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근, 이치린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요즘 쿠모이 씨가 잘 안 보이지 않아?"
"아. 옛날에 그 연회에 불쑥불쑥 나타나던…"
"요즘 명련사에서 자주 보이는 쿠모이 씨, 뭔가 기품있어지지 않으셨나?"
"그렇지? 뭔가 덕 높아 보이는…"
"마치 해탈이라도 하신 느낌이야."
최흉최악의 자매를 자칭한—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허세가 아니었던—요리가미 자매에게 패배한 후, 이치린과 나의 관계는 틀어졌다.
라이벌, 나아가 앙숙. 대체로 남들에게 그리 불리우는 관계였기에, 어찌 보면 원점회귀나 다름없었다. 태자님은 그것과는 별개로 아무것도 얻은 것 없는 나에게 조금 실망하신 듯했지만… 어쨌든 요는, 최소한 나의 입장에선 그날 이후 바뀐 것은 없어야 했다. 그리고 나 자신은 바뀐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치린은 조금 다른 듯하다. 그 날 이후 언젠가부터 계속되던 탄막 승부도 멈추고, 점점 얼굴을 볼 일이 사라지고, 그녀의 성격이 미묘하게 달라졌단 느낌이 들더니, 기어코는 저런 괴상한 소문까지 들려오게 되었다. 그녀에게서 기품이 느껴진다니. 이치린이 오컬트 볼이라도 삼키지 않은 이상 벌어질 수 없는 일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이변이 분명해!"
"이 녀석. 그게 무슨 이변이냐."
탁.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정수리에 가벼운 아픔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샌가 제 뒤에 태자님께서 서 계신 것이 아닌가.
"태, 태자님!"
태자님은 머리를 내리쳤던 패를 다시 양손으로 쥐며 말씀하셨다.
"네 욕망이 아주 시끄럽길래 왔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예? 제 욕망 말입니까?"
내가 무슨 욕망을 그리 크게 가졌단 말인가. 요괴들이 가득한 곳을 태워버리고 싶단 생각조차 최근엔 자제하고 있을 터였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군. 아니면… 네 스스로도 인지를 못 하는 건가? 두려움이다, 두려움."
"제가 지금 두려워하는 것이 있단 말입니까?"
"그래,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 두려움을 어떻게든 하고 싶단 욕망이 가득하구나."
말은 이해가 잘 되었지만, 납득할 수가 없었다. 내가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단 말인가. 무엇에 대해? 그리고 어째서?
"역시 납득이 안 간다는 표정이로군."
동시에 씨익 웃는 태자님의 모습은, 두려움을 일으키기에 충분했으나… 이건 아니고. 태자님이 오기 전까지 나는 무얼 생각하고 있었지?
"쿠모이 공…?"
아. 말해버렸다.
"어차피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그랬었지. 태자님은 그런 분이시다. 나조차 인정하지 못하는, 내 욕망을 읽어내실 수 있으신 사람이 바로 이분, 성덕태자시다.
"나도 들었다. 쿠모이 이치린. 그 자가 최근 명련사에서 갑작스레 평이 좋아졌다지? 불법을 통한 수행에 힘쓰는 모양이더군."
역시나, 태자님은 틀리는 법이 없으시다.
"당연히 두려움이 생길 수 밖에. 라이벌의 평판이 갑작스레 상승하면, 위기의식이란 으레 따라오는 법 아니겠나?"
"…그렇습니다! 그 자만 덕 높은 것 마냥 말해지는것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역시나."
대답이 마음에 드셨는지 태자님께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신다. 대답할 때 미묘한 망설임이 있었던 듯하지만, 그리고 태자님께선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신 듯하지만, 나는 화제를 바꾸며 그 괴리감을 슬쩍 감추었다.
"그렇다면, 불법의 수행이라는 것은 역시…"
"해탈, 즉 각종 욕구로부터 초월해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얻는 것이지. 모든 시간을 동등하게 바라보는, 4차원의 시각을 얻는 것. 거창하게 포장은 해 놨지만 요는 고차원적 존재로 승화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고차원적 존재로의, 승화…"
"초인을 목표로 삼는다는 점에서 우리와 다를 바가 없다 볼 수도 있지. 그래서 한 때 불교에 관심을 두었던 것이지만… 뭐, 지금은 이렇게 되었군."
살짝 으쓱이는 태자님의 모습은, 한 치의 아쉬움도 없는 듯했다.
"어차피 그런 승화의 과정 중 하나를 마법으로 때운 땡중의 가르침에서 무슨 깨달음을 얻겠냐마는."
"그렇겠지요? 애초에 쿠모이 공도 제대로 된 수행자가 아니었고 말입니다."
"정 두려우면 소문 따위에 휘둘리는게 아닌, 네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거라."
*
*
*
"시~ 무~ 등~ 등~ 주~"
목청만 쓸데없이 큰 하급 요괴 한 놈이 문 앞을 지키고 있다. 거의 매일마다 경내를 청소하는 놈이다. 지금은 문 앞을 청소하고 있는 모양.
2차 방화 시도(오컬트 볼 이변 즈음의 5차 시도가 마지막이었다)에서 저 놈에게 걸린 이후로 명련사에 들어가기 힘들어진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건… 아마 현재진행형이라 보아야 할 테지.
"마주치긴 껄끄럽고. 기다리는 건 성미에 안 맞으니 역시…"
몰래 들어가야겠다. 별 건 아니고, 그저 뒤쪽으로 돌아서 날아 들어가는 것 뿐이다.
"엇차."
가벼운 착지와 함께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반인이 오가는 시간대도 아니고 하여, 오가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고요한 것이 이 세상의 곳이 아닌 듯 했다. 그래봤자 태자님의 선계엔 못 미치지만.
"...아~ 제~ 아~ 제~"
취소. 여기까지도 들릴 줄은.
조금씩 들려오는 독경을 무시한 채 가장 큰 법당의 앞쪽을 향해 기둥을 돌아갔다. 그러자 살짝 열려있는 문 사이로 독경이 들려온다. 생각이 결여된 지겹기만한 외침이 아닌, 깊이가 느껴지는 부드러운 목소리. 곧바로 그 목소리의 주인이 이 절의 유일한 승려, 히지리 뱌쿠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내부. 그곳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쿠모이 이치린이 있었다.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어엿한 수행자라도 된다고 주장하듯이 다소곳하게 앉아있는 그녀의 모습은 고고했고, 아름다웠고, 그렇기에 두려웠다. 그녀가 마치 그녀가 아닌 듯했다. 쿠모이 이치린이라는 개념이, 이름이, 저기에 앉아있는 소녀와 같은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나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적어도 겉보기엔 완벽한 수행자였다. 그러한 사유로 반쯤 정신을 놓아버릴 뻔 했을 때, 이치린과 눈이 마주쳤다. 숨이 막혔다. 나도 모르게 기둥 뒤로 숨어버렸다. 정말로, 이게 라이벌 의식에서 나오는 두려움인가? 의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다.
법회는 어느새 끝이 나, 법당 앞은 흩어지는 인요들로 부산스러워진다. 그 틈을 타 빠져나가려 했다. 여기에 온 목적은 이미 달성했으니까. 그런 논리적인 판단 하의 행동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 순간, 붉고 거대한 구름이 나를 붙잡았다.
"어디 가?"
쿠모이 이치린이었다.
"으음, 다음 방화 스팟을 알아보러…?"
적당히 둘러댄 이유에, 그녀는 다소 진지하게, 그러나 평소의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어투로 답한다.
"그럼 안 되지. 요즘 조용하다 생각했는데 아직도 그런 걸 꾸미고 있어서야."
대롱대롱 매달린 것이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거꾸로 조금 안심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두려움은 핑계에 불과하며,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우였던 것 같다. 이치린의 내면은 변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안심했다.
"내 다음 방화 스팟을 알고 싶나? 그렇다면 탄막놀이다!"
"어, 음…미안. 거기 어울려줄 여유는 없어서. 곧 참선 시간이야."
남이 보기에는 조금 웃긴 일일지도 모르겠으나. 고작 그 한마디로 잠깐의 안심에 금이 가, 이내 산산조각이 났다.
#2
요즘 볼 일이 없었던 자를 보았다. 모노노베노 후토. 어느샌가부터 앙숙이 되어 있던, 되다 만 음양사. 그리고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을 뛰어넘은 자다. 최근엔 수행에 집중하고 있었던 터라, 아주 오랜만에 본 셈이지만… 절에 숨어들어와선 방화 스팟을 찾는단 소리나 하고, 갑자기 겁에 질리기라도 한 얼굴로 도망치다니.
"이래서야 찾아온 이유도 뭔지…"
갑자기 떠오른 잡생각에 잠도 오지 않아, 자리에 누으려다 말고 자리를 벗어났다.
찌르르 풀벌레 소리만 조금씩 들려오는 것이, 꽤나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렇게 된 김에 산책이라도 해야지.
"...어라."
"어라. 이거 우연이네요."
그리고 발을 옮긴 곳에, 히지리 언니가 있었다.
"오늘은 달도 밝고, 바람도 선선하니 산책하기엔 참 좋죠. 마음을 비우기에 이만한 때는 잘 없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최근에 느꼈지만, 이치린 당신의 마음은 공(空)을 논하기 이전의 문제가 있어 보이네요."
"그렇…습니까?"
"최근 수행에 열중하는 것 같은 모습은, 보기 좋았지만… 어째서일까요? 당신이 갑자기 수행에 전념하는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수행에 전념하는 계기라면 분명했다. 하지만, 이걸 제대로 된 이유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언니께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유인 걸까.
*
*
*
그 날은, 요리가미 자매를 상대하고 몇 주가 채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최흉최악의 자매(자칭)의 술수로 인해 후토와의 사이는 다시 틀어졌다. 당연히 평소대로 탄막놀이 승부도 계속 벌어졌고… 그렇게 된 이후, 5번째 승부의 일일 것이다.
"받아라!"
날아오는 불똥을 무시하고 내리치는 거대한 주먹.
"엇차! 여전히 과격하구만 그래!"
가볍게 주먹들을 피한 후토는, 답지않게 부적을 몇 장 던졌다. 하지만 저런 것으로 운잔을 막을 순 없다.
"얕은 꾀를!"
녀석이 무언가를 하려는 것 정도는 알았기에, 곧바로 운잔의 눈빛을 쏘아내려 했다.
"운잔!?"
그러나, 이미 그 꾀는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바람길은 미리 내 놓았고, 남은 것은 붙잡힐 대상을 끌어들이는 것 뿐이지."
휘오오오——
어느샌가 몰아치기 시작한 강풍은 운잔을 가두고만 있었다. 다른 그 누구에게도 영향을 주지 않고, 오로지 운잔만을.
"핫핫하! 역시 제대로 먹혀들었군! 스펠카드 명은 기류 「홍운…"
아주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웃는 녀석에게, 급하게 고리형 탄 하나를 던졌다. 이 땐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모종의 조급함, 두려움. 느꼈던 감정이 무엇이었든 간에, 나는 굉장히 당황하였고, 던져진 탄은 명백히 피할 수 없는 속도로 날아가버렸다.
"앗…!"
"구속의…으악!」"
결국 녀석은 무방비하게 피탄당했다. 그러나 자신의 어이없는 실수라 생각했는지, 후토는 풀썩 주저앉으며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내 잘못을 안다.
"미…"
"아하하… 정작 네놈을 까먹고 있었군…"
남이 보기에는 조금 웃긴 일일지도 모르겠으나. 고작 그 한 마디로 자그마한 자존감에 금이 가, 이내 산산조각이 났다.
*
*
*
"그날부터였습니다. 참선 시간에 빠지지 않기 시작한게. 제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비관만이 가득 차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 솔직히 말하자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듣고 나니 훨씬 당황스럽네요."
"역시 그런가요. 고작 이런 이유, 라는게…"
"아뇨, 아뇨. '고작'이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그녀는 내 말을 듣고선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치린, 당신에겐 크나큰 문제일 수 있죠. 그 마음도 알고 있습니다."
정녕 내 마음을 이미 알고 계신걸까. 하긴, 나도 이미 머리로는 깨달은 바니까. 결국, 운잔도 내가 얻은, 나의 힘인 것인데. 운잔의 힘을 빌리는 것에 부끄러워해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인데. 그것을 알면서도, 도무지 이대로는 납득을 못 하겠다는 듯, 무언가를 해야만 할 것 같은 불안감만이 맴돌았다.
"그리고 그 고뇌를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면, 수행으로서 승화시키는 것은 나쁜 행동이라 할 수도 없을 것이에요. 하지만 이치린, 당신은 깨달음을 도피처로 삼았던 것 같습니다."
"도피처라고요."
"그래요, 도피처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만 기약없는 견딤 또한 필요하지요."
조금 의외의 말이 나왔다. 내가 예상한, 그녀가 하려는 말은 이런 게 아니었다. 조금 더 전형적인 위로에 가까웠다.
"조금 더 직접적으로 말해보자면… 제가 위로의 말을 건네드릴 수도 있고, 조금 엄한 설법을 여기서 펼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문제의 근원을 찌르진 못한다는 겁니다."
"문제의 근원…?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그러니까, 이치린 당신이 가장 확실하고 빠르게 납득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을 쓰세요. 가장 쿠모이 이치린다운 방법을."
"가장, 저다운 방법…"
#3
"나와라, 모노노베노 후토—! 탄막으로—겨루자—!"
다음 날 아침, 몽전대사묘.
"나와라, 모노노베노 후토—!"
푸른 머리의 소녀가 평소 함께하던 붉은 구름을 대동하지 않은 채 서 있다. 그녀는 정적으로 가득한 선계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줄곧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탄막으로—겨루자—!"
거대한 건물이지만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공허한 메아리만이 다시 들려온다.
"…겨루자—."
"…자—."
이치린은 속으로 괜히 왔다는 후회를 삼켰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려던 때, 후토가 담장 위로 날아 이치린에게 다가갔다.
"정말 쿠모이 공인가… 찾아가야만 하는 쪽은 나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내가 찾아가는 쪽이 맞아. 나는 도전자니까."
이치린은 보라는 듯 양팔을 벌린다. 후토가 뚫어져라 쳐다보지만, 이치린에겐 운잔의 흔적조차 존재치 않았다. 그녀는 진정으로 오롯이 혼자서 이곳을 찾아왔다. 그것을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도전자? …그러고 보니, 너…"
"네가 생각하는 게 맞을걸? 운잔은 지금 여기에 없어."
그러자 후토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눈을 감아버린다. 직후 전조 없는 실소를 내뱉기 시작한다. 그 실소는 이치린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하. 그러니까, 나에게 인정을 받아내겠다는 것이로군? 그 붉은 구름 없이, 오로지 자네의 힘으로?"
하하, 하. 하하하하하—!
실소로 시작한 웃음은 점점 커져, 메아리가 돌아올 정도의 폭소가 된다. 잠시 뒤 그 웃음은 뚝 멈췄다. 후토가 자세를 잡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정적. 그 속에서 후토는 이치린을 도발한다.
"그래. 그 도전, 기꺼이 받아주마! 와라!"
이치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선, 곧장 오른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후토를 향해 쏟아져 내리는 수많은 고리탄들. 그러나 번쩍이는 황금빛의 일륜은 후토를 스치지조차 못했다.
"헛!"
이번엔 후토의 차례. 당긴 적 없는 화살들이 이치린을 덮쳐온다. 이치린은 오히려 후토에게 가까이 다가가, 근접회피를 시도했다. 화살이 잠깐 제동이 걸리는 구간. 그곳의 흐름을 타듯 이치린은 주변을 돌며 점점 후토와의 거리를 좁혔다.
"근접해 오는가… 그렇다면! 풍부 「삼륜의 그릇폭풍」!"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은 이치린을 곧장 바깥쪽으로 밀어냈다. 미스가 나진 않았지만, 여전히 몰아치는 바람에 뿐 아니라 그릇 세 장이 후토의 주변을 돌기 시작해 원거리전을 강요한다.
억지로 근거리전을 하라 하면 못 할 것은 없으나, 그 리스크는 지금 이루 말할 수 없을정도로 상승했다. 하지만 그 상황이 언제까지고나 이어질 수는 없다. 후토의 많은 공격은 그릇을 소모한다, 또한 그릇은 요격이 가능하다.
저 세 장의 그릇이 깨져 의미를 잃는 건 순식간. 그렇기에, 그릇이 의미를 잃기 전에 유의미하게 사용코자 하는 심리는 분명 존재한다. 이치린은 그리 판단하고선 곧바로 그릇을 요격하기 위한 고리탄을 던졌다.
"하! 그 정도 탄막에 내 그릇이 맞을쏘냐!"
"허세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접시는 모였다 퍼지기를 반복하며 탄막을 절묘하게 피했다. 하지만 이래서야 일방적으로 공격을 피하는 데 급급하게 될 뿐. 과감하게 그릇을 버리고 그릇관 무관계한 다음 공격에 집중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타이밍을 재다 연계되는 공격의 발판으로 삼느냐. 후토는 후자를 선택했다.
판단을 마친 후토는 그릇 몇 장을 추가로 던지며 이치린의 시야를 가린 뒤 화기를 모았다. 후토의 손에 모이는 화기는 조그맣지만 활활 타올라, 강한 열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것도 허세인지는, 직접 맛보게나!"
곧바로 쏘아진 수많은 불꽃. 이치린을 둘러싼 채 공중에 고정된 그릇들 사이를 튕기며 궤도를 읽을 수 없도록 움직였다. 이치린은 고리로 불꽃 몇 개를 쳐내다가, 이내 그릇이 주변을 둘러싼 위치에선 불리할 뿐임을 알고 밖으로 빠져나간다.
더 이상 튕길 그릇이 없는 곳까지 날아온 불꽃들은 궤도가 단순해졌고, 이치린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그것을 피했다. 하지만 몇몇은 스쳐갔는지 옷 몇 군데가 그을리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것이 대수겠는가. 이치린은 오직 후토 하나만을 바라보고선 곧장 일직선으로 달려갔다.
당연하게도 후토 또한 이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지 않는다. 곧바로 활시위를 당겨 이치린의 오른손에 들려있으며, 유일하게 탄막을 쏘는 곳인 황금색 고리를 조준했다.
곧장 일륜을 쏘아 떨어뜨려 무력화를 꾀하느냐? 아니면 그리 속인 후 남아있는 그릇을 쏴 확실한 공격의 연계를 꾀하느냐? 선택의 기로에 서서 고민에 빠지려 할 때, 이치린이 왼손을 뒤로 크게 뺐다. 허리를 틀어, 마치 주먹을 내지르려는 것 처럼.
후토는 수없이 싸워왔던 습관대로 곧 날아올, 그러나 지금은 날아올 일 없는 적색의 구름을 조준했고… 후토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거리는 좁혀진 뒤였다.
깡—!
이치린의 오른손에서 번쩍 빛이 나고, 돌과 쇠가 부딛히는 듯한 소리가 났다. 동시에 연기가 충격으로 뭉게뭉게 피어올라 시야를 가린다.
'잠깐, 쇳소리라고?'
이치린은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깨달았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캉—!
이번에는 조금 다른, 더욱 청명한 파열음. 후토의 화살이었다. 결국 이치린은 일륜을 손에서 떨어뜨렸다.
"이렇게 되면, 나의 승리로군."
휘잉. 강하게 불어오른 바람에 먼지는 걷히고, 이치린의 뒤에서 조준한 화살을 갖다대는 후토가 서 있다. 이치린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으며 말한다.
"흉혈… 이었나. 평소에 그 기술, 잘 쓰지도 않더니."
"초고속 이동이라는 메리트가 있지만, 아무래도 조작하기에 까다로워서 말이야. 잘 쓸 일이 없었지."
후토는 활시위를 놓았다. 픽, 하고 화살은 이치린이 앉아있는 자리의 바로 옆에 박혔다.
"그리고, 자네는 그런 기술까지 꺼내 들도록 나를 궁지로 몰았단 것이야. 정말 대단해."
"..."
이치린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답 없이, 촉촉해지는 눈가를 숨겼다. 후토는 그것을 눈치챘음에도, 밝은 말투로 할 말을 이어간다.
"…자네가 최근 품행이 좋다는 소문을 들었네. 그래서 어제 자네를 찾아간게야. 그리고 자네의 모습을 보고, 나는 두려움을 느꼈지… 왜였을까?"
"내가, 알 턱이 있겠어…"
웃음도 울음도 맺힌 목소리로 대답하는 이치린.
"처음엔 앙숙으로서의 두려움, 그런 것인 줄 알았지.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그러한 이유론 설명이 불가능했어."
후토는 자신도 모르게 점점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깨달았지. 자네가 더 높은, 다른 어딘가로 떠나버릴 것 같다는 두려움, 그리고 내가 그것을 부추겼다는 죄책감… 그래서였던 게지, 소름이 끼쳤던 것은."
"…그랬구나."
그래서 그렇게, 끔찍한 표정을 하고선 떠나갔구나.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린다는 것이 그렇게 두려웠구나. 이치린은 생각을 밖으로 내뱉는 일 없이 속으로 삼켰다. 후토가 하고싶은 말을 전부 할 수 있게 두어야 할 것 같았다.
"어느 때인가, 내가 말했던 것을 기억해냈네. '네놈을 까먹고 있었군.' 이었나. 미안하네. 그래서, 오늘 이 말을 들려주고 싶었네. 아니, 들려주어야만 하겠지."
후토는 크게 양팔을 벌리며 심호흡을 했다.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듯, 피할 수 없는 중대한 일을 맞닥트린 듯.
"자네는 오롯이 자네만으로도 대단하네. 그리고 자네는 대단하였기에 운잔이라는 그대의 힘을 얻었지. 그 또한, 자네의 대단함이야."
이치린은 눈물을 숨기기 위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조금 놀란 표정으로, 후토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늘 자네를 상대하니 운잔이 이해가 갈 정도였다니깐? 거기다 보세나! 이변 해결사들이라 불리는 자들도 음양옥이니, 팔괘로이니 해괴한 물건을 쓰지 않던가. 나도 배에 올라타기도 하고. 요는…".
"고마워."
"으, 응?"
이치린은 활짝 웃은채, 고마움의 정체를 고한다.
"그 한마디가, 듣고 싶었어."
그러자 후토는 당황해 횡설수설 헛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그, 그. 무슨 한마디 말인가? 내 배 이야기? 이변 해결사 이야기? 운잔 이야기?"
"비밀."
"에에잇! 이렇게 된 이상 탄막 승부로 알아내겠다! 이번엔 운잔까지 데리고 오게나! 진짜 승패를 가려야겠어!"
하하핫. 이치린은 덕 높은 미소가 아닌, 평소대로의 호쾌한 웃음을 지었다.
#번외
"아, 자네는 먼저 나가있어야 한댔지? 저쪽으로 나가면 저 둘보다 빨리 출구에 도착할걸세."
미코의 안내를 듣고선 운잔은 꾸벅 인사를 했다.
"아닐세, 어서 갈 길을 가게나."
"잘 들어가세요, 운잔."
그리고 미코의 옆에 서 있는 자는 히지리. 이렇게 셋은 모든 일을 담장 뒷편에서 지켜보았다.
*
*
*
후룩. 히지리는 쌉싸름하게 올라오는 향기를 맡으며 차를 한 모금 삼켰다.
"…그렇게 된 지도 벌써 몇 주가 지났군요."
"대사묘 앞에서 싸웠던 그 일을 말하는건가? 아침부터 시끄러웠다고."
어이가 없는 히지리는 미코를 째려보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게요, 제대로 말만 해 줬으면 쉽게 끝났을 일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누굴까요."
"오해하지 말게나? 나는 어디까지나 그 녀석이 직접 마주할 수 있게 등을 밀어주었을 뿐이야. 이렇게까지 될 줄은 나도 알지 못했다고."
"과거도 미래도 알아볼 수 있다고 선전하던 사람께서 하실 말씀이신지."
"아아, 그건 당.연.히. 선전에 불과한 것이지. 불법의 통찰력으론 거기까지 알 수 없었나? 게다가, '가장 쿠모이 이치린다운 방법'이라 하지 않았던가?"
"당.연.히. 알고 있었답니다. 조금 짜증이 치밀어 오른 것 뿐. 그리고 보살 흉내는 아닙니다만, 후토 씨가 그런 표정만 짓지 않으셔도 수행이나 대화를 권하였겠지요. 하지만 이치린 혼자의 문제가 아니게 된 이상, 이치린 홀로 수행하는 것 뿐으론 문제가 더 꼬일 뿐 아니겠습니까."
탕. 미코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치고선 한숨을 쉬었다.
"하아, 그만 하지. 자네의 입장에서 둘의 괴로움을 동시에 없앨 방법은 그 밖에 없었음을 이해하고 있어. 애초에 둘의 성향이 가벼운 다툼을 통해 감정을 승화시키는 데 적합하기도 하고 말이지."
"그렇지요. 저도 당신이 이치린의 소식을 듣고서 후토가 스스로 성장했으면 하는 바램을 가졌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그… 이치린이란 녀석은 어떤가?"
"으음…"
이걸 말해야 하나. 라는 생각이 얼굴에 빤히 보이는 히지리였다.
"우선, 수행은 그때만큼 착실히 하진 않지만… 그보다 이전에 비하면 꽤 낫다고 할 수 있죠."
"호오."
"중요한 일(예 : 후토와의 승부)이 있을 때만 빠지는 정도네요. 밖에선 조금 풀어지긴 했어도 수행자 분위기가 여전히 난다는 평이고."
"둘의 사이가 참 좋긴 한가보군. 후토와의 승부를 그리 중요시하다니."
뜰을 바라보는 미코는 홀짝거리며 차 한 모금을 마셨다.
"하지만 그래서야, 깨달음은 너무 멀지 않겠나?"
"…뭐, 이치린에게 남은 시간은 많으니까요. 조금씩 전진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글쎄. 자네에게나, 거기에 굳이 더하여 나라면 몰라도 그 둘에겐 깨달음, 곧 승화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사견이네만."
"최상의 깨달음에 적합함을 따질 이유가 있겠습니까."
"나는 그런 해탈, 곧 승화에 회의적이라. 후토도 말했듯, 나는 그것이 두렵다면 두렵지 유익한 것으로 보이지 않아."
"어찌 이해하지 못한 것의 가치를 쉬이 판단하십니까. 아직 알 수 없기에 최상의 깨달음이고, 애초에 당신은 깨달음의 정의를 비좁게, 원하는 대로만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언어는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지, 깨달음 그 자체를 표현할 수는 없지요."
"불가지론인가? 하지만 나는 그런 애매모호한 승화라는 개념으로 괴로움을 없애는 것보단, 욕망을 인정함으로서 괴로움을 승화시킴이 옳다고 보는데. 이를테면 그 둘의 승부처럼 말이지."
"하지만 그 뒤에도 이치린은 수행을 놓지 않았죠. 깨달음을 지향하는 삶의 방식, 그 자체가 위안이 될 수도 있는겁니다."
"그건… 하아. 됐다, 그냥 말을 말지. 그보다 이 차, 굉장히 맛있군."
"이래봬도 일반 인요 대상 다도 실습도 진행하거든요, 저희. 관심 있으시다면…"
"에이잇. 이만 돌아가겠네."
#후기
이후 이치린이랑 후토는 못 만났던 만큼 뜨겁게 비볐습니다
2번 주제인 승화, 그 중에서도 제시된 1번과 3번 의미가 이리저리 쓰까져있는 글임
원래 구상할 때는 전자가 메인이었는데 쓰다 보니 후자로 중심이 옮겨지고, 두 술 더 떠 동방 가지고 팬픽 써서 올리는건 처음인데 전투씬 비중 이렇게 큰 것도 처음이라 완성도가 굉장히 떨어집니다….
그래서 대회 기간 내 약간의 수정이 있을수도 있음
그리고 히지리랑 미코가 하는 말은 적당히 넘겨주세요 저 불교도 도교도 잘 몰라서 나름 조사한다곤 했는데 엉망진창임
그 와중에 소소한 메타요소나 시점전환 등 쓸데없는 욕심만 그득한 글
하여간 부끄러워도 이미 1만자 넘게 써버린 바 대회참가에 의의를 두고 올려봅니다
끝까지 읽어주셨다면 감사 또 감사
'제 3회 글알못 팬픽대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과거의 속박에서 벗어난 사나에 - 안쓰는계정 (0) | 2023.04.23 |
---|---|
말괄량이 조각가 - 피네 (1) | 2023.04.23 |
당신의 사랑이 나를 행복하게 합니다 - 피네 (1) | 2023.04.23 |
쎄이쟈 오리진 - ㅁㅇㅂㅇㅁ (1) | 2023.04.23 |
두근두근 위태위태 스키마탐험! - Letty (0) | 2023.0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