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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회 글알못 팬픽대회

즐거움이 사라진 거리 - 장기짝

1.거리

 

그 거리는 언제나 즐거움으로 가득 찬 거리였다.

종교가들의 이상한 대결 열풍이 불면서 그 거리는 한층 더 활기를 띠었다. 구경꾼들로 북적이면서 그 거리를 차지한 가게들의 매상도 치솟아 올랐다. 가게 주인들의 입은 자연스레 귀에 걸렸다. 가장 득을 본 가게는 소바 가게였다. 단순히 장사가 잘 돼서가 아니었다. 소바 가게 주인에게 숨겨진 노름 재능이 있을 줄 누가 알았으랴. 거리에서 종교가들의 대결이 있을 때마다 가게 주인은 더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그 종교 전쟁을 거리에서, 아니, 인간마을에서 가장 즐겁게 즐긴 이는 분명 그였다.

우습게도, 가장 먼저 모든 즐거움을 잃은 이도 바로 그였다.

첫 시작은 단순한 휴업이었다. 소바 가게에 휴업 팻말이 걸렸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그간 많이도 벌어댔으니 좀 쉬려는 거겠거니 생각했다. 그렇게 사흘 내내 소바 가게에는 휴업 팻말이 걸려있었다. 그동안 소바 가게 주인을 거리에서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어딘가 아픈가 해서 집에 방문한 오지랖 넓은 이들은 바닥에 늘어져 있는 내외를 발견했다.

"영 재미가 없어. 일하고 싶지 않아."

"나가봐야 재미도 없고.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그 광경을 본 이들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재미를 본 종교전쟁이 끝나니 허무감이 찾아올 만도 하지.

그리고 다음 날, 소바 가게 옆의 떡집에 휴업 팻말이 걸렸다. 다음 날은 포목점에, 다음 날은 잡화점과 술집에. 농부들은 밭과 논에 나가질 않았다. 점원들은 출근을 거부했다. 아이들은 서당에 나가질 않았다.

"일이 즐겁지가 않아."

"공부 따위 열심히 해도..."

이내 그 거리 전체가 활기를 잃었다. 어느 가게도 문을 열지 않고 누구도 그 거리를 지나다니지 않았다. 즐거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거리였다.

 

"뭐야, 다들 문을 닫은 게냐."

너구리 요괴 후타츠이와 마미조는 뒤늦게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소바를 즐길 마음이 들어 그 거리를 방문한 덕이었다. 가게마다 휴업 팻말이 걸려있고 인적이 사라진 거리를 보자 그녀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런 모습이나 보자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거늘."

그녀의 기억 속에서 다른 길거리가 떠올랐다. 벌써 수십 년 전에 본 거리였다. 어쩌면 백 년도 더 됐을지도 모른다. 확실하게 남은 기억이라곤 그 거리에 붙은 이명뿐이었다. 즐거움이 사라진 거리.

". 거리 하나가 아니었지."

마미조는 순간 자신의 기억이 살짝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 이명은 거리 하나를 가리키는 게 결코 아니었다. 마을 하나도 아니었다. 차라리 그 정도였다면 좋았으련만.

"짜증 나는 걸 떠올리고 말았구만."

그녀는 등을 돌려 거리를 빠져나왔다. 거리를 나오자 인간마을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짐꾼들은 분주히 걸음을 옮기고, 아이들은 낄낄거리며 서로를 놀렸다. 그 와중에 한 노인은 아내 몰래 가게에서 빠져나와 곰방대를 피기 시작했다.

"이래야지. 이래야 요괴 입장에서도 좋지 않느냐 말이야."

고개를 돌려 방금 빠져나온 거리를 바라봤다. 여전히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인간들, 이런 거리는 싫다. 이건 전혀 즐겁지 않아."

그녀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노가쿠 공연을 보러 가면 좀 즐거워질지 고민하면서. 소바 생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2.멘레이키

 

하쿠레이 신사에서는 얼마 전에 시작한 노가쿠 공연이 한창이었다. 평소의 신사답지 않게 마을 주민들도 많이 모여 공연을 관람하고 있었다. 마미조는 나무 위에서 관객들을 찬찬히 살펴봤다. 소바 가게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그 거리의 가게 주인들도. 가게 주인 외에는 거주자들의 면면을 모두 알지는 못했으므로 확신할 순 없었다. 하지만 하쿠레이 신사뿐만 아니라 마을 어디에서도 가게 주인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소문대로 모두들 자기 집에만 틀어박힌 모양이었다.

관객들에게 신나게 이것저것 팔고 있는 무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도 처음에는 무녀에게 이를 알릴까 고민했다. 노가쿠 공연으로 신사가 인파로 북적이니 무녀는 잔뜩 신이 나 있었다. 지금 인간마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 말해도 당분간은 신경도 쓰지 않으리라.

무녀가 나서지 않는다면 마미조가 굳이 나설 필요는 없다. 딱히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 기묘한 사건에 이상할 정도로 심기가 불편했다. 아마 그 거리에서 불쾌한 기억을 떠올린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심기가 불편한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을에서 조심스레 정보를 모아보자 사건의 실마리가 나타났다. 다만 그 실마리가 영 곤란한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냥 일이 재미가 없다네요. 아니 평소에는 얼마나 재미가 있어서 했다고?"

"가게 여는 게 즐겁지가 않다덥디다. 돈 벌기도 싫다니 참 이상해요. 하긴 요즘 배로 잘 벌기야 했지."

"서당에 오는 게 싫다더군. 평소에는 공부는 싫어도 친구들이랑 노는 게 좋아서 오던 녀석들인데..."

"거 그럼 나랑 평소처럼 노닥거리게 나오라고 했더니 그것도 싫다데요. 그것도 재미가 없다나?"

그 거리의 모두가 더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 했다. 즐거움이란 감정 자체가 사라졌다. 마미조는 지금 노가쿠 공연을 펼치는 노가쿠사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멘레이키, 하타노 코코로를.

 

노가쿠 공연이 끝났다. 관객들은 나름 재미있게 즐겼지만 내용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쿠레이의 무녀는 공연을 마친 코코로에게 젖은 수건을 건네주고는 다시 기념품을 관객들에게 팔러 갔다.

"멋진 공연이었네."

마미조는 가볍게 손뼉 치면서 코코로에게 다가갔다. 코코로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마미조를 돌아봤다.

"과찬의 말씀!"

무표정한 얼굴 앞에 노인 가면이 날아왔다. 말투에서 느낄 순 없지만 분명 기쁜 감정을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겠지.

"어떤가? 감정은 많이 배웠는가?"

"난해하지만 차근차근. 매우 긍정적이다."

"다행이구만. 오늘 찾아온 건 그 때문만은 아니고. 묻고 싶은 게 있네만."

코코로의 얼굴 앞으로 이번엔 화들짝 가면이 날아왔다. 마미조가 자신에게 무언가 묻는 게 놀라웠던 모양이다.

"당신이라면 뭐든지 다 알 줄 알았는데. 의외다."

"세상에 그런 존재가 어딨나. 아 혹시 농담인가? 그렇다면 제법일세."

"농담은 이렇게 하는 건가. 참고하겠다."

"한 방 먹었고만. 다름이 아니라 혹시 최근에 인간 마을에 내려간 적이 있는가?"

"최근? 최근이라면 언제?"

"마지막으로 종교가들이랑 싸우고 나서 말일세."

"없다."

코코로는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어느새 여자가면이 얼굴 앞을 차지하고 있었다.

"잘 생각해보게. 정말 그 뒤로 인간마을에서 감정을 가지고 논 적이 없나?"

"없다. 종교가들을 혼내주고 난 뒤 인간마을은 들르지 않았다. 인간들의 감정에도 간섭한 적이 없다. 내 감정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기만 했다."

코코로는 딱 잘라 말했다. 마미조는 과연 이 멘레이키가 거짓말을 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코코로를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가? 이내 그녀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충고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였던 멘레이키였다. 지금 와서 자신이 의심하는 입장이 되다니 스스로가 우스웠다.

"미안하네. 개인적으로 좀 불쾌한 일이 있어서. 기분 상했다면 사과하겠네."

"오오, 당신 불쾌한 건가? 나는 지금 기분이 나쁜 건가? 이게 그런 감정인 게로군."

"오늘도 많이 배운 셈일세."

"언제나 고마워. 이 고마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이번엔 방화범 가면이 앞으로 나왔다. 감정을 배워 즐거운 게 분명했다. 알기 쉬운 코코로의 반응에 마미조는 안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더욱 심란해졌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놈의 소행인 겐가.'

그녀는 코코로에게 솔직하게 밝히기로 했다. 조금 전까지 그녀를 의심하던 자신에 대한 반성도 담아서.

"오늘 인간 마을에 가봤는데 즐거움이란 감정을 잃은 사람들이 더러 보였네. 누군가의 소행이 아닐까 의심되더군. 혹시 짐작 가는 바가 없나?"

"뭐라?!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반야가면이 순식간에 코코로의 얼굴 앞으로 날아왔다. 명백한 분노의 표시였다.

"인간들이 즐겁지 않으면 나도 즐겁지 않아! 그런 흉악한 짓거리를 하는 놈들이 종교가들 말고 또 있었단 말인가!"

평온한 목소리로 분노를 표출하는 코코로의 모습에 마미조는 피식 웃고야 말았다.

"그런 악독한 놈들이 또 있는 모양일세."

"그럴 수가! 이러다간 내가 범인으로 몰리겠어!"

"내 제대로 혼을 내주지. 자네는 스스로의 감정에 충실하게나."

"그 약속 꼭 기억해!"

마미조는 멘레이키에게 더욱 미안해졌다.

 

어느새 대부분의 관객이 사라져있었다. 애초에 노가쿠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이니 신사에 더 머물 이유도 없었을 터였다.

'이제 어쩐다...'

노가쿠사가 멘레이키라는 사실은 종교 전쟁에 참여한 종교가들과 자신 정도만 알고 있었다. 마미조는 적어도 멘레이키의 감정이 안정적으로 정착될때까지는 그 사실은 숨기고 싶었다. 인간마을의 이상현상이 계속되면 멘레이키의 염려대로 무녀에게 의심을 살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론 의심을 벗을지 몰라도 그 과정에서 무녀가 괜히 시끄럽게 굴어서 쓸데없는 이목을 끌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미조가 꼭 나서야 할 일도 아니다. 멘레이키가 범인만 아니라면 자신에겐 상관없는 일이다.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 되내였지만 그 거리의 황량한 풍경이 계속 안경 너머로 떠올라 마음이 복잡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멘레이키에게 함부로 약속해버렸다. 누가 원흉이건 간에 제대로 혼내주겠다고.

일단 그 거리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부터 더 알아봐야 했다. 어떻게 할지는 그 뒤에 결정하면 되니. 다시 인간마을에 녹아들어야 할까 생각하던 찰나 마미조의 시야에 무언가가 꽂혔다.

'콧대 높은 놈들은 질색이다만...'

마미조는 한숨을 쉬면서 마음을 굳혔다. 사소한 소문이라도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녀는 얼마 남지 않은 관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토리이로 발을 돌렸다. 토리이 위에서는 마을과 가까운 텐구가 쉴 새 없이 사진을 찍는 중이었다.

 

 

 

 

 

3.텐구

 

"그 거리 말인가요? 알다마다요. 갑자기 유령 거리가 되어버렸는걸요."

까마귀텐구 샤메이마루 아야는 호쾌하게 답했다.

"? 그걸 언제 알았는가?"

"이틀 전이요. 가게란 가게는 그때 이미 문을 다 닫은 상태였고."

"그럼 뭐가 문제인지도?"

텐구는 입을 다문 채 마미조를 빤히 쳐다봤다. 마미조는 텐구가 무얼 하는지 깨달았다. 상대방에게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줘야 할지 머릿속으로 저울질하는 게 확실했다. 이내 텐구는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뇨. 모릅니다. 처음엔 가게 하나만 문을 닫는 정도였다는 것 외에는."

"그럼 전염되고 있다는 겐가?"

"적어도 제가 아는 한은요."

마미조의 불쾌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즐거움이 사라진 거리. 그곳도 처음에는 거리 하나, 마을 하나에서 시작했다.

"어쩌면 마을 전체가..."

"그건 상상만 해도 짜증 나네요. 지금도 그 거리 하나 때문에 인간마을이 영 재미가 없단 말입니다. 인간들이 좀 즐겁게 놀아야 저도 신문을 쓰는 맛이 있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도 종교 전쟁이 끝나서 기삿거리도 부족한데. 노가쿠 공연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죠."

마미조는 피식 웃었다. 텐구도 결국 요괴.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동감일세. 인간들은 좀 오만해야 재미가 있지. 그래야 요괴의 공포가 뭔지 제대로 알려줄 텐데 말이야."

"그럼요. 저는 그걸 기사로 쓰고요."

두 요괴는 서로를 향해 미소 지었다. 하쿠레이의 무녀가 그 모습을 봤다면 요괴 둘이 못된 짓을 작당한다고 혼쭐을 내줄 정도로 악독한 미소였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나서볼까 고민 중이네."

"호오."

텐구는 그 말을 듣자마자 수첩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흥미를 자극할 만한 이야기임이 분명했다.

"...아니. 기사로 써달라는 게 아니라. 혹시나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 없을까 해서 말이야. 사소한 소문이라도 좋네. 자넨 웬만한 소문은 다 알고 있지 않은가? 내 어디 다른 데 함부로 이야기 안 할 테니 좀 도와주게나."

텐구는 또 머뭇거렸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만년필로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다시 한 번 머릿속에서 저울질하는 중이리라.

"너구리 씨에겐 신세를 많이 지긴 했지만... 종교 전쟁에서 좋은 소재를 제공해주셨으니까요. 방금 한 이야기도 그걸 고려한 겁니다만..."

슬쩍 자신을 쳐다보는 텐구의 시선에 마미조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저울이 반대쪽으로 기운 모양이다.

"추카파브라라고 아는가?"

이마를 두드리던 만년필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얼마 전에 인간 마을에서 몰래 술독을 비우던 요상한 녀석이 있었지... 그놈 이야기라면 어떤가?"

"역시 말씀이 잘 통하시는군요!"

텐구의 얼굴에 다시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래서 이놈들 도움을 받기 싫었는데 하고 마미조는 속으로 혀를 찼다. 텐구란 손해 보는 거래는 절대 하지 않는 족속들이니. 바깥세상에서나 환상향에서나 항상 그런 놈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점이 재밌는 놈들이었다. 영악하지 않은 텐구는 즐겁지 않은 인간만큼이나 지루하다. 자기 이익을 챙기지 않는 텐구는 요괴의 존재를 부정하는 인간만큼이나 역겹다. 최소한 마미조는 텐구를 제대로 고른 셈이었다.

 

 

 

"삼도천 뱃사공한테 전해 들은 말입니다만, 지옥에서 가키(아귀) 한 마리가 탈출했다고 합니다. 무슨 수를 썼는지 삼도천까지 건넜다더군요."

"가키?"

".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없는 녀석들 말입니다."

"그럼 마을에서 즐거움이 사라지는 것도 그놈 짓이다...?"

"일단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자긴 지옥에서 그 고통을 겪는데 인간들은 즐겁게 지내는 걸 보니 심술이 난 거겠지요. 가키 중엔 그런 요술을 부리는 녀석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외엔 짐작 가는 바가 없더군요."

마미조가 추카파브라 이야기와 몇 가지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알려주자 텐구는 입을 술술 열었다. 분명 조금 전엔 원인을 모른다고 하더니, 이젠 그럴싸한 설명까지 덧붙여 답을 내놓고 있었다.

"그럼 전염된다는 것도..."

"밤에 그 거리를 몰래 돌아다니더군요. 까마귀들이 목격했습니다."

마미조는 안경 너머로 텐구를 노려봤다. 방긋 웃는 얼굴이 너무나 얄미웠다. 자신에게 접근한 이유를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자세한 내용은 숨겨놓고 간을 보다가 그걸 빌미로 적당한 소재를 얻을 속셈이었겠지.

"그렇군. 가키가 돌아다니니까. 그래서 전염이 된다는 거였군."

"나쁜 소식도 덤으로 알려드릴까요? 어젠 그 거리를 벗어났습니다."

"뭐라고?"

"관심이 많으신 듯하니 어디서 놀았는지 알려드리죠."

텐구가 하나하나 거리를 읊었다. 가키는 생각보다 많은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이대로 두면 인간마을 전체를 도는 건 시간문제라고 텐구는 덧붙였다. 그리고 텐구가 마지막 거리를 입에 담는 순간 마미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시죠? 그 책 대여점이 있는 거리. 스즈나안이던가."

"이제 됐으이. 고맙네."

마미조는 텐구에게 성의 없는 인사말을 날리고 등을 돌렸다. 더 이상 텐구의 능변 따윈 듣고 싶지 않았기에.

"어라? 이걸로 충분하신가 보죠? 혹시 가키를 찾을 생각이 들면 저를 찾아오세요."

텐구는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여전히 얄밉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4.스즈나안

 

텐구가 말한 대로였다. 인간마을 곳곳에서 문을 닫은 가게들이 눈에 띄었다. 아직은 드문드문 휴업 팻말을 건 정도였지만 텐구의 예상대로라면 다음 날에는 배로 늘어날 터였다. 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그렇게 인간마을 전체가. 모든 거리에 즐거움이 사라질 것이다.

'끔찍한지고.'

마미조의 안경에 황량한 길거리의 상이 맺혔다. 사람들은 다 자기 집에만 틀어박혀 있고, 요괴들은 재미가 없어 인간마을에 얼씬도 안 하는 거리. 단순한 환상이었다. 하지만 그 환상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감으면 다른 거리가 떠올랐다. 즐거움이 사라진 거리. 이내 그 거리는 환상향의 인간마을로 변했다.

'지나친 걱정일까?'

마미조는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고민했다. 지옥에서 탈출한 가키의 짓이라면 머지않아 지옥에서 적당히 해결할 터였다. 가키의 소행이 아니더라도 일이 커진다면 무녀나 평범한 마법사, 그도 아니면 히에다 가의 아가씨나 서당 선생님이 알아서 해결하리라. 분명 끔찍한 일이지만, 굳이 자신이 나설 필요는 없다. 어쩌면 너무 흥분한 걸지도 모른다. 불쾌한 기억이 떠올라 쓸데없이 과민반응해버렸다. 지금 진정하고 발을 빼더라도 늦지 않았다. 가키가 스즈나안의 인간 소녀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그럴 생각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스즈나안이 시야에 들어왔다.  간판은 여전히 비뚤어진 채였다. 휴업을 알리는 팻말 같은 건 없었다. 마미조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게 정면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역시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스즈나안은 가키의 손이 아직 닿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신도 이 일에 딱히 더 나설 필요는 없다. 누군가 알아서 해결하겠지. 코코로가 의심을 받으면 그때 재빨리 나서도 충분하다. 원흉을 혼내준다는 약속은 어기는 셈이지만 그녀를 지켜주기만 한다면 크게 괘념치 않으리라. 괜히 열을 올려 텐구에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알려준 자신이 바보 같았다. 게다가 그 보상으로는 괜히 불안한 소식만 전해 들었다. 텐구 좋은 일만 한 셈이 되어버렸다.

딸랑

마미조는 스즈나안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언제나처럼 종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소녀가 명랑한 목소리로 인사할 것이다. 어서 오시라고.

"어서... 오세요..."

그건 이런 우중충한 인사가 절대 아니었다.

 

"어라...? 오셨군요."

모토오리 코스즈는 책상 위에 엎드려있었다. 마미조가 바로 앞까지 다가가자 그제야 눈을 돌려 손님이 누군지 확인했다.

"코스즈 낭자...? 평소와는 많이 다르구만...?"

마미조는 걱정이 가득한 시선으로 코스즈를 내려다보았다. 코스즈는 눈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 ... 그러네요... 오늘은 어인 일로...?"

"이보게, 정신 차리라. 어디 아픈 겐가?"

"아뇨... 그냥... 영 재미가... 없어서..."

그녀의 대답과 동시에 마미조의 표정이 굳었다.

"부모님이 닦달하셔서... 문을 열긴... 했는데... 아 장사 재미없다..."

마미조는 무릎을 굽혀 코스즈와 눈높이를 맞췄다. 코스즈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공허한 구체만이 마미조를 비추고 있었다.

"낭자, 가게 문을 열었으면 장사를 해야지. 부모님은 어떠신가? 부모님은 괜찮으신 겐가?"

"... 부모님... 정작... 귀찮다고... 밥도... 안 했으면서..."

마미조는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코스즈는 다른 이들과 달리 가게 문은 열었다. 어쩌면 가키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하게 미쳐서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적당히 흥미를 북돋는다면 회복시킬 수 있을지도. 예컨대, 그녀가 좋아하는 책들로.

"이것 보게나 낭자. 평소에 외래서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살지 않았나? 안 그래도 내가 외래서를 하나 구해서 낭자에게 팔려고 찾아온 거라네. , 그래. 요마서는 어떤가? 지금 가져오진 않았는데 요마서도 한 권 가지고 있어. 저번에 내가 사려던 백귀야행 그림 두루마리처럼. 내 그것도 가져오지. 지금 당장."

거짓말이었다. 요마서 같은 건 없었다. 있어도 팔 생각도 없었다. 그저 코스즈를 각성시키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외래서와 가짜 요마서로 코스즈가 정신을 차린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마미조는 자신이 가져온 외래서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제목이 코스즈에게 잘 보이도록. 코스즈의 눈이 잠시 초점을 되찾았다. 그녀는 제목을 한 글자 한 글자씩 눈으로 읽었다.

"Street... Without... Joy...? 즐거움이... 사라진... 거리...?"

"그래. 외래서일세. 저번에 읽었던 잡지처럼. 재밌어 보이지 않나? 이걸 읽고 있게. 내 냉큼 요마서를 가져오지. 어때, 재밌지 않겠나?"

코스즈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잠시 마미조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더니 다시 책으로 옮겨갔다.

"요마서라... ... 요마서... 과연..."

"그래! 요마서 말일세."

마미조는 갓 발걸음을 뗀 아이를 응원하는 듯한 태도였다. 코스즈가 기우뚱거리다가 넘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이제 한 걸음, 한 걸음만 내디디면 된다.

"... 재미없어. 외래서... 두고 가세요... 나중에... 계산해드릴게요..."

코스즈는 넘어지는 쪽을 택했다.

 

다시 딸랑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와 같은 종소리였다. 하지만 스즈나안을 나오는 마미조의 표정은 평소와 너무나 달랐다. 그녀는 더는 웃지 않았다. 얼굴에는 분노만이 가득했다.

사도의 후타츠이와는 짜증은 종종 낼지언정 분노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부하들은 그녀를 경외했지만, 그녀의 분노가 두려워서는 결코 아니었다. 배신이 아니라면 부하들의 실수나 실패를 이유로 분노한 적도 없었다. 점잖게 타이르고 다음 기회를 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조차 분노를 금치 못할 때가 있었다. 가장 심했던 때, 그녀는 분노로 며칠 밤낮을 울부짖었다. 미리 막지 못한 자신, 뒤늦게 알고도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로.

그건 누에가 봉인당했을 때였다.

 

 

 

 

5.누에

 

"의외네내 도움을 구할 줄은 몰랐는걸."

호쥬 누에는 술병을 입에서 때면서 말했다독한 술 냄새를 마미조도 느낄 수 있었다뺨에는 벌써 얕은 홍조가 떠올랐다등에 솟아난 뾰족한 촉수들도 술기운으로 인해 짧게 경련했다.

"왜 그리 생각했나?"

"그야 나 없이도 인간마을에서 잘 놀길래."

누에는 다시 술병을 기울이며 낄낄댔다마미조는 그 술병을 빼앗아 자신의 입에 술을 부어 넣었다촉수들은 바로 실망감에 시들해졌다.

"독하구만삐친 겐가?"

"꼬맹이 취급은 여전하네."

누에는 다시 마미조에게서 술병을 낚아챘다하지만 술병은 비어있었다술이 더는 입에 떨어지지 않는 걸 깨달은 누에는 어깨너머로 술병을 대충 집어 던졌다술병은 기와 하나에 튕겨 나간 뒤 명련사 뒷마당에 굴러떨어졌다.

"괜찮은 겐가또 지붕 위에서 마셨다고 혼날 텐데?"

둘은 종종 주지 스님 몰래 명련사 지붕 위에서 술을 마셨다이상하게 누에는 꼭 흔적을 남겨 주지 스님의 잔소리를 듣곤 했다하지만 마미조가 함께 마셨다는 이야기를 입에 담는 법은 없었다.

"괜찮아쿄코가 알아서 치우겠지내가 적당히 입막음시켜놨거든."

마미조는 허탈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뒷마당에서 술병을 주운 쿄코가 주지 스님에게 쪼르르 달려가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이미 몇 번이나 있었던 일이다누에에게 이를 말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하지만 누에는 쿄코에게 이상할 정도로 일방적인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마미조는 자기가 몰래 술병을 치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원래하던 이야기로 넘어갈까내 도움을 구하는 것도 그렇지만 직접 가키를 잡으려는 것도 의외인걸?"

누에는 이번엔 마미조의 술병을 낚아채며 말했다.

"아아이놈이 하는 짓이 내 심기를 건드리니께."

"심기를 건드려인간마을을 건드린 게?"

"옛날 생각이 나더군헤이안쿄랑 남만이 생각났네."

"헤이안쿄라..."

누에의 눈이 인간마을을 향했다마미조는 지금 그 눈에 과거 헤이안쿄의 길거리가 비쳐 보일지 궁금했다누에가 다른 요괴들과 함께 백귀야행을 벌였던 그 거리누에가 봉인당한 그 거리약한 바람에 누에의 검은 머리카락이 살랑 흔들렸다흔들리는 머리카락 너머로 쓸쓸한 표정이 드러났다.

"헤이안쿄에 비할 바는 아닌데?"

"그렇제그래도 낮엔 인간들이 즐거워하니까 말일세."

"하긴."

"헤이안쿄도 인간들은 낮이면 아주 세상이 지들 것인 마냥 즐거워했제안 그런가그래서 밤엔 벌벌 떨었고우리가 그 즐거움을 다 앗아갈까 봐."

"맞아그랬지바보 같은 놈들그래서 아주 즐거웠어."

"인간들이 즐거울수록 우리에게 갖는 공포도 커지니 말일세그럴수록 우리도 즐거웠지."

누에의 얼굴에서 악독한 미소가 떠올랐다마미조는 약간 안도했다누에에게 헤이안쿄는 복잡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그녀가 전성기를 누렸던 공간인 동시에 그녀가 봉인된 장소그런 헤이안쿄의 길거리를 누에에게 상기시키는 게 과연 현명한 생각인지 마지막까지 확신할 수 없었다다행히도 그녀는 여전히 헤이안쿄의 백귀야행을 그리워하는 모양이었다.

"그래헤이안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동감이야인간들은 즐겁지 않으면 우릴 두려워하지도 않아우릴 경외하지도 않고이젠 흥미조차 없어맞아확실히 짜증 나네가키인가 하는 녀석감히 그딴 짓을 벌이다니 말이야."

"가키가 한 짓이라면 말이제."

"일단 그렇다고 치고그런데 남만남만은 또 뭐야거기 공명인가 뭐인가가 일곱 번 쳐들어간 데 아냐?"

마미조는 누에가 일부러 사실과 거짓을 뒤섞어서 질문한 게 아닌가 궁금해졌다차마 물어보진 못하고 웃으면서 넘겼다.

"그래근데 공명도 남만 전체는 어찌 못 했제아주 독한 놈들이 사는 땅이여일본도 쳐들어갔다가 아주 된통 당했제나중엔 불란서랑 미국이란 놈들도 쳐들어가서 비슷한 꼴을 당하더만."

"호오."

누에는 마미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자신이 봉인당했던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 안달이 난 듯했다.

"나도 그간 일본에만 있었던 건 아닐세여기저기 돌아다녔어어쩌다 보니 남만까지 흘러들어 갔는디기자인 척했든가그래서 불란서 놈들을 쫄랑쫄랑 따라다녔제."

"사도의 후타츠이와가 바다까지 건넜어?"

누에는 친구의 몰랐던 과거에 즐겁게 웃었다.

"하여간 거기도 참 신기했다네옛 일본의 농촌 같은 마을이 꽤 많드만."

"요괴로서 즐거웠겠군."

"아니... 요괴로서 정말 역겨웠다네."

 

그 지역은 수많은 마을이 얼기설기 엮여있었다마을마다 대나무숲과 수풀이 우거져있었다분명 무서운 요괴와 맹수들의 이야기로 가득 찬 장소였으리라.

하지만 인간들은 더는 맹수나 요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인간들은 인간들을 두려워했다.

불란서인들은 마을과 마을 사이에 놓인 길을 이용했다우마 없이 혼자서 움직이는 수레들이 길을 가득 채웠다하지만 남만인들은 그 정도로 굴하지 않았다그들은 나무를 베어 길을 막고이상한 폭죽을 이용해 불란서인들을 습격했다불란서인들은 갖가지 무기를 동원해 남만인들을 상대했다쇳덩어리를 떨구는 날틀불을 내뿜는 수레길은 점차 고철과 피로 물들어갔다불란서인들은 마을까지 쳐들어가 집마다 개와 이상한 장대로 쑤시고 다녔다마을사람들은 거리로 끌려 나와 갖가지 조사를 당하고어딘가로 끌려가 버리기까지 했다그리고 불란서인들이 돌아갈 때 남만인들은 길에서 그들을 습격했다마을과 길에는 즐거움이란 사라지고 공포와 의심만이 남았다마을사람들은 집안에 틀어박힌 채 불란서인이아니면 남만인이 철포와 함께 집으로 들어오는 걸 숨죽이고 기다렸다.

불란서인들은 이윽고 그 수많은 마을을그리고 각 마을을 잇는 도로를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즐거움이 사라진 거리.

Street Without Joy.

마미조는 그 길에서 역겨움을 느꼈다인간들은 요괴의 존재 따윈 기억하지도신경 쓰지도 않았다그들 눈앞에 있는 인간들을 두려워하고그들 눈앞에 있는 인간들에게 두려움을 주려 노력할 뿐이었다.

분명 그 길에 축제 행렬이 가득 찬 적이 있었으리라인간들은 요괴를맹수를 우스꽝스럽게 따라 하며 즐겁게 뛰어노는 축제그리고 어둠이 내려앉으면 자신들이 조롱한 요괴와 맹수에 대한 두려움을 품었을 터였다인간들은 즐거워하는 만큼 두려워했다하지만 더는 그렇지 않았다이제 낮이나 밤이나 인간들의 인간들에 대한 공포만이 가득했다낮에도 밤에도 거리에선 인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듣기만 해도 끔찍하네."

누에는 어느새 진지한 표정으로 마미조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한 손으로는 자신의 짧은 머리카락을 빙글빙글 말면서.

"이거 짜증 나는 이야기를 해버렸구만."

"뭘 이제 와서심기를 건드릴 만도 하네그런 꼴이 여기서도 펼쳐지면 아주 죽을 맛일 거야."

마미조는 다시 인간마을을 내려다보았다딱 봐도 거리는 평소보다 인적이 드물었다.

"그럼 도와주는 겐가?"

"그럼 안 도와줘내 부탁으로 여기까지 온 친구인데 설마 안 도와주리라 생각한 거야난 그냥 무슨 심정으로 그러나 궁금했을 뿐이라고."

누에는 다시 씩 웃었다뾰족한 이빨이 훤히 드러났다.

"그렇제내 친구를 의심했구만."

"그렇지만 좀 우습네암만 그래도 이 마을에서 헤이안쿄를 떠올리고 또 전쟁터를 떠올리는 건 너무한데사도의 후타츠이와 이거 너무 마음이 약해진 거 아닌가?"

"인간이 인간을 두려워하는 꼴을 보니 그렇게 되더군인간들도 깨달은 게지자신들이 쌓아놓은 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이제 요괴들보다는 인간들이 인간들에게 더 위험한 존재가 된 게야그 꼴을 쭈욱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약해지지 않고 안 배겨?"

누에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마미조를 쳐다봤다.

"아냐아냐... 그거 외에 또 있지숨기고 있군다 안다구."

누에는 마미조에게 얼굴을 쓱 들이밀었다술 냄새로 가득한 숨결이 마미조의 뺨에 닿았다.

"예를 들면... 아끼는 꼬마라던가?"

그렇게 말하면서 누에의 눈동자가 다시 인간마을을 향했다스즈나안이 자리 잡은 방향이었다누에의 음흉한 목소리가 마미조의 귀를 간지럽혔다.

"내 부정은 안 하지그건 그렇고 술 냄새 지독하구만좀 떨어지게나."

마미조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누에는 딱 걸렸다는 듯이 히죽거렸다.

"왜 그렇게 그 꼬마를 아끼는지 모르겠지만 뭐 난 상관없어방금 말한 대로 어차피 도울 테니까그냥 궁금했을 뿐이야."

누에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몸이 찌뿌둥했던 모양인지 기분 좋은 신음을 냈다촉수들도 좀 더 날카로워졌다.

"요마서를 읽더군."

"?"

"요괴가 좋은 건지 어쩐지 하여간 요마서를 열심히 읽더군물론 요괴를 마냥 믿기만 하는 건 아닐세인간이니께 어쩔 수 없제그래도 풀풀 솟는 요기에 소름이 돋아가면서도 요마서를 놓지 않더라고참 별난 인간이 다 있다 싶었제요즘 그런 인간이 어디 있나?여기도 인간들은 요괴를 무서워는 해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더만."

"아하."

"그래서 맘에 들더군그러다가 무슨 꼴이 날지는 모르겠지만지켜보는 재미가 있었어그게 다일세."

누에는 친구의 솔직한 답변에 웃음으로 답했다친구가 마음에 든다는데 더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하랴.

 

"그러니까 가키를 내가 잡고 씨앗을 먹이면 끝이지간단하네."

"아니그거론 부족해고놈을 그 정도로만 끝내는 거론 내 성이 차지 않는다 이 말일세"

"그럼?"

"염마를 불러올 걸세."

"염마?"

갑자기 튀어나온 염마라는 단어에 누에는 얼굴을 찌푸렸다촉수들은 그 이름을 듣자마자 빳빳해졌다그녀 입장에선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임이 분명했다.

 

 

 

 

 

6.가키

 

거리에 어둠이 깔리면서 안 그래도 드물었던 인적은 완전히 사라졌다거리를 순찰하는 자경대의 등불만이 거리를 유일하게 밝히고 있었다하지만 그 불빛은 박자목 소리와 함께 거리에서 점차 희미해지더니 이내 종적을 감췄다거리에는 건물들의 검은 윤곽만이 달빛에 비친 채 남았다밤새들의 울음소리가 마을 밖에서 거리까지 흘러들었다이내 골목에서 그림자가 기어 나왔다분명 사람의 형태였지만두 팔을 마치 발처럼 사용해 거미처럼 기어 다녔다그림자는 거리를 좌우로 살펴보았다자신이 이 거리에 홀로 남아있음을 확신했는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그림자는 그 거리에 자리 잡은 집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얼굴을 담벼락에 들이대고 킁킁거리고앙상하게 말라붙은 손가락으로 담벼락을 긁었다이내 집 하나가 마음에 들었는지 문 앞에서 서성이다가 신음을 내기 시작했다.

찰칵

기계음과 함께 강한 빛이 반짝였다그 빛에 순간적으로 그림자의 앙상한 몰골이 훤히 드러났다피부는 단순히 뼈를 가릴 뿐살점이라곤 붙어있지 않은 몰골먹어도 배부를 수 없는 아귀도에 떨어진 자굶주림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만이 얼굴에 남게 된 자.그림자의 정체는 가키였다빛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변태 아저씨거기서 뭐 해요?"

가키가 노리는 집을 마주 보는 집의 지붕에서 들리는 목소리였다달을 등지고 있어 얼굴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짧은 치맛자락이 바람에 흔들거리는 모습만은 가키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이제 재미 좀 보려다가 들킨 거야미안하게 됐네요그런데 이걸 어째사실 아저씨 들킨 지 꽤 오래됐어며칠 더 지켜볼까 했는데차마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이 들어와서 말이야그러니까..."

가키는 소녀의 가벼운 말투에서 명백하게 도발의 의도를 느낄 수 있었다그 의도를 감지한 이상 가키는 눈치를 볼 것이 없었다차마 소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키는 지붕으로 뛰어올랐다.

"나랑 좀 놀아줄래?"

그리고 가키의 앙상한 뺨에 게다 굽이 날아왔다.

 

가키는 담벼락에 내동댕이쳐졌다바로 자세를 바로잡고 지붕 위를 쳐다보자 소녀의 윤곽이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그 윤곽은 한 발을 뒤로 곧게 뻗은 채 공중에 떠 있었다소녀는 바로 그 자리에서 가볍게 한 바퀴를 돌면서 착지했다.독특한 외굽 게다의 윤곽은 달빛만으로도 뚜렷이 보였다.

"전부터 생각한 건데아저씨 너무 느리다."

가키는 그제야 자신을 직격한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자신이 무엇을 상대하는지도어째서 인간마을에서 텐구와 마주쳤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다음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가키는 바로 등을 돌려 거리를 내달렸다두 팔과 두 다리가 지면을 박차는 모습은 마치 날짐승의 질주 같아 보였다.

"그나마 조금 똑똑한 편인가...? 그래도."

가키는 바로 골목을 돌아 다른 거리로 들어섰다하지만 그 거리에는 또 다른 소녀의 윤곽이 기다리고 있었다.

"느린 건 별수 없네."

분명 다른 소녀일 텐데목소리는 똑같았다가키는 바로 등을 돌려 재빨리 골목으로 뛰어들었다골목 반대편에서 가키는 다시 거리를 좌우로 살폈다담벼락에 서 있는 또 다른 소녀의 윤곽이 가키의 흉측한 눈동자에 비쳤다.

"느리다니까?"

이번에도 똑같은 목소리였다.

그렇게 가키는 미친 듯이 거리와 골목을 뛰어다녔다소녀는 대체 몇 명인지어딜 가도 소녀의 윤곽이 가키를 기다리고 있었다모두 똑같은 목소리로 가키를 도발했다느려느리다고어서더 빨리더 빨리!

가키는 점점 몰리고 있었다그저 앞으로 내달리기만 했다소녀를 피해서 달리고 또 달렸다마침내 소녀의 윤곽이 보이지 않았다.가키는 드디어 그 소녀들을 따돌렸다는 안도감을 느끼면서 숨을 골랐다그제야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봤다거리의 한쪽에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그 반대쪽에는 이런저런 집들이 줄지어 자리를 잡은 거리였다가키는 자신의 정면에 버티고 있는 집을 차분히 살폈다문 위에는 간판 세 개가 걸려있었다맨 오른쪽에 걸린 간판은 삐뚤어져 있었다가키는 이 거리가 자신이 이미 방문했던 거리임을 깨달았다이 거리는 분명히...

그 순간창이 가키의 목을 꿰뚫었다.

 

"아이고혹시나 찌르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는데."

가키의 등에 올라탄 소녀가 말했다조금 전의 소녀와는 다른 목소리였다가키는 자신의 목에서 아직 피가 흐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삼지창은 가키의 목을 꿰뚫지 않았다다만 가키의 목을 가뒀을 뿐살점이라곤 없는 앙상한 목은 삼지창의 촉과 촉 사이에 간신히 끼어있었다조금이라도 목을 움직였다간 촉에 피부가 베일 정도였다.

"가만히 있어!

소녀는 한 손으로 창을 꼭 잡고 두 발로 가키의 등을 제압했다가키는 양손을 움직이려 했지만 무슨 수를 썼는지 무언가에 묶여 꼼짝도 하지 못했다소녀는 그 와중에 자유로운 손으로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그녀의 손안에서 꿈틀 꿈틀거렸다그 누구도 그 물건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그걸 차마 무언가의 씨앗이라고 상상할 이는 없었다.

"배고프지이거나 먹어!"

씨앗이 가키의 등에 박혔다가키는 고통으로 인해 바동거렸다그러다 창 촉에 목을 베여 핏방울이 창을 타고 지면에 흘러내렸다.신음이 새어 나오는 입에서는 무언가가 흘러나왔다질펀한 액체였다.

"이건가이게 즐거움인가?"

소녀는 흥미롭게 그 액체를 지켜봤다이내 그 액체는 방울방울 분리되더니 사방으로 흩어졌다일부는 그들 바로 앞에 있는 집으로 흘러들어 갔다.

"수고했습니다."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동시에 또각또각 발소리가 들려왔다그 소리를 듣자마자 가키는 더 심하게 바동거리기 시작했다덕분에 소녀는 가키 위에서 떨어져 내릴 뻔했지만 바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사신의 실수로 벌어진 일인데 요괴가 바로잡다니오랜만에 보는 선행이군요이 한심한 가키도 이런 모습을 진작에 본받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리고 등불과 함께 발걸음 소리가 가키 바로 앞에서 멈췄다가키는 이제 저항하지 않았지만 두 눈동자에는 절망감이 깃들어있었다당연한 반응이었다자신의 눈앞에 염마가 서 있었으니.

 

 

 

 

 

7.염마

 

지옥의 오니 둘이 염마의 양옆에 서 있었다둘 다 한쪽 손에는 등불을다른 쪽 손에는 끔찍하리만큼 거대한 쇠몽둥이를 들고 있었다그들이 들고 있는 등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염마의 얼굴을 엄숙하게 비추었다어둠 속에서 환하게 드러나는 초록 머리카락과 단호한 표정은 그 자리에 있는 모두를 압도했다.

"당신이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닙니다잘 알고 있겠죠당신이 돌아가야 할 곳은 아귀도입니다."

염마 시키에이키 야마자나두가 아귀도라는 단어를 말하자마자 가키는 다시 미친 듯이 바동거렸다이번에는 등에 올라탄 소녀도 놀라지 않고 바로 가키를 제압했다.

"당신이 지은 죄는 당신이 감당해야 합니다아귀도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건 당신의 죄 때문이죠당신이 감히 인간마을에 와 인간들을 시기해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염마는 자신의 가슴 앞에 들고 있었던 회오의 봉을 한 번 크게 휘두른 뒤 가키의 코 앞에 들이댔다단순한 몸짓에서도 재판장의 권위가 느껴졌다가키는 회오의 봉을 보고는 움찔했다.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합니까이 인간들은 분명 죄를 지은 자들입니다하지만 그 죄는 오롯이 자신의 몫당신이 함부로 이들의 즐거움을 빼앗을 순 없습니다그건 단순한 절도가 아닙니다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만드는 행위입니다당신이 한 짓은 살인보다 더 끔찍한 행위입니다사람을 죽이지도 않았지만살아도 산 게 아닌 존재로 만드는 행위란 말입니다.

그녀는 결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하지만 누구나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분노를 알 수 있었다가키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긴말 하지 않겠습니다지금 당장 아귀도로 돌려보낼 터이니그곳에서 당신이 생전 저지른 죗값을그리고 이 끔찍한 범죄의 대가를 치르도록코마치?"

그리고 거리 저편에서 큰 낫을 짊어진 소녀오노즈카 코마치가 걸어왔다염마 앞에서도 한껏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지금 당장 끌고 가도록나는 여기에서 볼 일이 더 남아 있으니."

"예이분부대로 하겠나이다."

코마치는 히죽 웃으면서 과장된 몸짓으로 인사했다염마는 그 건방진 몸짓이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딱히 뭐라 하진 않았다코마치가 가키 위에 올라탄 소녀에게 손짓하자 소녀는 창을 뽑고 물러섰다하지만 가키는 움직이지 않았다절망감에 신음만 낼 뿐이었다그녀는 들고 있던 낫으로 가키를 일으켜 세웠다낫의 날이 가키의 목에 닿았지만 피는 흐르지 않았다.

"이봐어서 가자고제 발로 가는 편이 차라리 낫잖아?"

코마치가 낫의 끝 부분으로 가키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가키는 저항하지 않고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겼다두 눈에 희망마저 잃은 그 존재는 이미 시체나 다름없었다그렇게 둘은 거리 너머로 사라졌다.

"더러운 녀석냄새나."

가키 등에 올라탔던 소녀호쥬 누에는 땅바닥에 앉아 두 손을 코에 대고 킁킁거리며 불평했다그리고는 염마를 올려다보며 씩 웃었다.

"염마님어떠십니까제 선행이 마음에 드셨습니까?"

그녀는 뭐가 그리 웃긴지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를 애써 참고 있었다.

"그럼 이제 설교 시간인가요?"

어느새 텐구샤메이마루 아야도 그 옆에 서 있었다마찬가지로 웃음보가 터지기 일보 직전인 얼굴이었다.

 

"모두 모여있었네?"

잠시 뒤 코마치가 돌아왔다.

"빨리 오셨네요?"

"삼도천에서 선배한테 넘겼어선배도 참중유의 길에 가져다줄 물자에 가키가 숨어있는 줄도 몰랐다니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지 원."

텐구와 누에는 서로를 바라보면서 씩 웃었다딱히 그 농땡이 치는 뱃사공이 할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삼도천까지의 거리야 나한텐 의미가 없으니 얼른 인수인계하고 돌아왔지이 재밌는 광경은 놓치고 싶지 않았걸랑."

코마치는 텐구와 누에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니 시키에이키님이제 슬슬 설교를...?"

그때까지 아무 말 없이 근엄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던 염마는 코마치의 농담에 표정을 구겼다.

"하여간 다들 귀찮게 하는지고좀 더 어울려주면 좋을 것을."

펑 소리와 함께 염마와 두 오니에게서 연기가 터져 나왔다연기가 걷히자 염마가 있던 자리엔 마미조가험악한 두 오니가 있던 자리엔 통통한 너구리 둘만이 남아있었다두 너구리가 들고 있던 몽둥이는 사라졌지만등불은 여전히 남아 거리를 밝혔다.

"멋진 연기였어난 진짜로 염마를 불러온다는 건 줄 알았지 뭐야."

"저도 진짜 염마님을 데려온 줄 알았다니까요제법이신데요?"

"이야나도 시키에이키님께 꼭 보여드리고 싶은데 말이야세상에 염마를 사칭하는 배짱 두둑한 녀석이 다 있네."

모두 마미조를 치켜세웠다자기 꼬리 위에 앉은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다들 진지한 구석이라곤 없었기에하지만 계획한 대로 성공적으로 끝났으니 굳이 뭐라 할 필요는 없으리라.

"하여간 모두 수고했다네저 가키 자식은 도저히 그냥 보낼 수가 없어서 말일세내 좀 겁을 잔뜩 줘봤지이제 속이 좀 풀리는구만."

"덕분에 난 가키도 잡고 좋은 구경도 했어하여간 재밌는 친구들이야이러니 땡땡이치는 게 즐겁다니까그럼 이만또 보자고이런 재밌는 일이 또 있으면 그때도 꼭 불러줘혹여나 시키에이키님이 오시면 미리 알려줄게이 일로 설교를 듣고 싶진 않겠지?"

코마치는 깔깔 웃으면서 거리 너머로 사라졌다거리의 어둠이 그녀를 삼키기 직전 그녀의 낫이 달빛에 반짝였다.

"저도 인간마을에서 오랜만에 재밌는 놀이를 했군요역시 알려드리길 잘했네요."

텐구는 뻔뻔하게도 마미조에게 자기 공적을 자랑했다마미조에게서 이야기를 얻어냈다는 사실은 잊었다는 듯이마미조는 질린 표정으로 텐구를 바라보았다.

"그려자기 손해 보는 장사는 절대 안 하제하여간 텐구들은."

"텐구들만큼 알아둬서 든든한 장사꾼이 어딨다고 그러십니까제가 신세를 진 건 사실이니 앞으로도 도움이 필요하시면 꼭 말씀해주시길."

"그러고 또 기삿거리나 얻자는 속셈이겄제설마 이 일을 신문에 쓰진 않겠제?"

등을 돌리고 발걸음을 옮기던 텐구가 갑자기 멈췄다.

"충격인간 마을을 누비는 가키.-이 괴물을 막은 건 염마를 사칭한 너구리누에와 텐구뱃사공도 한통속?!"

"어이잠깐어이."

텐구가 읊는 문구에 마미조의 목소리가 험악해졌다누에도 재빨리 창과 촉수를 텐구에게 겨눴다.

"-그런 내용을 쓸까 봐요그러면 저도 인간마을에 함부로 손댔다고 무녀씨에게 혼난답니다걱정 마세요그런 눈치도 없이 신문을 만들고 다닌 건 아니랍니다가키 이야기 정도만 적당히 싣겠습니다그러면 되겠죠?"

"텐구들 정말 귀찮구만."

"쟤 괜히 불렀어."

마미조와 누에는 바로 긴장을 풀었다텐구는 그 자리에서 빙글 돌아 둘을 마주 봤다너무나 얄미운 미소가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너구리 씨가 특히나 아끼는 인간 아가씨-도 기사에 실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안심되시나요?"

"-"

마미조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텐구는 뒷걸음질 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마미조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어두운 거리만을 쳐다봤다누에는 옆에서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

"진짜 귀찮은 텐구구만가키가 어딨는 줄만 알았어도 우리끼리 알아서 하는긴데..."

"난 몰라그쪽이 알아서 해결하라구."

누에는 촉수 하나로 친구의 꼬리를 콕콕 찔렀다마미조는 그녀의 음흉한 시선을 피한 채 스즈나안으로 눈을 돌렸다.

"이름도 모르는 손님이 이렇게나 챙겨주는 걸 알면 꼬맹이도 좋아 죽을걸?"

"그만해라."

마미조는 뾰로퉁한 표정을 지었다역시 지옥이나 인간마을에서 알아서 처리하게 내버려 둘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이제 와서 후회한들 늦었지만.

 

"그럼 이제 다 해결된 건가인간들은 예전처럼 제멋대로 즐겁게 살려나?"

"즐거움은 되찾았으니께그럴 거 같구만."

부하 너구리들을 돌려보낸 둘은 명련사 지붕 위에서 또 술병을 기울였다.

"그럼 우리가 헤이안쿄로 만들어버리기만 하면 되겠군어떻게 할까..."

누에는 벌써 인간들의 길거리를 공포로 물들 계획을 고민하고 있었다.

"머 그렇제하지만... 빼앗긴 즐거움만 되찾았으니 그간 내지 못한 즐거움도 마저 내야 할 터인데..."

"뭐 별수라도 있어너구리 악단이라도 데려와서 공연시킬 셈?"

"급하면 그렇게라도 하겠제하지만 그럴 필요 없으이."

"생각해둔 게 있는 모양이지?"

"그래안 그래도 이 일에 적임자가 있어서 말일세."

마미조는 웃으면서 하쿠레이 신사가 위치한 방향으로 얼굴을 돌렸다내일 노가쿠 공연은 분명 장관이리라.

 

 

 

 

8.너구리

 

노가쿠사는 춤을 춘다그 움직임엔 망설임이 없고 호흡은 흐트러지지 않는다그녀의 표정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하지만 그 춤을 보는 누구나 알 수 있다노가쿠사는 즐거워하고 있다인간들은 의미를 이해할 순 없지만 느낄 순 있다이 춤은 즐겁다춤을 추는 노가쿠사도춤을 보는 관객들도 흥겹다.

소바 가게 주인은 흥겨워한다부인도 마찬가지다이 공연이 끝나면 마을에 내려가 가게 문을 열 생각이다며칠간 장사하지 못했으니 분발해야 한다종교전쟁에서 노름으로 번 돈은 노점에서 이것저것 사 먹는 데 허탕하고 있다서당 아이들도 노가쿠사의 화려한 움직임에 환호한다며칠 만에 제대로 출석한 아이들을 보고 감격에 젖은 서당 선생님이 애들을 데리고 왔다안타깝게도 공연 전에 서당 선생님이 늘어놓았던 지루한 강의 내용은 모두 한 귀로 흘러보낸 지 오래다서당 선생님도 그걸 알지만 즐겁다학생들도 모두 즐거워하기에.

"과연이런 거였나."

"대단하제?"

"저 녀석제법인걸."

누에와 마미조는 하쿠레이 신사의 나무 위에서 그 모든 걸 구경하고 있었다누에는 멘레이키의 능력에 순수하게 감탄했다그녀는 인간들에게서 두려움을 얻는 존재인간들에게 순수하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능력을 신기하게 여기는 건 당연했다.

"즐거움을 주는 요괴라..."

"딱히 즐거움만 주는 건 아닐세다들 멘레이키란 걸 모를 뿐이니까알고 나면 공포나 경외의 대상이 될지도 모르제."

하지만 아직은 숨겨도 될 터이다누군가 눈치를 채면 그 때 가서 수를 생각해낼 수밖에.

누에는 두 손으로 턱을 받친 채 공연을 구경했다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마미조는 궁금해졌다.

"인간들이 즐거워하는 만큼 우리를 두려워하니까 우리가 즐거운 거였지?"

"그렇제."

"그럼 쟤는?"

"글쎄자기 말로는 인간들이 즐거워야 즐겁다고 하더구만."

"우리와는 다른가?"

"비슷하면서도 다르제."

"너는너도 그래인간들이 즐거워야 즐거운 거야우릴 두려워 서가 아니라?"

"글쎄요괴도 변하니께 나도 변했을지도 모르제나는 아직 반반인 거 같구만."

마미조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스스로 확신하지 못 했다자신이 그 거리를 보고 짜증 낸 이유는 무엇인가즐거움이 사라진 거리를 떠올린 이유는 또 무엇인가인간들이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인가아니면 단순히 인간들이 즐겁지 않아서인가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다적어도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유로 많은 짓을 벌인 건 확실하다그래서 마미조는 멘레이키를 의심하고텐구의 도움을 받았다코스즈를 걱정해 방문한 뒤 분노하고누에의 도움을 얻었다가키를 아귀도로 돌려보내기 위해 사신을 끌어들이고자신은 염마 흉내를 냈다이 모든 소동을 벌일만한 가치가 있었나?

"저 노가쿠보고 있자니 머리가 복잡해지는걸."

"그건 니가 아침에 혼나서겠제."

마미조는 누에가 던진 술병을 깜빡 잊었다덕분에 쿄코는 아침에 주지 스님에게 쪼르르 달려가 모든 걸 일러바쳤다누에는 주지 스님에게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마미조의 이름을 꺼내진 않았다.

"헤이안쿄를 재현하려고 했는데그럴 필요는 없는 걸까다시 생각해봐야겠어."

마미조는 신사를 둘러봤다마을 주민들뿐만 아니라 갖가지 요괴들도 공연을 보고 있었다삼도천의 뱃사공은 보다가 귀찮아졌는지 그늘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텐구는 토리이 위에서 수첩에 무언가를 분주히 적어 넣고 있었다멘레이키는 여전히 노가쿠를 추고 있다어느새 분노의 춤의 차례였다.

"요괴라면 다들 마찬가지인 기라이유는 달라도인간들이 즐거워야 즐거운 게지네가 즐거운 대로 행동하면 되지 않겠나."

마미조의 답변에도 불구하고 누에는 여전히 고민에 빠져 있었다마미조는 남만의 즐거움이 사라진 거리를 다시금 떠올렸다이제 그 길과 마을들은 어떻게 됐을지전쟁이 끝나고인간들끼리 가지는 공포도 약해졌을 테지만 요괴는 돌아오지 않았으리라한번 인간들이 즐거움을 잃어버리면 요괴들에겐 회복 불가능한 상처로 남는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그 모든 소동을 벌일 만한 이유가 된다마미조는 그렇게 자신을 설득했다.

"그럼 역시 즐길 수밖에 없겠구만."

마미조는 그렇게 중얼거렸다인간들도 요괴도 이곳에서 즐겁게 지내야 한다즐거움이 사라진다면요괴들은 이 낙원에서조차 발붙이지 못한다.

즐거움이 사라진 거리는 이제 질색이다.

 

마미조는 텐구와 눈이 마주쳤다그녀는 못 본 척 눈을 돌리려고 했지만 상대방이 먼저 윙크를 날렸다마지못해 눈인사하자 텐구는 만년필로 무언가를 살짝 가리켰다그 만년필이 향한 곳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검은 고깔모자를 쓴 평범한 마녀키리사메 마리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그 옆에는 방울장식으로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소녀코스즈가 나란히 서 있었다.

"아 진짜 귀찮은 텐구구만."

마미조는 쓴웃음을 짓고야 말았다분명 보기 즐거운 한 쌍이기는 했지만 텐구의 시선이 너무나 부담스러웠다텐구는 그 부담스러움까지 함께 즐기는 게 분명했다.

노가쿠 공연이 끝나자 마리사와 코스즈는 깔깔 웃었다마미조는 자신이 스즈나안에 놓고 온 외래서가 기억났다가키를 잡고 나서 코스즈가 그 외래서를 펼쳐봤을지 궁금해졌다솔직히 즐거운 내용은 아니었다하지만 그녀는 외래서나 요마서는 내용을 가리지 않고 즐겁게 읽었다정작 그 내용을 엉뚱하게 이해하긴 했지만그러다가 또 사고라도 치지 않을까 걱정도 됐지만 분명 재미난 광경이었다.

외래서를 붙잡고 이상한 해석을 혼자 중얼거리는 코스즈의 모습이 안경에 맺혔다마미조는 괜히 즐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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