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녀의 신앙
1.
환상향에 오고 나서 처음 하쿠레이 신사를 들렸을 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신사와는 너무 다른 모습에 놀랐다. 신사건물이나 토리이의 모습이 다르다는게 아니다. 신관은 어디에도 없었고, 홍백색의 무녀가 태평하게 마루에 걸터앉아 아이들이 장난치는 것을 풀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마저도 참배객은 없고, 새전함에는 동전 몇 푼, 나머지는 온갖가지 잡동사니들이 아무렇게나 들어가있었다.
"무녀님, 무녀님은 어떤 신을 모시나요?"
잠시동안 침묵이 이어졌고, 홍백 리본의 무녀는 빗자루를 쓸다말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뭔가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그렇게까지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나?
"이자나기? 이자나미? 대부분의 신사는 태양신인 아마테라스를 모시던데 역시 무녀님도? 음... 그것도 아니면, 뭐 신토에 신은 엄청 많으니까요. 츠쿠요미라던가, 아 근데 무녀님은 솔직히 하치만도 어울릴거 같아요. 요괴 때려잡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여전히 무녀는 빗자루를 꽉쥔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입을 열지도 않은게, 그렇게 모시는 신이 많나? 신토의 신은 800만이나 된다고 하니 그럴만도 하지만...
"...몰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힘없이 무녀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잠시만, 모른다고요?"
"어... 모르겠어."
한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어느 신사의 무녀가 자신이 모시는 신이 누군지도 모른다는 말인가? 연이어서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신사에는 모시는 신의 그림이 있기 마련인데 이 무녀는 그걸 못알아볼 정도로 신을 모신지 오래되었거나 그림이 신사 창고 어딘가에서 뒹굴고 있다는 소리 아닌가?
"어느 쪽이든 좋지 않은건 확실하네요."
무녀는 나를 외면한 채 다시 빗자루질을 시작했다. 서걱, 서걱, 낙엽이 빗자루솔에 쓸리는 소리만이 귓속을 맴돌았다.
"무녀님, 이건 심각한 문제에요. 무녀라는 사람이 자기가 누굴 모시는 지도 모르면 언젠가 그 신이 노할 수도 있다구요. 알고보니까 하필 칠복신이라도 되면 어떡하시려고 그러세요?"
여전히 무녀는 아무 말도 없었다. 서걱, 서걱, 슬슬 이 소리가 짜증나기 시작했다. 나를 등지고 서서 빗자루를 끄는 홍백의 무녀에게 자신의 업에 대한 일말의 자부심이나 신에 대한 믿음 따위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화려한 무녀복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입고 있는 것인가?
분명 저 무녀는 신앙심을 잃은지도 오래됬을것이다. 그저 대대로 내려오는 직업이 무녀니까, 그게 아니면 어릴때부터 신사에서 길러졌거나, 그래서 대충 하는거겠지. 어쩌면 무녀가 할 일은 신사를 청소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정말로 자신이 해야하는 일이 무엇인지 망각한 무녀에게 기대할만한 것은 없다 생각하여 더이상 말도 걸지 않고 뒤돌아 신사를 빠져나갔다. 새전으로 내려했던 동전들이 주머니 속에서 서로 부딪히며 짤랑거렸다.
"야 잠깐만! 새전은 내고 가야지!"
신사 아래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내려가는 내 뒤로 무녀가 소리쳤다. 낯짝 참 두껍다고 해야하나, 모셔야 하는 신도 잊고 살며 세속에 찌들어버린 무녀같지도 않은 인간이 아까까지 내가 하는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이제 와서 새전은 내라고 보채다니. 저 무녀는 그 새전이 누구에게 바쳐지는지도 모른다는 건데 그런 년을 위해, 누군지도 모를 신을 위해서 내 신앙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계속 뭐라 꽥꽥대는 소리를 무시하고 싶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소리쳤다.
"참배객도 안오고 새전도 점점 안들어오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생각은 해보셨어요? 그래, 신사 위치가 좀 그렇다 쳐도 말이지, 어떻게 자신이 모셔야 할 신이 누군지도 몰라요? 결국 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이 무녀같이 좀 굴어야 뭐 사람이 오든말든... 아니 됬어요, 그냥, 알아서 잘 생각해보던가요!"
솔직히, 이렇게 말하고 나서 바로 후회됬다. 무녀가 고헤이라도 들고 쫓아올줄 알았는데, 다행히 그냥 토리이 아래에서 멍하니 나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내 말에 조금 충격을 느낀 것이었을까, 아니면 신사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귀찮거나 그런 걸까. 일단 빨리 마을로 돌아가야 될 것 같아 발걸음을 재촉하려는 찰나,
"오, 얼마전에 새로 들어온 친구잖아."
흑백색 모자의 금발마법사였다. 아니, 왜 하필 이런 타이밍에?
"안녕하세요,"
딱 그렇게 인사하고 가려했지만, 달아나려는 찰나 목덜미가 콱 잡히는 느낌이 들었다.
"어딜 그리 급히 가? 뭔 일 있어?"
제발 나를 붙잡지 마세요, 그냥 보내줘. 이 사람한테 방금 일을 털어놔봤자 좋은 일 없다는 것을 직감하여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자 마법사는 뭔가 알아챘다는 듯 나불대기 시작했다.
"너 혹시 새전함에 이상한 거 넣고 오는 길이냐? 하, 그게 재밌긴 하지. 나도 곧잘 그런 장난 치거든? 동전 대신 나뭇잎이나 작은 돌알갱이 넣고 가면 멍청한 무녀가 뒤늦게 알고서 지혼자 발광하는데, 그거 보는게 진짜 웃기다니까."
새전함에 잡동사니들은 다 니가 한 짓이었구나, 지 혼자 신난듯이 아무렇게나 뭐라 떠들어대는데 한심하기 그지 없다. 난 당신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적어도 남의 일에 피해를 주는 악취미를 가지고 있진 않은데, 이 사악한 마녀는 도대체... 게다가 분명 그 무녀의 친구로 알고 있는데?
"마법사님,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거 그만둬요, 제발 좀. 당신이 하는 일이 저 위에 사는 무녀에게 좋을거 하나 없다니까? 친구라면서요, 친구 좀 도와줘요. 본업이 뭔지도 까먹었잖아 저 사람. 저 꼬라지를 보고만 있을 거에요?"
흑백의 마법사는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내가 더 당혹스럽다는 걸 알고있을까, 당연히 모르겠지. 마을 밖의 인간들은 하나같이 이모양 이꼴인지 걱정된다.
"너 레이무한테 이상한 소리했지?"
"그게 이상한 소리면... 아니, 어이가 없어서, 아 몰라요, 무녀한테 전해주세요. 자꾸 그러면 그나마 가끔 하쿠레이 신사에 들리는 참배객들도 결국 다른 곳으로 빠질거라고..."
2.
다시 생각해봐도 어지간히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 어느 무녀가 모셔야 하는 신이 누군지 조차 모른다는건가? 하쿠레이 신사의 무녀라는 인간들은 전부 이 모양이었을까? 모시는 신을 무녀가 모른다면, 그럼 참배객들은 대체 누구를 향해 참배를 하는거지?
신사의 주신을 찾아 모시는 건 내가 할일은 아니지만, 그저 호기심에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곧바로 집에 가지 않고 어딘가를 들리기로 했다.
"어서오세요, 아 너였구나?"
친절하게 반겨주는 코스즈, 그녀의 가족이 운영하는 스즈나안 대본소에서는 오만가지 서적들을 다 다루지만 특히나 다른 곳과 차별화된 점은 바로 바깥세상에서 들어오는 책들이 많다는 것이다. 고전소설은 물론이요, 자서전이나 위인전류도 있고 경제학이나 물리학 같은 것을 다루는 전문서적들도 꽤 있다. 다만 요리가이드북 같은 종류는 안 보이는데 어쩌면 이곳에서 제일 쓸모있을 것들이 막상 들어오질 않으니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그래, 오늘은 뭐 찾으러 왔어?"
뭔지는 모르겠지만 보던 책을 주섬주섬 챙기며 그녀가 말했다.
"어... 혹시 신사에 관한 책을 볼 수 있을까?"
"신사? 신토에서 말하는 신사 말하는 거지? 아마 오른쪽 문 열고 앞으로 가서 두번째 책장에 있을거야. 한번 찾아보고 원하는게 없으면 나한테 말해."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다시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코스즈가 말한대로 들어간 방은 온갖 일본의 역사와 문화, 전통에 관한 책들이 즐비한 서재였다. 일본의 다도문화나 음식에 관한 이야기, 오래된 문화재와 유물에 관한 것, 전국에 널린 모든 온천들에 대한 여행가이드북도 있었다. 두번째 책장에는 그중에서도 특히 민간토속신앙에 관한 책들이 꼽혀있었는데,
"어디봅시다... '신토의 역사', '일본 민족의 종교 : 신토', '일본의 신화와 현대 사회', '제국주의시대와 신토'... 아니 이런 거 말고, '과거와 현재의 무녀', '신화로 알아보는 일본의 민간신앙'..,"
없었다. 온갖가지 책들이 다 있었는데 그중 내가 찾는 것 만은 기막히게도 없었다. 결국 별 소득없이 그 방을 나왔다.
"찾았어?"
"아니... 혹시 전국에 있는 신사들 정리해놓은 책 같은건 없어?"
"그건 잘 모르겠는데, 일단 나 따라와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나를 어딘가로 안내했다. 그녀가 이끄는대로 따라가서 본 것은 정리되지 않고 다다미 위에 수북히 쌓여 어지럽혀진 도서들, 어떤 것들은 아직 상자끈을 풀지도 않은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여기 이번에 들어온 책들이야. 한번 찾아보고, 여기 네가 찾는거 없으면 어... 나도 별수가 없겠네."
순간적으로 코스즈의 태도가 불친절하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서점에서 아직 진열도 안 한 책을 보여주겠나 싶어 생각을 고쳐먹었다.
정리된 책장과 달리 널부러진 책들은 종류가 참 가지각색이었다. 하나같이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것들로 가득했다. '파리코뮌의 72일'이라던가 '마오주의와 덩샤오핑' 같이 수상한 냄새가 나는 책도 있고, '세계 음모론 101선' 같이 제목부터 흥미로운 것도...
"아, 찾았다. 있긴 있네."
'전국 신사 가이드', 그 책의 제목이었다. 책을 한장, 두장 넘기자 곧바로 목차가 나왔다. 책은 전국을 9개 지방으로 나누어 각 지방마다 소재한 신사를 사전과 같은 방식대로 순서지어 소개하고 있었다. 물론 그 많은 수를 전부 기술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래도 하쿠레이 신사 정도면 실려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목차를 훑었다.
"홋카이도지방... 12쪽,"
없었다.
"도호쿠지방... 66쪽,"
마찬가지로 없었다. 간토, 주부지방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사실 바깥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신사를 찾고있는건 아닌가 싶었지만, 그런 걱정이 심화되려는 찰나에 나는 그 이름을 간사이지방에서 찾을 수 있었다.
"は... は... 하쿠레이... 아, 찾았다. 교토현 교토시 기타구 소재?"
어쨌거나 분명 존재하는 신사였다. 환상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국에 사이교지 신사만 수백개인것처럼 이 하쿠레이 신사도 설마 이름만 같은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 결국 주고쿠, 시고쿠, 규슈, 오키나와지방까지 전부 살펴봤지만, 다행히 전국에 딱 하나 있는 이름이었다.
"찾았어?"
드르륵거리는 방문 소리와 함께 코스즈가 들어왔다.
"아 찾았나보네, 무슨 책이야? 신사에 관한 거라고 했던가?"
코스즈는 내 왼쪽에 털썩 앉더니 책을 살짝 들어 제목을 확인했다.
"전국 신사 가이드... 갑자기 이런건 왜? 어 잠시만, 이거 하쿠레이 신사 아니야? 와, 여기를 바깥세계 책에 실린 사진으로 보게 되니까 좀 신기하네. 바깥에서도 하쿠레이 신사가 꽤 유명한가봐? 그럼 레이무씨도 좀 이름있는 무녀인가?"
"아니, 그건 아닐걸. 그 무녀는 환상향의 하쿠레이 신사를 관리하는거고, 바깥세계의 하쿠레이 신사는 또 다른 무녀가 거길 관리하겠지."
코스즈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내가 찾는건... 보자보자, 주신은 아이토유죠노히메? 누구지?"
그래도 신토에 관해 좀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마지막이 히메(ひめ)로 끝나는걸 보아하니 여신인데, 누구지?
"사랑과 우정의 여신이잖아!"
코스즈가 알아냈다는 듯이 소리쳤다.
사랑과 우정의 여신? 세상에, 말도 안된다. 그 무녀가 모셔야 하는 신이 사랑과 우정을 다루는 신이라고? 정말 매칭이 안된다고 해도 이렇게나 생뚱맞을 수가 없다. 전쟁의 신이나 폭풍의 신 같은 것일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누군지 모를 하쿠레이 신사의 신관이 무녀를 잘못 발탁한 듯 싶었다. 사랑이나 우정 따위와는 가장 멀리 있을 것 같은 인간이...
"근데 이건 왜 찾아본거야?", 코스즈가 책장을 이리저리 넘기며 말했다.
"그 무녀 있잖아, 자기가 누굴 모시는지, 그러니까 신사의 주신이 누군지도 몰라."
그 말을 듣고서 코스즈는 상당히 심각해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그래서, 뭐라고 좀 안좋은 소리하고 집에 돌아가는 참에 여기 들려서 찾아보려했지. 근데 사랑과 우정의 여신일줄은..."
"그래도 하쿠레이의 무녀님, 환상향 지킨다고 여러모로 바쁘게 지낸다고 그랬던거 같은데 말이야. 사람 해치는 요괴도 직접 퇴치해주고, 이변이 일어나면 달려가서 해결해주고."
그런 이야기는 여러번 들었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적어도 그러는 모습을 내가 본적이 없어서 믿을 수가 있어야지, 게다가 코스즈가 은근 팔랑귀라서 뭘 어디서 누구한테 주워들었는지 알수가 없다.
"야 코스즈! 여깄냐?!"
별안간 뒤에서 쾅하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듯한 코스즈는 등 뒤를 돌아보았다.
"마리사씨? 제발 문좀 살살 열어주세요! 간 떨어지는줄 알았잖아..."
마리사? 마리사라면 그 검은 모자 쓰고다니는 마녀 이름 아닌가?
"아니 그야... 이 시간에는 항상 여기 있을 애가 안보이니까 누가 납치라도 해간 줄 알았지. 근데 그 옆에 남자애는 누구냐? 처음 보... 아니, 너 아까, 신사 앞에 걔 맞지? 어 맞는거 같네. 너가 튀고 나서 레이무 찾아가봤는데 애가... 영 말이 아니던데? 갑자기 막 창고 뒤져보더만 '없어.. 없다고..'거리면서 자기 혼자 중얼거리는데 뭐라 말해도 외면하고... 너 뭐라고 했는데 레이무가 그 모양이 됬냐?"
역시 신사를 뛰쳐나오면서 했던 말들을 무녀가 외면하기에는 너무 뼈아픈 말들이었을까, 그런고로 그 흑백마녀에게는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다. 하쿠레이 신사에 모셔지는 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무녀와 나눈 짧은 대화와 나의 막말까지.
"그럼 아까 레이무가 찾던 건 옛날 신들의 그림이겠구나. 하긴 그러고 보니, 나도 하쿠레이 신사에서 모셔지는 신이 누군지도 몰랐네. 그래서 그 주신인지는 찾은 거야?"
코스즈가 책을 가져가 그 마녀에게 보여주었다. 내용을 더듬더음 짚어가며 주신이 누군지 알게 된 마녀는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무엇인가에 불쾌함을 느끼는 모습이라 해야할까, 혐오감을 느끼는 것 같다 해야하나.
"어, 그래, 굉장히 어울리지 않네, 레이무한테는."
마녀도 동의했다,
"와 진짜... 레이무한테 사랑과 우정의 여신? 이건 진짜 아닌거 같은데. 어쩌면 이거야말로 이변이 아닐까? 이변 이름은 뭘로 할래? 박려이변이 좋을까?"
또 지혼자 뭐라 떠들기 시작한 마녀를 붙잡으며 코스즈가 이야기했다.
"마리사씨, 이거 레이무씨에게 알려주러 가야죠. 자, 너도 빨리 일어나, 레이무씨한테 가서 전해주자."
"아니아니, 두사람만 갔다와..."
다시 거길 돌아간다면 살아서 나올지 의문이었다. 운이 좋으면 신사에 종속된 노비가 되는 수준으로 끝나려나 생각했다.
“야, 그거 찾은거 너지, 그치? 그러면 찾은 사람이 직접 가줘야지, 그리고 걔가 뭐라하든간에 어쨌든 자기 정체성을 되찾아준 은인인데 그렇게 못살게는 안굴거야. 생각보다 걔 뒤끝없어, 만약 뒤끝작렬이었으면 환상향에 요괴는 단 한마리도 빠짐없이 명계에 가있을걸?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같이 가주는데 괜찮지, 안그래?”
“어떻게 된게 당신이 하는 말은 설득력 있다가도 스스로 자폭해리네요.”
3.
가을이라는 계절, 찬란하게 피었던 꽃들은 다 저물고 푸르렀던 잎사귀들이 형형색색의 오색의 단풍으로 물드는 계절. 농부가 흘린 땀은 풍작의 결실로 보답 받게 되고, 매말랐던 감정도 넘치는 감성으로 충만하게 된다. 떨어지는 낙엽은 사람의 마음을 공허하게 만들지만, 언제나처럼 푸른 하늘 아래에 사람들은 일상을 살아간다.
하쿠레이 신사의 홍백무녀는 평소와 같이 낙엽이나 쓸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것이 가을철 신사관리의 주업무였다. 오전에 있었던 일로 꽤 충격을 먹었지만, 어떻게든 정신을 추스르고 평소대로 돌아간 듯 보였다. 다만 무녀는, 그 건방진 남자애가 했던 마지막 말은 잊지 못하고 있었다.
“어, 저기있다! 레이무씨!”
“레이무! 이제 좀 괜찮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 주홍색 토리이 아래에서 익숙한 사람 둘과 익숙해질지도 모를 사람 한명이 뛰어오고 있었다.
“레이무, 그거 찾았다!”
그 외침을 들은 무녀는 자신이 흑백의 마법사에게 무언가 빌려준 적이 있는지 곱씹어보았다.
‘마리사가 또 내가 빌려준 무엇인가를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건가?’
하지만 요 근래 빌려준 것도, 되돌려받지 못한 것도 없었다. 자신이 빌렸다가 돌려주지 않은 것은 쌓이고 쌓였지만.
숨을 헐떡이며 무녀에게 뛰어온 세 사람을 보고 무녀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잠시만, 그보다 쟤는 아까...”
“자, 네가 찾은걸 레이무한테 보여줘.”
흑백의 마법사는 대단한 재물이라도 찾아낸 것 마냥 말했다. 소년은 가지고 있던 책을 펼쳐 넘기더니 말없이 무녀에게 건냈다.
“도대체 뭐길래... 어, 이거 우리 신사잖아? 이 책 뭐야? ‘전국 신사 가이드’? 바깥세계의 책인가 보네, 우리 신사 바깥에서도 좀 유명한가? 근데 이거 보여주려고 그렇게 뛰어온거야?”
“그거 말고, 더 아래에.” 하찮은 벌레를 보는 표정으로 흑백 마법사가 말했다.
“더 아래?”
‘...에 위치해있다. 주신은 아이토유죠노히메로...’
언젠가 들어본 듯한 이름이 적혀있었다. 하쿠레이 신사의 주신, 아이토유죠노히메, 사랑과 우정의 여신, 그것은 신사의 정체성이었고, 곧 하쿠레이 레이무라는 이 신사의 무녀가 모셔야 할 분이었다.
“어...”
무녀는 곧장 뭐라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침에 자신에게 욕을 한 바가지 쏟아붓고 간 소년이 그사이에 자기도 잊고 있던 자기 신사의 주신을 찾아왔고, 분명 그것은 무녀라는 자신의 본업에 생명력을 불어준 은인에게 감사해야할 일이었지만, 동시에 그 일로 영 무기력해진게 소년이 괘씸한 부분도 있기 때문이었다. 인간들을 지켜주고 환상향을 유지해나가는데 큰 역할을 하는 자신이 마을의 한 소년에게 욕을 먹어야하는가, 그런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사랑과 우정의 여신? 레이무 자신도 놀랐다. 뭔가 자신과 상당히 괴리감 있어 보이는 분이었다. 옆동네 신사에서 숭배하는 신들은 땅도 만들고 하늘도 만들어내는데 뭔가 위엄없어 보이는 느낌도 있었다.
“레이무, 어때?”
“아, 아니 뭐. 어떠냐니?”
“네 직업의 정체성을 구해준 은인에게 감사하다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소년의 표정에는 여전히 불신이 가득했다.
“...고마워.”
그 한마디에 소년의 얼굴에 빛이 돌아왔다. 흑백의 마법사도 손뼉을 치며 감탄하는 제스쳐를 취했다.
“고마워, 너 덕분에 이제 내 본업에 충실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 좀 더 귀찮고 바빠질지도 모르지만...”
“이야, 네가 누구한테 고맙다는 말도 하고, 야야, 너 대단한거야. 레이무가 누군가에게 고맙다, 미안하다 그런 소리 하는 걸 듣는 것조차도 힘든데 말이야,”
“마리사, 내가 언제...”
“자자 조용, 너도 일단 레이무한테 사과는 해야겠지?”
소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조그만 목소리로 사과하는 소년에게 무녀는 아니아니 괜찮아―하고 말했지만, 마법사는 그 모습을 보고 뭐가 그리 웃기다고 웃어댈 뿐이었다.
“햐, 근데 솔직히 말해서 얘가 한 말 있잖아, 너한테 따끔하게 쏘아붙여서 그렇지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었어. 오히려 적중했다고 해야하나? 그 염마의 반나절짜리 설교도 레이무를 굴복시킬 수 없었는데 말이야.”
“너 진짜...”
또다시 다투기 시작한 둘을 내버려두고 대본소집 아가씨는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건 뭐야?”
“바깥세계 사람들이 그린 아이토유죠노히메의 그림이에요. 얼마 전에 ‘신토로 알아보는 일본의 민간신앙’이라는 책이 우리 대본소에 들어왔는데 거기 부록으로 들어있더라고요.”
“사랑과 우정의 신이라...”
“레이무, 뭔 생각하는지는 알겠는데 사랑이란 건 대단한거야. 땅과 하늘, 곡식의 풍요가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인간들은 이렇게 살아올 수 없었어. 그리고 너 정도면 우정은 확실히 알 수 있지 않을까?”
무녀는 침묵으로 답하였다. 아마도 그 물음에 대한 동의의 의사였을 것이다.
“이제 레이무씨도 제대로 무녀일 하는 건가요? 게다가 사랑과 우정의 신이면 생각보다 꽤 많이들 찾아올거에요.”
“네가 그토록 원하던 새전도 이제 많이 들어올걸.”
새전에 관한 이야기에 홍백의 무녀는 비로소 미소를 지었다.
네 사람은 참도로 걸어갔다. 정화의 의식 후 새전함에 새전을 넣고, 무녀가 종을 울리며 나머지 세 사람도 하쿠레이 신사의 주신에게 예를 다했다. 짧은 참배 이후, 무녀는 이전과 다른 느낌을 받았다. 잃어버린 걸 되찾은 느낌이었다, 갈길 없던 자신의 신앙심이 비로소 제 위치를 찾은 것 같았다.
“사랑의 신이면 뭐, 소년, 너는 뭐라고 빌었냐? ‘코스즈하고 이루어지게 해주세요~’라고 빌었어?”
키득거리면서 소년에게 장난치는 흑백의 마법사였지만,
“잠시만, 너 왜 귀가 빨게지냐?”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 이게 아닌데, 코스즈가 되게 싫어하겠다 야...”
레이무가 무표정으로 대본소집 아가씨를 가리켰다. 고개를 푹 숙이고 어쩔 줄 모르는 모습,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흑백의 마법사는 이리저리 고개를 흔들었다.
“와... 이건 좀.. 예상도 못했는데...”
“확실히 좀 골 때리는 일이네... 그리고 왠지 좀 짜증나.”
“퇴치해야하나?”, 홍백의 무녀가 어느새 가져온 고헤이를 들고 말했다.
곧이어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신사 위로 부적의 탄막이 펼쳐졌다.
어쨌거나 하쿠레이 신사는 잃어버렸던 중요한 무엇인가를 되찾을 수 있었다. 무녀의 신앙심도, 신사의 정체성도 말이다. 그만큼 하쿠레이 무녀는 이전과 같이 태평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제 홍백의 무녀는 진정한 무녀로써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끊이지 않을 참배객들의 행렬이 무녀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다.
“야 마리사 근데, 거지 같은 위치가 여전히 문제잖아.”
“이제 그건 별로 상관없어. 사람들은 있지, 사랑을 이룰 수 있다면 목숨도 걸거든.”
그렇게, 오늘도 가을철 환상향의 하루가 지나간다.
주제 정하는데 8일, 시간에 쫓겨 반나절만에 썼습니다.
그리고 신의 이름이나 책의 이름은 전부 급조해낸거니까 혹시 검색해서 찾아보시지는 마셔용
다른분들에 비해 확실히 부족할거 같은데 봐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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