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자루에서 잘려나간 인간의 머리를 꺼내 머리 위로 던진다. 우산을 두 손으로 받춰 잡고 머리가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휘두른다. 시취가 포물선을 그린다. 머리통은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꼬치구이가 구워지고 있는 석쇠에 떨어진다. 눈알구멍에서 튀어나온 구더기가 숯에 쳐박혀 튀어오른다. 군중의 웅성거림이 커진다. 비명을 시작으로 군중속에 섞인 동료들은 각자의 주머니에서 하나 둘 머리를 던진다. 연설을 주도하던 대텐구는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준비해 온 경축사를 계속 낭독한다. "오니들의 손아귀로부터의 해방은 폭력에 대한 자유의 승리입니다."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홈런. 푹 썩어 살점 몇개가 간신히 매달린 어느 인간의 두개골이 대텐구의 머리에 직격했다. 우리에게로 내리쬐는 감정들이 피부에 선명하게 와닿는다.
위장이 빳빳해진다. 위액이나 답즙 같은 것들이 내장을 데운다. 포만감이 생경해 새삼스레 배를 쓰다듬니는다. 너무 오래 되었지. 발걸음 하나에 무게를 고르게 실은 적이, 시야에 지평선을 담고 약간 뻔뻔하게 가슴을 들고 걸었던 적이.
배낭에서 붉은색 플래카드를 꺼낸다. 글씨는 흰색, 획의 끝을 일부로 휘갈겨 튄 물감이 핏자국처럼 보인다.
'인간의 삶은 통조림이 아니다.'
피켓을 든다. 크게 외친다. 내 목소리가 이렇게 컷던가. 내 말을 옆사람이 듣고 똑같이 말소리를 덧댄다. 말소리가 말소리를 고무한다. 서둘러 달려온 백랑 텐구들이 주위로 몰려와 나를 그대로 지면에 고꾸라뜨렸다. 팔을 잡힌 채 머리 위로 쏟아지는 타격을 견딘다. 그럼에도 외침은 점차 커진다. 여기에는 존엄이 있다. 박애가 있다. 존재가 존재를 구하려는 지성체로서의 윤리가 있다. 그러면서도 이것은 본능에 거스르지 않는다. 오히려 본능을 지지한다. 내 내장은 그것을 증명하고 있고 나는 웃는다.
*
가두행진은 성공적이었다.
요괴의 산 해방을 기념하는 말을 거사일로 택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분지에 위치한 산의 광장에는 텐구뿐만 아니라 다른 요괴들도 관광차 들어와 있었다. 평소였다면 텐구사회 특유의 폐쇄성으로 은폐되었을 터였다. 그러나 온 산의 관심이 집중된 시점에 일어난 시위는 백랑텐구의 탁월한 경찰력으로도 덮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
물론 썩어도 준치라, 주요 언론지는 철저하게 침묵을 지켰고, 우리의 행적은 단순히 요괴 간 알력다툼으로만 기록되었다. 그렇지만,
"약소 요괴 서클이 발행하는 요미우리에서는 일제히 우리를 조명하고 있지." BB가 말했다.
"우리가 던진 머리통이 텐구놈들이 무단 투기한 음식물쓰레기에서 도로 주워온 것이라는 사실이 여론을 뒤집는 데 결정적이었죠. 자기들이 길바닥에서 싼 똥을로 맞는 격이니까, 항의를 한다 해도 웃음거리밖에 더 되겠어요?"
"끝내주는 아이디어였어. 여론도 긍정적이야. 마을에서 활동하는 요괴 몇도 인육처리시설에 대한 문제의식에 공감하고 있어. 솔직히 캇파들까지 호응할 줄은 몰랐는데. 걔낸 텐구 따까리니까. 그나저나, 넌 백랑들이 투기하는 곳을 어떻게 알고 있었던거야? 그 철저한 놈들이 은폐에 신경을 쓰지 않았을리가 없잖아."
나는 지인들 이야기에서 들었다고 대충 얼버무렸다. 진상은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텐구들이 축제 전후로 남은 인육 찌꺼기를 투기하는 곳은, 극빈층 요괴들 사이에서 무료급식소로 알려져 있었다. 인간을 습격할 수 있는 여력이 없는 요괴들은 축제 전후로 이런 장소를 순회하며 썩은내 나는 고깃덩이를 모아 서식지로 가져가 먹었다. 나 역시 다 죽어가는 요괴들 사이에서 덜 썩은 팔뚝 하나를 생으로 씹은 적이 있다. 상납금 없이는 발도 붙이지 말라는 무녀의 등쌀에 못이겨 산에서 노숙하던 시절이었다. 맛은 어땠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어쩌다 여기까지 추락해버린 걸까. 싸구려 포만감으로 배를 채운 뒤 느껴지던 비참함에 손등으로 떨어진 눈물의 무게감이 기억났다. 다른 손으로 손등을 거칠게 쓸었다. 지금은 그때와 달라.
지금 활동하는 조직으로 옮기기 이전에, 현자가 이사로 있던 공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었다. 바깥에서 납치해 온 인간들을 사육하고 가공하여 스팸으로 만드는 공장의 분뇨처리시설이 내 근무지였다. 공장에서는 스키마를 통해 사육하는 인간들이 배출한 분뇨를 관리하고 있었다. 분뇨를 저장하는 탱크의 용량을 관제하면서 용량이 90%에 가까워진다 싶으면 서버로 명령어를 입력해 오물을 압축하여 역류를 막는 일이었다. 종종 서버에 이상이 있을때는 지하의 오물 창고로 내려가 절차에 따라 스키마를 재기동했다. 스키마는 자주 멈췄고 메뉴얼은 근본적인 해결책 없이 긴급 상황을 늦출 수 있는 방법들의 리스트에 불과했다. 사무실에 앉아 관제콘솔만 한 시간에 한 번 돌리면 된다는 소개와는 달리 관리반장은 용량 차는 속도가 불규칙하므로 직접 내려가서 확인하라고 닥달했다.
썩은 오물 냄새가 나는 지하로 내려가 탱크 앞을 노려보며 시간을 보내는 일이 잦았다. 탱크 표면에는 위에 달린 계폐장치로부터 흘러나온 오물이 응고되어 있었다. 수년동안 닦이지 않아 먼지와 뒤엉킨 덩어리가 커다란 벌레가 싸지른 알집처럼 보였다. 도끼로 그걸 찍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갈라진 탱크사이로 쏟아지는 오물이 나를, 관리반장을, 스팸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인간들을 휩쓰는 것을 상상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잠이 잘 왔다. 파국의 원인이라도 되어서 의미를 부여받고 싶었던 걸까. 무엇이라도 해서, 어떻게라도 기억되고 싶었던 걸까.
*
BB를 만난것, 그리고 이 단체에 들어간 것은 전환점이었다고 생각한다.
지인의 소개로 길거리 버스킹의 기술 지원 스태프로 나와있었는데, 그 공연의 주관자가 BB였다. 잘 나가던 밴드의 리더였던 그는, 어느날 돌연 밴드를 해체하고 츠쿠모가미 연합라는 시민단체를 조직하여 정치적 색체가 짙은 버스킹 공연을 주관하고 있었다. 비인간적인 인육 공정 시스템과 시설을 독점하는 요괴의 산을 비난하는 문구가 쓰인 플래카드가 인간 얼굴에 돼지 몸통을 붙인 조악한 포스터와 함께 장비를 싣고 온 고물 픽업 트럭에 매달려 있었는데, 퀄리티는 썩 좋지 못했다. 심지어 집회 주최측의 의견조차 통일되지 않아 보였다. 공장식 축사를 폐지하여 환경보전과 식용 인간의 인권을 보존하라는 비교적 온건한 주장부터, 인간은 우리의 친구이며 사랑과 우정으로 대해야 한다는 밑도끝도 없는 이상론까지 연주자들의 멘트에서 튀어나왔다. 공연자의 멘트에 반발하는 관객 텐구 하나와 실랑이가 붙어 나를 포함한 스태프들이 간신히 떼어낸 일도 있었다.
주먹구구식 진행의 비효율성에 질려, 그리고 연주자들의 낯뜨거운 멘트가 부끄러워 나 돈이고 뭐고 탈주를 진지하게 고민하던 시점에 먼저 다가와 말을 건 이가 BB였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취지는 좋다고 봐요. 인육공장에서 일하는 입장에서 생산 방식이 좀 역겨운 거 맞거든요. 우리가 맨날 바깥세계 비난하는 래퍼토리를 쓴다는 점이 되게 모순적이죠. 효율만 뽑아내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 없다는 그런 속물 논리. 심지어 그렇게 뼈빠지게 생산한 것도 진짜 그거라도 먹어야 하는 가난한 애들한테 가지도 않더라고요. 듣자하니 바깥세상에 숨어사는 요괴들한테 비싸게 팔아먹는다던데."
"취지 얘기가 나왔으니 이제 문제점이 나올 차례겠군요." BB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속마음을 들킨 나는 어색한 미소로 화답하며 말했다.
"어...... 이건 아닌데 싶은 부분이 있기는 하죠. 뭐랄까, 공연이면 공연이고 집회면 집회지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보니까 이도저도 아닌게 되어버리고...... 그냥 자기들만 만족하고 끝나는 것 같더라고요. 뭐, 환상향답다면 환상향 답지만 말이에요."
"저는 좀 더 과감하게 가는 것을 주장했는데, 공연이라는 큰 틀을 놓기 싫어하더라고요. 저도 예전엔 공연을 했었고, 그래서 음악이 관중을 끌어모으거나 기존 지지자를 결집시키는 데에는 데는 괜찮은 수단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정치적 의사를 명확히 전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고, 우리가 상대하는 세력 입장에서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도 사실이죠. 우리를 알리고, 우리가 개혁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적절한 수단은 분명 아니라는게 제 의견이에요. 이걸 남들에게 설득하느라 애를 먹고 있죠. 같이 활동하던 동생도 이걸 이해 못하더라고요."
그레서 헤어진거지만, 하고 BB는 덧붙였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는건가요."
나는 BB를 쳐다보지 않고 물었다. 명백하게 비아냥처럼 들릴 말이어서 아차 싶었다. 그로나 완전한 실언은 아니었다. 정치니 예술이니 정신적인 활력을 소모하는 활동은 생활에 여유있는 이들의 특권처럼 여겨졌고 거기에 수반되는 고민은 복잡하되 얄팍해 보였다.
"글쎄요, 어떨까요...... 음, 잠깐 거기 있는 앰프 선 좀 건네주시겠어요?"
어리둥절하면서 앰프 커넥터를 건넸다. BB는 걸치고 있던 비파를 몸 앞으로 돌렸다. 비파의 아래에 커넥터를 꽃고는 손가락을 기묘하게 꼬아 줄을 내리쳤다. 음정은 있었지만 어쩐지 현악기보단 타악기 소리에 가까웠다. 마력으로 단순히 소리를 증폭시킨 것 과는 다른, 진동 자체의 강렬함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했다. 화난 건가?
"네일 어택이라는 주법이에요." 당황한 나를 보고 씩 웃으며 BB가 말했다.
"곡에 악센트를 넣고 싶은데 단순히 소리를 크게 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바깥세계의 기술을 응용했죠. 여기 보면 줄 아래 장치가 붙어있죠? 이게 퍼커시브를 잘 잡아줘요. 이거 한다고 비파 옆면을 생으로 뜯고 구멍을 냈죠."
입이 벌어졌다. 같은 츠쿠모가미기에, 본체가 되는 물건에 손을 대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다. 나 역시 우산에 가짜 눈과 혀를 붙이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장식이었고, 돌아갈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단순히 소리를 내고 싶어서 자신의 본체에 영구적인 개조를 했다고 말하는 건가.
"난 이런 성격이에요. 들어가야 되는 문이 작으면 몸을 숙이고 들어가기보단, 시간이 걸려도, 피해를 감수해야만 해도, 벽을 뚫고 문을 넓히는 편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와요.
이 일도 마찬가지에요. 시간이 걸리겠지만, 약소 요괴에 지나지 않는 츠쿠모가미의 영향력을 기르기 위해선 정치적인 쟁점에 참여하여 존재감을 확보해야 할 필요성이 있어요. 갈등을 쉬쉬하는 환상향 특성 상 이런 행동은 엄청난 블루오션이 될 거에요."
"그걸 위해 발 걸쳐놓은 쟁점이 인간 사육시설이고요?"
"그렇죠. 하지만 인간 입장에서도 손해 볼 일이 없어요. 우리는 영향력을 확보하고, 공장 축산으로 사육당하는 인간들은 어찌되었던 자유를 찾을 테니까요. 더 이득을 보는 쪽은 있을지는 몰라도 피해보는 쪽은 없어요. 기득권층을 제외하면 말이죠."
그렇게 이어지던 대화는 고막을 쑤시는 하울링소리로 인해 갑작스럽게 중단되었다. 오디오의 상태를 확인하려 일어난 나에게 BB는 악수를 청했다.
"나중에 밥 한끼 먹죠. 이런 말 잘 안하는데, 일하시는 것도 그렇고, 이야기 한 것도 그렇고, 같이 일하고 싶어지네요."
나는 엉겹결에 그 손을 잡았다. 관리가 잘 된 손등과 달리 손바닥의 감촉은 거칠었다. 굳은살이 마디마다 박힌 듯 했다. 하늘에선 낙조가 붉게 타오르고 있었고 옅은 붉은 빛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시각과 촉각의 불일치. 그 낙차는 그가 보여준 단호한 열정에 어떠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듯 했고 나는 승낙 이외의 선택지를 고민 할 수 없었다.
*
"배불러. 그만 먹을게 난." K가 주는 술안주를 사양하면서 말했다.
"오~만날 죽상으로 와서 술부터 찾는 밥귀신이 왠일이래?" 웃음기를 머금고 옆에 앉아 있던 S가 비아냥댔다.
"애초에 난 츠쿠모가미라서 딱히 뭘 먹을 필요는 없어. 마음을 먹고 사는 부류라고 나는."
"그건 나도 알어. 근데 니가 인간 놀래키길 잘 하냐? 정신적인 포만감 대신 배라도 채워야겠다고 징징대면서 남 아침밥까지 뺏어먹던 애가 이런 말을 하니까 그런거지." S는 팔로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나중에라도 돈은 다 냈었어. 그리고 언제적 일이냐고 그게." 나는 어깨를 잡는 S의 손을 잡고 그의 무릎위에 올려놓았다. S는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팔꿈치에 이리저리 힘을 주었으나 변하는 건 없었다. 평소와는 다른 반응에 술자리에서는 웃음기 섞인 야유가 들렸다. S는 당황한 눈치였다. 요력이라면 우리들 중 가장 강한 그였으니 내가 그의 힘을 압도하는 일이 당황스럽게 느껴졌으리라. 예전같았으면 웃으며 넘어갈 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왠지 시덥잖은 모욕을, 나를 깔보는듯한 시선을 굳이 용납해 줄 이유를 떠올릴 수 없었다. 나는 이 초라한 술자리보단 더 높은 곳에 있었다. 윤리적으로도, 그리고 물질적으로도.
정치에 대한 BB의 신조는 '정치적 성과는 물리량에 비례한다'는 것이었다. 자극적이고 눈에 띄일수록 목적을 이루기 쉬워진다는 말이었다. BB가 단체장으로 취임한 후, 단체는 기존의 퍼포먼스 중심의 활동에서 점차 공격적인 노선으로 전환했다. 공장식 공정의 비윤리성을 비판하는 판플렛을 인쇄하여 이곳저곳에 뿌렸다. 환상향으로 떨어진 외래인 몇을 찾아 바깥세상으로 안전하게 에스코트 해주기도 해주고 생색내는 식의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그 중 가장 논란이 되고, 그만큼 우리 단체의 명성을 드높인 건 게릴라 인터뷰였다. 사람이 많은 거리에서 대기하다 인간의 편을 자처하는 무녀, 종교인, 때로는 요괴들이 나타나면 마이크를 들이대며 환상향 인간 취급에 대한 견해를 요구했다. 인간을 지성체로 대하지 않는 지금의 환상향 체계에 대해 인간의 대표자로서 할 말이 없습니까. 헛소리 집어 치우고 꺼져. 헛소리? 지금 고통받는 사람들의 비명을 헛소리로 치부하신 겁니까. 알 것 같군요. 실은 인간의 편을 사칭하면서 이 불합리한 체제를 유지하는데 일조하시는 분이니. 대략 이런 대화가 이뤄졌고, 불쾌해하며 자리를 뜨는 무녀를 막을 순 없었지만, 그걸 지켜 본 마을사람들이 제멋대로 나불대는 것은 무녀 역시 막을 수 없었다. 그들의 명성은 깎인 반면 단체는 '과격하긴 할 지언정 할 말은 하는 단체'라는 평판을 얻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날뛰는대도 위로부터 커다란 방해가 없었던 건 놀라운 일이었다. 인간은 입장상, 요괴는 체면 때문에 나서지 못할 것이라는 BB의 판단은 정확했다. 마을의 갈등을 중재하는 이들은 명목상 인간의 편이었으므로 인간을 보호한다는 우리의 주장에 토를 달지 못했다. 만약 우리 단체와 대치라도 했다간 인간의 적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질 판이었으니까. 한편 환상향에서 한가닥하는 요괴들은 떠오르는 이슈를 대수롭지 않게 넘기거나 혹은 도의상 지지하는 스탠스를 취했다. 그들은 보급받은 인육없이도 생계를 유지할 능력이 있었고, 중산측의 특권인 윤리의식을 갖춘 존재들이었다. 인간보다 상위의 존재로써 인간의 처우 개선에 아량을 베풀어야 한다는 당위에 딴지를 걸기에는 그들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텐구 정도만이 언론의 힘을 빌어 '옳은 목적은 옳은 수단으로 성취해야 한다'는 식의 점잖은 비판을 가했으나, 그 정도의 온건함은 비록 타당할지언정 무시할 만 했고, 실제로 대부분 신경쓰지 않았다. 그 텐구마저도 인육 무단 투기건으로 모리야의 엄중한 항의를 들은 이후로는 자중하는 눈치였다.
나에게도 큰 변화가 생겼는데, 그것은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정신적인 수입이었다. 환상향의 실세들, 그러니까 신사연회연합이라고 불리우는 이들은 놀랍게도 우리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게릴라 인터뷰에서 말실수를 했다가 커다란 곤욕을 치룬 적 있던 초록 무녀는 우리를 대놓고 겁냈다. 열심히 포교를 하다가도 내가 지나가면 고개를 푹 숙이고 말없이 골목 끝으로 사라지는 꼴은 볼 만했다.
그들의 공포와 당황스러움은 그대로 수입으로 들어왔다. BB의 놀라운 점 중 하나는 막 나가는 것 처럼 보여도 조직을 유지할 수 있는 자구책을 마련해 놓고 일을 시작하는데 있었다. 단체는 BB와 나와 같은 츠쿠모가미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기에 인육을 먹을 필요 없이 감정이라는 수입만으로도 유지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 밤의 무덤가에서, 짐승길에서, 혹은 외진 골목에서 시도했던 연출들보다, 한낮의 태양 아래서 모습을 빤히 드러내고 구호를 외치고 행진을 하는 편이 벌이가 더 좋았다.
또한 인육을 섭취하지 않는 요괴들로 구성된 '친 인간적인' 단체라는 사실은 인간마을에서 사상적으로 급진적인 이들의 후원과 참여를 이끌어내고 있었다. 게릴라 인터뷰의 하이라이트를 만들었던 유명 활동가들은 개인적으로 후원을 받기도 했다.
한 마디로 시위 한 번으로 활동가들은 금전적, 정신적인 여유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단체는 일부 언론과의 협조 하에 영향력을 부풀릴 수 있었다.이러한 황금공식에 이끌린 츠쿠모가미들이 하나 둘 씩 단체에 가입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요즘 데모하면서 깡이 많이 늘었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하는데" K가 킬킬거렸고, S는 멋쩍은 표정으로 내게 잡힌 손목을 몇 번 쓰다듬었다. 애써 우스갯소리로 넘어가려는 듯 했지만 분위기가 불편해진것이 느껴졌다.
"내가 몰라서 그럴 수도 있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W가 말했다. "지금처럼 요괴가 요괴를 정치적으로 공격하는게 맞는건지 모르겠어. 안그래도 작은 사횐데, 이런 조그마한 갈등이 균형을 깨서 거대한 아노미를 일으키진 않을까 걱정이 되더라구."
나는 씩 웃으며 답했다. "애초에 약소 츠쿠모가미 단체따위로 깨질 균형이었으면 언제 어떤 방식으로 깨져도 이상하지 않겠지. 오히려 우리는 체계의 약점을 귀띰했다는 점에서 화이트 해커와 비슷한 존재 아닐지?" BB가 한 말이었다.
"화이트 해커?"
"음...... 공격으로서 시스템의 취약점을 미리 경고해주는 역할을 맡았다고나 할까?"
"야, 내가 보기엔 무책임을 좋게 포장하는 거 같은데. 깽판은 치되 그 결과는 사회에 떠넘기겠다는 심보잖아." S가 쏘아 붙였다.
"애초에 준 게 없는 사횐데 그쪽 사정 봐 줄 필요가 있는걸까? 우리가 잘난 현자님들한테 받은게 뭔데. 인육 배급은 띄엄띄엄 나와서 습격 없이는 살기도 힘들고. 그래서 습격 좀 할라치면 무녀니 마법사니 하는 애들이 방해하고. 그런데 정작 그 둘은 서로 협력관계잖아. 결국 우리를 못살게 하는 건 현자를 위시한 기득권층이라고."
"문제를 너무 대충 본다. 애초에, 배급을 당연히 받아야 되는 거라고 생각하면 안돼지. 그건 뻔뻔한 거야.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너는 습격이니 뭐니 말하기 좀 그렇지 않냐. 무녀고 마법사고 거르고, 일단 니가 졸라 못 잡잖아. 내가 너 습격때마다 얼타서 발각되는 거 때문에 날려먹은 기회가 몇갠데.
그리고 니가 하는 그거, 솔직히 츠쿠모가미니까 할 수 있는 거야. 너희는 인간들 안 먹어도 살 수 있잖아. 뭐 니 말로는 너무 가난해서 생고기라도 씹었다지만, 그거 안먹는다고 우리처럼 굶어 죽는 건 또 아니잖아? 감성놀음에 취해 혼자 그러고 있었던 거지. 니들은 요괴가 기득권이다 뭐다 하지만, 솔직히 너희도 핍박받는 계층은 아니다? 오히려 기득권이면 기득권이지. 애매한 위치때문에 그렇게 설쳐도 아무도 뭐라 안그러잖아. 그래서, 혼자 자기연민에 빠져가지고 돌아다니는 꼬라지가 아주 같잖아보여요. 알겠어?"
"에이! 말이 좀 심하다. 오랜만에 모였는데 서로 헐뜯고 그러면 안돼지!" 당황한 K가 손사레를 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술 먹은 S가 이런 것은 한 두번이 아니었기에. S역시 반쯤은 술김에 꺼낸 말일 것이다. 까칠한 면이 있어서 그렇지 사람 자체는 나쁘지 않았고 은근히 잔정이 깊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을 문제다. 그러나 넘어가선 안됐다. 이것은 단순히 내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신념에 관한 문제였다. 술은 한 잔 들이키고 S를 쏘아보았다
"단체를 항상 비난하던 요괴가 한 마리 있었어. 요괴는 인간의 적이라는 고리짝 논리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던 년이었지. 인간을 습격하고, 그 고기를 취하여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 삶의 이유이며 명예라고 한창 떠들어대더군. 근데, 알아봤더니 그 자식은 어떻게 생계를 유지했는지 알아?
마을을 습격하는 백귀야행 끄트머리에나마 참여하는 대가로 몸을 팔았어! 그렇게 꼽사리 낀 거 가지고 명예니 품위니 큰소리를 뻥뻥 쳐댄거지.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항상 배운 거 없고 무식한 놈들이 별 생각없이 기득권의 이데올로기를 수호하는 법이라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냐?"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응시했다. 그들의 감정이 공기를 타고 폐로 들어와 혈관을 순환하기 시작했다. 당혹스러움, 공포, 흥분, 두려움 그리고,
"야, 꺼져라 그냥."
혐오와 분노.
잠자코 있던 W의 일갈에 K와 S는 얼어붙었다. 나 역시 당황스러웠지만 곧 냉정을 되찾았다. 돌발 시위를 하면서 생긴 판단력이 도움이 되었다. 여기에 있어봐야 험한 꼴만 보겠지. 목을 좌우로 흔들어 뻣뻣해진 목을 푼다.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연채로 신발을 고쳐 신고 문 밖으로 나갔다. 잡상을 쫓아내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면서 일 생각을 했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고 말한 BB의 말을 떠올렸다. 이번 시위로 대대적인 관심을 얻었지만 그만큼 반대편에선 적극적으로 우리를 탄압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 전에 현자와의 협상 테이블을 잡아 우리의 권리를 보장 받아야 할 것이다.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기왕 입을 벌린 김에 새로 붙일 포스터에 붙일 표어를 읊어보며 음운이 적당한지 가늠했다. '우리 엄마는 어디갔어요? 윗집 텐구 돌잔치에 머리가 있단다.'
*
뜻밖의 맥락으로 바라던 결과가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 '원숭이 손' 괴담의 원숭이 손처럼, 운명은 원하는 바를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배송하는데 세상 어떤 작가보다도 창의적이다.
드디어 현자가 테이블로 나왔다. 표면적인 입장은 자신이 이사로 취임한 공장이 겪은 논란에 대한 책임표명이었다. 우리는 얼싸안고 물 밑으로 진행될 협상을 대비했다. 운이 좋다면, 누군가 말했다. 요괴의 산 일부분을 츠쿠모가미 자치령으로 넘겨줄 지도 모르지. BB는 호들갑이라며 말렸지만 그 역시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를 숨길 수 없었다.
그러나 현자의 식신이 두툼한 서류뭉치를 들고 사무소를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대신에 현자는 인간측과 직접 면담하여 인육 공정 문제에 대해 논의할 것임을 발표했다. 인간 대표로는 명련사의 주지, 신령묘의 태자가 뽑혔다. 요괴와 인간의 교류를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해온 이들이었고, 인망또한 두터운 이들이었으므로 인간 마을에서도 반대하지 않았다.
정작 문제를 제기했던 우리는 철저하게 판에서 배제당했다. 나는 각종 사설로 이 같은 상황을 비판했지만 반대 주장도 거셌다. '해당 단체의 과격성으로 미루어봤을때 합리적인 논의를 기대할 수 없다.'. '해당 단체의 단원들 중 몇이 과거에 인간마을에서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우리의 자극적인 활동이 독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평판또한 악화일로였다. 게릴라 인터뷰로 큰 타격을 입은 모리아의 무녀가 루머에 시달리다 못해 농약병을 비운 사건이 기점이었다. 가십의 대상에서 동정의 대상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공식 입장으로 유감을 표하고 쾌차를 기원했으며, 무녀가 고통받던 루머 대부분은 우리가 유포한게 아니라는 해명을 시도했지만, 무슨 말을 했었어도 상황을 타개할 수 없음을 우리 모두가 직감하고 있었다. 기울어지는 배에서 한 두명씩 발을 빼어 도망가기 시작했다.
"더 센게 필요해. 이딴 밍밍한 토론 따위는 한번에 잊혀지게 만들 걸로." 신경질적으로 비파를 튕기던 BB가 말했다.
"이때까지 했던 걸로는 안돼겠죠?"
"그걸 말이라고 해? 그 자리에서 린치나 안 당하면 다행이겠다. 다행히도, 쓸만한 타개책이 있어. 리스크가 커서 보류해두고 있던거긴 하지만, 지금 찬밥 더운밥 따질 때는 지났지."
"저는 뭘 하면 될까요?"
"들은 바로는 인간 대표들이 곧 공장을 견학한다고 하더라. 그날에 스무명 정도 인원을 인육공장에 대기시켜. 연장 챙기고, 복면 씌우고. 신호를 보내면, 공장에 침입해서 거기 있는 인간들을 싹 구출해서 놔주면돼. 공장에서 사육당하는 인간을 풀어주는 거지."
"그렇다면,"
"일단 우리는 다시 인간의 편이라는 신뢰를 얻을 수 있겠지. 거기에 현자면 몰라도, 자기들 재산이 날아간 셈인 캇파나 텐구는 가만히 안 있을 껄? 인간을 다시 잡아 부족분을 충당하려 할 텐데, 이쯤되면 평화로운 해결책은 물 건너 간거라고 봐야지."
상상을 초월하는 대답에 손이 떨렸다. 이때까지의 활동과는 차원이 달랐다. 불법과 합법을 넘나드는 활동이 대부분이었지만, 이것은 경우가 달랐다. 텐구의 재산에 직접적으로 손을 대는 행위는 아무리 온건한 기득권이라도 넘어갈리가 없었다. 하극상 이변때 멋모르고 텐구에게 대들다 사지가 갈갈이 찢겨 버려진 츠쿠모가미 동료들이 떠올랐다. 내가 동요하는게 눈에 띄게 분명했는지 BB가 내 손을 잡고 단호한 목소리로 나를 설득했다.
"이건 단순히 우리만의 문제가 아냐.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는 수백명의 인간들을 위한 것이기도 해. 두려움은 이해해. 하지만 지금의 틀을 깨부수지 않으면, 우리와 같은 약자와 연대하여 대항하지 못하면 지금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노력은 부정당하게 되는 거야. 우리가 해 온 일을 생각해. 바깥세상에서 납치당해 어쩔 줄 몰라하던 외부인을 데려다 줬을 때 기억나? 눈물 흘리면서 인사하던 그 아저씨 기억하냐고. 우리가 해온일이 그런거고, 앞으로 할 일도 마찬가지야."
너만 믿을게,
말을 맺고는 BB는 나에게 준비를 재촉했다. 그가 주로 주도한 공격적인 행동에 대해선 한 마디도 하지 않은게 떠올랐다. 한 마디 하려고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잽싸게 자리를 비웠다.
*
아니, 됐다고요. 철창 너머에서 인간이 말했다. 예?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흐리멍텅한 얼굴로 인간은 말했다. 어처피 밖이나 여기나 쓰레기처럼 살다 갈 인생이었어요. 차라리 바깥 세상보다 여기가 나아요. 밥도주고, 잠도 자고, 가끔 위로라고 여자도 보내주고....... 뭐 결국 기계에 썰려 고기가 될 거라곤 들었는데, 어처피 인생이란게 언제 죽을지 모르는 법 아닌가요. 오히려 약 먹고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처분된다니까 왠만한 죽음보다는 신사적인 편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솔직히 저는 여기 나간다고 해서 더 나은 삶을 살 순 없을 것 같아요. 걱정해줘서 고맙긴 한데, 진짜 괜찮아요.
*
구역질을 간신히 참았다.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체온 조절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듯 오한과 열이 반복해서 느껴졌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인간 스스로 거부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건 무엇이란 말인가. 아니 애초에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 '이용당하는 쪽이 있을지는 몰라도 피해보는 쪽은 없어요. 기득권을 제외하고는.' BB의 말이 머리에서 떠돌았다. 여전히 맞는것처럼 들렸다. 한편 S의 비난은 귓등에서 메아리쳤다. '혼자 자기연민에 빠져 돌아다니는 게 같잖아 보여.' 넘어질 듯 비틀거리며 나는 BB가 기다리고 있는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문은 열려 있었고 거기에는 BB가 담배를 물고 있었다. 그가 담배를 피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없어 안심이 되었다. 나는 그의 앞에서 주저앉듯 멈춰섰다. 흐느끼듯이 말이 쏟아졌다. BB는 여전히 침착했다. 내가 말을 끝내자 잠시간 숨을 고를 시간을 준 뒤 그는 나에게 물었다. 여전히 침착한 말투였다.
"예전에 여기 정화조에서 일했다고 말했지? 그럼 어디에 어떤 시설이 있는지도 아는거고?"
"네. 대충 알아요."
"분변이 쌓아두면 썩는 과정에서 분명 가스가 찰 텐데, 그걸 빼는 파이프가 혹시 천장에 있어?"
"네. 옥상에 무동력 배출기가 두어개 쯤 돌아갈 거에요. 그쪽으로 가스가 빠지는 걸로 알고 있는데......."
"환기가 잘 안 되었나봐. 잠시 둘러봤는데도 썩은 계란 냄새가 진동을 하더라고. 이러다 탱크에 불똥이라도 튀면 어쩌려는지."
"그...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시는 건가요?"
"음... 그게 말이지, 아 대놓고 말하긴 좀 그런데" BB가 말한다. 눈가를 살며시 찌푸린 채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가. 결심한 듯 품에서 은색 지포라이터를 꺼냈다. 손가락을 튕겨 불꽃을 내고, 말없이 그것을 바라본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날, 낙조의 따뜻한 색조가 침범한 채로, 비파를 튕기곤 했을 때, 내가 매혹당했던 그 얼굴로.
"뭐, 지들이 나가기 싫다면야, 강제로라도 나가게 해야되지 않겠어?."
그의 눈빛은 그때와 비교해서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한낮이라서, 노을 아래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백색광 아래서는 분명하게 보였다. 나는 이제서야 그걸 알았다.
*
"우리는 구하려고 온 쪽이니까 우리를 폭발과 연관짓지는 않을 거야. 뭐, 인간마을 여론이 끝장 난 상황에 진상조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겠냐마는."
BB는 내 우산을 들고 공장 밖으로 몸을 피하기로 했다. 너는 츠쿠모가미이므로 공장이 폭발한들 우산만 무사하면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BB는 말했다. 소식을 들은 동료들도 하나 둘 씩 출입구로 빠져나갈 것이다. 결국 남는 것은 나와 죽음을 명랑하게 기다리는 인간들 뿐이다. 아직 회담이 진행되고 있다면 4층 회의실에는 요괴 현자와 주지 같은 이들도 남아 있겠지.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는 페인트가 새로 칠해져 있었다. 하늘색의 페인트가 잿빛 어둠에 묻혀있었다. BB가 빠져나가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예전에 일했던 관제실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관제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내 후임 근무자는 보이지 않았다. 나처럼, 탱크를 확인하러 내려간 걸까? 썩은 계란냄새가 코를 찔렀다. 냄새를 느끼지 않기 위해 코를 틀어막고 입으로 숨을 쉬었지만, 악취는 여전히 심했다. 점차 몸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이 방에 낯선 팻말이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근무시 방독면 필참!'
웃기고 있네 진짜. 현기증이 일었고 그대로 나는 의자로 고꾸라졌다. 이마에서 콧등을 타고 내려가는 땀방울이 무겁다. 혼곤한 정신상태에서 몇몇 장면들이 무작위로 재생된다. 잡음이 수더분하고 장면 간 경계가 모호했다. 주마등마저도, 이곳에서는 분명치 않다.
피해보는 사람은 없다고 말하는 BB의 말. 지포라이터를 건네주던 굳은살 박힌 손. 악수의 감촉. 판플렛을 만들다 베인 상처에 반창코를 붙여주는 동료들. 화내는 빨간 무녀. 초록 무녀가 비운 빈 농약병. 외지인은 바깥세계로 돌아가기 전에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한 여름에 치켜들던 팔들은 핏줄이 선명하게 보였다. 인간의 삶은 통조림이 아니다. 우리는 만족하고 있어요. 사육당하고 있는 인간의 말. 뒤죽박죽인 기억의 파편이 뭉친다. 경험은 포괄되지 않는다. 하나로 모일 듯 싶으면 명백하게 다른 하나에 부딫쳐 다시 파편으로 흩어진다. 통일성을 무너뜨린다. 끝끝내 단순해지지 않는다.
위선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자유는 어떤 억압보다 나은 것이며, 나은 것을 더 많은 이들에게 분배하는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뒤틀려 있던 거겠지. 약자를 대변하며 강자에게 인정받으려 했으니. 모순은 필연이었고 상황이 악화되는 순간 속절없이 파열될 구조였다.
알고 있었음에도 대체로 까먹었다. 안전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언제나 밑바닥으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져 있었다. 돌아갈 집이 있었고 인육을 먹지 않아도 되었으며 빈곤과 부당함을 느꼈을때 호소할 곳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하는 것도, 종족의 배신자란 탈을 쓰고 정의와 도덕을 휘두르는 것도.
지하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한 2평 남짓한 방. 냉난방은 이상없지만 냄새가 나고, 습하여 벌레가 많다. 곰팡이가 시반처럼 퍼져있지만 벽지의 상태는 양호하다.
내가 살아온 세계도 이와 같지 않은가. 약자도 강자도 아닌, 애매한 특권의 중산층의 세계. 벌이는 시원찮지만 굶지는 않는다. 때로 부당한 일을 당하지만 차별받는 일은 없다. 고향집의 지긋지긋한 안온함 같은 것을 느낀다. 결국, 있어야 할 곳에 돌아온 것이다. 가스가 말초신경까지 장악한 탓인지 손에 힘이 빠졌다. 지포라이터를 떨어뜨렸다. 책상 모서리에 부딫쳐 뚜껑이 열렸다. 마찰음과 함께 솜털만한 불빛이 일었다. 붗꽃은 바닥에 깔린 가스에 취해 불길한 춤을 춘다.
시야가 흐려져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다. 수백미터 바닷속으로 침잠한 것 같은 고요함에 의식은 해체된다. 깨어날 수 있을지, 불꽃이 폭발으로 이어질지, 사태가 어떻게 종결될지에 대해서 대답을 내놓을 능력이 나에게는 없다.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중산층, 내가 중산층이라는 사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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