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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회 글알못 팬픽대회

천하제일인 치르노 - ㅁㄴㅇ

 


평소라면 잠들 고도 남았을 새벽, 치르노는 책상에 앉아 붓과 씨름 중이었다.

 

"아니.... 이게 아냐.... "

 

이미 수도 없이 붓을 집어던졌던 치르노는 또 한 번 붓을 집어던졌지만, 이내 마음을 다 잡고 다시 붓을 주웠다..

 

"여기를 좀 더 길게 늘리고..."

 

치르노의 붓 끝이 부드럽게 휘었다.

 

 

 

아무 것도 안 보여. 아무 것도 안 보여. 아무 것도 안 보여.

 

대요정이 신경을 쓰든 말든 치르노는 제 할 일을 했다.

 

그러니까, 대요정과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해오던 행동. , 앞머리를 쓸어 올렸단 뜻이다.

 

대요정은 결코,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대로 두면 자신이 알은 체 할 때까지 치르노가 저 짓을 반복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정말이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치르노 머리에 그건 뭐야...?"

 

그제야 치르노는 끊임없이 머리를 쓸어 올리던 손을 멈췄다.

 

", 눈치 챘어?"

 

치르노는 '天下' 이라고 적힌 띠를 이마에 두르고 있었는데, 왜 세 번째 글자인 ''만 한자로 적지 않았는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다이쨩도 알다시피 치르노는 최강이잖아?"

 

".......그렇지...?"

 

"그런데 혹시 치르노가 최강이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함부로 치르노에게 덤볐다가 다칠 수도 있잖아? 그래서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띠를 맨 거야!"

 

치르노가 엣헴하고 가슴을 펴는 모습을 보며 대요정은 제발 치르노의 기행이 여기서 끝나기를 기도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치르노.... 그냥 돌아가자... ?"

 

"괜찮아~ 괜찮아~"

 

기어이 치르노는 대요정을 끌고 태양의 숲으로 향했다.

 

태양의 숲은 대요괴 유카가 거주하는 곳.

 

대부분의 대요괴가 그렇듯이 유카 또한 본인의 요력만큼이나 자존심이 강했고, 따라서 허락 없이 자신의 땅을 밟은 둘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너희는 뭐냐?"

 

대요정은 유카의 눈을 마주치자마자 뱀 앞의 쥐처럼 몸이 굳어버렸으나, 치르노는 달랐다.

 

치르노는 대요괴 앞에서도 당당했다.

 

치르노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유카는 치르노가 대체 왜 제 이마를 까며 으스대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 번 더 물었다.

 

"니들 뭐냐고."

 

그녀로선 드물게도 인내심을 발휘한 것이지만, 치르노는 외려 본인이 답답한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아이 참~ 잘 보라니까!"

 

'天下'

 

유카가 한 '너희는 뭐냐'라는 질문에 치르노가 천하제일인 이라고 간접적으로 밝힌 것임을 유카는 알아채지 못했다.

 

사실, 알아챘어도 별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유카의 인내심이 끊어졌다.

 

치르노는 죽도록 처맞았다.

 

치르노가 당한 폭행은 실로 폭력적이어서, 만약 이 자리에 언제나 사고치는 요정메이드들 때문에 모든 요정을 증오하게 된 메이드장 사쿠야가 있었더라도

 

'아니, 그렇다고 왜 애를 때려요! 말로 해요! 치르노! 빨리 잘못했다고 빌어!'

 

라고 말하며 치르노를 감쌌을 것이다.

 

그러나 홍마관의 메이드장이 아닌 한낱 요정 중 하나에 불과한 대요정은 차마 유카를 말리지 못했다.

 

결국 대요정은 치르노가 처맞는 동안 벌벌 떨다가 유카가 기절한 치르노를 던지며 '데리고 꺼져.'라는 말을 내뱉고 나서야 드디어 끝났다는 안도감을 느끼곤 치르노를 부축해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치르노는 대요정의 간호에도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대요정은 밤새 치르노를 간호하다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다시 일어났을 땐 치르노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치르노? 치르노!"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유카가 나타났을 때까지만 해도 대요정은 치르노가 이번 기회에 다소 쓴 경험을 하고 정신을 차렸으면 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

 

치르노는 맞아 죽을 뻔하고 친구가 맞아 죽을 뻔 하는 동안 자신은 그 폭력이 자신을 향하지 않기만을 바라며 숨죽이고 있었다.

 

"치르노! 치르노!"

 

치르노를 찾아 온 저택을 뛰어다닌 대요정은 마침내 치르노를 찾았다.

 

절대 치르노가 갔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서재에서 치르노는 대요정이 들어온 것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집중하고 있었다.

 

"치르노? 뭐하는 거야?"

 

대요정은 치르노가 무엇을 하는지 보러 가까이 다가갔다.

 

치르노에게 평소의 아이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요정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치르노는 붓을 들었다.

 

치르노의 붓 끝이 부드럽게 휘었다.

 

치르노의 '天下''天下'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