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키진 세이자는 자신이 약하면서 동시에 악한 요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타인을 속이고 괴롭히는 것을 업으로 삼는 요괴 아마노자쿠, 하지만 통상적으로 약한 존재가 적을 많이 만들어서 좋을 것은 없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약자가 설치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짓밟히고 사라질 뿐이니까. 그렇기에 그녀는 약자만의 생존법을 터득해왔다. 조그만한 기척에도 예민하게 반응해 흔적을 완벽히 지우며, 항상 이중 삼중으로 도주 계획을 세워 철저히 정면전을 피하는 비열하지만 그녀다운 방법. 오랜 세월 그런 식으로 목숨을 부지해온 세이자는 자신의 생존 전략에 상당한 자신이 있었다.
이 날도 세이자는 여느 때랑 다름없이 자신의 은신처에 눌러앉아 도주용 도구들을 손질하며 환상향을 뒤집을 사악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한때 동료(도구)였던 소인 공주가 내걸은 공개수배, 그 때문에 도주와 노숙을 전전하다 찾은 은밀한 장소. 어떤 추적자도 자신을 쫓아 이 곳까지 도달하진 못했다. 그만큼 꽁꽁 감춰져 있으며 혹여 누가 찾아오더라도 금세 알아채고 대비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 이 곳에 있는 동안엔 자신이 누군가에게 붙잡히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 지금의 은신처에 대한 세이자의 평가였다.
그때였다. 그녀의 등 뒤에서 갑작스레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악의로부터 태어나 뿌리까지 뒤틀려버린 가엾은 요괴여, 그대가 원하는 것은 정녕 무엇이더냐?”
잠깐이지만 세이자의 사고가 정지했다. 잽싸게 상황을 파악한 세이자의 목덜미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공격할 의사만 있었으면 분명 자신의 심장이나 팔다리가 날아가고도 남았을 거리.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 누군가가 있다. 삼면이 막힌 어두컴컴한 토굴에서 마치 그것은 원래 있었다는 듯 갑자기 존재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 자신의 기척과 힘을 완벽히 숨길 수 있는 존재가 얼마나 되겠는가, 분명 아마노자쿠 같은 요괴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강력한 녀석일 것이다. 허나 등 뒤에서 어떠한 적의나 살의가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 자는 아마노자쿠를 사냥하러 온 자객이 아닌 걸까? 애시당초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도 그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이해가지 않는 낯선 이의 방문에 아마노자쿠의 생각은 의심과 의문으로 가득 차올랐다.
“대답이 늦는군. 하기야, 갑자기 소원을 묻는다면 누구든 고민에 빠지기 마련이지. 급할 것 없다, 아마노자쿠여. 지금 이 몸은 한가하니 그대에게 천천히 생각할 시간을 주도록 하지.”
“혹시 뭐 사형수의 마지막 소원을 묻는 그런 거야? 유감스럽지만 나는 자비를 구걸할 정도로 멍청한 녀석이 아니야. 죽이거나 포획하려는 거라면 말 대신 행동을 먼저 하지 그래? 그렇게 여유를 부리다간 놓치게 될테니까.”
“만용을 부리고 있구나. 죽는 한이 있어도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 머리 숙이는 일은 없다 이건가. 허나 안심해도 좋다. 나는 그대를 해하러 온 것이 아니니. 내 말을 들어라. 고개 돌려 나를 보아라. 그리고 내 질문에 답하라. 아마노자쿠여. 그저 그대의 생각이 듣고 싶을 뿐이다.”
세이자는 삐딱한 자세로 몸을 돌려 등 뒤의 불청객을 바라보았다. 경계는 여전히 풀지 않은 채였다. 적대할 의향이 없다고는 했지만 이 자에게 있어 자신의 처우는 기분에 따라 언제든 손바닥 뒤집듯 바꿀 수 있는 일.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상황을 다루고 지금처럼 타인에게 휘둘리는 상황 자체가 세이자에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는 거대한 문. 저 문을 통해 자신의 은신처를 찾아온 것이리라. 지금은 굳게 닫혀있는 육중한 문 앞에,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의자 위에 편하게-세이자의 입장에선 거만하게- 앉아 그녀를 바라보는 불청객이 있었다. 화려하고 격조 높은 관복, 그리고 상대를 관찰하려는 저 내려다보는 시선. 세이자는 문득 공개수배극에서 마지막까지 자신을 추적해왔던 요괴 현자를 떠올렸다. 생김새부터 태도와 말투까지, 이 자에게선 그 요괴 현자와 매우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렇게 누추한 곳에 어쩌다 귀한 분이 오셨나. 너, 정체가 뭐야?”
“내 이름은 마타라 오키나. 드러나지 않는 배후에서 방해를 없애고 만물을 수호하는 비신이지. 이 환상향을 창조하고 관리하는 신이기도 하다.”
“그런 녀석이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 시점에서 이미 비신이라고 부르기 민망하지도 않아?”
“하하하, 당돌하군. 언뜻 보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보이지. 그대는 지금 비신이라 일컫는 내가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내 존재에 모순되는 행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더냐? 하지만 정말 모든 것이 비밀로 감추어진 신이라면 누가 그 존재를 믿을 것이며, 신앙을 얻지 못하는데 어찌 신으로 남아있을 수 있겠느냐. 어떤 존재가 비밀에 부쳐져 있다는 것은 꼭 아무도 모르는 곳에 콕 숨어 있기만 한다는 것은 아니라네, 아마노자쿠여. 지금 그대처럼 말이지.”
“이젠 아무도 모르는 곳이 아니게 되었지만, 누구 덕분에.”
“어디에도 비신이 세상의 앞면에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된다는 규칙은 없다. 지옥을 관리하는 자라 하여 지옥 밖으로 나오면 안 된다는 법은 없는 것처럼. 그대가 멋대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아, 그대의 은신처에 갑작스레 방문한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쭉 지켜봤는데 이 좁은 토굴에서 나올 생각도 없는 것 같았고, 평범하게 찾아오면 도망칠게 분명했으니까.”
“즉 처음부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있었다, 이 말인가 ……. ”
“그대는 완벽히 자취를 감추고 잠적하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하지만 그 또한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거지. 비신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된다. 내가 찾은 이 은신처는 절대 들킬 리 없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그대 앞에 있고 그대의 은신처는 오래전부터 내 감시 하에 있었지. 생각과 현실의 괴리가 믿기지 않느냐. 모두 그대의 편협한 생각이 모순을 만들어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자신을 깔보고 있다는 생각에 어두워지는 세이자의 표정, 하지만 망치의 마력도, 스스로 싸울 힘도 없는 그녀가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화가 잔뜩 나 있군. 내가 너무 심하게 말한 건가?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그대가 원하는 것을 말해보거라, 아마노자쿠여.”
“내가 원하는 것? 그건 당연히 정해져 있잖냐. 무슨 수를 써서든, 누구를 이용해서든, 혁명을 일으켜 이 썩어빠진 환상향의 파워 밸런스를 뒤집는 것! 질서라는 명목으로 약자를 짓밟아오던 너 같이 음습한 강자들을 저 밑바닥에 처박고 그 위에 올라서는 것이다!”
“혁명이라, 피가 끓어오르는 단어지. 그 혁명을 통해 내가 창조한 이 세계를 뒤집고 먹이사슬의 위로 가는 것이 정녕 그대가 원하는 것이더냐? 아마노자쿠란 그런 요괴였느냐?”
“당연하지. 이 나를 깔보던 녀석들을 반대로 깔아뭉개는 것만큼 즐거운 건 또 없을테니까.“
세이자의 말을 들은 오키나는 앉은 자리에서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때까지 그녀의 뒤에 있던 문이 활짝 열리며 푸르른 하늘이 너머로 펼쳐졌다. 먼저 오키나가 걸터앉은 의자가 둥실 떠올라 문을 통과해 빠져나갔다. 그 직후 강력한 힘이 세이자를 끌어당겼다. 힘주어 저항해보지만 결국 문을 통과해 상공에 내던져지는 세이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내 자세를 고쳐 잡는데 성공한다.
“어디로 끌고 온 거야, 어!? 설마 함정이냐!”
버럭버럭 있는 대로 성질을 드러내는 세이자에게 오키나는 자신의 아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진정하고 아래를 보라. 환상향에서 가장 높은 산의 정상이 지금 그대의 발 아래쪽에 저렇게 작게 보이고 있다. 산뿐만이 아니야. 이 내가 만든 세계가, 또 그대가 지배하에 두고 싶어 하는 세계가 우리 아래에 펼쳐져 있지. 조그맣게 한 눈에 들어오니 참으로 알기 쉽지 않은가?”
세이자는 자신의 발아래 펼쳐진 조그마한 환상향과 오키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환상향을 과시하듯 보여주는 이 창조주의 의도가 무엇인지 아마노자쿠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다면 자신을 따돌리고 빼앗아보라는 도발인 것일까? 아니면 어차피 이루지도 못할 꿈, 대리 만족이나 하라는 기만인 것일까?
“마음을 가지고 노는데 도가 튼 그대도 내 의중을 헤아리지는 못하나 보군. 그대는 분명 이 환상향을 뒤집어 정점에 올라서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런 그대에게 힘을 선사할 수 있어. 백귀야행을 홀로 상대해도 쓰러지지 않는 생명력과, 강대한 요력을 감당할 수 있는 정신력. 필요하다면 그대를 따르는 휘하 군단도 만들 수 있다. 내가 힘을 불어넣는다면 사물을 요괴로 만드는 것 정도는 간단하지. 츠쿠모가미 군단과는 비교도 안 되는 그대만의 혁명군이 완성될 거야. 그 정도면 이 세계의 정점에 올라서는 것이 간단하겠지. 물론, 그대가 원한다면.”
“아...그러셔?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거냐. 기껏 자기가 만들어놓은 세계를 헤집어놓고, 죄다 엎어버리겠다는 요괴에게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주겠다고?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네 부하가 되거나 할 생각은 없어. 내가 힘을 얻는다면, 네 녀석 또한 벌레만도 못한 입장이 되어 기어 다니게 될 거다.”
“만물을 수호한다는 것은 꽤 힘든 일이야. 미리 동자들도 은퇴시키고 나도 은퇴해서 유유자적한 삶을 사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농담하는 게 아니라고. 아니면 한 번도 이쪽의 입장이 되어 보지 못해서 현실감각이 떨어지기라도 하나보지?”
“반대의 입장이 되어본 적 없어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것은 그대도 마찬가지 아닌가? 아마노자쿠여, 환상향을 지배하는 자가 된 후에 그대는 무엇을 하고 싶은 게냐. 말해보아라.”
“두말할 것도 없어. 모두에게 굴욕을 주고, 힘을 휘둘러서 ... 그러니까 …….”
타인의 마음이나 욕망에 반대되는 짓을 하여 만족감을 얻는 것, 그것이 아마노자쿠. 강자와 약자가 뒤바뀌는 것은 곧 자기 이외에도 수많은 존재가 강자가 되고 갈망하던 권력을 얻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럼 세이자는 아마노자쿠답게 그들의 행복을 방해하기 위해 움직일 수밖에 없다. 다른 이들의 행복을 손 놓고 바라보는 것, 그것은 아마노자쿠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니까.
“설마 아군을 배신한다고 말하고 싶은 게냐.”
“그래, 그거야! 당연하지! 아마노자쿠는 원래 동료 따위 만들지 않아. 다른 녀석들은 전부 이용할 뿐, 그러니 혁명이 성공한 다음엔 하나 둘 끌어내리고 이 내가 환상향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어주겠어.”
”지금 그 말은 이상하군, 공포와 두려움을 이용해 자신을 떠받들게 하고, 절대불가침한 존재로 군림하는 것은 이미 신의 영역에 걸쳐 있어. 결국 신이 되고 싶은 것이냐? 그래, 따지고 보면 아마노자쿠도 신이 지상에 남기고 간 파편 같은 존재,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어도 이상할 것...“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콰악, 하고 둔탁한 소리가 나며 오키나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세이자가 오키나를 덮쳐든 것이다. 오키나의 코앞까지 바짝 다가온 세이자는 의자의 양 팔걸이를 강하게 내리찍으며 분노로 가득한 얼굴을 신에게 들이밀었다. 부릅뜬 눈으로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는 세이자에겐, 눈앞의 인물이 손짓 하나로 자신을 ‘무’로 돌려놓을 수도 있는 신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 같아 보였다.
“역린을 건드렸나보군.”
“내 혁명을 너 같은 것들과 엮지 마. 난 아마노자쿠다. 나는 날 때부터 요괴였고, 죽을 때까지도 요괴다! 그런 내가 신이 될 거라고? 그걸 원한다고? 웃기지 마. 나는 너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게 아니야! 다른 녀석들이 이 나를 신으로 모시려 한다면 신앙을 주는 녀석들부터 그 목을 치고 피를 뿌려서라도 두려워하게 만들어 줄테다. 끊임없이 인간을 습격한다면 요괴로 남아있을 수 있겠지!”
“요괴는 인간을 습격하고, 인간은 요괴를 퇴치하는 것이 요괴와 인간 사이의 관계. 퇴치할 수 없게 된 일방적인 존재를 과연 인간들이 요괴로 인정해주겠느냐.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변덕스러운지는 그대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아하~ 알 것 같군. 소원을 들어준다고 말하면서 내게 접근을 한 이유를 알겠어. 이런 식으로 이 몸의 계획을 돕는 척 하면서 사실은 성공할 수 없다고 나를 세뇌할 생각이지? 결과적으로 내 스스로 혁명을 관두게 만들어 환상향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네 녀석의 계획일거야.”
타인을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처럼, 아마노자쿠는 처음부터 이득만 가져오는 달콤한 제안 따위는 없다고 오키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듣기에 달콤한 제안 안엔 치명적인 독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렇게 독에 잠식되어 괴로워하는 상대를 보고 즐기거나 또 다시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척 착취하려는 것이 오키나의 의도이며, 딱 그 예상대로 그 시커먼 속내가 드러나 것이라고 세이자는 결론지었다. 그녀 스스로가 타인을 그렇게밖에 보지 않고 있으니까. 처음부터 도움 같은 건 기대도 하지 않았다. 호의를 베푸는 척 언제 뒤통수를 칠 지 살피고 있었는데 이런 수법을 쓸 줄이야. 높은데서 내려다 볼 줄 밖에 모르는 신들은 한결같이 역겨운 존재라는 감상에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설득이나 훈계를 들을 리 없는 요괴한테 헛된 노력을 낭비할 정도로 난 어리석지 않다. 그저 그대가 말한 소원의 맹점을 짚어준 것 뿐. 그대가 혁명을 성공시켜 얻는 결과는 이전 체계를 답습하고 다른 이들의 행복을 방관하거나, 그대 손으로 모든 것을 파멸 시키고 홀로 정점에 올라서는 것, 둘 중 하나이다. 어느쪽이든 그대가 아마노자쿠로 남아있고자 하는 그 결심에 모순되는 결과를 낳고 말아. 그럼 모순만 낳을 뿐인 이 소원이 정녕 그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나는 정말 그대의 이야기를 듣고 소원을 들어주러 온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소원에 대해 그대 스스로 납득할 수 있어야만 하지. 재미있군. 아마노자쿠로 남아있길 고집하여 스스로 모순을 낳다니, 그대는 거짓말쟁이로군.”
“새삼 그걸 이제 와서 깨달았어?”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다. 정확히는 ... 그대는 마치 스스로 ‘나는 거짓말쟁이다.’ 라고 선언하는 거짓말쟁이 같다는 얘기다. 스스로 거짓말쟁이라 선언했으나 이는 진실에도 거짓에도 도달할 수 없다. 스스로 만든 모순에 사로잡힌 존재, 그게 지금 나와 이야기하고 있는 그대의 모습일지니. 애초에 말했을지어다. 그대의 편협한 사고가 현실과의 괴리를 만들고 모순을 낳는 것이라고. 아마노자쿠여, 그래선 자기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없다.”
“기분 더러워 죽겠네. 모순이 뭐 어쨌다는 거냐. 그래, 그런 건 너 같은 녀석들의 특기지. 해보지도 않고 그 잘난 머리만 데굴데굴 굴려서 이것은 되고 저것은 안 된다 일찌감치 판단내려버려. 내 생각이 좁다고? 오히려 그런 얄팍한 계산으로 나를 다 꿰뚫고 있다고 착각하는 그 멍청한 생각이 더 좁은 거 아니냐? 그리고 한가지 더. 소원을 이뤄준다고 한 말도, 힘을 주겠다고 한 말도 나는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내 희망사항에 이런저런 트집사항을 잡든 말든 나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이거야!”
오키나의 앞에서 도발적인 말을 이어나가며 손을 그녀의 사각, 자신의 등 뒤로 슬그머니 가져가는 세이자. 거기엔 세이자가 문에 빨려 들어가기 직전 만일에 대비해 보험 삼아 집어든 도주용 아이템이 숨겨져 있었다.
“음습한 녀석. 무슨 꿍꿍이가 있나 보려고 잠시 어울려 주었더니만, 짜증나서 더는 못 들어주겠군. 마지막으로 이쪽에서 충고 하나 해주지. 감히 강자 주제에 이 반역의 아마노자쿠를 회유하려는 생각은 집어치우는 게 좋을거다!”
그 말과 동시에 세이자는 허리춤에서 꺼낸 접이식 양산을 단숨에 펼쳤다. 경계를 조종하는 요괴 현자 야쿠모 유카리로부터 훔쳐온, 그녀의 힘이 담겨있는 도구. 세이자의 요력에 반응해 주인의 능력이 미약하게나마 발현된 양산은 허공에 작은 틈새를 만들어냈다. 보란 듯이 오키나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며 세이자는 열린 틈새 안쪽으로 잽싸게 도망쳤다. 세이자가 빠져나가자마자 틈새는 스르륵 닫히고 남은 것은 상공에 홀로 떠 있는 오키나 뿐. 하지만 일련의 모욕적인 언사와 행동에도 오키나는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저 허탈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가로젓곤, 오키나는 턱을 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참 다루기 까다로운 악동이야. 시간이라면 남아도니까. 생각할 시간을 좀 주도록 할까-.”
2.
세이자의 그릇은 야쿠모 유카리의 능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기엔 너무나 작은 그릇이었다. 틈새를 이용해 모습을 감추고 거리를 벌렸다지만 그 거리는 고작 수십 미터, 오키나가 조금만 주위를 둘러봤으면 지상으로 부리나케 도망치는 세이자가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일부러’ 그러지 않았고, 그 사실을 모르는 세이자는 마음속으로 자신을 속이려 한 신을 실컷 비웃으며 지상에 착지했다.
“자- 이제 어쩐다. 은신처도 들켜버렸으니 새로운 곳을 찾아야 하는데.”
발각 된 은신처는 더 이상 이용 가치가 없다. 하지만 장소는 포기할 수 있어도 안에 모아둔 도주용 아이템들은 포기할 수 없었다. 적어도 도구들만이라도 챙기기 위해 세이자는 자신의 아지트가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공개수배극 자체는 일단락되었다지만 긴 세월 간 쌓은 업보로 인해 그녀를 미워하는 요괴가 환상향 지천에 널려있다. 직접적인 원한이 없어도 얄밉거나 거슬린다는 이유로 그녀를 해하고자 마음먹은 요괴도 있다. 그런 녀석들과 재수없게 마주친다면 도주야 자신 있지만 지금처럼 몸을 숨길 장소도, 반칙 아이템도 없는 상황에선 따돌리는 과정에 큰 힘이 소모될 것이 분명했다. 힘을 비축해도 모자를 판에 오히려 모아둔 힘을 전부 써버리는 악수를 두지 않기 위해서 세이자는 온 감각을 날카롭게 세우고 흔적을 지워가며 조심스럽게 숲 속을 헤쳐 나갔다.
걷기 시작한 뒤로 시간이 꽤 흘러 하늘빛이 어두운 주황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을 때, 세이자의 예리한 감이 그녀에게 경고신호를 보냈다. 누군가 그녀를 따라오고 있었다. 미행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것으로 보아 추적자는 세이자의 위치를 이제 막 알아챈 듯 했다. 지상에 내려왔을 때 세이자는 제일 먼저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철저히 확인했고, 아지트까지 가는 동안에 우회를 하더라도 신중히 움직여 우연히 다른 누군가가 쫓아오거나 마주치는 것을 최대한 피해왔다. 그렇다면 지금 추적자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상공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세이자를 우연히 목격하고 멀리서부터 쫓아 왔다는 것. 그 가능성 또한 어느 정도 예상하여 이동의 흔적을 철저히 지운 세이자였지만 아무래도 추적자는 포기하지 않고 온 숲 속을 뒤지며 그녀를 찾아다닌 모양이었다.
눈치 채지 못한 척 주위를 천천히 살피던 세이자는 나무와 수풀이 가장 우거진 곳을 향해 몸을 홱 던졌다. 추적자를 방심시킨 뒤 그 시야에서 사라져 유유히 따돌리기 위함이었다. 자세를 낮추고 잽싸게 나무와 수풀 사이를 이동하던 세이자는 쓰러져 있는 커다란 고목 뒤로 몸을 숨겼다. 못 찾으면 다행이고, 발각 당할 것 같으면 기습으로 한 방 먹인 뒤 그 틈에 도주하자는 것이 세이자가 즉석에서 생각해낸 도주 전략이었다. 천천히 숨죽이고 귀를 기울이며, 자신을 쫓아오던 기척이 가까워지길 기다리던 그때…….
“찾았다~ “
세이자의 눈앞에 검은 무언가가 인정사정없이 빠른 속도로 내리꽂혔다. 상황을 살피거나 공격하려고 몸을 내밀었으면 틀림없이 머리나 몸이 꿰뚫렸을 것이 분명한 아슬아슬한 거리. 그리고 그 공격으로 세이자의 움직임이 봉인된 잠깐의 순간을 상대는 놓치지 않았다.
“한참 찾았잖아. 뭐야, 겁쟁이처럼 잔뜩 쫄아가지곤. 고생시킨 만큼 콱 찔러 버린다?”
“누가 쫄았대. 보나마나 귀찮은 녀석일게 분명하니 떼어놓으려 그랬지. 고생 좀 하셨어? 그럼 내가 노린 대로 된건데 말이야.”
고목 위에 올라서 세이자를 내려다보는 검은 그림자. 어둑어둑한 숲의 그림자에 가려 그 얼굴은 알아보기 어려웠으나, 그녀의 등 뒤에서 꿈틀거리는 화려한 원색을 띈 이형의 날개만으로도 그녀가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난 또, 어떤 할 일없는 녀석이 따라붙었나 싶었는데, 진짜로 하는 것 없는 잉여 녀석이 올 줄은 몰랐네.”
“실례야. 절에서 이것저것 시키기는 하니까 일이 없는 건 아니라구. 안할 뿐이지. 나 같은 대요괴가 복도나 닦고 있으라니 말이 돼? 하기 싫어 몸이 비틀리는 줄 알았는데 마침 하늘에서 어떤 바보가 휙 떨어져 내리는 게 보이지 뭐야. 또 재미난 일이 벌어지는구나 싶어서 살짝 끼어들어 보려 했지.”
타인을 속이는 일이라면 아마노자쿠 못지않게 유명한 요괴 누에. 아마노자쿠가 거짓말이나 속임수로 원망과 증오의 감정을 끌어내는 요괴라면 이쪽은 자신이나 사물의 정체를 속여 공포와 두려움의 감정을 일으키는 요괴다. 방식에 차이는 있어도 기본적으로 속임수로 살아간다는 공통점을 가진 두 요괴. 그런 공통분모 덕분에 둘은 환상향이 생기기 이전부터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정체를 들키면 힘도 제대로 못쓰는 게.”
“제대로 쓸 힘조차 없는 녀석보단 강할걸?”
땅에 깊게 박힌 창을 빼내며 누에는 세이자가 퉁명스럽게 던진 말을 받아쳤다. 누에가 던진 창은 날 부분의 반 이상이 딱딱한 지면에 박혀있었다. 환상향에 온 뒤로 이전에 비해 많이 약해졌다고는 하나, 세이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는 증거였다. 욕이라도 날릴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올려다보는 세이자였지만, 머릿속으로 만큼은 냉정하게 둘의 힘 차이를 파악하고 있는 그녀였기에 누에의 맞도발에 딱히 새로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누구한테 쫓기고 있었어? 떠돌이 요괴들? 우리 쪽 녀석들? 아니면 네가 이용해먹으려다 실패한 녀석들? 참 아이러니해. 혁명을 주도한 누구는 이렇게 쫓기고 있고 이용당한 녀석들은 약자 취급에서 벗어나 저마다 새로운 삶을 찾아 행복한 삶에 정착했으니까. 잘 됐네 잘됐어~.”
“벗어나긴 무슨 ... 굴복한 거지. 이놈이나 저놈이나 조금만 구슬리면 홀라당 넘어가가지곤, 뭐, 그러니까 이용하기 편했던 거지만. 나도 딱히 쫓기고 있던 건 아니야. 그냥 너보다 100배는 귀찮은 녀석을 만났지. 아~주 짜증나는 녀석이었어.”
“무녀거나 틈새요괴거나 바른말하기 좋아하는 네 공주님이었나 보네~”
“다 틀렸어, 그런 녀석들이면 차라리 낫지. 신이라는 작자였어, 그것도 뭐 엄-청 대단하신 분이라고 하더라고? 아주그냥 거만함이 풀풀 풍겨져 나와서 토 나올 것 같았어. 소원을 이루어주겠다면서 뭐 자기 정도쯤 되면 이 내가 환상향을 지배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다나? 하, 다 듣기 좋은 개소리야.”
“오~ 흥미로운데. 좀 더 이야기 해줘봐. 거부할 없는 제안을 해온 것 같은데. 요정 같이 단순한 녀석들이라면 좋다고 받아들일만한 이야기야. 그런 솔깃한 제안을 하필 아마노자쿠 같은 요괴에게 해오다니, 이상한 취향의 신인가봐. 하지만 넌 거절했겠지, 그치? 네 성격과 자존심에 남이 내민 손을 덥석 잡을 리 없잖아.”
“이 몸이 누구시냐, 악의와 오기로 똘똘 뭉친 아마노자쿠님이시다. 내가 다른 녀석을 이용할 수는 있어도 다른 녀석이 날 이용하는 건 못 참아. 내가 이용하는 쪽이 아니면 결코 손을 잡지도 않고, 더욱이 자기가 강하다고 믿는 녀석들의 거래에 어이구 나으리 하면서 고개 숙이지도 않는다고. 당연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척 비웃어주고 빠져나왔지. 지금쯤 그 녀석, 너무 화나서 또 공개수배령이라도 내리는 건 아닌지 몰라.”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툭툭 털고 세이자는 다시 원래 가려던 곳으로 향했다. 그 뒤를 둥둥 떠서 따라오는 누에. 따라오지 말라고 해도 말을 안 들을 것이 뻔했기에 딱히 뭐라고 하진 않았다. 아지트의 위치가 들키긴 하겠지만, 어차피 도구만 챙기고 떠날 곳이었으므로 문제 될 것도 없었다.
“자신이 어찌될지 모르는데도 일단 약 올리고 보는건 여전하네.”
“그냥 도망치면 없어 보이잖아. 최소한 기분만큼은 더럽게 만들어줘야지.”
“찌질해. 그런데 좁은 마인드로 살다간 너,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
“죽일 수 있으면 죽여보라지. 아, 그 녀석도 비슷한 말을 하던데. 나보고 생각이 좁아서 모순에 빠졌다나. 혁명이 성공하면 결국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체계 속에서 다른 녀석들이 행복하게 웃고 있는걸 방관하거나 홀로 모두를 짓밟고 올라서 초월적인 존재, 그러니까 신이 되는 것밖에 선택지가 없다고 했어. 어느 쪽이든 내가 아마노자쿠로 남아 있을 순 없을거라고 말이지. 생각 자체가 건방져.”
“머리를 조금만 굴리면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는데. 다시 한 번 더 세상을 뒤집어버린다거나, 적당한 때 퇴치 당해서 요괴로 남아있든가.”
“그럼 모처럼 성공시킨 혁명이 의미 없어지잖아.”
“그게 아마노자쿠답게 살아가는 방법일 수도 있지. 자신의 본질을 헷갈리고 있는 것 아닌가 몰라~”
“난 누구보다 내 본질에 충실히 아득바득 살아가고 있어. 그러는 너야말로 정체불명이 아이덴티티인 요괴면서 너무 미적지근해진 거 아니야? 대놓고 본모습으로 절에서 잡일이나 하고 지내는 옛 정체불명의 요괴라니, 옛날에 쌓은 명성이 울겠어.”
“너, 남들이 만든 규칙에 얽매이는 건 끔찍하게 싫어하면서 정작 자기는 빡빡한 잣대를 가지고 있구나? 과연, 속만큼이나 생각도 좁아. 그러니까 남도,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거야.”
“내 말이 틀렸어?”
“정체불명은 어떤 방향으로든 달성할 수 있어. 인간의 사고란 주무르기 편해서 인식을 조금만 비틀어 놓아도 진실을 보지 못하고 허상을 덧씌우지. 도시 전설 같은 작은 소문만으로도 인간은 멋대로 없던 괴물을 만들어내거든. 나는 그런 걸 이용하면 되는 거야. 내가 절에서 이 모습으로 지낸다고 완전히 무력해졌다고 생각해? 나는 내가 움직이지 않고도 마을을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로 쥐었다 폈다 할 수 있어. 스케일도 작고 무녀의 방해도 심해서 예전만큼은 잘 안되곤 있지만. 나 정도 되는 요괴라면 상황을 조작해서 내 모습을 알고 지내는 녀석도 겁에 질리게 만들 수 있어. 너도 아까 내가 뒤를 밟았을 때 엄청 긴장했잖아? 아니라곤 하지만 솔직히 쫄지 않았어? 응? 바짝 날이 서서 쭈뼛쭈뼛 움직이는 모습이 재밌어서 일부러 아는 척 안하고 계속 쫓아갔던 건데.”
“안 쫄았다고. 결국 모습을 드러내는 바람에 예전보다 약해지긴 했다는 거잖아.”
“그건 명련사가 마음에 들어서 내가 내린 선택이야. 하지만 조금 약해지면 어때, 내 아이덴티티가 힘 덕분에 얻어진 것도 아닌걸. 그러니까 착각하지 말라니까? 능력에만 의존해서 밥줄이 끊긴다고 징징거리는 건 너같이 생각 좁은 녀석들이나 그러는 거야. 넓게 보지 못하고 외길 하나만 바라보고 있으니, 길 하나가 끊기는것만으로 갈 곳을 못 찾고 뱅뱅 같은 곳만 돌 수밖에. 아아~ 불쌍하다 불쌍해. 한 번 잘 생각해봐. 네 본질을 지켜내기 위한 방법이 정말 하극상이 맞는건지.”
이죽거리며 비꼬는 말투가 듣기 거북했지만 딱히 반박할 수 없었다. 특히 신경 쓰이는 마지막 한 마디가 세이자의 마음 한 구석에 연달아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나는 왜 하극상을 일으키려 했던 거지? 나는 왜 강해지려고 했던거지? 쫓겨다니기 바빴던 지난 시간들 동안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들이 연달아 그녀의 머릿속에서 생겨났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신은 네게 힘을 주어도 그 힘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할 것 이라는 걸 알고 있었을 거야. 자신의 목표와 수단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바보녀석에게 좋은 도구를 쥐어줘봤자, 그 바보는 그걸 휘두를 생각은 못하고 꿈을 이뤘다며 도구를 품안에만 끌어안고 있을걸?”
“거 듣자듣자하니 못 하는 소리가 없네, 아주.”
“어리석은 요괴에게 주는 대요괴님의 충고니까 잘 들어. 네가 그렇게 입에 달고 다니는 혁명이니 하극상이니 하는 것은 1회성 명분이야. 그리고 네가 힘을 얻고자 하는 이유, 그것이 무력으로 나 같은 녀석들을 찍어 누르기 위해서는 아니잖아. 힘을 휘두르고 싶은 곳은 정작 다른 데 있는데 엉뚱한 곳을 목표로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처음부터 세이자의 위치는 밑바닥으로 정해져 있었다. 남이 기뻐하는 모습을 눈뜨고 못 보는 천성과 별개로 힘이 강한 순서대로 시스템을 정하고 그에 맞춰 돌아가는 요괴들의 사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의 사회를 무너뜨리고 그 위에 올라 서 있던 녀석들의 수치와 당혹으로 일그러진 표정이 보고 싶었다. 무소불위로 휘두르던 권력을 빼앗기고 자신을 원망하며 닿지 않는 주먹을 내지르는 비참한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 뒤는 어찌되든 상관없었다. 자신을 떠받들어 주거나 숭배하는 그런 건 필요 없다, 그저 무료할 때마다 그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며 굴욕스러워하는 표정을 볼 수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힘이었다. 세이자가 가진 무엇이든 뒤집을 수 있는, 상대의 파워나 능력조차 마이너스로 만들 수 있는 역전의 능력. 하지만 그 ‘뒤집는다’ 라는 행위 자체가 힘을 소모한다. 상대가 물이 든 그릇이라면 세이자의 힘은 그릇을 들어 뒤집고 물을 전부 쏟아내게 하는 것. 그러나 그릇 안에 든 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릇을 뒤집는데 더 많은 힘이 필요해진다. 지금의 세이자는 고작 자기의 그릇과 크기가 비슷한 그릇밖에 들어 올리지 못하지만, 그녀는 환상향이란 거대한 그릇을 뒤집고 싶어했다. 그래서 힘을 모으고자 했던 것이다.
스스로에 대해 곰씹어보며 세이자는 자신이 내뱉은 말과 본심이 크게 어긋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짓말도 반복하다보면 진실로 굳어지듯, 거짓 명분도 반복하여 내세우다 보면 스스로 그 명분을 진짜로 받아들이고 움직이게 된다. 지금의 세이자가 그러했다. 힘이니 혁명이니 하는 것들은 전부 수단에 불과한 것들이었을 텐데, 어느샌가 누에의 말처럼 수단과 목표가 뒤바뀌어 있었다. 세이자가 진정 추구하던 것은 혁명으로 바뀐 사회를 건설하는 것도, 새로운 사회의 지배자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네가 진짜로 이루고 싶었던 것은 네가 속여먹은 녀석들이 원하는 것과 달라. 자신마저 속이지 말라고, 아마노자쿠.”
우뚝 세이자의 발이 걸음을 멈췄다. 수풀과 낙석에 가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 천연 동굴. 그곳이 아까 전까지 세이자가 머물던 그녀의 은신처였다. 좁고 텅 빈 동굴은 마치 지금껏 그녀의 사고를 가둬놓은 허울 좋은 명분과 그에 대한 집착을 보는 것만 같았다. 이제는 더 이상 쓸모없어진 장소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 세이자는 잠시 후, 무언가 결심했다는 듯 성큼 안으로 들어가더니 자신의 도구들을 전부 챙겨 밖으로 나왔다.
“이제야 뭘 좀 깨달은 모양이네. 그럼 이제 어디로 갈 셈이야? 또 바퀴벌레처럼 이런 곳에 박혀있지 말고~ 내게 공손히 부탁한다면 당분간 절에 숨어 지낼 수 있도록 히지리한테 잘 이야기 해줄 수도 있어. 네가 앞으로 무슨 짓을 할지, 그리고 그 신이라는 녀석이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좀 더 지켜보고 싶어졌거든. 그때가 오면 살짝 끼어들고 싶기도 하고~”
“흐음 ... 그렇지. 이거 어쩌냐. 친절한 조언 덕분에 깨달은 것도 있고, 네 강력한 요기에 숨어 은신처까지 잘 올 수 있었으니 고마워서 어쩔 줄 모르겠네.”
“그렇지?”
“그러니까, 내 답은 ‘이거’다.”
누에의 앞으로 휙 하고 무언가가 던져졌다. 그것이 심지가 타들어가고 있는 여러 개의 폭탄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미 도화선에 당겨진 불씨는 폭탄의 본체와 막 맞닿으려는 참이었다.
“어 ... 야, 야!?”
콰-앙, 어둠이 내려앉은 숲의 정적을 깨고 밝은 불꽃과 우렁찬 폭음, 그리고 매캐한 연기가 가득 피어올랐다. 폭탄이 터지기 직전 잽싸게 몸을 뒤로 피한 덕분에 누에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자욱한 연기가 걷히고 난 그 장소에 세이자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쩐지 그 녀석이 순순히 고맙다고 할 리 없지. 하여간 나이만 먹었지 순전히 애라니까. 꼴에 자존심만 살아서는. 끙 ... 그나저나 땡땡이 친 사실은 진작 들켰을텐데 뭐라고 변명해야하나몰라.”
뒤늦게 자신에게 닥칠 후환을 걱정하는 요괴를 뒤로 한 채, 아마노자쿠가 떠난 숲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고요를 되찾고 있었다.
3.
음습하면서도 낯익은 기운을 느끼고 신묘마루가 잠에서 깼을 때는 아직 한밤중이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조용한 방 안에서 신묘마루는 장지문을 통과해 들어오는 달빛을 조명삼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씩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며 희미하던 가구나 벽장식의 윤곽이 차츰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윽고 신묘마루의 시선이 한 군데 멈춘다. 달빛이 닿지 않는 완전한 어둠의 영역, 그 안쪽으로부터 빠져나와 빛과 어둠의 경계선에 걸친 거친 맨발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신묘마루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요괴의 이름, 그리고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알아챈 듯 발의 주인 세이자는 선뜻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너... 너어 ... 세이자!!”
“오랜만이야, 공주. 그간 별 일 없으셨는지?”
“인사할 때가 아니라! 이 성엔 무슨 이유로 또 찾아온 거야? 여기까진 어떻게 들어온거고? 분명 성을 지키는 츠쿠모가미도 있었을 텐데.”
“한때 이곳에서 함께 하극상을 준비해온 몸, 성의 지리라면 도주로부터 보물창고까지 전부 알고 있지. 성 안의 츠쿠모가미들이라면~ 글쎄?”
세이자의 말에서 강조된 보물이란 단어. 그리고 그녀가 실실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보란 듯이 등 뒤로 감춘 손에서 얼핏 삐져나온 망치자루. 신묘마루는 금세 이 뼛속까지 시커먼 요괴가 자신의 성에 숨어들어온 이유가 무엇인지 떠올렸다.
“요술망치 ... 그걸 훔쳐냈구나!”
벌떡 일어나 달려드는 신묘마루. 그러나 세이자가 휘두른 손에 그녀의 작은 체구는 아까의 기세가 무색할 정도로 너무나도 쉽게 짓눌려 제압당하고 말았다. 딱히 신묘마루의 신체에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었기에 세이자는 신묘마루가 다치지 않도록 최소한의 힘으로만 압박하며 흥분한 그녀에게 말을 붙였다.
“오랜만의 환영 인사치곤 너무 과격한걸, 공주.”
“이거 안 놓으면 바늘로 벌집을 만들어 주겠어.”
“오오 무서워라. 이 상태로 어떻게 말입니까, 공주님? 일단 진정하고 내 얘기를 들어보는 건 어때? 마침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잔뜩 있었고, 요술망치 이야기는 이 다음에 생각해보자고. 대답에 따라 요술망치를 돌려줄 수도 있어.”
“네 말은 거짓말투성이니까 결국 안 돌려주겠다는 뜻이나 다름없는걸.”
“그건 스스로 한 번 생각해봐. 아무튼, 우선 제일 궁금했던 건데, 그 웃기지도 않은 현상수배극은 왜 벌인 거야? 무녀나 그 기분 나쁜 틈새요괴가 살려주는 댓가로 날 바치라고 말하기라도 하던가?”
“세이자를 수배한건 순전히 내 의지로 일으킨 일이였어. 틈새요괴가 제시한 건이긴 하지만 ... 네가 말한 것처럼 환상향의 모든 사람이 다 약자를 차별하거나 괴롭히지도 않았고, 약하다고 해서 모두가 너처럼 힘을 잔뜩 얻어 복수하고 싶어 하는 것도 아니었어. 오히려 우리의 혁명이 성공했다면 이런 좋은 사람들까지 피해자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어. 그래서 널 불러다 놓고, 아니 강제로라도 묶어놓고 설득하려 했던거야.”
“좋은 답변이야, 공주.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제일 기분이 좋아지는 답이었어.”
“어, 정말?”
“물론 거짓말이지, 단순하긴. 하아 ... 그 갑갑하고 구역질나는 오니의 나라에서 힘겹게 누구씨를 구해내고 목표를 부여하고, 거기에 협조해줬는데 정작 그 누구는 배신도 모자라 똑같이 환상향 시스템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니. 공주, 공주가 다른 녀석들을 동정할 처지라고 생각해? 따듯한 바깥 햇살에 나와 만나기 전의 기억마저 싹 녹아버린거야?”
신묘마루가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과거의 일을 어떻게 잊으랴. 강자는 지배하고 약자는 복종한다, 이 논리가 극에 달한 오니들의 세계. 그야말로 힘이 없는 자는 어떠한 발언권도 거부권도 얻을 수 없는 잔혹한 곳이다. 그 곳에서 소인은 오니들에게 발에 차이는 벌레만도 못한 존재, 아니, 실질적으로는 벌레보다도 비참한 존재였다. 재산, 기술력, 노동력 모든 것을 오니들에게 빼앗기고 그저 목숨만 부지한 채 하루하루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것이 소인들의 일상이었다.
신묘마루도 그런 소인들 중 하나였다. 그렇게 착취당하는 삶을 이어가던 도중, 어느 날, 오니같이 생겼지만 똑같이 그들을 증오하는 요괴가 자신에게 다가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지금 세상은 썩어빠진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와 함께 세상을 바꾸어 약자가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보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해준 그 요괴, 아마노자쿠는 신묘마루에게 있어 처음으로 자신들을 위해준 구원자이자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발판을 제시해준 선도자였다. 비록 혁명은 실패했지만, 세이자가 아니었다면 신묘마루는 지금과 같은 행복을 절대 누리지 못하고 여느 소인과 다름없이 오니의 나라에서 착취당하는 삶을 이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잊지 않았어! 거기서 날 꺼내준 건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구. 많은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이고 ... 하지만, 세이자가 말한 혁명의 방식은 옳지 않다고 봐.”
“허, 참 ... 그렇게 당해놓고 갑자기 생각이 바뀌다니 어이가 없구만. 억울하지도 않아? 분하지 않아? 공주가 생각하는 혁명의 목적은 무엇이었지? 선의의 피해자는 전혀 만들지 않고 결과적으로 모두가 잘 먹고 잘 사는 세상. 그런 건 있을 리 없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잖아? 모두에게 복수하려던 게 아니었어? 실컷 갚아줘야 직성이 풀리는 거 아니었냐고.”
“처음엔 나도 내가 그걸 원하는 줄 알았어! 세이자의 말이라면 다 옳다고 믿었으니까. 강한 놈들은 다 나쁜 녀석들이고 혼내줘야 한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레이무들을 만나고 세이자가 내게 해준 말들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되고나서 생각이 변했어. 이곳은 세이자가 말한 증오를 쏟아내고 피의 복수로 씻어내야 할 더러운 세상이 아니었어. 감정이 향할 곳이 없어지니 자연스럽게 복수심도 옅어졌지. 그러다보니 내가 감정이 앞서 착각하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거야. 내가 진짜 뒤집고 싶었던 건 약자를 착취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는 힘의 논리 그 자체지, 기존의 파워 밸런스가 아니었어. 세이자의 말대로 강자와 약자를 뒤바꾸기만 해서는 ... 이전과 다를 게 없잖아. 나는 해방되겠지만 다른 선량한 누군가가 원래의 우리의 위치에서 핍박 받았을 거야. 난 그런 결말을 원하지 않아. 미안해, 세이자. 내가 진짜 바라고 있었던 혁명의 방식은 너가 생각한 것과 다른 것 같아.”
신묘마루의 말을 듣고 있는 세이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런 그녀에게 든 감정은 분노가 아닌 당혹, 혐오. 이렇게 이 녀석이 물러 터졌다니, 나는 이런 녀석을 위해 나 자신의 본질을 착각할 정도로 애써온건가? 자신이 쏟아온 노력과 시간이 도구였던 녀석에 의해 전면으로 부정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생각과 동시에 신묘마루를 향한 질투 비슷한 감정이 꿈틀거렸다. 눈앞의 소인보다 몇 배는 더 영리하다고 느낀 자신조차 모순의 늪에 빠져 허우적댔는데, 자신을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면서, 세상 물정 하나 모르고 귀하게 자란 녀석이면서, 세이자보다 먼저 자신의 본심을 파악하고 저렇게 또렷하게 주관을 말하는 모습이 납득되지 않았다.
아지트를 떠난 세이자가 휘침성으로 찾아온 이유는 신묘마루의 생각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신묘마루에게 영향을 받아 혁명이란 거짓 명분에 취해 모순에 빠진 자신처럼, 어쩌면 신묘마루도 무녀나 주변 녀석들의 영향을 받아 괴리에 빠진 것은 아닐까 했었다. 그렇다면 그 괴리를 바로잡아주마, 신묘마루가 나아가야 할 길은 복수라는 이름의 과업을 달성하러 가는 길임을 깨우쳐주고자 했다. 하지만 신묘마루의 대답은 그 반대였다. 오히려 신묘마루는 세이자보다 한참 전에 자기 안의 모순을 깨닫고 자신과 세이자와 지향점이 다르다고 결정내린 상태였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갈라져 지낸 사이 신묘마루는 자신의 시야를 넓히고, 사고의 한계가 불러오는 모순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이미 그녀는 세이자로부터 독립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신묘마루의 정신이 그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세이자와 떨어져 있는 동안 만난 여러 인연들의 도움이 컸지만 늘 혼자인 것이 당연한 아마노자쿠가 이 사정을 알 리 없었다.
신묘마루에게 건 기대가 산산이 부서진 세이자의 삐뚤어진 사고회로가 삐걱거리며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나와 방향이 다르다는걸 깨달았다고? 아니다, 공주는 나와 동류다. 세상에 대해 좋지 않은 경험밖에 없는, 마음 한 구석에 증오를 가득 품고 있는 녀석이다. 공주는 아까 전까지의 나처럼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게 틀림없다, 다만 단순해서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나는 아마노자쿠다. 무엇이든 뒤집는 존재다. 공주가 스스로의 생각이 옳다고 믿고 있으면, 그 방향이 나와 반대라고 믿고 있으면 통째로 뒤집어주자. 그 생각이 틀렸음을. 그리고 결국 나와 같은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세이자는 기억을 되돌려 지난날을 되짚어봤다. 신묘마루와 갈라서고 도피 생활을 전전하며 주워들었던 환상향의 소식들, 그리고 그와 같이 들려왔던 신묘마루의 행보를 하나씩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 그 안에 섞여있을 신묘마루의 모순을 탐색했다. 짧은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세이자의 입가가 일그러지며 사악한 웃음을 자아냈다. 이 웃음은 아마노자쿠의 부정적인 쪽으로 예리한 사고가 신묘마루의 약점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는 신호였다.
“공주. 그러고 보니 나와 떨어져 있는 동안 꽤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지? 괴담 소동이라든가, 빙의 소동이라든가.”
“그랬지? 세이자는 그 때 도망 다니던 중 아니었어?”
“세상 돌아가는 일은 다 꿰고 있어야 계획을 더 수월하게 짤 수 있으니까. 나야 도망 다니느라 바빴다 쳐도, 공주는 그 때 뭘 하고 있었지? 응?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하진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뭐어 ... 어떻게 하면 큰 몸이 될 수 있을까 그 방법을 찾느라 조금 바쁘게 보냈지. 지저부터 바깥세상까지 안 가 본데가 없을 정도로.”
“싸움 걸고 다녔잖아? 이 녀석 저 녀석 안 가리고. 그 때 기분은 어땠어, 공주? 솔직히 말해봐. 닥치는 대로 힘을 휘둘러 다른 녀석들을 쓰러뜨렸을 때 무지 기분 좋지 않았어? 나름 한 가닥 하는 놈들이었잖아. 그런 놈들 사이에서 한바탕 날뛰니까 즐겁지? 막 인정받는 것 같고, 뭐라도 된 것 같고.”
“마, 말이 심하네! 기분 좋은 것도 맞고 재밌었지만 그게 뭐 어때서!”
“자신의 말을 잘 생각해봐, 공주. 공주는 분명 썩어빠진 힘의 논리를 바로잡는 게 목적이라고 했지. 선량한 녀석들이 피해보는 것도 싫다 했고. 하지만 내겐 이미 공주가 그 썩어빠진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버린 것 같은걸. 환상향의 강자들이 정한 룰 속에서 다른 녀석들을 쓰러뜨리며 자기 욕구를 채우는 모습이 오니 같은 녀석들과 뭐가 달라? 그리고 공주가 쓰러뜨린 녀석들은 과연 나쁜 녀석들이었을까? 아니지, 아니야. 분명 이변을 해결하려 분주히 애쓰던 녀석들도 있었을 거야. 공주가 그 녀석들의 발목을 잡은건 아닐까? 공주 때문에 해결이 늦어지고 피해가 더 커진 건 아닐까? 공주가 괜한 일에 껴들어서 말이야.”
“그렇지 않은걸. 나는 싫다는 녀석을 괴롭히지도 않았고 ... 또 남을 다치게 한 기억도 ... ...”
조금만 생각해보면 억지로 트집 잡는 것에 불과한 말들, 하지만 세이자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세이자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신묘마루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신묘마루는 전투 중 느꼈던 흥분과 그때 자기가 내뱉은 말들을 떠올렸다. 커지고 싶다는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을 막아서는 이들에 맞선 사실을 떠올렸다. 자기가 다른 사람들 마냥 멋대로 소동을 일으키고 있는 동안 무녀 일행이 이변의 주모자를 무찌르고 사건을 해결한 사실을 떠올렸다. 세이자의 말을 전면으로 부정하기엔 그런 기억 하나하나가 양심을 괴롭혔다. 한편, 그런 신묘마루의 반응은 세이자에겐 그야말로 당첨 제비나 마찬가지였다. 속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으며, 세이자는 신묘마루를 짓누른 풀어주며 태도를 180도 바꾸어 말했다.
“아아, 고뇌하고 있군요, 공주님. 하지만 저는 이해할 수 있어요. 어쩌겠어요, 눈앞에 원하는 것이 있으면 갓난아이라도 손을 뻗어서 잡으려 할 것이고, 눈 앞에 축제가 벌어지고 있으면 가보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죠. 당연한 이치에요. 그래요, 분명 공주님은 이성적으론 저와 다른 길을 걷겠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공주님이 저 없이 스스로 찾아낸 목표라니 과연 대견해요. 하지만 그 목표는 대의를 생각하여 정한 것이 아닌가요? 공주님이 진정 하고 싶어 하는 것은 대의랑 전혀 관계없는 일이에요. 그리고 그것은 이 아마노자쿠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죠. 왜냐하면, 공주님은 결국 저와 동류니까.”
어떠한 반론이나 변명도 허락하지 않고 나긋나긋한 말투로 아마노자쿠는 눈앞의 소인을 몰아붙인다. 신묘마루가 가진 올바른 마음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여 뒤집어쓴 위선의 껍데기일 뿐이라는 것을, 하지만 결국 신묘마루와 자신이 원하는 것은 같다는 것을 주입하기 위해. 신묘마루는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었다. 그러는 것이 당연했다. 지금껏 이 소인 주변에 붙어있던 누구도 이런 식으로 그녀의 마음에 파고들려 하지 않았으니까. 이제 세이자가 조금만 더 구슬리면 신묘마루는 그녀의 말에 완전히 굴복하여 전처럼 그녀의 도구가 되어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이자는 그녀를 이용하여 모순 따위 일절 없는 자신의 진짜 소망을 실현할 수 있게 된다. 그 소망을 이루는 데에 신의 도움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이제 앞으로 한 걸음, 세이자의 새로운 계획이 이 자리에서 막 태동하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그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더니, 꽤 재밌는 짓을 하는구나, 아마노자쿠여.”
세이자의 등 뒤, 처음과 마찬가지로 벽 밖에 없었던 공간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4.
이 순간, 세이자는 생각했다. 왜 하필 지금이냐고. 어떻게 이렇게 절묘한 타이밍에 자신을 방해할 수 있느냐고. 그러면서 그녀는 이 거만한 비신이 자신을 놓친 것이 아니라 고의로 풀어주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결국 신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 꼴이 된 세이자의 표정이 수치와 분노로 찌푸려졌다.
“끝까지 지켜보려 했지만 그대의 행동은 꽤 예상 외여서 말이다, 아무래도 하루의 절반은 그대 같이 약삭빠른 자에게 너무 긴 시간이었나 보군. 그래도 원하던 답을 찾은 것 같으니, 이번엔 확실히 그대의 대답을 듣도록 하겠다. 또 도망치면 곤란하니 실례인 것은 알지만 잠시 움직임을 묶어두도록 하지.”
오키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 뒤에서 두 명의 그림자가 튀어나와 세이자에게 달려들었다. 한 명은 등 뒤에서, 손을 구속하고 세이자가 건방진 비신의 면상에 휘두르기 위해 고쳐 잡은 망치를 빼앗았다. 다른 한 명은, 날카롭게 끝이 잘린 대나무를 그녀의 목에 가져다대며 저항의 여지를 완전히 봉했다.
“자~자~ 파이널 앤서의 시간이야, 아마노자쿠.”
“정말~ 처음부터 얌전히 굴었으면 이렇게 강제로 묶어두지 않아도 되었는데~ 지금 스승님은 서비스 정신 가득이라고!”
“후후, 손에 든 가짜 보구로 어찌 해볼 셈이었더냐. 이런 상황에서 두 번 씩이나 나를 기만하려고 하는 그 용기는 칭찬해주고 싶구나.”
“어? 그거 가짜였어, 세이자?”
“공주는...끼어들지 마. 지금 열 받아 죽겠으니까.”
“다른 이에게 화풀이를 하면 쓰나. 그래도 이번엔 아마노자쿠의 말이 맞다. 소인이여,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겠지만 이 아마노자쿠가 내 물음에 진실한 답을 할 때까지만 잠시 기다려 주는 것이 어떻겠느냐. 그대의 궁금증은 그 뒤에 풀어주도록 하겠다.”
그렇게 말한 뒤 오키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세이자의 앞으로 다가왔다. 친근하면서도 무게 있는, 자애로우면서 진실을 꿰뚫어보는 날카로운 시선이 세이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물어보겠다, 아마노자쿠여. 그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더냐? 내 그대가 소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 지금쯤이면 이미 그대를 사로잡은 모순에서 벗어나 자신의 본심과 마주하는 데 성공했겠지. 나는 그 대답을 기대하고 있다. 모순되거나 거짓되지 않은 그대의 진실한 대답을.”
“아 ... 진짜 ... 못해먹겠네.”
“음?”
“그러니까, 그 빌어먹을 질문 좀 그만 물어보라고! 이렇게까지 시원하게 남의 계획을 말아먹고 뻔뻔하게 잘도 물어보시네. 대답이 듣고 싶냐! 오냐, 해주지! 내 앞에서 꺼져, 그게 이 몸의 소원이다! 말했잖냐, 너 같은 놈들의 동정을 사는 것도 도움을 받는 것도 끔찍하게 싫다 이거야. 이 몸은 뼛속까지 아마노자쿠다. 난 이 환상향, 잘난 네놈들이 만든 세상을 혼란스럽게 휘저어 놓을 요괴라고! 새로운 질서? 집어치우라지! 세상을 뒤집고 뭘 할 거냐고? 또 뒤집어 놓을 거야! 뒤집고 뒤집고 또 뒤집어서, 그 때마다 엉망진창으로 무너져가는 세상을, 너희들이 골머리 앓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봐주지! 그래, 애초부터 혁명 후에 어떻게 처신할지 왜 걱정해야 되는거냐. 내가 뒤집기 시작한 세상에 질서 같은 건 존재하지 않을건데! ‘내 하극상’은 내가 계획하고 내가 실행한다. 이용할 도구도 내가 선택하고 결행의 날도 내가 직접 정할거야. 그래야 네 녀석들이 더 당혹스러워 할 테니까. 기대하고 있어라, 예상치 못한 데서 이 환상향에 불행과 혼란을 선사해 줄 테니. 오늘의 빚도 잔뜩 뜯어내주겠다고!”
쩌렁쩌렁 방이 울릴 정도로 한참을 내뱉고 나서야 세이자는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다듬었다. 스승에게 불경한 태도를 드러낸 이 요괴를 어찌해야할지 곤란해 하는 두 동자와 세이자가 외친 충격적인 내용에 얼빠진 표정으로 세이자를 쳐다보는 신묘마루. 그들의 표정과 대조적으로 자기 진심을 입 밖으로 전부 털어낸 거짓말쟁이 아마노자쿠의 표정은 후련함이 가득했다. 그리고 다른 한 명, 세이자의 대답을 들은 오키나는 ...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 ... 하핫, 아하핫! 재미있군, 참으로 재미있어. 그래, 그것이 그대가 찾은 답이더냐. 훌륭하다. 참으로 아마노자쿠다운 대답이군. 의미 없는 짓이라도 계속 세상을 뒤엎어 놓는다라. 애초에 내가 언급하지 않았을 정도로 비논리적인 선택지가 그대의 모순을 돌파하는 출구였을 줄이야. 역시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는 자들은 삐뚤어진 눈으로 보는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가. 만족스러운 답이 되었다, 아마노자쿠여.”
“호오 ... 그럼 내 소원을 들어주는 건 맞지?”
“그래, 질문을 멈추고 그대에게서 물러날 것이 그대의 소원이었지. 마이, 사토노, 아마노자쿠를 풀어주도록. 귀찮게 해서 미안하게 되었군. 그대는 자유의 몸이다. 소원은 확실히 이루어주었다.”
오키나의 지시에 세이자를 구속하고 있던 동자들이 구속을 풀고 물러났다. 풀려남과 동시에 세이자는 잽싸게 자신이 떨어뜨린 레플리카 요술 망치를 집어 들곤, 어깨에 두른 보라색 천을 뒤집어쓰더니 그대로 모두의 앞에서 모습을 감춰 버렸다. 오키나의 마음이 바뀔까 의심하여 잽싸게 도망친 것이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도주극이라 얼이 빠져있던 신묘마루에겐 세이자를 붙잡을 일말의 여유조차 없었다.
“과연 ... 그렇게 많은 강자들을 따돌린 수배범답군. 저렇게 잽싸서야, 도망치는 속도만큼은 텐구와 비교해도 되겠어.”
“저기 ...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그쪽은 누구고, 세이자하고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리고 세이자가 방금 한 말, 저건 거짓말이 아닌 거지?”
“아아, 잊을 뻔 했구나. 이 야심한 시각에 거처에 멋대로 찾아와 놓고 이 모든 것을 비밀로 하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지. 내 그대에게 말해주도록 하겠다.”
오키나는 신묘마루에게 낮 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세이자가 처음 말했던 소원은 무엇이며 자신이 어떤 지적을 했었고 어쩌다 세이자가 도망치게 되었는지,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까지.
“그러니까 그쪽은 존재가 비밀에 부쳐진 신이라는 거네. 어- 그런데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도 되는 거야?”
“그대도 아마노자쿠랑 똑같은 질문을 하는구나. 비신이라 함은 그 정체를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것. 언뜻 들으면 나에 대해 알려진 정보가 너무 없어서 나에 대해 드러내는 것이 금기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지. 하지만 실상은 정 반대다. 나는 온갖 사물과 이치에 관여한다. 그 때문에 나에 대한 정보가 너무 많이 드러나 있지.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별할 수조차 없는 정보들이 뒤섞여 있으면, 그건 그것대로 실체를 잡아내기 어려운 법이다. 알 수 없는 것도 비밀이지만,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것도 비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해가 되었느냐?”
“어려운 말이지만 대충은 이해했어. 그리고 세이자는... 방금 세이자가 한 말은? 난 알 수 있어. 저 녀석은 거짓말쟁이 요괴지만 방금 그쪽에게 한 말은 전혀 거짓말 같지 않았어. 그럼 세이자는 혁명에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던 거야?”
“아마노자쿠와 함께 시간을 보내온 그대에게는 큰 충격이겠지. 동전으로 비교해볼까. 그대는 앞면인 동전을 뒷면으로 뒤집어 놓기 위해 혁명을 준비했다. 그대가 원한 것은 동전의 뒷면이었으니 말이지. 하지만 아마노자쿠는 동전을 ‘뒤집는 행위’를 원했다. 마침 동전은 앞면으로 놓여있었고, 손쉽게 뒤집을 수 있게 뒷면을 보고자 하던 그대에게 같이 뒤집을 것을 요청한 것이지. 아마 동전이 뒷면이 된다면 이번엔 앞면을 보고자 하는 자에게 접근하여 힘을 합치자고 할 것이다. 그래, 그대에겐 이해할 수 없는 짓이겠지. 매번 뒤집을 때마다 망신창이가 되고 힘을 소모하면서 의미없는 결과를 반복할 뿐이니까. 하지만 그것이 아마노자쿠라는 요괴인 것이다.”
“... ... 그렇구나. 역시 세이자는 처음부터 내가 아니었어도 상관없었고, 일이 성공하면 다른 녀석을 찾아 떠난다는 거네. 약자를 위한 세상 같은 건 다 거짓말이었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느냐. 아마노자쿠의 삐뚤어진 행태는 그대가 가장 가까이서 봐 오지 않았는가. 방금도 그대가 마음이 약해진 틈을 타 그 마음에 비집고 들어가려 하지 않았느냐. 이 곳에 온 이유도 그대를 포섭하여 자신의 사악한 본성을 만족시킬 새로운 계획에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그대에겐 냉혹하지만 이것이 진실이지.”
“사실,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어. 세이자가 이 세상에 대해 내게 말해준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을 때부터. 의견이 갈라지자 태도가 일변했을 때부터. 하지만 원망할 수는 없는걸. 세이자가 날 선택하지 않았으면 계속 괴롭게 살았을 거고, 또 나도 이런 저런 소동에 끼어들면서 세이자에게 어느 정도 공감하게 되었으니까.”
“호오, 원망하기는커녕 아마노자쿠를 변호하다니 재미있구나. 아마노자쿠가 그대에게 물들어 자신의 본질이 흐려졌던 것처럼 그대 또한 아마노자쿠에게 물든 것인가?”
“부정하지는 않아. 아까 세이자가 그쪽 질문에 답할 때 뭐랄까, 굉장히 설레는 것처럼 보였거든. 언젠가 환상향을 무한한 혼란에 빠뜨리겠다는 그 얼토당토않은 계획이 너무나 기대된다는 표정이었어. 아마 내가 최근에 느꼈던 즐거웠던 기분들과 비슷한 느낌일거야. 그래서 세이자의 생각도 이해가 돼. 물론 모두를 괴롭히겠다면 막아 세울 거지만~.”
“기묘한 우정이로군. 정작 아마노자쿠는 그대를 배신하는 말을 남기고 도망쳤건만, 그래도 그녀를 감싸주는 게냐.”
“저렇게 말해도 막상 내가 부르면 다시 올 걸? 그런 녀석이야. 아직 나는 이용가치가 있으니까.”
“후후후, 그렇단 말이지. 그런 그대를 위해, 그리고 그 아마노자쿠를 위해 내가 작은 선물을 주도록 하지.”
“선물?”
오키나가 소매 춤에서 돌돌말린 종이 한 장을 꺼내 신묘마루에게 내밀었다. 예쁜 그림과 색색의 글씨로 꾸며진 화려한 전단지였다.
“탄막 콘테스트? 이게 뭐야?”
“환상향의 각지에서 모인 자들이 탄막의 예술성으로 승부를 겨루고, 인간은 불꽃놀이 대신 그걸 보며 즐기는 축제다. 하쿠레이의 무녀가 계획했지. 그대와 아마노자쿠에게 좋은 유흥거리가 될 것이다.”
“갑자기 이런 대회는 왜 ...?”
“그대도 아마노자쿠도 똑같이 소란을 좋아하지 않았느냐. 또 규칙을 뒤집는 것은 아마노자쿠의 특기가 아니더냐. 탄막을 구경거리 삼는 것은 좋지만 그 때문에 경각심이 사라져서는 곤란하지. 그래서 나는 이 대회를 시시하게 끝나지 않도록 바꾸어줄 이들을 찾고 있었다. 그대들이 이 대회에 그대들만의 방식으로 참가하겠다 한다면, 내가 협조하겠다. 내가 도와준다는 것을 비밀로 한다면. 아마노자쿠 녀석도 받아들일 것이다. 원래 아마노자쿠의 소원을 듣고 적당히 때를 봐서 이 이야기를 직접 전해주려고 했는데, 그렇게 답해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 어떻게 하겠느냐. 대신 이 선물을 전해주겠느냐. 정 양심에 찔린다면 거부해도 상관없다.”
“받겠어! 무조건 받겠어! 취소하거나 무르기 없기야? 원하는 대로 세이자랑 나랑 대회를 엉망진창으로 바꿔놓을거니깐!”
“즉답이로군. 그 대답을 기다렸다.”
----------------------------------------------------------------------------
얼마 후 탄막대회 당일, 형형색색의 탄막이 하늘을 수놓고 구경꾼들의 환호와 감탄으로 시끌벅적한 현무의 계곡. 축제가 한창인 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는 두 명의 그림자가 있었다.
“과연, 예상보다 질 떨어지는군. 난 예상했지만 말이지.”
“애들 속임수 같은 대회를 열다니, 레이무도 정상이 아냐.”
“이건 이거대로 재미있지만 말이야.”
“아마노자쿠가 재밌다고 한다면, 정말 시시하다는 소리구나.”
“하하하, 그렇지.”
“그나저나, 정말로 와줬네. 그렇게 야비하게 굴어놓고, 면목 없어서 안 올 줄 알았는데.”
“염치 같은걸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마노자쿠의 장점이지. 그리고 역시 숨어 다니는 건 내게 어울리지 않아서, 공주의 함정이더라도 한 방 먹이고 도망칠 각오로 왔지. 애초에 이렇게 연회장에서 떨어진 외진 곳에서 만나자고 한 걸 보면 이번에 공주는 나와 같은 쪽인 것 같았고.”
“그래도 내 생각은 저번과 같아. 이렇게 손을 잡더라도 평소엔 세이자와 다른 길을 갈 거니까.”
“네,네, 공주님 뜻대로 하십쇼. 나도 그 때의 계획은 포기하지 않았어. 나는 나대로 아마노자쿠답게 공주를 이용할 거니까. 이걸로 서로 통한 거네. 그래서~ 이런 곳에서 왜 내게 상담을? 짐작은 가지만.”
“그래그래, 세이자를 부른 이유, 그건 말이지-.”
- To be Continued to [The Grimoire of Usami] ...
Epilogue.
난입해온 불청객들에 의해 난장판이 된 탄막대회가 끝난 후, 레이무를 비롯한 일동은 잔뜩 녹초가 되어 축제(소란)의 뒷정리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야쿠모 유카리는 그들의 시야가 닿지 않는 상공에서, 자신이 만든 스키마에 걸터앉아 아래쪽의 상황을 지켜보며 자신을 이곳으로 불러낸 상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꽤 성대하게 날뛰어 주었어. 내가 불러 모은 녀석들도 굉장했지만 그 녀석, 진행이 능숙하던데. 재능을 반사회적인 쪽으로밖에 못 쓴다는 게 참 안타까운 녀석이야.”
“정말~ 갑자기 찾아와서 무슨 부탁을 하나 했더니 이런 애들 장난을 꾸민 줄은 몰랐지, 오키나. 너답지 않게 짓궂은 장난이었어.”
“하하, 그렇게 말하는 본인도 심사위원 역할을 꽤 즐기지 않았나. 이 축제를 이용해 한 탕 벌려던 하쿠레이의 무녀에겐 좋은 인생수업이 되었을 거야. 이 정도면 수업료가 싼 편 아닌가.”
“무녀의 교육 담당은 내 쪽인걸. 굳이 신경써주지 않아도 내가 잘 지도했을 거야. 그리고 이런 계획을 꾸민 건 무녀 때문이 아니잖아. 네 진짜 목적은 ... ”
“아마노자쿠 말이지. 예리하군.”
“나랑 그 요괴를 사이좋게 앉혀놓았잖아. 오늘만큼은 좋게 넘어가자고 이야기한 것도 너고. 그렇게까지 감싸주면 바보가 아닌 이상 알아차릴 수밖에 없어.”
“모처럼 마련한 자리인데 화해는 안했어? 하긴, 네가 머리를 굽히고 들어간다고 그 녀석이 사과를 받아줄 호인은 아니지.”
“그런 문제아에게 그렇게 관심가지는 이유가 뭐야? 비록 지금은 큰소리치는 만큼 뭔가 해내지도 못할 약한 요괴지만 제대로 날뛰게 되면 귀찮아지게 돼. 그녀석이 노린 대로 오랫동안 쌓아온 환상향의 질서가 무너질 수도 있어.”
“그래서 네가 약하다고 말한 요괴 하나를 잡기 위해 온 환상향 녀석들이 나서게 한 건가? 유카리, 너답지 않은걸. 쥐 한 마리를 잡자고 온 성에 불을 놓는 녀석이 아니잖아.”
“역병을 옮기는 쥐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백신이라는 것은 말야, 약한 병균을 인간에게 고의로 주입하고 몸이 스스로 그 병을 이겨내게 해서 강한 병균에도 이겨낼 수 있도록 하는 거야. 독기를 가득 품었지만 그릇이 작은 그 녀석은 환상향의 백신과도 같은 존재지. 그녀석이 활개치고 다님으로서 무녀처럼 질서를 유지하는 쪽은 항상 경각심을 가지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게 될 거고, 또 날뛰기 좋아하는 요괴들은 그 녀석에게 이리저리 휘둘리고 하면서 쌓인 독기를 배출해내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겠지. 뭐, 이번엔 그녀석도 자기 자신을 잃고 선을 넘으려고 하는 것 같길래 자신의 본분을 깨닫도록 지도해주긴 했지만.”
“만약 아마노자쿠가 자신의 본분을 잊고 힘밖에 모르는 존재가 되었으면 어쩌려고 했어?”
“원하는 대로 힘을 주고, 자기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신이 되는 모습을 지켜보려고 했지. 요괴로 남고자 하는 녀석을 신으로 만들어주는 것만큼 좋은 벌칙도 없을 거야. 다행히 그 정도로 생각이 짧진 않았어.”
“우려하던 일이 생기면 고생하는 건 하쿠레이의 무녀와 내 쪽인데, 그걸 알아주었음 좋겠네.”
“하핫, 큰 힘에는 책임이 따라야 하지 않겠어? 그리고 요즘 환상향이 좀 많이 시끄러웠잖아? 어째 통제에 애를 먹고 있는 것 같은데 몇몇 현자라는 녀석들이 현자답지 못하게 사태를 방관하는 것 같아서.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이쪽도 조커를 한 장 쯤은 들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 이쪽에서 잘 유도해주면 환상향을 싹 뒤엎고 새로운 터전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조커가. 아, 유카리를 지적한 건 아니니까 안심해.”
웃고 있지만 방금 전의 말을 하는 오키나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이는 필시 속내를 떠보기 위함이리라. 유심히 유카리를 응시하는 시선은 그녀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재미있는 발상이네. 나는 짚이는 바가 전혀 없어서 모르겠는걸? 잘도 아마노자쿠를 길들일 생각을 했네. 네가 엮여 있다는 걸 눈치 채면 하던 짓도 때려치울 반항적인 녀석인데 말이야.”
“이번에도 내 의도대로 잘 움직여주었어. 마지막에 어긋나서 내가 직접 개입해야만 했지만, 그래도 두고 볼 가치는 있더군. 그러니 아마노자쿠를 너무 압박하지 않아줬으면 좋겠어. 그것은 내 패야.”
“하아 ... 공사구분만 확실히 할게. 나 믿지?”
“일단은.”
애매한 대답에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유카리는 스키마 속으로 사라졌다.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회장의 정리도 끝나고, 유카리마저 떠나가자 아까 전까지의 소란은 어디 갔냐는 듯 현무의 계곡은 적막함이 감돌았다. 오직 별빛만이 대지를 비추는 가운데, 이번 일의 뒤에 서있었던 대지의 신이자 별의 신, 그리고 장해를 물리치고 만물을 수호하는 역할의 비신은 눈을 감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과연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것은 짐작가는 것이 너무 많아 오히려 알 수 없는 비밀. 그 답은 오직 비신인 그녀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현상수배 당했던 세이자가 그리모어 오브 우사미에서 어떻게 오키나를 빽으로 달고 유카리랑 사이좋게 심사위원을 먹었는지 그 과정을 상상해서 써봤습니다.
성공적인 대회 마무리 기원합니다.
'제 2회 글알못 팬픽대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관은 논한다 - 초핫 (0) | 2020.07.05 |
---|---|
sake L께서 강림하셨다 - 나는미쳤다 (0) | 2020.07.05 |
아래쪽이 가벼운 고구마 - 조져버리기 (0) | 2020.07.05 |
산딸기 - 초록목도리 (0) | 2020.07.05 |
라스트 리모트 - Enma (0) | 2020.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