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낯선 곳에서 끌려가고 있었다. 끌려간다기보다는, 가마 위에 모셔져 가고 있었다. 모두 절박한 표정이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래 봐야 소용없을 줄 알면서도, 그래도 혹시나 하는 희망으로, 그녀를 모시고 어디론가 향했다. 그녀는 그저 가마 위에 모셔진 채로, 묶인 채로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절박한 행렬은 이윽고 멈췄다. 앞서가던 사람들은 양쪽으로 나란히 갈라지고, 가마는 그에 맞춰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녀 앞에는 호수가 나타났다. 넓지도 않고, 딱 보기에도 깊어 보이지도 않는 호수.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그녀가 막연히 알던 호수의 모습과는 어딘가 달랐다. 이내 그녀는 깨달았다. 이 호수는 원래 이렇게 얕은 호수가 아니라고. 수면 근처에 드러난 진흙과 수목의 경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 호수는 가물었다.
아니, 그녀를 이 가마에 태워 모셔온 행렬 전체가 가물었다. 뭐가 그리 절박한지 이제 분명해졌다. 이 사람들은 물을 원했다. 곧 바닥을 보일지도 모르는 호숫물이 아니라, 우중충한 하늘에서, 햇빛조차 새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물을 원했다. 그 물이 논과 밭을 적시고, 호수와 저수지를 다시금 채우기를 기원했다.
덕분에 그녀는 자신이 왜 모셔져 왔는지도 알았다. 그들은 비가 내리기만을 바라고 잠자코 앉아있을 수 없었다. 간절한 희망을 담아 뭐라도 해야 했다.
그 희망을 담아, 절박함을 담아 가마가 점점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이제 가마 앞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가마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지탱해줄 사람이 없는 가마 앞쪽이 아래로 크게 기울었다. 그리도 가마에 묶인 그녀의 몸이 호숫물로 갸우뚱 향했다.
호수는 가물어가긴 했어도, 아직은 가마를 삼킬 정도로 충분히 깊었다. 가마에 묶인 채로 모셔져 온 그녀도 당연히 삼켜버릴 것이다. 애초에 그러려고 모셔온 것이었다. 호수가 이 선물을 받고 기뻐하라고, 아니면 이런 더러운 것을 받고 화를 내라고. 호수에 사는 용신이, 기뻐서든 화가 나서든, 어느 쪽이라도 좋으니 비를 내리기를 원하면서. 그런 간절한 기원을 담아, 그녀의 몸이 가마와 함께 호숫물에 곤두박질쳤다. 안이 비치지 않는 호숫물이 바로 눈앞까지 닥쳐오면서, 그녀의 시야가 캄캄해졌다.
“아.”
그리고 마에리베리 한은 길 한복판에서, 온몸이 홀딱 젖어버렸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란 게 이런 거네.”
마에리베리 한의 친구, 우사미 렌코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히히 웃으면서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메리를 바라봤다. 메리는 아직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실감이 나지 않아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금빛 머리카락과 두 손에서는 뚝뚝 물방울이 떨어져 그녀가 서 있던 아스팔트 바닥에 얼룩을 넓혔다. 그녀가 입고 있던 보라색 블라우스는 아직도 물기를 내보내지 못하고 두툼하게 부푼 채로 땅을 향해 늘어졌다.
“내가 지금까지 겪은 일 중에, 최악, 아니 한 세 번째쯤 최악이야.”
메리는 마치 해초처럼 말려버린 앞머리 사이로, 질렸다는 눈빛을 내뿜으며 한탄했다.
“그 앞의 두 개는 뭔데?”
“그보다 좀 더 나쁜 건 키메라 때문에 입원한 거. 가장 나쁜 건 렌코를 알게 된 거.”
정작 렌코는 그 말에 그냥 태평하게 웃어넘겼다.
“하하, 메리는 이런 상황에서 농담이 심하네.”
“고작 그런 반응을 보이니까 최악이란 거야.”
메리가 옷의 허리 부분을 한웅큼 붙잡고 쥐어짜자 물걸레처럼 물이 주르륵 짜여 나와 바닥을 적셨다.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며 인상 찌푸리는 메리와는 반대로 렌코는 구름 한 점 안보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실실 웃었다.
“메리가 별안간 비명을 지르길레 내려다보니 이런 꼴일 줄이야. 정작 하늘에는 물 한 방울 안 떨어지고. 저수지가 바로 옆에 있는 것도 아니고.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된 걸까?”
“남의 불행을 그런 식으로 소비하다니 진짜 못된 거 알지?”
“그래도 궁금하잖아. 어쩐지 멍해보이더라니. 걷는 와중에 어디 넘어갔다오기라도 한 거야?”
렌코의 질문에 메리는 쓰고 있던 모자를 쥐어짜면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넘어간 건진 모르겠지만, 보긴 했어.”
“봤다고?”
“무슨 가마 같은데 타고 있었다고 해야 하나. 묶여 있었던 것 같아. 사람들이 그 가마를 들고 나를 어느 호수인지 저수지로 데려갔어.”
“계속 나랑 이 길 걷고 있었으면서 무슨 소리야.”
“설명하기 어려운데 아무튼 그랬어. 길을 걷는 와중에 가마에 묶인 채로 그런 광경이 보였어.”
“그래서 가마가 젖기라도 한 거야?”
“아니, 가마째로 호수에 그냥 던져넣었어.”
“아하, 가마째로 호수와 함께 빠져버리면 젖는 것도 당연하지. 재미있네. 안 그래도 우리도 호수로 가고 있던 길이니까.”
“우리가 가는 호수가 내가 본 호수인지는 잘 모르겠어. 내가 빠진 호수는... 가마가 잠길 정도긴 했지만 꽤나 가물어있어 보였거든. 딱히 이 근처에 가뭄이 심하다는 소식은 없었잖아?”
“애초에 그 호수의 소식 자체를 찾아볼 수가 없었지. 우리도 건너건너 전해 들은 이야기로 알게 됐으니까.”
“그래. 그렇게 유명하지도 않은데... 사람들이 많이도 호수로 향했어. 게다가 옷도 뭐랄까, 전통 복장이었지.”
“전통 행사에 일부러 옛날 복식을 차려입는 경우도 있지만... 여기서 아직 그런 행사를 한다는 이야기도 없었지.”
“그러니까 아마 내가 본 그 호수는... 우리가 찾던 호수는 아니라고 생각해. 가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명하지도 않으니까.”
아직도 옷에서 물을 쭉쭉 짜내는 메리의 결론에 렌코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댔다.
“글쎄, 어쩌면 우리가 찾던 그 호수가 맞을지도 몰라. 그 호수는 맞지만,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호수는 아닌 거지.”
“그게 무슨 소리?”
“그러니까 메리가 본 호수는, 우리가 찾아가는 호수는 맞지만 지금은 아니었던 거야. 옛날에 이 근처에 가뭄이 닥쳤을 때의 그 호수를 본 거지.”
“내가 시간을 넘어서 그걸 봤다고?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걸.”
“어차피 메리가 우주까지 갈 수 있는 것도 실감이 나지 않는 건 마찬가지잖아.”
메리는 심통이 나긴 했지만 렌코 말이 맞긴 했다. 메리에겐 꿈과 현실의 경계도 모호하고, 종종 알지도 못하는 장소까지 직접 다녀오기도 했다. 거리의 제약도 그런 식으로 무시할 수 있다면 시간도 무시하는 건 이상할 게 없었다. 메리는 렌코의 그런 설명을 납득하면서도 여전히 불쾌한 기색을 숨기진 못했다.
“시간을 넘는 건 좋아. 왜 굳이 이렇게 젖어야 하는 건데?”
“죽순을 가져온 거랑 다를 것도 없잖아.”
“기분이 달라. 기분이. 젖는 건 불쾌하다고.”
“요즘 세상에 이렇게 젖을 일도 없잖아. 일기예보만 잘 챙겨보면 비 맞을 일도 없고. 정취 라고 생각하면... 응?”
메리에게 그렇게 훈수를 늘어놓던 렌코는 머리에 쓴 챙 모자에서 이상한 진동을 느끼고 말을 끊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이번에는 뺨에 뚝,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감각을 느꼈다.
“엥? 뭐야? 하늘이 언제 저렇게 어두워졌지?”
렌코의 눈에 들어온 건 조금 전까지는 화창했지만 어느샌가 회색 구름으로 가득 찬 하늘이었다. 그리고 렌코는 자신이 느낀 감각이 뭔지 깨달았다. 그 순간 이번엔 렌코의 코에 뚝, 물방울이 떨어졌다.
“어디 그 정취, 느껴보시지 그래?”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마찬가지로 깨달은 메리는 히죽 웃으며 렌코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 어차피 메리는 젖을 대로 젖었다. 이제 와서 또 젖는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
“아니, 일기예보에선 이런 말 없었는...”
그리고 후두둑, 비가 쏟아져 내렸다. 렌코도 메리만큼이나 홀딱 젖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으아, 홀딱 젖어버렸네.”
우사미 렌코는 이제 와서 그래 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한탄했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검은 머리에서는 뚝뚝 물방울이 어깨와 발치로 떨어져 내렸다. 그녀의 옷과 신발도 이미 물을 잔뜩 머금고 있어서 더 젖을 것도 없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아, 우산이 얼마나 대단한 문명의 이기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아. 하나만 있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우사미 렌코의 뒤에서, 마찬가지로 온몸이 홀딱 젖은 마에리베리 한, 렌코식으로 줄여서 메리가 한탄했다. 어깨 앞까지 내려오는 그녀의 금발도 빗물에 쭈글쭈글해져 평소의 찬란함 같은 건 찾아볼 수도 없었다. 머리카락은 그나마 양반이었다. 물기로 가득한 옷은 몸에 착 달라붙어 남들이 보기에도 남사스럽고, 입고 있는 입장에서도 피부에 닿는 느낌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비가 쏟아지기도 전에 젖어있었다는 사실은 별로 위안이 되지도 못했다.
“아니, 이렇게 쏟아져 내리는 데 제대로 예측도 못 하고, 일기예보 괜찮은 거야? “
“일기예보 이전에 그냥 폭우 자체가 이상해. 그렇게나 맑더니 갑자기 이게 뭐야? 내 생각엔 렌코가 괜히 심술궂은 이야기를 해서 그래.”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비를 어떻게 내리게 해. 그보다는 메리 네 쪽이 더 의심스럽지 않아? 길 한복판에서 갑자기 젖었잖아. 비도 갑자기 내리게 하지 못할 건 뭐야?”
메리와 렌코는 그렇게 티격태격하면서 각자의 옷을 쥐어짰다. 어찌나 물이 많이도 흘러나오는지 발판의 난간을 넘어 거실까지 순식간에 흘러넘칠 것만 같았다.
“그래도 근처에 이런 호텔이 있어서 다행이었지. 원래 여기서 하루 묵을 예정이긴 했지만. 아아, 그래도 좀 더 싼 데서 묵을 생각이었는데. 이게 무슨 봉변이람.”
“지금은 얼마가 들더라도 깔끔한 데서 씻고 싶어. 내가 먼저 씻어도 되겠지, 렌코?”
“잠깐, 메리가 씻는 동안 나는? 나도 지금 엄청 찝찝하거든?”
“정 못 기다리겠으면 호텔 직원한테 부탁해봐. 남는 방이라도 빌려줄지 모르지. 아, 가방 안은 안 젖었겠지? 여벌 옷까지 젖었으면 탐사고 뭐고 몰라. 그냥 돌아갈 거야.”
메리가 그렇게 잠시 가방 안으로 한눈을 팔던 사이, 그 옆에 있던 렌코는 먼저 후다닥 거실로 올라가더니 그 옆에 열려있는 욕실로 재빠르게 들어갔다.
“메리, 미안! 얼른 씻을 테니까!”
“잠깐! 렌코! 비겁하게!”
“정말 미안!”
선수를 빼앗긴 메리는 원망스럽게 소리쳤지만 렌코는 젖은 옷을 이미 욕실 안에서 벗어 거실로 내던지고 있었다. 그렇게 내던져진 옷에서는 여전히 빗물이 줄줄 새어 나와 거실바닥을 적셨다. 제아무리 절친한 사이라지만 그 새삼 남사스러운 꼴에 메리는 시선을 돌리고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메리가 찝찝한 기분으로 한숨만 내쉬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 방 아닌가? 프론트에선 여기랬는데.”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알아들은 메리는 얼굴만 보일 정도로 문을 살짝만 열고 답했다.
“아, 여기 맞아요. 벌써 오셨나요? 정말 감사해요. 선생님 아니었으면 어찌 됐을지...”
메리는 문 너머의 손님에게 그렇게 허겁지겁 감사 인사를 전했다. 문틈 너머 짧은 머리카락의 성숙한 여성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
“아, 아직 못 씻었나 보네요.”
“네, 친구가 먼저 씻기로 해서...”
“어라, 따로 씻어요? 워낙 친해 보여서 같이 씻을 줄 알았는데.”
메리는 상대방의 못된 농담에 웃지도 못하고 얼굴이 한층 더 붉어졌다. 안그래도 렌코도 그렇게 남사스럽게 행동하는데 이런 농담까지 듣다니. 그래도 상대방은 렌코와 달리 조금 농담이 심했다는 자각은 있는지 멋쩢게 웃으며 사과했다.
“아, 미안해요 미안. 워낙 친해 보여서. 너무 못됐죠 나?”
“아니에요. 저흴 도와주셨는데... 여기까지 태워주지 않으셨다면 정말 어찌 됐을지...”
짓궂은 농담을 들었지만 메리는 진심으로 그 여성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비가 쏟아지는데 어디로 피해야 할지 몰라 도로에서 갈팡질팡하던 차에 우연히 차를 타고 지나가던 그 여성이 도와주겠다고 제안했다. 그 제안이 아니었다면 둘은 아마 아직까지도 빗속을 정처 없이 헤매고 있을 터였다. 그 여성은 자신의 목적지는 어딘지 밝히지도 않고 바로 이 호텔까지 데려다주고는, 빗물에 젖은 차 시트까지 처리하고 메리와 렌코를 친절하게도 확인하러 올라온 것이었다.
“그 빗속에 사람이 있으면 누구라도 그랬겠죠. 너무 신경 쓸 것 없어요. 그나저나 아직 못 씻었으면... 나도 바로 옆 방 빌렸는데, 내 방에서 씻을래요? 나는 젖진 않았으니까.”
“아, 아뇨. 그렇게까지 해주실 건...”
메리는 상대방의 계속되는 호의에 당황해서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물론 메리도 마음만 같아선 당장이라도 옆 방 욕실로 뛰쳐들어가고 싶었지만, 렌코처럼 경박해 보이고 싶진 않았다.
“에이, 괜찮아요. 그렇게 오래 있으면 감기 걸려요. 기껏 이런 시골까지 와서 아프면 쓰나.”
메리는 핑곗거리를 더 떠올려서 거절해보려 했으나, 바로 그 순간에 뒤쪽의 욕실에서는 경쾌한 샤워기 물줄기 소리가 들려왔다. 렌코는 지금 이 순간에도 혼자서만 따뜻한 물줄기로 몸을 데우고 있다는 사실에 메리의 마지막 남은 심리적 방어선마저 무너졌다.
“그럼, 부탁드려도 될까요?”
메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이미 문을 활짝 열고 있었다.
“이야, 정말 마침 지나가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됐을지. 우린 정말 운이 좋다니까요, 그렇지 메리?’
“이런 폭우를 맞는 상황을 운이 좋다고 할 순 없을 것 같은데.”
메리의 신랄한 반응에 옆에서 듣던 나츠키가 깔깔 웃었다. 메리와 렌코는 샤워를 마치고 옷까지 다 갈아입은 채로 방바닥에 앉아 맥주캔을 홀짝이고 있었다. 그 둘의 은인인 여성도 이것도 나름 인연이라며 자연스럽게 합류해, 세 여성은 예정에 없던 간소한 술잔치를 벌이게 되었다. 자연스러운 분위기 덕에 메리와 렌코는 자신들을 도와준 여성의 이름이 나츠키라는 것, 그녀도 이 근처에서 볼 일이 있어 지나가던 차에 폭우 속에서 난처해하던 메리와 렌코를 만났다는 것까지 듣게 되었다.
“그럼 둘은 왜 여기까지 온 거죠? 관광? 이 근처에 볼 게 많긴 하지.”
나츠키의 질문에 메리와 렌코는 서로를 멋쩍은 눈으로 바라봤다. 나츠키가 말한 대로 이 근처에는 이런저런 관광명소가 있었고, 이런 호텔이 자리 잡은 것도 그런 곳을 찾아오는 관광객들 덕분이었다. 하지만 둘은 그런 관광객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관광객은 가지 않는, 잘 알려지지도 않고 기이한 장소를 찾아다니는 괴짜들이었다. 아직 그런 장소에 남아있는,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없는 결계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괴짜들. 그러다 보니 아무에게나 여행 목적을 대놓고 밝히기는 어려운 처지였다. 자칫하다간 이상한 짓을 하러 온 외지인들로 의심을 사기 쉽상이었으니. 나츠키는 그런 둘의 미묘한 반응을 보고는 사정을 어느 정도는 눈치챈 것 같았다.
“아하, 말하기 곤란한가? 그럼 됐고요. 나도 피차 말하긴 곤란한 처지니까.”
“곤란하다고요?’
분명 곤란하다는 뜻은 캐묻지 말라는 뜻일 텐데, 렌코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렇게 되물었다. 나츠키는 그런 렌코의 엉뚱한 반응이 우스운지 깔깔 웃었다.
“아아, 어차피 여기 사람도 아니니 괜찮을까? 사실 이 근처에 뭘 좀 버리러 왔거든요. 주민들이 그런 걸 좋아하겠어요? 그러니 함부로 말하면 안 되지. 아니, 그런데 이렇게 술술 말하고 있네. 내 정신 좀 봐.”
나츠키는 그렇게 말하고는 맥주를 한 모금 더 넘기며 깔깔 웃었다. 너무 호탕한 태도라서 메리는 그녀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렌코는 그녀의 말은 곧이곧대로 믿는지 다른 질문을 더 던졌다.
“버린다고요? 이 근처에 뭘 버릴 만한 데가 있나요? 아니면 혹시... 관광 명소...?”
“아아, 관광명소는 아니고요. 관심이 있어요? 의외네. 혹시 그쪽도 뭘 버리러 온 건 아니죠? 그럼 라이벌인데.”
“아뇨, 아뇨. 그럴 리가요. 그런 나쁜 일은 안 합니다. 아니, 나쁜 일은 아닌데.”
렌코는 너무 적극적으로 부인을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나츠키의 목적을 나쁜 일이라고 말했다는 걸 깨닫고 허겁지겁 변명을 늘어놓았다. 나츠키는 렌코의 그 당황하는 꼴이 우스운지 또 깔깔 웃었다. 아무래도 짓궂기로는 나츠키 쪽이 렌코보다는 한 수 위인 듯했다.
“아, 친구가 재밌네요. 같이 다니면 즐겁겠어.”
나츠키가 메리를 슬쩍 바라보며 말했지만 메리는 입술만 살짝 비죽였다. 아마 메리가 렌코의 제멋대로인 면모 때문에 이래저래 고생한다는 걸 알면서도 한 말일 터였다. 나츠키는 그 정도면 충분히 재미를 봤는지 가볍게 웃으면서 렌코의 질문에 답했다.
“뭐, 당연히 관광명소는 아니고요. 이 근처에 호수가 있거든요. 관광객들은 거의 모르고 이 근방 주민들도 별로 관심이 없는.”
“호수?”
메리와 렌코는 그렇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그 둘도 그 호수를 찾아 온 셈이었으니까. 나츠키는 그런 반응까진 예측하지 못했는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그 둘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짐작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랬구나. 이 근처에 호수는 거기뿐이니까... 나랑 똑같은 데를 가던 건가? 이런 인연도 다 있네요. 그런데 정말 별거 없는 호수인데. 특별히 갈 이유가 뭐가 있나요?”
메리와 렌코는 어떻게 답해야 할지 서로 눈빛으로 의견을 교환했다. 어차피 상대방도 그 호수를 찾아가는 길이었고, 목적지도 들켰으니 굳이 구차하게 변명을 해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결국 메리는 자신들이 여기까지 온 이유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단, 결계 이야기는 빼고.
“그 호수, 유독 날씨가 변덕스럽다고 해서요. 뭔가 특별한 게 있나 해서 확인해보려고요.”
“아, 우리는 그런 특이한 현상을 취미차 찾아다니는 동아리거든요. 하하.”
렌코는 의심을 좀 덜 사려고 했는지 변명 아닌 변명을 중간에 끼워 넣었지만, 메리 입장에선 오히려 더 수상쩍은 콤비로만 보일 것 같았다. 정작 나츠키는 둘의 설명에 흥미가 있었는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거기가 날씨가 확실히 변덕스럽긴 했죠. 하지만 호수 근처는 다 그런 것 같기도 한데. 가봐야 실망하지 않겠어요?”
“실망하는 것까지도 동아리 활동이라서요.”
메리의 대답에 나츠키는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친구랑 같이하는 데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할까. 그래도 의외네요. 아마 이 근처에서도 그 호수는 거의 기억하는 사람이 없을 텐데.”
나츠키의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사실 메리와 렌코는 호수의 소문은 우연히 듣고 이 지역까지 온 건 좋았지만, 정작 이 근방에서는 아무리 수소문을 해도 별다른 이야기를 더 들을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주민은 그런 호수가 근처에 있는지도 잘 몰랐고, 그나마 존재 정도는 아는 사람들도 뭐 그런 걸 다 찾아다니냐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결국 둘은 이상하리만큼 이 근방에 대해 부정확한 지도를 따라 호수를 찾아 헤매다가 폭우를 홀딱 맞는 본변을 당한 것이었다.
그 와중에 렌코는 갑자기 깨달았다. 둘이 이 근방에서 만난 사람들 중 유일하게 그 호수와 연관이 있는 사람은 나츠키 뿐이었다. 나츠키는 이 근처 주민도 아닌 것 같은데, 대체 어떻게 그 호수에 대해 알고 있는 걸까. 나츠키는 렌코의 눈빛만으로 그 의심을 읽어냈는지 하하 웃으며 나름의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게 말이죠. 사실 나도 이 근처에서 살았거든요. 그 호수 이야기도 그래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고. 막상 돌아와 보니 호수를 그래도 알던 사람들은 다 어디론가 떠나거나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 뭐야. 너무 허무하더라고요. 그런데 오늘은 이렇게 그 호수를 찾아온 사람도 만나고. 인생이란 정말 알 수가 없지 뭐야.”
“그럼 그 호수에 대해서 좀 아시겠네요?”
렌코의 질문에 나츠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제 이 근방에 사는 사람들보다는요. 딱히 그쪽이 원하는 이야기일진 모르겠지만. 얼토당토않은 이야기거든요.”
“그런 얼토당토않은 이야기 때문에 온 거지만요.”
나츠키는 메리의 그런 반응이 재밌는지 히죽 웃었다.
“아아, 역시 그런 쪽이었나. 사실 정말 옛날엔, 이 근방에서 꽤 중요한 호수였다네요. 농업용수를 거기서 많이 얻어서. 그런데 어느샌가 이 근방 농가는 다 밀려나고, 그나마 관광으로 지역이 생계를 유지하면서 호수는 관심 밖...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심한 꼴이 된 거죠. 여기까지는 그냥 정상적인 이야기이고...”
나츠키는 묘하게 뜸을 들이더니, 마치 대단한 비밀이라도 털어놓듯 낮은 목소리로 소곤댔다.
“그 호수에, 사실은 용이 살았대요.”
“용?”
메리와 렌코는 갑자기 규모가 커진 이야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둘이 조사한 바로는 그 호수는 그렇게 대단한 전설이 있을 정도로 큰 편도 아니었다. 그러니 근처에 다른 관광 명소들이 각광받는 와중에도 호수는 소외당하는 것도 당연했다. 솔직히 용은 고사하고 거대 뱀이나 살만한 호수인지도 의문일 정도였다.
“역시 조금 우습죠? 아마 이 근처 날씨가 워낙 변덕스러워서, 이 호수에 용이라도 사는 게 아니었을까 사람들끼리 농담이라도 했던 게 아닐까요? 이런 식의 구전이야 항상 그런 자연 현상과 관련 있으니까.”
“농담치고도 조금 생뚱맞은걸요.”
“너무 그러지 마, 메리. 나는 꽤 스케일이 커서 좋은 걸.”
메리는 렌코의 속 편한 반응에 따끔한 눈총을 줬지만 정작 렌코는 재밌는 이야기를 들어서 만족했는지 즐거운 표정으로 술을 넘기고 있었다. 메리는 그 와중에 나츠키의 이야기에서 아직 빠진 부분이 있다는 걸 깨닫고 물었다.
“그 호수에 뭘 버리러 간다고 하셨죠. 뭘 버리러 가시는데요?”
메리의 질문에 나츠키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그건 아직은 비밀. 사실은 말하기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호수 갈 생각, 아직 있어요? 그렇담 내일 나랑 같이 가요. 내가 길도 알고, 차도 있으니까.”
나츠키의 친절한 제안에 메리와 렌코는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분명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얼씨구나 좋다고 받아들일 만한 제안이었지만, 그 둘은 거기서 어떤 활동을 하게 될지, 어쩌면 활동 이상의 것을 체험하게 될지 몰랐다. 나츠키는 분명 그 호수에 대해 많이 알고 있고, 메리와 렌코에게 도움을 많이 줬지만 아직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은 제3자였다. 그 묘한 거리감을 느낀 나츠키도 별수 없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제안을 살짝 뒤로 물렀다.
“어쩔 수 없죠. 난 내일 아침에 갈 거니까 그때까지 잘 생각해봐요. 정 나랑 가는 게 불편하면 그 시간을 피해서 가면 되고.”
“죄송해요. 말하기는 힘들지만...”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나도 나 나름 사정이 있고, 그쪽도 그런 걸 테니까.”
나츠키는 메리의 사과에 가벼운 손짓으로 답했다. 다행히도 나츠키는 둘의 그 미묘한 반응에 크게 실망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메리와 렌코가 안심하고 술을 마저 마시려던 차에, 나츠키가 갑자기 다시 말을 꺼냈다.
“아, 그래도 하나만 확실히 해줄래요? 대단한 건 아니지만.’
“뭘요?”
“내일, 따로 가더라도 나보다 먼저 가진 말아요. 호수가 어디인지는 내가 다녀오고 나서 정확히 알려줄 테니까. 그 정도는 약속할 수 있죠?”
메리와 렌코는 분위기에 휩쓸려 서로의 의견도 나누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차를 타고 다녀올 나츠키보다 일찍 다녀오기도 어려웠거니와, 그녀의 제안을 이미 거절한 뒤였던지라 또 서로 불편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상한 약속이었다. 왜 굳이 그녀가 먼저 다녀와야 한다는 것일까. 렌코는 결국 이번에도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직접 물었다.
“혹시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저희보다 꼭 먼저 가야 할.”
“흐응, 피차 비밀이 있는 법이잖아요?”
그 짓궂은 한 마디에 렌코는 뭐라 더 추궁할 수가 없었다. 메리와 렌코도 나츠키에게 함께 가기 곤란한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녀도 굳이 둘에게 자신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래도 나름의 배려인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 호수, 위험할 수도 있거든요. 기우일지도 모르지만요.”
그렇다면 나츠키가 먼저 다녀온다면 호수가 덜 위험해지기라도 한다는 것인지. 메리와 렌코는 그 두리뭉실한 설명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더 캐묻지도 못했다.
그날 렌코가 일찍 깨어난 건 숙취 때문이 아니었다. 렌코는 잠결에 허벅지에서 축축한 감각을 느끼고는 그 찝찝함의 원인을 확인해보기 위해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이 나이를 먹어서 어이없는 밤 실수라도 해버린걸까 싶었지만, 그런 것 치고는 너무나 차가운 느낌이었다. 메리는 덮고 있던 이불을 옆으로 열어젖히고 난 뒤 눈썹을 찌푸렸다. 렌코의 하반신 쪽 침대시트는 마치 비라도 맞은 것처럼 축축하게 젖어있어서, 침대시트가 차마 흡수하지 못한 물이 새어 나와 바닥으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 물이 자신의 오른편에서 흘러나오고 있단 걸 깨달은 렌코는 고개를 돌려 메리를 불렀다.
“메리, 이거 뭐야, 대야 째 물 마시다가 흘리기라도 한 거야?”
하지만 분명 렌코의 오른편에서 자고 있어야 할 메리는 답하지 않았다. 아직 술에서 깨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메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축축하게 젖은 침대 시트와 이불뿐이었다.
렌코는 처음엔 메리가 잠시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있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화장실이 불이 꺼진 채로 열려 있는 걸 보자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방 안에는 딱히 메리가 숨을 만한 장소도 없었다. 그보다 더 이상한 건, 바닥이 축축하게 젖어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디서 물이라도 흐른 걸까 싶었지만 정작 화장실 바닥은 물기 하나 없었다. 그제서야 렌코는 정신을 퍼뜩 차렸다. 메리는 이미 낮에 빗방울 하나 떨어지지 않던 맑은 하늘에서 혼자 폭풍우라도 맞은 것처럼 젖어버렸다. 낮에도 그랬는데, 밤에 그러지 말라는 법이 어딨는가.
그렇다면 대체 메리는 어디 있는 거지?
어처구니없게도, 답은 바로 렌코의 눈앞에 있었다. 바닥에 흘러넘치는 물은, 문 밖의 복도로까지 이어지고 있었으니까.
렌코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로 뛰쳐나가면서 외쳤다.
“메리!”
“메리, 메리!”
렌코는 복도로 뛰쳐나와 좌우를 살피면서 외쳤다. 하지만 그 어느 쪽에도 메리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각 호실의 문들은 굳게 닫혀 있고, 아직도 축축한 물자국만 복도에 남아 있었다. 렌코는 그 물 자국을 따라 달려 나가면서 계속 메리의 이름을 외쳤다.
“무슨 일이에요?”
술을 마시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던 나츠키가 복도로 얼굴을 내밀면서 물었다. 이미 계단까지 달려온 렌코는 그쪽을 돌아보지도 못하고 외치면서 물 자국을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메리가 사라졌어요! 따라가야 해요!”
“잠깐만! 혼자 가지 마요! 잠깐! 같이 가요!”
렌코는 이미 나츠키의 만류에 따를 정신이 아니었다. 그저 바로 눈앞의 물 자국이 끊기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달릴 뿐.
1층에 내려온 렌코는 프론트의 직원에게 메리의 행방에 대해 물었지만, 정작 그는 누가 나간 적이 없다는 도움이 안 되는 답만 들려줄 뿐이었다. 렌코는 자신이 잠옷 차림이라는 사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호텔 밖으로 뛰쳐나갔다. 직원의 설명이 무색하게도 물 자국은 데스크를 지나 호텔 밖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렌코에겐 다행인지 아닌지, 호텔 밖은 동이 트기 시작하면서 물 자국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간간이 장사 준비를 하는 주민들이 보이기는 했지만, 메리는 그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도 못하고 그저 무작정 아스팔트 도로 위의 물 자국을 따라 달렸다. 아직 표면장력으로 둥글둥글하게 뭉친 물 덩이로 볼 때 메리가 이곳을 지나간지는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렌코는 그저 자신이 너무 늦지 않기만을 바라며,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어떻게든 내쉬어가며 달렸다.
렌코는 어느새 마을 밖으로 나와, 인적이 드문 도로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도 차도 없이, 그저 물 자국만을 따라가고 있을 때 메리는 공기가 점점 습해지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도로 위만을 바라보던 렌코는 잠시 시선을 위로 올리고 나서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는 어느샌가 짙은 안개 속을 달리고 있었다. 발밑의 물 자국 외에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어서 렌코는 자신의 대략적인 위치조차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아갈 길을 찾을 수도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눈앞의 물 자국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계속 따라가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렌코의 유일한 동앗줄이던 물 자국은 잠시 뒤에 도로 한복판에서 끊겨 있었다. 렌코는 그 순간 좌절감에 주저앉을 뻔했지만, 안개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바로 정신을 차렸다. 비록 안개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너머에서는 분명 물이 첨벙첨벙, 누군가가 물장구를 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렌코는 자신이 어디까지 달려왔는지 이내 깨달았다. 원래 메리와 함께 오고자 했던 바로 그 호수에 온 것이었다. 렌코는 그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바로 달려갔다.
“메리!”
하지만 이번에도 답을 들려오지 않았다. 렌코는 안개 너머로 발을 내디뎠다가 갑자기 허공에서 앞으로 고꾸라져버렸다. 안개 때문에 도로가 끝나고 경사가 시작되는 걸 미처 못 본 탓이었다. 바로 밑의 둔덕까지 가볍게 구른 렌코는 바로 일어나 첨벙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앞으로 향했다. 렌코의 신발에 물이 스며들어와 축축해지더니, 이내 발목까지 물에 잠겼다. 하지만 렌코는 바로 앞에서 메리의 희미한 형상을 발견했기 때문에 오히려 더 급하게 호수 안으로 뛰어들었다.
“메리! 정신 차려, 메리!”
렌코는 어느새 무릎까지 들이찬 호수 위로 발을 첨벙첨벙 들어 올리며 메리에게 걸어갔다. 이제 안개 너머에서 메리가 선명히 보였다. 침대에 눕기 전에 입었던 차림 그대로, 그녀는 성큼성큼 호수 깊숙이 걸어 나가고 있었다. 이미 메리는 허리까지 물속에 잠기고, 그녀의 치맛자락은 마치 물감처럼 호숫물 위로 얇게 퍼져나갔다. 메리는 느릿느릿,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걷고 있어서 렌코는 금세 친구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더 가면 안 돼 메리. 위험해. 정신 차려!”
렌코는 메리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메리는 마치 친구의 존재 자체를 느낄 수 없는 것처럼 계속해서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있었다. 어깨를 붙잡는 정도로는 친구를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렌코는 뒤에서 메리를 꼭 껴안고 안간힘을 써서 그 자리에 붙잡아뒀다.
“메리! 제발! 메리!”
메리는 렌코의 예상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졌다. 단순히 옷이 물을 머금어서가 아니라, 마치 무언가에 끌려가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렌코는 어떻게든 메리를 뒤로 끌어당겨봤지만, 간신히 그 자리에서 더 끌려가지 않게 막는 게 고작이었다. 분명 렌코는 메리가 더는 나아가지 못하게 꽉 붙잡고 있었는데, 호숫물은 어느샌가 그녀의 가슴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마치 비가 내려 수위가 올라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게다가 그 속도도 점점 더 빨라졌다. 렌코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땐 이미 턱 밑까지 물이 차오른 상태였다. 이제 자신의 옷까지 완전히 젖어버린 렌코는 메리를 붙잡아두기는 커녕 자신이 가라앉지 않게 거의 제자리에서 발버둥을 쳐야만 했다. 호숫물의 불쾌하고 텁텁한 맛이 입술을 넘어 식도에서 느껴지던 찰나에, 뒤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거기 있어요?! 있으면 대답해요!”
“여기 있어요! 여기! 좀 도와주세요!”
등 뒤에서 외치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나츠키였다. 렌코는 목청껏 소리를 질러 답했지만, 오히려 덕분에 호숫물이 입안으로 콸콸 쏟아져 들어왔다. 이제 도움을 요청하지도 못하고, 코까지 물이 차오르던 찰나에 렌코의 옆으로 무언가가 풍덩 빠졌다.
“좀만 버텨요! 내가 갈게요!”
렌코는 순간 자기 옆으로 사람이 빠졌다고 생각하고 흠칫 몸을 떨었다. 사람의 팔다리가 호수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의 외관을 어설프게 따라 한, 지푸라기로 엉성하게 만들어진 허수아비였다. 하지만 허수아비 하나가 빠졌다고 상황이 변하진 않았다. 오히려 렌코는 그 허수아비가 옆에 빠지면서 튄 물을 뒤집어쓰기만 했다. 호숫물이 계속 올라와 렌코의 눈 밑까지 들이닥쳤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렌코를 끌어당겼다.
“잡았어! 잡았으니까! 친구 꽉 붙잡아요!”
나츠키는 그렇게 외치면서 렌코와 메리를 붙잡아 당겼다. 덕분에 렌코는 수면 위로 입을 내밀고 참아왔던 숨을 몰아쉴 수는 있었지만, 나츠키 혼자만의 힘으로 두 사람을 끌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세 여자가 호수에서 아둥바둥 몸부림을 치는 우스꽝스러운 꼴만 되어버렸다.
“메리가, 메리가 정신을 안 차려요!”
“알았으니까, 꽉 붙잡고! 놓지 마요!”
나츠키는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그 와중에도 호숫물은 다시 렌코의 입가까지 들이닥치고 있었다. 나츠키는 렌코를 꽉 붙잡은 채로, 안개 너머로 마치 누군가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외쳤다.
“이들은 당신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전혀 상관 없는 사람들이라고요! 제물도 아니고! 당신이 받을 제물은 내가 준비한 것뿐입니다!”
렌코는 순간 안개 너머에서 무언가가 아른거린 것 같았다. 처음에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헛것이라도 본 것인가 싶었지만, 그 희미한 형체는 점차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나츠키는 바로 그 형체가 아른거리는 곳으로 소리를 계속 지르고 있었다.
“당신에게 신앙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제물로 받아서 뭐하려고요! 이 사람들을 데려가면, 나도 함께 데려가야 할 겁니다!”
나츠키의 외침은 처음에는 간절한 부탁 같았지만, 어느샌가 절박함과 각오가 담긴 협박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안개 너머의 형체는 나츠키의 그런 외침에 반응하기라도 하듯 꿈틀거리더니, 갑자기 번개라도 친 듯 섬광이 번쩍였다. 아니, 실제로 뒤늦게 찾아온 천둥소리 덕분에 렌코는 그게 진짜 번개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섬광에서 잠시나마, 호수 한가운데에서 아른거리던 형체의 모습이 드러났다 사라졌다. 그때 렌코의 눈에 보인 것은, 거대한 바다 한가운데에서 꿈틀거리는 용이었다. 분명 자신들은 자그마한 호수에서 몸부림치고 있을 뿐인데도.
“내가 사라지면, 이제 이 세상에 당신을 믿을 사람도, 섬길 사람도 없어! 엉성한 허수아비 제물조차 아무도 바치지 않을 거야! 그러면 당신이 얻을 신앙 같은 건 없다고! 그래도 좋다면 상관없어! 그렇게 쓸쓸히 이 세상에서 잊혀지고 싶다면 우릴 데려가도 좋아!”
한순간 폭풍우 치던 바다처럼 느껴졌던 호숫물이 순간 고용해졌다. 호숫물 위로 얼굴만 간신히 내민 렌코 옆으로, 엉성한 허수아비가 평온하게 호수 한가운데로 흘러갔다. 이상하게도 렌코는 그 허수아비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를 뒤에서 꽉 붙잡고 있는 나츠키도, 그 허수아비가 천천히 안개 너머로 멀어지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렌코는 어느샌가 호숫물이 가슴 근처까지 내려왔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메리를 끌어당기기 위해 몸부림을 칠 필요도 없었다. 메리는 완전히 힘이 빠진 채로, 렌코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로 털썩 주저앉았다.
이내 호숫물은 다시 발목까지만 잠길 정도로 수위가 낮아졌다. 나츠키는 렌코를 붙잡았던 손을 풀면서 말했다.
“얼른 나가요. 이제 곧 비가 올 거예요.”
“비?”
렌코는 완전히 기력을 상실한 메리를 꽉 껴안은 채로 물었다.
“제물을 바쳤으니까. 어서요.”
나츠키는 렌코와 함께 메리를 양쪽에서 부축해 호수 밖으로 향했다. 둔덕을 지나 나츠키의 자동차가 세워진 도로로 올라왔을 때, 별안간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일기예보에선 없던 폭우였다.
렌코는 나츠키의 차 뒷자석에 메리를 먼저 눕히고 자신이 타기 전에 마지막으로 호수를 바라봤다. 안개 속에서 비쳤던 거대한 바다 같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얕았던 수위가 빗물로 조금씩 올라가는 초라한 모습뿐이이었다. 호숫가의 앙상한 진흙에는 가전 쓰레기를 포함한 잡동사니들이 무분별하게 방치되어 있어 한층 더 안쓰러운 모습을 자아냈다. 상당히 구식 가전 쓰레기들이 눈에 띈다는 점에서, 그 호수가 그렇게 방치된 건 결코 하루 이틀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호수 한가운데로 흘러간 허수아비는 그 쓰레기 더미 속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호수가 허수아비를 받고 기뻐하는 건지 아니면 화를 내는건지, 지금 쏟아지는 비로는 알 도리가 없었다.
메리가 정신을 차린 건 나츠키의 차가 호텔에 거의 도착했을 때였다. 담요에 몸이 덮인 채 깨어난 메리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메리의 말에 따르면, 그저 꿈속에서 누군가 불러서 호기심에 따라갔을 뿐이라고. 나츠키는 메리가 그 호수에 있을지 어떻게 알았는지, 그리고 호수에 던진 허수아비는 무엇인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다. 마치 그 반대급부라도 되는 듯 그녀는 메리가 어째서 혼자 호수에 갔는지도 묻지 않았다.
“먼저 들어가서 좀 씻어요. 내 방도 써도 좋고. 프런트에는 체크아웃을 조금 늦춰달라고 말해놓을 테니까.”
나츠키도 호숫물과 비에 온몸이 젖어 꼴이 말도 아니었지만 메리와 렌코를 배려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두 방의 욕실을 메리와 렌코가 따로 쓸 일은 없었다. 메리가 정신을 차리기는 했지만 기력이 돌아오질 않아 도저히 혼자 씻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셋 모두가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르고 호텔 밖의 카페에 모인 것은 정오가 다 돼서였다. 셋이 자리 잡은 자리의 유리창문 너머로는 아직도 비가 쉴 새 없이 내리고 있었다.
“따뜻한 것 좀 더 마셔요.”
나츠키는 아직도 안색이 좋지 않은 메리에게 커피를 한잔 더 내밀었다. 메리도 이번에는 그 제안을 차마 거절하진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이런 종류의 일, 많이 겪었나요? 어느 정도는 그쪽에 걸쳐 있을 것 같기는 했지만...”
이번엔 메리 대신 렌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렌코는 호수에서 나츠키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직접 보았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도 나름의 사정으로 그쪽 세계에 대해 아는 게 있다고. 메리와 렌코에게 자신보다 호수에 먼저 가지 말라고 경고했던 것도 분명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나츠키는 렌코가 호수의 안개 너머에서 본 게 무엇인지도 알고 있을 터였다.
“아까, 안개 너머에서 뭔가 보였어요. 처음에는 거대한 기둥 같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용 같았어요.”
“정말 용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몰라요. 나도 잘 모르고.”
되려 말을 흐리는 나츠키의 모습에 렌코는 살짝 욱해서 따지고 들었다.
“하지만 그쪽이 그랬잖아요. 그 호수, 용신이 있다고.”
“그건 사람들이 그렇게 믿었던 거죠. 안개 너머로 어렴풋한 모습을 보고. 나도 제대로 본 적은 없어요. 아마 그쪽도 자길 용이라고 생각하건 말건 신경 쓰지 않을걸요. 그쪽이 신경 쓰는 건 단 하나에요.”
나츠키의 그 말에 메리는 무언가를 퍼뜩 떠올렸는지 입을 열었다.
“제물이군요.”
“맞아요. 정확히는 자신에 대한 신앙만 신경 쓰죠. 우리 세계의 도덕, 선악, 규칙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죠. 그래서 사람을 제물로 바쳐도 상관 없고.”
“내가 그 제물로 선택받았던 거군요. 그래서 그렇게 호수까지 그렇게...”
메리의 그 추측에 나츠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도 그런 선택 따윈 안 했어요. 이제 용신은커녕 그 호수를 신경 쓰는 사람도 없으니까. 그래서 자기 멋대로 제물을 가져가기로 한 거죠. 보통 사람들은 그런 존재를 느끼지도 못하니까 괜찮았겠죠. 하지만 가끔, 그쪽 세계에 예민한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홀리곤 했어요. 당신들도 호수 근처에 갔다가 그런 식으로 홀릴까 봐 나보다 먼저 가지 말라고 한 거죠.”
홀린다는 말에 렌코는 무언가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나츠키를 만나기 바로 전, 메리가 난데없이 도로 한복판에서 물에 빠지기라도 한 듯이 젖어버린 일.
“그럼 어제 메리가 갑자기 젖었던 것도...”
“어제? 어제 비 때문에 젖은 게 아니었나요? 설마 어제 거기서...”
“나는 아녔어요. 메리만 젖었지. 그 뒤로 비가 와서 나도 젖은 거예요.”
나츠키는 렌코의 설명을 듣고 뒤늦은 후회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쪽 세계와 어지간히 거리가 가깝나 보네요. 호수 근처에도 가지 않았는데 그렇게 홀려버릴 정도였다니. 어제 이 이야기를 미리 들었다면 여기도 안전하지 않단 걸 알고 더 조심했을 텐데... 미안해요. 이건 내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렌코와 메리는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오히려 그렇게 더 미안해하자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나츠키가 왜 그리 책임감을 느끼는지 렌코도 메리도 짐작 가는 구석이 없었다.
“왜 그렇게 그 호수에 신경을 쓰는 건가요? 덕분에 메리가 무사하긴 하지만...”
나츠키는 렌코의 질문에 씁쓸한 표정으로, 창문 너머로 내리는 비에 시선을 돌리며 답했다.
“내가 이제 그 호수의 유일한 신자니까요.”
나츠키는 자신의 사정을 담담하게 메리와 렌코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동안 혼자 지던 짐을 마치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듯한 말투였다.
“내가 어릴 적엔 그래도 아직 신앙심을 가진 사람들이 좀 있었죠. 하지만 대부분은 노인분들이셨어요. 내 아버지뻘만 해도 그런 이야기가 있더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고, 젊은 사람들은 신경도 쓰질 않았죠. 이제 농사를 짓지 않으니까요.”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 근처에서 농사를 지을 때, 이 호수는 마을의 생명줄이었다. 이 자그마한 호수에서 논과 밭에 댈 물의 원천이었다. 하지만 워낙 자그마한 호수여서, 언제라도 바닥을 드러낼지 몰라 마을 사람들은 노심초사했다. 비다 평년보다 조금이라도 덜 오면 그해 농사를 포기해야 할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신앙이 생겨났다. 호수에 용신이 살아서, 용신에게 제물을 바치면 비를 내려줄 거라고. 그래서 비가 오지 않을 때면 가마를 만들어 제물을 그 위에 앉혔다. 바닥이 다 드러난 호수에 제물을 태운 가마를 통째로 밀어 넣으면, 마치 거기에 호응이라도 하듯이 비가 오고 호수가 다시 가득 차곤 했다. 물론 사람을 제물로 바칠 순 없으니, 가마에 올라 호수에 수장되는 건 허수아비의 역할이었다. 농사를 짓는 마을에서는 워낙 절박한 문제였다 보니, 그 연례행사 아닌 행사 준비와 실행을 도맡아 하는 사람들도 따로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우리 집이 그런 집이었죠. 하지만 이 근처가 개발되면서 농사도 안 짓게 되면서 우리 아버지 대부터 이미 그런 의식은 하지 않게 됐어요. 적어도 마을 전체에서는요. 우리 집안 사람들끼리나 가끔 모여서 제물을 바치곤 했죠. 나도 물론 다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했지만요. 마을 사람들이 호응하질 않으니 부모님도 어느샌가 그만두셨죠. 가족들이 마을 밖으로 이사를 갈 땐 얼마나 기뻤는지. 이런 이상한 호수에서 이상한 의식 따위 벌일 일이 없으니까. 우리 가족마저 마을을 떠나니 호수는 완전히 관심 밖이 되어서 쓰레기장이 되어버렸죠.”
나츠키의 말투만으로는 그녀도 진작에 그런 허무맹랑한 신앙을 버리기라도 한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 자신이 마지막 신자라고 했다. 렌코는 거기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지만 옆에서 메리가 나지막이 말했다.
“나 말고도 있었군요. 그 호수에 홀려버린 사람이.”
메리의 그 지적에 지금까지 사뭇 진지하던 나츠키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맞아요. 마을을 떠나고 몇 년 뒤에 일어난 일이었죠. 나는 소문만 들었어요. 마지막까지 마을을 떠나지 않던 노인분이었는데... 밤중에 호숫가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졌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날부터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어요. 몇 년간 그렇게 비가 많이 오지 않는 편이었는데 이상하다고 말들이 많았다더군요. 그 폭우 때문에 봉변을 당했거니 다들 넘겨짚더군요. 하지만 나는 그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듣고 바로 깨달았어요. 그분은 제물이 되어버린 거란 걸요. 앞뒤가 바뀐 거죠. 그분은 폭우 때문에 발을 헛디딘 게 아니에요. 그 용신인지 뭔지가 그분을 제물 삼아 비를 내리게 한 거죠.”
렌코는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나츠키의 이야기가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그 이야기를 털어놓는 나츠키의 시선과 목소리에 두려움이 담겨 있어서였다. 지금의 그녀는 전날 밤에 짓궂은 장난을 치던 그녀가 아니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에 사로잡혀, 그 존재를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는, 공포에 질린 광인 같았다.
“그래서 좀 더 찾아봤어요. 그런 식으로 호수에서 사고가 전에도 있었는지. 우리 집이 떠나고 난 뒤부터 매해 크고 작은 사고가 생기기 시작했었어요. 마을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또 그런 일들이 벌어지니 호수를 더 멀리했겠죠. 호수는 그러니 다른 제물을 어떻게든 찾아보려고 하고. 그러다가 결국 한 명이 제대로 홀려버린 거죠.”
“하지만... 정말 사고였을 수도 있잖아요. 나츠키 씨도 전해 듣기만 했을 뿐이고...”
렌코는 그렇게 반론해봤지만 돌아온 건 나츠키의 헛웃음뿐이었다. 렌코 자신도 나츠키와 메리가 자신의 반론을 믿지 않으리란 걸 잘 알았다. 무엇보다 렌코 본인이 호수에서 그런 일을 겪은 참이었다. 렌코는 그저 그 일이 자신의 착각이었기를 바라면서 그런 의미 없는 질문을 던진 것뿐이었다. 메리도 나츠키도 그걸 이해했기에 렌코에게 뭐라 더 반박하지 않았다.
“그 뒤로 생각해봤어요. 앞으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무시할 수도 있었겠죠. 그 모든 걸 우연이라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나도 이미 그 호수에 홀려버렸던 거죠. 그래서 우리 집에서 하던 일을 혼자서 계속하기로 했어요. 엉성한 허수아비를 하나 구해와서, 호수에 던져버리는 거죠.”
렌코의 머릿속에서는 퀭한 얼굴로 허수아비를 호수에 던지는 나츠키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자신도 모르게 품은 신앙 때문에 공포에 질려서, 자신이 틀렸기만을 바라면서, 정작 그 신앙심에 따라 행동해버리는 한 소녀의 모습이.
“처음에는 사실 반신반의했어요. 내가 틀렸기만을 바라면서 허수아비를 던졌죠.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을 땐... 헛웃음도 안 나오더라고요. 그 뒤로 매년 반복했어요. 호수에서 내 제물을 받는 게 누구인지는 몰라도, 이 엉성한 제물만으로 만족하기를요. 이 제물에 만족해서 다른 사람들을 제물로 삼지 않기를... 가끔은 안개 너머에서 그 모습을 본 것 같았어요. 내 제물에 만족해서 모습을 보였다고 믿었죠. 어쩌면 내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고.”
“그럼 아까 우릴 붙잡기 전에 던졌던 그 허수아비는...”
“내가 준비한 제물이죠. 인간 대신. 당신들보다 먼저 가서 달래줄 생각이었어요. 내가 제물을 바치기 전에 당신들이 먼저 가면 혹시나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나츠키는 렌코의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그녀는 전날에 자신보다 늦게 호수를 방문해달라고 부탁했다. 정작 그 이유는 제대로 설명하지도 않고. 렌코는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호수에 허수아비를 던지는 건 그녀에겐 신앙의 영역이었다. 나츠키의 입장에서 자신들은 신앙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설명해봐야 이해할 리가 없으니까. 자신들도 나츠키에게 결계를 찾으러 간다는 이야기는 얼버무리지 않았던가.
“그래도 다행이에요. 한바탕 소란을 벌인 덕에 상황을 일찍 깨달았으니까요. 조금이라도 늦게 깨달았다면... 아무튼 다행이에요. 진작에 경고해야 했는데. 미안해요.”
나츠키는 여전히 메리에게 벌어진 일에 책임감을 느끼는 것 같았지만 정작 메리는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아니, 오히려 렌코처럼 나츠키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듯했다. 렌코와 메리는 이 마을을 떠나면 아마 이 호수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낼 수 있을 테지만, 나츠키는 아니었다. 나츠키는 앞으로도 이런 일이 또 반복되지 않을까, 이 호수의 마지막 신자로서 공포에 떨 테니까. 그녀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어쩌면 더 잦은 빈도로 호수에 허수아비를 던져넣을 것이다. 부디 자신의 신앙심에 호수가 만족하기만을 바라면서. 호수가 다른 누구를 대신 제물로 삼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녀는 자신의 신앙을 버리기엔 너무 착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따뜻한 음식으로 배를 채운 메리는 금세 기력을 회복했다. 나츠키는 메리의 상태가 괜찮아지자 바로 근처의 기차역까지 둘을 배웅해주겠다고 했다. 그녀다운 친절한 제안이었지만, 호수에서의 일을 겪고 난 렌코와 메리에겐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나츠키는 그 둘이 여기 남아있다간 또 무슨 일을 겪게 될지 걱정이 돼서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둘이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위안은 그 제안을 군말 없이 따르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또 연락하세요.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나츠키는 승강장까지 둘을 배웅하면서 자신의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하지만 렌코와 메리는 나츠키에게 그런 일로 연락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신앙 때문에 너무 많은 짐을 지고 있었으니까. 기차가 올 시간이 다 되어서도 비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 메리는 작별 인사를 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를 던졌다.
“이 일, 언제까지 계속하실 건가요?”
“글쎄요. 내가 할 수 있을 때까진 할 것 같은데요.”
“만약 나츠키 씨에게 사정이 생기면...”
메리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질문을 흐렸다. 나츠키는 거기까지만 듣고도 질문을 다 이해하고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러게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호수에 용신이 산다. 그러니 누가 제물을 바쳐야 한다. 이제 와서 이런 바보 같은 이야기를 믿어줄 사람이 또 있을까요?”
“그래도 마을 주민들이라면...”
“그 호수에 쓰레기를 버리는 주민들이요? 차라리 쓰레기를 더 버려서 얼른 호수를 메워버리면 좋겠네요.”
나츠키는 스스로 재밌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깔깔 웃었지만 메리와 렌코는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약간 멋쩍어진 나츠키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있죠, 어렸을 적엔 왜 호수의 용신 같은 걸 믿는지 이해못했어요. 그런 걸 믿으면 마음이 조금 편해지나보다 싶었죠. 아무런 믿음 없이 살기엔 세상은 너무 불확실하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네요. 제물을 바치기만 하면 나도 마음이 편해지니까.”
그렇지만 나츠키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신앙을 받는 존재들은, 사실 우리의 안위나 도덕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겠죠. 번개나 폭풍우가 나쁜 놈들만 덮치는 건 아니니까. 이 마을에서 비가 내려봐야, 이젠 농사도 짓지 않는데 무슨 소용이람. 그러니까 이젠 결국 신앙을 갖지 않는 사람들이 현명한 거죠. 아직도 그런 것에 벌벌 떠는 내가 바보고.”
렌코와 메리는 나츠키에게 뭐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금은 빗물이 떨어지는 승강장에서 나츠키의 고백을 들어주는 것밖에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신앙 따윈 다 무서워서 가지는 거야. 신앙을 가진다고 위안을 받는 것도 아니고. 너무 무서워서 견디지 못한 나머지 스스로를 속이는 거지. 믿고 있으니 다 괜찮을 거라고. 하지만 돌아오는 건 더 큰 공포뿐이야.”
나츠키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마지막으로 둘에게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렇게 벌벌 떠는 건 한 사람으로 족하죠. 그래서 다른 신자를 찾지도 않을 거고요. 호수에 허수아비를 던지면서 위안을 받는 건 나뿐이면 되니까.”
메리는 그녀가 그런 식으로라도 위안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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