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온다.
겨우내 얼어붙은 경내는 이윽고 표정을 바꾸며 만물의 약동을 준비한다. 아스라이 새하얀 안개는 부지불식간에 골짜기로 흘러내려 이부자리에 파묻힐 기세로 온기를 전한다. 아직은 조금쯤 쌀쌀한 봄바람이 귓전을 스친다. 눈과 얼음으로 화化한 석간수石間水도 이제는 눈치챈 건지 우드드드득…… 듣는 소리로 토옥, 토옥…… 바위를 두드린다.
이 세상의 색채가 바뀌어간다. 경칩驚蟄을 주장하듯 뛰어오르는 개구리, 부쩍 잦아진 봄비가 다가오는 빛깔을 역설한다. 산그늘 잡목들조차 어느새 새파란 잎을 거느리고 따사로운 봄햇살을 맞이할 준비를 하나 둘 착실하게 해나가고 있다.
절이 있다. 한때는 인파로 붐비었음에 틀림없다는 듯이 그 문은 손길에 닳아있고 툇마루는 경내를 마주하며 인사를 나눈다. 세심한 관리 덕분인지 어느 곳 하나 해진 곳 없는 담장 너머 비사문천毘沙門天을 모시는 그곳에서는 그러나 더는 왕래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시린 하늘이 봄빛으로 마주치는 세상 아래 오직 그곳만이 변해갈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마치 오래전부터 그 모습 그대로인양 이물감을 간직한 채 놓여있다. 실은 이물감이라는 표현으로는 미진하다. 미처 완성되지 못한 수채화처럼, 오직 그곳만이 무채색無彩色이었다.
그 절의 깊숙한 어디인가, 비사문천의 화신化身은 오늘도 무언가 움직이며 오랫동안 반복되었을 일들을 처리해나가고 있었다. 무채색의 그 광경은 몇 가닥 남지 않은 잔붓으로 먹칠한 듯 칼날처럼 다가오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눈동자 속 하늘은 아프도록 시리다. 언제부터 이 모습을 보아온 것일까,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 무한히 반복되는 사계절의 홍수 속에 자신은 비사문천의 화신 이외의 다른 존재방식은 용납될 수 없는 그 무언가, 기실 그것만이 마음 속 자아존재증명이었다. 치켜든 고개를 내려 골짜기 아래를 바라본다. 흰 것은 안개, 검은 것은 산, 몇 번이고 반복된 봄은 이미 퇴색하여 이 세상은 어디까지고 무채색無彩色이었다.
봄이 온다.
겨우내 얼어붙은 경내는 이윽고 표정을 바꾸며 만물의 약동을 준비한다.
이 세상의 색채가 바뀌어간다.
절이 있다. 한때는 인파로 붐비었음에 틀림없었던 듯이 그 문은 손길에 닳아있고 툇마루는 경내를 마주하며 맞절을 나누고 있다.
봄이 온다.
언제부터 이 모습을 보아온 것일까. 나 자신은 비사문천의 화신 이외의 다른 존재방식은 용납될 수 없는 그 무언가, 그것만이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갈림길.
나는 달리 살아가는 방법을 모른다.
『저는 호랑이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토라마루 씨라면 무척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시작은 우연이었다. 인격이 있는 착실한 요괴, 신뢰받는 요괴, 선택받은 존재였지만 실감은 들지 않았다. 감시역도 따라붙었다. 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 사람이 있었다. 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다, 해내는 것이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기 위해서 나는 연기했다. 연기든 무엇이든 좋았다.
비사문천의 제자가 되었지만 실감은 들지 않았다. 시작부터 묵계默契였기에, 혹은 원래 신이 그렇듯, 나는 그저 신앙을 모으는 일에 진력했다. 눈앞에는 그 사람이 있었다. 노란빛 머리끝은 차분히 타오르고, 그 눈은 언제나 끝간 데 없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가는 그저 사소한 일이었다. 마지막 하나 남은 소거법처럼, 이 절과 그 사람이 나를 긍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의 나날은 계속될 수 없었다. 인간이 품지 못할 시선을 품은 탓에 그 사람은 유폐되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나는 내가 요괴임을 만인 환시중에 밝힐 도리가 없었다. 마침내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었다.
봄이 온다.
그리고 가을이다.
늦은 밤 하현달이 동녘 산그림자 위로 정물처럼 떠오른다. 내일도 반복될 일이 있기에, 이 시각까지 깨어있는 것은 비사문천의 화신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자연히 생경한 그 시선은, 그럼에도 동쪽 하늘이 아닌 절간 담벼락 위에 못박혀 있었다.
「한잔 하지 그래?」
「저는 이 사찰을 대신 맡고 있는 몸, 죄송하지만 이런 시각에 음주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무슨 소리야? 위장에 술을 집어넣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또 어디 있다고 그래?」
「……」
담벼락 위에 걸터앉은 도깨비는 구태여 응시하지 않아도 마치 다가오듯 한껏 색채를 내뿜고 있었다. 나는 나로서 존재한다는 유아독존唯我獨尊의 자기긍정. 언제나 무채색이었던 눈동자에는 지나치게 자극적인 빛깔이 수마를 몰아내고 있었다. 맥동하는 목젖이 경내를 온통 울리고 있다.
「……어떤 용무이신지.」
「딱딱한 소리는 그쯤 해둬. 어차피 같은 요괴 사이 아냐? 그보다 한잔 어때?」
「사양하겠습니다.」
호리병에선 끝도 없이 무언가가 흘러나오고 있다. 구태여 응시하지 않아도 술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배려없이 다가오는 그 냄새가 경내를 온통 뒤덮고 있다.
「달빛도 은은하니 딱 좋잖아. 이런 날에 술을 안마시면 손해 보는 거라고. 애초에 술 마시는데 뭐 이유가 필요해?」
「……그렇습니까.」
「그럼, 이런 날엔 술맛도 더 돌거든. 맛이 없는 건 어디 아픈 녀석 정도겠지.」
「……」
어느새 하현달이 머리위까지 솟았다. 남녘 하늘로 질 때가 새벽녘. 이 이상은 곤란하다는 생각을 하던 즈음이었다.
꿈을 꾸었다.
『비사문천님도 솔직하지 못하단 말이지, 대신할 자를 구하면 그만이라느니 어쩌느니. 애초에 왜 감시역이 꼭 요괴쥐여야 하냔 말이야.』
투덜거리며 절간을 나서던 나즈린이었다. 언젠가부터 비창의 파편과 비사문천의 보탑이 보이지 않았다. 잃어버린 기억은 없다. 실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기에 잃어버렸다는 표현도 어딘가 이상하다. 하지만 비사문천의 화신으로서는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될 비보들. 그 결과가 감시역이 감시대상을 내버려두고 비보를 찾기 위해 지상으로 향한다는 모순이었다.
비사문천님의 말씀은 오래전 그때 단 한번 뿐이었다. 나는 비사문천의 화신이 되었고, 더 이상 어떤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어쩌면 화신이란 본래 그런 것이겠지. 사람들은 나와 이 절을 향하며 신앙을 보이고, 나는 비사문천님을 대신해 신앙을 모은다. 아무 말도 없는 것은 어떤 문제도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떤 방법도 없기 때문일까.
나는 비사문천의 화신이기 이전에 요괴였다. 그리고 그 사람은 인간의 몸으로 요괴를 도운 끝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면 내가 요괴의 몸으로 인간의 신앙을 모으는 것은 과연 어떨까.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인가. 실은 그렇지는 않다. 나는 요괴의 몸이 아닌 비사문천의 화신으로서 인간의 신앙을 모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 과거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현재를 결정지은 비사문천님과 그 사람은, 이제 존재조차 흐릿하다. 그렇게 나는 어느새, 과거도 현재도 흐릿한 어떤 무언가가 되어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되 참나무가 고목이 되어 썩어 문드러지는 사이에 나 또한 그렇게 되어버린 듯하다.
이곳을 떠나지 않을 참이었다. 아무것도 해낼 수 없었던 나 자신의 유일한 자아존재증명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러나 차츰 모든 것은 흐릿해지고 봄은 몇 번이고 다시 되돌아오고 있었다. 봄과 함께 찾아오는 아침안개는 어째서 하얀색을 띠는가. 모든 색을 잃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퇴색한 하늘빛과 안개의 차이점은 거리감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몇 번이고 찾아온 봄 속에서 함께 퇴색하며, 그저 형체만은 유지하려 뜻모를 생각을 되뇌이고 있었다.
아침.
「……」
경내 한 켠이 서늘하다. 입구에 우두커니 머물러 있는 검은 그림자. 빙글게 휘몰아치는 먹빛이 시린 눈에 생경하다. 쏟아지는 아침햇살에 색채를 드리우고 있다.
‘……재액災厄인가.’
세상사 어디에나 있는 길흉화복吉凶禍福의 이야기들, 작게는 새옹지마塞翁之馬부터 천하에 이르러서는 치란지도治亂之道까지, 마치 내가 비사문천의 화신으로서 신앙을 모으듯 재액이 모이는 장소 역시 따로 있다는 믿음을 형상화한 것이나 진배없는 그 모습. 앳된 소녀는 그저 부동不動임에도 제멋대로 바람쳐 흩어지는 칠흑빛 재액 가운데에서 함께 회전하는 듯한 착시마저 느껴진다.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비사문천의 화신으로서 자의와 무관하게 어떻게든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저 아이 역시 재액의 화신으로서 자의와 무관하게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
한순간 소녀가 생긋 웃어보였다. 양팔을 들어올리자 일렁이는 먹빛이 마치 신기루처럼 너울지어 사라졌다.
『아침이잖아요.』
그런 말이 들린 것 같았다. 이윽고 아이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과거와 현재 중 어느 것도 될 수 없는 모순에 빠져 어떻게든 버티고 서 있을 뿐이다. 하지만 저 아이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비치었다. 적어도 그 눈동자에는 나보다 좀 더 많은 것들이 비치는 듯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몇 번째인지 모를 봄이 온다. 나는 많은 것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더 이상 그 무엇도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나를 존재케 하는 것은 이제 이 절, 이 장소뿐이다. 돌아올 장소가 되어줬으면 하는게 아냐. 나는 달리 살아가는 방법을 모를 뿐이야.
그렇게 나는 몇 번째일지 모를 계절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침.
「……」
경내 한 켠이 소란하다. 입구에 우두커니 머물러 있는 잿빛 뭉게구름. 그리고 요괴가 두 명. 놓지 않았으나 놓친 마침내 놓아버린 그리운 과거들.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언가 좋은 방법은 없겠습니까? 소생도 돕겠습니다.」
「토라마루 씨는 뭔가 알고 계시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
세상이 흐릿하다. 흐릿하다……
「……방법은 있습니다.」
이곳에는 하늘을 나는 배가 있다. 거기엔 묘우렌命蓮님의 힘도 깃들어있다. 이제는 비보도 돌아왔다. 법계法界의 봉인도 어쩌면, 어쩌면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되는걸까. 그 사람은 인간이 품지 못할 시선을 품은 탓에 유폐되었다. 나의 이 생각은, 요괴가 품어도 되는 생각일까? 비사문천의 화신이 품어도 되는 생각일까? 나는 누구일까. 하지만, 하지만……
「이번엔 내가 구할 차례니까.」
「……이쪽으로. 봉인을 푸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이제 더 이상 후회하고 싶지 않아. 도망치고 싶지 않으니까. 이 길의 끝에 내가 사라지더라도, 그래도 좋아. 고개를 들어보자.
쇼우가 고개를 들자, 세상은 색채를 품었다. 눈물져 흐릿했던 시야가 걷히고 삼라만상의 위광이 그들을 감쌌다. 퇴색한 하늘이 빛을 되찾고 아침안개 사이로 금강저金剛杵를 쏙 빼닮은 햇살이 계곡을 비춘다. 아침안개는 어째서 하얀색을 띠는가. 모든 색을 끌어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와 현재를 모두 끌어안은 채 세월을 온몸으로 받아낸 그들이 이젠 경내를 가로지르며 창고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본당本堂이 묵묵히 그들을 건너다본다. 이윽고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한잔 하지 그래요?」
「어이……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아침이라구.」
「무슨 소리에요? 위장에 술을 집어넣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또 어디 있다고 그래요?」
「아니 그건 그렇지만 말이야……」
거기엔 아침햇살을 마주하며 툇마루에 걸터앉아 호리병을 홀짝이는 비사문천의 화신이 있었습니다. 마주편 담벼락에 서 있는 도깨비는 기가 막힌 듯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본당에선 스님의 독경소리가 은은하게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한구석에 보이는 뭉게구름은 아무래도 요괴인 듯합니다. 왠지 소란스러워 보이는 사찰은 사찰이라기보다 민박집 같은 활기참마저 엿보이네요. 심지어 입구에선 우산을 든 소녀가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놀래키려 우산을 쥐었다 폈다 애쓰고 있습니다.
「……스님이 화내진 않을까?」
「괜찮아요 괜찮아요. 어차피 전 몇백년을 참아왔다구요. 그보다 한잔 어때요?」
「그럼 뭐 샤앙않고 받겠어.」
호리병에선 끝도 없이 무언가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본당은 바로 뒤편에 있는데. 이 친구들, 여기서 이래도 되는걸까요?
「도대체가 말이에요, 전 얼마나 힘들었는데, 처음 보는 두루마리를 갖고 오시질 않나, 심지어 마계魔界에서 뭘 배워왔다고 신나서 자랑하시고…… 저도 그냥 즐겁게 지낼걸 그랬다니까요.」
「너 취했구나……」
「쇼우 씨, 너무 많이 드시지는 마세요―」
「앗, 죄송합니다!」
「너 잡혀사는구나……」
잠시 멎었던 독경소리가 다시 울려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젠 잃어버리고 싶지 않으니까요. 딱히 그렇게까지 조심스러운 건 아니에요.」
「뭐…… 그도 그렇지. 술맛 좋지? 아침부터면 또 어때. 이런 날에 술을 안마시면 손해 보는 거라고.」
「지당하신 말씀.」
돌아왔을 때엔 정말 대단했습니다. 연신 사의를 표하는 뱌쿠렌白蓮, 그녀를 둘러싼 친구들은 모두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비창을 타고 내려앉아 이윽고 묘우렌지命蓮寺를 세웠습니다. 저 또한 사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처음에는 조심스러움도 있겠지요. 하지만 연기緣起란 본디 그런 것이 아닐런지요. 찰나가 또한 영원이며, 전생이 있기에 현생이 있으며, 과거가 있기에 현재가 있습니다. 혹은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去者必返이라고 하던가요.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법. 하지만 또다시 만나게 될 날도 있는 것이겠지요. 쇼우는 한 걸음을 내딛었고, 마침내 오늘과 같은 날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어찌 뿌듯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대여, 연기의 굴레에 괴로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굴레 또한 되돌아보면 굴레가 아닌즉, 설령 변하지 않는 것은 없을지라도, 그들의 지금 이 지복祉福이 앞으로 다가올 날들에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기를, 비사문천인 저 역시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습니다.
연기는 불교에서 말하는 縁起입니다. 혹은 신귀산연기의 연기도 縁起지요.
제시해주신 주제에 맞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내키는 대로 졸작을 써보았습니다.
첨부파일이 PDF 파일인데 혹시 다른 양식이 필요하시면 답장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대회진행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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