 늙어 죽는 것을 마녀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인간이었다고 할 수 있었던 그 소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내 집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책에 홀리기라도 했는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한 동안 묵묵부답으로 눈동자만 굴리던 소녀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을 들어 올리며 내게 이렇게 답했다.
“앨리스는 바다에 가본 적 있어?”
질문에 돌아온 것은 질문. 언제나 제 말만 하던 말괄량이. 그날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어린애 같은 성격에 웃음을 지어주던 것 또한 나였지만.
“바다라. 오랜만에 들어보네. 환상향에 들어오기 전에는 자주 갔었지.”
“헤에, 그럼 어때? 정말 바깥 세계를 덮을 정도로 물이 많은 곳이야?”
“덮을 정도라고 할 것도 없이, 이미 바깥 세계는 절반 이상 물에 잠겨 있어.”
좁은 산골을 벗어나본 적이 없는 소녀는, 내 말에 더욱 눈을 빛내고 있었다. 분명 이곳엔 발이 안 닿는 계곡물을 찾는 것조차 힘들었으니까.
“바다에 가보고 싶은 거야?”
“응, 굉장하잖아. 세상을 가득 메운 소금물, 여름에도 녹지 않는 얼음산, 노을빛으로 빛나는 물결, 그 속을 헤엄치는 집채만한 물고기. 뭐 하나 빠질 것 없이 낭만 그 자체라고.”
소녀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위 아래로 손을 휘적거리며 열띤 연설을 했다. 무엇이 저 아이에게 바람을 넣어준 걸까. 슬그머니 눈길이 책의 표지로 향했다.
「해양대백과」
나는 입을 가리고 실소했다. 유아교육용 책 한권에 로망 운운하며 눈을 빛낼 수 있다니, 그야말로 천진난만 그 자체가 아닌가.
“아마 마리사가 생각하는 만큼 재미있진 않을 거야. 빙산이나 고래 같은 건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게 아니거든.”
“에에…”
내 말에 소녀는 약간 실망한 듯 웃음기가 사라진다.
“하지만 노을 정도는 매일 볼 수 있어. 응, 그건 확실히 예쁘지. 홀로 해안에 앉아 맞이하는 금빛 해원… 마치 마리사의 탄막이 세상에 내린 것 같아.”
“오오…”
부정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그 절경. 그를 모르는 순박한 소녀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이며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바다라는 거, 꼭 가보고 싶은 걸!”
“참, 마리사도… 바깥 세계로 갈 길이 없는 데 어떻게 가려고?”
“그건, 음…”
소녀는 말을 더듬으며 열심히 해결책을 찾으려 했지만, 이내 별다른 방법이 없음을 깨닫고 낯빛이 흐려졌다. 그렇다. 아무리 갈구하여도 우물에서 태어난 개구리에게 밖으로 나갈 길은 없는 것이다.
“별 수 없는 거야.”
“응, 그렇겠지….”
소녀는 책을 제자리에 꽂아 넣고 쓰러지듯 소파에 누웠다. 그리곤 팔로 두 눈을 가려버렸다. 울적해져서 눈물이 흐르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새로운 흥밋거리 하나가 없어진 정도의 아쉬움이 남아있었을 뿐이겠지.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아쉬움은 소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나도 언젠가 다시 가 보고 싶네. 그땐 마리사와 함께.”
불가능한 걸 알면서도, 나 역시 내심 바라왔다. 긴 세월을 살면서 나를 괴롭힌 무료함. 그를 잠시나마 달래준 것은 그녀였으니까.
“…응.”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그때 소녀의 입은 웃고 있었다.
#
“앨리스.”
“…아.”
내 의식을 되돌린 것은 또 다른 마녀의 부름이었다.
“…졸았어?”
“아니, 잠시 다른 생각을 좀 했어.”
좌우로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나는 다시금 이상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나와 파츄리 노우렛지, 둘 만이 부유하는 세계로.
“홍마관의 마녀가 나무에 올라 타다니… 세상이 변하긴 변했어.”
“재밌는 말이네. 이제 홍마관은 없지만.”
“…”
그 말에, 어렴풋이 한 흡혈귀를 떠올릴 수 있었다. 먼 옛날 죽음을 택한 붉은 달. 세상의 끝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영원히 그럴 예정이었으니까. 이제 와서 애도의 감정이 들지는 않았지만, 조용히 눈 정도는 감아주고 싶어졌다.
“기분 좋아.”
눈을 감자 촉감이 다가오고, 적당한 부유감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이대로 맞붙어 잠이 들어도 좋으련만, 잠은 이미 충분히 잤다. 저 세상의 몫까지 잤을 테지.
“…마리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
“…아아.”
파츄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있을 때, 나한테 바다에 가고 싶다고 했었거든.”
“굉장한 블랙 조크네.”
파츄리에게서 진심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백 하고도 몇 년 만 인 것 같다. 저런 웃음을 다시 보는 것은.
“사전을 뒤적거리더니, 고래니 빙산이니 엄청 열심히 말을 잇더라.”
“고래가 아직 있을까? 빙산은 포기해야겠지만.”
이미 죽은 아이의 소원을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하지만 이런 사소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우리 둘만의 유일한 낙이 되어 버렸다.
“만약 네가 아니라 마리사가 여기있었다면… 그 아이는 좋아했을까?”
“그럴 리가.”
당연하다는 듯 부정하는 파츄리. 나 또한 같은 심정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짧았으면 짧았지, 절대 이런 식으로 영생을 원하진 않았을 거야.”
“마법사이기 전에 인간이었으니까.”
“인간이라서… 일까.”
“…아닐 수도 있겠네.”
파츄리의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정적이 흘렀다. 아무 간섭도 없는 제법 긴 정적의 시간. 미진한 바람이 불어오고, 잠시 그녀의 품에서 목적지 까지 눈을 붙였다.
#
“도착했어, 앨리스.”
“아…”
딱히 기대할 것이 없음에도, 나는 고개를 아래로 향했다.
“마리사의 집이 있던 곳이야. …아마도.”
“보이지 않는 걸.”
“당연하지, 내려가면 보일거야.”
자세히 확인하고 싶었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어쩔 수는 없어 고개를 들었다.
“그럼, 이제 여정은 끝인가?”
“응, 고마웠어. 너도, 네 빗자루도.”
“이젠 그 짜증나는 말장난도 못 듣는다니.”
“네가 따라 온다면 볼 수 있을지도.”
“사양할게. 마리사한테 안부 전해 줘.”
“응, 언제든 기다리고 있을게.”
긴 세월 서로를 무너지지 않게 도와줬던 이를 보며, 나와 파츄리는 미소를 지었다.
몸을 일으켜, 저 지평선의 끝을 보았다.
온 세상이, 바다가, 마리사의 탄막처럼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조각배에서 쓰러지듯 내 몸을 던져,
나는 마리사의 품으로,
예전에 하늘이었던 바닷 속으로 몸을 던졌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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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환상소요담 부활 기념 팬픽대회 출품작.
(https://m.dcinside.com/board/touhou/4034498)
주제 - 바다
지구 온난화로 물에 잠긴 미래의 환상향.
마리사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자살하는 앨리스를 담은 팬픽이다.
하지만 글이 진행되는 도중 그러한 정보는 일체 넣지 않았다.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돌아다니는 내용임에도, 배를 '나무' 혹은 '빗자루'로 바꿔 쓰고, 주변이 물바다라는 상황은 묘사조차 하지 않았다.
결말에 소소한 반전을 넣고 싶었던 것 같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해만 힘들게 만드는 답답한 구성이다.
정보를 주지 않으면 독자들은 모른다.
그걸 이해해주길 바라는 건 작가의 욕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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