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
한숨을 쉬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 붉은 머리의 악마.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보라 머리의 마녀.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엔 침묵이 흘렀고, 소악마가 또 한숨을 쉬려고 할 때, 파츄리가 열어두었던 책을 소리 나게 닫았다.
"소악마. 홍차 좀 달라고 했잖니?"
"아... 아, 네. 죄송합니다."
파츄리의 말에 정신을 차린 소악마는 서둘러 티포트를 찾았고, 허둥지둥하며 찻잔에 차를....
쪼르르
"아..."
찻잔이 아닌, 파츄리의 치마에 홍차를 따라버린 소악마. 파츄리와 소악마는 조용히 젖어버린 치마를 바라보았다.
"..."
"..."
잠시 치마를 바라보던 파츄리는 자신이 보고 있던 책을 뒤적였다. 불행 중 다행인지, 책에는 차가 쏟아지지 않았다. 책이 무사하다는 걸 안 파츄리는 한숨을 푹 쉬더니 소악마에게 말했다.
"됐어. 갈아입을 옷이나 가져와."
"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 소악마는 파츄리의 치마를 가져오기 위해 걸어가다 자기 발에 걸려 쿠당, 하고 넘어졌다.
"... 하아..."
파츄리는 또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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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일이 있었어."
"또? 이번 주에만 몇 번째야?"
파츄리의 말에 놀라며 되묻는 레밀리아. 그녀가 파츄리에게서 소악마의 이야기를 들은 게 이번 주에만 해도 10번이다. 소악마가 얼빠진 채로 지내고, 틈만 나면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는 똑같은 레퍼토리의 이야기를 말이다. 레밀리아가 걱정된다는 얼굴로 말했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냐?"
"몰라. 본인이 말을 안 해주는걸."
고개를 좌우로 젓는 파츄리.
"그런 건 가서 물어봐야지. 바보야?"
레밀리아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하고 말했다.
"개인 사정이면 어떻게 해. 민감한 부분이면? 그런 걸 어떻게 물어봐?"
"그래도 물어봐야지. 심각한 일이면 어떻게 해."
넌 너무 낯을 가려서 탈이야. 라고 덧붙이는 레밀리아.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내가 소악마랑 이야기해 볼게. 무슨 일 있는지."
"너 걔랑 어색하잖아. 둘이 이야기해 본 적도 많이 없으면서..."
"그, 그래도 홍마관의 주인으로서 사용인들의 고충은 들어줘야지. 한 달 동안이나 상태 안 좋으면 뭔가 심각한 일이 있다는거잖아."
"..."
"무슨 일이 있으면 들어주고, 할 수 있으면 해결까지 해줘야지. 다 소중한 홍마관의 가족인데."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레밀리아를 보고, 파츄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허당끼 넘치는 바보 같은 꼬맹이 흡혈귀면서, 이럴 때는 또 주변 사람을 잘 챙겨주는 홍마관 당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레밀리아가 멋있었기 때문에.
'인망이 높단 말이지...'
한낱 사용인의 일도 진지하게 받아들여 주는 레밀리아를 보며 파츄리는 얕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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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악마의 방. 희미한 등불이 방 안을 은은히 밝혔다. 소악마는 책상 앞에 앉아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기 없는 눈과 고민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 소악마의 상태를 말해주었다.
그때, 누군가 소악마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소악마, 들어가도 될까?"
"아. 네. 들어오세요."
끼익. 방문이 소리를 내며 열렸다. 레밀리아가 방에 들어와, 소악마의 옆에 섰다.
"아... 레밀리아님. 무슨 일이세요?"
한 박자 늦게 반응하는 소악마. 그런 소악마가 걱정된다는 듯, 레밀리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악마. 무슨 일 있어?"
"에?"
"파츄리한테 들었어. 요즘 계속 멍하니 있다며. 기운도 없어 보이고. 무슨 일 있는 거 아냐?"
"..."
레밀리아의 말에 소악마는 조용히 움츠러들었다. 소악마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레밀리아.
"괜찮아?"
"... 그게,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개인적인 일이라..."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말하는 소악마. 그녀는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시선을 깔았다. 그런 반응을 보자 좀 더 걱정된 레밀리아가 소악마의 눈을 바라보았다.
"음... 말하기 힘든 거면 말 안 해도 돼. 그래도 그냥... 네가 걱정되어서 그런 거니까, 뭔가 문제가 있으면 말해줘.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거라면 어떻게라도 해줄게."
"..."
진심이 담긴 레밀리아의 말에 소악마는 잠시 머뭇거리며 고민하였다. 소악마는 또 다시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혀끝에선 다른 말이 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그녀는 홍마관에서 가장 친한 파츄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말을, 레밀리아에게 말하려고 하고 있다. 비밀과 고민은 친분이 있는 자가 아닌 어색하고 서먹한 사이에 있는 자에게 말하기 더 쉬운 법이니까.
"...... 제가 왜 사는지 모르겠어요..."
계속해서 뜸을 들이던 소악마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흡혈귀인 레밀리아에겐 듣기 충분한 정도였다.
"매일 매일 일하고, 자고. 일어나면 또 일하고... 저는 일하기 위해 태어난 걸까요?"
소악마의 말에는 점차 말에 물기가 섞였다.
"환상향에 오기 전엔 뭔가 나름의 꿈도 있었는데... 이젠 그런 것도 다 잊어버리고... 친구 하나 없는 타지에 와서는 일만 하고... 홍마관 사람들 사이에서도 겉돌기만 하고 ..."
레밀리아에게 자기 생각을 정리도 안 하고 전부 쏟아내고 있는 소악마는 입에서 나오는 감정의 쏟아짐을 멈추려고 하였다. 하지만, 한번 터진 감정의 댐은 멈출 수 없었다. 소악마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해서 자신이 평소에 하던 생각을 내뱉었다. 그런 소악마의 두서없는 말에도 레밀리아는 묵묵히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제가, 제가... 흑... 저는, 마계에선, 안 이랬는데... 흡... 이젠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그저 하루하루 의미 없는 삶을, 흑... 보낼뿐이이에요..."
이젠 조금씩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는 소악마. 그녀는 쏟아져나오는 눈물을 손으로 훔치며, 횡설수설했다. 말도 제대로 못 하고 그저 감정에 따라 말하는 소악마가 안쓰러웠던 레밀리아는, 소악마의 등을 쓸어주었다.
"흑, 흡... 다들 좋으신분인데... 끅... 저는 제대로 적응도 못 하고... 마계가, 마계가 그리워요... 엉엉..."
소악마가 흘리는 눈물이 점차 많아졌다. 이윽고 소악마의 눈에서 떨어지는 방울진 눈물은, 격한 감정의 흐느낌이 되었다. 책상에 엎드린 채로 펑펑 울기 시작한 소악마를 보며, 레밀리아는 소악마를 토닥여 주었다. 레밀리아의 다정한 손길에, 소악마는 감정이 복받쳤는지 더욱 서럽게 울었다.
무척이나 오래 울던 소악마는 지쳐서 책상에 엎드린 채로 잠에 빠졌다. 계속해서 그녀의 곁을 지키던 레밀리아는 소악마가 깨지 않게 조심히 안아서 침대에 눕히곤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잠든 소악마를 바라보는 레밀리아.
"엄마... 집에 가고싶어..."
잠에 빠진 소악마가 작게 말했다. 그녀의 잠꼬대를 들은 레밀리아는 슬픈 표정으로 소악마의 앞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아직 남아있던 소악마의 눈물이, 주르륵 흘러 베개를 적셨다.
----
[---야. 너는 --- 뭐가 --- 싶니?]
인자한 미소를 짓는 한 여성. 그녀는 조그마한 키의, 조그마한 악마를 보며 무언가를 물었다.
[저는 나중에 커서, --------래요!]
조그맣던 악마는 활발하게, 앞으로 좋은 일만 있을 거 같은 웃음을 보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눈앞의 여성에게 안겼다.
"... 아...?"
눈을 뜬 소악마는 일어나자마자 한마디 탄성을 내었다. 알 수 없는 꿈이었다. 내용이 군데군데 빠져있는, 그리운 꿈이었다.
잠깐 누워서 그리움에 젖어있던 소악마가, 갑자기 상체를 일으켰다. 어젯밤, 레밀리아에게 추하게 한탄했다는 사실을 떠올린 소악마는 자신의 눈가를 잡았다. 어제 있던 일은 소악마가 직장 상사... 아니, 회장님께 진상을 부린 것과 같은 대형 사고였다.
"하..."
퇴사할까. 그런 말을 속으로 삼킨 소악마는 몇 분간 가만히 앉아 마음을 추스린 후, 출근할 준비를 하였다.
끼이익. 평소와 같은 무표정으로 평소와 같이 도서관 문을 연 소악마의 앞엔 파츄리와 레밀리아가 있었다.
"아. 마침 잘 왔어. 소악마."
소악마는 문을 열자마자 자신을 향해 말하는 레밀리아를 보고 빳빳이 굳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밀리아는 소악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퇴사하자. 소악마."
"...네?"
생각으로만 했던 걸, 다른 사람의 입에서 들으면 굉장히 당황스럽다는 걸 깨달은 소악마였다.
"그거 부당해고야."
옆에서 책을 읽던 파츄리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레밀리아는 앗, 하는 소리와 함께 손을 마구 흔들었다.
"아니아니아니! 해고가 아니라! 네 생각 때문에 그런 거야!"
"저를요...?"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하는 소악마. 레밀리아는 진지한 말투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래. 네가 어제 말했잖아. 마계가 그립다고."
"마계가?"
파츄리도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 레밀리아에게 물었다.
"아, 아니 그건... 그냥... 어제 했던 말은 그냥... 제 주접이라고 생각해주세요..."
점차 작아지는 소악마의 목소리. 레밀리아에게 괜한 소리를 해서 해고를 당한다는 생각에 소악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제 들었던 건 주접으로 넘길만한 그런 게 아니었어. 소악마."
레밀리아가 소악마를 향해 걸어 나갔다. 자신에게 점차 가까워지는 레밀리아를 피해 소악마는 한두 걸음씩 물러났고, 결국 소악마는 도서관 벽까지 몰렸다. 그런데도 레밀리아는 계속해서 소악마에게 다가갔다. 서로 가슴이 맞닿을 만한 거리까지 소악마에게 몸을 붙인 레밀리아. 그런 그녀를 피해 벽에 착 달라붙은 소악마는 당황하며 레밀리아를 바라보았다.
쿵
레밀리아는 소악마가 기댄 벽 뒤로 손을 뻗었다. 두 사람은 소위 말하는 '벽쿵' 자세가 되어,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레밀리아는 진지한 표정으로, 소악마는 당황하면서도 붉어진 얼굴로. 그 모습을 뒤에서 조용히 파츄리는 힐끔힐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소악마. 어제 말한 거. 진심이었잖아. 그렇지?"
"아... 그, 그게..."
레밀리아의 눈을 피하는 소악마.
"소악마. 그거 하나만 물어볼게. 넌, 하루에 한 번이라도 행복할 때가 있어?"
소악마의 눈을 빤히 바라보는 레밀리아.
"…."
소악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공허했다.
"이건 아냐. 소악마. 넌 일하는 기계 같은 게 아니잖아."
레밀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악마는 조용히 허공을 보다, 입을 열었다.
"... 오늘이 마치 어제 같아요."
두 사람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오갔다. 레밀리아는 소악마의 말과,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여러 가지를 읽어내었다.
"내일은 바꿀 수 있어."
"어떻게요? 전, 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고... 이미 늦은거 같아요..."
"아니, 늦지 않았어. 내일을 바꾸려면 오늘부터 바꿔야겠지. 이리 와봐. 소악마."
레밀리아는 소악마의 손을 잡고 파츄리의 앞으로 이끌었다. 흡혈귀의 힘에 속절없이 끌려간 소악마는 앉아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파츄리를 마주하였다.
"그래서, 퇴사하게?"
"아, 아니 그건 레밀리아님이 일방적으로..."
"그래. 그거에 관해 이야기 좀 해야지. 자. 앉아. 소악마."
소악마에게 의자를 꺼내주는 레밀리아. 무언가 떨떠름해 보이는 표정의 소악마였지만, 그녀는 순순히 의자에 앉았다.
"그, 퇴사라던가 그런 말은 좀 너무 갑작스러워서..."
"꼭 퇴사하라는 건 아니야. 강제로 퇴사시킬 생각도 없고."
책상 위에 있는 티포트를 들어, 소악마에게 홍차를 따라주는 레밀리아.
"근데, 지금, 이 삶에 만족해? 아니잖아. 소악마. 난 네가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홍마관은 네게서 그 권리를 앗아갔어. 아주 큰 잘못이지. 홍마관의 주인으로서 정말 미안하다고 생각해."
"..."
"그리고 그 큰 잘못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싶어. 네가 만일 퇴사하겠다고 하면, 네가 다른 직장을 구할 때까지 재정적으로 지원해 줄게. 따로 필요한 게 있으면 또 도와주고 말이야. 말뿐만이 아니야. 이 레밀리아 스칼렛의 명예를 걸고 맹세할게. 퇴사 후 마계에서도 잘 지낼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해 줄 거야. 어때?"
헉. 소악마의 숨 들이키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일개 말단 직원이었던, 그것도 홍마관 직속이 아닌 홍마관 내 부속 도서관에서 일하던 자신에게 고귀한 흡혈귀의 명예까지 걸며 퇴사 후까지 지원해 준다는 약속을 하는 이 상황이 놀라웠던 소악마였다.
"... 물론 아까 말했듯, 강제는 아니야. 네가 하고 싶으면 퇴사하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지. 개인적인 감정으론... 네가 홍마관에서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도, 홍마관에서 일하는 게 너 자신의 발전이나 꿈을 방해하고, 네가 느끼기에 홍마관의 하루하루가 기계 부품의 삶 같다면 널 보내주는 게 맞겠지."
시선을 떨구며 자신 없이 말하는 레밀리아.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소악마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
"지금 당장 정하라는 건 아니야. 너도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하잖아?"
레밀리아는 소악마를 향해 기운 없이 생긋 웃어보였다.
"... 알겠습니다. 한번... 생각해볼게요."
소악마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악마."
옆에서 파츄리가 작은 목소리로 소악마를 불렀다. 소악마는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 그동안 미안했어. 네가 이 도서관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 몰랐네. 내가 너무 많은 걸 시켰나 봐."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사과하는 파츄리.
"아... 아니에요. 그, 힘들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파츄리가 책을 계속 보듯, 자신 앞에 놓여있는 홍차를 바라보는 소악마. 무의식적이고 기계적인 흔들림만을 반복하는 찻잔 위 홍차에는 소악마가 비쳐보였다.
"..."
세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밀리아는 홍차를 홀짝였고, 파츄리는 계속해서 책을 보았고, 소악마는 여전히 홍차 위의 자기 자신을 바라보았다.
"맞다. 소악마. 너, 홍마관에 오고 나서 밖에 나간 적 있어?"
딸깍. 홍차를 마신 레밀리아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에? 아. 네. 뭐, 홍 씨 부탁으로 정원 꽃에 물 준다거나... 가끔이지만 파츄리님이 뒤뜰 산책하시는 거 같이 간다거나..."
"아니 그런 거 말고. 홍마관 밖으로 나간 거 말이야. 너, 연회에도 참석 안 하잖아?"
"예 뭐... 그렇죠. 홍마관 밖으로 나간 적은... 없는거 같네요."
소악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 나갈 기회도 없었고, 딱히 나갈 생각도 없었던 소악마에겐 외출 경험이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레밀리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갤 저었다.
"한 번도? 이거 안 되겠네..."
그러고는 소악마의 손을 턱 잡는 레밀리아. 소악마는 깜짝 놀라며 레밀리아를 쳐다보았다.
"나랑 좀 밖에 나가보자. 마계에서 환상향까지 온 건데, 관광 정도는 해봐야 할 거 아냐."
"앗..."
"레미. 갑자기 데이트 신청하니까 애가 놀라잖아."
장난스레 말하는 파츄리를 한번 바라본 레밀리아는 씩 웃어 보였다.
"데이트? 좋네. 그거. 그런 거로 하고, 오늘은 나랑 좀 어울려 줘. 소악마. 할 일 있어?"
"그, 딱히 없긴 한데..."
"그러면 결정됐네. 파츄리. 소악마 좀 빌릴게."
책을 보는 채로 고개를 끄덕이는 파츄리. 그녀의 허락도 받았겠다, 레밀리아는 소악마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소악마. 가자!"
갑작스러운 레밀리아의 행동에 소악마는 당황하며 레밀리아에게 끌려갔다. 두 사람은 점차 파츄리에게서 멀어졌고, 마침내...
끼익, 쿵...
두 사람은 도서관에서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도 레밀리아는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갔고, 소악마는 불안과 알 수 없는 감정을 가지고 레밀리아에게 끌려갔다. 이윽고 홍마관 정문에 도착한 두 사람. 레밀리아가 갑작스레 멈추더니, 손뼉을 두 번 짝짝 쳤다.
"...?"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황한 레밀리아는 다시 손뼉을 쳐보았지만, 역시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사쿠야아~ 어딨어~?"
손뼉으로 종자를 불러내는 데 실패한 레밀리아를 보며 소악마는 그녀가 찾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떠올렸다.
"네. 부르셨어요?"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한 은발의 메이드. 그녀는 레밀리아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예의를 갖추었다.
"아. 사쿠야. 소악마에게 양산을 좀 줄래?"
아까 전, 박수에 대한 것은 그냥 없던 일로 치는지, 아무 말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레밀리아. 그녀의 말에 사쿠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양산이요? 왜 그걸 소악마 씨에게?"
"오늘은 소악마랑 단둘이 데이트니까."
"아하. 자. 여깄어요."
뭔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소악마에게 양산을 건네는 사쿠야. 소악마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서 양산을 건네받았다.
"그럼, 잘 갔다 오세요."
사쿠야는 소악마와 레밀리아에게 손을 흔들었고, 레밀리아 또한 사쿠야에게 손을 흔들며 갔다 오겠다고 말했다. 소악마는 고개를 조금 숙여 인사한 후, 양산을 피고 레밀리아에게 씌어주었다.
두 사람은 홍마관을 나섰다. 적당히 기분 좋은 햇빛이 두 사람에게 쏟아졌다. 물론 레밀리아에게 가는 햇볕은 양산이 전부 막아냈지만 말이다.
"사쿠야 말고 다른 사람이 씌어주는 양산도 기분 좋네."
자연스럽게 소악마와 팔짱을 끼는 레밀리아. 예상외의 접촉에 빳빳이 굳은 소악마는 힐끔 레밀리아를 쳐다보았다. 소악마의 상태가 어떻든, 밖에 나와 산책한다는 게 기분 좋았던 레밀리아는 콧노래를 흥흥거리며 불렀다.
"앗. 레밀리아 님. 소악마 씨까지. 두 분만 같이 있는 건 처음 보는 거 같네요? 어디 가시나요?"
홍마관을 나오자마자 붉은 머리의 문지기, 홍 메이린이 두 사람을 반겨주었다.
"소악마랑 당일치기 여행 좀 갔다 오려고. 집 잘 보고 있어."
"넵. 맡겨만 주세요!"
기합이 빡 들어간 채로 경례하는 메이링. 이내 그녀는 소악마에게도 묵례하며 인사했다. 소악마 또한 어색해하며 인사를 받았다.
"가자. 소악마."
레밀리아가 소악마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소악마는 서둘러 양산을 레밀리아에게 맞춰서 이동했다.
두 사람은 조용히 걸었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왔다. 평생 마계에서만 살아왔던 소악마는, 처음 보는 환상향의 풍경에 묘한 느낌을 받았다.
"여기가 안개의 호수야. 홍마이변 기억나지? 그때 안개에 쓴 물이 여기서 나온 거야."
무척이나 큰 호수. 저 멀리서 요정들이 꺄르륵거리며 노는 모습이 보였다. 푸른 초목이 요정들의 놀이터가 되어주고 있었다. 가끔 요정 중 하나가 만들어 낸 얼음 파편이 흩날리고, 봄의 향기가 느껴졌다. 요정들의 귀여운 목소리가 호수를 가로질렀다.
"저기 저거 보여? 노란색으로 꽉 차 있는 들판. 저게 다 해바라기야. 뭐, 가까이 가면 좀 성가신 애가 나와서 굳이 가고 싶진 않으니까 다른 데로 가자."
레밀리아가 손가락으로 샛노란 들판을 가리키곤 몸을 돌렸다. 나무가 무성한 숲을 지났다. 조금 걸어가니, 희미한 물소리가 들렸다.
"물소리 들리지? 폭포 소리야. 폭포 쪽에 뭐... 캇파라고 했었나? 걔네랑 텐구 애들이 산다고 하더라고. 한번 보고 가자."
물방울이 이리저리 춤을 추고, 그에 맞춰 무지개가 활짝 웃었다. 천지를 흔드는 폭포 소리는 전율을 느끼게 했다. 이따금 멀리서 두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레밀리아는 그 시선이 불편했는지, 소악마를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저쪽은 마법의 숲. 앨리스 알지? 걔가 저기 살고 있대. 아. 그리고 마리사도. 개인적으론 이런 칙칙한 곳은 싫어."
후후. 가볍게 웃은 레밀리아는 소악마 옆에 딱 붙었다. 소악마는 양산을 기울여 햇빛에게서 레밀리아를 좀 더 가렸다.
"이 길은 뭐라고 했더라? 재사의 길? 아마 그랬을 거야. 가을이 되면 여기가 다 피안화로 뒤덮인다는데, 아쉽네. 가을이 아니라서."
소악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저 평범한 꽃들이 피었고 평범한 나무들이 자란 평범한 길이었다.
"이리로 쭉 가면 무연총이라는 곳이 나오는데, 자살 명소래. 그래도 보라 벚꽃과 피안화로 쫙 깔려있어서 이쁘긴 할걸? 그래도 별로 기분 좋은 곳은 아니니까 가보진 말자."
레밀리아가 자살 명소라는 말을 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살이란 말은 좋은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악마는 그리 불편해하지 않았다.
"오늘은 날씨가 좋네. 바람도 선선하고. 햇빛도 그렇게 쨍하지 않고. 딱 기분 좋은 정도야."
기분 좋은 날씨. 소악마와는 거리가 먼 단어였다. 비가 오면 도서관이 조금 습해지고, 아니면 평소대로. 도서관의 날씨는 항상 비슷비슷했으니까. 마계에선 어땠었나 생각해보면...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와보니 어때? 환상향 관광은? 괜찮은 거 같아?"
"네. 뭐... 하나같이 마계에선 볼 수 없던 곳들이라 좋네요. 이쁘기도 하고."
대답은 그렇게 하지만 무언가 부족해 보이는 표정의 소악마.
"뭐, 제대로 간 곳은 폭포나 안개의 호수 정도만 갔지만 말이야."
레밀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소악마의 부족함은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이쁘고 멋진 풍경은 부족함을 채워주지 못했다.
"소악마. 배고프지 않아?"
"아. 네. 조금 그렇네요."
"돌아다니니까 좀 배고프네. 저녁 시간까진 좀 남았지만... 조금 일찍 저녁 먹을까?"
"네. 그러죠."
레밀리아는 소악마를 데리고 인간 마을로 향했다. 인간 마을의 문지기가 두 사람을 막아섰지만, 레밀리아의 말 몇 마디에 금방 길을 비켜주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따로 막 먹고 싶은 건 없어요."
소악마를 올려다보며 말하는 레밀리아. 그녀를 보며 소악마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럼. 이라 말하며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가게에 들어가 버리는 레밀리아. 소악마도 얼른 그녀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음식을 주문하고, 테이블에 앉았다. 레밀리아는 창밖을 바라보았고, 소악마는 물컵을 잡은 채로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 두 사람은 조용했다. 이윽고, 음식이 나왔다. 금세 음식은 없어졌고, 소악마와 레밀리아는 값을 치른 후, 음식점에서 나왔다.
"맛있게 먹었어?"
"괜찮았어요. 맛있네요."
"그럼 다행이네."
레밀리아가 키득키득 웃었다. 하늘은 붉은색 노을이 점차 올라오고 있었다. 양산은 필요 없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인간 마을을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건물을 지나쳤다. 두 사람 사이엔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환상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예쁜 풍경을 본 오늘 하루는 소악마에게 좋은 감정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부족했다. 관광은 그저 관광일 뿐이었다. 하루는 흘러가고, 내일은 찾아오게 되어있다. 레밀리아의 말대로 퇴사할지 말지, 고향에 돌아갈지 말지에 대한 생각이 소악마의 머릿속에 확 밀려왔다.
"소악마. 마계가 고향인 거지?"
갑작스레 레밀리아가 말했다.
"... 네."
"나도 악마긴 한데, 나는 마계에 한 번도 가본 적 없어."
레밀리아는 자신의 등에 달린 날개를 흘낏 쳐다보았다.
"근데 네가 어제 그렇게 그리워하는 거 보고, 나도 좀 가보고 싶더라. 과연 마계는 어떤 곳일까~ 하고 말야."
"..."
소악마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고, 레밀리아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중에 꼭 한번 데려가줘?"
"...네."
레밀리아가 씩 웃었다. 그녀의 눈웃음이 소악마에겐 태양과도 같이 밝아 보였다. 두 사람은 다시 조용히 거리를 걸으며 바람을 느꼈다. 사람들의 생활 소음이 시끄러웠지만, 그와 동시에 조용했다. 마을은 넓었고, 두 사람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그들은 정적을 즐겼다.
대낮의 햇빛처럼 밝지도 않고, 한 여름밤의 보름달처럼 매혹적이지도 않은 붉은 노을이 두 사람을 비추었다.
"그러고 보니, 둘이 다니는 건 처음이네. 홍마관의 밖도 처음이랬지? 오늘 하루. 어땠어?"
녹슨 자전거. 삐걱거리는 아치교. 떠드는 아이들. 버려진 신발 한 짝. 굴뚝의 연기.
"... 좋았어요. 정말로. 마계와는 다른 느낌이고... 꽤 멋있고 좋았어요."
오래된 간판. 바람 빠진 공. 어색한 웃음. 어설프게 칠해진 하늘.
"... 저번에 말했었지? 예전엔 네 나름의 꿈이 있었다고."
수줍은 들꽃. 자유로운 새. 레몬 사탕. 잠깐의 침묵.
"... 네. 지금은.... 오래되서 기억은 안 나지만요."
색이 벗겨진 나무 의자. 노을의 주황색 빛.
"뭔진 몰라도 응원할게. 네 꿈을."
꿰뚫는 미소. 잃어버린 꿈.
"아......"
악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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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전환에 따라와 줘서 고마워. 소악마. 재밌었어."
"저도 좋았어요. 레밀리아 님."
"그... 제안의 대답은 나중에 말해줘. 서두르진 말고."
소악마의 방 앞. 레밀리아는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 네. 알겠어요."
꾸벅 고개를 숙인 소악마. 레밀리아는 그러면 잘 쉬라며 소악마의 방문을 닫았다.
"... 레밀리아 님?"
문이 닫히자, 안쪽에서 소악마가 레밀리아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레밀리아는 문을 열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왜 그래?"
"오늘, 정말 좋았어요. 정말로요."
레밀리아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소악마는 더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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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여느 때와 같이 책을 읽고 있던 파츄리에게 소악마가 다가왔다. 파츄리는 책에서 시선을 떼고 소악마를 올려다보았다.
"왜?"
"... 파츄리 님. 저, 결정했어요."
"... 그래?"
파츄리는 조용히 책을 덮었다. 그리곤 소악마와 눈을 마주쳤다.
"어떻게 할 거야? 고향에, 마계에 돌아갈꺼야?"
"..."
소악마는 가만히 서서 잠시 뜸을 들였다. 파츄리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잠시 꾸물대던 소악마는 간신히 입을 뗐다.
"계속, 여기에 있고 싶어요. 파츄리 님."
소악마의 결심을 들은 파츄리가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다행이야. 소악마."
"... 이곳에서 파츄리 님의 마법을, 어깨너머로라도 배우고 싶어요."
"마법을?"
"네."
소악마의 눈은 공허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 좋아. 네가 그렇다면 시간 날 때마다 마법을 조금씩 알려줄게."
"... 감사합니다."
허리 숙여 감사를 표하는 소악마.
"근데 왜 갑자기 마법을 배우고 싶다는 거야? 너도 조금은 할 줄 알잖아."
"... 옛날, 옛날에 꿨던 꿈을... 목표를 다시 떠올렸거든요."
"꿈?"
파츄리가 되물었다.
"네. 꿈. 어렸을 적의 꿈이지만... 아직 저는 이루고 싶어요."
"...어떤 꿈인지, 말해 줄 수 있어?"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는 파츄리. 소악마는 부끄러운지 볼을 긁고, 쭈뼛대다가, 입을 열었다.
"부끄럽긴한데... 대, 대악마가 되고 싶었어요..."
점점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소악마. 파츄리는 잠시 멍때리다가, 피식하고 웃었다.
"재밌네. 알았어. 최대한 협조해 줄게. 참. 레미한테도 내가 말해둘게. 소악마. 힘든 결정이었는데 고마워. 남아줘서."
"아, 아니에요... 그리고 그, 그... 꿈에 대한 건 레밀리아님껜..."
"후후. 알았어. 비밀로 할게. 어제 레미랑 같이 돌아다닌 건 어땠어?"
"...좋았어요. 정말로. 레밀리아 님 같은 대악마가 되고 싶을 정도로..."
뒷 말을 아주 작게 한 소악마. 덕분에 파츄리는 못 들었다. 하지만 못 들은 부분을 굳이 물어보진 않는 파츄리.
"레미가 잘해줬나 보네. 알았어. 그럼, 지금부터 해볼까? 마법 훈련."
"아, 네!"
파츄리는 책을 책상 위에 두고, 로브를 촥 휘날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악마는 파츄리를 바짝 따라갔다. 소악마는 더 이상 슬퍼하지 않았다.
옛날에 즐겨하던 게임이 정말 재밌었다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혹자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옛날에 좋아하던 게임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게임을 하던 그 시절의 내가 그리운거라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또한 같은 것일지 모릅니다.
허접한 글이지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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