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기분이 나쁘지 않은 날이다. 가을은 기분 나쁜 날이 거의 없다. 시원한 날씨, 먹을 것이 가득한 계절, 그리고 아름다운 단풍. 무엇 하나 부족하지 않은 완벽한 계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은 날도 아니다. 어제도 가을이었고, 그저께도 가을이었다. 매일매일이 똑같은 날인데 오늘이라고 해서 특별히 좋을 것도 없다.
“잘 잤어?”
“응...”
잠이 덜 깨 쓸데없는 잡생각에 빠진 나를 깨운 것은 동생 미노리코의 아침 인사였다.
동생은 거의 항상 나보다 먼저 일어나 아침 식사 준비를 한다. 오늘도 아침부터 집안 가득히 퍼지는 차의 향기와 달콤한 고구마 냄새는 자연스럽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식탁으로 향하게 만든다.
“자, 오늘 신문이야.”
뜨거운 차를 홀짝이며 마시고 있던 나에게 미노리코가 완성된 요리와 함께 신문을 건네주며 말했다. 신문은 구독한 적이 없는데도 항상 집 앞에 놓여 있다. 평소라면 눈에 띄는 사진 몇 장만 보고 내다 버렸을 신문이지만 오늘은 조그마한 사진에 글 몇 줄만이 적힌 기사 하나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라이브 공연..?”
“악기 연주회를 한다나 봐. 산에 사는 녀석들이 아닌데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 공연한데.”
“흐음...”
미노리코도 평소엔 신문을 읽는 정도가 나랑 비슷하다. 그런데도 이 기사의 내용을 이미 봤다는 건 서로 관심 가는 부분마저 비슷했던 것 같다.
“보러 갈래?”
내 표정을 읽었는지 미노리코가 먼저 제안을 던졌다. 마침 공연 장소도 그리 멀지 않다. 가을이 시작된 지 한참이 지난 지라 이미 산의 단풍도 거의 다 칠해 마땅히 할 일도 없었다. 매일 지루하게 앉아서 차나 마실 바에야 가끔은 이런 공연을 보러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미노리코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대신 고구마요리를 입안 가득히 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와~ 의외로 많네.”
공연 장소에 도착했을 땐 이미 수 많은 캇파와 텐구들이 모여 공연에 열광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저마다 술병을 들고 온 걸 보면 라이브 감상보단 술잔치가 목적인 것 같았지만. 목적이야 어쨌든 관객이 많으니 공연 분위기는 한창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언니, 좀 더 가까이 가서 보자.”
“그래.”
낯선 광경이었다. 요괴의 산에서 라이브 공연이라니 당연히 낯설다. 산에서도 신이나 다른 요괴들이 음악을 연주하는 정도는 본 적 있지만 이렇게 자연과 나무가 가득한 산 한복판에서 귀가 저릴 정도의 시끌벅적한 음악이 울려 퍼지는 건 아마 처음일 거다.
가까이에 가서야 알 수 있었지만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연주자들은 전부 츠쿠모가미들이었다. 각자에게 주어진 악기를 자신과 한 몸이나 다름없게 연주하는 걸 보니 모두들 한때 악기였던 게 분명하다.
상당히 여러 악기들이 모여 있었다. 산에서는 볼 수 없었던 낯선 모습의 악기들도 상당히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당연 맨 앞에서 드럼을 연주하는 츠쿠모가미였다. 빨간 머릿결을 휘날리며 힘차게 드럼 스틱을 내리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보고만 있어도 힘이 샘솟는 것 같았다. 드럼을 한 번 내리칠 때마다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고 그 소리와 함께 내 마음도 함께 울렸다.
그 음악이 마음에 들었다. 아니, 음악보다는 연주하는 츠쿠모가미들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각자 저마다의 개성이 살아 있으면서도 서로의 화합이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조화롭다. 나는 한동안 말없이 공연을 감상했다. 캇파와 텐구는 술에 취하고 나는 공연이 끝날 때까지 그 광경에 취해 빠져들었다.
“제법 괜찮았지?”
“응. 멋있었어.”
공연은 생각보다 금방 끝났고 우리 두 사람은 아쉬움을 뒤로 한 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연주자들이 인사를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오고 난 뒤에도 대부분은 그 자리에 남아 술잔치를 이어갔다. 당연히 우린 그 자리에 낄 생각이 없었다. 아침부터 그런 복잡한 자리에 낄 바에야 집으로 돌아가 차라도 한 잔 더 마시는 게 나았다.
“잠깐, 거기 너희들!”
뒤에서 누군가가 다급하게 우릴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발걸음을 멈춘 나와 미노리코는 거의 동시에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릴 부른 사람이 누군지 그 특이한 복장 때문에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분명 무대에서 드럼을 연주하던 츠쿠모가미. 무대에서 인사를 마치고 내려온 게 조금 전인데 벌써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제법 급하게 뛰어왔나 보다.
“후... 따라잡아서 다행이네. 설마 여기까지 와서 술 한잔도 안하고 돌아갈 줄은 몰랐어.”
츠쿠모가미는 이마의 땀을 쓰윽 닦으며 말했다.
“우린 저런 술잔치는 별로거든. 그나저나 방금 전 무대는 굉장했어.”
“응. 대단했어.”
나는 멋진 연주를 보여준 그녀에게 극찬을 아끼지 않고 싶었지만 갑작스럽게 만난 사이에 떠오르는 칭찬은 별로 없었다.
“그래. 좋게 들어주었다니 다행이네.”
츠쿠모가미는 무심한 듯 그렇게 말하더니 몇 걸음 더 다가와 나와 미노리코를 번갈아 가며 천천히 훑어봤다.
“우, 우리한테 할 말이라도?”
“아, 혹시 내가 생각하는 게 맞나 해서. 아무래도 이런 관객은 처음이란 말이야. 캇파도 아니고 텐구도 아니고. 인간일 리는 없고. 그렇다면 너희들...”
츠쿠모가미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나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물었다.
“신인가?”
“그래. 신이야. 나는 풍작의 신. 언니는 단풍의 신.”
질문은 나에게 했지만 대답은 미노리코가 했다. 츠쿠모가미가 얼굴을 너무 가까이 들이대는 바람에 바로 대답을 못했기 때문이다.
“좋아좋아. 역시 신문에 내길 잘했어. 오늘 우리가 산에서 공연하기로 한 건 기분전환도 있지만 신을 만나고 싶어서였거든.”
“우리를? 왜?”
의외였다. 그토록이나 열정적인 공연을 하길래 음악 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을 줄 알았다. 게다가 신을 만나러 왔다니. 한눈에 봐도 신에게 공물을 바치거나 하는 걸 좋아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신은 뭐든지 할 수 있잖아. 특히 너. 단풍의 신이랬지? 우리랑 같이 활동해보지 않을래?”
츠쿠모가미는 나를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말했다. 하지만 내게 손가락보다 먼저 다가온 것은 그녀의 말이었다. 함께 활동해보자는 그녀의 말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나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나? 나랑 공연을?”
“아아, 물론 같이 무대 위에 서자는 건 아니고. 우린 음악원들로만 구성되다 보니까 무대의 연출이나 퍼포먼스 같은거엔 부족하거든. 네가 여러 가지 색으로 단풍에 그림을 그려서 우리의 무대를 꾸며주는 거야. 그럼 우리도 네 작품을 음악으로 표현해주고. 그런 식으로 같이 활동하자는 거지. 어때? 서로 좋지 않겠어?”
“그건 안돼.”
신나게 자신만의 상상을 펼치던 그녀의 기대에 나는 딱 잘라 대답했다. 너무 칼같이 거절한 탓인지 그녀는 살짝 놀란 표정이었지만 그 제안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건 당연히 안 되는 일이니까.
“왜?”
“언니는 단풍의 신이거든. 네가 생각하는 그림의 신 같은 게 아니야.”
“상관없어. 단풍에 원하는 색을 칠해주기만 하면 돼. 무대에서 뿌려주면 좋을 정도로 알록달록하게. 우린 그 단풍을 배경 삼아서 공연을 하는...”
“그것도 안돼.”
츠쿠모가미의 얼굴이 한껏 찌푸려졌다.
“그러니까 왜?”
목소리의 톤이 아까보다 높아졌다.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따지듯이 묻는 것만 봐도 그녀가 지금 화가 났다는 것쯤은 간단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신이니까... 신은 자신이 맡은 역할을 다해야 해. 하늘의 신은 하늘을 다루고, 땅의 신은 땅을 다루고. 단풍을 단풍 색으로 칠하는 신은 다른 색은 칠하면 안 돼.”
나는 츠쿠모가미가 당연히 내 말에 납득할 줄 알았다. 그것이 신의 존재 이유니까. 하지만 내 말을 듣던 그녀는 이해가 가지 않는 듯 턱을 손으로 집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진지한 얼굴로 나에게 다시 물었다.
“다른 색을 칠하면 어떻게 되는데?”
“다른 색은 안돼. 가을은 단풍의 계절이야. 사람들은 가을의 아름다운 단풍을 보고 싶어해. 내가 맘대로 다른 색을 칠하면 사람들은 실망할거고 그럼 사람들은 나를 신앙하지 않을 거야.”
그녀의 얼굴은 한층 더 찌푸려졌다. 그녀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해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겨우 그런 이유로... 못한다고?”
그녀가 나에게 한 걸음 더 다가오며 말했다.
“뭐야 그게! 너희들은 신이라며. 신이라는 녀석들이 인간이 시키는대로 밖에 하지 못하나?”
그녀의 윽박지르는 듯한 말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녀가 내뿜는 분노에 압도당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니, 분노 때문이 아니다. 말 때문이다. 그 말은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다들 인간은 신의 뜻대로 살아간다고 말한다. 하지만 신들은 다들 어렴풋이 알고 있다. 현실은 반대나 다름없지 않은가. 신은 인간의 신앙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신앙을 얻기 위해선 인간의 뜻대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신앙을 먹기 위해선 복종할 수 밖에 없다. 상사의 명령에 따르는 텐구처럼. 부모의 말대로 따르는 아이처럼. 그리고 마치...
“하아...”
그녀는 깊게 숨을 내뱉으며 이내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보았다. 그녀의 경멸하는 시선에 나는 본능적으로 눈을 돌렸다. 그녀의 눈을 피해 생각했다. 그녀가 납득할 만한 답을 찾아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가는 도중, 그녀는 내가 애써 외면하던 한마디를 나에게 내리꽂았다.
“도구네.”
“...”
정적이 흘렀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태평한 척 말을 쥐어짜보려 했지만 지금 입을 열었다간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오는 걸 막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자, 잠깐! 너 말이 심하잖아!”
미노리코가 내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나 같은 겁쟁이와 달리 말을 꺼낼 용기는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 이상 그녀의 시선 아래서 납득할 만한 답을 찾아낼 자신은 없었으니까.
“왜. 틀린 말 했어? 너희들은 도구잖아. 인간들을 만족시킬 만한 도구.”
“...”
나는 계속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내 앞에 서서 나를 막아주는 동생의 등 뒤로 숨어버리고 싶었다. 그런 나에게 질렸다는 듯이 그녀는 다시 한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곤 이번엔 오히려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너희랑 같이하겠단 말은 취소할게. 우리 악단은 이제 도구가 아니게 된 녀석들만 받거든.”
그렇게 말한 뒤 츠쿠모가미는 그대로 뒤돌아 손을 흔들며 가버렸다.
언제 잠들었던 거지? 밖을 보자 벌써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낮에 츠쿠모가미를 만난 그 장소로부터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와 이불에 몸을 파묻은 이후 줄곧 잠만 잤었나보다. 식탁엔 미노리코가 준비해 둔 농작물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생각해보니 점심도 먹지 않았다.
오랫동안 자느라 찌부둥해진 몸을 간신히 일으켜 기지개라도 펴 보았다. 여전히 기운은 나지 않는다. 식욕도 없다. 술에 취한 다음 날의 아침처럼 머리는 계속해서 지끈거린다. 평소 생각이 많아질 때면 안정을 주던 아카시아 꽃잎의 향기도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시원한 가을바람이라도 맞으면 머리가 맑아지지 않을까 생각에 몸을 움직여 보았다. 몇 걸음을 걷자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걷지 못했다. 벽을 짚고 중심을 잡고서야 겨우 제대로 걸어 문을 열고 나올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나오자 가을 내내 바닥에 떨어져 내린 단풍들이 지면 전체를 한가득 뒤덮어 어느새 발목 높이까지 쌓여 있었다. 한 발을 내딛자 발은 수북히 쌓인 단풍 사이로 푹 꺼진다. 다음 걸음도, 그다음 걸음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운 단풍잎 속에 발을 담근 채 마치 강을 건너듯이 해쳐 걸어나간다. 우리 집 근처는 산 전체에서 단풍이 가장 많이 피기로 소문난 곳이다. 그리고 단풍이 가장 아름답게 물드는 곳이기도 하다. 당연한 얘기다. 단풍의 신이 사는 집이 바로 옆이니까.
그렇다. 나는 신이다. 인간들의 소망에 의해서 태어난 단풍의 신. 오로지 떨어지기 직전의 잎을 아름답게 칠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절대 바꿀 수 없다.
나는 치마를 살짝 들어 말라 비틀어진 잎으로 뒤덮인 돌 위에 걸터앉았다. 어느덧 해가 질 시간이 다 되어 산 전체는 내가 칠한 단풍과 같은 색으로 붉게 물들었다. 늘 그렇듯 가을 산의 노을은 아름다웠다. 매번 변하지 않는 아름다운 색 그대로였다.
바닥엔 알록달록한 색의 낙엽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빨간색, 노란색, 붉은색, 노르스름한 색, 빨갛고 노란색...
“다 거기서 거기구나.”
언제나 다양한 색들을 칠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보니 하나같이 틀에 박혀있는 색뿐이었다. 그 틀이 무엇인지 이제는 안다. 인간들이 좋아하는 색. 인간들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색. 인간들이 나에게 신앙을 바치는 색. 언제나 그런 색들만 칠해왔다. 신은 도구다. 인간들에 의해 태어나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도구.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였다. 한없이 바닥을 향한 시야 속에 뭔가 이질적인 색이 눈에 띄었다. 바닥을 가득 뒤덮고 있는 울긋불긋한 단풍색 사이로 보인 것은 녹색의 단풍잎이었다. 혹여 잘못 본 건가 싶어 낙엽들을 파헤치고 들춰 보았지만 역시 칠해지지 않은 녹색 그대로였다. 이렇게 떨어질 정도로 오래된 단풍인데도 색이 그대로인 걸 보면 색을 칠하는 가을 내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잎인 것 같았다.
나는 아직 물들지 않은 단풍에 손가락을 얹어 조심스레 색을 입혀갔다.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능숙하게. 단풍은 내 손길이 닿는 곳마다 붉은색으로 물들어갔다. 붉은색이지만 중간중간에 노란색이 섞여 단풍은 한층 더 아름다운 모습을 보였다. 꺼지기 직전 타오르는 불꽃처럼 잎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그야말로 가을의 상징이라고 할 수도 있는 아름다운 색이었다. 그리고 그 색은 어제도 칠한 색이었다. 전날에도, 그 전날에도, 작년에도, 10년 전에도, 100년 전에도. 아니. 이게 아니다. 츠쿠모가미의 연주는 이런 색이 아니었다. 한결같이 요괴의 산 전체에 울려 퍼지던 그런 평온한 음악이 아니었다. 이렇게 모두가 원하던 색이 아니었다.
나는 그토록 아름답게 칠했던 단풍의 색을 지워 다시 녹색으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이번엔 하얗게. 단풍의 색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하얗게 칠했다. 하얗기만 하니 마냥 심심하다. 이번엔 그 단풍에 붉은 점을 새겨주었다. 육각형의 붉은 점을 가진 하얀 단풍이었다.
나는 멍하니 앉아 그 단풍만을 바라보았다. 난생처음 보는 단풍의 색이었다. 평소 칠해왔던 색보다 예쁘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독특하고 왠지 모를 매력에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마치 오늘 아침 그 츠쿠모가미의 연주처럼.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기뻐 보이는 표정이다. 연주가 힘들지언정, 그다지 환호받지 못할지언정, 그 순간만큼은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한 표정이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눈앞에 있는 커다란 단풍나무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 나무의 잎에 손이 닿는 순간, 나는 내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색을 칠한 것을 느꼈다. 이건 대체 무슨 색인가. 내가 이런 색을 꺼내든 적이 있던가. 그런 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내 눈앞의 세상은 내가 집어든 색과 같게 물들고 있었다.
무언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쿵. 쿵. 쿵. 쿵. 산짐승인가? 아니, 그렇기엔 너무 가볍다. 애초에 좁은 우리 집 계단을 비집고 들어올 만한 산짐승이 있던가? 아니, 우리 집 계단을 저렇게 뛰어들어올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다.
“언니이...!”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도 누군지 바로 알 수 있는 목소리다.
“언니! 언니! 언니!”
나는 베개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어 올리고 덮고 있던 이불만을 꽁꽁 뭉쳐서 끌어안은 채로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저렇게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말았으니 어차피 다시 잠들기는 글렀다.
“시끄러워... 아침부터 왜 그러는데?”
“큰일이야! 지금 텐구들이 잔뜩 몰려들어서... 아니 그 전에 우리 집 앞의 나무 전체가 잎이 보라색이야! 저거 언니가 한 거 맞지?”
“내가 한 건 맞지만 보라색은 아닌데? 분홍색과 연보라색의 중간 정도야.”
“그런 건 상관없어!”
미노리코는 답답하다는 듯이 발을 동동 구르고 팔을 허공에 마구 휘저으며 말했다.
“텐구들이 사진을 왕창 찍어대고 있다고! 저 나무들이 신문에 실려서 사람들이 보게 되면 어쩔 거야?”
“글쎄...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미노리코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왜 그런지는 안다. 지금의 내 행동은 나 스스로도 놀랄 만한 행동이니까. 색이 다른 나무들이 신문에 실리는 게 왜 문제인지도 안다. 사람들은 늘 보던 색의 단풍을 원한다. 평소와 다른 색의 단풍이 피면 사람들은 가을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가을을 꾸며주던 신을 향한 신앙도 줄어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난 점점 힘을 잃게 된다. 난 신앙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신이니까.
창문 밖을 보니 미노리코가 말한 대로 텐구들이 잔뜩 몰려와 평소와 다른 나무의 색을 찍어대고 있었다. 어젯밤에 칠한 건데 하루아침에 저렇게 몰려들다니. 먹이만 보면 우르르 몰려드는 까마귀들답다.
나는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나 옷장에서 단풍잎과 같은 색의 후드티를 꺼내 입었다. 날씨가 추운 날에 입기도 하지만 대체로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을 때 단풍 사이에 섞여들 만한 위장을 목적으로 입는다. 오늘처럼 기삿거리에 목마른 텐구들이 잔뜩 몰려든 날에 인터뷰라도 요청받았다간 보통 귀찮아지는 게 아니다. 나는 후드티의 모자를 푹 눌러쓰고 텐구들이 나무에 한눈 판 사이 조심스레 빠져나갈 생각으로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다녀올게.”
“어, 언니? 어딜 가려고? 아침은?”
“안 먹을게. 늦게 돌아올 테니까 기다리진 마.”
생각해보니 어제도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 배고프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몸에 기운은 넘치고 발걸음이 가볍다.
늘 그렇듯 오늘도 단풍의 색을 칠하러 간다. 하지만 평소와는 다르다. 이미 이번 가을의 단풍은 전부 칠했지만 이걸로 끝낼 순 없다. 나는 미노리코의 걱정 어린 목소리를 뒤로 하고 문을 열고 집을 나갔다. 예상대로 텐구들은 나무에 몰려들어 사진을 찍어대기 바쁘다. 그렇다면 이제부턴 단풍의 색을 물들이러 갈 뿐이다. 이제부턴 내가 색을 칠할 시간이다.
최근 텐구들의 기사 내용은 거의 다 비슷하다. 색이 변해버린 가을 산. 지금까지 없던 최초의 단풍이변. 제정신이 아니게 된 가을 신... 전부 다 단풍의 색과 관련된 기사들 뿐이다. 그야 그럴 만도 하다. 평소라면 한참은 걸려야 칠할 수 있는 단풍의 색을 겨우 며칠 만에 잠도 안 자면서 바꿔버렸으니까. 지금 요괴의 산의 색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다.
어딜 가도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뒤덮인 산. 그런 건 며칠 전까지의 얘기다. 올해의 가을 산은 그렇게 평범하지 않다. 맑은 하늘색의 단풍도 있고 여름이라 착각할 정도로 녹색인 단풍도 있다. 길을 걷다 보면 이따금씩 새까만 검은 색의 단풍이 떨어지기도 한다. 떨어진 낙엽들 속을 잘 뒤져보면 특이한 무늬가 있는 잎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늬가 있는 잎은 너무 눈에 띄기 때문에 많이 만들진 않았지만 어쩌다 발견한다면 네잎클로버처럼 행운을 가져다 줄지도 모른다.
새롭게 모습을 바꾼 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당연히 좋지 않다. 사람들은 이전과 같은 단풍의 색이 줄어드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하였고 그 색을 칠하는 나를 향한 신앙도 크게 줄어들었다. 누군가는 대놓고 가을 신을 욕하고 다니기도 한다고 신문에 쓰여 있었다. 물론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몰라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다.
오늘 아침에는 전에 만났던 츠쿠모가미가 찾아왔다. 산의 단풍이 이상해졌다는 텐구의 신문을 읽고 바로 찾아온듯했다. 이번엔 정식으로 명함까지 가져와서 소개했다. 호리카와 라이코라는 이름에 옆에는 친절하게 드럼의 츠쿠모가미 라고도 적혀있었다. 소개가 끝난 후 첫 마디는 다양한 색으로 바꾼 내 단풍들이 마음에 든다는 것이었다. 산에 올라오는 길에 이런저런 색의 단풍을 주워왔는지 그것들을 내 앞에 내밀어 보이는 표정이 적잖이 뿌듯해 보였다. 이번에도 라이코는 내게 악단의 가입을 요청했다.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고 내가 무대를 꾸며주면 그들도 내 단풍을 음악으로 표현해주는 환상의 작품.
아쉽지만 거절했다. 음악과 함께하는 단풍도 좋지만 단체활동을 하게 되면 시간과 장소에 제약을 많이 받는다. 아직은 이 산에서 칠해보고 싶은 색이 너무나도 많다. 라이코도 이해한다는 듯 지도를 남기며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말했다. 음악 활동으로 많이 바쁜지 볼일이 끝나자마자 바로 돌아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기 전에 고구마라도 몇 개 챙겨줄 걸 하는 생각이 든다. 나 하나 만나겠다고 산까지 올라온 사람인데, 그리고 내가 변화할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인데 다음번엔 직접 찾아가서 좀 더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
“언니... 정말 괜찮아? 힘들어 보여. 몸도 많이 야위었고.”
작업에 지쳐 단풍나무 아래에 몸을 기대 쉬고 있는 나에게 미노리코가 다가오며 말했다.
물에 젖은 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손수 닦아주며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놓은 과일을 내 입에 들이댄다. 시끄럽고 참견이 많긴 해도 심성은 착한 동생이다.
“응... 괜찮아. 잠시 딴생각을 한 것뿐이야.”
말은 그렇게 했어도 사실은 알고 있다. 최근 나를 향한 신앙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신앙이 줄어들수록 몸은 약해지고 몸이 약해질수록 단풍을 물들이는 일은 힘들어진다.
하지만 여기서 낭비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가을이 끝나기 전 가능한 한 많은 색을 칠하고 싶다. 가을의 단풍은 무궁무진한 색을 품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늘 똑같지 않더라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잠시 따라와 봐. 보여줄 게 있어.”
나는 치마에 묻은 낙엽들을 털고 일어나 미노리코의 손을 잡고 내 작품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이건..?”
나와 미노리코의 눈앞에 형형색색의 단풍잎들이 펼쳐졌다. 분홍색과 노란색이 밝게 빛나면서도 화려한 색이 다양하게 섞인 독특한 색이었다. 다양한 색을 하나의 잎에 넣는 건 쉽지 않은지라 아직 미완성에 지나진 않지만 나름 화려하게 잘 칠해졌다고 생각하는 단풍나무 중에 하나다.
“예쁘다.”
미노리코의 칭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스스로도 예쁜 색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남에게 들은 기분은 또 색다르게 느껴진다.
“언니, 이런 걸 만들고 있었던 거야?”
“이거 말고 다른 것도 만들고 있지. 가을 산의 단풍은 셀 수도 없이 많으니까.”
등 뒤편에서 바람이 흘러들어오는 게 느껴진다.
“아, 눈이다!”
“눈?”
반대편에서 바람이 강하게 불어왔다. 뒤쪽에서 투명하고도 새하얀 단풍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려 시야를 뒤덮는다. 눈 결정처럼 하얗게 빛나는 단풍의 잎들이 눈앞을 가득히 뒤덮었다. 내가 칠했지만 떨어질 때 이렇게나 아름다울 줄은 몰랐다. 이토록 아름다운 광경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봄에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 어떤 가을에서조차도.
미노리코는 입을 벌리고 그 눈 결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보다 겨울과 눈을 훨씬 싫어하는 미노리코가 이렇게 눈을 오랫동안 바라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 모든 게 처음이었다. 색도, 계절도, 이 아름다움도 전부.
미노리코는 눈 결정의 단풍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그중에서 가장 눈부시게 빛나는 잎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나를 보며 가져가도 되냐고 물었다. 물어볼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아침이 밝았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상쾌한 가을바람이 나를 잠에서 깨웠다.
오늘은 기분이 좋은 날이다. 어제 칠한 색이 다르고, 오늘 칠할 색이 다르니 매일매일이 특별하지 않을 리가 없다. 하지만 오늘의 나를 한층 더 기분 좋게 만드는 건 동생의 변화 때문이다. 가을의 수명이 다해가고 수확 시기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동생 미노리코는 평소보다 몇 배는 바쁘다. 오늘도 아침 일찍 준비를 마치고 나갔는지 식탁에 음식만 차려져 있고 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미노리코가 바쁜 탓에 평소와 같이 호화로운 아침 식사는 없다. 오늘 아침도 요리가 아닌 삶은 농작물이나 신선한 과일들이 대부분이다. 나는 가장 가까이 있는 감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한입 베어 물자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분명 감자를 먹었는데 새콤달콤한 맛이 난다.
그래. 이것 때문이다. 최근 미노리코는 새로운 농작물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이미 수확 시기는 상당히 지났지만 이번 가을을 놓치면 내년까지 기다리게 되니 신메뉴 개발에 한시가 바쁜 모양이다.
나는 그 옆에 있는 처음 보는 모양의 과일을 집어 먹어 보았다. 이건 고구마와 포도를 섞은 맛인가. 그렇게 맛있진 않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맛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그건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농작물이니까. 평소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 맛의 아침 식사였지만 나는 무엇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식탁에 한가득 펼쳐진 각양각색의 맛을 전부 맛보고 평소보다 씁쓸한 맛의 차도 남김없이 마셨다.
다시 작업할 시간이다. 오늘은 붉은빛이 한껏 빛나는 단풍을 머리에 꽂았다. 옷은 평소보다 희게. 하얀 드레스에 연한 금빛이 감도는 느낌으로 정했다. 문을 열고 밖을 나오자 새하얀 단풍잎들이 바닥에 한가득 쌓여 있었다.
나는 하얀 구름다리 같은 단풍길 위를 걸어 푸른 나뭇잎 사이로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연분홍색의 작은 잎들이 주변에 휘날리며 봄날의 요정들처럼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춤춘다. 은빛 물결과 같은 색의 낙엽들이 바스락거리며 떨어지는 소리는 한여름의 시냇물 소리 만큼이나 맑고 청량하다. 붉은 단풍은 다른 색들 사이에서 더욱 붉게 보였다. 끝나가는 가을을 향해 자신의 존재를 내보이듯 평소보다 더욱 붉게 타오른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온다. 타오르는 불꽃에 바람이 불어 붉은 불꽃은 더욱 격렬하게 타오른다. 점점 거세지는 바람을 견디지 못한 잎들이 떨어져 흩날리기 시작한다. 그토록 격하게 타오르던 단풍잎들은 하나의 낙엽이 되어 땅을 등지고 살포시 눕는다. 대지의 색과 같은 갈색의 낙엽들이 그들 곁을 감싼다. 투명하면서도 연노란 빛을 내뿜는 얇은 잎들이 천상에서 내려와 한 줄기 빛처럼 넓게 퍼져나가 세상을 환하게 비춘다.
나는 그 모든 광경을 하나하나 눈에 새겨 넣었다. 모두 내가 칠한 색이다. 내가 만든 세상이다.
남들은 미친 짓이라고 말했지만 그 미친 짓은 나에게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춤추고 노래하는 자연, 발끝에서부터 솟구쳐 타오르는 전율. 보고 들리고 느껴지는 모든 것들이 살아 숨 쉬는 세계. 언젠간 알게 될 거다. 신이 더 이상 도구가 아니게 된 세계. 그런 세계를 보게 될 거다.
그리고 만약 내 동생이 이 세계를 포기하고 다시 도구로 살아가기를 정한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아니, 내 동생뿐만 아니라 다른 신들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아니아니, 신뿐만 아니라 요괴, 요괴뿐만 아니라 인간. 내가 앞으로 만날 모든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다른 이들을 만족시키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한가. 그들의 기대에 맞춰줄 필요가 뭐가 있는가. 나를 태어나게 한 존재 따위에게 맞춰 살아야 할 이유가 뭐가 있는가.
그딴 거 없어도 세상은 이렇게나 아름다운 색으로 가득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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