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금발의 유녀는 차분히 술을 따라내렸다. 잔을 받은 사람은 보랏빛 머리를 한 장신의 여성. 그녀는 눈에 안대를 써서 앞이 보이지는 않는 듯 했다.
"흠..."
술을 받은 여성은 천천히 술잔을 들어 코를 한번 대고는, 여유롭게 술을 들이켜 잔을 비웠다.
"현무계곡 맥곡차."
"호오, 좋아."
유녀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뒤이어 다른 술을 따라내렸다.
"이건 어떨까?"
"어디... 흐음?!"
여유롭게 코를 대고 향을 음미하던 여성은, 순간 느껴진 술의 향취에 적잖이 놀란 듯 했다.
"농담이지 이거?"
"냄새로 어떻게 농담을 쳐?"
조용히 웃으며 받아치는 유녀와 달리, 여성의 손이 적잖이 떨려왔다.
"설마..."
여성은 부들대는 손으로, 간신히 술을 받아 넘긴다.
"맙소사..."
여성이 들고 있던 잔이, 손을 타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카라스텐구... 73..계..?"
"캇카카! 맞았어!"
유녀는 박수를 치며 박장대소하였고, 여성은 입이 귀에 걸려 황급히 안대를 벗었다.
"텐구 녀석들, 이번엔 힘 빡주고 보내줬잖아?!"
"그치? 그치? 대박이라니까 이번 가을은!"
좋아라 노래를 부르며 손을 맞잡고 도는 두 신, 모리야 스와코와 야사카 카나코다. 분기마다 매번 보내지는 텐구들과 모리야 신사의 화합을 의미하는 선물, 요괴의 산의 명주들. 계절마다 질 좋은 술이야 여러번 왔었지만, 이번 가을은 특히 귀한 술을 보내왔다.
"저희가 뭔가 좋은 일을 했던가요?"
"몰라. 근데 줬으니까 어떻게 해? 먹어야지!"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무녀, 코치야 사나에. 그녀에 비하면 재앙신이라는 모리야 신의 모습은 마치 신난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당장 마시지. 연회에 내놓기에는 너무 아까워."
"동감이다. 사나에, 너는 어떻게 할래?"
"...저는 괜찮아요."
사나에는 싱긋 웃으며 주는 술을 사양하고, 간단한 주전부리를 차려 신들의 앞에 내려놓았다.
"사나에, 너는..."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두 분도 참, 술만 보면 저렇게 아이처럼..."
좋은 게 좋은 것은 맞다만, 신으로서의 체통 정도는 지키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사나에는 헛웃음을 지었다.
"술이라..."
사나에에게 있어서 술이란 딱히 가까운 존재는 아니었다. 그 무녀라는 위치 때문에 술을 입에 대기는 하되, 자의로 술을 즐기거나 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아니 완전히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연회에서도 잔을 들고 있지 않았다. 잔이 있어도 좀처럼 비는 일은 없었고, 신사에 널브러지는 모습은 물론 없었다. 그녀는 술을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
'아빠 뭐 먹어?'
'맛있는 거. 사나에도 한번 먹어볼래?'
'응!'
그것이 어린 사나에가 접했던 술의 첫 기억이다. 맛은 마치 약을 달여 먹은 것 처럼 씁쓸했고, 또 혀가 데어 달아오르는 듯한 느낌도 났었다. 그 한모금을 삼키자마자 사나에는 불쾌감에 눈물을 지었고, 쿡쿡 웃던 사나에의 아버지는 부인에게 등짝을 얻어 맞았다.
'왜 애한테 술을 먹여요!'
'애가 달라잖아아악! 미안! 미안!'
'아앙-! 맛없어!'
부인에게 구레나룻을 붙잡힌 남편과, 앙앙거리며 울음보를 터뜨리는 꼬마 아이, 그리고 옆에서 웃거나 물을 주던 다른 어른들의, 지금 생각하면 행복하던 유년 시절의 초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나에의 아버지는 술을 좋아했다. 매일 저녁마다 밥에 술을 곁들여 먹고, 술 약속이 있었더라면 사나에에게 신사를 맡겨놓고 외출할 정도로 술을 좋아했다. 그의 행복은 술과 함께하는 것이었고, 사나에도 술에 취해 기분이 좋아진 아버지의 모습이 마냥 기분 좋았다. 그때까지 사나에에게 있어서 술은 아빠를 행복하게 해주는 약 같은 것이었다.
#
'이 개년아!'
시간이 지나 사나에가 교복을 입게 될 무렵, 그녀의 집안 상황은 썩 좋지 못했다. 시대는 더 이상 신을 필요로하지 않았다. 그 변화속에 끼어 무력해지는 것은, 신뿐이 아니라 그를 섬기는 것을 삶으로 하는 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가 능력이 없어서 돈이 안벌리냐? 일이 안 들어오는 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모리야 신사는 더 이상 가족을 위한 수입원이 될 수 없었다. 신주인 아버지를 대신해서 사나에와 그녀의 어머니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분주히 뛰어 다녔으나, 물려받은 길이 신주로서의 길 밖에 없었던 아버지는 다른 길을 걷는 법을 몰랐다. 심적인 압박을 받는 인간은, 자신이 바뀌려 하기 이전에 세상을 원망한다. 돈을 못버는 자신이, 그럼에도 자신을 격려하는 딸과 아내가, 자신을 한량이라 칭하며 멸시하는 세상 사람들이, 그를 더욱 궁지로 몰아 넣었다. 그는 매일 밤마다 술을 마시고, 아내를 화풀이의 대상으로 삼았다.
'밖에서 뭔 소리를 내서 씹것들이 날 보고 지랄을 떨어? 그 새끼들이 나보다 좋아? 어? 그 새끼 자지가 그렇게 좋냐고 이 년아!'
'그만... 제발 그만해요 여보!'
폭력에는 목적도, 이유도 없었다. 단지 이 상황을 부정하고 싶어서, 뭐라도 하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서, 그는 죄없는 아내를 수없이 내려쳤다.
'우으으으으...'
사나에는 그 소리가 너무 싫었다. 왜, 왜 아무 잘못도 없는 어머니를 때리는 걸까. 왜 아닌 걸 알면서도 어머니를 욕하는 걸까. 고함소리, 병 깨지는 소리, 물건 부서지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귀를 쏘는 듯한 그 시끄러운 고함소리로 부터 벗어나서, 차라리 엄마와 함께 도망쳐서 둘이서만 살고 싶다고 느꼈다. 가끔 그 성난 아빠가 문을 차고 들어와 이유없이 따귀를 때린 날 밤에는, 차라리 아빠가 죽었으면 싶다고 느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사나에가 가장 싫어했던 것은, 다음날마다 그들 앞에 무릎 꿇고 사과하던 아빠의 모습이었다. '미안하다, 미안해 사나에. 아빠가 못나서 정말 미안해.' 매번 그렇게 말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뭐가 미안했던 걸까? 엄마를 때렸던 거? 내 머리를 잡아당겼던 거? 미안하다면 처음부터 그러지 말았던 편이 좋지 않았을까?
이 사람의 사고회로는 이미 막혀 있었다. 무엇이 아빠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술이다. 술이 아빠를 바보로 만들었고, 술이 아빠를 괴물로 만들었다. 술만 먹으면 아빠가 우리를 때렸고, 술만 깨면 아빠가 사과했다. 술이다. 술, 술이 아빠를, 엄마를, 우리 가족을 망쳤다.
그런 생각이 들 때 즈음, 그녀는 더 이상 고통받을 필요가 없어졌다.
사나에의 아버지는 어느 겨울, 술에 취한 채로 밤길을 헤메다 얼어 죽었으니까.
#
모두 지난 일이다. 그녀는 이제와서 아버지를 욕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의 어머니는, 환상향에 오기 바로 전날까지도 아버지를 용서해달라는 말을 했으니까.
"사과받아야 할 사람은 엄마였는데..."
사나에는 착잡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사나에."
시간이 어느정도 지나고, 본당에서 스와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스와코님."
벌써 한 상을 비웠나 싶어 사나에가 총총걸음으로 본당에 다다랐을 때, 스와코와 카나코는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사나에를 맞이했다.
"...?"
"가까이 오너라."
차분한 스와코의 목소리에, 사나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천천히 몸을 옮겼다.
"여기, 이거 보이느냐."
"...?"
스와코가 상에 오른 산나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혹여 벌레라도 묻었나 싶은 마음에, 사나에는 그 접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흐흥♡"
"아앗...!"
사나에가 상에 한 눈을 판 사이, 어느새 카나코에 그녀의 등 뒤에 접근해 그녀의 양 팔을 봉인했다.
"카나코님...! 갑자기 무슨?!"
"스와코, 안 다치게 잘해라."
"걱정마셔. 사나에, 여기봐봐."
뒤를 잡은 카나코에게 시선이 팔려 있을 때, 스와코는 어느새 사나에의 눈 앞에 술병을 든 채 사나에의 입을 조준하고 있었다. ...카라스텐구 73계산!
"자, 잠깐만요 스와코님. 저 술은...!"
"이빨 깨지기 싫으면 주둥이 벌리고 있어!"
이빨이 깨진다니, 그것만은 정말 싫었다. 사나에가 얼떨결에 입을 크게 벌리자, 스와코는 만족스런 표정을 집고 병 주둥이를 사나에의 입에 욱여넣었다.
"잠.... 욱...우욱...."
술이, 술이 들어온다. 마시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는데도. 텐구들이 마시고 신들이 마시는 술이다. 먹으면 단번에 취할 것이다. 취하면 기분이 좋아질 것이고, 또 난폭해질 것이다. 마치 아버지가 그랬던 것 처럼.
"읍... 푸하아! 퉤 퉤!"
사나에는 얼굴을 틀어 간신히 병주둥이를 입에서 뗄 수 있었다. 그 과정에 아까운 명주가 적잖이 바닥에 버려지기는 했지만, 사나에가 마신 양은 그것보다 훨씬 많았다.
"아~ 아까운 술이 다 쏟아져버렸네."
"뭐, 뭔가요, 갑자기! 사람을 붙잡고 술을!"
"어땠니 사나에?"
"어땠냐니..."
사나에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입가에 묻은 술을 닦았다.
"씁쓸하고, 얼굴도 뜨끈뜨끈거리고..."
"취한 꼴로 주먹을 휘두르던 아비 생각도 나지?"
"...!"
전혀 예상치 못한 스와코의 말에, 사나에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다.
"우리는 네가 태어나는 모습, 더는 네 아비가 태어나는 모습도 봤다. 그 녀석이 너를 어떻게 키웠고, 또 어떻게 끝맺었는지도."
스와코가 사나에의 볼을 쓰다듬었다.
"네 아비는 제 나름대로 노력하는 녀석이었어, 신사를 부흥시키려고 신발이 닳도록 뛰어다니기도 했고, 어느 신주들 중에서도 우리와 가장 가깝게 지냈지. 결국 술에 먹혀 우리를 볼 수 조차 없게 되어 버리긴 했지만."
"..."
"사나에, 너는 아직도 술이, 아비가 무섭지?"
스와코의 질문에 사나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와코는 사나에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곤, 말을 이었다.
"술은 인간과 가장 오랜 시간을 동반한 유흥거리다. 아픔을 잊으려고, 즐거워지고 싶어서, 유대를 확인하기 위해, 우리들을 기리기 위해, 인간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술을 즐겨왔지. 거기서 네 아비가 선택한 길은, 결국 술을 통해 모든 것을 잊는 길이었다."
스와코의 목소리는 사뭇 진지했다.
"두려워하고 싶으면 두려워하고, 싫으면 받지 않아도 좋다. 다만 이것만은 알아두거라. 인간을 파멸시키는 것은 술이 아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술에 의존하려는 마음가짐에 잘못이 있을 뿐."
"..."
"알겠느냐?"
"네..."
사나에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와코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카캇. 좋구나. 한잔 받을테냐?"
"네, 기꺼이..."
자신의 잔이 없음을 깨닫고 자리를 일어서려는 사나에에게, 스와코가 자신의 잔을 빌려준다.
잔이 아래에 향하고, 그 위에 술이 따라진다.
사나에는 고개를 돌리고 입을 가려, 천천히 술을 넘겼다.
"써..."
약이라도 달여 마신 듯 씁쓸하고, 혀가 데이기라도 한 듯 뜨끈뜨끈거렸다.
아버지가 따라주셨던 그 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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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17일 동방 타임어택 팬픽대회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touhou&no=3724887) 출품작.
타임어택 팬픽대회는 말그대로 타임어택.
짧은 시간 안에 슥슥 써내는 재미가 있다.
설정이 잡히지 않은 사나에의 유년시절을 배경으로 잡고, 주제인 술을 신과 인간의 관점에서 풀어내고자 했다.
쓰는 동안 밋밋한 느낌이었지만 완성하고 보니 나름 깔끔한 맛.
아마 이때부터 글의 호흡을 생각했던 것 같다.
글이 너무 무거우면 읽는 사람도 지치고, 너무 가볍다면 몰입하기 힘들다.
가볍고 유쾌하되 속내용은 무겁게 잡고자 했다.
다만 사나에 아버지 입에서 나오는 욕은 지금 보기엔 민망한 수준이다.
글로 쓸 때는 욕도 곱게 뱉어야 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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