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새가 두목(杜木)의 끝에 앉아있습니다.”
무심코 내뱉었을, 단순히 감탄사였을지도 모르는 말 한 마디. 백로는 이 말을 잊지 못한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절대 잊을 수 없는 말이었으니.
입에 담긴 존재의 운명을 뒤트는 입에서 이 말이 나오고, 화살은 쏘아졌다. 쏘아진 화살은 새의 가슴을 꿰뚫고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그것 뿐이면 흔하디 흔한 이야기였을텐데 화살은 자신이 그러한 이야기의 소품으로 쓰이는 것이 싫었던 모양이다.
쏘아진 화살은 신의 손에 의해 다시 되돌아와 자신을 쏘아보낸 존재를 꿰뚫었다. 화살을 쏘는 자는 모름지기 되돌아올 화살을 두려워 해야하거늘, 그는 그러지 못했다.
화살을 생각해보지 않고 쏜 자의 잘못이요, 그 화살을 받아들고 생각 없이 돌려보낸 자의 잘못이었다. 그게 당연한 것이며 흑백을 가릴 것도 없었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나 권력이 있다는 것은 곧 부조리도 있다는 뜻으로 통한다.
감히 입을 열어 무의미한 희생을 초래한 죄로 백로는 지상으로 유폐되는 형벌을 선고받았다. 그 부당함과 억울함에 몸서리치고 싶었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신들의 나라에서 필멸의 지상으로 떨어진다는 것. 고작 말 한 마디 잘못 한 것치고는 너무나 과도한 처사였으나 역시나 백로는 항의 한 마디 꺼내지 못했다.
나름 위치가 있는 신이었던 그녀조차 항의할 수 없는 존재가 그녀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고, 판결을 내렸으며, 집행을 지시했기 때문에.
고로 판결은 내려졌고, 집행은 빨랐다. 그렇게 아메노사구메는 떨어졌다.
…
하늘에 뜬 달이 지상을 비추는 어느 밤에, 아메노사구메는 눈을 떴다.
떨어진 지상은 깨끗했다. 아직 더럽혀지기 전의 지상은 신의 나라만큼은 아니지만 순수함을 담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곳은 유배지. 즐길 수가 없는 곳이다.
“윽…!”
즐기고 싶어도 즐기지 못할 것이다. 어깨 쪽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에 그녀는 다시 의식을 잃을 지경이었으니.
손을 뻗어 고통이 느껴지는 곳을 만져보니 느껴지는 것이 없다. 찬란하게 빛나던 왼날개가 있어야 할 곳이 비어 있다.
지상에 떨어지면서 그 충격으로 뜯겨져 나간 것이리라. 허전한 왼쪽 날개죽지를 부여잡고 아메노사구메는 떨어져나간 자신의 날개를 필사적으로 찾아보았다.
고통에 흐려진 시야로 주변을 둘러보자 보이는 피투성이 날개 한 짝. 지상의 더러움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기라도 한 듯이 일부가 검게 물들어있다.
붉고, 검고, 하얀 날개. 아메노사구메가 기어가다시피 날개에게 다가가서 손을 뻗지만 날개에서 온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미 차갑게 식은 날개는 구태여 붙여보려 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영영 왼날개를 잃어버린 것이다.
웃음도 울음도 나오지 않는 감정 속에서 아메노사구메는 그저 잃어버린 날개를 하염없이 매만질 뿐. 어깨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허전함이 그녀가 완전히 떨어졌음을 굳이 강조해준다.
“흐윽.”
처음엔 웃음도 울음도 나오지 않았으나, 드디어 그 중 하나가 모습을 비추기 시작한다. 고작 말 한 마디 잘못 한게 이토록 큰 죄였던가. 누군가를 속이거나 욕되게 하기 위함이 아닌 그저 새가 있다고 말했을 뿐인데.
“끅, 흐윽…흑…”
그것 때문에 모시던 이는 살해당하고, 자신은 지상으로 떨어지고, 왼쪽 날개를 잃었다. 말로 인해 잃어버린 것이 너무나 많다. 그렇다고 얻은 것도 하나도 없다. 오직 잃은 것 뿐.
“아…아.”
잃은 것 뿐인가?
“우, 아…아우..”
아메노사구메는 피투성이에 더러움투성이인 날개 속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를 들었다. 자신이 미쳐서 아기의 옹알이를 흉내낸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분명히 다른 존재의 소리였다.
붉고, 검고, 하얀 날개의 안에서 작은 손이 모습을 내민다. 아메노사구메의 손에 비해 너무나 작고 연약한 손. 영원을 살아가는 신들의 세계에서는 너무나 보기 힘든 것이다.
“아우아, 아…”
아메노사구메가 무언가에 홀린 듯 떨어진 날개를 헤치자 그 안에서 태어난 존재가 모습을 드러낸다. 작고도 연약한 존재가.
여자아이. 머리에 붉고, 검고, 하얀 머리칼이 한갈래씩 나있는 갓난아이가 그곳에 있었다. 머리에 난 돌기처럼 보이는 작은 뿔을 제외하고는 아메노사구메와 쏙 빼닮은 아이가 날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여신의 일각인 아메노사구메는 그 존재가 무엇에서 비롯된 존재인지 오판하지 않았다.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아이는 자신의 떨어져나간 날개로부터 비롯된 존재. 즉.
“내 딸아이…”
하늘에서 쫒겨난 편익의 백로는 자신의 치욕스러운 흉터나 다름없는 그 존재를 납득하지 않았을 법도 하지만, 그녀는 그 흉터조차 자비로이 보듬기로 하였다.
이미 떨어진 죄인이 되었거늘 고작 그런 이유로 딸을 내치는 부모가 있다면 그야말로 짐승만도 못한 일일 테니.
조심스럽게 아이를 들어올려 안은 아메노사구메는 자신을 똑 빼닮은 붉은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잃은 것 뿐이라 생각했던 서글픔과 억울함에서 나온 눈물이 다른 눈물로 바뀌어간다. 하지만 아직 웃을 수는 없다. 아직은.
“헤헤, 헤…”
어머니의 눈을 마주본 아이가 웃으며 손을 뻗은 순간. 편익의 백로는 비로소 함께 웃어줄 수 있었다.
“그릇된 죄인의 딸로서 태어났건만, 참으로 해맑구나. 나의 아이야.”
그녀는 지상에 떨어져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건만, 이곳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을 얻었다.
“세이자(正邪). 바르지 못한 나와는 다르게 너는 올바름(正)이 그릇됨(邪)의 앞에 위치하길 바란단다. 너의 이름은 키신 세이자야.”
설화의 여신 아메노사구메는 지상에 떨어졌다. 그리고 한 아이의 어머니인 키신 사구메는 지상에서 새로이 태어났다.
…
익숙지 않은 지상의 생활이었다. 그보다 더욱 익숙지 않은 육아였다. 하지만 사구메는 여신이었고 세이자도 여신의 딸이었다.
필멸자에 비해 그녀들에겐 허락된 것이 더 많았고, 치명적일 실수들조차 그냥 넘어갈 수 있을 실수가 되었다.
덕분에 어설펐던 모녀는 어느새부턴가 지상에서 익숙하게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가 웃으면 어머니도 따라 웃고, 아이가 울면 어머니도 같이 울어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행복한 세월의 어느날, 걸을 수 있을 정도가 된 세이자가 강에 빠진 적이 있었다. 작디 작은 세이자도 위험하지 않을 개울에 가까운 강이었지만, 호기심이 동한 세이자가 무리하게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려 하다 그만 지쳐 힘을 잃은 것이다.
근처에 사구메가 지켜보고 있어서 세이자가 더 위험해지는 일은 없었지만. 그날 사구메는 이것만큼은 알려줘야겠다는 투로 자신의 딸에게 작은 조언을 해주었다.
“세이자. 무리하게 흐름을 거스르려고 하면 안돼. 굴러가는 운명의 바퀴를 역전시키려고 하는 순간 큰 일이 날 테니까. 알겠지?”
“어머니, 바퀴가 뭐에요?”
“언젠가 필멸자들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 될지도 모르는 그런게 있…얘, 엄마 말에 집중해야지.”
모녀는 웃음을 터트렸고, 이 행복한 날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작았던 아이가 어머니를 안아줄 수 있을 정도로 자랐을 때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곁에 있고 태어나 준 것만으로도 사구메는 세이자에게 감사했고. 세이자 역시 어머니를 사랑했다. 긴 시간 동안 사소한 다툼도 있었지만 모녀의 사이는 그런 것으로 갈라질만큼 약하지 않았다.
이 행복이 영원히 이어졌으면 좋았겠지만, 세상에 영원불멸한 것은 없다.
“아메노사구메. 데리러 왔어.”
“야고코로…님?”
언젠가의 때. 세이자가 자리를 잠시 비웠을 때였다.
“네가 비록 지상에 유폐된 죄인이지만 그래도 천진신의 일익. 내가 츠쿠요미께 간청을 드려서 간신히 너를 데려오는 것을 허락받았어.”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존재가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그것도 다시 신의 나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더할나위 없이 기쁜 소식을 가지고.
“지상의 대지는 물론이고, 신들의 나라조차 서서히 더러움에 물들어가. 그래서 우리 천진신들은 이 땅을 떠나 때묻지 않은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할 생각이야. 그 이주엔 너도 포함되어 있고.”
야고코로의 말에 사구메는 형언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기쁨. 지상을 떠나 다시 신들의 나라로 돌아갈 수 있음에 대한 고양감. 야고코로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걱정.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침묵이 있었다. 야고코로는 사구메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었고, 시간이 지나 사구메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또 한 사람을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사구메는 이렇게만 말했지만, 야고코로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온 참이었다.
“지상에 떨어진 너 하나를 데려오는 것만으로도 나는 수많은 불가능을 넘어섰어. 하물며 네 더러움에서 비롯된 네 분령. 그러니까 네 아이는…”
고개를 젓는 야고코로를 보며 사구메는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고서 미소지었다.
“그렇다면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세이자가 없는 곳에서 영생을 누린다한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저는 지상에서 제 딸과 함께 더럽혀지고, 사예에 물들어 죽어가겠습니다.”
망설임 없는 단언.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본 야고코로는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한때는 오만하기 그지 없는 천진신이었지만 지상에 떨어져 국진신으로서의 면모도 받아들인 탓에 이렇게 되었는가.
자신의 노력을 부정하고 거절하겠다는 선언에도 야고코로는 화내지 않았다. 애초에 화를 낼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느낀 것은 동정이었다. 지상에 떨어진 천진신에 대한 동정이 아닌 한 아이의 어머니를 향한 동정.
치밀어오르는 안타까움을 누르고서, 야고코로는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미안해, 아메노사구메. 정말로 미안하지만 내가 한 것은 제안이 아니었어.”
“예…?”
그와 동시에 주변에서 야고코로를 수행하던 신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들을 보며 사구메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단번에 이해했다.
“야고코로 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츠쿠요미께서 너를 거두기로 한 것은, 내 설득도 있었지만 너의 힘을 높게 산 것도 있어. 지금 나는 사사로운 감정을 내비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야.”
새로이 신들이 이주할 곳인 달의 도시. 그곳의 건설을 일임받은 야고코로는 자신의 마음대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츠쿠요미는 아메노사구메의 능력을 높게 사서 데려옴을 허락했고, 야고코로는 그에 따라야만 했다.
“그렇다면 세이자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조금만 더 시간을…!”
“미안해. 더러움에서 비롯된 존재가 달에 원망을 품게 만들어서는 안되거든. 그에 대한 두려움은 곧 더러움이 될 테니까. 너는 갑자기 사라진 것이 되는거야.”
저항을 해보나 결국 신들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사구메의 애원을 들으며 야고코로는 매정하게 말했다.
“부당합니다! 부당하고 또 부당합니다! 이런 법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동감이야.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
“세이자! 세이자아아!!!”
사구메의 처절한 외침이 지상에 울리지만 야고코로는 그것이 더 퍼져나가 어딘가에 있을 세이자의 귀에 닿지 못하게 하였다.
“나를 용서하지 마. 아메노사구메. 하지만 이해해줘. 내 신위에 맹세코 언젠가 네 딸과 다시 만나게 해줄 테니.”
그러니까, 부디 그 삶의 의지를 놓지 말아줘. 정말로 미안해.
…
세이자는 지상에 버려졌다. 처음에는 어머니를 찾으려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혹여 무슨 일을 당한건 아닐까 걱정을 가득 안고서 이곳저곳을 찾아다녔다.
흔적조차 없다. 세이자가 목청껏 어머니를 불러보아도 메아리밖에 돌아오지 않는다. 정말로 무슨 일을 당한 것인가 더욱 걱정이 되었으나 그렇다면 흔적이라도 있어야할텐데 전술했듯 흔적조차 없다.
세이자의 머릿속에서 피어오르는 걱정이 의문으로 바뀌던 때, 언젠가 그녀의 어머니가 해주었던 옛날 이야기가 기억이 난다.
‘세이자. 언젠가 내가 용서받아 다시 하늘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널 꼭 데려갈게.’
‘그곳은 이 지상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는 곳이란다. 네게도 꼭 보여주고 싶어.’
세이자는 신의 아이답게 영특하였고, 그 이야기가 떠오르기 무섭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하였다.
어머니가 나고 자란 곳인 신의 나라. 그녀는 언젠가 꼭 그곳에 돌아가겠다고 하며 그곳을 그리워했다. 더해서 만약 돌아가게 된다면 꼭 세이자를 데려가겠다고 했다.
우습게도 세이자는 자신을 꼭 같이 데려가겠다는 사구메의 이야기에서 자신이 버려졌음을 추론해낼 수 있었다.
사구메는 모종의 이유로 하늘로부터 용서를 받았고, 신의 나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마따나 세이자를 데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상에서 태어난 더러움 덩어리를 어찌 감히 하늘로 데려가겠는가. 사구메는 자신의 딸과 신위로의 복귀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고, 그 중 후자를 택한 것이다.
실제와는 반대되는 결론을 내린 세이자는 모든 감정을 제치고 솟아오르는 한 가지 감정을 느꼈다.
분노였다.
“원망한다. 아메노사구메. 원망한다 천진신들이여. 원망스럽다, 내 위에 선 모든 자들이여.”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 대한 분노, 어머니를 꾀어낸 신들에 대한 분노, 애초부터 자신을 태어나게 만들어 이런 감정을 느끼게 만든 하늘의 존재들에 대한. 위에 있는 자들에 대한 분노가 그녀의 마음을 지배했다.
“나를 버리고 간 자여, 난 더 이상 그대를 어머니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준 이름을 부정하고, 그대로부터 물려받은 성을 갈아치우리라.”
그렇게 키신 세이자는, 희미한 신으로부터 태어난 바름을 그릇됨보다 우선하는 존재에서 다른 존재가 되었다.
“내 이름은 키진(鬼人) 세이자. 나는 귀신이 되어 올바른 것조차 그릇되게 바꿔놓겠다. 하늘(天)조차 부정(邪)하는 존재가 되겠어.”
아마노자쿠, 키진 세이자. 그것이 여신의 딸이 새로이 정한 이름이었다.
“내 이름은 키진 세이자. 뼛속까지 아마노자쿠가 되어주마…! 반드시 날 버리고 간 당신에게 후회를 안겨주겠어!”
아메노사구메로부터 아마노자쿠가 태어났다.
그리고 거짓말같이 그 순간에 아마노자쿠는 자신이 누구로부터 비롯되었는지, 누구에게 원망을 가지고 있는지 물거품처럼 잊어버리고 말았다.
신으로부터 비롯된 분령인 키신 세이자가 아니라, 완전히 아마노자쿠인 키진 세이자로서 재탄생된 날이었다.
…
“내가 원망하는 딸, 세이자가 나를 영원히 기억해주기를.”
내가 사랑하는 딸, 세이자가 나를 잊어버리기를.
…
길고 긴 세월이 지났다.
달의 도시는 현자 야고코로의 명을 따라 건설되었고 모든 천진신들이 더러움 없는 그곳으로 이주하였다. 그 중에서는 대륙에서 온 달의 여신 상아를 비롯한 다른 신들 역시 있었고.
순호라 자칭하는 강대한 신령이 달을 침략하는 일도 있었으나 야고코로가 그녀를 진정시켜 돌려보내고 그녀의 존재를 월인들의 기억에서 아메노사구메가 지워버려 해결하였다.
올 때는 죄인의 신분이었던 아메노사구메는 달의 현자의 일각이 되었고, 그녀를 데려온 야고코로는 역으로 달의 현자의 자리를 내려놓고 봉래의 약에 손을 댄 달의 공주를 따라 지상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키신 사구메는 단 한 순간도 세이자를 잊었던 적이 없었다. 세이자가 그녀를 잊었을지언정 그녀는 딸을 잊지 않았다.
지상의 환상향에서 이변을 일으키는 그 모습도 보았다. 소인의 공주를 속여 요술망치를 취해 도구들과 약소요괴들이 하극상을 일으키게 하는 이변.
그 소식을 들은 사구메는 세이자가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고 하고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음에 기뻐했다.
세이자가 환상향 전역에서 수배되어 도망치고, 다가오는 적들을 격퇴하는 사건을 들었을 때는 걱정도 되었지만 훌륭히 자신의 길을 관철함에 또 기뻐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순호가 진정으로 달의 도시를 함락시키기 위해 전례없는 세력을 끌어당겨 공격해왔을 때, 사구메는 지상의 힘을 믿고서 달의 현자들이 세운 계획을 실행하였다.
지상을 정화하기 위해 병력을 내려보냈지만 사구메는 환상향의 인요들이 고작 그런 것에 당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세이자를 걱정하지 않았다.
달의 힘을 지상에 뿌린 것도 지상을 정화한다는 명목에서 지상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함이었다.
마침내 그 계획이 결실을 맺어 순호를 단념하게 만들고서야 사구메는 잠깐의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잠깐의 여유 동안 사구메는 지상으로 내려와 달의 현자와 공주, 탈영한 달토끼가 머물고 있는 죽림의 영원정에 발길을 옮겼다.
언젠가 야고코로가 했던 약속. 그녀의 신위를 걸고서 다시 한 번 세이자와 만나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어. 사구메.”
영원정에 도착해서, 자신을 보며 미묘하게 불편해하는 달토끼를 따라 야고코로, 야고코로 에이린과 독대하게 된 사구메는 눈빛으로 그때의 약속에 대해 물었다.
“네가 이곳에 온 이유는 알고 있어. 내가 너에게 죄를 저지를 때 한 약속을 확인받기 위해서겠지?”
“예. 그래서 저는 아직까지도 당신을 이해하되 용서는 하지 않았습니다.”
에이린이 서글픈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서 사구메를 쳐다본다. 그녀의 눈은 처음 봤을 때, 하다못해 달에 있을 시절에조차 상상하기 힘든 많은 것들이 담겨있었다.
“스스로 찾아가지 않은 이유는 알고 있어. 너희 모녀를 떼어 놓은 내가 결자해지하기를 바라고 있을테고, 또한 너의 죄책감 역시 있겠지. 정말. 너의 잘못이 아닌데.”
“그걸 아는 사람이 무책임하게 지상으로 도망을 갔습니까.”
“후후, 기억하고 있다는 시점에서 무책임한건 아니라고 해줘.”
그때처럼 잠시 간의 침묵이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이 어색한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사구메였다.
“세이자는…잘 지내고 있습니까?”
“우리도 죽림 바깥에 크게 관심을 두는 편이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너무 잘 지내서 문제라고 밖에 전할 말이 없네.”
“다행, 이군요.”
간만에 보는 사구메의 미소. 달에 있을 때도 세이자의 소식 이외에는 웃음을 보인 적이 없었던 그녀의 미소는 에이린 입장에서는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웃으니 보기 좋은걸. 그 미소를 잃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난 너와 한 약속을 기억하고 있어. 기다리고 있으렴. 오래 기다릴 일은 없을테니까.”
그 이후의 이야기는 시시콜콜한 것들 뿐이었고, 사구메도 에이린도 깊게 신경쓸 이야기는 아니었다.
…
정말로 오래 기다릴 일은 없었다.
야쿠모 유카리. 월면전쟁에서 한 번 마주친 적이 있고 달의 또다른 공주와도 접점이 있던 지상의 요괴가 에이린의 서신을 들고서 사구메를 찾아온 것이다.
서신을 받아든 사구메는 두 번 읽을 것 없이 유카리를 따라 지상으로 향했다. 환상향의 어느 곳. 축제처럼 보이는 현장. 그리고 불꽃처럼 터지는 탄막들. 그 탄막들의 저편에서 보이는 요괴들.
"세이자…!“
그 많은 인요들 사이에서도 저 붉고, 검고, 하얀 머리칼을 어찌 못 찾을까. 아니 머리칼이 아니더라도 어찌 그때와 변한 것이 없는 딸의 모습을 못 찾을까.
"…"
사구메는 말없이 축제의 중심으로 한쪽만이 남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갔다. 기분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세이자를 만나 재회의 기쁨을 만끽하고 싶었지만 세이자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터.
그래서 사구메는 현장의 법도를 따르기로 했다. 전에 달의 도시에서 선보인 적 있는 스펠카드 룰. 흥미로운 지상의 규칙을 따라 그녀는 날개를 펼치고 비어있는 허공을 향해 날아갔다.
"누구야? 이런 녀석한테 말한 적음 없는데.“
"으음? 이 녀석은…나도 말을 꺼낸 적은 없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어째서지?“
그녀가 펼치는 아름다운 탄막을 보며 관중들과 심사위원들이 한 마디씩 하지만 아직 세이자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더욱 화려한 탄막을 보일 뿐. 에이린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도 겸해서.
“…요괴가 야고코로 님의 친서를 들고 달에 왔을 땐 뭔가 싶었는데, 이제 알겠어. 요괴도 인간도 섞여들어 더러움에 가득찬 광기의 연회에 불려진 이유를.”
그 이유는. 수많은 세월을 지나 지켜진 에이린의 약속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표면상의 이유부터 따르기로 하였다.
“자, 그럼 '더욱, 더욱 더 생명을 위협하는 더러움에 가득찬 광기의 연회를 계속하도록 하거라!‘”
그녀의 선언과 함깨 화려하게 뻗어지는 스펠, '한쪽 날개의 백로‘. 한쪽 날개의 백로는 자신의 다른 한쪽에서 태어난 아이를 위해 이 탄막을 보여주었다.
"아메노사구메라고? 나랑 동족이잖아! 이 대회에서 생각보다도 더 수확이 많은걸! 역시 앞으로도 소인 쪽에 붙어 있어볼까.“
이 목소리. 이걸 어떻게 잊을까. 한쪽 날개의 백로가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 있던 아마노자쿠와 눈을 마주쳤다.
세이자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사구메는 세이자를 알고 있다. 영겁의 세월 끝에 모녀는 다시 한 번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사구메를 꼭 빼닮은 붉은 눈동자. 두 붉은 눈동자가 마주치자 세이자는 씨익 미소지었다. 사구메도 둘의 첫만남 때 그러했듯이 미소를 지어주었다.
…
사구메의 능력과 무녀 덕분에 축제는 끝났지만 그녀는 아직 달로 돌아가지 않았다. 약속을 지키고서야 용서할 수 있게 된 에이린에게 감사를 전하러 가야 했으니.
"이봐, 거기 너! 아메노사구메!“
미혹의 죽림을 지나가려던 사구메의 뒤를 어떤 목소리가 붙잡았다. 방금 전에 들었으며, 또한 아주 오래 전에 들었던 적이 있는 목소리. 사구메는 판단보다 빠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평소같으면 그냥 갈텐데, 어째 그냥 두고 볼 수야 있어야지. 처음으로 만난 동족이잖냐.“
처음이 아니란다. 더할나위 없이 사랑하는 내 딸아.
“어때, 놀라워? 너도 동족을 만나는건 드문 일일텐데.”
놀랍단다. 이렇게 놀란 적은 너를 떠나보낸 이후로 처음이란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사구메는 더 말하지 않고 그 자리에 표정없이 서 있었다. 떨리는 입꼬리를 감추기 위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역시 말은 안하는구만. 켁, 재미있기는. 시시하지 못한 녀석 같으니라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세이자는 사구메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사구메는 거리를 벌리고 싶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입을 열면 운명을 뒤집는 정도의 능력이었나? 꽤 구린 능력이잖냐. 입만 열면 세계가 뒤바뀐다니.”
그래, 여기서 더 말을 안하고 무시하자. 더 이상 내 아이를 괴롭게 하기 싫고, 나도 이 이상 접촉해서는 안돼. 달의 현자가 지상의 아마노자쿠와 엮인다니. 그건…
"…완전 굴러가는 운명의 수레바퀴를 역전시키는 능력 아니냐?“
…그건, 지금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사구메는 그 말을 들은 즉시 잠시 이성이 끊어졌고,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얼떨떨한 표정의 세이자가 품에 안겨 있었다.
"켁. 이, 이게 뭔 짓이야? 처음 보는 사이에 이렇게…“
"아니야. 세이자.“
정말로 아니야. 다시 한 번 말해줄게.
"세이자. 무리하게 흐름을 거스르려고 하면 안돼. 굴러가는 운명의 바퀴를 역전시키려고 하는 순간 큰 일이 날 테니까.“
그 바퀴가 역전하지 않고 굴러간 덕분에 너와 나는 만날 수 있었고, 헤어졌고, 다시 만날 수 있었어. 다시 나를 원망하고 있을 너를 만날 수 있었어.
내가 한 때의 감정에 미쳐 무리하게 능력을 쓰지 않았다면 넌 내게 원망을 쏟아낼 수 있었을텐데. 나만이 일방적으로 너를 그리워하고 미안해하는구나.
"…미안해.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세이자… 나를 용서하지 말아줘…너를 두고 가서 미안해. 이제야 만나러 와서 미안해. 변명할 말은 없어. 정말로 미안해…“
사구메의 품에 안긴 세이자는 갑자기 자신에게 알 수 없는 사과를 쏟아내는 동족을 보며 당황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밀쳐낼 수 없었다. 어째서일까. 언제 만난 적이 있었던가…
"…언젠가…만난 적이…“
언젠가 아직 더럽혀지지 않았던 지상에서.
"아메노사구메…“
날개를 잃은 백로, 아메노사구메. 그것은 누구인가.
"나의…“
나의.
…
“내가 원망하는 딸, 세이자가 나를 영원히 기억해주기를.”
기억해주기를.
잊어버리더라도
영원히.
언젠가는 떠올릴 수 있게.
…
"…어머니…“
사구메의 숨이 잠깐 멎었다.
"세이자?“
잃어버렸던 호흡을 되찾고 편익의 백로는 다시 한 번 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에게서 예의를 못배운거냐. 에이, 좀 떨어져.“
"엣.“
세이자가 사구메를 밀쳐내자 사구메는 힘없이 물러났다. 동시에 힘없는 미소 역시 지어보였다. 역시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그래, 그럴 리가 없지.
"누가 나랑 동족 아니랄까봐 이상한 행동만 골라서 하는구만. 켁. 흥미가 떨어졌어. 난 가련다.“
사구메로부터 등을 돌린 세이자가 다시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세이자…“
다시 만난 딸로부터 외면받은 어머니는 가슴이 아렸지만 붙잡지는 않았다. 그래. 이제 모르는 사이니까.
사구메는 체념하고 다시 죽림 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의 모습이 대숲 사이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덕분에 세이자도 오래 숨어있을 필요는 없었고.
"어째서 모른 척하는 거니. 아마노자쿠. 너는 다 기억해냈잖아.“
“…미안하니까.”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달의 현자, 야고코로 에이린. 그녀가 갑자기 나타나 질문을 던졌음에도 세이자는 놀라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한다.
"저 모습을 봐. 어머니가 나를 정말로 버리고 떠났다면 저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겠지. 언제나 나랑 함께하겠다 맹세하신 분인데.“
아무렇지 않다는 듯 팔짱을 끼는 아마노자쿠.
"그런데 나는 그녀를 오해해서 원망했어. 아마노자쿠를 떠나 자식된 자가 그래서는 아니될 일이지. 어머니도 내게 잘못을 저질렀지만, 나 역시 그녀를 용서하지 않을 자격은 없어.“
평소의 세이자답지 않게 유려한 언변을 뽐내는 아마노자쿠를 보고서, 에이린은 정말 붕어빵같은 모녀구나 싶었다.
"그래서, 어려운 말은 제쳐두고. 기분이 어때?“
"…땅을 파고들고 싶을 정도로 더러워.“
"후후, 하늘로 솟아오를만큼 기쁘다는 뜻이구나. 아주 효녀야.“
부정은 없다. 달빛 한 줄기가 아마노자쿠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 한 방울을 비춘다.
"나도 그리웠어. 어머니가 내 기억을 지운 이후에도 나는 쭉 누군가를 원망하면서도 그리워했으니까. 기억이 지워지더라도 내게 새겨진 온기만큼은 몸이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 부재가 드디어 해소되었잖아. 기뻐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어.“
"그렇구나. 하지만, 그런 말은…“
에이린이 손가락을 딱 튕기자 죽림이 살아움직이듯 변하며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존재를 드러낸다.
"본인한테 직접 하는게 어때?“
죽림 속으로 사라진줄 알았던 사구메가 그곳에 있었다.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한 채. 세이자 역시 눈물이 흐르는 얼굴로 그녀를 마주보았다.
"세이자…“
"…어머니.“
그때처럼 하늘에 뜬 달빛이 둘을 비춰주는 밤.
그곳에서 아메노사구메와 아마노자쿠는 다시 진정으로 재회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키신 사구메와 키진 세이자는 다시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어머니와 딸은 다시 한 번 서로를 안아주었다.
무심코 내뱉었을, 단순히 감탄사였을지도 모르는 말 한 마디로부터 시작된 인연. 백로는 이를 절대 잊지 못한다.
본디 나쁜 의미로 잊을 수 없었던 말이었지만, 이제는 좋은 의미만이 남아 그녀의 기억 속에 새겨져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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