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햇살은 눈부시고 바람은 시원하다. 요정들은 떠들썩하고 그 소란에 흔들리는 풀들의 냄새는 향긋하다. 지나오던 길에 낮은 나무에서 딴 열매를 한 입 베어 무니 새콤달콤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진다. 왠지 모를 행복감에 가만히 서서 히죽 웃어버린다. 그러고 나서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목적하는 곳은 딱히 없다.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른다. 사실 어디가 됐든 상관없다. 정신을 차려 보면 항상 처음 보는 풍경들이다. 한참을 걸었을 것이라는 예상만 할 수 있다. 그런 것 치곤 까만 구두의 광택은 바래지 않고 있다. 검은 모자와 노란 셔츠, 초록빛 치마도 먼지 하나 묻어있지 않다. 하지만 이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러면 무엇이 중요한가? 지금은 저 멀리서 춤추고 있는 멘레이키가 눈에 들어온 것이 중요하다. 분명 재밌을 것이기 때문이다.
“코코로!”
무표정의 멘레이키는 춤에 열중한 듯 보인다. 빙글 한 바퀴 돌면서 본인의 키만한 언월도를 휙 휘두른다. 분홍빛 머리카락이 그 춤선을 따라 호를 그린다. 어쩐지 그리운 듯 아련하다. 그러다 다시 한 번 빙글 돌고, 언월도를 나를 향해 겨눈다.
“웬 놈이냐!”
경계하는 목소리의 멘레이키의 표정은 말투와 달리 조금의 변화도 없다. 그녀의 머리 우측에 걸친 가면은 어느 샌가 화가 잔뜩 난 붉은 한냐 가면으로 바뀌어 있다.
“노가쿠 연습 중이야? 멋진걸?”
멘레이키는 언월도를 거두고 말한다.
“네 녀석이군, 내 아버지의 원수!”
그리고 몸을 반 바퀴 돌린다. 그 후 다시 반 바퀴 빙글 돈 후 오른손에 쥔 부채를 나를 향해 활짝 핀다.
“나의 노가쿠로 이 원수를 갚겠노라!”
“대결이야? 재밌겠다!”
나는 뒤로 폴짝 뛰어 오른다. 그리고 멘레이키를 향해 커다란 탄을 날린다. 탄은 분홍빛이다. 그러나 멘레이키는 춤을 추며 여유롭게 나의 공격을 피한다. 나는 다시 한 번 하트 모양의 탄을 날린다. 멘레이키는 또 한 번 빙글 돌면서 탄을 피한다. 마치 나의 마음을 읽은 듯하다. 멘레이키는 단 한 번도 반격을 하지 않는다. 그저 나의 탄막들을 슬쩍 피할 뿐이다. 아름다웠던 몸짓들이 이제는 나를 놀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분한 느낌이 든다. 멘레이키는 별안간 움직임을 멈춘다. 이제 반격을 하려는 건가?
“오늘은 여기까지.”
이렇게 말하곤 나를 등지고 천천히 걸어간다. 멀어지는 멘레이키를 나는 가만히 지켜본다. 그저 멍하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아, 재밌었다!”
얼굴에 한 가득 웃음꽃이 피어오른다. 매일매일 즐거운 일만 가득해서 기분이 좋다. 나의 까만 구두는 다시 정해지지 않은 목적지를 향해 움직인다. 다음번에는 장미꽃을 피워내겠다고 다짐을 한다.
*
“오린, 사토리님은 좀 어때? 괜찮아지시겠지?”
울먹거리는 여인의 떨리는 목소리가 커다란 복도에 우울하게 퍼졌다.
“아직도 침대에 누워계셔. 그래도 앓으시는 건 좀 잦아들었으니 지금은 그냥 주무시고 계실 거야. 금방 괜찮아지실 거야. 울지 마.”
빨간 머리를 양 갈래로 딴 요괴 고양이가 울먹거리며 눈물을 닦고 있는 지옥 까마귀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위로하고 있다.
“그래도 사토리님, 저렇게 아프신지 벌써 며칠이나 됐고, 이대로 사토리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난, 난...”
“우, 울지 말래두! 나도 정말 슬프고 괴롭지만 금방 나아지실 거라니까? 뚝! 옳지, 옳지.”
지저의 옛 도시 안쪽에 있는 거대한 저택인 지령전은 얼마 전부터 우울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 원래부터 썩 활기 넘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지령전의 주인인 코메이지 사토리가 갑자기 앓아눕기 시작하면서 우울함이 한층 더 깊어진 듯하다. 그나마 지령전에서 시끌벅적하던 사토리의 애완동물들도 사랑하는 주인의 병으로 인해 슬픔에 빠져 있고, 주인으로부터의 명령이 없으니 지령전과 작열지옥터의 일들도 모두 멈춘 상태였다. 벌써 보름은 지난 것 같다. 하지만 지령전의 그 누구도 그들의 주인의 병의 원인을 아는 자가 없었고, 그들의 주인도 도저히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아까 전에 지상에서 이름 있는 도사를 찾아서 도움을 청했거든. 곧 올 거야. 와서 분명 사토리님을 치료해 줄 거야.”
지상은 얼마 전까지 종교가들의 싸움으로 소란이었다. 신앙을 모은다는 명목 하에 환상향 각지에서 일어난 종교가들 간의 싸움은 환상향의 인요들의 이목을 모으는 데 충분히 자극적이었다. 이런 소란과 열광의 도가니는 지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종교가들은 지령전에서도 신앙 모으기에 열중이었다. 오린은 난생 처음 지령전이 옛 도시의 사람들로 북적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난장판 속에서 환상향의 종교가들도 접하게 되었다. 오린은 그 때의 기억 덕분에 사토리의 병을 낫게 해 줄 위인을 점찍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위인을 떠올렸을 때 오린은 곧바로 지상으로 나가 그를 찾기로 결심했다. 이 넓은 환상향에서 얼마가 걸리더라도 반드시 찾아서 데리고 오리라. 그런데 위대한 사람치고는 너무 쉽고 빨리 만날 수 있었다. 지상으로 나와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인간의 마을 근처 오솔길에서 그가 양편에 키 작은 시해선 한 명과 초록 옷을 입은 망령 하나를 끼고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오린은 그를 보자마자 다른 생각도 할 겨를 없이 그에게 헐레벌떡 달려갔다. 그의 앞에 다다르자 오린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드디어 구원자를 만났다는 막연한 기쁨에 안도감이 차올랐다. 그리고 그를 올려다보며 입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나를 찾고 있던 것을 잘 알고 있다. 찾아 온 이유도 잘 알고 있지. 지령전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거라. 내가 가서 다 해결해주도록 하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저번 종교가들의 싸움에서도 이런 오만함이 맘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런 성격이 그의 능력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오린은 여러 번 감사의 인사를 하고 지나온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대체 언제쯤 오려는 걸까? 내가 사람은 제대로 찾은 게 맞겠지?”
지령전으로 되돌아 온 지 얼마나 됐을까? 도움을 청할 사람을 너무 성급하게 결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마저 들 때였다. 복도의 저편 어두운 곳에서부터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오래 기다렸다. 내가 왔으니 안심하거라.”
기다리던 그 도사가 빨간 안감의 커다란 파란 망토를 휘날리며 걸어왔다. 넓적한 판자를 양손에 쥐고 입을 가린 모습은 도도한 듯하지만 한편으로는 재수 없어 보이기도 했다.
“누, 누구냐!”
“오쿠, 경계하지 않아도 돼. 내가 부른 도사가 저 사람이야.”
“보아하니 너희들의 주인이 크게 아픈 것 같구나. 하지만 내가 약을 가지고 왔으니 걱정할 것 없다. 자, 너희들의 주인에게 나를 안내하거라.”
오린은 그녀의 말투가 맘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사적인 감정에 사로잡힐 때가 아니기에 순순히 그녀를 사토리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커다란 문을 열자 넓은 방안이 나타났다. 그리고 방의 끝에는 레이스로 장식된 침대가 놓여 있다.
“치료의 술을 시행해야 하니 문을 닫고 너희들은 물러가 있거라.”
“우리도...”
“불안해 할 필요 없다.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오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도사는 침대로 천천히 걸어갔다. 침대에는 분홍빛 머리의 어려보이는 여인이 잠을 자듯 누워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지령전의 주인이시여. 저는 토요사토미미노 미코라고 합니다.”
도사는 누워있는 사토리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미동도 없이 누워있던 사토리의 눈이 스르르 떠졌다. 그리고 조금씩 몸을 일으켜 앉았다. 미코는 사토리를 가만히 응시했다. 사토리의 눈빛에는 힘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와 빨간 촉수로 연결되어 있는 제 3의 눈은 반쯤 감긴 상태였다. 사토리는 맥이 빠진 시선을 미코에게로 향했다.
“당신은 충실한 심복을 두고 계시는군요. 주인을 살리기 위한 구원자를 애타게 찾는 그런 심복을요. 그리고 아주 정확하게 찾아냈죠.”
미코의 말에도 사토리는 반응이 없었다. 미코는 그런 사토리를 다시 한 번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 사실 저를 직접 찾아올 필요는 없었지만 말이죠. 저는 누군가의 욕망을 파악하는 게 특기라서요. 당신과 비슷하다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죠, 마음을 읽는 사토리 요괴여.”
사토리는 살짝 경련했다.
“하지만 지금의 당신은 마음을 읽는 능력이 온전하지 못하군요. 그렇지 않았다면 제가 이렇게 수다를 떨 필요도 없었을 테죠. 가엾은 자여. 당신은 누군가의 마음을 읽음으로써 항상 자신이 그들의 우위에 있었죠.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고 있으니, 당신이 깔보던 자들과 같은 처지가 되었군요. 자, 지금의 상황에서는 제가 당신 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습니다.”
미코는 조소와 같은 미소를 살짝 지었다.
“마음을 읽을 수 없는 사토리 요괴라... 모든 존재는 각자의 목적으로 존재를 유지하거늘, 당신은 스스로의 존재 목적을 스스로가 위협하고 있군요. 저는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의 욕망을, 당신의 마음을.”
“뭘...”
힘없는 목소리가 가녀린 작은 몸에서 울려 나왔다.
“뭘 안다는 거야.”
“당신은 사방이 어둠에 싸인 정원에 있어. 답답할 만도 할 텐데 도망쳐 나올 생각은 하나도 없는 것 같군. 정원을 가득 메운 장미꽃들이 그렇게도 사랑스러운가? 하지만 당신의 온몸은 그 날카로운 가시들 때문에 온통 상처투성이인걸?”
사토리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쥐고 몸을 굽혔다. 작은 신음이 세어 나왔다.
“가엾은 짝사랑이로군. 그 장미들은 어둠 속에서 잔상도 없이 파묻혀야 될 것들이거늘. 당신의 마음을 읽는 눈은 덧없는 그것들을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고 시야에 담아두려 애쓰고 있어. 마음도 없는 그들을 말이야.”
“나, 나한테... 뭘 하려는 거야?”
사토리는 숙인 몸을 힘겹게 살짝 들고 미코를 노려보았다. 미코는 드러난 사토리의 제 3의 눈에 시선을 뒀다. 제 3의 눈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마구 떨리고 있었다.
“아직 마음을 읽는 능력은 돌아오지 않고 있나 보군. 걱정 마, 나는 당신을 해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당신을 치료해 주기 위해 온 거니까.”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내내 신음하던 사토리가 소리를 질렀다. 외치는 소리는 문 밖에까지 새어나간 듯 했다.
“사토리 님? 사토리 님!”
사토리의 목소리를 듣고 문 밖에 있던 오린이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문은 잠겨 있어 그저 연신 두드릴 뿐이었다.
“사토리 요괴의 제 3의 눈은 마음을 읽는 눈이지. 마음을 읽는다는 것은 존재를 드러낸다는 것이고. 즉, 당신의 제 3의 눈은 존재하는 것들을 드러내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지? 무엇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지? 무엇을 그렇게 사랑하느냔 말이다! 당신의 존재는 무엇인가? 어째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주시하는 것이냐?”
“아, 아니야. 그 애는... 그 애는 존재해...”
“당신은 지금 알 수 없는 공포로 가득해. 그저 생긴 공포는 있을 수 없지만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공포로군.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떨게 만드는가? 그리고 그 속에 드러난 애틋한 감정은 무엇인가? 천하의 사토리 요괴가 미지의 원인으로 생긴 스스로의 트라우마를 이렇게까지 발현시키다니 가엾기 짝이 없구나. 이제 스스로의 존재의 목적을 회복하여 도(道)와 하나 되도록 하거라.”
미코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손에는 둥그런 환약이 놓여있다. 환약은 이내 밝은 빛에 싸여 공중에 떠올라 서서히 사토리에게로 다가갔다.
“아니야! 싫어! 안 돼, 안 돼!”
강렬한 빛이 사토리의 시야를 덮어버렸다. 주위는 고요 속에 파묻혔다.
*
수많은 소리들이 들려온다. 노랫소리,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 시끄러운 악기 소리, 싸움하는 취객들의 소리. 나는 붐비는 인파를 비집고 들어간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향하는 곳이 어딘지 궁금하다. 그 중심에는 높은 임시 누각이 놓여 있다. 그 위에서는 처음 보는 요괴가 춤을 추고 있다.
“웬 놈이냐! 네 녀석이군, 내 아버지의 원수! 나의 노가쿠로 이 원수를 갚겠노라!”
허공을 가르는 몸짓이 아름답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하얀 피부는 몽환적이기까지 하다. 춤선을 따라 휘날리는 분홍빛 머리카락은 그리운 듯 아련하다. 주변의 소음은 각기 따로 울려 퍼진다. 그럼에도 불협화음으로 하나 되어 이 공간을 메운다. 주변은 떠나가라 시끄럽지만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하다. 이 시끄러운 고요 속에서 드넓은 이 공간은 나와 저 춤추는 요괴 둘만 남은 듯 좁다. 이렇게나 좁은 공간인데 저 요괴는 나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딱딱한 무표정으로 춤만 출 뿐이다. 나는 그녀가 어쩌다 한 번이라도 나와 눈이 마주쳐 주길 바란다. 부디 나를 인지해 주길 바란다. 그녀의 기억 속에 내가 인식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분홍빛 머리카락은 다시 한 번 호를 그린다. 그러고는 잠에 빠지듯 서서히 하지만 빠르게 사라져간다. 이제 시야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의 희망은 없다. 이름이라도 알았으면 했는데. 무엇의?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지? 뭐 늘상 있는 일이니 신경 쓰지 말까? 정신을 차려보면 또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겠지.
“안녕, 꼬마야?”
*
문이 덜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방안에서 미코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너,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사토리님한테 뭘 한 거냐고!”
“걱정할 것 없다. 너희 주인은 그저 자고 있을 뿐이다. 곧 깨어나겠지. 그러면 다 치료되어 있을 것이다.”
오린은 미코의 말을 듣고 사토리가 누워 있는 침대를 들여다보았다. 사토리는 과연 자고 있었다.
“사토리님은 왜 앓고 계셨던 거죠?”
사토리가 안전한 것을 보고 안심하자 미코를 향한 오린의 태도가 유순해졌다.
“도가 흐트러져 있어서였지.”
오린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만물은 도에 속해있지. 그리고 만물은 자신의 목적으로서 도를 행한다. 만물의 목적이라 함은 그들의 존재를 발현함을 의미하지. 너의 주인은 자신의 목적을 스스로 져버리고 있었다. 존재자들의 마음을 드러내는 사토리 요괴의 목적을 말이야. 그녀는 알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더군. 이상한 점은 그것을 애틋해하고 있었다는 거야. 무엇이 그리도 애틋했는지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에게 적용시켰다. 사토리 요괴의 능력 중에서도 타인의 트라우마를 형상화하는 능력을 말이지. 하지만 어째선지 그 어떤 것도 나타나지 않았어. 여기서 자신의 트라우마를 드러내는 것을 멈췄으면 이상이 없었겠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자신의 공포를 주시했다. 존재자를 인식하지 않는 사토리 요괴라니! 그저 자신의 공포를 형상화하는 데에 쓰이게 된 제 3의 눈이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게 되니 자연스레 도는 흐트러지게 되고 그녀는 존재가 위험해지는 병에 걸리고 만 것이다.
나는 존재들의 욕망을 들을 수 있다. 너의 주인은 병중에서도 끊임없이 소리쳤어. 사라지지 않게 해달라고. 분명 흐트러진 자신의 도로 인하여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지 않게 해달라고 빈 것이겠지. 마침 그 욕망을 들은 내가 구원자로서 나타난 것이다. 자신의 공포를 형상화한다는 사토리 요괴의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제 3의 눈을 닫으려 하는 사토리 요괴도 들어본 적이 없지. 그럼에도 나는 이를 치료해내고야 말았지. 공포의 기억을 지우고 도를 안정화시킴으로써 간단하게 말이야!”
미코의 일장연설을 들은 오린은 모든 것을 이해하진 못했지만 사토리의 병을 이자가 고쳤고, 스스로를 크게 높이고 있다는 것만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하나의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면 그 공포의 원인은 뭐였죠?”
생각지 못한 질문을 들은 미코는 순간 당황한 듯 했다. 그러다 이내 얼버무리듯 입을 열었다.
“그, 분명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겠지? 어떤 이유로 우연히 트라우마를 형상화 하는 능력을 자신에게 사용하게 되었고,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니 두렵지 않았을까? 애틋한 감정은... 그래,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잖아, 안 그래?”
“아, 그런가요.”
오린은 뭔가 시원하지 않은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사토리가 나았다는 사실에 큰 안도감을 느꼈다.
“감사 인사는 안 해도 된다. 이런 일은 위인이라면 마땅히 해내야 할 일이었으니. 그럼.”
끝까지 오만함을 거두지 않은 채 미코는 발을 뗐다. 멀어져가는 미코를 한참 바라보던 오린은 미코가 복도 끝의 어둠으로 사라지자 한 걸음에 사토리에게로 달려갔다.
*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본다. 목부터 발끝까지 내려온 보라색 천과 흰 드레스를 입은 금발의 여인이 공중에 앉아있듯 떠 있다. 부채로 입을 가린 얼굴의 눈빛은 얕잡아 보듯 기분 나쁘다.
“누구야?”
나는 이 기분 나쁜 여인에게 정체를 묻는다.
“나는 상식과 비상식의 경계, 맑은 날에 쏟아지는 여우비, 환상과 현실에 발을 디딘 자, 삶과 죽음 사이의 황홀경, 파동과 입자를 구분하는 방정식.”
이상한 녀석이다.
“모든 경계를 다루는 존재. 환상향의 대현자, 야쿠모 유카리. 곧 환상향 그 자체.”
“뭐라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거든?”
이상한 여자의 표정이 살짝 찡그러진다.
“자기소개 끝났으면 잘 있어. 난 갈 거야.”
“갈 데가 어디 있다고 그러지?”
묻는 소리에 이상한 여자를 쳐다본다. 여자는 웃고 있다.
“너는 너의 처지를 잘 모르고 있나 보구나.”
“무슨 소리야?”
여자의 눈빛이 아까보다 더 날카로워진 것 같다.
“환상향은 현실에서 잊힌 것들이 모여드는 곳. 즉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존재하는 세계. 모순이 순리로써 작용하는 공간.”
“또 알아듣기 어려운 말 할 거지! 똑똑한 척, 잘난 척 딱 질색이야!”
“그런 환상향에서마저 잊힌 것들은 그저 존재하지 않는 것들. 그런데 너는 뭐지?”
뭔가 이상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올라온다. 왠지 듣기 싫은 말을 할 거 같다. 나는 귀를 양손으로 틀어막는다.
“너는 존재하지 않는 녀석이다. 존재하지 않는 녀석이면 존재하지 말아야지, 그런데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싫어, 싫어! 하지 마! 말하지 마!”
분명 있는 힘껏 귀를 막고 있는데도 소리가 들린다. 싫은 감각이 온몸과 생각을 뒤흔들고 있다.
“너는 누구지?”
아, 나는... 누구지...?
“대답해라! 너는 누구지?”
“나는... 나는...”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환상향은 정말 이상한 일들 투성이야. 인식조차 되지 않는 것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니.”
인식조차 되지 않는다고? 그럼 뭐지, 내가 여태껏 느껴온 것들은? 인식해온 것들은? 나는, 나는 분명 여기 있는데. 있고 느끼고 생각하는데, 나는 뭐지?
“자, 꼬마 아가씨. 이제 그만 사라져 주지 않겠어? 현실도 환상도 아닌 존재가 경계 사이에 끼어 있으니까 곤란한 일이 한 둘이 아니거든?”
“나는... 나는 존재해...”
“휴... 존재한다면 스스로를 증명해보지? 스스로를 증명조차 할 수 없으면서 존재한다고 말 할 수 있나?”
“나, 나는... 햇살이 눈부신 것도 느끼고 시원한 바람도 느껴! 요정들의 떠드는 소리도 듣고 향긋한 풀냄새도 맡는다고. 또 새콤달콤한 열매도 맛보고. 또...”
“그것들이 너의 존재함과 무슨 상관이지?”
혼란스럽다.
“네가 느낀 감각들, 그리고 생각들은 전부 너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야. 원인이 없는 결과는 존재하지 않지. 너의 그 감각들, 그리고 너의 존재한다고 느끼는 감정들은 모조리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나오고 다른 이에 의해 인식된 것들이야. 그러니까 너라는 결과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 아직도 모르겠어?”
“너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하는 거지?”
“존재하는 것들은 스스로의 목적에 의해 존재를 발현한다. 하지만 너에게는 그러한 존재 목적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누군가 정해놓은 목적에 따라 일시적으로 발현되었다가 사라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네 녀석한테는 냄새가 난다고, 남의 마음 속 어둠을 드러내는 악취미를 가진 녀석의 냄새가 말이야.”
“그, 그럼 넌 어떻게 나를 보는 거야?”
“유능한 조력자가 있거든. 그자가 너를 주시하는 눈빛의 방향을 특정해주는 덕분이지. 사실 나는 지금 너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애초에 너는 인식도 안 되고 보이지도 않는 녀석이니까.”
아, 그래. 이제 알겠어.
“이제 스스로를 깨닫거라. 그리고 사라져라!”
“이제 깨달았어, 내가 누군지.”
“아니, 넌 존재하지 않는대두!”
“그래 나는 존재하지 않아. 하지만 존재하지. 누군가 봐 주고 인식해 주는 덕분에 나는 존재할 수 있었어. 미움 받는 것이 힘들었을 텐데도 끝까지 나를 지켜봐줬어. 덕분에 즐거운 일도, 슬픈 일도, 고마운 일도 정말 많았는데... 언제까지고 두려움에 움츠리고 있을 수는 없지. 그래, 그가 나를 사랑해 준 만큼 나도 그를 사랑하니까.”
“혼자 뭐라고 떠드는 걸 보니 깨닫긴 깨달았나 보구나. 그럼 사라지렴, 눈을 감은 사토리야.”
나는 자세를 똑바로 하고 그 자리에 서 있는다. 몸이 서서히 희미해져 간다. 끝내 장미꽃을 피우지 못한 것은 아쉽다.
“자신의 트라우마를 형상화하려 하다니, 정말 지저 녀석들의 취향은 이해할 수 없다니까.”
“아, 맞다 유카리!”
“응?”
거의 다 희미하게 흩어진 몸으로 나는 말한다.
“너는 네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어?”
*
사토리는 건강을 되찾았다. 우울하던 지령전도 사토리의 애완동물들이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덜 우중충한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건강해진 사토리는 자신이 병들어 누워있는 동안의 기억이 남아있지 않았다. 사토리의 애완동물들은 그저 그녀가 기억도 못할 만큼 많이 아팠었기 때문으로 여겼지만 오린만은 그것이 미코가 사토리를 괴롭히던 공포의 기억을 지웠기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오린은 사토리의 병에 대한 풀리지 않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대체 그 공포의 기억은 무엇이었을까? 시원하게 풀리지 않는 고민을 안고 오린은 뒤뜰로 향했다.
“에구! 세상에 큰일났네! 잠깐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이렇게 돼다니! 사토리님한테 혼나겠다, 어쩌지!”
지령전 뒤뜰에는 사토리가 아끼는 정원이 있다. 사토리가 아프기 전에는 매일 그녀의 애완동물들이 깔끔하게 관리를 했다. 특히 그녀가 제일 아끼는 장미꽃밭은 사토리 본인이 관리할 만큼 사랑을 듬뿍 받은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초라하게 시들어 내팽개쳐진 꽃잎만이 정원을 덮고 있을 뿐이었다.
'제 2회 글알못 팬픽대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는 무심하게도 - 장기짝 (0) | 2020.07.05 |
---|---|
Qui, animi vi prope divina - 동프학선언 (0) | 2020.07.05 |
치르노는 치르노 일까요 - 촉촉한촉수 (2) | 2020.07.05 |
천하제일인 치르노 - ㅁㄴㅇ (0) | 2020.07.05 |
한식 - traditionalrock (0) | 2020.07.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