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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팬픽

남매 (2014. 12)





천 년 전 히지리 가에는 남자 아이가 하나 있었다. 대를 이어줄 다른 사내아이가 없어 식솔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자란 그 아이는, 지식과 예의범절을 갖춘 신동으로 자랐다. 그러나 가엾게도 아이는 서당을 마치기도 전에 악병에 걸리고 만다. 어쩌면 오늘날에는 손쉽게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병의 원인을 악귀에게서 찾던 무지의 시대에, 그들에겐 종교 이외에 기댈 길이 없었다. 극진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고, 결국 아이는 제 몸조차 가눌 수 없게 되어 매일을 이불 속에서 보내게 된다. 왜 이런 병에 걸려버린 걸까. 아이는 운명을 원망했다. 이제는 그저 짐 덩이가 되어 가족들에게도, 하인들에게도 민폐만 끼칠 뿐이었다. 내색하지는 않고 있지만, 틀림없이 모두 그렇게 여기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는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지냈다. 눈을 떠도 침상 안, 눈을 감아도 침상 안. 몸을 움직이는 것은 기껏해야 요강 앞까지. 백일이 지나도록 밝은 미래를 그리고, 천일이 지나도록 현실에 좌절했다. 그것이 그의 유년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빛은 있었다. 그 빛은 하나뿐인 누이, 히지리 뱌쿠렌. 집을 비우는 날이 잦았던 부모를 대신하여 누이는 그의 보호자가 되어주었다. 몸이 뜨거우면 정성스레 간병해주었고, 밖을 나설 수 없는 그를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마을에서 본 것, 지나가다 우연히 들은 것, 하루를 보내며 느낀 것, 하나같이 남들이 듣기에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것이 그에게 있어서 이상향이었고, 그가 소통하는 세상의 전부였다. 실뜨기, 실을 자아서 한차례씩 주고받으며 모양을 만드는 놀이. 그것이 계집아이들이나 하는 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누이와 함께 밤이 새도록 그 놀이를 즐겼다. 누이가 먼저 실을 만들면 그가 한 번, 그가 실을 만들면 다시 누이도 한 번. 실뜨기를 할 때마다 세계에는 그와 누이만이 남아있었다.

 

병마와의 오랜 싸움 끝에, 그는 결국 병을 이겨내고 무사히 장성할 수 있었다. 그는 대를 잇는 것 이전에 불가에 뜻이 있음을 믿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출가한 뒤 그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설법을 전파하며 불교의 전파에 힘을 썼다. 비록 집을 떠나 먼 길을 돌아다녔다고 해도, 그는 한 번도 누이를 잊은 적이 없었다. 그의 기억 속에 선명한, 선명하다 못해 애틋한 유년기의 추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그는 누이가 불가에 입문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그 날을 기점으로 산중에서의 수행을 그만두고 누이를 만나기 위해 여정을 떠났다.

 

그의 이름은 묘렌이라 했다.

 

#

 

“으음.”

얇은 천으로 견디기에는 약간 싸늘한 바람, 그 감각에 히지리 묘렌은 눈을 떴다. 그가 눈을 떠서 본 것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컴컴한 천장. 하지만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니 그곳은 히지리 가의 저택이 아니었다. 활짝 열려 푸르른 마당이 보이는 장지문, 고풍스러운 서랍장 위에 얹혀 있는 영롱한 보탑, 모두 묘렌이 살던 히지리 가에는 없던 모습이었다.

“여긴…?”

묘렌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상황을 확인하려 했다. 이내 그 곳이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자 묘렌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회상하려 했으나, 이상하게도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들어갈게, 묘렌.”

생각을 미처 정리하기도 전에, 다른 방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묘렌은 정신을 다잡고 뒤를 돌아보았다. 요괴라면 단 번에 베어버릴 기세로 태세를 취했으나, 묘렌은 그곳에 서있는 여성을 보고 넋이 나가버린다.

“누님…?”

“잠자리가 불편하진 않았니?”

문을 열고 묘렌을 맞이한 사람은 히지리 뱌쿠렌, 그의 누이였다.

“누님… 읏!”

뭘까, 무언가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다.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진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묘렌은 한동안 그녀를 쳐다보며 기억을 되짚다가, 뒤따라온 두통에 이마를 어루만졌다.

“크윽…”

“그렇게 놀았으니 머리가 깨지겠지. 참… 여기도 일단은 절이라니까.”

“절.”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묘렌의 머릿속에 흐릿하게나마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누이 뱌쿠렌이 유명한 절의 승려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하산하여, 그녀가 있는 절에 도착했다. 그리고 절의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환대를 받았다.

“그렇군요. 누님께 초청받아서 며칠 간 여기서 머물기로 했었죠.”

“응, 이제 기억났나보네.”

“이것 참, 바로 어젯밤 만났으면서 또 반갑다고 할 뻔 했네요. 누님의 얼굴을 보자마자 굉장히 오랜만에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묘렌…?”

“…어라, 왜 이러지?”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그의 옷을 적셨다. 왜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우리 묘렌…”

뱌쿠렌이 그를 다정하게 안아주었다. 그 표정은 어딘가, 조금 슬퍼보였다.

 

#

 

“이젠 좀 괜찮아졌니?”

“네. 죄송했습니다, 누님. 이것 참, 왜 갑자기 눈물이 흘렀던지….”

아무리 생각해도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흐르던 눈물이 멈추기까지는 분명 긴 시간이 걸렸고, 그 시간동안 뱌쿠렌이 그를 안은 채, 묵묵히 등을 토닥여 주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일이 누이를 번거롭게 했다는 사실이 묘렌을 멋쩍게 만들었다.

“후훗, 여전히 울보구나. 우리 귀여운 묘렌, 그 짧은 밤새 누나를 못 본 게 그렇게 슬펐어요?”

뱌쿠렌이 익살스러운 농담을 건네며 묘렌의 볼을 어루만졌다. 묘렌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누이의 익살에 화답하듯 미소를 짓는다.

“누님이야말로 여전히 대담하시네요. 절에 ‘그런 걸’ 숨기고 있다가 본당에서 잔치판을 벌이시다니. 덕분에 숙취로 머리가 깨질 것 같습니다.”

분명 불가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은 입에 대선 안 될 음료가 오고 갔던 기억이 있다. 아하, 어젯밤 일이 기억나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었나.

“어머머… 숙취라니, 누가 들으면 술이라도 먹인 줄 알겠네.”

뱌쿠렌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능청스럽게 웃었다.

“술이라고 한 적 없습니다, 다만 곡차가 아주 달콤하더군요.”

“…아하하!”

그 말을 들은 뱌쿠렌은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그래, 술 있다. 어쩔래!”

그 말과 함께 그녀는 남동생의 등짝을 팡팡 내려친다.

“크헉!”

어릴 적부터 힘 하나는 엄청났던 그녀는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맞는 묘렌 입장에서는 더 강해진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얼얼한 등을 어루만지며, 묘렌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누님은 하나도 변한 게 없군요.”

“아니, 예전에 비하면 약간 더 세졌지.”

“아, 역시.”

그 말이 끝나고 서로를 마주보니, 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큰소리로 웃고 또 웃었다. 그래, 이것이 행복이고 이것이 남매애. 묘렌은 이 행복이 계속되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아하하하… 자, 슬슬 가야지. 우선 단장하고 오렴, 물은 받아놨으니까.”

뱌쿠렌이 웃다 새어나온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간다니, 어딜 말씀이십니까?”

의아한 표정을 짓는 묘렌을 보며, 뱌쿠렌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오늘 하루, 네게 보여주고 싶은 게 많아.”

 

#

 

몸단장과 가벼운 아침식사를 마친 뒤, 누이가 제일 먼저 데려간 곳은 절의 본당이었다. 교인 여럿이 옹기종기 모여 아침부터 합장을 하며 염불을 외고 있었다. 토라마루 쇼우, 무라사 미나미츠, 쿠모이 이치린. 묘렌에게는 전날 자신을 살갑게 대해 준, 그리고… 신나게 술을 들이붓던 기억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염불은 제법 일찍 끝났다. 그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문 밖에 서 있던 묘렌과 뱌쿠렌을 맞이하였다.

“히지리! 그리고 동생 히지리!”

“하하, 묘렌이라고 불러주세요.”

절의 본존인 토라마루 쇼는 묘렌을 제법 독특하게 불렀다.

“어젯밤엔 굉장했어요, 설마 초면인 여성들 틈에 껴서 그 정도로 분위기를 띄울 줄은…”

“저 혹시 취해서 날뛰었나요?”

뱌쿠렌을 친언니처럼 여긴다는 쿠모이 이치린이라는 승려는, 묘렌 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말을 꺼내며 그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발정난 개 같았달까.”

“으아아...”

한동안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무라사 미나미츠는, 슬쩍 끼어들어 묘렌에게 비수를 꽂았다.

“일찍 제압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

“제압!? 저 기절해 있었습니까?”

“언니의 당수는 예술이었어요.”

“이치린!”

뱌쿠렌이 당황해서 이치린의 입을 막았다.

“아, 술에 쩔어서 주정 부리다가 누님한테 맞아서 기절했었군요.”

그래서 기억이 없었구나. 묘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아니, 아냐 이건…!”

“큭큭큭…”

뱌쿠렌이 당황하여 입을 뻐끔뻐끔 거리자, 장난기 가득한 셋은 결국 웃음을 터뜨린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 즐거워, 묘렌도 살짝 미소를 짓는다.

‘과연, 누님은 이런 분들과 함께 하고 계셨구나.’

자신을 병간호하느라 사이 깊은 친구하나 만들지 못했던 누이가 이제는 모두를 이끄는 강인한 여성이 되어 있었다. 묘렌은 그 차이를 통해 그녀의 성장을 체감할 수 있었다.

“묘… 묘렌은 바빠요! 아직도 보여주고 싶은 것이 많으니까!”

뱌쿠렌은 말을 더듬으면서도 간신히 묘렌의 손을 붙잡고 그들에게서 빠져나온다.

“브라콘 히지리가 동생 납치해간다!”

“휘유! 터프한 누나, 보기 좋은데?”

뒤통수에 전해지는 얄궂은 농담. 뱌쿠렌과 묘렌은 얼굴이 화악 달아올라 그대로 본당을 빠져나왔다.

“여어.”

뱌쿠렌에 손에 끌려 나오던 묘렌은, 입구에서 어느 여자아이가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을 확인한다. 등에는 붉은색과 파란색의 날개가 돋은 괴상한 차림새의 여자아이… 저 아이는 누구였지?

“나는 모르는 거야?”

“…”

묘렌은 끌려가는 와중에도 그녀와 제법 오랜 시간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되뇌어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분명 기억나는데, 저 아이만큼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질문을 할까 했지만 상관없으려나 싶은 생각이 들어, 묘렌은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뒤에서 그 아이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럼 난 초대받지 못했다는 거네.”

묘렌이 뒤를 돌아보니 이미 그 아이는 없었다.

 

#

 

“생기 넘치는 마을이군요.”

묘렌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지?”

그의 말에 뱌쿠렌도 눈을 반짝인다. 사랑하는 동생에게 자신이 사는 곳을 하나하나 소개시켜주고 싶었을 터, 뱌쿠렌은 잔뜩 흥분해 있었다. 한동안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손을 붙잡은 누이가 너무나도 들떠 있어서 느긋하게 감상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물론 그를 묘렌이 꺼릴 이유는 없었다. 누이가 웃는 것이 자신의 기쁨이었으니까.

“아, 이거…”

묘렌은 뱌쿠렌을 따라 다니다가 잠시 잡화상 앞에 멈춰 선다.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고운 상아색 끈이었다.

“이건 얼만가요?”

“형씨 보는 눈이 있네! 그거 옆에 계신 여자 친구 분 머리라도 묶어드리면… 어이쿠! 뱌쿠렌님!”

넉살좋게 묘렌을 끌어들이던 중년의 남성은, 그 옆에 서 있는 인물이 명련사의 주지, 뱌쿠렌임을 깨닫고 화들짝 놀란다.

“아아, 뱌쿠렌님 업어 가실 분이면 돈은 못 받지. 기분이다. 공짜로 가져가쇼.”

“아뇨, 저희는 그런 게 아니라… 어라?”

묘렌은 소매에 꿰매둔 주머니를 뒤적이며 돈을 찾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분명 몇전 남아 있었을 텐데?”

“괜찮아, 괜찮아! 사양 말고 받아. 뱌쿠렌님 잘되면 나도 공덕 쌓고 좋지, 뭘.”

분명 누이의 절에 향하는 여정이 길어질까 돈이라면 두둑하게 챙기고 왔다. 그런데 소매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묘렌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주인장이 계속하여 자신에게 끈을 건넸기 때문에 깊이 생각해볼 틈이 없었다. 어딘가 떨어뜨렸거나 벌써 다 써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묘렌은 잡상을 털어 넘기고 주인장이 건넨 끈을 받아 누이를 향했다.

“누님, 잠시 뒤돌아주세요.”

“어머, 어머. 우리 묘렌이 언제 또 이런…”

누님이라는 말에 더더욱 놀란 주인의 표정은 무시하고, 묘렌은 능숙하게 뱌쿠렌의 뒷머리를 묶었다. 머리를 다 묶은 뒤, 묘렌은 진열대에서 거울 하나를 꺼내 뱌쿠렌에게 뒷머리를 비춰주었다.

“역시 잘 어울리시네요. 본가에 있을 때는 자주 이렇게 묶으셨죠?”

“예뻐….”

뱌쿠렌은 한동안 자신의 뒷머리를 어루만지며 감탄했다. 한동안 그 상태로 고착되어 있다가, 뱌쿠렌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번득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자, 묘렌 어서! 아직 보여주고 싶은 곳이 많다구!”

“아앗, 누님 살살 좀!”

묘렌을 당기는 뱌쿠렌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

 

“어라? 겐지모노가타리가 벌서 완결이 났습니까? 무라사키 여사님의 집필 속도는 무섭군요…”

“…네? 손님?”

“어머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어서 가자 꾸나, 묘렌!”

 

“무척이나 감정이 절제된 극이로군요. 그런 와중에도 순식간에 가면을 바꾸는 묘기가 정말 굉장합니다. 대륙의 기술인가요?”

“음, 아… 뭐 비슷하지.”

 

“그러니까 특히 자네 같은 젊은이는 조심해야 하는 게야. 언제 너구리가 사람을 홀리려들지 모르는 거거든.”

“새겨듣겠습니다, 후타츠이와 여사님.”

“큭큭큭… 아하하…”

 

묘렌은 고서점을 들르고 저잣거리에서 가면극을 하는 아이도 보았다. 요괴를 조심할 것을 당부해주던 마을의 권위있는 노파도 만났고, 9번의 삶을 환생했다는 이야기꾼 아가씨도 만났다. 가끔 신자 몇명이 다가와서 뱌쿠렌과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질녘까지 뛰어다니던 남매는, 마침내 경단가게에 들러 다리를 쉬게 했다.

“여기 경단 먹어본 적 없지?”

“애초에 처음 들르는… 읍…?!”

뱌쿠렌은 장난삼아 꼬치경단을 묘렌의 입속으로 쑤셔 넣었다. 그것을 맞받아쳐서 한입에 삼켜버리고, 목이 메어 괴로워하는 묘렌. 뱌쿠렌은 당황하여 허겁지겁 물을 건넸다. 이어지는 남매의 장난스러운 말싸움. 멀리서 봤더라면 선남선녀 한 쌍으로 오해받을 만큼 흐뭇한,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렴, 마실 것 좀 사올게.”

“아뇨, 그러실 것 까지는…!”

묘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뱌쿠렌은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없는데.”

이미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하여간 누님은. 묘랜운 잠시 앉아서 지친 다리를 주물렀다.

“보기 좋은 한 쌍이시네요.”

“아, 아닙니다. 저희는 남매…”

누군가의 목소리에 묘렌이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한 여성이 묘렌을 보며 웃고 있었다. 수려한 외모, 우아한 머릿결과 비녀, 선녀 같은 아름다움이 있었지만, 동시에 구렁이 같은 불길함이 있었다. 아니 그것보다, 왠지 낯이 익었다. 분명 묘렌은 살면서 이런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그녀의 얼굴도 목소리도 말투도, 모든 것이 이미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저기… 실례합니다만 저와는 구면이신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네요.”

여성은 자연스럽게 묘렌의 옆자리를 차지한다.

“행복하신가요?”

“네?”

“지금 이 순간, 혹은 오늘, 더러는 당신의 삶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겠네요.”

“…”

묘렌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느닷없는 질문에 당황한 것도 있겠지만, 그녀의 질문이 너무도 이질적이었다는 점이 그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이 여자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그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목적이 어찌 되었든, 지금 묘렌이 할 수 있는 대답이란 이미 정해져있었다.

“행복합니다.”

“후훗, 다행이네요.”

여성은 작게 새어나온 웃음을 손으로 흘렸다.

“그 행복은 소중히 하세요. 당신의 행복은 당신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히지리 묘렌.”

“잠깐, 당신 어떻게 내 이름을 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던 묘렌은, 갑작스레 찾아온 두통에 머리를 조아렸다.

“아아악!”

무언가가 그의 머릿속을 끊임없이 압박하는 것처럼 그의 두통은 가실 줄을 몰랐다.

‘묘렌, 묘렌!’

‘글쎄, 이걸 히지리 묘렌이라 할 수 있을까요? 혼을 넣기 전까지는 그냥 빈껍데기 일 뿐이죠.’

두통은 좀처럼 멎을 생각을 하지 않고, 묘렌의 기억에 없던 장면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익숙한 얼굴이다 생각했었는데, 얼굴뿐이 아니다. 목소리도, 말투도 그 불길한 기운도, 분명 어디선가 느껴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다, 당신 대체 누구야...!”

“뱌쿠렌 씨에게 전해주세요. 시간이 없다고.”

“묘렌!”

저 멀리서 음료를 들고 오던 뱌쿠렌은, 무릎을 꿇은 채 괴로워하는 묘렌을 보고 그를 끌어당겼다. 뱌쿠렌은 웃음으로 화답하는 여성을 노려보다가, 이내 자리를 피했다. 여성은 멀어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인형놀이, 열심이네.”

 

#

 

“놔주세요, 누님….”

묘렌은 힘없는 목소리로 누이를 불렀으나, 그녀는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묘렌을 끌고 다닐 뿐이었다.

“…큿!”

“꺄앗!”

묘렌이 거칠게 뱌쿠렌의 손을 뿌리쳤다. 그렇게 해서라도 멈춰 서지 않으면, 정말로 두통에 머리가 부서져 버릴 것만 같았다.

‘놈이다! 히지리 묘렌이 나타났다!’

‘그래, 그거다! 죽여! 죽여서 동포들의 원수를 갚자!’

머릿속에 끊임없이 이상한 기억들이 솟아나고 있었다.

‘아이고 이놈아! 장남이 출가를 하더니 기어이 말도 없이 가버리느냐 이 불효막심한 것아!!!’

‘제발 눈 좀 떠 보렴, 묘렌! 나를 만나러 오겠다고 했잖니! 왜 네가 이런 꼴이 되어서 누워있는 거야! 묘렌! 묘렌! 묘렌!!!’

수많은 요괴들이 그를 둘러싸서 무참히 살해했고, 온 가족의 그의 시신을 부여잡고 통곡하고 있었다. 왜 이런 기억이 있는 것인가. 누이 뱌쿠렌의 절을 찾아서 이곳까지 왔는데, 왜 기억속의 자신은 차갑게 굳은 시체가 되어 있단 말인가?

“누님…!"

묘렌은 자신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인 그녀를 거칠게 잡아 당겼다.

“누님, 제게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습니까? 제발 말해주십쇼. 머리가 터질 것 같습니다. 왜… 왜 누님이 저를 붙잡고 울고 계셨던 겁니까? 왜 제가 차갑게 식어 관속에 누워있었단 말씀입니까?”

묘렌은 그녀를 세차게 흔들다가,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누님?”

뱌쿠렌은 울고 있었다. 분명 무언가 잘못되었다. 누이가 무언가 알고 있음을 묘렌도 넌지시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 상황에서 묘렌이 할 수 있던 것은 한가지 뿐. 묘렌은 조용히 누이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하지만 눈물을 닦으면 닦을수록 그녀의 눈에서는 더 많은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묘렌은 그녀를 잠시 포옹하고, 살짝 떨어져서 입을 열었다.

“누님, 말해주세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묘렌, 너는.”
뱌쿠렌은 목 아래까지 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말을 이었다.
“보고 싶었어, 묘렌.”
“누님?”
“천 년이 흘러도, 세상이 변해도 나는 너를...”

“거기까지야, 둘 다.”

누군가가 뱌쿠렌의 말을 잘랐다.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쪽을 보니, 그곳에는 붉은 머리를 한 장신의 여성이 거대한 낫을 들고 있었다.

“히지리 묘렌. 맞지?”

“아…”

처음 보는 사람이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왠지 모르게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여자는 위험하다고, 몸이 말해주고 있었다. 생자가 익숙하게 느껴서는 안 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익숙한 이 느낌. 묘렌이 천 년 전에 느꼈던 ‘그 때’의 느낌이다.

“누님! 어서 피하…!”

묘렌이 뱌쿠렌의 앞을 막아서려는 순간. 뱌쿠렌은 그를 뒤로 밀쳐냈다.

“…누님?!”

묘렌을 밀친 뱌쿠렌은 순식간에 상대를 들이받아, 굉음과 함께 거대한 흙먼지를 일으켰다.

“누님!”

일어있던 흙먼지가 가라앉고, 뱌쿠렌과 괴한의 모습이 드러났다. 괴한이 내리 찍는 낫을, 뱌쿠렌이 막아 버티고 있었다.

“당신… 알 만한 사람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윽!”

“히지리 묘렌의 혼은 돌려받는다. 그리고 당신은 금기를 어긴 대가를 단단히 치러야 할 거야.”

“혼…이라고요?”

묘렌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대낫을 들고 누이를 습격하는 괴한, 그 괴한을 맨손으로 대적하는 누이.

“나는… 나는…!”

그 사이에서 묘렌의 심장소리가 점점 커져서, 그의 귀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었다.

“묘렌! 도망쳐! 어서!”

괴한을 막아선 뱌쿠렌이 소리쳤다.

“누님, 저는, 저는 대체…!”

“살아! 제발!”

“…!”

그 두 마디. 사자에게 담아 보내는 생자의 청을 듣고, 묘렌은 이해했다. 그리고 모든 기억이 되돌아왔다.

 

누이가 불가에 입문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 날, 히지리 묘렌은 산중에서의 수행을 중단하고 누이가 지내는 절을 찾아 여정을 시작했다. 험난하고 고된 여정이었지만, 묘렌은 누이를 만날 희망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누이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그가 누이를 만나는 일은 없었다. 그는 여정을 끝내기도 전에, 요괴의 습격을 받아 명을 다했으니까.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 헤이안 시대의 일이다.

 

#

 

두 팔이 다리가 되도록 달려서, 묘렌은 돌아왔다.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누이의 절로.

“하아… 하아…”

묘렌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이의 동료들. 웃는 얼굴로 맞이하러 왔건만, 뱌쿠렌이 없기에 적잖이 당황한 느낌이었다. 무리에는 묘렌이 절을 나설 때 마주친 괴이한 소녀도 있었다. 묘렌은 힘없이 그들을 지나쳐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히지리는 어떻게 된 걸까요? 혹시 탄로난건…”

“그럴 수가… 오늘 때문에 일부러 나즈린한테도 오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었는데.”

“난 몰라. 절에 붙어있는 명판이라는 명판은 내가 다 뗐다고. 뭐가 잘못됐다면 다 누에 때문이야. 능력은 뒀다가 뭐해? 날개라도 감추고 말을 걸던가!”

“나… 난 아무 말도 안했어! 애초에 나를 끼워주지 않았던 너희들이 더 나빴던 거야! 으아앙!”

멀어져가는 소리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묘렌은 그저 자신이 있던 방으로 돌아가서, 그대로 침상에 누웠다. 침상에서 보이는 것은 어두운 천장. 천 년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칠흑 같은 어둠. 그것이 묘렌의 유년시절. 그것이 묘렌의 살아생전의 기억. 묘렌은 그대로 몸을 웅크려 자신의 추억 속에 잠겼다.

 

#

 

얼마나 지났을까, 쥐죽은 듯 누워있던 묘렌의 방으로 누군가 찾아왔다.

“묘렌.”

찾아온 것은 뱌쿠렌. 아까 그 괴한은 이제 사라진 것 일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뱌쿠렌은 천천히 묘렌의 침상에 다가갔다.

“오랜만이네, 어렸을 때 생각나지 않니? 네가 이렇게 누워있으면 내가 들어와서 같이 놀았었는데.”

웃는 얼굴로 과거를 회상하는 뱌쿠렌. 허나 묘렌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저는 누구입니까.”

“너는 히지리 묘렌, 나의 사랑스러운 동생이란다.”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가짜, 히지리 묘렌의 껍데기를 쓴 가짜입니다. 누님, 진짜 히지리 묘렌은 이미 죽고 없습니다. 누님도 이미 아시지 않습니까. 제 기억도, 몸도, 모두…”

“묘렌.”

뱌쿠렌이 다정한 목소리로 묘렌을 불렀다. 묘렌은 그에 반응하여 고개를 들었다.

“보렴. 부르면 반응하잖니. 너는 스스로를 묘렌이라고 여기고. 나는 너를 묘렌이라 부른단다. 그것만으로 충분해. 그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

뱌쿠렌이 묘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보고 싶었어, 묘렌. 정말로…”

“누님…?”

「부우우우우-!」

그 순간, 멀리 절의 대문 쪽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자세히 귀를 기울여보니 소리가 꼭 나팔소리 같았다. 나팔소리 뿐이 아니다, 수 십 장정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고, 이미 해가 졌음에도 문 바깥이 붉은 빛으로 밝아져있었다.

“대역죄인 히지리 뱌쿠렌은 들어라!!!”

체구에 걸맞지 않는 쩌렁쩌렁한 목소리, 환상향의 사자를 담당하는 염라 시키에이키 야마자나두의 목소리였다. 절의 대문 앞에는 이미 수많은 사신들이 문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 그중에는 낮에 뱌쿠렌을 습격했던 괴한, 오노즈카 코마치도 있었다.

“동생 히지리 묘렌의 혼을 빼낸 것도 모자라서 그 영혼에 생을 불어넣은 죄! 또 그 혼란을 바로 잡기 위해 파견한 사신을 폭행한 죄! 모두 엄히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니, 모든 무기를 버리고 순순히 투항하라!”

시키에이키는 냉정과 격정이 어우러진 목소리로 뱌쿠렌에게 투항할 것을 권유하였다.

“오셨구나.”

뱌쿠렌은 미소를 지으며, 겸허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나는 잠시 어디 좀 다녀올 테니까, 묘렌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저분들이 하는 말을 들으렴. 괜찮아. 나쁜 분들은 아니니까.”

한 걸음, 두 걸음. 대문을 향하는 뱌쿠렌의 발걸음. 우발적인 행동이었을까, 묘렌은, 그런 뱌쿠렌의 손을 붙잡고 절의 뒷문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

 

“여기라면 안전할 거 에요.”

“안전하긴, 엎드리면 코 닿을 거리구만.”

기껏 도망쳐서 온 곳이 그냥 좀 떨어진 풀숲일 뿐이라. 묘렌도, 뱌쿠렌도 웃었다. 웃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웃어서 이 상황을 잊고 싶었다.

“바보, 가만히만 있었으면 저세상엔 갈 수 있을 텐데.”

“상관없어요. 누님도 저를 위해 이런 무모한 짓을 했다면서요.”

“…그렇네.”

뱌쿠렌은 그대로 묘렌의 품에 기대었다. 얼마만일까, 남매가 이렇게 하루 종일 놀았던 것은, 뱌쿠렌도, 묘렌도, 검은 하늘에 흩뿌려진 별들을 보았다.

“아, 묘렌. 오랜만에 이거 하지 않을래?”

뱌쿠렌은 자신의 머리를 묶어두던 끈을 풀었다. 그리곤 그 끈을 이리저리 돌려 수를 놓았다. 실뜨기의 기본 형태.

“아, 진짜 오랜만이네요. 옛날에도 이거 하느라 밤새는 줄 몰랐었는데.”

묘렌도 기꺼이 도전에 응하였다. 뱌쿠렌은 미소를 지으며 자아낸 실을 묘렌에게 내밀었다.

“웬만한 여자애들보다 네가 더 잘했지.”

천년이 지나도 실력이 녹슬지 않았음을, 서로가 서로에게 증명할 기회였다.
“누님.”

묘렌이 실을 만들면 다시 뱌쿠렌이
“묘렌.”

뱌쿠렌이 실을 만들면 다시 묘렌이
“즐거웠습니다.”

묘렌이 실을 만들면 다시 뱌쿠렌이
“...”

뱌쿠렌이 실을 만들면 다시 묘렌이

“…묘렌?”

뱌쿠렌이 실을 만들면-

“뭐하니 묘렌, 어서 다음 수를 만들어야지.”

뱌쿠렌이 실을 만들면-

“더… 안하면… 그냥 내가 이긴 걸로 할 거야…? 묘렌… 묘렌… 묘렌, 묘렌, 묘렌, 묘렌!!!”

애타는 부름은 곧 절규로, 절규는 눈물이 되어 흘러 내렸다.

“으흑, 으으… 으흐으윽…”

“…”

묘렌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염마가 슬픈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

 

“놀랐어요. 당신이 저를 찾아오실 줄은 몰랐거든요. 게다가 이런 청탁까지….”

“…”

카쿠 세이가는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뱌쿠렌은 그녀의 시비조에 개의치 않고 대화를 이어갔다.

“제 동생은…”

“예. 당신의 동생 히지리 묘렌은 부활할 수 있어요. 당신이 보관해둔 그의 유골로, 약간 뒤틀어서 덧칠한 기억을 가지고 말이죠. 다만 이런 식으로 땜질을 한다고 해도, 천 년 전의 헤이안 시대와 지금은 분명히 차이가 있을 겁니다. 작게는 시대착오로 인한 오해나 세부적인 부분에서의 오차에서 의구심이 일어날 것이고, 크게는 요괴의 습격을 받아 죽은 본래의 기억이 덧칠한 가짜 기억과 혼선을 일으킬 겁니다. 아마 제법 여러 부분에서 삐꺽댈 겁니다. 위화감을 계속해서 느끼다보면 최후에는 거짓 기억이 붕괴될 수도 있겠지요.”

뱌쿠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간은 하루뿐입니다. 정해진 기간은 아닙니다. 염마가 이상을 눈치 채고 움직이기까지, 딱 그 정도의 시간을 유추한 것이죠. 모쪼록, 짧은 시간을 소중히 하시길.”

세이가는 뱌쿠렌을 한 번 흘겨보고는 말을 이었다.

“또한 금기입니다. 도교와 불교를 막론하고, 사자에게 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최악의 금기. 아, 물론 당신이라면…”

“예,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

힘없는 반응. 이미 선을 넘어버린 행위임을 알고 있기에, 뱌쿠렌은 죄인처럼 얌전했다. 하지만 좀 더 자극적인 모습을 보고 싶었던 세이가는 오히려 이런 반응이 불쾌했다. 종교의 우두머리인 그녀가 최악의 금기를 저지르고 있다. 좀 더 활기찬, 분노에 찬, 눈물 어린, 재밌는 반응을 보고 싶었다. 마음 같아선 그녀를 살살 긁어 절규하도록 만들고 싶었지만, 이런 사람에게 조잡한 화술이 통할 리 만무했다. 철저하고 빈틈없는 성격.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신뢰감 깊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기에 이 상황이 더더욱 우습기는 하지만.

“무엇이 당신을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세이가가 물었다.

“사자는 사자일 뿐. 무의미한 집착은 결국 독이 되어 당신에게 돌아올 뿐입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 말을 들은 뱌쿠렌이 입을 열었다.

“제 유년 시절은 암흑뿐이었습니다. 친구를 사귈 정도로 활달하지도 않았고, 동년배들 사이에서도 성격 때문에 따돌림을 당했었으니까요. 그런 저에게, 세상은 감옥이었어요. 눈을 떠도 감옥 안, 눈을 감아도 감옥 안.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저를 달래주던 것은, 그 아이의 순수한 미소뿐이었습니다.”

뱌쿠렌은 사랑스러운 동생의 얼굴을 떠올리고, 약간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저를 바라보며 미소 짓던 그 아이. 제가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그 아이를… 저는 다시 한 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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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사우저배 팬픽대회 (https://blog.naver.com/dofelly) 출품작. (다수 주제 중 '집착'을 선정)

2016년 제 2회 방년소녀탄막제에 합동지 환요몽연기 자권에 수록하기 위해 개작. 

 

남동생 히지리 묘렌을 되살린 히지리 뱌쿠렌의 이야기.

 
사망 당시 60대 노인이었던 묘렌을 젊을 적에 죽은 걸로 묘사했을 뿐더러, 묘렌의 부활에 관해 자잘한 설정을 이것저것 욱여넣어 여러모로 흠이 많다.

그래도 원전의 설정을 비틀었다거나 하는 너절한 변명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게 동방 팬픽의 장점이라면 장점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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