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무는 화요일이 다가오면 느껴지는 설렘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는 화요일을, 화요일에 찾아오는 마리사를 기다렸다. 특별하게 매주 화요일에 만나자는 약속을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화요일은 그런 날이 되었다. 화요일 아침의 새들은 평소처럼 지저귀고 있었지만, 레이무에게는 마리사가 온다는 것을 알려주는 속삭임처럼 들려왔다.
그녀는 마리사가 도착할 시간이 되면 마루에 앉아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평소의 그녀는 마루에서 차를 마셨다. 그러나 마리사를 기다리는 날만큼은 차를 마시지 않았다. 마리사와 같이 하루의 첫 차를 마시고 싶은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이무는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쿠레이 신사의 앞에 키리사메 마리사가 내려앉았다.
“요, 나 왔어.”
레이무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지만, 손을 뒤로 숨기며 손바닥에 손톱을 눌러 박았다. 들뜬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 어서 와. 손에 든 건 뭐야?”
그녀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아, 이거?”
마리사는 레이무의 옆자리에 앉았다. 레이무의 어깨가 살짝 떨렸지만, 짐꾸러미의 묶음을 푸는 데 집중한 마리사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포장이 풀어내자 칸칸이 들어있는 과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리사 이거 과자... 비싼 거잖아.”
마리사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저번에 이변 하나 해결해준 마을의 과자가게에서 선물로 받은 거야. 매 번 차 얻어 마시는데 이 정도 쯤이야.”
마리사는 과자 하나를 집어 올리고 레이무의 앞에 먹기 좋게 갖다 댔다.
“자, 집주인님 먼저 한 입.”
레이무는 생각했다.
생각 없이 하는 행동일까.
웃는 얼굴로 과자를 들고 있는 마리사는 어떤 속셈도 없어 보였지만, 더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손바닥을 손톱으로 눌러야 했다. 마치 애정으로 착각할지도 모르는 자신을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레이무는 조심스럽게 과자를 입으로 물었다.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던 달콤함이었다.
“우와, 레이무 표정이 행복해졌어.”
레이무는 순간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마리사는 그런 레이무를 보며 쿡쿡거리며 웃었다.
“우, 웃지 마. 과자가 맛있었을 뿐이니까.”
“맛있어서 다행이네.”
마리사는 생글거리며 웃었다. 레이무는 표정을 진정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태연한 척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마리사와 잠시 떨어져 있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차. 내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으라고.”
레이무는 단맛에 어울릴 만한 가장 떫은 차를 내오면서도, 과자보다는 값싼 차라는 사실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레이무는 대사를 준비하기로 했다. ‘과자에 더 어울리는 차가 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신사엔 이런 것밖에 없어서 말이야.’ 하지만 그녀가 쟁반을 마룻바닥에 내려놓기도 전에, 마리사는,
“이 향, 내가 좋아하는 차네.”
하고 차를 칭찬했다. 레이무는 굳이 말을 꺼내지 않기로 했다.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를 제외하면 하쿠레이 신사는 한없이 고요했다. 가끔씩 차를 마시는 소리와 과자를 깨무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첫 잔을 마시는 동안에는 언제나 둘 다 말을 하지 않았다. 이것도 정한 적이 없었지만, 언제부턴가 그렇게 되어있었다.
마리사는 찻잔을 양손으로 잡고, 조금씩 입김을 불어넣어 차를 마셨다. 레이무는 그런 마리사의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독립적이고, 사소한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어두운 면이 드러나지 않는 활기찬 이미지였지만, 차를 마시는 모습만큼은 정말로 소녀 같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잔이 비워지고, 둘은 1주일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과자, 잘 먹었...다고.”
마리사가 떠난 후, 레이무가 빈방에서 중얼거렸다. 마리사는 ‘차 잘 마셨어.’하는 인사를 남기고 날아갔다. 마리사가 가고 난 다음에야 그녀는 과자에 대한 인사를 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의 없는 행동일지도 몰랐다. 마리사는 못내 서운했을지도 몰랐다. 다음 주가 되면 말해줘야겠다고, 레이무는 그렇게 다짐했다.
불이 꺼진 방에서 레이무는 이불을 덮었다. 낮에 마리사가 과자를 먹여줬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레이무는 이불을 발로 걷어찼다.
레이무는 1주일 동안 평소보다 많은 일을 받았다. 마을을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얼굴도장을 찍고 다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레이무는 돈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그저 잡생각이 들지 않도록 몰두할 무언가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마리사와 자신은 단지 친구관계라고. 더 이상의 감정은 서로에게 없는 거라고. 그렇게 되뇌면서, 그녀는 고헤이(御幣)를 사뿐히 내려쳤다. 종잇조각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정신없이 달린 1주일이 지나고 화요일이 되었다. 생각보다 많은 일을 받아버린 레이무는 이번 주 목요일까지 의뢰가 들어와 있었다. 화요일에 일을 부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머뭇거리며 넘겨댔다. ‘다른 일이 있어서요.’ 하고 둘러댔지만 입속에서는 ‘좋아하는 친구가 와서요.’ 하는 말이 맴돌았다.
그리고 화요일, 레이무는 걱정에 잠겼다. 하늘에서는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하쿠레이 신사와 레이무가 사는 숲은 그렇게 멀지 않았기 때문에, 오는 도중에 비를 맞을 일은 없다고 레이무는 생각했다. 오늘은 못 보겠구나, 레이무는 비에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무는 신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요, 레이무.”
레이무가 뒤돌아본 자리에는 전부 비에 젖은 마리사가 서 있었다.
“마리사...? 왜 비를 전부...”
마리사는 지붕이 시작되는 곳까지 들어와 치마를 빨래처럼 비틀어 짰다.
“마을에 가는데 중간에 비가 오더라? 우리 집보단 신사가 가까워서. 비 그칠 때까지만 잠시... 레이무?”
마리사가 올려다본 그곳에는 레이무가 없었다. 신사 안쪽에서 콰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레이무가 옷가지와, 커다란 수건과 등등을 품에 한가득 안은 채로 뛰어나왔다. 서둘렀는지 레이무는 숨을 몰아쉬었다.
“저기, 마리사한테 맞는 옷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마리사는 쿡쿡거리며 웃었다.
“아냐 옷은 괜찮아. 거기 큰 수건만 줄래?”
레이무는 한동안 얼굴과 머리의 물기를 닦는 마리사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맞다, 따뜻한 차라도 내어올게...!”
하고, 옷가지를 챙겨 신사의 안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레이무는 차를 끓였다. 마리사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가장 떫은 차를 끓일지 고민했지만, 망설인 끝에 레이무는 더 따뜻한 느낌이 드는 차를 끓이기로 했다.
마리사는 마루에서 무릎을 모아 앉은 채로 수건을 이불처럼 둘르고 있었다. 더 따뜻한 방 안에 들어오는 게 어떠냐는 질문에 마리사는 ‘방 안까지 젖어버리면 안 되니까.’라며 마루를 고집했다.
“빗소리에 마시기 좋은 차네.” 마리사가 첫 잔을 받아들고 한 말이었다.
레이무는 ‘다행이다.’라던가, ‘딱히 널 위해 고민했던 건 아니야.’같은 대사를 생각해보았지만, 결국 입 바깥으로 내지 않았다. 문득 그녀는 이 차가 오늘 처음 마시는 차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 올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차를 마시지 않고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이번 화요일도 마리사와 첫 차를 마시게 되었다.
레이무는 옆에 앉은 마리사로 시선을 옮겼다. 마리사는 양손으로 찻잔을 붙잡고 차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온기에 풀어진 표정으로 마리사는 찻잔을 꼭 쥐고 멍하니 비 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리사의 금발은 비에 젖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라고, 레이무는 생각했다. 마리사는 마리사였지만 마리사로 보이지 않았다. 속눈썹은 물기를 머금고 있었고, 추위에 조금 창백해진 뺨은 찻잔의 온기에 조금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리사의 입술은, 붉었다. 레이무의 머릿속에 비유할 수 있는 모든 붉은 것들이 생각났다. 마리사는 입김을 불어넣고, 찻잔을 기울여 입술을 살짝 갖다 댔다. 아직 뜨거운 모양이었다. 다시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 행동을 바라보는 그녀는 머릿속에 단 한 가지의 행동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 생각이 되는지, 안 되는지 보다도 마리사에게 말하고 할지, 말하지 않고 할지만이 고민이었다. 찻잔을 쥔 손이 떨렸다. 무의식적으로 양손으로 찻잔을 쥐었다.
“비가 그칠 모양이네.”
마리사가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레이무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레이무는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깨달았다.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뛰어댔다. 달린 것도 아니었다. 움직임이 특히 많은 제사를 올린 것도 아니었다. 스스로 기획한 행동에 잔뜩 긴장했을 뿐이었다. 마리사가 조금 더 가만히 있었다면, 레이무는 그녀의 의사 따위도 신경 쓰지 않고 멋대로 자기 주관적인 행동을 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금방 그치네.’ 하고 대답하는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차 잘 마셨어. 나중에 보자.”
“잘 가. 마리사.”
마리사가 떠나간 마루에는 스며든 빗물이 자욱과, 그녀가 덮었던 수건이 그림자처럼 남아있었다. 마지막 인사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은 스스로를 좋아할 수 없었다. 마리사, 그녀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마리사,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상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 나는 정말 그냥 물어보는 것뿐인데, 마리사, 나랑...
“입... 입술을 마주... 아니...”
레이무는 양손으로 쥐고 있는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아직 첫 잔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지근한 차를 레이무는 단숨에 들이켰다. 찻잔을 마룻바닥에 내려놓았다. 기운이 빠졌다. 그녀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털어내듯 입 밖으로 소리를 내었다.
“키스를...”
레이무는 두 번 다시 그 단어를 입 바깥으로 내지 않기로 다짐했다. 말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마리사는 자신을 순수한 친구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 이상의 감정을 들키는 순간, 둘은 더 이상 지금 같은 관계가 아니게 될 것이었다. 감정을 솔직하게 말했을 때 마리사는 스스럼없이 받아줄까. 레이무는 고개를 저었다. 받아주기를 바라는 건 독선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감정을 마리사에게 털어놓는 상상을 했다. 마리사는 당황하고, 생각 못 했다는 표정을 짓고, 그렇게 자신과 거리가 멀어지는 상상이 이어졌다. 죽을 때까지 서먹한 관계로 남아버리는 미래가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화요일, 마리사가 없는 화요일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보며 웃지 않는 마리사가 떠올랐다.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감정을 들켰을 때 돌이킬 수 없이 나락으로 빠져들 자신과 마리사의 관계가 자꾸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하지만 무엇보다 레이무를 떨리게 하는 것은, 앞으로 이 감정을 숨길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레이무는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서 이불을 뒤집어쓰기로 했다. 모든 게 견딜 수가 없었다. 문득, 아직도 과자에 대해 답례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마리사...” 레이무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레이무는 자신의 방 문을 열었다.
마리사는 자신의 집 문을 닫았다.
“바보 같았어.” 마리사는 한숨 쉬듯 말했다.
마리사는 신사에 가기 전에 마을에 들리려 했다. 저번에 같이 먹었던 과자를 사러 갈 생각이었다. 레이무가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속여넘겼다. 하지만 불 하나 없이 어두운 집은 마리사를 자신의 본심과 마주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과자를 받아먹는 레이무를 보고 싶었다.
그리고 마을로 가던 도중 소나기가 내렸다. 돌아간다면 자신의 집 쪽이 훨씬 가까웠지만, 화요일을 기다릴 레이무가 마음에 밟혔다. 마을에서는 레이무가 활기차게 일을 하고 다닌다는 소식이 들렸다. 혹시, 과자를 먹은 걸 답례하려고 평소보다 무리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렇다면 레이무에게 부담을 덜어줄 말이라도 해줄 요량이었다. 마리사는 빗자루를 신사의 방향으로 돌렸다. 사실은 레이무를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마리사는 결국 레이무를 걱정시켰다고 생각했다. 불안해하는 레이무의 앞에서 그녀는 더욱 태연한 척 해 보였지만, 연기가 들켰을 거라고 생각했다. 바보 같았어, 그녀는 물에 젖은 옷을 의자에 던지며 중얼거렸다. 혹시 레이무의 옷을 사양한 게 레이무에게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이 싫은 건 절대 아니었다. 마리사는 단지 너무 신세를 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차라리 가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레이무를 걱정시키지도 않았고, 레이무에게 상처를 줬을지, 안 줬을지를 걱정하지도 않았을 텐데.
마리사는 레이무를 좋아했다. 아무 일이 없어도 문득 보고 싶었고, 맛있는 걸 발견하면 레이무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레이무의 말 한마디마다, 작은 움직임조차 신경 쓰게 되었다. 혹시, 사랑에 가까운 감정일지도 모른다고, 마리사는 생각했지만 그녀는 이 감정에 사랑한다는 말을 섣불리 붙일 수 없었다. 만약 지금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 아닌 단순한 집착이거나, 소유욕이거나, 독점욕이라면, 레이무를 상처입히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오랜 고민 끝에 마리사는 스스로의 감정을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은 단지 레이무 그녀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조금씩 전해보기로 했다. 매주마다 꾸준히 신사를 찾아갔고, 맛있는 게 생기면 레이무에게 가장 먼저 들고 갔다. 머릿속에서는 언제나 적극적인 애정 표현이 생각났지만 마리사는 레이무에게 거절당하는 게 무서웠다. 가장 사소한 거절에도 자신의 감정이 가장 낮은 곳부터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그런 공포가 느껴졌다. 무슨 행동을 해야 할까, 어떤 행동을 해야 레이무가 좋아하고, 어떤 행동을 싫어할까.
그녀는 침대에 눕지 않았다. 왠지 오늘은 잠들 수 없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의자에 앉아, 달빛만이 들어오는 어두운 집 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창문 밑, 침대 옆의 탁자에 올려진 벚꽃 모양의 머리 장식이 달빛에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과거의 일에 생각이 닿았다.
“거절 한 건 나잖아. 바보 같기는.”
유카타는 아무래도 불편했었지, 마리사는 생각을 이어갔다.
작년에 있었던 일이었다.
마을에서는 가을 축제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마리사는 마을 입구에서 레이무를 기다리고 있었다. 축제에는 유카타를 입어야 한다는 레이무의 고집에 입고 온 유카타지만, 마리사는 조금 부끄러웠다. 유카타는 평소 긴 치마에 가려져있던 다리를 드러냈다. 혹시 레이무도 유카타가 너무 짧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마리사는 불안한 마음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마리사는 머리카락을 누를 수 있었던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마리사는 언제나 모자를 쓰고 다녔지만 유카타에는 모자가 어울리지 않았다. 마리사는 모자를 쓰지 않으면 머리가 정말로 부스스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1주일의 작업 끝에 축제 이틀 전 머리를 가라앉히는 마법식을 겨우 그려낼 수 있었다.
“마리사.”
뒤를 돌아본 그곳에는 레이무가 서 있었다. 그녀는 평소의 무녀 복장이 아니었다. 벚꽃 무늬가 새겨진 유카타의 차림새였다.
“아, 레이무.”
“정말 유카타네? 싫어하길래 안 입을 줄 알았는데.”
마리사는 일부러 태연한 척 팔을 펼쳐보였다.
“나에겐 안 어울리는 옷이 없다는 걸 증명해줄 생각이었거든! 어때, 완전 어울리지?”
마리사의 과장된 몸짓에 레이무는 쿡쿡, 하고 웃었다.
“응, 되게 잘 어울려. 머리카락도, 차분해서 예쁘고.”
마리사는 안도감을 느낄 틈도 없이, 칭찬의 습격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너, 너도... 되게 예뻐. 레이무.”
무의식중에 한 말이었다. 순간 마리사와 레이무 사이에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정적은 몇 초 뒤 마을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계속됐다.
“...갈까.” 레이무가 머뭇머뭇 말을 꺼냈다.
마리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은 밤을 물러내듯 길거리마다 등이 매달려 있었다.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이 정도의 사람이 살았었나, 싶을 정도의 인파였다.
“사람 되게 많다.” 마리사가 말했다.
“잘못하면 미아가 될지도 모르겠어.” 레이무가 말했다.
큰 거리로 나아갈수록 사람들은 더욱 많아졌다. 마리사와 레이무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가 서로의 손을 찾아 마주 잡았다. 서로의 손을 잡아본 건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마리사는 굳이 그 사실을 말로 하지는 않기로 했다. 대신 싫지 않다는 의미로, 어쩌면 좋다는 의미로 레이무를 붙잡은 손에 조금 힘을 주었다. 레이무도 답례하듯 손을 쥐었다. 문득 마리사는 레이무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멋쩍은 듯이 웃었다.
둘은 늘어선 노점들을 기웃거리며 걸었다. 마리사는 노점마다 관심을 보이며 레이무에게 말을 걸었다.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생각할수록 점점 긴장되어오는 감각을 참을 수 없었다. 다행히 레이무는 자신의 말에 적어도 두 배의 반응을 보여 왔다.
“나 마리사 모자 안 쓴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아.”
레이무는 불현듯 마리사의 이야기를 꺼냈다.
“가끔 모자 벗잖아?”
“그건 눌린 머리. 오늘처럼 차분한 건 처음이라서.”
마리사의 머릿속에 1주일 간 고생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아하하, 나는 머리가 왠지 허전한 것 같기도.”
레이무는 눈을 깜빡이며 마리사의 머리카락을 응시했다. 그리고 마리사가 반응을 보일 새도 없이 마리사의 손을 잡아끌었다.
“마리사. 이쪽으로.”
“무, 무슨 생각이야 레이무!?”
마리사는 속절없이 레이무에게 끌려갔다.
레이무가 도착한 곳은 머리핀을 파는 노점이었다. 그녀는 마리사를 뒤에 세워둔 채로 머리핀을 신중하게 골랐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레이무는 마리사에게 다가와,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조금은 어리둥절한 마리사에게 손거울을 비췄다.
“쨘.”
마리사의 머리에는 벚꽃이 한 송이 피어 있었다. 마리사는 손을 뻗어 장식을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다행이다. 어울려서.”
레이무는 싱그럽게 웃었다. 마리사는 잘못하면 심장이 터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부끄러워 죽을 것 같은 감정을 레이무에게는 굳이 표현하지 않기로 했다. 레이무도 태연한 척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었지만, 두 뺨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고마워. 너한테 이런 걸 받은 건 처음...이네.”
“자, 자 그러면 나는 값을 주고 올 테니깐.”
레이무는 얼굴이 보이지 않게 돌아서 노점으로 다시 걸어갔다. 아마도 자신의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스스로도 알았기 때문이라고 마리사는 생각했다. 마리사는 물건의 가격이 얼마인지 알아볼 겸 레이무의 뒤를 따라갔다.
“저, 벚꽃 무늬로 하나 더 살게요.”
노점 주인 아저씨는 뒤이어 오는 마리사를 바라봤다.
“저 뒤에 있는 아가씨와 같은 무늬로 말이지?”
마리사는 그제야 상황을 눈치챘다. 레이무는 그녀의 머리핀의 값을 이미 냈다. 그리고 자기 모르게 그녀와 같은 머리 장식을 살 생각을 했다. 하지만 눈치 없이 레이무의 뒤를 밟아 온 것이었다. 레이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마리사와 눈이 마주쳤다.
레이무가 진정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결국 마리사는 레이무에게도 같은 핀을 사주고 싶었다는 말로 레이무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레이무는 마리사와 같은 위치에 핀을 꼽았다. 둘은 다시 손을 맞잡고 거리를 걸어나갔다. 마리사는, 남들이 보면 연인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불안감이 마음 한켠에서 자라나는 게 느껴졌다. 나는 레이무에게 어울릴 만한 사람일까?
“마리사.”
레이무는 사람이 분주하게 모여드는 타코야키 노점을 가리켰다. 바로 앞에 서 있는 입간판은 타코야키의 가격과, 특별한 상황에서의 할인이 적혀 있었다.
“저 집. 연인사이면 할인해준데.”
레이무는 머뭇머뭇 다음 말을 이었다.
“우, 우리도 연인이라고 속여 볼까?”
마리사의 발이 얼어붙었다. 공포가 자신의 발을 잡아끄는 감각이었다. 마주 잡은 손이 스르르 풀렸다. 마리사가 지금까지 레이무에게 서스럼 없이 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아니, 속 편한 자기합리화였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말로 레이무가 자신을 특별하게 여긴다면. 자신 따위를 정말로 특별하게 여겨주는 사람은 어떻게 대해야 할까.신경 쓰는 법을 몰라 무신경한 척하는 자신이 레이무에게 상처를 입힌다면...
“마리사... 농담이야 난 그냥 할인...”
레이무는 불안에 떠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에 마리사는 정신이 놓이는 듯했다.
“그런, 아니, 저기... 그래도...”
마리사는 둘러대려는 말이었다. 하지만 마리사는 아직도 다음 말을 후회했다.
“주인 아저씨가 이상하게... 생각, 할지도...”
동전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레이무가 들고 있던 동전 주머니를 떨어뜨렸기 때문이었다. 동전 주머니를 향해 뻗는 레이무의 손이 미묘하게 떨렸다.
“어라, 주머니를 떨궜네.”
레이무의 목소리는 평소 이상으로 차분했다.
“아니야... 저기, 들어봐, 나는...”
“괜찮아.”
레이무는 마리사의 말을 잘랐다.
“미안. 내가 너무 들떴었나 봐.”
레이무는 동전 주머니의 먼지를 조심스럽게 털어냈다.
“축제도 거의 끝나 가는데, 슬슬 돌아갈까? 피곤하기도 하고.”
레이무는 마리사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레이무는 잠에서 깨어났다. 신경 쓰이는 꿈을 꿔버린 덕분이었다. 다시 잠들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방을 나서다가 다시 돌아와 탁자 위에 놓인 작은 상자를 챙겼다. 아마도 새벽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무는 방석을 깔고 마루에 앉았다.
작년 가을 축제의 꿈이었다. 마리사와 행복한 한 때가 지나가면, 언제나 꿈의 마지막은 그 부분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툭 부러지는 느낌이 났다.
레이무는 종종 그때 자신이 떨고 있었다는 걸 마리사에게 말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들곤 했다. 불안하지 않은 척, 농담인 척 건넨 고백이었지만 그건 정말로 그녀의 진심이었다. 자신이 갑자기 불안에 떠는 모습에 당황하던 마리사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레이무는 도망치듯 축제를 빠져나왔다. 마리사와 작별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않았었다.
그 후로 레이무는 마리사와 손을 잡아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희망어린 감정을 배려 없이 내비쳤기 때문에, 관계가 후퇴한 것이라고 레이무는 생각했다. 레이무는 들고 있던 작은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벚꽃 무늬의 머리핀이 들어 있었다. 마리사에게 레이무가 사준 머리핀이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기도를 올리듯 레이무는 머리핀을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말아쥐었다.
다음날 레이무는 미묘한 추위에 눈을 떴다. 손에는 머리핀이 쥐어져 있었다. 어제 그대로 마루에서 잠든 모양이었다. 문득 가을이 지나갈 무렵 마루에서 졸던 일이 생각났다. 우연히 들른 마리사는 바깥에서 자면 감기에 걸린다며 레이무를 혼냈었다.
“감기...”
그녀는 어젯밤 비에 젖은 마리사가 생각났다. 만약 감기에 걸렸다면, 누구 하나 찾아오지 않는 숲 속의 집에서 앓고 있을 마리사가 떠올랐다.
“아니, 혹시 감기가 아니라면 무안해지니까...”
레이무는 신사의 안으로 들어와, 아침밥을 먼저 준비하기로 했다.
그리고 30분 뒤, 레이무는 마리사의 집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레이무는 마리사가 감기에 걸려 누워있는 상상을 머릿속에서 걷어낼 수 없었다. 혹시 마리사가 죽을 정도로 아프다면, 혹시 마리사가 나를 찾고 있다면...
레이무는 마리사의 집 앞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마리사의 집 문을 두드렸다.
“마리사. 나야.”
하지만 집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혹시 대답하지 못할 정도로 아파 누워있는 건 아닐까. 레이무는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문손잡이를 돌려보았지만 잠겨있었다. 레이무는 다시 문을 두드렸다.
“마리사, 안에 있어? 마리...”
그 순간 문이 열렸다. 마리사는 활기찬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야? 그렇게 걱정하는 표정을 짓고 서서는.”
괜한 걱정이었구나. 레이무는 왠지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그, 그냥. 지나가다가 들려 본 거야.”
“나는 또. 무슨 일 생긴 줄 알았네.”
마리사는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이제 볼 일 보러 가는 거야?”
레이무는 순간 벚꽃 머리핀에 생각이 닿았다. 마리사의 집에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아니, 조금 시간이 남아서. 잠시 들어가 봐도 될까?”
마리사의 어깨가 조금 떨렸다.
“아, 지금은 저기, 집이 더러워서 조금 무리...”
“신사 더러운 꼴도 많이 봤잖아? 새삼스럽게.”
“레이무. 저기... 안 돼.”
마리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레이무는 거절당했다는 사실보다 마리사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에 정신을 빼앗겼다.
“잠깐, 마리사 너...”
“정말 안 돼. 레이무. 더 이상은...”
마리사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녀는 현기증을 느낀 것처럼 비틀거렸다. 레이무는 마리사를 붙잡았다. 마리사의 옷 위로 느껴지는 마리사의 체온은 정상이 아니었다. 마리사는 이제껏 숨을 참은 사람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감기, 아닌 게 아니었구나. 레이무는 머릿속이 새햐얗게 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몸은 마치 본능처럼 해야 할 일을 찾아 움직였다.
그리고 조금 뒤, 마리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쟁반에 담긴 죽을 우물거리며 먹고 있었다. 레이무는 침대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있었다. 마리사의 방에는 숟가락이 그릇과 부딪치는 소리 이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침묵은 마리사가 쟁반을 침대 옆의 탁상에 올려놓는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레이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픈 거, 왜 숨겼어.”
그녀는 처음에 마리사가 아픈 걸 눈치채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감기 걸렸는지 확인하러 온 주제에, 알아채지도 못하고 마리사를 더 고생시켜 버렸다고. 마리사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레이무는 자신의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숨긴다고, 안 아픈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그래도’야!”
레이무는 마리사의 말을 잘라냈다.
“더 아파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아파졌으면 어떡하려 했는데!”
목소리는 의도치 않게 점점 커졌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있는 마리사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죄여오는 것 같았다. 마리사는 죄가 없었다. 하지만 레이무는, 자신의 섭섭함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 의지가 안 되는 사람이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인데, 내 앞에서, 아프다는 말 하나 못 할 정도로, 내가, 그렇게...”
레이무는 순간, 자신이 환자에게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안.”
방 안은 잠시 침묵으로 물들었다. 마리사는 머뭇거리며, 침묵을 다시 걷어냈다.
“레이무, 지나가다가 들른 거잖아. 다른 일 있을지도 모르는 애한테 매달리고 싶지는... 않았다고.”
레이무는 급소를 찔린 느낌이었다.
“아니야. 사실... 저기...”
마리사는 어렴풋이 사실을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정말로 감기가 걱정돼서 왔지만 ‘지나가다 들른 것.’이라며 둘러댄 것이었다. 만약 감기가 걱정 돼서 왔다면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도달하자, 마리사는 서운한 감정이 몰려왔다.
“나 걱정 돼서 와 놓고... 아닌 척 한 거지. 레이무.”
레이무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맞아. 안 아픈 척했어. 어딘가 볼일 보러 가다가 들렸을 거라 생각해서.”
평소의 마리사는 자제력으로 감정을 막아냈다. 하지만 머리는 아팠고, 몸 상태는 나빴다. 지금의 그녀에겐 감정을 막아낼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레이무 생각해서 안 아픈 척 한 건데 이제 와서 말 안 했다고 나한테 화내는 거야? 레이무?”
“마리사, 내가 잘못...”
“나는 너한테... 표현 하나하나 신경 쓰느라 죽을 것 같은데. 얼마나 힘든데... 너는...”
마리사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리사는 레이무를 굳이 보고 있지 않아도 그녀가 당황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리사의 머릿속에 그동안 레이무에게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감정 표현들이 하나씩 지나갔다.
“나는 감정 표현이 서툰 사람이라고. 잘못 말했다가 레이무를 상처 입혀버리니까. 가을에도 그랬잖아? 결국 상처 입혀버릴 정도로 무심한 사람인거야 나는! 그래서 너랑 멀어질까 봐 무섭다고. 무서워서 결국 아무것도 못 해버리는 내가. 맞아! 내가 싫은 거야! 바보처럼 아무 것도 못 하니까!”
“마리사...”
레이무의 떨리는 목소리에, 마리사는 더욱 레이무를 몰아붙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만큼은 모든 것을 레이무의 탓으로 돌려도 될 것 같았다.
“내가 얼마나 어려운데, 얼마나 고민하는데. 레이무는 하나도 몰라주잖아! 그러면서, 그러면서 레이무는 나한테만, 나한테만...”
이불은 점점 눈물 자국으로 얼룩져갔다. 레이무는 마리사의 말이 꿈처럼 들려왔다. 그녀가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던 일이었다. 마리사는 소리 없이 계속 눈물을 떨궜다.
마리사를 어떻게든 위로해야 했다. 전해야 했다.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나도 너처럼 말 한마디에, 행동 하나에 무서워하고 있다고. 하지만 말로 전달하기엔 적당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레이무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한 차례 심호흡을 했다. 그녀가 생각한 위로 방법은 친구 사이에서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레이무는 마리사의 어깨를 천천히 감싸 안았다. 긴장한 탓인지 조금 뻣뻣하게 안아버렸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마음 속 깊은 곳부터 후회했다. 마리사가 밀쳐내면 더 이상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자신이 부러질 것 같다는 공포, 마리사에게 내가 불편하지는 않을까 싶은 공포가 느껴졌다.
하지만 마리사는, 그런 그녀의 우려를 무시하듯 레이무의 허리를 팔로 감싸며 레이무에게 안기듯 기대었다. 그녀는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마리사는 연신 눈물로 얼룩진 서운함을 레이무에게 털어놓았다. 레이무도 금방 울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지금은 마리사를 위해 눈물을 참기로 했다.
그렇게 마리사는 한참동안 레이무의 옷깃을 적셨다. 울다 지쳐 잠든 마리사의 머리 위에 레이무는 물수건을 올렸다. 아마도 오늘은 신사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았다.
마리사는 아버지의 두 가지 모습을 기억했다. 손님들을 대할 때의 밝은 모습과, 자신을 대할 때의 차갑게 얼어붙은 모습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탐탁치않게 여겼다. 마리사는 아버지가 그렇게 대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막연하게 추측할 뿐이었다.내가 여자애답지 않게 돌아다녀서 그러시는 걸까.
대부분의 못마땅한 일에 마리사에게 매를 드는 아버지였지만, 특히 마리사가 집 바깥을 돌아다니는 것엔 더욱 특별히 반응했다. 외출이 들키고 나면, 그녀는 하루 동안 창고에 갇혀 있어야 했다. 마리사가 아프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내린 소나기에 마리사가 젖어 들어 왔을 때에도, 아버지는 말 한마디 없이 그녀를 창고에 집어넣었다.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창고는 바깥보다 추웠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머리가 점점 아파져 왔다.숨이 점점 가파르게 차올랐다. 마리사는 어두운 공간 속에서 누군가 찾아와주길 간절히 빌었다. 평소라면 버틸 수 있는 벌이었지만,지금 만큼은 버틸 수 없었다. 버려졌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 순간 창고 앞을 지나가는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잠겨있는 문으로 뛰어가 문을 두드렸다. 내보내 주세요. 잘못했어요.저 아파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발소리는 창고의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는,
“나간 건 네 잘못이다. 아버지는 내일까지 열어주지 말라고 하셨다.”
잔혹한 말을 읊었다.
그리고, 마리사는 꿈에서 깨어났다. 마리사는 더러운 꿈을 꿨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이른 아침인 듯, 새벽녘 새들의 지저귐이 집 안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 위에는 차가운 물수건이 올려져 있었다. 레이무는 자신의 팔을 베게 삼아 침대의 모서리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아마도 밤을 새면서 자신의 물수건을 갈아준 모양이었다.
그녀는 반대쪽 손을 레이무에게 뻗었다. 그리고 지쳐 잠들어 있는 레이무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문득 자신을 조금 뻣뻣하게 껴안던 레이무가 생각났다. 레이무, 너도 나처럼 표현이 무서운 거구나. 모르고 있어서, 미안해. 마리사는 다시 한 번 레이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리사는 자신의 팔을 조심스럽게 꺼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기는 하루 만에 떨어져 있었다. 몸 상태는 잠든 레이무를 깨우지 않고 자신의 침대에 눕힐 정도로 좋아져 있었다. 마리사는 이틀 동안 못 치운 집을 정리했다. 레이무는 일어날 때까지 재워 두기로 했다.
레이무가 일어난 건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마리사...”
점심을 준비하던 마리사가 뒤돌아본 그곳에는, 자신의 베개를 껴안고 있는 레이무가 서 있었다. 아직 잠이 덜 깬 모양인지 레이무는 눈이 반 쯤 감겨 있었다.
“아, 레이무. 밥 먹을래?”
레이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는 밥을 먹는 동안에도 베개를 놓지 않았다. 마리사는 그런 레이무가 엄청 귀엽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한 번 레이무가 잠에서 막 깰 무렵에 놀러 가는 계획도 세우기로 했다. 밥을 거의 다 먹어갈 때가 돼서야 레이무는 제정신을 차렸다.
“아...”
“응?”
“마, 마리사 아프잖아! 괜찮아? 열은?”
마리사는 쿡쿡거리며 웃었다. 레이무는 그러는 마리사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덕분에 하루 만에 나았어. 그보다 말야, 레이무. 내 베개는 언제까지 안고 있을 건데?”
레이무는 붉어진 얼굴로 마리사의 방으로 도망쳐버렸다.
“...바보냐. 나는.”
레이무는 스스로 자책하듯 말했다. 그녀는 레이무가 깨어날 때까지 잠들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열이 내린 걸 확인한 순간부터 긴장이 풀려 잠든 것 같았다. 마리사에게 아침밥을 해주겠다는 계획도 빗나가 버렸다. 그녀는 마리사의 방에 들어온 김에 자신이 잤던 자리를 정리하기로 했다.
그녀는 탁자 위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마리사를 위해 가져왔던 쟁반은 이미 마리사가 치운 모양이었다.
“간호도 제대로 못 하고. 나는 정말... 어라.”
탁자 위에는 어디선가 많이 봤던 물건이 올려져 있었다. 벚꽃무늬 머리핀이었다.
“레이무. 차 끓여놨는데.”
문이 열리면서 마리사가 방으로 들어왔다.
“아아, 침대 정리야 내가 하면 되는데... 근데, 레이무 뭐 봐?”
레이무는 순간 둘러댈까, 싶었지만 이제는 왠지 그대로 말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머리핀... 아직 갖고 있네 싶어서...”
그리고 방 안에는 미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레이무는 곧바로 후회했다. 하지만 침묵이 나쁜 감정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는 걸 눈치 챈 레이무는 후회를 취소했다. 마리사의 뺨이 조금 붉었다.
“당연히, 네가 사준 건데. 의, 의미 있는 거니까.”
둘은 이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말없이 끓여놓은 차를 마시기로 합의를 보았다.
레이무는 해가 지기 전에 신사로 돌아왔다. 조금 더 있고 싶었지만 마리사의 권고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두울 때의 비행은 위험해.’ 레이무는 마루에 쓰러지듯 누웠다. 붉게 물든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온 몸의 긴장이 전부 빠지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솔직해져도, 그렇게 큰일이 나진 않는구나.
마리사는 레이무가 있었던 침대에 엎어지듯 누웠다. 무녀가 껴안고 있던 베개에서는 어렴풋이 무녀가 느껴졌다.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마리사는 베개를 껴안았다. 왠지 마음이 녹는 것처럼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리사는 탁자 위의 벚꽃무늬 머리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솔직해져도, 그렇게 큰일이 나진 않는구나.
레이무는, 화요일이 다가오면 느껴지는 설렘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는 화요일을, 화요일에 찾아오는 마리사를 기다렸다. 특별하게 매 주 화요일에 만나자는 약속을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화요일은 그런 날이 되었다.
그녀는 마루에 나와 마리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에는 벚꽃 머리핀을 꽂고 있었다. 조금 티 내는 것 같아서 스스로 별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리사가 사준 물건을 자신도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그녀의 옆에는 과자 상자가 놓여 있었다. 마리사의 답례를 위해서 사온 과자였다. 마리사가 찾아오면 그녀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과자를 먹여주기로 했다.
“요. 레이무”
마리사는 매주 오던 그 시간에 신사에 도착했다.
“어서 와. 마리사.”
레이무는 반가운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표정과 말 밖에 표현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문득, 레이무는 마리사의 짐꾸러미에 눈길이 끌렸다.
“마리사, 그거 무슨 짐이야?”
“아아, 이거?”
마리사는 평소보다 레이무와 더 가까운 자리에 앉아왔다.
“별건 아닌데... 잠깐, 네 옆에 있는 상자는 뭐야?”
“이거 과자...인데. 너한테 답례 못 한 게 계속 마음에 걸려서.”
마리사는 난처한 표정으로 짐의 묶음을 풀어냈다. 레이무의 옆에 있는 상자와 같은 종류였다.
“나, 나도 사왔는데...”
레이무는 마리사에게 왜 사 왔는지 묻고 싶었다. 마리사는 레이무가 왜 사 왔는지를 물어봤을 때 대답할 말을 골랐다. 그리고 레이무는 마리사가 무슨 대답을 할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마리사는 단 한 가지밖에 대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자를 한 번 더 먹여보고 싶었으니까. 둘은 동시에 뺨이 붉어졌다.
마리사는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저, 저기! 옛날에도 서로 사줬었던 적 있지 않아?”
“맞...맞아 있었던 것 같은데, 뭐였더라.”
마리사는 질문을 한순간 정답을 찾을 수 있었다. 레이무의 머리에 꽂혀 있는 머리핀. 레이무도 마리사의 시선을 따라 정답을 알아냈다. 둘은 조금 전보다 훨씬 얼굴이 붉어졌다. 가을의 그 때처럼, 서로 멋쩍게 웃으면서 넘어가기로 둘은 합의했다.
“어제는 미안했어. 아파서 괜한 소리 늘어놓고.”
레이무는 마리사의 사과에 반발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야! 고마웠는데. 오히려.”
“그래도 왠지 바보 같잖아. 표현이 무섭다니. 악령이나 말 안 통하는 요괴도 아니고.”
레이무는, 지금이라면 마리사에게 자신의 두려움도 고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사실, 사실은 무섭다고. 너한테 표현하는 거.”
마리사는 멍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많이 표현하고 싶은데... 네가 싫어할까 봐 하지 못한 것도 많고. 그, 그러니까 바보라고 하면 안 돼. 나도 바보가 돼버리잖아.”
마리사는 레이무의 표현이 제법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레이무를 진정시키듯 미소를 지었다.
“나는 레이무가 표현해주는 건 전부 좋은데.”
마리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나는 네 표현이 그냥, 부끄러웠달까. 나는 좋아함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네가 말하는 것도 쉽게 말하는 건 아니라는 것도 몰랐던거고.”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전과는 다른 기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이상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두려움을, 공포를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기분이 물감이 퍼지듯, 기분 좋게 스스로를 물들이고 있었다.
“그럼... 이제 내가 뭘 해도 받, 받아 줄 거야?”
레이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대도.”
“정말... 뭐, 뭐든 괜찮은 거지.”
“아 정말, 괜찮다니깐.”
레이무는, 머뭇머뭇 자신이 사온 과자 상자의 포장을 풀었다.
“그, 그러면 있잖아. 내가 뭘 해도 웃지 않기다...?”
마리사는 레이무가 할 행동을 왠지 알 것 같았다.
“아아, 오늘은 레이무가 먹여 주는 과자를 먹을 수 있겠네~ 그런 거라면 몇 번이고 해도 되는데? 그렇게 부끄러워 할 필요까진 없......”
레이무는 과자를 자신의 입에 갔다댔다. 그리고 부서지지 않게, 입으로 살짝 깨물었다. 레이무는 행동의 의미만큼 뺨이 붉어져 있었다. 레이무의 입술은, 그 보다도 더욱 붉었다. 마리사는 비유할 수 있는 모든 붉은 것들이 생각났다.
레이무는 무릎 사이에 손을 집어넣은 채로 자신을 기다렸다. 참을 수 없는 귀여움이 느껴졌다. 그녀는, 과자를 먹기 전에 짤막하게 감상을 표현하기로 했다.
“잘 먹겠습니다.”
마리사는 레이무에게 다가갔다. 레이무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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