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선정성 및 폭력성이 다소 포함되어 있습니다. 심하지 않으니 그냥 봐도 됩니다.
*일부 원작과 다른 설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1-
“저기, 있지, 메리.”
일본의 교토 대학에 재학 중인 어느 겨울, 여느 때처럼 시작은 렌코의 한 마디였다.
“혹시 ‘환상향(幻想鄕)’이라고 들어봤어?”
“환상... 향?”
환상향이라니, 혹시 렌코가 만든 합성어일까? 지금 같은 몽위과학세기에 환상향이라니... 분명 우리 서클이 숨겨진 결계를 찾는 등 비과학적인 서클이라곤 하지만 지금 같은 시기에 ‘향’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큰 결계나 미지(未知)를 찾는 건 좀 어렵지 않을까 싶은데.
응, 그러니까 그게 말이지─, 라며 옆 자리에 아무렇게나 던져 둔 숄더백에서 작은 공책을 꺼내는 렌코. 나는 대학구 내의 카페에서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팝송을 들으며 그 모습을 잠자코 보고 있었다.
“그렇지. 이거야, 이거.”
렌코는 과할 정도로 호들갑을 떨며 들고 있던 공책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니까, ......이게 뭐야?”
음, 글쎄.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 반응은 정말이지 평범한 여대생다운 반응이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평범한 여대생은 아니지만.
아무튼 렌코의 공책에 적혀있는 것은 평범한 여대생이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들이었다.
-환상향(幻想鄕)
-잊혀진 꿈과 환상이 모이는 낙원
-최근 실종된 학생들이 관련되어 있을지도?
-아무래도 사회적으로도 제법 알려진 것 같다
-향정신성 물질이라고 하는데... 글쎄?
“보면 모르겠어? 내가 조사한 환상향이야.”
“아니, 그 정도는 보면 알 수 있는데.”
마치 수수께끼 퍼즐이나 스무고개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말들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렌코는 이런 내 반응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나는 거의 다 식은 핫초코를 한 모금 입으로 넘겼다.
“어딘가 지역명이 아니었어? 그보다 최근 실종된 학생이라거나, 향정신성 물질이라는 부분은 전혀 이해가 안 가는 걸?”
“음. 확실히, 그건 나도 조사하다가 깜짝 놀랐었으니까.”
렌코는 말하던 도중 갑자기 스마트 폰을 꺼내 패드를 톡톡, 두들기더니 어느 사이트에 접속해서 내게 보여주었다.
“이른바 대학생들 간의 커뮤니티라는 거지.”
어째서 이겼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갑자기 의기양양한 얼굴을 한 렌코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스마트 폰의 패드를 조작하더니 이내 어느 게시판에서 손을 멈췄다.
아무래도 환상향이라는 이름으로 검색을 한 것 같은데... 겨우 그 정도로 기고만장하기는.
나는 렌코에게서 스마트 폰을 받아 게시판에 올라온 글 몇 개를 클릭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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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환상향이라는 게 뭔가요?
글쓴이: 유동게 조회: 67 댓글: 5개
친구가 하도 환상향 환상향 노래를 불러서 처음엔 술이나 어디 바 이름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네요.
일단 먹는 게 맞긴 한가요? 비싼 거예요?
52.731***: 어린 애는 아직 몰라도 돼
포도웰치스: 님 혹시 파오후?
83.032***: 뚜방뚜방
24.721***: 야; 그거 하지 마 내 친구 그거하고 완전히 맛이 가버렸어 그리고 그거 좀 그래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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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환상향 구했다!
글쓴이: 112 조회: 131 댓글: 8개
지금 막 급하게 구해 온 거라 사진은 못 찍었다
부럽냐? 혹시 몰라서 유동 아이피로 글 쓴다^~^
일단 이 환상향이란 물건도 물건이지만 그보다 판매상?처럼 보이는 여자가 엄청 이쁘더라
나이는 나보다 연상으로 보였는데 연륜? 아니 관록이랄까, 하여튼 말 못할 카리스마 같은 게 있더라. 뭐, 보기 드문 은발이란 점도 한몫했지만.
이 누나랑 친해지면 혹시...
46.781***: 아서라. 꿈도 유분수지
34.590***: 오 그거 어디서 구했음? 나도 좀 해보고 싶은데ㅠㅠ
1 1 2 : 와, 약 사러 가서 판매상한테 반했다는 놈은 또 처음인데
K@RE : 고가에 거래하고 싶습니다. qdgvx112@xxxxx.com으로 연락주세요
83.032***: 뚜방뚜방
1609 : ㄴ 뚜방충 새끼 꺼져ㅗ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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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636***: 누구 물어보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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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 후배랑 연락이 안 된다;
글쓴이: 히로게시 조회: 43 댓글: 3개
나랑 친하게 지내던 학교 후배가 있거든. 나 자위대 갔다 와서도 이것저것 도와줬던 애라서 친동생처럼 생각하고 있었는데 글쎄, 애가 한 일주일 전부터 연락이 안 되네;
주변 애들한테 물어보니까 전공 수업도 통 안 나오는 모양이고... 원래 이렇게 말없이 사라질 애가 아닌데
사실, 좀 걸리는 게 있는데... 애가 무슨 약을 한다는 거 같더라고. 그... 환상향? 환상약? 어쨌든 그런 걸 한다는 거 같은데 혹시 많이 위험한 거야? 걱정 안 해도 되겠지? 그냥 잠깐 여행이나 간 거면 좋겠는데...
+혹시 누구 이 환상향이란 거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면 가르쳐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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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QC: 음... 이런 말 하긴 미안한데, 아마 그리 좋지만은 않을 거 같아. 내 아는 동생도 지금 그 약 사러 간다는 말만 남기고 한 달 가까이 연락이 안 되네. 거짓말이라고 생각해도 좋지만 아마 넌 내 말 믿을 수 있겠지? 실종신고는 하긴 했는데... 차라리 어느 배에 타고 있는 정도면 안심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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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 글을 읽던 나는 스크롤을 올려 게시판 이름을 확인했다. 응, 자유 게시판이라. 확실히 최근 글 목록을 보면 다른 커뮤니티처럼 자유 게시판 특유의 소란스러움과 잡스러운 느낌이 강했지만... 내가 본 글들은 하나같이 자유 게시판이라기보다는 괴담 게시판에 더 어울릴 것 같은 글들이었다. 게다가 중간중간 삭제된 댓글이 그런 느낌을 더 가중시켰다. 렌코도 참, 어쩜 이렇게 맨날 이상한 주제만 찾아오는지 오히려 그게 더 신기할 정도라니까.
“어때?”
팔에 돋은 소름을 쓸어내리는 내 손으로부터 렌코가 스마트 폰을 빼앗아가다시피 낚아채며 물었다.
“어? 어, 응. 나쁘지 않네. 그런데 도시괴담 같은 걸 말하기에 반년은 계절이 지난 것 같은데.”
“거기에 대해선 나도 동감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아니 경사스럽게도 이건 도시괴담 같은 게 아니야, 메리.”
“그렇구나.”
내심 괴담이나 뭐가 다르냐는 물음이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렌코의 목소리가 너무나 확고했기에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남은 핫초코를 입안으로 전부 털어 넣었다.
“으, 써.”
“그야 여기는 순수 100퍼센트 카카오를 쓰니까.”
“대학구 내 카페치고는 호화로운 거 아니야?”
“이제 와서 뭘.”
렌코는 농담하지 말라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 하더니 다시 내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그러니까 난 렌코는 좋지만, 렌코의 저 눈은 기분 나쁘단 말이야. 짜증나.
“메리도 최근 들어 이 근방에서 일어나는 실종 사건은 알고 있지?”
“물론이지. 그거 꽤 유명해서 뉴스에도 타지 않았던가?”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맞아.”
실종사건.
가장 처음 들었던 건 아마도 한 달 전쯤이었던 것 같다. 교토 중심가부터 외곽까지 위치에 가리지 않고 일어난 사건이다. 뿐만 아니라 남녀노소에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어난 사건이라 경찰당국도 상당한 애를 먹고 있다고 들었는데. 참... 수도가 도쿄에서 교토로 바뀐 지 벌써 몇 년 전 일인데 아직도 치안이 이 모양이니... 아무래도 이런 건 예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아마 범인이 누군지 아직도 추정 단계라고 했었지?”
“오, 관심이 전혀 없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제법 잘 알고 있네. 맞아. 다만 사건이 일어난 범위나 실종자 수에 근거해서 정부에선 거대 조직이나 해외의 테러 집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다더라.”
“에에? 해외 테러집단이라니, 너무 스케일이 큰 거 아니야?”
“아니, 고작 사람 몇 명이 모여서 저지르기엔 사건이 너무 크잖아. 오히려 나는 그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런가─. 나는 렌코의 눈에서부터 고개를 돌려 창밖을 향했다. 유리창은 온도차에 의한 김 때문에 어느새 뽀얗게 변해 있었다. 손가락을 가져다 대니 바깥의 시리도록 찬 기온이 찌릿 하고 전해졌다. 떨리는 손끝으로 김을 지워 낙서 따윌 하고 있자니 렌코가 뾰로통해서는 입을 열었다.
“잠깐, 메리... 듣고 있는 거야?”
“아? 응. 물론이지. 어... 만약 사람이 아니라면 어떨까 싶은 생각을 하고 있었어.”
“...사람이 아니라면?”
다행히도, 의심을 피하기 위해 아무렇게나 뱉은 말인데 아무래도 렌코의 흥미가 쏠린 모양이다. 참, 렌코도 괴짜라니까. 그렇게 쓸데없는 사실에 흥미를 가져봐야 나중에 위험해질지도 모르는데.
“그렇네. 메리, 그건 요괴의 짓이라는 거지?”
“아니, 확정은 아니고. 만약 그렇다면 어떨까... 싶어서 말이야.”
“음. 만약 정말 요괴의 짓이라면... 헤이안쿄 이후 최대의 악몽이겠는 걸. 아무래도 그때는 그나마 음양사라는 것들도 있었다지만 지금은 그런 영능력자들도 거의 없고. 그나마 요괴에게 현대 화기가 통할지도 의문이고.”
흐으으음─. 긴 한숨을 흘리며 고개를 푹 숙이는 렌코. 나는 그녀의 앞에 한 입밖에 안 건드려진 쉬폰 케이크에 포크를 찔러 넣었다.
“우움... 그런 건 렌코가 아무리 걱정해봐야 소용도 없잖아?”
“그것도 그렇긴 한데... 아앗! 메, 메리! 그거 내거잖아!”
“뭐, 어때. 정작 주문해놓고 안 먹었으니까 렌코가 나쁜 거야.”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닌 걸? 내가 핫초코를 다 먹을 때까지 건들지도 않은 렌코가 나쁜 거라구.
그러나 렌코는 여전히 미련이 남는지 내 쪽으로 가져온 케이크를 향해 눈짓을 주더니, 이내 깊은 한숨과 함께 눈을 질끈 감았다.
“에잇! 어, 어쨌든! 내가 조금 조사한 바로는, 이 환상향이라는 약이 최근 일어난 실종사건과 관련이 있는 모양이야.”
“그거 근거는 있는 말이야?”
“물론이지. 사실 이 커뮤니티 말고 다른 커뮤니티도 조금 살펴봤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이렇게 실종된 사람을 찾는 다른 글에서 결과 내 검색을 하면 80퍼센트 이상에 이 환상향이라는 단어가 걸린단 말이야.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
렌코는 스마트 폰을 다시 톡톡 두드리더니 내게 뭔가를 보여주면서 눈을 빛냈다. 글쎄, 구시대의 유물인 폴더폰을 쓰는 나한테 그런 걸 보여줘도 알 리가 없잖아, 렌코. 뭐... 삐삐보다는 낫지만.
그러나 유감스럽지만, 내가 이 이야기를 이해했건 못 했건 간에 그런 내 생각과는 반대로, 비봉구락부라는 서클의 일원으로서의 마에리베리 한은 이미 이 다음에 나올 말을 예상하고 있었다.
“메리, 혹시 이 환상향이라는 약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아?”
“으음. 흥미로운 이야기긴 한데... 아무래도 그건 마약이잖아? 좀 위험하지 않을까?”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물론, 우리 비봉구락부가 해 온 일들치고 안 위험한 일이 더 손에 꼽을 정도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번 일처럼 대놓고 불법적인 일은 없었다. 지금까지의 일이 단순히 우리의 안전과 직결되는 문제였다면 이번 일은 잘못되면 사회적으로 위험한 일이다. ......우리의 안전을 놓고 이렇게 말하게 되다니. 어쩐지 좀 슬퍼지는 걸. 이것도 다 렌코 때문이라니까.
그러나 렌코는 이런 내 우려에도 불구하고 언제나처럼 자신만만한 얼굴로 씨익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재밌을 거 같지?”
...정말이지, 렌코도 참.
렌코는 분명 저 호기심 때문에 큰 일 당할 거라니까.
-2-
겨울바람이 매섭다. 우사미 렌코는 옷소매 사이로 파고드는 찬바람을 막기 위해 매고 있던 빨간 목도리를 한껏 더 세게 여몄다. 그녀는 어느 정신병원 앞에 서 있었다.
[ 하치(はち意) 정신과 의원 ]
무미건조한 글씨가 적힌 간판을 매단 건물은 겨울 속에 섞이려는 건지 새하얗다. 지금에 들어서 차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배기가스가 상당수 줄었다고는 하지만 저런 색은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색이다. 하지만 정신병원이라는...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들을 격리시키는 데에도 이만한 곳이 없겠지.
지금은 고치지 못할 병은 없고, 오히려 불치병이나 정신병은 하나의 개성으로까지 인정되는 시대라고 말하지만, 사회가 정말 자신에게 해가 될 존재를 용납할 리가 없다. 정신병원은, 환자를 치료한다는 명목 하에 환자들 본인들이 원치도 않는 감금을 자행하는 사회와 합의된 격리시설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나 렌코가 이 병원을 찾은 것은 그녀가 그런 정신병을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다름 아닌 최근 유행하는 ‘환상향’이라는 약에 대해 아는 의사가 이 병원에 있다는 소식이 들렸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메리도 참. 이런 때에 아프면 어쩌자는 거야?”
렌코는 추위에 꽃처럼 물든 얼굴로 투덜거렸다. 그런 그녀의 옆에 항상 함께 다니는 메리는 보이지 않는다.
다툰 건 아니다. 다만 나갈 채비를 다 마쳤을 쯤에서야 메리로부터 한 통의 문자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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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미안 렌코
미안 렌코
아침에 일어나니까 갑자기 열이 심하네
어제 바람이라도 쐰 게 문제인 걸까... 미안하지만 오늘 조사는 렌코 혼자 가줘야 할 것 같아
미안! 어쨌든 조사하고 연락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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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감기라니, 너무해.”
분명 그녀와 달리 메리는 이런 약속에 대해서 어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지만, 그런 녀석이 빠지면 더 서운한 법이다. 게다가 비봉구락부는 고작 두 사람만 있는 서클이 아닌가?
“결국 오늘은 나 혼자 해야겠네.”
자신이 고집쟁이라는 사실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픈 친구를 억지로 끌어낼 정도로 이기적인 성격은 아니다.
렌코는 여전히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는 듯 입맛을 다시며 병원 입구로 향했다.
-3-
[어서 오세요]
기계적으로 만들어진 보이스가 문을 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내부는 병원에 대해서 퇴폐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던 렌코의 예상보다 깔끔했다. 대개의 정신병원들이 한 건물을 통째로 개조해서 쓰거나 2, 3층에 위치해 있다는 것과 다르게 이 병원은 1층에만 자리 잡고 있다는 게 특이하다면 특이한 점일까. 확실히 병원의 내부는 꽤 넓어보였지만 그렇다고 병원에 입원하는 환자들 전부를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뭐, 입원 환자들은 어딘가 따로 옮기기라도 하나?’
그런 생각 따윌 하고 있을 때였다.
“대기번호 8번, 우사미 렌코 님?”
“아, 예!”
“선생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 쪽 방으로 들어가시면 되요.”
“아, 가, 감사합니다.”
‘와, 저런 머리를 하는 사람도 있구나.’
평소라면 좀 더 당당하게 대답했겠지만 머리를 전부 보라색으로 물들이고 있는 간호사 덕분에 살짝 말을 더듬어 버렸다. 메리도 티 하나 없는 금발이긴 하지만 그녀는 애당초 순수 혈통에 따른 금발이다. 지금 같은 시대에 안되는 게 뭐가 있겠느냐 만은, 저렇게 긴 머리를 자연색도 아닌 보라색으로 물들이는 건 또 어떨까 싶다.
‘그, 뭐랄까. 인간미가 없다고 해야 하나.’
미리 메일로 약속을 잡아두고 오기는 했지만, 정작 문 앞에 서자 긴장되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 렌코는 오늘의 목적을 떠올리고 기죽으려는 자신을 다잡았다.
“들어갈게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을 알리고 조용히 문을 열었다. 병원은 세세한 부분에까지 신경을 썼는지 문은 조금의 흉한 소리도 없이 열렸다.
“실례합니다. 메일로 연락드린 우사미 렌코라고 하는데요...”
렌코는 원장실을 곁눈질하며 인사했다. 밖에서 봤던 건물 외관과 같이 원장실 내부도 역시 하얬다. 심지어 가습기에서 나오는 몽글몽글한 수증기마저 새하얗게 보이는 착각이 들었다.
무슨 생각으로 인테리어를 한 건지, 병원 전체가 다 하얗다보니 정신이 나갈 지경이다. 오히려 환자들이 병을 얻어갈 것 같다.
원장은 블라인드를 내려 햇빛을 막은 창가 바로 옆 자리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는지 읽고 있던 서류를 정리했다.
“아, 왔어요?”
원장은 메일로 나눴던 내용으로 보아 40대의 중년 아저씨를 상상했는데 예상외의 미인이었다. 나이는 20대 후반이려나. 동성인 렌코가 보기에도 절제된 용모의 수려함이 있는 여자였다. 렌즈를 꼈는지, 회색인지 검은색인지 분간이 안가는 눈동자가 비치는 무테안경이 수술대의 할로겐 수술등처럼 반짝였다. 그러나 렌코의 시선을 붙잡은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머리카락이었다. 원장은 길게 땋은 머리를 버들가지처럼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렌코가 가진 흑발과는 전혀 대비되는 백은색이 지나치게 인상적이었다.
“여기에 앉으세요.”
“아, 감사합니다.”
원장은 정신과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소파로 그녀를 안내했다. 소파는 푹신했지만 렌코의 신경은 온통 원장의 머리로 향했다.
‘아무리 개인의 자유라고는 하지만 저런 백은발도 완전 악취미인 걸. 나이로 보나 어디로 보나 자연적인 건 아닌 것 같고, ...인공적으로 탈색한 거겠지? 겉보기랑 다르게 의외로 노는 타입인가?’
“그러니까... 환상향이라는 물질에 대해서 궁금하다고 했었나요?”
“응? 아, 네. 이것저것 조사하다보니 이 병원에서 환상향 관련 환자들을 조금 상담했다고 들었어요.”
원장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고 렌코도 정신을 차렸다.
이미 서로 메일로 기본적인 인사치레를 마쳤던 참이었기에 두 사람은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흐응, 환상향이라...”
원장은 입고 있던 흰 가운에 찔러 넣었던 손을 빼, 코끝에 걸친 안경을 밀어 올렸다.
“들어봐요.”
그녀는 긴 한숨을 포옥 쉬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당신도 그 환상향이라는 게 뭔지 정도는 이미 알고 있겠죠?”
“네. 향정신성 약물... 그러니까 마약이요.”
“맞아요. 사실 거기까지도 찾기 힘든데 제법 관심이 깊은가 보네요. 대학 논문으로 낸다고 했던가요?”
“아... 물론이죠. 저희 과 교수님이 워낙 깐깐하셔서 제대로 조사해가지 않으면 점수 따기가 힘들거든요.”
“후후. 대학이라, 그립네요. 아, 혹시 커피 마실래요?”
원장은 뜨끔한 렌코가 대답하기도 전에 종이 컵 두 개를 꺼내 포트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이제와 거절하긴 힘들다고 여긴 렌코는 잠자코 지켜봤다.
메리와 함께 있었다면 이렇게 얌전히 있지만은 않았겠지만, 혼자라서인지 아니면 은연중에 이 여자의 카리스마에 짓눌린 건지, 아무래도 대화를 리드 당하고 있었다.
“자, 마셔요.”
“고맙습니다.”
커피는 제법 화려한 원장실의 내부 인테리어와 어울리지 않게 싸구려 믹스를 쓴 듯 달큰한 인스턴트 향이 코를 스쳤다.
그러나 정작 원장은 커피를 끓이고 나서도 자리에 앉지 않고 연신 그녀의 주위를 서성였다. 어딘지 망설이는 모습이 처음의 직설적인 태도와 달라 렌코의 신경을 자극했다.
“메일로는 뭐 대단한 걸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이 약물에 대해서는 저도 잘 알고 있는 건 없어요. 아마 저만이 아니라 다들 그럴 거예요. 환상향은 최근 새롭게 발견된 약물이니까요.”
“에에... 아무래도 최근 유행하기 시작했으니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뭔가 착각이 있는 것 같네요. 내가 말하는 ‘새롭게 발견된 약물’이라는 건 다른 약, 그러니까 코카인이나 아트로핀 같은 약물들을 조합해서 만들어냈다는 게 아니에요. 음, 잠시만요.”
원장은 지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책상 서랍에서 작은 케이스를 하나 꺼냈다.
“어디까지 얘기했죠? ...아, 그래. 그러니까 그 환상향이라는 약은 좀 더 새로운 차원이에요. 뭐랄까, 학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전혀 색다른 약이죠.”
“...새로운 조합 같은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새로운 약이라는 건가요?”
“맞아요. 발견됐다기보다는 발명됐다는 표현이 더 맞겠죠. 이해력이 좋네요. 후우, 나도 옛날엔 머리가 참 좋았죠. 제자도 있었는데 말이에요.”
“아하하, 그, 그런가요.”
“그런 거죠. 하여튼 이 환상향이라는 약 때문에 지금 많은 학자와 의사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을 거예요. 뭣도 모르면서 정부에서는 조사해라! 조사해라! ...그런 인간들이 렌코 양처럼 조금이라도 조사를 해보면 이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텐데요. 하여튼 고생은 언제나 우리 같은 사람들 몫이라니까요.”
한동안 푸념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원장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한 것이, 아무래도 진심으로 말하는 건 아닌 듯 했다.
커피를 한 모금 넘기고, 원장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얼마 전, 저도 실제로 이 약을 볼 수 있었어요. 뿐만 아니라 환자가 직접 제 앞에서 먹어보기도 했죠.”
“먹는다고요?”
“그래요. 약의 성질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 약의 경우 먹는 것으로 그 효과가 가장 증대된다더군요. 뭐, 얼마나 먹느냐에 따라 또 다른 이야기지만 말이죠.”
원장은 말하면서 서랍에서 꺼낸 케이스를 가리켰다. 케이스는 작은 반지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작았는데, 원장은 마치 프러포즈라도 하는 동작으로 상자를 열어젖혔다.
“이건...”
“맞아요. 이게 바로 그 환상향이에요.”
그건 약이라는 이미지에 흔히 맞춰진 빨간 알약이었다. 캡슐이 아니라 매끈매끈한 비타민제를 닮아서인지, 블라인드를 뚫고 들어온 빛에 투과된 알약은 투명한 루비처럼 보였다. 겉으로는 아무리 봐도 마약이라고 생각하기 힘들다.
렌코의 그런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했는지 원장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알약을 집었다.
“분명한 환상향이 맞아요. 말했듯이 환자가 직접 사용해보기까지 했거든요. 마약들이 전부 주사기 안에 담겨 있거나 하지는 않아요. 사람들을 끌어들일 만한 매력이 있어야죠. 오히려 아름다운 장미에 가시가 있는 법이랄까.”
“분명한 환상향이라니. 농담도 그런 농담이 따로 없네요.”
“현실의 허깨비라는 건가요? ...아무래도 좋아요. 그보다 커피 더 마시겠어요?”
“아뇨. 충분해요. 그리고... 환상향에 대해서도 충분히 도움이 됐어요.”
“그럴 리가... 딱히 렌코 양이 원하는 걸 말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건 그렇지만, 이 약, 제게 주시면 안 될까요?”
“음.”
원장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를 훈계하려 한다기보다 곤란하다는 듯한 신음에 가까웠다. 원장은 대답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포트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가슴을 졸이며 기다리던 중, 새 커피 믹스를 다 타고 나서야 대답이 들려왔다.
“일본이 제법 이런 쪽으론 관대하다고는 해도 그것도 적정선이 있는 법이에요. 알고는 있겠죠?”
“물론 병원에 폐가 끼칠 일은 없을 거예요.”
“...정말, 렌코 양. 사실은 논문 때문이 아니죠?”
“.......”
“고작 논문 때문에 진짜 마약을 입수하려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어요.”
일순간 메스날처럼 예리한 시선이 렌코를 훑었다.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필사적으로 보였던 걸까? 부정하려면 부정할 수도 있겠지만 눈앞의 여성은 그런 점마저도 다 꿰뚫어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원장은 거짓말을 들킨 아이처럼 아무 말 없이 탁자에 놓인 약을 바라만 보고 있는 렌코를 보며 짧은 쓴웃음을 지었다.
“좋아요. 드릴게요.”
“에? 저, 정말요?”
“딱히 렌코 양이 나쁜 일에 악용하려는 것 같지는 않고, 일반인이 멋대로 양산할 정도로 이 약이 간단한 것 같지는 않거든요.”
“하지만... 원장님도 힘들게 구하신 거 아닌가요?”
“어차피 저는 더 이상 연구해봤자 별 결실도 못 얻을 것 같으니까요. 어쩌면 렌코 양이 가지고 있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르죠. 약에게나, 당신에게나.”
요컨대, 무작정 신뢰하지는 않지만 신뢰해서 나쁠 건 없다는 뜻이다.
렌코는 원장의 대답이 나오자마자 도로 물리기라도 할까 봐, 약이 들어 있던 케이스를 닫고 잽싸게 챙겨들었다.
“하지만 만약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다시 찾아와요. 나도 모처럼 즐거운 대화를 나눈 것 같으니까요.”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원장실을 나서려던 그녀는 막 생각났다는 듯, 문 사이에 몸을 반쯤 내민 채로 물었다.
“그, 원장님을 찾아왔다던 환자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원장은 의외의 질문을 받았다는 듯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녀를 보더니 이내 가벼운 눈웃음을 치며 문을 살며시 밀었다.
“그건 그냥 미스터리로 남겨두자고요.”
그녀가 채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문이 닫히고, 때문에 렌코는 보지 못했다.
렌코의 등을 배웅하던 원장의 입가가 히죽 하고 말려 올라간 것을.
-4-
“흐응. 이게 환상향인가.”
항상 즐겨 찾는 대학구 내의 카페로 향하는 길, 렌코는 원장으로부터 받은 케이스에서 혹시라도 미끄러질라 조심스레 알약을 꺼내들었다. 겨울바람에 살짝 언 손이지만 알약의 감촉은 제대로 전해졌다.
이런 작은 약에 무려 향(鄕)이라는 말까지 붙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그건 반대로 생각하면 이 작은 알약이 그런 거창한 말을 뒤에 붙일 정도로 엄청나다는 뜻이겠지.
렌코는 알약을 들어 햇빛에 비춰보기도 하고 건너편에 있는 사람을 비춰보기도 했다. 거리의 행인들이 그녀를 이상하게 바라봤지만 금세 관심이 수그러들었다.
“대학 연구실에 가서 조사라도 해볼까?”
별 생각 없이 흘러나온 말이었지만 이내 렌코는 고개를 저었다.
방금까지 만났던 원장조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약을, 그녀가 조금 살펴본다고 해서 뭔가 새로운 사실을 찾아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고작 그런 방법으로 뭔가를 알아낼 수 있다면 이미 정부에서도 환상향이라는 약에 대해서 제대로 된 정보를 공표했을 것이다. 아직까지도 환상향이라는 말이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건 그만큼 이 약의 구조가 난해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탁.
탁.
타탁.
타탁.
케이스를 다시 집어넣고 카페로 향하던 렌코의 발걸음이 멈췄다.
병원을 나오고서부터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곧바로 뒤를 돌아 살폈지만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인파에 묻혀 딱히 수상하다 싶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위험해.
렌코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근거는 없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여자의 감이라는 녀석이다. 착각이야, 라는 생각은 그녀의 발을 따라 움직이는 소리에 묻혔다. 의도적으로 사람들의 발소리에 스며드려는 소리가 오히려 부자연스러워서 눈치 채버렸다.
누군가 그녀를 미행하고 있다.
‘대체 누가?’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만한 일을 했던 기억은 없다. 아니, 최근에는 비봉구락부의 활동으로 다른 누군가와 마찰이 빚어질 일 자체가 없었다고 해야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미행을 당할 만한 일이라면...
“...환상향 때문인가!”
렌코는 코트 주머니에 넣어둔 케이스를 떠올리고 작게 소리쳤다.
분명 이 약 때문이다. 아니, 이 약을 제외하고선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다. 하지만 대체 뭣 때문에? 고작 마약 하나 때문에 사람을 미행한다니. 만약 그녀가 어느 조직의 간부라도 된다면 모를까, 그녀는 일개 여대생에 불과하다. 이 환상향이라는 마약도 아주 우연하게 구했을 뿐이다.
본래 일상을 타도하고 비일상을 추구하는 게 비봉구락부라는 서클의 존재의의라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전조도 없이 비일상이 찾아오다니...
“...정말이지, 환상향에 대해서 조사하길 잘했다니까?”
흥분 때문인가? 두려움 때문인가? 식은땀이 흐른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경찰서로 가? ...아니야. 지금은 나도 마약을 지니고 있어. 경찰서로 가면 괜히 나만 구석으로 몰리게 될 거야. 그럼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다시 와도 좋다던 원장의 말이 생각났다.
‘아니지. 아무리 그런 말을 듣긴 들었다지만 병원을 나서자마자 바로 되돌아가기엔 내 염치가 있지.’
이제 와서 염치를 따지기엔 상황이 많이 복잡해졌다. 그러나 렌코의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원장에게서는 어딘지 작위적인 느낌이 났다. 마치 뭔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워낙 깊은 곳에 억누르고 있어서 알 수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아까 원장실에서 그녀는 그것이 카리스마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다시 떠올려보면 그건 카리스마라기보다는 미지의 수상함에 가까웠다.
‘그럼 메리네 집으로 갈까?’
퍼뜩 든 생각이었다.
분명 메리의 집이라면 이곳에서 그리 멀지도 않고 오히려 지름길로 앞서나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내 하아, 하고 깨달음과도 한숨이 새어나왔다.
“...메리는 지금 아프잖아, 이 바보야.”
메리라면 병석에서도 분명 그녀를 도우려 할 게 뻔하다. 그러나 그 경우, 뒤에서 쫓는 누군가가 렌코만이 아니라 메리마저 노릴 수도 있었다. 그런 민폐만큼은 끼치고 싶지 않다, 라는 것이 그녀의 본심이었기에 지금 같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렸을 때에도 가능하면 제 선에서 해결을 보고 싶었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싫다면 결국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제길, 대체 왜 고민한 건데!”
상가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가 멀어진다. 부딪친 행인들의 욕지거리가 잠깐 동안 머무르다 사라졌다. 명문 교토 대학에 재학 중인 여대생이 이렇게 과격하고 무례한 짓을 한다는 게 알려진다면 학교 차원에서도 징계를 면치 못하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 당장의 문제에서 벗어나는 게 더 시급했다.
탁탁탁탁탁!
갑자기 빨라진 발소리. 이젠 더 이상 추측이고 뭐고 할 것도 없어졌다.
렌코는 교통비를 아끼고 비봉구락부의 활동비로 쓰기 위해서 일부러 대학 근처에 원룸을 구해서 살고 있다. 메리의 집보다는 좀 더 멀겠지만 당장 생각나는 곳은 집밖에 없었다.
병원에서부터 이렇게 뒤를 밟은 것을 보면 이미 집까지 다 파악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운이 좋다면 그저 오늘 그녀가 약을 손에 넣은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아직 그녀에 대한 세세한 조사 같은 건 하지 못했을 터, 렌코는 후자에 희망을 걸었다.
‘그리고 집에 가서 일단 약을 숨기고 경찰을 부르는 방법도 있어. 어찌 되든 일단 집에 가는 게 급선무야.’
지금 당장 약을 줘버리던가 버리기라도 하면 이 상황이 어떻게 해결될지도 모르겠으나, 이 약은 지금 그녀가 가진 모든 단서다. 더 이상 어떤 정보를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감히 버릴 수는 없다. 그럴 바엔 차라리 도망치는 편이 훨씬 낫다.
2, 3분가량을 쉬지 않고 달리자 벌써 숨이 턱 아래까지 차올랐다.
서클활동을 할 때엔 주로 신칸센을 타고 다니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일반인보다는 체력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긴장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많은 체력을 소모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아,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내쉴 때마다 미국 만화에서 나오는 말풍선처럼 하얀 입김이 나왔다.
중심가에서 벗어나자 사람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탁탁탁탁!
“제기랄, 뭐야? 대체 뭔데?”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투덜거렸다. 분명 누군가가 그녀를 쫓는 소리는 확실히 들리는데도 뒤에서 누군가가 달리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물리학적으로 투명인간이 불가능하다는 건 흔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당연한 사실도, 주술적인 힘이 개입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설마 마약 하나 때문에 그런 짓까지 하는 녀석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데.”
그러나 정작 렌코는 말과 다르게 어쩐지 불안감을 지우지 못했다. 그녀는 비상식과 상식의 경계에 걸쳐있는 인간이다. 지금 같은 상황을 설명하기에 비상식보다 알맞은 힘이 없고, 무엇보다 그녀 자신이 비상식과 관련해서 이 약을 입수하려 했다는 걸 상기하면 다른 누군가가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렌코는 급하게 몸을 틀었다. 코너를 돌자 부서진 아스팔트며 임대문의가 붙어 있는 빌딩 등, 급격하게 낙후된 시설들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여긴 일본의 수도가 옮겨지면서 공사가 중지되었던 중심지 외곽 지역이었다. 집으로 향하는 방향과는 달랐지만 뒤를 쫓는 추격자를 신경 쓰다 보니 전혀 엉뚱한 장소로 들어와 버린 듯 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콜록콜록, 기침을 할 때마다 속이 뒤틀리는 것 같다. 겨울인데도 온 몸에서 땀이 나고 다리가 무겁고 목이 따끔거렸다. 기분 나쁜 컬컬함을 애써 떨쳐내고 무작정 달리자, 기능이 완전히 정지한 공사장에 들어왔다.
탁탁탁탁!
뒤에서는 여전히 형체 없는 누군가가 그녀를 쫓고 있었다.
소리는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형체 없는 발소리를 제외하면 주변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행인들의 우스갯소리도, 도심의 노랫소리도 하나 들리지 않았다. 여기선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아무도 모를 게 뻔했다.
공사장에는 쓰이다 만 자재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
숨을 수밖에 없다. 이대로 있다가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상대가 마약에 눈이 뒤집힌 영능력자라면 붙잡혔을 때엔 어떤 꼴을 보게 될지 상상조차 안 됐다. 그녀는 옆에서도 소리가 들릴 정도로 급히 숨을 들이쉬고 몸을 움직였다.
...탁!
신발 밑창이 아스팔트에 부딪치는 소리가 멈췄다. 동시에 저도 모르게 렌코의 숨소리도 멈췄다.
터벅터벅.
찢어진 현수막이 경고라도 하듯 을씨년스럽게 흔들렸으나 발소리는 거침없었다. 구석에 몰린 토끼를 잡듯 퍽이나 여유로운 발걸음이 텅 빈 공사장을 울린다. 렌코는 터질 것 같은 가슴을 붙잡고 숨을 죽였다. 발걸음은 자신이 쫓아온 대상을 찾는지 공사장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지 한동안 멈출 줄을 몰랐다.
우르르르릉.
일기예보에서 눈이 온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그녀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당장이라도 눈이 쏟아질 듯 어느새 잿빛으로 물든 하늘을 올려봤다.
“흠.”
갑자기 들려온 신음에 하마터면 소리를 낼 뻔했다. 별 의미 없는 한 마디였지만, 렌코는 움찔움찔 떨리는 다리를 붙잡고, 눈빛이라도 보일 새라 질끈 감아버렸다.
그녀의 예상대로 공사장 안에는 낯선 누군가가 있었다. 전혀 보이지 않지만 이 을씨년스러운 공간에 그녀를 노리는 존재가 함께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 형체 없는 존재도 갑작스런 기상의 변화에 당황했는지 전과 같은 거침없는 동작이 제법 사라졌다고 느꼈다. 소극적으로 길가의 돌멩이를 걷어차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뚜벅이는 발걸음이 아스팔트를 울리며 사라졌다.
발소리가 멀어지고 몇 분이나 지났을까? 렌코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 쉴 수 있었다.
“후아.”
살았다, 라는 안도감보다 누구일까, 하는 상투적인 물음이 먼저 떠올랐다. 비봉클럽의 활동을 하면서도 저런 힘을 가진 술사의 존재를 만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렌코가 떨리는 숨을 가다듬는 소리만 빼면 주변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제야 눈이 내리는 걸 의식했다. 눈은 아까부터 내리고 있었는지 그녀의 어깨에 낮게 눈이 쌓여 있었다. 손을 가져가 툭툭 털어냈으나, 이미 녹은 눈 때문에 겉옷이 축축해져 있었다.
이번 일이 마무리 되면 메리랑 쇼핑이라도 갈까, 그렇게 생각하고 철근들을 감싼 천막에서 나올 때였다.
멈칫, 갑자기 그녀의 몸이 굳어버렸다.
그녀의 시선은 십몇 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폐자재 보관소를 향하고 있었다. 보관소는 못질 돼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고 지붕만 아니라 처마까지도 뜯겨나가 눈을 피하기 어려워 보였다. 덕분에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은 낡은 건물 옆에 무수히 떨어져 쌓이고 있었는데, 비단 그것만이라면 그녀도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 눈들은 바닥이 아닌 허공에 누군가 있기라도 한 듯 인간의 어깨에 쌓이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렌코의 몸이 일시에 소름이 돋았다.
눈은 그 자리에 고정된 채로 가만히 있었지만 렌코는 단번에 그 눈을 맞고 있는 누군가의 눈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낯선 시선, 숨어 있던 그녀가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서 있는 불가시의 존재.
렌코는 어쩐지 그 보이지 않는 상대가 비웃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싸아아아아───. 이 곳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듯, 날이 시퍼렇게 선 바람이 불고, 렌코는 쓰고 있던 모자가 날아가는 것도 잊어버린 채로 그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5-
쾅!
위잉, 위잉.
철컥!
렌코가 집에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신발을 벗는 것도, 불을 키는 것도 아니라 문을 잠그는 것이었다.
지문 인식기의 알림에 이어, 전 주인이 떼지 않아 마지못해 놔두고 있던 아날로그 식 도어록까지 잠그고서야 렌코는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다행히 방 안은 달라진 곳이 없었다. 누가 쫓아온 건진 몰라도 그녀의 집까지 알아내진 못한 것 같다.
"...대체 왜 쫓아온 걸까?"
이유는 알고 있다. 아마도 그녀가 가져온 환상향이라는 약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본질적인 해답이 되지 않는다.
대체 이 환상향이라는 약이 뭐길래 그녀를 쫓는단 말인가?
병원의 원장은 이 약을 갖고 있을 때에도 전혀 위험하다거나 누군가에게 쫓기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지금 렌코가 갖고 있는 초조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왜? 원장과 그녀의 차이는 무엇이기에?
질문이 끊이지 않는다.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이런. 옷부터 갈아입어야겠네."
현관은 그녀의 옷에서 흐른 물로 흥건했다. 렌코는 주저앉은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린다.
땀 때문에 몸 여기저기가 끈적해서 샤워라도 하고 싶지만, 솔직히 말해서 샤워하는 중에 아까의 정체불명의 추격자가 올까 두렵다.
옷을 갈아입은 렌코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난 뒤에야 모자가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하아. 이번 일이 끝내면 메리랑 모자라도 사러 가야지, 원."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고 세탁기에 집어넣는다. 스마트폰에는 병원에 들어가기 전에 왔던 메리의 문자를 제외하곤 아무런 알림도 뜨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다.
렌코는 연락 달라던 메리의 말을 떠올리고 곧바로 문자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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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야, 메리
나야, 메리. 어때? 몸은 좀 괜찮아? 오늘은 그냥 환상향에 대한 전문가들 사이의 흐름만 알아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뜻밖의 수입이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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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목없음
짠! 한 알이긴 하지만 무려 환상향을 손에 넣었단 말이야! 사진 첨부할 테니까 꼭 보도록 해
_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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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이 완료됐다는 알림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렌코는 화면을 껐다.
애써 잊으려 했지만 아까 그 괴한에 대한 불안한 상상이 사라지지 않는다. 눈이 쌓이던 마지막, 직접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괴한은 분명 웃고 있었다. 어쩐지 그런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설마, 싶지만 렌코가 이렇게 집에 올 수 있었던 것도 그 괴한이 일부러 놔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러나 렌코는 그 생각을 애써 부정했다. 아니, 부정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됐다. 만약 괴한이 정말 일부러 그녀를 놓아준 거라면... 그녀는 이미 괴한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던 게 아닌가?
문득, 렌코는 어떤 거대한 어둠이 자신을 감싸고 있는 것 같은 오한을 느꼈다.
그래, 그럴 리가 없어.
병원 앞에서부터 일부러 미행했는데 거기서 날 놓아줄 리가 없잖아?
온갖 생각을 떨쳐내듯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두려워하는 것은 '만약'이며 '만일'이다.
처음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호기심 반, 재미 반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일에 얽힌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빼기엔 늦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약을 포기한다고 해서 보이지 않는 괴한이 그녀를 곱게 놔둘지가 의문이었다.
"이렇게 고민한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스마트폰을 열어 즐겨찾기에 저장한 사이트에 접속했다. 금세 로딩창이 지나가고 페이지가 떴다. 새로운 소식을 찾아 게시판 여기저기를 뒤져보던 렌코는 익숙한 아이디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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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 후배 사진인데 혹시 요근래에 본 사람 있으면
글쓴이: 히로게시 조회: 148 댓글: 7개
쪽지로 연락 부탁해
아직 대학생이고 보다시피 남자야. 어째 맞선 안내라도 하는 것 같지만 지금 정말 진지해
꼭 부탁해
_사진 첨부
53.224***: 저거 님 사진임?
히로게시 : ㄴ 아니. 후배 사진이야
53.224***: 후배 사진 막 올리네 ㅋㅋ
86.974***: 교토대학생 아님? 님도?
히로게시: ㄴ 응 맞아
삭제된 댓글
83.032***: 뚜방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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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봤더라 하고 고민하길 잠시, 렌코는 전에 메리와 카페에서 봤던 걸 기억했다.
'아마 실종 어쩌고 그랬던가?'
활동기록을 보니, 일일이 답글까지 달고 꾸준히 글을 쓴 걸 보면 아무래도 시답잖은 장난처럼 보이진 않았다. 이렇게까지 열심이라니, 후배 사랑이 대단한 사람이구나 싶다.
아무리 그래도 친족이 아닌 사람이 이렇게 무단으로 사진을 게시하는 건 또 다른 문제겠지만.
"어라?"
심드렁한 얼굴로 스크롤을 내리던 렌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글에 첨부된 사진 속의 얼굴은 그녀에게도 제법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마도 훗카이도 쪽에서 상경했다고 했던가? 태양빛에 탄 피부가 인상적인 왜소한 남성이었다. 이외엔 딱히 특이하달 것도 없었지만, 렌코가 그를 알고 있는 건 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메리에게 추파를 던지던 남자였기 때문이다.
물론 두 사람이 이어지거나 하진 않고 메리의 애매모호한 대답으로 흐지부지 끝난 관계였지만, 덕분에 렌코도 그에 대해선 제법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타테야마 슈지 군이었나?"
렌코가 가장 최근에 그를 본 것은 그가 메리와 무슨 대화를 하고 있을 때였다. 흐지부지 끝난 관계에도 불구하고 평범하게 대화를 하고 있어서 의아하게 여겼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옆머리를 쳐낸 투블럭을 하고 있었는데, 사진 속의 그는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로 눈까지 가리고 있었다.
설마 실종된 게 이 남자였을 줄이야. 솔직히 말해서 조금 꺼림칙함을 지울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떻게든 환자의 정보를 받아야 했는데."
뭐가 미스터리야, 미스터리는─. 렌코는 원장의 말을 떠올리며 투덜거렸다.
띠링!
그 순간 스마트폰의 화면에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울렸다.
갑작스런 알림에 깜짝 놀라 터치해보니 메리로부터 답장이 도착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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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말이야?
정말이야? 별다른 일은 없었고?
눈도 내리는데 혼자서 갔다 오느라 수고했어
지금은 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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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일'이라는 대목에서 정체불명의 괴한이 무심코 떠올랐지만 메리에게 섣불리 말해서 좋을 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라도 메리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되는 건 사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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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응
응. 난 별 일 없었어
메리는 몸 좀 나아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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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렌코는 스마트폰을 침대 위에 던지고 등을 기댔다.
침대 앞에는 작은 탁자가 하나 있었는데, 탁자 위에 놓인 케이스에서 그녀의 시선이 멎었다. 환상향이 담겨있는 케이스, 그것이었다.
렌코는 손을 뻗어 케이스를 열었다. 케이스는 툭, 하고 가볍게 열렸다. 환상향은 그 안에서 여전히 마약이라곤 믿겨지지 않는 광택을 발하며 빛나고 있었다. 정말이지, 겉보기엔 평범한 보석 같다.
「오히려 아름다운 장미에 가시가 있는 법이랄까」
원장의 한 마디가 머리를 스쳤다.
'아름다운 장미라.'
그녀의 혀가 스윽, 입가를 핥는다.
렌코는 문득 이 약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약의 구조라거나 영향이라거나, 그런 틀에 박힌 궁금증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건 더 원초적인 궁금증이었다. 마치 머리에 총구를 들이댔을 때 저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비슷한 욕구랄까?
꿀꺽. 침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가 묘하게 크게 울린다.
곧바로 환상향을 입으로 가져가려던 렌코의 손길이 멎었다.
이제와 윤리적인 책임감을 느낀 건 아니다. 그저, 이 약이 안전할지 어떨지에 대해서 걱정이 들었다.
손을 입 바로 앞까지 가져가서는, 그 상태로 고민에 빠지길 몇 분. 그러나 렌코는 눈을 질끈 감고 떨리는 손으로 환상향을 입안에 던지듯 집어넣었다.
'원장님도 만약 무슨 일이 있으면 다시 찾아오라고 했고, 양만 잘 조절하면 심각하진 않을 거랬어... 그리고 이런 기회가 흔치는 않잖아?'
환상향은 그간의 고민을 비웃듯 순식간에 녹아 사라졌다.
"아..."
혀끝에서 녹아내린 환상향이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돌고 있는 게 묘하게 실감났다.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균형 감각이 모조리 사라진다. 도심의 사념이 흩어지고 오직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주변을 메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건 시각적인 변화였다.
"아, 아핫. 하하하. 이... 이건가...? 이게, 이게 환상향...?"
세상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아니, 수채화의 물이 번져나가듯 색깔이 윤곽을 벗어나고 있었다.
현실의 탁해지고 애매한 빛깔들이 모조리 빠져나온다. 뻗은 손가락마저도 어지럽게 녹아 세상과 하나 됐다.
하복부가 뜨겁다. 유두는 이미 꼿꼿이 서서 브래지어에 스치기만 해도 신음이 새어나왔다.
"하아... 으응..."
욕정에 찬 눈동자가 허공을 훑었다. 푸들푸들 떨리는 등을 젖히고, 그녀는 여태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절정을 느꼈다.
"꺄으으으으응!"
그녀의 원룸에 비명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차마 입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처녀인 그녀에게 약이 가져다주는 쾌감은 너무 강렬했다.
환상이 현실에 덧씌워지고, 현실은 환상에 채색된다.
뭐가 현실이고 뭐가 환상이지? 분명 다른 두 개념이 구분되지 않았다.
원근감이 사라지고, 의식적으로 통제되지 않은 눈이 풀렸다. 쾌락에 홀려 목을 젖히는 미모의 턱에서는 타액과 땀이 방울 져 흘렀다.
그 순간이었다.
삐빅! 삑!
철컥 철커덕.
지문인식 장치가 풀리고, 아날로그식 도어록이 강제로 열렸다.
그러나 렌코는 풀린 눈으로 그러한 광경을 멍하니 바라볼 뿐, 쾌감으로 둔해진 몸은 움직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탁탁탁탁!
익숙한 발소리가 방안을 메운다.
‘도망쳐야 해.’
머릿속에서 미친 듯이 경고가 울렸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정신만이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환상향을 복용하고, 무력화 될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들이닥친 침입자의 존재에 소름이 돋았다.
"아아..."
밤의 그림자에 갇힌 우악스런 손길이 그녀를 붙잡았다.
온 몸이 덜덜 떨렸다.
'이건...'
위기상황에서 확대된 본능이 깨어나듯 마약에 의해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한 가지 사실이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실종, 사건...'
그러나, 결국 그것을 끝으로 그녀의 정신은 완전히 어둠에 잠겼다.
-6-
평소 침대 위에서 잘 때는 느낄 수 없는 딱딱함과 냉담함. 렌코는 그런 불편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뭐지...'
주변이 온통 어둠이었다. 한치 앞은커녕 제 손발마저도 분간이 되지 않는 어둠이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여긴 어디야..."
습기 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시커먼 침묵을 깼다. 렌코는 엉금엄금 바닥을 기며 몸의 균형을 찾았다.
강한 현기증이 있었다. 한 손으로는 벽을, 다른 손으로는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았다. 구역질이 치민다. 연거푸 술을 마셔대고 난 다음 날에도 느끼지 못했던 지독한 구토감이 그녀를 움직였다.
"우욱... 웩! 우웩..."
먹은 게 없어서인지 식도에선 멀건 위액만 쏟아졌다.
한동안 켁켁 거리며 눈물을 짜내는 사이에 멍해졌던 머리가 천천히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정신병원의 원장을 만났던 일. 그녀에게서 환상향을 받고 쫓겼던 일. 겨우겨우 집에 도착해 지인의 실종 소식을 들은 일. 그리고,
"......읏."
환상향을 먹은 일.
단지 그것만으로 단숨에 얼굴이 붉어진다.
대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도, 그 이전에도 이성과 성관계를 맺은 적은 없다. 물론 자위 경험 정도는 있지만... 어제 그건, 자위를 처음 했을 때에도 느끼지 못한 쾌감이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마약을 하는 걸까."
렌코는 귀까지 새빨개진 채 중얼거렸다.
어젯밤에 느꼈던 그 쾌락을 항상 느낄 수 있다면 누구라도 마약을 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을 것이다. 물론 환상향이 다른 약들보다 더 효과가 센 지도 모르겠지만... 이러다간 중독이 될지도 모르겠다.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원장을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한 렌코는 벽을 붙잡고 일어섰다. 우선은 여길 나가야 했다.
바깥에서도 비현실을 좇던 렌코의 담력은 죽지 않았다.
눈이 어둠에 적응됐는지 희미하게나마 주변이 분간되자 렌코는 천천히 벽을 더듬어 전등의 스위치가 있나 찾았다.
“...있을 리가 없지.”
만약 자신이 납치범이라도 전등 스위치 같은 걸 만들었을 리가 없다. 렌코는 당연한 허탈감을 느끼며 벽에 기댔다. 만약 스마트폰이 있었으면 플래시라도 킬 텐데, 소지품도 모조리 가져간 것 같았다.
“날 여기에 집어넣었으면 어딘가 문도 있겠지.”
당연히 문은 잠겼겠지만, 당장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그렇게 생각한 렌코는 다시 천천히 벽을 더듬었다. 금속 특유의 매끄러움과 냉기가 손을 타고 전해졌다. 집에서 입고 있던 잠옷 차림 그대로이던 렌코는 약간의 추위를 느꼈다.
위에서 아래로, 위치와 방향을 바꿔가며 벽을 찾던 렌코의 손에 뭔가가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동그랗고 툭 튀어나온 무언가.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예전에 쓰던 구식의 문고리 같았다. 돌려서 여는 문고리라니, 렌코의 집에 있던 아날로그식 도어록보다도 오래된 물건이었다.
그러나 나갈 수만 있다면 뭐든 상관없다.
‘부숴야 하나?’
뭔가 내려칠만한 게 없을까 고민하며 문고리를 만지작거리던 렌코는 돌연 철커덕, 하는 소리를 들었다.
“.......”
깊숙한 정적이 깨지자 흠칫, 몸을 떤 렌코였지만, 금방 그것이 문고리가 돌아가며 난 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문은 처음부터 잠겨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문이 끼이익, 낡은 경첩이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며 열렸지만, 렌코는 어쩐지 꺼림칙함을 지우지 못했다.
뭔가 이상하다.
그녀가 환상향을 얻은 순간부터 미행하고, 스스로에게 투명화 마법을 걸 정도의 실력자가, 애써 납치까지 해놓고 문을 잠그는 걸 잊었다? 말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문은 일부러 열어둔 것이 분명했다.
문득, 렌코는 자신이 무대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무대 위의 꼭두각시고 거대한 무언가가 그녀를 의도대로 끌고 가는 것 같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왜? 라는 진부하고 상투적인 질문이 다였다. 이 모든 것에 수상함을 느끼면서도 그녀는 누군가의 의도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실낱같은 빛이 새어 들어온다.
꿀꺽, 침이 목을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렌코는 천천히 문을 열어젖혔다.
“윽.”
갑자기 들이닥친 빛에 렌코가 작게 신음을 흘렸다.
한동안 어둠에 익숙했던 눈이 따끔거린다. 렌코는 손으로 빛을 가리고 잠시간 그대로 서있었다. 그리고 빛에 어느 정도 적응되었다 싶을 때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감시자라도 있을까 싶은 예상과 다르게,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천장에는 구식이지만 LED전등이 수술실의 전등처럼 빛나고 있었고, 벽과 바닥은 온통 이름 모를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양말도 신지 않은 탓에 발바닥이 시리는 것 같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투정부릴 때가 아니었다.
렌코가 나온 방은 가장 끝 방이었다.
복도는 그녀의 방에서부터 시작해서 계속해서 늘어져 있었다. 수평선도 아니고,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에 섬뜩한 느낌이 들었지만 나아가야 했다.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메리...”
문득 자신의 파트너가 떠올랐다.
지금쯤 메리는 뭘 하고 있을까? 그녀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나타났다가 사라졌지만 가장 마지막에 든 생각은 이곳에서 나가서, 메리와 함께 옷을 사러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작 한다는 게 옷을 사러 가고 싶다니, 나도 참 괴짜구나 싶지만, 그만큼 진심이었다.
‘기다려, 메리. 반드시 돌아갈 테니까.’
-7-
복도는 갈림길 하나 없이 일자로만 이어졌는데,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에서 신화에 나오는 라비린토스의 공포를 연상시켰다.
혹시 이렇게 영원히 헤매게 되는 건 아닐까, 사실 출구 따윈 없는 게 아닐까. 그런 불안한 상상들이 폭발했지만 렌코는 세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분명 출구는 있을 거야. 분명 나갈 수 있을 거야.’
그건 확신이라기보다 스스로를 다독이는 각오였다.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필요이상의 중압감에 주저앉아버릴 것 같았다.
대체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하늘만이라도 보였더라면 시간이나 장소를 알 수 있었을 텐데, 사방은 온통 꽉 막혀 그 흔한 배기관조차 보이지 않았다. 렌코는 벽에 기대 차갑게 굳은 발을 슬슬 주물렀다. 동상에 걸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딱딱해진 발은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제대로 도망이나 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상태였다.
“하.”
짧고 가는, 단말마 같은 한숨이 새었다. 피곤했다. 충동적으로 삼킨 약의 후유증도, 미지의 적에 대한 두려움도, 그리고 끝이 나오지 않는 복도와 창백한 LED등도. 모든 것으로부터 피로를 느꼈다.
“잠깐 쉴까...”
언제 뭐가 튀어나올지 몰랐지만, 어차피 이 복도에서 도망치거나 숨을 곳은 없었다. 렌코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주저앉았다. 차가운 벽에 머리가 대자 조금은 정신이 맑아진 것 같다. 그녀는 맑아진 사고 속에서 천천히 시간을 가늠했다.
‘내가 아무리 오래 정신을 잃었어도 대충 5시간 남짓일 테고, 방에서 나온 지 대충 30분 좀 안 지났을 테니까... 이것저것 생각하면 어림잡아 8시간 정도는 지났겠지.’
렌코의 기억이 맞다면, 그녀가 환상향을 먹은 건 대충 저녁이 지난 무렵인 8시쯤이었다. 그럼 지금은 아무리 늦어도 새벽 내지 아침 무렵이라는 얘기가 된다.
‘겨우 아침밖에 안됐다면 아무도 내가 납치된 걸 모르겠구만...’
아마 메리가 밤새 연락 정도는 했겠지만 그녀도 설마 렌코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건 생각지도 못할 거다. 그럼 메리가 아무리 일찍 일어난다고 해도 8시는 되어야 렌코의 집을 방문할 텐데, 그 말은 아직까지 그녀의 행방불명을 알고 있는 이가 없다는 말이 된다.
“하아.”
렌코는 답답한 소리를 내며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때,
“......아. ...하...”
“!”
숨을 멈췄다. 렌코는 일어나려던 자세 그대로 몸을 굳히고 남다른 청각에 의식을 집중했다.
“......아, 읏! 하아...”
소리는 간헐적으로 전해졌다. 귀를 기울이니 그건 사람의 헐떡이는 소리 같았는데, 렌코는 두려움보다 먼저 뭔가가 있다는 사실에 큰 안도감을 느껴버렸다.
얼마 만에 들은 타인의 목소린지 모르겠다.
그녀는 약간의 경계심을 가진 채로 여태까지 보다 조금 더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탁탁탁탁!
“...윽! 하아...! 하아..!”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이윽고 저 멀리 벽면에서 뭔가 툭 튀어나온 것이 보였다. 렌코는 단숨에 그것이 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윽...”
곧바로 문을 확인해볼 요량으로 달리던 렌코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어디선가 강한 향이 코를 찔렀다.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는 냄새였다. 어찌나 강력하던지 코를 틀어막은 상태에서도 목안이 간질거렸다. 그러나 눈앞에 뭔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렌코는 소리 나지 않게 발을 움직였다.
문은 다른 벽이나 천장과 다르지 않게 금속으로 이루어져있었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처음 렌코가 눈을 떴던 방의 문이 돌려서 여는 문고리였던 것에 반해 눈앞의 문은 마치 수용소처럼, 정말로 누군가를 감금하기 위해 만들어진 듯 굳게 잠겨있었다.
“카자미... 유카(風見幽香)?”
렌코는 문에 달린 글자를 읽었다. 이 안에 갇힌 누군가의 이름 같았다.
렌코는 문을 열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해 밀어보았지만 역시나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네.”
그녀는 문을 열기를 포기하고 좀 더 시선을 올렸다. 시야에 문에 난 쇠창살이 들어왔다. 쇠창살은 그녀의 키보다 좀 더 높은 곳에 있었는데 소리는 쇠창살 사이로 들려오고 있었다.
렌코는 쇠창살의 끝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발돋움하여 안을 들여다봤다.
가장 먼저 렌코는 강한 현기증을 느꼈다.
쇠창살을 잡기 위해 코를 막고 있던 손을 놔버린지라 쇠창살 사이로 흘러나온 향이 그대로 머릿속을 후벼 파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힘겹게 고개를 털어내고 방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렌코가 처음 어둠 속에서 정신을 차린 것과 다르게, 방안은 온통 환했다. 마치 태양이라도 가져다 둔 것 같았다.
그 다음 눈에 들어온 건 다름 아닌 꽃들이었다. 방안은 쇠창살 틈으로는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를 감안하더라도 지나치게 넓었는데 그녀의 대학 강의실보다도 넓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넓은 방안을 온통 갖가지 색들의 꽃들이 피어나 장식하고 있었다. 과연, 그렇다면 이 지독한 향기도 이해가 간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기던 렌코는 방의 가운데에 사람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이 아니었다. 방이 워낙 큰지라, 중앙에 있는 그들을 보기 위해 렌코는 좀 더 눈을 크게 떴다.
“헉!”
그리고 무심코 쇠창살을 놓칠 뻔했다.
“저, 저게 뭐야...?”
방의 중앙에는 5명 정도의 남성들과 한 명의 여성이 있었다. 여자의 머리칼이 눈에 띄는 녹색에 알비노처럼 붉은 눈을 가졌다는 사실은 독특했으나, 이들 조합 그 자체만으로 특별하기에는 뭔가 부족했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꽃밭위에서 한가롭게 피크닉이나 나누고 있는 게 아니었다.
“하앗, 하앗, 으으으응!”
“헉... 헉...”
“으윽... 하악!”
쾌락에 찬 신음 소리가 귀를 찔렀다.
남자의 몸이 부르르 떨린다. 푸슛,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남근에서 백탁액이 기세 좋게 뿜어졌다.
“아응...”
풀잎 같은 머리가 아름다운 여성은 자신의 몸이 정액에 더럽혀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연신 신음소리만 내뱉었다. 여자의 옷은 이미 죄다 벗겨져 그나마 흰 블라우스만 걸치고 있었는데, 심지어 그마저도 앞섬의 단추가 전부 뜯겨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여자의 풀어헤쳐진 하늘하늘한 블라우스에서 엿보이는 눈같이 하얀 배는, 그 안에서 움직이는 남자들의 육봉에 맞춰 움찔움찔 경련을 일으키고 있다.
찌걱 찌걱 츄파 츄파
충격으로 눈가가 떨렸다. 당장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몸은 마법이라도 걸린 듯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혼자 순수한 척 빼고 싶은 건 아니다. 하지만 이건 이상했다. 그들의 눈은 하나 같이 풀려 있었고 여자는 개처럼 내민 혀에서 질질 침을 흘리고 있었다. 아무리 섹스에 취해있다고 하더라도 이지를 상실한 채 쾌락을 탐하는 건 누가 봐도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아윽.”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눈앞이 흐려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다가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갑자기, 뭐야...?’
쿠당탕!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았지만 안에서 들리는 신음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마라톤 경기를 완주한 사람처럼 온 몸에서 힘이 쫙 풀렸다. 향이 아까보다 더 강해지고 있었다.
렌코는 정신을 잃을 것 같은 머리를 흔들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를 악 문 채로 기대고 있던 벽에 강하게 머리를 한 번 부딪치자 그나마 좀 나았다. 그녀는 알코올중독자처럼 덜덜 떨리는 손을 주체할 수 없어 벽에 몸을 기대고 느릿느릿 문 앞으로 갔다.
“헉, 헉... 끄억!”
그 순간, 신음과는 다른 비명이 울렸다.
서둘러 쇠창살에 매달려 안을 들여다보자 방금까지 여자의 질내를 범하고 있던 남자가 남근을 박은 채 앞으로 고꾸라졌다. 옆에서 다른 남자들이 여자의 뒷구멍이며 입이며 범하고 있었지만 쓰러진 남자의 몸은 벌벌 떨더니,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여자에게 기대듯 늘어진 남자가 방해되는지, 옆에서 한껏 허리를 흔들어 대던 남자들은 그를 들어 내던지곤 다시 쾌락에 몸을 맡기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한 남자의 몸이 푸들푸들 떨리더니 여자의 몸 위로 정액을 흩뿌렸다.
푸슛, 푸슛!
“꺄으으으으응!”
철저하게 쾌락에 지배된 신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여태껏 처녀인 렌코라도 방금 그녀가 절정에 올랐다는 사실쯤은 알 수 있었다.
아무도 쓰러진 남자를 걱정은커녕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미쳤어.’
렌코는 현기증 나는 머리로 그렇게 생각했다.
쓰러진 남자의 얼굴은 여태껏 그녀의 시야에서 등을 돌린 채로 허리를 움직이는 바람에 보이지 않았지만, 다른 남자들이 집어던진 바람에 지금은 정면에서 그 얼굴이 똑바로 들어왔다.
잡지에서나 볼 법한 핼쑥해진 얼굴. 양 볼은 며칠 동안 먹지 못한 사람처럼 푹 꺼져있었고, 동공은 초점을 잃은 채 허공에서 시선이 방황하고 있었다.
죽었다. 꿈쩍도 않는 그의 퀭한 모습에서 그 사실을 직감했다.
자세히 보니 헉헉 거리며 허리를 놀리고 있는 다른 남자들의 모습 역시 만만치 않았다. 하나같이 다 죽어가는 병자의 꼴을 해놓고선 그저 그것만이 전부라는 듯, 여자와의 성관계에 생기를 불사르고 있었다.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저들의 모습은 마치 뭔가에 홀린 듯 했다. 꽃들로 가득한 주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환경에 렌코는 기이한 위화감을 느꼈다. 과연 저것들은 단순한 조형이란 말인가? 고작 그런 것 치고는 지나치게 섬세하고, 지나치게 강렬했다.
“...꽃?”
알록달록한 꽃들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강한 향을 풍긴다.
머릿속에 스파크가 치는 것 같았다. 동공이 확장 되고, 그제야 그 꽃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아... 아아... 아아아!”
렌코는 그 자리에서 코와 입을 틀어막고 달렸다. 숨을 쉬면 안 됐다.
한 쪽으로만 난 길에서, 이리저리 벽에 부딪치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면서 무작정 달렸다. 그저 저 방에서 멀어져야 한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렌코는 바보가 아니다. 사람에게 기쁨과 쾌락을 주고 그 외의 것은 전혀 생각지 못하게 하는 걸 알고 있었다. 거대한 꽃밭 그 자체가 게걸스럽게 벌려진 악마의 아가리였다. 향에 취해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그런 괴물의 입속.
그건, 마약이었다.
-8-
“말도 안 돼...”
가능할 리가 없다.
아무리 최근의 일본이 약물에 대해서 너그러운 태도를 가지고 있다지만 저 정도로 거대하고 본격적인 마약 농장은 있을 수 없다. 아니, 있어선 안됐다.
그러나 명확한 진실은 반드시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거대한 마약공장의 약들이 밖으로 퍼져나가면, 대체 이 나라는 어떻게 될 것인가?
렌코는 눈만 뜬 채 기계적으로 허리를 움직이고 신음을 내뱉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들에겐 현실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바로 옆에서 사람이 쓰러져도, 그저 약이 가져다주는 환상에 취해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렌코도 그런 체험을 했었다. 환상향을 복용했을 때, 분명 그녀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을 봤다. 그들은 그런 세상에 취해 있는 것이었다.
토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먹은 것도 없는 마당에 또 속을 게워내면 탈진해버릴 것 같아 차마 그러지도 못했다.
아직도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그런 메슥거림을 이겨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 공장에 대한 비밀을 폭로하기 위해서든, 메리를 만나기 위해서든, 혹은 살기 위해서든. 무슨 이유에서라도 우선 여길 나가는 게 우선이었다.
길은 여전히 하나다.
저 멀리 복도의 끝이 보였다.
처음에는 막다른 벽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점점 더 가까워지자 금세 그것이 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문은 미닫이로, 잠금장치가 없어 옆으로 밀면 간단히 열리는 구조였다. 니켈 합금으로 이루어진 탓에 건너편이 전혀 보이지 않아, 렌코는 아주 조금만 열어 문틈으로 안을 살폈다.
안은 ‘카자미 유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던 방과 다르게 꽃이 만개해 있기는커녕, 오히려 복도보다도 어두웠다.
“으...”
문 안쪽에서 신음소리 비슷한 것이 흘러나왔다.
렌코는 또 아까와 같은 광경이 펼쳐져 있는 건가, 하고 침을 삼켰으나 띄엄띄엄 들려오는 소리는 아까 들린 신음과는 조금 달랐다.
‘...이대로 있어봤자 달라질 것도 없어... 차라리 눈을 딱 감고 가자.’
손잡이를 잡은 채 고민하던 렌코는 그대로 문을 열었다.
그녀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문이 자동으로 닫혔다. 예고도 없이 닫혀버린 문에 당황한 렌코는 다시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잡았으나, 아무리 기를 써도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앞으로만 가라는 건가...?”
문득 옛날 영화 속의 대사가 떠올랐다.
“오직 앞만 보고 뛸 것. 뒤를 돌아보는 것은 나약함의 증거다.”
벌써 수십 년도 더 된 영화였지만, 지금 상황에 그렇게 들어맞는 말도 없었다.
이 상황이 대체 누가 꾸며낸 건지, 무엇을 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결코 당해줄 수는 없었다.
결심을 마친 렌코는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어둠 속을 똑똑히 노려보며 걸었다.
“그, 아아...!”
“으으으...”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메아리쳤다. 전 방에서 봤던 난교... 의 흔적은 없는 것 같았지만, 빛이 적은 이 방에서는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메아리만으로도 충분히 괴기스러운 상황이 연출됐다.
더듬더듬, 주변을 경계하며 발걸음을 옮기자 어둠에 익숙해졌는지, 주변의 형상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양 옆에는 사람들이 줄지어 있었다. 글쎄, 대체 몇 명이나 되는 걸까? 뒤에서부터 눈대중으로 수를 세던 렌코는, 그 수가 두 자리를 넘어가자 그만 포기해버렸다.
특히나 이상한 것은 그들이 전부 옷을 벗고 있었다는 점이다. 중간 중간 섞여있는 남자들의 난생 처음 보는 알몸에, 처음에는 시선을 둘 곳을 몰라 눈을 가리기도 했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렌코는 그들이 자신을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병자처럼 벌거벗은 몸을 아무렇게나 하고 허공에 시선을 둔 채 뭔가 알 수 없는 말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저건!”
그들의 형언할 수 없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인파 속에 난 작은 길을 조용히 걸어가던 렌코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희끄무레한 빛 너머에,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미닫이문이 보였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이 방의 분위기에 위축되어 있던 렌코에게 그건 더없이 기쁜 소식이었다.
저도 모르게 기쁜 숨을 뱉고 그대로 문으로 달려 나가려던 그 때, 낯익은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우, 우사미... 우사미 렌코?”
“어, 어디야?”
전혀 알지 못할 소리만 중얼거리던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어리둥절한 렌코가 두리번거리자, 목소리는 다시 한 번 그녀를 불렀다.
“이, 이쪽이야... 여기라구...!”
그제야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알아챈 렌코가 급히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달려갔다.
목소리의 주인은 벌거벗은 채 낮게 손을 흔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퍽이나 우스운 꼴이었지만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절실함이 그런 분위기를 깼다.
목소리의 주인이 남자라는 것을 본 순간, 이 남자가 갑자기 덤벼들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는 해코지할 생각은 없는 듯 그녀를 보자마자 어린애처럼 울기 시작했다.
“너, 너 맞구나! 렌코, 정말 너였어!”
“누, 누구신지...?”
퀭한 얼굴로 주저앉아 펑펑 우는 모습이 얼마나 서럽던지, 렌코는 당황해버렸다.
그러나 숨이 꺽꺽 막힐 정도로 눈물을 훔치는 남자가 뱉은 말에 그녀는 머리가 멍해졌다.
“나, 나야... 나라구! 타테야마 슈지란 말이야!”
-9-
몇 분이 지나고, 렌코는 어느 정도 진정된 타테야마를 향해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
“그,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라고. 너야말로 대체 왜 여기에... 아니, 메리, 메리는 어디 있어?”
그녀의 주변을 살피며 메리부터 찾는 모습에 렌코의 기분이 상했다.
‘여기서도 메리를 찾는 거냐, 이 인간은.’
“메리는 당연히 집에 있겠지. 그보다 너, 바깥에서 실종처리 된 건 알고 있어?”
“뭐, 뭐라고?”
타테야마는 눈을 크게 뜨더니 신음했다.
그는 웹사이트의 ‘히로게시’라는 사람이 올렸던 사진이나 렌코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떡지고 들쑥날쑥 자라난 머리칼하며, 그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한 듯 몸에서 고약한 냄새가 풀풀 났다. 뭣보다 한 쪽 눈은 안구암이라도 걸린 듯 제 혼자 빙글빙글 돌아갔고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새까맣게 탄 피부나 하이톤의 목소리는 분명 그녀가 알던 타테야마였다.
“대체 어쩌다가 그런 꼴이 된 거야? 응?”
“그, 그건...”
그는 말하길 꺼리는 듯, 잠시 주저했지만 결국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환상향이야. 너도 들어는 봤겠지? 환상향을 먹고, 다른 것들로는 도저히 그 기분을 느낄 수가 없어서... 다시...”
“마약을 했었어?”
렌코는 기가 막혀서 그의 얼굴을 노려봤다.
지방에서 수도권 대학까지 왔길래 제법 건실한 녀석인 줄 알았는데, 설마 마약이나 손을 대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러나 타테야마는 오히려 그녀에게 반문했다.
“그러는 너도 환상향을 먹고 온 거 아니야?”
“어, 어?”
당황한 채 말을 더듬자, 그것 보라는 듯, 타테야마의 입가가 비틀어졌다.
“...어차피 여기 온 녀석들은 죄다 똑같아. 다들 환상향을 먹고 나서, 혹은 다시 구하려다가 이곳에 오게 된 녀석들뿐이야.”
“이, 이 많은 사람들이 전부?”
“너라면 어떻게 그 쾌감을 잊어버리겠어...?”
백여 명은 넘어갈 듯한 방안의 인원에 숨을 삼킨 렌코였지만 이어진 그의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환상향을 먹어보지 않은 그녀였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겠지만, 이미 환상향이 주는 쾌감을 기억하고 있는 그녀는 그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대체 어느 누가, 세상이 붕괴하고 재탄생하는 경계에서 느낀 쾌감을 잊어버릴 수 있겠는가? 그건 마치 죽음과도 같았다. 죽음 직전에 인간은 가장 강한 황홀함을 느낀다던가? 그야말로 달콤한 죽음이었다.
“...그리고 고작 마약 정도로 뭘 그래?”
“무슨 소리야?”
“너...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타테야마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눈으로 렌코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한 쪽 손을 내밀었다.
렌코는 그의 시선에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내밀어진 손을 살폈다.
“이건...”
“응. 맞아. 네가 생각하는 그거야.”
그의 팔 여기저기에 주삿바늘이 있었다. 대부분 비교적 최근에 생긴 것들로, 그가 실종된 사이에 투여된 것 같았다.
“우리는 항상 일정 시간이 되면 마약을 투여 받아. 우리의 의지 같은 건 상관없어. 그저... 그게 다야. 하지만... 여기는 단순한 마약공장이 아니라고, 렌코.”
“단순한 마약공장이 아니라니...”
렌코는 이 방에 오기 전 이름패가 걸려있던 방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들의 모습은 일반적인 마약공장에서 할 법한 모습은 아니었다.
인간의 존엄성, 그 자체를 깎아내리고 그저 쾌락만을 주입한 짐승 같은 모습이었다.
“오면서 보지 못한 거야? 여기는 우리 생각보다 좀 더...”
타테야마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였다.
전조도 없이 그의 주변의 공간이 갈라졌다. 허공이 갈라졌다는 표현은 제법 이상할지도 모르겠지만, 도저히 그 말 외에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렌코는 갈라진 허공의 틈새로 보이는 수많은 눈동자들, 그리고 전혀 속이 내비치지 않는 심연을 보자마자 그것이 메리와 늘 보던 ‘경계’라는 것을 깨달았다.
딱! 딱! 딱!
뭔가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신경을 건드렸다.
미간을 찡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던 렌코는 그 소리가 근처에서 나는 걸 깨달았다. 타테야마였다. 그는 그 옆으로 생긴 경계를 보자마자 미친 듯이 몸을 떨며 이를 부딪쳤다.
“왜, 왜 그래? 무슨 일인데?”
너무 갑자기 변한 그의 태도에 렌코도 덩달아 당황했다.
이제 보니 비단 그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의 주변에서 널브러진 채 초점 잃은 시선만 보내고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그와 같은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딱! 딱! 딱! 딱!
방 전체가 이가 맞부딪치는 소리로 가득해지자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나, 날 데려가려고 온 거야...”
“널? 누가? 어디로?”
“모, 몰라! 하, 하지만... 가야 해. 가지 않으면 안 돼...”
“잠깐만, 네가 왜 가야 한다는 건데?”
이 공장에 관해 겨우 알고 있는 녀석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 그런 계산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친구를 짝사랑하는 녀석을 저 불길한 경계너머로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타테야마는 이미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
“렌코, 너는... 몰라서 그런 거야. 나도 저 기분 나쁜 눈구멍 사이로 들어가면 어디로 가는지 몰라. 하지만...”
“그럼 안 가면 되잖아!”
렌코는 이미 반쯤 몸을 돌린 그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중간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가로막혀 튕겨나 버렸다.
“...결계?”
그동안 비봉구락부를 하며 얻은 경험은 그것이 결계라는 것을 단박에 깨닫게 했다.
허공의 흔들림이 잦아들고, 타테야마의 질린 얼굴이 드러났다.
“소용없어. 이 보이지 않는 뭔가가 우리를 막고 있어. 우리라고 괜히 도망치지 않은 게 아니야.”
“기다려, 타테야마! 나, 나 이런 쪽은 잘 알고 있어! 조금만 기다리면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우사미 렌코.”
“.......”
렌코의 숨이 멈췄다.
타테야마의 줄곧 흔들리던 눈알도 방황을 멈추고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약에 가려진 총기가 돌아온 눈이었다. 체념했으나, 환상에 취하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는 눈이었다.
“...난 가야해. 누가 우릴 부르는 건지는 모르지만, 내가 처음 왔을 때 이 안으로 가지 않은 사람은 죽었어. 말 안 듣는 기계를 버리듯이, 그냥 죽였다고.”
“...그런, 일은...”
“물론 이 안으로 들어간다고 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 하지만... 적어도 당장 죽는 것보다는... 낫잖아?”
렌코는 깨달았다.
그녀가 여기까지 오면서 줄곧 일방통행적인 복도를 걸어왔듯이, 그 역시도 일방통행을 강요받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뭐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지만, 사실 두 사람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타테야마는 천천히 심연의 경계 저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잘 들어. 네가 뭘 봤는지 모르겠지만 여긴 상상보다 더 미친 곳이야. 이런 건 절대로 있어선 안 돼. 마약한 것에 대한 인과응보든 뭐든, 이런... 개좆같은 빌어먹을 건... 있어선 안 된다고...”
그의 몸이 크게 떨렸다. 그러나 덜덜 떨면서도 그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렌코, 꼭 도망쳐. 그리고 매스컴이든 뭐든, 제기랄, 알았지? 응? 꼭, 나가서...”
이윽고 그의 몸이 완전히 어둠에 잠겼다.
렌코는 더 이상 그가 같은 공간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윽... 뭐, 뭐야...”
타테야마가 사라졌음에도 경계는 여전히 그 아가리를 열고 있었다. 착각이겠지만, 그 안에서 껌뻑이는 눈들이 그녀를 쏘아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둠을 두르고 쏘아보는 시선이 어찌나 매섭던지, 렌코는 고개를 돌려 피하려 했지만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이를 악물고 마주봤다.
그 후로 눈은 몇 번 더 깜빡이더니 처음 나타났을 때와 같이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경계가 닫히자 안심한 듯, 주변의 사람들이 다시 알지 못할 소리만 반복하기 시작했다.
꿈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가야 해. 계속, 가야 돼.”
한동안 그들의 환청을 듣고 있던 렌코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앞에, 문이 있었다.
-10-
그 후로도 렌코는 몇 개의 방을 지나쳤다.
처음에는 ‘카자미 유카’라는 이름이 붙어 있던 방을 지났을 때가 떠올라 보지 않으려 했지만, 그런 그녀를 놀리기라도 하듯 방들은 반드시 그녀가 제대로 보고 갈 수 있는 구조로 이어져 있었다.
“.......”
중국풍 옷을 입은 여자, 인형들 사이에 파묻힌 소녀, 메이드 옷을 입은 소녀, 박쥐 날개를 달고 있는 소녀, 눈이 달린 모자를 쓴 소녀 등등... 하나 같이 풍속점이나 코스프레 샵에서나 볼 수 있을 다양하고 괴상한 옷차림뿐이었지만, 그들에게도 공통점이 있었다.
그녀들은 처음 봤던 방과 같이 어딘지 풀린 눈으로 성관계를 맺고 있었다. 개중에는 반항하려는 여자도 물론 있었지만, 남자들이 주사를 놓거나 불그스름한 약을 먹이자마자 그런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그저 약에 취해 신음을 내뱉는 것만이 전부였다.
“...적당히 하란 말이야...”
까득, 입안에서 불쾌한 소리가 울렸다.
타테야마는 경계로 사라지기 직전, 이곳이 자신의 상상보다 훨씬 미친 곳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지금, 우사미 렌코는 그 말을 뼈저리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의 존엄성? 다 부질없는 말이었다. 이 안에서 인간은 그저 해롱거리는 가축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다. 여자는 약이 주는 쾌락에 몸을 싣고, 남자는 환장한 듯 허리만 움직이다가 죽어버린다. 그게 끝이었다.
마치 성경에 나온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케 했다. 환상, 쾌락만을 좇은 인간은 덧없이 파멸해버린다.
하지만... 대체 누가 심판을 내린단 건가?
인간이 파멸하는 건 결국 인과응보, 자업자득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체 누가 그들에게 쾌락을 강요하고, 답이 정해진 외길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자의로 약에 취했다면 납득할 수 있었을 거다. 그러나 타테야마도, 소녀들도, 모두 자의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파멸은, 누군가에게 억지로 강요된 것이었다.
“...또냐.”
거칠어진 말투를 의식했다.
그녀의 앞에는 또 다시 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태까지 지나온 철문들과 다르게 대나무로 엮여 있었다.
렌코는 주저 없이 손잡이를 당겼다.
방안은 온통 대나무뿐이었다. 그것도 이미 죽어있거나 장식용 가짜가 아닌 전부 살아있는 진짜였다. 사진을 제외하고는 실물은 처음 본 렌코도 솔직하게 감탄했다. 그러나 이내 처음 봤던 방의 꽃들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코를 막았지만 풀냄새를 비롯한 흙내음 외에는 별다른 향이 나지 않는 것을 눈치 챘다.
“괜찮... 겠지?”
천천히 코를 막은 손을 떼고 발길을 옮겼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늘을 올려 봤지만, 하늘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나무들은 보이지도 않는 천장을 향해 쭉쭉 자라나있었다.
렌코는 쉬지 않고 걸었다. 체감 상 30분쯤 지났을 무렵, 그녀는 이상함을 느꼈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줄곧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 같은 기시감이 느껴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럴 리가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계속 앞으로만 걸었는데 같은 자리를 돌 리가 없잖아.’
한편으론 온갖 추측과 가설이 떠올랐지만 렌코는 ‘착각’이라는 한 마디로 그 모든 생각을 지워버렸다. 그녀답지 않았지만, 그건 어쩌면 충분히 지쳐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렌코는 기대 없이 떠돌았다. 빽빽하게 자란 대나무들이 시계를 가렸다.
‘죽림이란 건 이렇게나 헤매야하는 곳이었나.’
꼬르륵.
“.......”
배가 고프고 목이 말랐다. 결국 그녀는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벌러덩 뒤로 드러눕자 긴장과 노동의 연속으로 지친 다리가 비명을 질렀다. 그야 물론 몇 시간이나 계속 걸었으니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멍하니 드러누운 렌코의 눈이 반짝였다.
“이거, 먹을 수 있겠지.”
그녀의 눈앞에 죽순이 자라나 있었다.
죽순에 대해서는 맛만 알고, 어디까지나 합성으로만 봤던지라 솔직히 말하면 조금 헷갈리는 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건 틀림없는 천연의 죽순이었다.
어느 지방에서는 죽순을 생으로 씹어 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처음 죽림에 들어왔을 때 가졌던 경계는 극도로 낮아져 있었다. 당장은 굶주림이 더 강했던 탓이다.
꿀꺽, 침이 넘어가고 그녀가 죽순을 덮고 있는 흙을 천천히 파낼 즈음이었다.
“......끄읏! 그으윽!”
“.......”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이람.
대나무 너머에서 들린 신음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지, 씻지도 않은 죽순을 생으로 먹으려 하다니. 방황할 정도로 넓은 죽림은 사람의 정신을 피폐하게 하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배고파서 먼저 죽어버릴 것 같았다. 우선 여길 나가면 식당부터 가야겠다고 생각한 렌코는 조심스레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걸어갔다.
죽림은 지나치게 조용했지만 애당초 맨발로 흙 위를 걷는 그녀가 작은 소리라도 낼 리는 없었다.
푹! 푹!
줄곧 예민해 있었고, 지금은 죽림의 완벽한 침묵에 극도로 날카로워진 청각으로 전해진 소리. 렌코는 그것이 뭔가를 찌르는 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있는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여태까지와 다르게 위협이 될 만한 무언가를 소지한 인물임에도 틀림없었다. 그녀는 완전히 잠들지 않는 자기보호의 본능이 가슴 속에서 꿈틀거림을 느꼈다.
‘도망칠까...?’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그것은 정말 찰나였다. 설령 지금 대나무 군락 바로 앞에 있는 위험을 피해간다 해도, 훨씬 더 지리멸렬하고 혹독한 최후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 뻔했다. 어쩌면 타테야마를 데려간 그 불길한 경계가 다시 그녀 앞에 나타날지도 몰랐다.
결국 이번에도 선택지는 없었다. 그녀는 지금까지처럼 다시 앞으로 소리 없이 나아갔다.
사각!
“...가흑! 크, 하악...!”
“이건 어때?”
아무래도 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닌 듯, 더 가까이 다가가자 누군가의 대화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건 대화라기보다 한 쪽의 일방적인 중얼거림 같았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합...”
렌코는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뜨고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대나무 사이로,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두 명의 여자가 있었다.
각각 백발과 흑발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정 반대의 여성들이었는데, 한 쪽은 수술대 같이 생긴 탁자 위에 올라가 가죽끈으로 묶여 있고, 다른 한쪽은 반대로 그런 백발의 여성을 내려 보고 있었다.
비단 그것만이라면 여태까지 이런저런 광경을 지나온 렌코도 이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흑발의 여성이 손을 움직이자 기세좋게 피가 튀었다. 그러나 여성은 솜씨 좋게 피를 피해내고선 들고 있던 가위를 떨어트렸다. 동시에 가위의 끝에 걸려있던 시신경과 함께 눈알이 툭, 떨어졌다. 검붉은 눈이 희미하게 웃음기를 머금었다.
“어때, 모코우. 이런 것도 나쁘진 않지?”
“그으, 흐으으윽...”
“어머, 설마 우는 거니? 네가?”
모코우라는 불린 여자의 왼쪽 눈은, 정밀한 수술기구도 아니고 봉제용 가위로 거칠게 후벼 파인 탓에 눈가 주변이 완전히 뻥 뚫려 있었는데, 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연신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이었지만, 흑발의 여성은 오히려 불쾌한 듯, 바닥에 떨어진 눈알을 발로 밟아 으깨며 슬쩍 손을 들었다.
“모코~우. 좀 더 재미있는 반응을 보여줘. 언제나 그랬잖아? 아니면... 혹시 이게 필요한 거니?”
“─────!”
고통으로 떨리던 모코우의 몸은 흑발 여성의 손에 들린 물건을 보자 그 떨림은 한층 더 강해졌다.
흑발의 여성의 알약을 들고 있었다. 피처럼 붉게 빛나는, 그것은 렌코도 익히 알고 있는 약이었다.
여성은 모코우의 반응이 눈에 띄게 나타나자 그제야 빙긋 웃었다.
푹!
모코우의 쇄골에 수술용 메스가 박혔다. 메스는 어찌나 예리하던지, 여자의 손길에 따라 쇄골부터 승모근까지 거침없이 횡단했다.
“그래, 그렇지. 모코우는 역시 이게 좋은 거구나.”
“끄으으으윽! 우으으윽! 끄으!”
모코우는 메스가 박힌 것에 아랑곳 않고 미친 듯이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이 묻어나는 비명이 아니었다. 그렇다기보다는 여자의 말에 부정하려는 듯한 그런 필사적인 의사가 섞인 동작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더더욱 깊이 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래. 지금 줄게.”
“끄으, 그, 그만해, 카구야!”
“그만 하지 않아~.”
카구야라고 불린 여자는 모코우의 재갈을 벗기고 들고 있던 환상향을 직접 입안으로 넣으려 했다. 모코우는 어떻게든 그것만은 피하기 위해 몸을 흔들었지만 온몸에 묶인 끈 때문에 소용없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콰득!
뭔가가 씹히는 소리가 들렸다.
“......모코우?”
렌코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그녀가 그리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보다 심한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모코우라 불린 여자가 카구야라는 여자의 손을 그대로 씹어버린 것이다.
까득 까득, 마디뼈가 치아에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퉤, 모코우는 침을 뱉듯 입안에 있는 것들을 저 멀리 뱉어냈다.
“...응, 그래. 그렇게 하는구나.”
카구야가 웃었다. 투명하고도 날카로운 유리 조각처럼, 그야말로 매끄러운 웃음이었다.
렌코는 다리의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아 벌벌 떨었다. 눈앞의 광경이 자극이 심한 탓도 있었지만, 그 눈웃음이 소름끼치도록 무서웠다.
한 쪽 손의 손가락이 모조리 잘려나갔는데도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것이 지나친 분노 때문이든 혹은 다른 이유가 있든, 어떻게 한 마디 비명조차 없이 웃을 수 있단 말인가? 약에 취한 상태에서는 고통마저 쾌락의 일부로 인식되겠지만, 저 여자의 눈은 분명한 현기가 있었다. 현실을 지각하고 환상에 있기에, 어쩌면 그래서 더 무서운 걸지도 몰랐다.
카구야는 손가락이 모조리 잘려나간 손을 강하게 털어내더니, 멀쩡한 손으로 품속을 뒤졌다.
“그, 그만둬! 그만두라고!”
절정으로 치달은 극단의 동요 속에서 카구야는 입술을 스윽, 핥으며 모코우에게 다가갔다.
다음은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손을 씹혔으니 똑같이 손가락을 자르려는 걸까, 온갖 무서운 상상이 한데 섞였지만, 렌코는 이상하게도 눈을 감지 않았다. 품속에서 꺼낸 카구야의 손이 빛을 발했다.
정신을 차려보면, 렌코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있었다.
그것은 뜨겁게 달군 쇠처럼 빛나고, 또 타올랐다. 아니, 그건 착각이었다. 그저 스치는 빛을 모조리 투과해내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환상향. 수십 개는 될 듯한 알약이 그녀의 손 위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있었다.
말이 수십 개지, 마약이 중추를 자극해 사람을 각성상태로 이끈다는 점, 그리고 시중에 유통되는 약보다 몇 배는 강력한 환상향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저건 사람을 죽이려는 행위에 가까웠다.
그러나 카구야의 움직임은 거침없었다. 그녀는 손가락이 뭉텅이로 뜯겨나간 손으로 모코우의 입을 강제로 벌렸다. 모코우는 이번에도 손을 씹어버리려고 했으나 카구야의 주변으로 떠오른 메스 하나가 그녀의 턱을 찔러 고정시켰다.
“그윽! 그으으윽!”
단말마가 울리고, 환상향이 후두둑 쏟아지며 모조리 입에 처박혔다. 모코우는 경기를 일으키며 어떻게든 뱉어내려 했으나 카구야의 손이 목구멍 안까지 틀어막고 있었다. 쇼크보다 기도가 막혀 죽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시간이 흐르고, 가죽끈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발버둥 치던 몸이 멎었다. 죽은 것은 아니었다. 단, 그건 죽음보다 더한 모습이었다.
“흐... 아하하... 하하...”
백치처럼 멍한 웃음소리. 맛이 간 모코우의 눈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부적이 덕지덕지 붙어있던 그녀의 바지는 오줌이라도 지린 건지 온통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턱과 쇄골에 메스가 박히고, 한쪽 눈은 억지로 적출당한 채로 실실 웃는 모습이 지나치게 리얼한 탓에 오히려 일그러진 예술품 같은 모습이었다.
“웩... 우윽... 쿠웩!”
렌코는 그 자리에서 쉼 없이 토했다. 어젯밤에 먹은 환상향을 토해낼 기세로 꾸역꾸역 토해냈다. 눈앞에 미친 살인자가 있다는 점도 머릿속에 나지 않았다. 그저, 지금은 구역질만 났다.
“최근의 상식은, 아무래도 꿈과 현은 동의어라는 것 같아. ...뭐, 그렇게 말해도 어디까지나 그 여자가 한 말이지만.”
끈적하게 늘어지는 침을 닦아 내고 있자니 카구야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토록 요란하게 굴었으니 그녀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했다.
카구야는 적어도 당장은 그녀를 해치려는 의사가 없는지, 수술대 위에 팔꿈치를 기대고, 입에는 거품을 물고 간질 환자처럼 몸을 떠는 모코우의 입에서 아직 다 녹지 않은 환상향 한 알을 꺼내 빛에 비추었다.
“그렇다면 이 약은, 환상향은 대체 어떨까? 너희 인간만이 아니라 요괴와 요정, 심지어 머리 빈 요수들에게마저도 쾌락을 주고 꿈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이 약은... 현실일까?”
“.......”
“깨닫지 못하고 환상에 머무를 너, 그리고 그 환상을 깨고 바깥으로 나갈 나비. 어디의 너도 진짜라고 단언할 수는 없어. 지금의 상식으로는 양쪽 모두 너 자신이니까, 오히려 둘 다 진짜일지도 모르고.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네.”
“.......”
렌코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녀의 분위기에 압도된 걸지도 몰랐다.
“환상에 도전하는 자는 환상과 함께 사라진다... 환상향에 도달하는 너일까, 현실로 회귀하는 너일까?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겠지.”
꿀꺽. 카구야는 반쯤 녹은 환상향을 삼켰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고, 그녀는 휘청거리는 몸으로 걷다가 등을 돌리고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
“...나가는 문은 저쪽. 나는 지금의 삶도 나쁘진 않지만 여전히 지루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 환상이란 건,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니까.”
눈으로 그녀의 손을 따라가자, 대나무 잎들 사이에 아주 교묘하게 가려진 문이 있었다. 이번에도 들어왔던 문과 같이 대나무로 엮인 문은 아무리 눈이 밝은 사람이라도 쉽게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실제로 렌코도 카구야가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영영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정체가 무엇이건 간에, 렌코는 길을 일러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 자리에 있던 수술대와 각종 기구들, 그리고 두 사람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있었다.
렌코는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꿈이라도 꾼 걸까?
‘깨닫지 못하고 환상에 머무를 너, 그리고 그 환상을 깨고 바깥으로 나갈 나비. 어디의 너도 진짜라고 단언할 수는 없어. 지금의 상식으로는 양쪽 모두 너 자신이니까, 오히려 둘 다 진짜일지도 모르고.’
어딘지 쓸쓸해보이던 카구야의 목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꿈과 현실, 과연 어느 쪽이 더 일반한가?
렌코는 대답 대신, 문을 열었다.
-11-
“이, 이게 대체... 뭐야...!”
기계처럼 끊어지는 목소리로, 우사미 렌코는 비명을 질렀다.
지금 그녀의 기분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당혹감. 그 말 외에는 있을 수 없었다.
죽림에서 나와 문을 연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병원이었다. 온통 새하얗고, 지극히 현대적인.
‘하치(はち意) 정신과 의원.’
렌코는 익숙한 이름을 떠올렸다.
“대체 왜, 병원이?”
렌코는 무의식적으로 속마음을 입 밖으로 흘리고도 주변을 경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병원은 불이 켜지지 않아 어두컴컴했지만 시야가 분간이 안 될 정도는 아니었다. 렌코는 한 번 와봤던 병원의 배치도를 기억해내고 천천히 통로 쪽으로 향했다.
‘이것도... 함정일까? 아니면...’
확신 없는 추측이 머리 위로 부유했다.
지금 그녀가 느끼는 추위, 배고픔, 피곤함, 딱딱함, 이 모든 것들이 진짜였지만 마냥 감각을 너무 신뢰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어쩌면 지금 이 병원의 모습도 환상은 아닐까? 아니, 이전에 우사미 렌코라는 사람은 지금 현실에 있는 게 맞긴 한가? 지금까지 내가 살아있었고, 또 수많은 방들을 지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러면 안 돼. 정신 차리자, 우사미 렌코.”
끊임없는 의심 속에서 렌코는 스스로를 다그쳤다.
지금 상황은 분명 모든 것을 의심할 여지가 있다. 죽림에서의 경험은 정말로 그녀가 꿈을 꾸고 있는 건지 헷갈리게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모든 것을 의심하더라도, 자기 자신만큼은 의심해선 안 됐다. 그녀는 분명히 현실에 있었고, 이 병원 역시도 현실이었다. 객관적인 진실은 분명 거기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미 머릿속으로 알고, 의심하고 있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려 해봤자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렌코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치 정신병원은 환상향을 비롯해 지금까지 지나온 비인도적인 시설들과 연관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타테야마는 어떻게 됐을까...’
여기까지 오면서 많은 방들을 지났지만 타테야마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마 어딘가, 그녀가 보지 못한 방에 있거나...
“...그럴 리가 없어.”
그녀는 고개를 저어 불길한 상상을 털어냈다.
타테야마는 분명 살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구하기 위해서든 다른 이유에서든, 이곳을 나가야 했다. 마침내, 저 앞에 투명한 유리문이 들어왔다. 눈이 내리는 모습이 선명한, 몇 시간 만에 보는 바깥이었다.
“잠깐만요.”
그녀가 문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그녀를 제지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그렇지, 이렇게 쉽게 보내줄 리가 없지.’
이렇게 대놓고 문을 보이고 있다니. 그녀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렌코는 굳은 얼굴로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을 돌아봤다.
“...무슨 일이신가요, 야고코로(八意) 원장님.”
백은발의 머리가 발끝에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뜨린 미인, 야고코로 에이린이 카운터에 기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모든 것이 명확해진 지금 생각하면 환상향을 처음 건네준 것도, 그녀가 미행을 알아차린 것도, 그리고 가장 처음, 웹사이트의 게시판에 올라왔던 글에 언급된 판매상도 모두 야고코로 원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원장님은 불리한 질문에는 대답해주지 않으셨죠.”
환상향을 복용한 환자들은 지금 어디에 있냐는 질문. 이미 타테야마를 만났던 렌코는 그 질문의 대답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원장은 변명 하나 없이,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할까요? 이렇게 서서 얘기하는 것도 다리가 아프니 말이죠.”
“.......”
렌코가 대답하거나 말거나, 원장은 그대로 원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두운 복도에 혼자 남은 렌코는 잠시 고민했다.
지금 원장의 제안을 무시하고 눈앞의 유리문을 나가면 되었다. 그러면 더 이상 피곤할 일도, 골치 아플 일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자꾸 원장실로 향했다. 원장은 그녀를 여기까지 오게 하는 데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 않았다. 물론 다소 정신적인 충격이 있긴 했지만 어쩐지 그건 지금을 위해 일부러 보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야고코로 원장은, 렌코와 대화를 원하고 있었다.
뭣 때문에?
“.......”
렌코가 알 턱이 없었다.
아니, 애당초 왜 이런 수고를 하면서까지 그녀와 대화를 원한 것일까?
문득, 렌코는 타테야마를 집어삼킨 경계를 떠올렸다. 어차피 지금 멋대로 저 문을 나선다 해도 경계나, 렌코를 미행했던 투명인간이 언제고 다시 쫓아올지 몰랐다.
“선택권은 또 없잖아...”
살며시 입술을 깨물고, 그녀는 원장실로 들어갔다.
원장은 전에 봤던 소파에 앉아 커피를 타놓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
“일단 좀 앉아요.”
원장이 맞은편의 소파를 가리키며 말한 손이 무색하게 렌코는 꼼짝도 하지 않고 원장을 지그시 노려봤다. 지금까지 거쳐 온 경험이 그녀의 경계심을 늘린 것 같았다.
원장은 쓴 웃음을 지으며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믿지 않으시는군요.”
“지금 누구를 믿을 수 있겠어요. ...게다가 당신이라면 더더욱!”
“어차피 제게 지금 당장 당신을 해칠 생각이 없다는 건, 렌코 양도 잘 알잖아요?”
렌코 양은 머리가 좋으니까요─, 원장이 그렇게 덧붙였다.
원장이 그렇게까지 대놓고 말하자 렌코는 그제서야 어깨를 으쓱하고는 소파에 앉았다.
“커피라도 한 잔 들어요. 인스턴트긴 하지만 아무것도 못 마셨을 테니.”
원장이 그렇게 말했지만 렌코는 모락모락 김이 나는 커피를 노려보기만 할 뿐 손도 가져가지 않고 입을 열었다.
“왜 저를 보고 싶은 건지, 그리고 왜 이런 시설을 만든 건지 설명부터 듣고 싶은데요.”
‘이런 상황에 오히려 몰아붙이고 있다니.’
원장은 당차게 쏘아대는 렌코에게 살짝 감탄했다. 지하에서 그런 수라장을 겪었음에도 이렇게 당당할 줄이야.
“음, 어디부터 얘기해야 할까. 우선 두 질문의 가장 근본적인 대답은 제가 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또 회피하시는 건가요?”
“그럴 리가요. 전 그저 부탁받았을 뿐이에요. 쉽게 말하면... 렌코 양을 시험해 달라는.”
“시... 험?”
“제가 말해 줄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아요.”
원장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렌코 양. 꿈... 그러니까 환상이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야 물론... 꿈은 꿈일 뿐이에요. 한낱 허상, 허깨비에 지나지 않아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한낱 허깨비일 꿈은 항상 우리와 이어져 있어요. 없어선 안 될 정도로 익숙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꿈과 현실이 다르다는 주장은 틀림없어요.”
“동감이에요. 하지만 꿈은 현과 같은 말이기도 해요. 여기부터는 제 의견은 아니지만, 지금은 꿈과 현을 구분하더라도 같은 개념으로 여기고 있죠. 꿈속의 나도, 현 속의 나도, 모두가 ‘나’라는 한 개인이에요. 그렇다면 어디의 누가 남든, 결국 그건 나 자신이잖아요? 그 말은 곧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는 말이 아닐까요?”
“...당신의 말은 궤변이에요. 상대성 정신학에서는 분명 꿈과 현을 같은 것으로 보고 그렇게 주장해요. 꿈을 뇌가 보여주는 허상의 일환, 현실의 생리현상에 포함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런 주장들은 전부 개인의 주관에서 비롯됐을 뿐이에요. 정말로 명확한 진실을 찾고 싶다면, 주관에서 벗어나 믿을 수 있는 객관에서 찾아야 한다고요. 꿈과 현실이 아무리 깊게 이어져 있다고 해도 우리가 꾸는 꿈이 실체가 될 순 없어요. 꿈은 현실과 다르니까요.”
“그렇지만 ‘꿈과 현을 구분하더라도 같은 개념으로 여기고 있다.’ ...이 표현은 어딘가 익숙하지 않나요?”
렌코는 미간을 찡그렸다.
원장이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해서 시간을 벌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꿈과 현을 같은 개념으로 여긴다... 같은 개념... 잠깐, 같은 개념?’
같은 개념으로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경계가 사라진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렌코는, 최근 들어 그런 경험을 한 기억이 있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설마, 환상향이라는 건가요?”
환상향을 입안에 넣었을 때, 그녀는 분명 현실에 환상에 덧씌워지고 채색되는 경험을 했었다. 말 그대로 둘의 구분이 사라져버렸다.
“꿈이 먼저냐 현이 먼저냐, 꿈과 현이 같으냐 다르냐, 이런 질문은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그런 시대적인 사고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응하느냐겠죠. 환상향을 먹고 환상에 남을지 현실로 회귀할 지는 본인의 선택에 따른 문제에요. 그들은 다시 환상향을 찾았고, 우리는 그들의 바람을 들어줬어요. 그들이 여기 있는 건 모두 그들의 선택이었어요. 그저 그뿐인 이야기죠.”
“그 말은 틀렸어. 당신들은 그저 그들에게 선택을 강요했을 뿐이에요. 자의가 아닌 강요된 선택이 어떻게 그들의 의지라는 거죠? 경계의 틈으로 들어가기 직전, 타테야마는 눈을 떴어요. 그는 현실을 직시했다고요. 그거야말로 선택이에요. 당신들이 한 짓은, 유리한 입장에 선 자가 무지한 자를 농락한 비겁한 행동에 지나지 않아!”
탁. 다 마신 종이컵을 탁자에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렌코와 원장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자리를 지켰지만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원장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솔직히 나는 그 정도 각오조차 하지 않은 녀석들이 환상을 넘본 것에 대한 인과응보라고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네.”
그 말을 공격의 신호로 받아들인 렌코가 다급히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원장은 공격 대신 품속에서 낯익은 케이스를 꺼냈다.
“그건...?”
“환상향이에요.”
그건 렌코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이제 와서 환상향을 꺼낸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렌코 양, 당신은 꿈과 환상이 서로 다른 거라고 했어. 그리고 우리가 한 건 선택권을 준 게 아니라 선택을 강요했을 뿐이라고도. 그렇다면 당신의 뜻대로 가장 공정한 방식을 취하겠어. 자, 이 환상향을 먹어. 만약 당신이 한 말대로 꿈과 환상이 전혀 다른 거라면 당신은 환상 속에서도 눈을 뜨고 현실을 볼 수 있겠지. 그래, 그 타테야마라는 남자처럼. 당신의 말은 스스로 증명해 봐.”
“그게 어디가 공정하다는...”
“당신은 지금 여기서 나갈 수도 있어.”
렌코의 말을 끊고 원장, 야고코로 에이린의 눈이 빛났다.
“원한다면 이대로 문을 나서도 좋아. 하지만 그 경우 당신은 이 안에 있었던 일들을 발설해선 안 돼. 하지만 지금 내 제안에 수락하고 당신이 눈을 들 수 있다면... 이 안에서 당신이 보고 느낀 모든 것들을 매스컴에 알려도 좋아.”
“......그래서 당신이 얻는 게 뭐길래?”
“말했잖아. 부탁받았다고. 어차피 우리는 인외. 이 시설이 없어져도 사는 데 지장은 없어.”
말 그대로 시험이었다.
이대로 혼자 도망쳐 살아가느냐, 아니면 양심을 지키고 그녀 자신의 말을 몸소 입증하느냐. 편안하게 죽을지도 모르고, 고통스럽게 살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반대가 될 수도 있겠지.
이번만큼은 그녀가 선택해야 했다.
“.......”
힐끗, 원장실의 열린 문 너머에 투명한 유리문이 보였다.
「...렌코, 꼭 도망쳐. 그리고 매스컴이든 뭐든, 제기랄, 알았지? 응? 꼭, 나가서...」
“.......”
손을 가져가 케이스를 열자, 마치 잘 다듬어진 루비처럼 빛나는 알약이 있었다. 이 약을 먹으면 어떤 결과가 있을지는 불 보듯 뻔했다. 이미 여기까지 오면서 질리도록 보아왔다. 이 작은 알약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야고코로 원장. 당신은 심리를 파악하는 데 전문가야. 여기까지 오면서 내내 그걸 느꼈고 또 지금 당장만 해도 절실히 느끼고 있어. 하지만 말이야...”
렌코는 손을 뻗어 알약을 쥐고, 그대로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당신은 사람의 마음을 파악하는데 서툴렀어.’
타테야마를 만나게 한 것이 실수였다.
만약 렌코가 그를 만나서 이 시설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고, 또 마음을 다잡지 못했다면, 지금과는 다른 선택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타테야마로 인해 굳어진 마음이 지금의 선택을 이끌었다.
꿀꺽, 환상향이 목을 넘어갔다.
“하... 악!”
렌코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온 몸이 뜨겁다. 발끝에서부터 시작된 간질이는 느낌이 하복부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아응, 흐읏...”
렌코는 간드러지는 신음소리를 참으면서 감기는 눈을 애써 떴다.
처음 복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현실과 환상이 융합하고 있었다.
정신 차려야만 했다. 이대로 있어선 안 됐다.
렌코는 앞니로 입술을 찢을 듯이 깨물고는 탁자의 모서리를 붙잡고 일어섰다. 두 다리가 푸들푸들 경련을 일으킨다.
안 돼. 이대로는...
탁자 위의 커피가 보였다.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렌코는 그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끄, 꺄으윽...!”
비릿한 피맛이 느껴진다. 깨물고 있던 입술이 찢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깊은 아픔이 다리에서 올라왔다. 들이부은 커피가 다리에 화상을 입힌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부족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신을 유지해야 했다.
쾅!
안 그래도 어지러운 머리를 바닥에 들이박자 눈앞이 핑 돌았다.
쾅!
이마가 찢어졌는지 빨간 피가 물감처럼 흘렀다.
쾅!
다시 한 번 머리를 박는다.
그제야 흐트러진 시계가 좀 정상적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나가야, 해...!”
렌코는 비척비척 걷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피 섞인 땀이 비처럼 쏟아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쉬었다간 정신을 놓쳐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눈앞에 유리문이 있었다.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그녀는 전력을 다해 팔을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처절하게 떨리는 손이 유리문에 닿았고,
[안녕히 가세요]
기계음이 들렸다. 쿠당탕! 그녀의 몸이 그대로 고꾸라졌다. 한 겨울, 매서운 눈바람이 불고 있었다.
“하하... 아하하하... 하하하!”
그녀가 환상을 이겼고, 그렇게 생각한 렌코는 눈을 감았다.
-13-
오너의 취향인지, 골동품이나 다름없는 낡은 빈티지 라디오는 속보를 전하고 있었다.
[다음 소식입니다. 최근 교토 시내에서 한복판에서 드러난 마약 재배장이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는데요. 정신병원으로 위장한 이 건물에서는 마약의 재배뿐만 아니라 인신매매, 성매매를 비롯해 각종 인체 실험 역시도 자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범인들이 여전히 종적을 감추고 있는 가운데, 시민들은 한 국가의 수도에서 이런 일이 생길 때까지 정부는 무엇을 했느냐는 비탄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특파원 연결하겠습니다.]
훗카이도에서 유례없는 폭설로 교통에 마비를 겪고 있는 겨울, 교토는 눈은커녕 오히려 온화한 기온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런 교토의 중심에 위치한 대학구 내의 카페에서 머리에 붕대를 한 소녀가 포크를 내려놨다.
“...그래서 말이야, 진짜 정말 죽은 줄 알았다니까. 타테야마 녀석, 괜히 혼자 폼 잡고 사라지더니 살아서 보니까 얼굴 죽을 만큼 빨개진 거 있지? 참, 메리 너도 같이 봤어야 되는데!”
“어휴, 렌코도 참 그런 게 뭐가 재밌다고. 어쨌든 이번엔 정말 위험했다구. ...사실 그 안에서 죽은 사람들도 꽤 발견됐다잖아.”
“으,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이렇게 무사하니까 된 거 아냐?”
“...렌코는 이럴 때 보면, 아니 항상 보면 정말 무식해.”
“에에? 너무하네, 메리. ...얌.”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소녀, 우사미 렌코는 접시 위에 남은 파운드 케익을 통째로 삼켰다.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모습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소녀, 메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우사미 렌코는, 납치됐던 당일 기적 같이 탈출해 하치 정신병원 앞에 쓰러져있던 것을 지나가던 행인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졌다. 약에 의한 정신적 부작용, 뜨거운 커피를 뿌린 탓에 생긴 2도 화상, 그리고 살짝 찢어진 이마를 제외하면 무사한 그녀의 모습은 정신병원 지하에 있던 마약공장에 대한 신고와 함께 일본을 넘어 전 세계로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그녀의 증언이 사실이라는 것이 밝혀지자마자 정부는 부랴부랴 자위대를 동원해 타테야마 슈지를 비롯한 실종자들 전원 구출, 범인들을 추격했으나 야고코로 에이린이나 정신병원에서 일하던 간호사들, 그리고 렌코가 봤던 이상한 옷을 입은 소녀들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혹시 그 날 밤 있었던 일들은 전부 렌코의 망상이 만들어낸 꿈이고, 지금의 현실 역시도 환상은 아닐까. 자꾸만 그런 생각이 머리를 치켜들었다.
“그럴 리가 없지.”
후루룩, 렌코는 카페라떼를 마시며 중얼거렸다.
꿈과 현은 다르다. 그것은 그녀가 환상향을 먹음으로써 몸소 증명했다. 지금 먹고 있는 파운드 케익도, 카페라떼도 전부 생생한 현실임이 분명했다.
“아, 맞아. 메리, 이따가 모자 사러 가지 않을래?”
“응? 쇼핑? 하지만 너 원래 쓰던 모자는 어쩌고...”
“아아, 그거.”
렌코는 붕대를 감은 머리를 만지며 쓴웃음을 지었다.
“전에 도망치다가 잃어버렸거든. 어디로 날아갔나 봐.”
“칠칠맞지 못하기는... 그런데 그 몸으로 돌아다녀도 괜찮은 거야?”
“응, 뭐... 딱히 아프지는 않으니까. 그냥 조금 불편할 뿐이야.”
“렌코만 괜찮다면야 나도 괜찮지만.”
메리는 여전히 미심쩍다는 얼굴로 시계를 봤다.
[AM- 10:30]
“이런, 슬슬 강의 들으러 가야겠네.”
“그래? 그럼 이따 수업 끝나면 연락해.”
“알겠어. 렌코는 그럼 몸조심하고 어디로 갈지라도 정하고 있어.”
“조심할 게 뭐 있다고...”
렌코는 서둘러 카페를 나서는 메리의 뒷모습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원래는 메리와 최대한 비슷한 시간표로 일정을 짠 렌코였지만, 최근 마약공장 사건 덕분에 학교에서도 병결을 권한 탓에 그녀는 때 아닌 휴일을 맞이하고 있었다.
“...환상에 도전하는 자는 환상과 함께 사라진다, 인가.”
렌코는 죽림의 카구야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날 이후, 야고코로 에이린은 확실히 약속을 지켰는지, 그 뒤로 렌코가 미행당하는 일도, 허공에서 열린 경계가 쏘아보는 일도 없었다. 매스컴은 물론이고 그녀의 앞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지막 만남이 그랬으니 최소한 그쪽에서 접촉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솔직히 좀 기대하고 있던 것도 사실이다.
에이린은 사람들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그들에게 끝없는 환상을 제공했었다. 어찌 보면 그것은 환상이라는 자원을 남용한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환상에 도전한 것은 환상을 남용한 에이린일까, 아니면 환상에서 눈을 돌린 렌코일까?
-12-
[AM- 10:31]
메리는 여느 때처럼 카페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 옆에는 언제나 함께 있던 파트너의 모습은 없었다. 그녀는 손목에 찬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곧 있으면 강의가 시작될 테지만 그 전에 가야 할 곳이 있었다.
쏟아지는 눈을 팔을 들어 막으며 달린 끝에 도착한 곳에는 주변의 풍경에 녹아드는 새하얀 건물이 있었다.
[ 하치 정신과 의원 ]
도시 외곽에 있는 탓에 그리 환자가 많지는 않은 병원이었다.
굳이 정신과를 가려 한다면 대학 부속 병원을 찾아가도 괜찮겠지만, 메리가 눈을 맞으면서까지 이 병원에 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어서 오세요]
익숙한 기계음성이 그녀를 반겼다. 메리는 옷에 묻은 눈을 툭툭 털어내고는 걸음을 옮겼다. 다른 환자들은 없다. 그야 물론, 이 병원은 현실과 어울리지 않는 자들을 격리하는 병원이기 때문이다. 텅 빈 병원은, 범인이라면 몸서리치며 피해가겠지만, 복도를 걷는 메리의 모습은 오히려 유쾌하기까지 했다. 금세 원장실 앞에 도착한 그녀는 노크 한 번 없이 문을 열었다.
“안녕.”
“.......”
원장실은 블라인드를 내린 채로 형광등을 꺼놓고 스탠드만 켜져 있었다. 한참 생각에 빠져있던 원장, 야고코로 에이린은 뜻밖의 등장인물에 멈칫했다가 한숨을 흘렸다.
“...무슨 일로 온 거지, 야쿠모 유카리?”
불쾌함이 진득하게 묻어나는 목소리가 전혀 다른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메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소파에 걸터앉았다.
“그러니까 지금은 마에리베리 한이라니까. 야쿠모 유카리라고 부르는 건 그만 둬, 달의 두뇌.”
“글쎄, 그런 설정은 그녀가 옆에 있을 때에나 붙이던 게 아니었나?”
“아, 맞아. 잘 있나 확인하러 온 거야.”
“.......”
메리가 빙긋 웃었다. 동시에 에이린의 얼굴이 꿈틀거렸지만, 그건 아주 순식간이었다.
“그 아이라면 저 쪽에 있어.”
“응, 그래.”
야쿠모 유카리, 아니 마에리베리 한은 엉덩이를 털고 원장실 구석에 있는 문으로 향했다.
“잠깐.”
“뭐야?”
그러나 그런 그녀를 에이린이 불러 세웠다. 메리는 대놓고 귀찮은 티를 내면서도 무시하지는 않고 성실히 반응했다. 에이린은 여전히 찡그려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익숙한 솜씨로 케이스를 꺼냈다.
딸칵, 케이스 안에는 예의 빨간 알약, 환상향이 있었는데 에이린은 그것을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듯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우사미 렌코라는 그 아이는 당신의 파트너가 아니었나?”
“응, 뭐. 맞아.”
“그런데 왜 그녀를 그런 꼴로 만든 거지? 타테야마라고 했던가? 그 남자에게 환상향을 권한 건 둘째로 치더라도 그녀에게 환상향을 주라던 것, 그녀의 집주소를 알려준 것, 그리고 굳이 보여줄 필요도 없던 지하를 보여준 것까지... 이런 복잡하고 까다로운 방법을 쓸 필요가 있었나? 당신이라면 이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거나 차라리 더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에이린은 여태까지 고민했고 순수하게 가지고 있던 의문을 내었다.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보면 환상향을 처음 복용했을 뿐인 렌코가, 두 번 이상 복용하고 다시 환상향을 얻으려 한 다른 사람들처럼 납치되었던 것부터가 이상했다. 그런 사실 자체가 이미 그녀 주변에 있는 누군가가 돕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그러나 야쿠모 유카리 아니, 메리는 오히려 질문이 우습다는 듯 반문했다.
“아직도 모르겠어?”
"...역시 당신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네.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그녀는 에이린에게 등을 돌리고, 환상향을 건네받아 빛이 새어나오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은 원장실과 달리 형광등을 모조리 켜놓고 있었는데, 새하얀 벽지와 대리석에 반사된 빛 때문에 오히려 눈이 부셨다. 방의 중앙에 놓인 침대에는 익숙한 실루엣이 누워있었다. 메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가갔다.
“그러니까 내가 누누이 말했잖니. 분명 그 호기심 때문에 큰일을 당할 거라고. 그렇지?”
검은 머리, 붕대로 감싼 이마. 우사미 렌코였다. 렌코는 곤히 잠 든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때때로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는데, 그 모습이 그녀의 여성스러움을 한층 더 돋보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부자연스럽다는 건 누가 보더라도 명백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수면 중에 이렇게 거친 호흡과 열기를 내는 경우는 적었으니까.
메리는 렌코가 신음하건 말건 상관없이 침대 귀퉁이에 걸터앉아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깨닫지 못하고 환상에 머무를 너, 환상을 깨고 바깥으로 나갈 나비... 후후후. 아쉽지만 렌코, 진실은 언제나 주관 안에 있어.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건 정말로 꿈인 거지. 객관 안에 진실이 있다는 너의 말은 틀렸어. 봐, 너는 이렇게 꿈속에 있잖아. 꿈속의 너도, 현실의 너도... 결론은 하나야.”
메리는 약에 취한 렌코의 입술을 살짝 열었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환상향을 가볍게 그 안에 흘려 넣었다.
으읏, 약이 들어가자마자 득달같이 반응하는 렌코의 신체에 메리는 밝은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좋은 꿈이지? 렌코.”
-end
환상에 도전하는 자는 환상과 함께 사라진다.
작가 주: 순서대로 읽는 것이 맞으나, 13과 12는 거꾸로 읽으셔도, 혹은 한 부분을 아예 빼고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어떤 해석과 결말을 원하든 자기 입맛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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