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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팬픽

내 얘기를 들어라 (2020.8.29)

 

 

 

- 허허, 이 잡것들을 좀 보라.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왔단 말이냐?

 

- 아이고 무섭다. 눈 감으면 코 깨물어가겠네. 누가 들으면 그 쪽이 늑대령인줄 알겠소.

 

- 네놈들이 우리 등짝에 칼침 놓은 걸 어찌 잊겠느냐? 오냐, 원수들이 보기 좋게 모여 있구나. 싸그리 목을 따다 킷초 두령께 바쳐야겠다.

 

- 아 그만하슈. 늙다리 수달도 애꾸 반장도 진정하슈. 저 장지문 너머에 두 두령이 회담 중인걸 잊으셨는가? 어찌 목소리가 두령들보다 크단 말이오?

 

- 아가 말 잘했다. 저 늙다리가 다 부러진 이빨로 으르렁거리니 내가 웃겨서 날뛰었구나.

 

- 아 근데 저 애꾸 놈이?

 

- 고만하라 안혀유. 참, 어째 두 분은 보기만 해도 못 죽여서 안달이슈?

 

- 왜기는, 너희 늑대 놈들이 우리 킷초 두령을 배신하지 않았느냐.

 

- 그건 또 뭔소리유? 배신은 무슨 배신?

 

- 이 놈 보라. 곱상하다 싶더니만 아무것도 모르는 핏덩이구나. 네가 이런 자리에 낄 깜냥이더냐? 늑대령에 쓸만한 놈이 없다더니 그 말이 참말이다.

 

- 아 뭔 배신이냐 물었슈!

 

- 아 고놈 기는 세다. 그래 좋다. 배신이 뭔 배신이냐. 이 핏덩이놈아. 그건 네가 네 아비 불알주머니에도 없던 시절, 네 두령인 검정말이 우리 킷초 두령을 배신했던 이야기다. 그래, 내 얘기를 한 번 들어봐라.

 

 

 

# 늙은 수달령의 기억

 

 

이 몸이 늙은 수달령이시다. 들어라. 어르신으로 말할 거 같으면 천년에 천년을 더해 이천년간 킷초 님을 모셔온 노장중의 노장이다. 내 위로 킷초 님이 계시고 아래로는 핏덩이 뿐이니 내가 축생계의 역사가 아니고 뭐겠느냐? 이 어르신은 모든 걸 기억하고 있다. 그래, 저 쿠로코마가 막 죽어서 축생계로 떨어졌을 때의 일도 말이다.

 

니들이 죽어서 축생계에 떨어진 날을 기억하느냐? 염마가 작대기를 휘두르니 지옥의 아가리로 떨어졌지. 쿠로코마도 그랬다. 꼴에 영물이라고 인간의 모습으로 축생계로 떨어졌지만, 말대가리라 그런지 몰라 어린 나이에 떨어져서 그런지 몰라, 쿠로코마는 수저도 제대로 못 들 작디작은 계집의 모습으로 지옥에 떨어졌다. 흙바닥을 엉금엉금 기며 ‘태자님, 태자님’ 거리던 그 깜찍한 모습을,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구나.

 

고년은 이 어르신이나 킷초 두령은 안중에도 없었다. 제가 죽은 줄도 모르고 계속 옛 주인만 찾았지. 인간이었다면 망부석이 되어 죽었을 게다. 그 모습이 가여웠는지, 우리 자비로우신 킷초 두령님께서 쿠로코마를 쓰다듬더라. 이제 괜찮다. 아가, 육신이 명을 다하여 이 곳에 왔는데 네가 어딜 가겠느냐? 생전의 기억을 잊고 죽어서도 서로 칼을 맞대니, 여기가 지옥이다. 우리가 널 품는다. 그렇게 두령께서 쿠로코마를 거뒀다. 그 인자한 목소리에 이 늙은이도 눈물이 찔끔 흘렀다. 지옥에 부처님이 있으니 웬 말이냐. 그런데, 이 쿠로코마 년이 은혜를 갚지는 못할망정 두령의 등에 칼침을 놓았다 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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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고 난리 났다. 누가 부처야? 거북이 등껍질을 싸맨 구렁이 년이지. 다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것들이 뭔 부처를 찾고 자빠졌어?

 

- 저, 저 버르장머리 없는 애꾸 놈이! 이 놈아, 네 남은 눈깔 한 쪽까지 뽑아 봉사를 만들어주랴!

 

- 늙다리가 노망이 났구나. 이 눈은 죽기 전에 남긴 명예로운 상처다. 육신은 이미 죽어 없는데, 어째, 영혼의 눈이라도 뽑아보려고?

 

- 저저, 저놈!

 

- 아, 애꾸 반장님 왜 이러기요! 잘 듣고 있는데 왜 초를 치고 그러슈?

 

- 이 놈 말하는 것 좀 보게. 욘석아. 네가 저 늙은 너구리에게 홀리는 게 갑갑해서 그런다. 저 썩은 아가리에서 나오는 게 말이 아니라 방귀다. 부처가 어째? 원, 킷초 만큼 악랄한 년은 내가 죽어서도 본적이 없다. 내 얘기를 들어보아라.

 

 

 

# 애꾸눈 늑대령의 기억

 

 

내가 애꾸눈 늑대령이시다. 짐승들이 서로를 물어뜯고 갈갈이 날뛰는 이 축생계에 구석다리에서 숱한 맹수령을 물리친 역전의 용사요, 쿠로코마 님께 거두어지기 전까지 늑대령의 우두머리였던 몸이시다. 내 눈 한쪽이 없어 사나워 보일지는 몰라도 도를 알고 의리를 아는 협객이니, 극도는 곧 이 몸을 칭하는 말이다. 동포들아 떠올려라. 킷초가 수달령들을 거느리고 우리 늑대령들을 가둬뒀던 때의 기억 말이다.

 

그 때 우리에겐 주인이 없었다. 킷초는 뭇 맹수령들을 지옥 구덩이에 가둬놓고, 매일같이 수조의 물고기마냥 관상하는 걸 낙으로 삼았지. 오직 수달령만 킷초에게 간택 받아 그 옆에 붙어먹었다. 재수 없는 놈들. 킷초는 그날도 핏기 없는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점이 있다면, 그 킷초년의 치맛자락을 꼬옥 잡고 늘어진 어린 두령님의 존재다. 아, 어찌 잊을쏘냐! 늑대 이빨이 두려워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그 깜찍하던 시절의 두령님을! 왜소한 몸이지만 그 몸이 발하는 풍채는 숨길 수 없었다. 저 분이야말로 장차 우리를 이끌어줄 위인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킷초는, 그 피도 눈물도 없는 년은, 애원하는 두령님을 그 맹수 구덩이에 처박았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죄도 없는 쿠로코마 님이 엉엉 울면서 비는데도 꿈쩍하지 않았지. 저 년은 피가 아니라 독이 흐르고 있구나 싶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지옥에서는 죽을 일이 없으니 안심하라. 축생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누구보다도 강해져야 한다나? 지랄 났다. 지가 무슨 어미사자인감? 사자도 이 지옥 아가리를 보면 도망칠 텐데. 그렇게 아등바등 버티던 쿠로코마 님이 구덩이로 떨어지니, 맹수령들이 그 분을 향해 달려들더란 것이다.

 

곰대가리에 살쾡이, 평소에 찌그러져 있던 족제비령까지 신나서 덤벼들더라. 이놈들, 이놈들. 니들은 자식도 없느냐. 지옥의 구덩이에 쳐 박혀서 도의마저 잊은 것이냐. 고통에 몸부림치다 기절한 쿠로코마 님을 나와 내 동포들이 지켰다. 그 어린 젖먹이를 우리 힘으로 키우려 했다! 염병, 그 다음날 킷초 년이 쿠로코마 님을 데리러 오지만 않았더라도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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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그리 악독한 짓을 저질러 놓고도 킷초 년이 부처 같아 보이느냐? 입이 있거든 말해 보거라!

 

- 거 애꾸 양반, 그 쯤 하시오.

 

- 넌 또 무엇이냐? 그래, 그 구렁이 년 옆에 붙어먹던 벙어리 놈이로구나. 어쩐 일로 네 입이 움직이더냐?

 

- 나는 말주변이 없지만, 주인 욕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바보는 아니라오. 애꾸 양반은 어찌 그리 생각이 짧소?

 

- 그게 무슨 소리냐?

 

- 킷초 두령은 쿠로코마를 강하게 키우려 일부러 그런 짓을 한 거요. 애꾸 양반 입으로 그러지 않았소? 사자도 자식을 절벽에서 떨어뜨리는 법이오.

 

- 아이고, 니 자식 놈이나 그렇게 해줘라. 강하게 키우긴 개뿔이? 하룻밤 꼬박 기절해 있다가 두레박에 끌려 올라간 게 전부다. 그 년이 우리 두령을 가지고 논 거야. 아마 킷초 그 년은 두레박을 내리기 전까지 절벽 위에서 쿠로코마 님이 도망 다니는 걸 보면서 낄낄댔을 게다.

 

- 참으로 갑갑하오. 애꾸 양반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오. 킷초 두령은 쿠로코마를 제 자식처럼 아꼈단 말이오. 내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시오.

 

 

 

# 묵묵한 수달령의 기억

 

 

나는 묵묵한 수달령이오. 내 말주변이 없어 벙어리 소리를 듣지마는, 킷초 님께서는 침묵이 금이라 하여 나를 항상 곁에 두셨소. 나는 킷초 님의 은혜에 답하고자 우직하게 그 곁을 지켰소만, 애꾸 양반의 작태를 보고 있자니 참을 수 없어 입을 여는 거요. 나는 낮이나 밤이나 킷초 님 곁을 지켰기에 댁들보다 속사정은 잘 알고 있소. 그래, 그건 쿠로코마가 귀걸조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던 밤이었소.

 

그날도 하루 업무를 마치신 킷초 님께서 날 거느리고 밤산책을 하고 있었소. 산책이라고 해도 귀걸조 숙소 내부를 둘러볼 뿐이지만, 그렇게 귀걸조 가족들이 자는 모습을 보고 난 후에야 자신도 편히 잠이 드신다 하오. 그런데 그날은 수달령 가족들의 숨소리 사이에 귀에 걸리는 소리가 하나 섞여있지 않겠소? 뭐겠소. 그 쿠로코마가 또 태자라는 옛 주인을 잊지 못하고 울고 있던 거요. 킷초님은 문 앞에 서서 한숨을 푹 쉬었소. 가엾다. 저 어린 망아지가 아직도 옛 주인을 못 잊고 구슬피 우는 구나. 밖에서 기다리거라. 내 저 아이에게서 옛 주인을 잊게 해주마. 들여다보진 말아라.

 

한 시진을 기다리니 킷초 님이 방을 나오셨소. 문 안을 들여다보니 쿠로코마는 새근새근 자고 있었지. 내 충의가 있어 방 안을 훔쳐보진 않았소만, 분명 킷초 님은 어린 쿠로코마를 달래고 있었을 거요. 그 후로도 밤마다 우는 소리가 들리면 킷초 님이 쿠로코마의 침소를 찾아 달래주곤 하셨으니, 이게 애정이 아니고 뭐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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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따 저 놈이 즈그 주인을 감싸려다 제 발에 넘어져 부렀어야. 킷초가 입 닫고 살라 한 이유를 알겄다.

 

- 이 지저분한 목소리는 또 누구요?

 

- 이 놈 보소? 즈그 원수의 목소리도 까먹어부렀어?

 

- 누군가 했더니 늑대령 중에서도 유독 지저분한 작자 아니오. 그래, 내 무슨 말실수를 했다는 거요?

 

- 킷초가 밤마다 쿠로코마 님의 침소에 들어섰다 하지 않았냐잉. 침대에 사람이 둘인데 염병 옛날이야기나 들려줬으까?

 

- 그럼 그것 말고 또 뭐가 있소?

 

- 아따 이놈아. 뭐기는, 허리는 안 써? 밤마다 침실을 들락날락거리면 그거 말고 뭐가 있당가?

 

- 아무리 킷초 님이라도 어린 아이에게 손을 댔겠소? 거 참 남사스럽구려.

 

- 그쯤 해라 이놈아.

 

- 엄메? 애꾸 성님도 보태기요? 거 성님도 알잖수. 저 킷초 년은 사슴 비슷한 것만 봐도 발정 나서 달라붙는당께?

 

- 대꾸할 필요도 없소.

 

- 미안하다. 이 놈이 생전에 죄질이 구려서 입이 걸기로는 나보다 더하다. 그래도 의리 하나는 좋은 녀석이니 용서해라.

 

- 어허 참, 성님두?

 

- 헌데 아재들, 얘기가 다른 길로 새지 않았수? 쿠로코마 두령이 킷초 두령을 배신했다는 이야기는 언제쯤 나오는 거유? 쿠로코마 두령 어릴 적 이야기만 하다 날 새겄슈.

 

- 아따 그 놈 보채기는 겁나게 보채부러. 그랴, 그럼 나가 이야기해줄랑께. 나그의 말을 들어보라.

 

 

 

# 양아치 늑대령의 기억

 

 

나그가 양아치 늑대령이어라. 나가 비록 배움이 짧아가 입이 걸고 난봉꾼 소리를 듣지마는, 용맹하기로는 경아조에서도 애꾸 성님 바로 다음이랑께. 말해두겄는디, 나는 쿠로코마 두령님의 어릴 짝 같은 건 몰라라. 디져븐지 천 년도 안됐어야. 나가 축생계에 떨어졌을 때는 이미 쿠로코마 두령님이 귀걸조의 간부가 되어 늑대령들을 이끌고 있었제. 헌데 그 시절 늑대령들은 귀걸조의 가족이라 카믄서도 가족 대접을 못 받고 있었당께. 말이 좋아 가족이지 시방 고기방패에 재떨이였어야. 쿠로코마 님만 없었어도 진즉 뛰쳐나갔제잉. 그 때만 떠올리면 나가 상처가 욱신거려 잠을 못 이뤄야!

 

고거이 천년 전이당가? 팔백년 전이었당가? 허튼 옛 적에 귀걸조가 강욕동맹 넘들헌티 제대로 밟힌 적이 있어라. 수달령 늑대령 할 거 없이 도철놈헌티 잡혀가구 킷초도 쿠로코마 두령도 목만 딸랑 붙어서 돌아왔당께. 킷초는 갈갈이 날뛰었제. 늑대령을 싸그리 불러다가 엄포를 놓는 기여. 시방 우덜 늑대령이 무능해서 박살이 났디야? 즈그가 작전을 잘못짜가 이 모양이 된 거제. 얼굴이 시뻘개져 가지고 우덜을 싸그리 묻어버릴라 하는디, 거서 쿠로코마 두령이 킷초 앞을 따악 막아섰지라. 아 들이 무슨 죄가 있소? 지가 그 벌을 다 받을 테니 우리 아 들은 건들지 마소. 하셨지라. 우리 두령님이지만 참말로 멋져부러. 이만하믄 킷초 년도 화를 삭힐만 했제? 미친년. 그 말을 듣더니 얼굴이 더 시뻘개져서 쿠로코마 두령한테 채찍질 해부러야. 내가 니 가족이다. 내가 니 가족이다. 저 똥개새끼들이 아니라 내가 니 가족이다. 하믄서 쿠로코마 두령을 치는디, 엄메, 한 번은 봐도 두 번은 못 보겠다는 거 아니여.

 

아 그만하소. 그만하소. 이미 죽은 우리 성님 매 맞다가 또 죽겄소! 죄도 없는디 왜 사람을 잡는디요? 죄가 있으믄 쿠로코마 성님이 아니라 우덜을 매질하소! 입이 부르트게 말려도 말을 안 들어. 쿠로코마 성님이 쓰러져서 간신히 숨만 헐떡이니 그제야 채찍을 거두었지라. 눈물이 왈칵 쏟아져도 사람 살리는 게 먼저 아니여? 나가 서둘러 쿠로코마 두령님을 들쳐 업었제. 성님 왜 그러셨소. 성님이 뭔 잘못을 해서 모난 놈들 죄를 대신 받는단 말이요? 그러니 숨만 붙어있던 우리 두령님, 입술을 오물오물하믄서, 내가 너희들 덕에 이 자리에 올랐는데 어찌 너희를 탓하겠느냐? 울지 말어라. 너희가 내 가족이다. 하는 기여. 크으. 참말로. 그때만 생각하면 나가 눈물이 흘러 어쩔 줄을 몰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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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때 깨달았지라. 우덜이 섬겨야 할 것은 저 킷초 년이 아니라 쿠로코마 두령님이란 거슬.

 

- 옳다구나. 너 말 잘했다. 밥 먹고 칼침 놓는 것 밖에 모르는 줄 알았더니 다시 봤구나.

 

- 거시기 애꾸 성님은 어째 이리 칭찬에 야박하쇼잉?

 

- 네 말 덕에 아주 잘 기억났다. 그래, 그 미친년이 본보기랍시고 쿠로코마 두령을 채찍에서 피가 뚝뚝 떨어질 때까지 매질했지.

 

- 잘못을 지었으면 값을 치러야 하는 거 아니오? 쿠로코마가 당신네 죗값을 대신 받은 거요.

 

- 그럼 가족이라는 말을 삼가야지, 뉘 집에서 아들딸을 매질하며 키우느냐? 벙어리가 그렇게 키우더냐, 늙다리가 그렇게 키우더냐?

 

- 아니 근데 저 놈이?

 

- 거 어르신 제가 말하지 않았심꺼. 점마 늑대령 놈들은 양심에도 털이 났심더.

 

- 아이고, 이 숨이 턱 막히는 목소리는 또 누구 거냐?

 

- 마 애꾸 아재 쫌 보소. 내 누군지 모르심꺼?

 

- 오라, 살이 잔뜩 오른 땀 많은 수달놈이로구나. 거 참, 늑대령에 인물 없다던 늙다리 수달령은 어딜 갔나? 수달령은 인물이 많아서 저런 놈을 데려왔나 보구나.

 

- 와예? 지가 무슨 문제라도 있십니꺼?

 

- 왜기는 이 놈아. 네 놈이 곁에만 있어도 땀 때문에 방이 후덥지근해진다. 거 밖에서 바람 좀 쐬고 와라.

 

- 어허, 저 애꾸 놈. 야, 야 이놈아. 다른 놈은 몰라도 네가 이 녀석을 욕하면 쓰겠느냐? 저런 도리 없는 놈을 보았나. 이 놈이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 아, 그래. 그 말도 맞다. 내 말이 지나쳤구나.

 

- 고마 됐심더. 엎드려 절 받기 아닙니꺼.

 

- 거 미안하대도?

 

- 왠일이유? 살다 살다 애꾸 반장님이 고개 숙이는 모습도 다 보는구만유.

 

- 그럴만한 일이 좀 있다.

 

- 아니 뭔 일이 있었길래? 애꾸 반장이 저 아재비 땀샘이라도 따줬슈?

 

- 어험, 고놈 참.

 

- 애꾸 아재도 민망해가 말을 모다는 기라. 죄가 많다 안하나. 알았다. 아야 내 말 들어 본나. 내 대신 이야기 해주께.

 

 

 

# 땀 많은 수달령의 기억

 

 

내 땀 많은 수달령이라 안하나. 한겨울에도 땀이 삐작삐작 흘러가 땀 많은 수달령이라 불리는 기다. 근데 내는 원래 이런 체질은 아니었다. 점마 저 쿠로코마 년 때문에 이렇게 됐다 아이가. 맞다, 내 똑또기 기억한다. 쿠로코마 년이 우리 귀걸조를 배신했던 날을 말하는 기다.

 

점마 양아치 늑대가 말한 날로부터 쫌 더 된 이야기다. 그때도 도철과 축생계의 사활을 걸고 다투던 날이었제. 킷초 두령은 쿠로코마를 시켜가 도철의 뒤를 치도록 명령을 내맀다. 내는 킷초 두령 옆에 딱 붙어가 그 곁을 지키고 있었다. 도철이랑 떡하니 마주보고 서로 아 들을 세워만 두면, 쿠로코마가 늑대놈들을 이끌고 도철이 뒤를 치기로 했다 안하나. 그런데 아무리 전투가 계속 되어도 쿠로코마의 소식은 들리지 않드라꼬. 고개를 돌려보니 우리 귀걸조의 보금자리에서 싯꺼먼 연기가 올라오는 거 아이가. 그때 따악 삔또가 잡히대. 아야, 조때따. 쿠로코마 점마가 기어이 우리를 배신했구마. 이가 갈려도 난리가 났는데 일단 살고 봐야 하지 않겠나. 등 뒤에선 불길이 올라오고, 눈앞에는 참수리령들이 부리를 딱딱거리는데, 우야노 우야노. 킷초 두령, 이러다 다 죽겠심더. 마 유령이라 죽지는 않겠지마는, 도철한테 사로잡히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심더. 이 우야면 좋겠십니꺼? 눈앞의 도철을 쳐야겠소, 아니믄 등 뒤의 쿠로코마를 쳐야겠소?

 

그래 캤더마, 이 참, 이기 또 어이없는 기라. 누구는 눈물 줄줄 흘리면서 발을 동동 구르는디, 킷초 두령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웃고만 있는 기라. 내 킷초 두령이 그렇게 괄괄하게 웃는 모습은 처음 봤다 아이가. 아따 킷초 두령, 대체 뭐 그리 즐겁십니꺼? 이게 또 작전이면 숨기지 말고 내도 귀띔 좀 주이소. 내가 이리 애걸복걸을 해도, 킷초 두령은 정신 나간 사람마냥 주욱 웃던 기라. 그렇게 한참을 웃고 나서 후퇴를 명하니, 어떻게 잘 살아가 귀걸조는 건재했지마는, 내는 아직도 그날 킷초 님이 웃은 이유를 모린다는 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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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킷초 그 년이 실성을 한 거지. 그렇게 늑대령들을 개풀 취급 하더니만 꼴좋구나.

 

- 애꾸 이 놈. 말 좀 곱게 해라. 두령이 실성을 했어도 그게 배신한 쿠로코마 탓이 아니겠느냐?

 

- 시방 그게 왜 두령님 잘못이여? 우덜 쿠로코마 두령을 박대한 응보를 치룬 거 아녀?

 

- 이 끌베이 새끼 모다는 말이 읎다. 내는 그 때만 떠올리모 지금도 땀이 줄줄 샌다!

 

- 거 다들 독이 잔뜩 올랐소. 진정들 하시오.

 

- 이 난장판에 나랑 비슷한 사람이 벙어리 수달령 아재비 밖에 없다니, 가슴이 아프구먼유.

 

- 동자가 하면 안 될 말을 했기 때문이오. 킷초 두령과 쿠로코마의 옛날이야기를 꺼내면 항상 이렇게 끝이 난다오.

 

- 참, 아재비들 말만 들어보면 킷초 두령과 쿠로코마 두령이 불구대천의 원수 같구먼유.

 

- 실제로도 그렇지 않소?

 

- 글씨, 지는 잘 모르겠구먼유. 꼭 사이가 나빠 보이지는 않았는디.

 

- 그건 무슨 소리요?

 

- 지도 본 게 있으니 이런 말을 하지 않겠슈. 그럼 이번엔 지가 이야기 해보겠구먼유. 아재비들 모두 들어보슈.

 

 

 

# 어린 늑대령의 기억

 

 

지는 어린 늑대령이구먼유. 거 늙은 수달 아재비 말마따나 이런 자리에 낄 껌녕도 안되고 성님들한테도 구박받는 몸이지마는, 저두 눈이 있고 귀가 있으니 보고들은 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있지 않겄슈. 어르신들은 킷초 두령과 쿠로코마 두령이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양 이를 갈지만, 제가 본 건 꼭 그렇지 않더라는 거유. 그건 얼마 전, 평소와 같은 칠흑 같은 밤이었슈.

 

지는 아직 죽은 지 얼마 안 된지라 생전의 버릇이 남아있구먼유. 밤이면 갑갑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잠자리를 빠져나와 축생계를 걸어 다니는 게 제 낙이어유. 그날두 별 하나 없는 축생계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적적한 마음을 달래고 있었는디, 멀리서 두 아녀자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리는 게 아니겄슈? 지가 슬금슬금 걸어가 보니, 아 글쎄 쿠로코마 두령이 킷초 두령과 나란히 앉아서 깔깔 웃고 있지 뭐유. 거 평소에는 서로 못 죽여 안달인 분들이 무슨 이야기를 그리 즐겁게 하나, 지가 호기심이 동해서 몰래 구경했쥬.

 

경아조의 들짐승들은 잘 지냅니까? 걱정말라. 너 걷다가 마주치기만 해도 얼굴 뜯어버릴라 한다. 그럼 귀걸조의 물짐승들도 잘 지내는가? 아 걱정만 하세요. 당신 잡히면 그날이 말고기 잔치하는 날입니다. 뭔 농담 같지도 않은 살벌한 말을 나누고 있지 않겄슈. 그렇게 말하면서도 서로 얼굴만 보면 깔깔대는 게 참 신기하단 거유.

 

그렇게 시답잖은 농을 나누다가, 킷초 두령이 말을 꺼냈슈. 사키, 아가야. 다시 내 품으로 돌아오지 않겠느냐. 네가 너무 그립다. 그렇게 말하는 킷초 두령의 눈빛이 아련하드란 거유. 허니 쿠로코마 두령이, 나도 그립다. 매 맞던 기억도, 품 안에 졸던 기억도 모두 좋은 추억이다마는, 도망간 말이 어찌 마굿간을 찾겠느냐. 두고 봐라. 나는 언젠가 이 별 하나 없는 축생계를 떠나 태자님의 빈소를 찾겠다. 나 뿐 아니라 내 가족들도 같이 말이다. 킷초 너도 가겠느냐? 하는 거유.

 

물론 킷초 두령은 손사래를 저었슈. 두 두령의 대화도 다시 쓰잘데 없는 이야기로 되돌아왔지마는, 저는 그날 쿠로코마 두령과 킷초 두령의 표정을 잊지 못혀유. 두 두령님 얼굴이 참 훤해서, 마치 죽기 전 밤하늘에 보았던 별들 같더라는 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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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가 네가 헛것을 본 게 아니더냐. 킷초 두령께서 쿠로코마 년과 밀회를 가졌다니 말이 안 되는 구나.

 

- 늙은이 말이 맞다. 네가 잘못 본 게 아니냐? 정녕 쿠로코마 두령이 킷초와 행복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단 말이냐?

 

- 참말이라니까유.

 

- 점마 눈까리가 삔 거 아이가?

 

- 지가 어리긴 어려두 두 눈 두 귀 모두 멀쩡한디 무슨 말을 그리 하슈?

 

- 쿠로코마가 배신한 이후로 킷초 두령은 환하게 웃은 적이 없소. 동자가 잘못 본 거요.

 

- 아문, 그라제. 우리 두령님 킷초 얘기만 나오면 칼침 넣고 싶어 손을 바들바들 떤당께.

 

- 거 참, 듣고도 믿질 못하겠구나. 그럼 두 두령이 서로 보기만 하면 이를 갈던 게 다 거짓이란 말이냐.

 

- 뭐 서로 치고 박고 싸우지마는 싫어하진 않는다. 이런 건 안 돼유?

 

- 그런 사이도 있다면 있겠소만,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구려. 킷초 두령도 항상 쿠로코마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으니 말이오.

 

- 어쩌면 저희가 붙어 있으니 일부러 기싸움을 한 걸지도 몰러유.

 

- 옳아. 우리가 보는 앞에서만 투닥거린다는 말이로구나.

 

- 뭐시여? 허믄 저그 문짝 너머에서는 서로 부대끼고 재미보고 있다는 거 아녀?

 

- 허어, 이 장지문 뒤에서 말이냐?

 

- 애꾸 반장님, 침 넘어가는 소리가 예까지 들려유.

 

- 어허 이 놈! 조용히 있어라. 그, 커흠! 내 잠깐 저 문 너머를 확인 해 보마. 우리 쿠로코마 두령이 걱정 되어 그런다.

 

- 저 애꾸 놈 보게? 인석아, 자리 좀 내봐라.

 

- 이 아재 좀 보소. 평소에는 점잔 빼더니만 궁금하긴 궁금한갑다.

 

- 거 조용히 하라. 살짝만 확인해본다 하지 않았느냐.

 

- 어째, 뭐가 좀 보이슈?

 

- 늙은 양반, 애꾸 성님. 어찌 둘 다 말이 없어졌당가?

 

- 가만 있어라, 이 틈이 작아서 안 쪽이 잘 안 보이는구나. 내 좀 더, 아이쿠야!

 

- 애꾸 반장님, 괜찮어유?!

 

- 두 번 다시 안 찾아올 줄 알아, 미친년!

 

- 엄메, 쿠로코마 두령님 아니어라?

 

- 쿠로코마 이 문디 가스나야! 니 저 문짝이 얼마짜린 줄 알고 뽀사뿌노? 미닫이는 옆으로 미는 거 모리나!

 

- 아 시끄러워! 얘들아, 가자 가! 으휴, 내가 미쳤지!

 

- 쿠로코마 두령님, 안에서 뭔 일 있었슈?

 

- 시끄럽대도!

 

- 또 오세요, 사키. 언제든 환영입니다.

 

- 꺼져!

 

- 킷초 님, 쿠로코마랑 싸우셨습니까?

 

- 비밀입니다.

 

- 아따 우리 두령님, 안짝에서 킷초랑 즐거운 시간을 보낸 모양이요잉?

 

- 이게 미쳤나?

 

- 아이고 나 죽네! 두령, 나가 잘못했시요!

 

- 뭔 일이 있었어도 말을 해야 알지.

 

- 그러게 말이에유. 참 별일도 다 있네유.

 

 

 

<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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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짭알못 팬픽대회 출품작.

(gall.dcinside.com/board/view/?id=touhou&no=7608753)

주제 - 애증

 

킷초와 쿠로코마의 과거를 두고 수달령과 늑대령이 실랑이를 벌이는 팬픽이다.

 

글을 쓰며 가장 재미있는 건 인물과 인물간의 상호작용이고, 그걸 나타내는 것은 인물의 대사다.

그렇다면 아예 대사만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를 써보는 건 어떨까.

'내 얘기를 들어라'는 그런 생각에서 비롯된 팬픽이다.

 

꽤 재밌는 모양새가 나오긴 했지만 단점도 명확했다.

각 지방의 방언에 대한 이해도 부족, 상황을 표현할 수단이 부족하다는 한계 등등.

'고작 팬픽'이라는 생각을 하기엔, 아직도 갈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