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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회 글알못 팬픽대회

여기에 아무 말이나 적으십시오 - 카스페

[1]

 

여기에 아무 말이나 적으십시오.

 

아무 말.

 

 

[2]

 

……!”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그 농담이 재밌어서 웃는 게 아니었다. 그냥 하란다고 정말 아무 말이나 적어버린 내 자신이 조금 우스웠다.

 

이게 뭔지도 모르면서 말이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방금 주운 그 노트를 앞뒤로 돌리며 살펴보았다. 그냥 별거 없는 평범한 노트였다. 크기는 책보다는 조금 작고, 굵기도 적당히 얇았다. 여기 마법의 숲에서 주운 것 치고는 상당히 깨끗하단 것만 빼면, 정말 평범한 노트였다.

 

, 제법 깔끔하고 좋아 보이네. 들고 가서 실험할 때 메모하는 용도로 쓸까?”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노트의 다음 장을 넘겼다.

 

[3]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노트의 다음 장을 넘겼다.’

 

나는 노트의 마지막 문장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노트에는 방금까지 내가 말했던 것과 생각했던 것, 행동했던 것들이 적혀 있었다.

 

, 뭐야이게?”

 

분명 처음 노트를 주웠을 때는 아무것도 적혀져 있지 않았다. 첫 페이지에 적힌 여기에 아무 말이나 적으십시오.’라는 황당한 말만 빼고 말이다.

혹시 내용을 미리 적어놨는데 내가 보지 못한 것일까? 아니, 그건 말도 안 된다. 세상 어느 누가 키리사메 마리사가 수상한 노트를 줍고, 되도 않는 말장난을 치며 속으로 생각할 것을 적어놓았을까. 그럴 이유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이건 대체 뭐지?”

 

나는 알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며 노트의 다음 장을 넘겼다.

 

[4]

 

노트를 떨어뜨릴 뻔 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군가 숨어서 장난치는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수상한 포자가 둥둥 떠다니는 마법의 숲에 누가 있을 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속으로는 누군가 제발 있어주길 바랬다. 점점 이 상황이 질 나쁜 장난이라고 웃어넘길 수 없었기 때문에.

 

!”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노트의 다음 장을 넘겼다.

 

[5]

 

나는 노트의 다음 장을 넘겼다.

 

[6]

 

나는 노트의 다음 장을 넘겼다.

 

[7]

 

나는 노트의 다음 장을 넘겼다.

 

[8]

 

젠장, 누굴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나는 노트를 바닥으로 던졌다. 좋아, 이대로 잊어버리고 집에 들어가는 거다. 그렇게 다짐한 나는 그 노트에게서 등을 돌렸다.

 

별 이상한 것에 말려들어 버렸어. 이대로 집에 들어가서 노트에 관한 건 깡그리 잊어버릴 거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세발자국 만에 걸음을 멈췄다.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저 노트. 내 행동을 다음페이지에 그걸 적어두는, 수상하기 짝이 없는 노트. 그 노트의 마지막 장에는 뭐라고 써져 있을까?

 

……아냐, 돌아가자.”

 

더 이상 저런 것과 관계를 가지면 안 된다. 누구라도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하면 그런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나서서 노트를 집는다는 건……그야말로 목숨 내 놓는 멍청한 짓이다. 하지만 그놈의 호기심이라는 것이 계속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마지막, 딱 마지막 노트만 펼치고 가라고. 그러면 아무 문제없다고 속삭이면서. 호기심은 내 고개를 돌릴만한 힘은 없었지만, 내 발목만큼은 확실하게 붙잡고 있었다.

 

[9]

 

결국 노트를 주워버렸다. 호기심에 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딱히 별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노트의 마지막 장이 딱 붙어있어서 도무지 펼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장뿐만이 아니었다. 다음 장을 제외한 모든 부분도 마지막 장처럼 붙어있었다. 그리고 다음 장을 펼치면 방금 내가 했던 일들이 기록되어 있었고.

 

[10]

 

아무래도 이 노트는 다음 장을 넘겨야만 비로소 그 다음 장을 열 수 있는 방식인 것 같다. 마법 때문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한 것 보다 더욱 수상한 물건임에는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대로 이 마법의 숲에다 버려두어야 할까? 아니그건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만약 누군가 이 노트를 줍게 되면 내 것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언젠가는 내 손에 돌아오게 되겠지. 무엇보다도 이 노트는 내 생각과 행동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버린다고 해도, 노트의 기록이 멈출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걸 모르고 버렸다가, 누군가 내 사생활과 생각이 잔뜩 적힌 노트를 줍게 되는 건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들고 가자.”

 

정말 찜찜했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남들이 보지 못하도록 가지고 있는 게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었으니까. 결정을 내린 나는 그대로 그 노트를 품속에 넣고 집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노트의 다음 장을 넘겼다.

 

[11]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하아. 달리 방법이 없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그 노트 옆에 책이나, 잡동사니들을 쌓아두었다. 노트의 다음 장에 내 생각과 행동이 기록되는 거라면, 평생 그 노트의 다음 장을 넘기지 않으면 된다. 그러니 노트를 펼쳐두고, 요 잡동사니들을 쌓아두고 잊어버리자. 그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노트를 찢어버리거나, 태워버릴까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마법인지, 뭔지가 걸려있는 노트에 그런 것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마법 책에는 그런 보호마법이 거의 필수로 걸려 있으니까.

 

좋아, 한 장만 더 넘기자아니 한 번 더 넘기는 게 낫겠네. 거의 빈 페이지를 만들어야 하니까. 그리고 두 번 다시 다음 페이지로 넘기지 않으면 된다구.”

 

나는 그렇게 말하며 노트의 다음 장을 넘겼다.

 

[12]

 

*******

*******

*******

 

[13]

 

결국 페이지가 넘어가 버렸다.

스스로 넘긴 것이 아니었다. 노트가 멋대로 폭발했기 때문이었다. 폭발.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노트의 다음 페이지가 터져버리며 다음 장으로 넘겨 버렸다. 노트를 넘기지 않고 있다가 그 다음 장에 기록되는 문장이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쌓여버린 것이 원인이었다.

처음 위험을 느낀 것은 노트 위에 잡동사니가 들썩일 때였다. 허겁지겁 잡동사니를 치워보니 노트가 움찔거리며 페이지를 밀어내려 하고 있었다. 불안을 느낀 나는 더 무거운 것들을 쌓아두었고, 그것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미봉책에 불과한 조치였다. 문장이 기록되는 것을 더 버티지 못한 노트가, 그 무거운 물건들을 기어코 밀어내며 다음 장을 넘겨버렸으니까.

 

문제는 없겠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노트를 바라보았다. 돋보기를 들이밀어야 겨우 볼 정도로 작은 크기의 문장이 빈틈없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더 채울 공간이 없었는지 글씨위에 글씨가 겹쳐지기까지 했다. 그것이 쌓이다보니, 결국 언뜻 보면 그냥 새까만 종이로 보일 정도가 되었다.

 

어쨌든 가만히 놔두는 것도 해결책이 아니었네. 채울 만큼 채우면 알아서 페이지가 넘어가는 방식이라니.”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페이지를 넘기기 위해 노트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미처 손을 데기도 전에 노트가 스스로 다음 장을 넘겼다.

 

[14]

 

, 이게 왜 이러지?”

 

노트가 스스로 움직였다. 문장이 쌓여 터진 것의 여파일까?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노트가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노트의 이 행동이 무슨 결과를 가져다주게 될 것인지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저대로 놔두어서는 안 된다.

 

나는 노트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노트가 스스로 다음 장을 넘겼다

 

[15]

 

나는 그 노트를 책상위에 고이 펼쳐두었다.

 

노트가 스스로 다음 장을 넘겼다.

 

[16]

 

노트를 책상위에 올려둔 나는 멍하니 노트를 바라보았다. 뭔가 이상했다. 나는 노트를 어딘가 봉인해두고 버려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노트를 집는 순간, 나도 모르게 책상위에 놔두고 있었다.

 

분명 이 노트내가 책상에 놓기 전에 다음 장으로 넘어갔어. 그런 뒤에 내가 노트를 책상위에 올려두었고설마.”

 

나는 노트를 가만히 만져보았다. 어쩌면 그냥 착각일지도 모른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그때 노트가 스스로 다음 장을 넘겼다.

 

?”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노트를 바라보았다. 노트에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 실시간으로 빠르게 기록 되고 있었다.

 

맙소사.”

 

노트가 스스로 다음 장을 넘겼다.

 

[17]

 

내가 당황하던 사이 레이무가 찾아왔다. 나는 레이무에게서 노트를 숨겼다. 몇 번 대화가 오가고, 레이무는 돌아갔다. 나는 노트를 다시 꺼냈다.

 

 

[18]

 

도무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 노트가 제멋대로 움직이더니, 실시간으로 내 행동을 기록하질 않나, 이제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허구로 지어내기까지 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고장이라도 난 걸까? 역시 페이지를 넘기지 않고 놔두었던 게 문제였을까?

 

내가 그렇게 당황하고 있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리사? 문 열어.”

 

아는 목소리다. 그래서 더 당황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레이무였으니까.

 

, 레이무? 잠깐만!”

 

나는 재빨리 서랍을 열어 노트를 숨겼다. 잠깐, 내가 이걸 왜 숨기는 거지?

 

왜 그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레이무가 문밖에서 나를 재촉했다.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레이무에게 의심받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왜? 왜 나는 의심받는 걸 두려워하는 거지? 뭘 숨기려고?

문을 열자마자 잔뜩 찡그린 레이무의 얼굴이 보였다.

 

뭐 하고 있었던 거야? 이렇게 더운데 손님을 밖에다 세워두다니.” 레이무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그렇게 말했다.

미안, 미안. 옷 좀 갈아입다보니. 들어오라고.”

 

나는 그렇게 말하며 레이무를 집안에 들였다.

 

실례.”

그런데 여긴 무슨 일이야?”

 

레이무에게 물을 건네주면서 내가 물었다.

 

별건 아니고, 혹시 이 근처에서 수상한 물건 못 봤냐고 물으러 온 거야.”

수상한 물건?” 바로 떠오르는 것이 있었지만 나는 말하지 않았다.

물건이라고 해야 하나, 어쩌면 물건이 아닐 수도 있어.”

 

레이무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든 물을 단숨에 마셨다.

 

무슨 말이야?”

최근에 뭔가 강한 원한을 가진 것이 결계를 넘어왔거든. 결계에 남아있는 흔적으로 봐선 살아있는 생물은 아니었어. 그런데 생물이 아니라면 근처에 있어야 할 텐데, 아무리 찾아봐도 근처에는 없더라고.”

거기가 어딘데?”

 

내가 그렇게 묻자 레이무는 잠시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손가락 하나를 들어 바닥을 가리켰다.

 

여기. 마법의 숲. 그래서 내가 여기에 온 거야.” 레이무는 그렇게 말하더니 몸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왠지 너라면 알고 있을 거 같았거든. 누군가 그 물건을 가져갔다고 하면 결계가 깨진 흔적 주변에 그 물건이 없는 게 말이 되니까. 그리고 그런 수상한 것을 가져갈 사람은 너밖에 없고.”

 

침을 꿀꺽하고 삼켰다. 레이무는 알고 나에게 온 것일까? 단지 떠보려고?

 

글쎄그런 험악한 물건은 못 본거 같은데.”

그래? 알았어.”

 

레이무는 웬일로 거기서 더 캐묻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로 심각한 게 아닌 건가?

 

하긴 그게 이미 너한테 있었으면 넌 이미 죽었겠지.”

 

레이무의 그 말이 귓바퀴에 닿는 순간, 온몸의 피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레이무? 죽는다니?”

말 그대로야. 그 무시무시한 원한을 가진 게 결계를 뚫고 들어온 걸 나조차도 선명하게 느낄 정도였으니까. 무슨 원한인지는 몰라도 엄청 지독한 것일 테지. 밖에 안 나가봤어? 마법의 숲 근처의 요정들이 전부 도망가 버렸고, 요괴들마저 술렁거릴 정도야. 그 정도로 심각한 물건이었으면, 인간은 줍자마자 원한 때문에 미치거나 자살해 버렸을걸. 그러니까 마리사.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당분간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 있어. 혹시나 그걸 발견하기라도 한다면……그 후론 나도 못 막으니까.”

 

레이무는 그렇게 말하고 집을 나갔다.

 

[18]

 

레이무가 나가고 난 뒤 나는 서랍에서 노트를 꺼냈다. 문을 잠갔다. 커튼을 내렸다. 옷을 벗는다. 씻는다. 침대에 눕는다. 나가지 않는다.

 

[19]

 

레이무가 나가고 난 뒤, 나는 서랍에서 노트를 꺼냈다. 어느새 페이지가 넘어가 있었다. 이번에도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이 기록되어 있었다. 아니, 아마 이게 내가 곧 하게 될 일일 것이다. 실제로 저것들 중 하나는 이미 실행 했으니까. 노트는 이제 내 과거의 일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 미래의 일까지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원리인지, 그것을 거부하면 어찌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달리 거부할 수도 없었다. 레이무가 말 한 대로 이것이 원한을 잔뜩 머금은 위험한 물건일 수 있으니까. 지금 나는 노트의 기분에 따라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인 셈이다.

사실, 저항할 수 있는 기회도 없었다. 레이무가 찾아왔을 때, 그 원한을 가진 물건에 대한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레이무에게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입이 열리질 않았다. 마치 무언가 내 입을 막고, 얼굴을 만져 표정을 억지로 짓게 하는 것 같았다. 레이무의 반응도 이상했다. 분명 처음에는 나를 의심하는 것 같았는데, 곧 순수한 얼굴로 돌아가 버렸다.

뭐가 어찌된 건지 모르겠다. 머리가 점점 복잡해졌다.

 

일단, 문부터 닫을까.

 

 

[]

 

 

[95]

 

나는 침대위에 가만히 누워서 노트를 바라보았다. 따뜻한 물에 씻고 나니 점점 졸려왔다. 아무 걱정 없이 잠에 들 것만 같았다. 이대로 자면 나는 내 의지대로 잠에 드는 걸까, 아니면 노트에 적힌 대로 잠에 드는 걸까?

언제부터인가 노트는 내 행동을 실시간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아니, 내 행동을 기록하는 것이 맞는 걸까? 내 행동을 보고 노트에 기록이 되는 게 아니라, 노트가 문장을 기록하는 대로 내가 따라하는 건지도 모른다. 가만히 누워서 노트만 바라보고 있자니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레이무를 만나고 난지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레이무는 단 한 번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나를 의심하고 있던 게 아니었어? 이번엔 물러가고 뒤에서 나를 몰래 조사하는, 그런 전개가 아니었냐고? 어째서 그 뒤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거지? 무엇보다도 이 수상쩍기 짝이 없는 노트, 이게 정말 그 결계를 뚫고 들어온 원한이 담긴 물건이 맞는 걸까? 환상향을 떠들썩하게 만든 것 치고는 아무도 눈치를 못 채고 있는데?

 

모르겠다.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다. 나는 계속해서 이 노트에 휘둘리고 있을 뿐이었다. 단 한 번도 저항하지 못하고, 노트가 하고 싶은 데로 조종당하기만 하는. 차라리 이게 그냥 이변이었다면, 그렇다면 뭐라도 했겠지만. 이번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모든 것이 끝나길 빌고만 있는 신세다.

 

노트가 스스로 다음 장을 넘겼다.

 

[96]

 

그러고 보면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꽤 많은 페이지를 넘긴 것 같았다.

 

노트는 그렇게 굵지 않았던 거 같았는데앞으로 얼마나 남은거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노트의 옆 부분을 보았다. 눈으로 봐도 한 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노트는 앞으로 네 장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노트가 스스로 다음 장을 넘겼다.

 

[97]

 

나는 노트의 다음 장을 넘겼다.

 

[98]

 

누가 넘기는 거지? ? 아니면 노트? 가슴이 터져나갈 듯이 두근거렸다.

 

나는 노트의 다음 장을 넘겼다.

 

[99]

 

뭔가 해야 하는 건가? 누가? 노트가?

 

모른다. 생각할 정신도, 시간도 이제 내게는 없었다. 생각할 의지는? 그건 남아있던가?

 

나는 노트의 다음 장을 넘겼다.

 

[100]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심지어 노트에도 아무런 기록이 없었다.

 

뭐지? 이게 끝인가?”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노트의 앞 쪽을 확인해 보았다.

 

[99]

 

깨끗했다. 노트에는 기록되어있어야 할 문장이 사라져 있었다. 원래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나는 페이지를 뒤로 넘겼다.

 

[98]

 

여기도 비어있었다.

 

[97]

 

여기도 마찬가지.

 

그 뒤로 계속 노트를 뒤로 넘기며 확인해 보았지만 노트에는 그 어떤 기록도 존재하지 않았다.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마치 노트가 내 존재를 없었던 것으로 만들려는 기분이었다. 좋지 않았다.

 

[13]

 

이 앞쪽은 글자가 겹쳐 새까맣게 칠해진 페이지가 있는 곳이다. 폭발하듯이 넘겨진 탓에 페이지가 좀 너덜너덜해진 곳이며, 노트가 폭주하기 시작한 때다.

 

설마 여기마저 비어있는 건…….”

 

나는 그렇게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앞쪽을 펼쳤다.

 

다행히도, 아니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그곳에 무언가가 적혀있었다.

 

[12]

 

이제 너는 필요 없어. 다른 사람이 필요해,

 

[11]

 

뭐야무슨 말이야?”

 

뭔가 잘못 본 것일까? 하지만 확인할 도리가 없었다. 노트가 멋대로 페이지를 앞쪽으로 넘겨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음 장을 넘기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직 앞쪽으로만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다. 나는 점점 불안해졌다. 노트가 무엇을 원하는지, 필요 없다는 말이 무엇인지 깨닫기가 두려워졌다.

나는 노트의 앞 페이지를 펼쳤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10, 9, 8노트가 점점 짧아지는 것이 느껴진다7, 6, 5, 4손이 점점 떨려온다3, 2그리고 드디어.

 

 

 

 

[1]

 

여기에 아무 말이나 적으십시오.

 

 

 

나는 노트를 떨어뜨렸다.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노트가 손을 그대로 통과한 것이다. 마치 노트를 받치던 손이 없었던 것처럼. 나는 떨리는 눈으로 내 두 손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시야 어느 곳에도 내 손은 찾아볼 수 없었다. 팔도, 몸도, 다리도내 몸 전부가 보이지 않았다. 곧이어 시야가 점점 어두워지더니 곧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 한 가지 유일하게 보이는 것이 있다. 노트. 모든 일의 흑막인 저 정체모를 노트가 눈앞에 있다. 소리를 지르며 손을 뻗어본다. 그러나 소리를 지를 입도, 뻗을 손도 나에겐 없다. 가 닿을 만한 것은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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