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生)을 위해 이(理)를 버린 그
10명의 음성이 들려온다. 나를 원하는 백성들의 울부짖음.
위인은 덕으로서 백성을 관철한다. 위인이라는 자는 덕으로서 업을 행한다.
내가 원하는 이상향. 이상향에 닿기위한 나의 정치, 나의 패업.
그래, 이 모든 것이 백성을 위한 일이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천하를 위한 일이다.
야망을 품은 위인의 귀는 밝고도 예리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바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이루게 해준다.
목소리는 욕망이 가장 먼저 표출되는 장소.
하나도 남김없이 이루어준다.
설령 그것이 나의 생각을 변화시켜주는 계기가 될지라도...
...
"태자님, 나의 태자님."
음성이 들린다.
"눈을 뜨세요. 어서 눈을 뜨세요."
굉장히 오랜 꿈을 꾼 것 같다.
생애의 순환을 여러번 되풀이한 것 같은 기분.
수많은 내가 언제나 똑같은 업을 행하는 기분.
나를 부르는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
긴 잠에서 깨어나도 잊혀지지 않는 그 음색.
"당신의 신하가 기다립니다."
그래, 이 세계에서 너같은 목소리를 가진 자는 없지.
나를 이곳으로 인도한 신하.
나를 다시 태어나게끔 만들어준 기인.
"당신의 소중한 심복이 당신의 부활을 기다립니다."
때가 되었다. 내가 도래할 때가. 내가 다시 백성들에게 모습을 드러낼 때가.
나의 재림이.
"조금씩 천천히, 그 눈을 떠주세요."
그녀의 인도를 받는다.
조심스럽게 눈을 뜬다.
"천천히, 더욱더 천천히."
나의 임시거처, 눈을 감기 전의 몽전대사묘를 떠올리며 눈을 뜬다.
"..."
몸을 일으켜 세운다.
잠이 들기 전 그 상태 그대로, 나즈막한 불빛에 비쳐지는 풍경에 익숙해져간다.
그리고,
"나는, 부활한 건가...?"
내 앞에 서있는 선인.
나에게 도교를 알려준 스승.
나에게 시해선이 되는 방법을 알려준 책사.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게되신 태자님, 축하드려요."
아니, 사선. 하지만 나에게 복을 안겨준 사선.
"그대는 세이가구나."
잠깐...
낯설다.
분명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말은 바깥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내가 알지 못하는 여성의 음성이 대신 내 생각을 대변해주었다.
... 그런 일이 있을 수는 없다.
"가만있게...! 내, 목소리가... 내 손이...!"
내가 변한 것이다.
서둘러 내가 나였음을 기억하기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내가 알고있는 나의 모습이 전혀 그려지지 않는다.
얼굴을 만졌지만, 내 형상을 이루고 있지 않았다.
나라는 존재로 구성하지 않는, 전혀 다른 사람이 내 의식을 채워나가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거지?
"무엇이 문제이신가요?"
사선은 아까와 같은 반응이다.
그녀의 또다른 목소리가 귓가에 들린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쓸 겨를이 없다.
"문제라니, 나를 보게! 내 몰골을! 내 차림을!"
이것도 아니다.
치장이 많은 옷, 그러나 잠들기 전에 입었던 옷은 전혀 아니었다.
나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저는 어떤게 문제인지를 잘 모르겠는데요?"
여전히 저 사선은 오리무중으로 답했다.
저렇게 남의 속을 밑에서부터 긁어오르는 방식, 지금까진 흘려넘겼다만 점점 신경이 쓰여온다.
아니, 그녀의 또다른 목소리가 묘하게 더 신경이 쓰인다.
"여자가 되었지 않는가!"
내 기억속엔 존재하지 않는 자의 음성이 날카롭게 들렸다.
"... 그게 어때서요?"
뭐?
"뭣이?!"
세이가, 너...
그녀의 목소리가 이상하다, 그때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때의 세이가는 그렇게 욕망에 가득찬 목소리가 아니었다.
"한 시대의 위인이 현재를 버리고 영생을 택하신 결과이옵니다.
태자님께선 자신의 역사를, 자신의 평가를 남자답지 못하게 버리고 도망치신 겁니다."
...! ㄴ, 네가 어찌 그런 말을 하는 건가!
"그건 자네의 계획대로...!"
"그때의 태자님은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소인배가 아니셨을 텐데요?"
세이가...!
나를 가르치려는 게냐!
내가 잘못했다는 것이냐!
"!... 자네...!"
부활에 대한 계획을 어찌 지금에 와서 네가 부정하는 거냐!
이 계획을 제안한건 다름 아닌, 너였을 터!
"당신은 너무 올곧았어. 한없이 아름답고 깨끗해서 누구도 당신에게 흠집을 낼 수 없었어."
"..."
내가 알고 있었던 세이가가 아니다. 내 앞에 있는 사선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목소리가 다르다. 내 목소리도, 그녀의 목소리도 이미 다르게 들려온다.
"하지만, 당신의 순수함도 오래가지 못했지.
사람이라면 누구나, 범인도 위인도 거스를 수 없는 욕망을 가지게 되었지."
...! 진의에 닿는 목소리가 들렸다.
... 아니 아니, 처음부터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면...
"설마 세이가, 자네... 나를 만나려고 했던 게...!"
내가 생각했던 정치의 연장선을 위한 방법이 아니었다면...
"그 진시황마저도 생에 욕망을 품었는데 당신은 오죽하려나.
하지만 그도 생에 집착하게 된 결과는 꽤 비참했지."
단지 나를 끌어내리기 위한 간책이었다면...
"... 나를, 비난하기 위해서였나!"
너의 그 능글맞은 웃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
"아뇨, 전 태자님을 좋아해요. 태자님의 순수하지 못한 모습도 좋아한답니다.
하지만, 순수함을 잃으신 태자님을 좀 더, 조금 더 망가뜨리고 싶어요.
당신을, 당신을 괴롭히고 싶어요."
목소리가 점점 일그러진다.
더이상 그녀의 생각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알고 있었던 그녀와 전혀 다르다. 그리고...
그녀를 파악할 시간이 없음을 직감했다.
...! 사선은 나를 향해 다가왔다.
오, 오지마. 불길하다. 예감이 안 좋다.
"가, 가까이 오지 마라 세이가!"
나를 감싸 안지 마라!
"여성의 몸으로 변하신 소감은 어떠십니까, 태자님?"
포근하게 감싸여진 천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그리고 갓 태어난, 앳된 소녀의 교성이 들린다.
여성은 사선의 행위에 저항을 하지만, 사선은 아랑곳 하지 않고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교성이에요. 갓 태어나신 여자의 몸은 각별하신가요?"
하지만 대답이 들리지 않는다.
그녀는 버젓이 불쾌한 기색을 보이고 있다.
"나를... 능멸하려는 게냐?!..."
이성을 부여잡고 있지만 그녀의 귀는 온전치 않다.
그녀에겐 아직 다음으로 향할 단계가 부족한 것 뿐이다.
"후후. 능멸이라뇨, 여자의 즐거움을 알려드리는 겁니다."
사선은 그녀의 옷을 한꺼풀씩 벗겨 내려간다.
사뿐이 가라앉는 날개의 흐름은 계속해서 아래를 바라본다.
"좀 더 저에게 몸을 맡기세요. 쾌락을 받아들이시는 겁니다."
실오라기가 얽혀들어가는 듯한 목소리가 소녀의 귓전에 울린다.
사선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끈적진 매혹이 묻어나온다.
"그만, 제발 그만하게나... 나는, 이걸 위해 영원을 선택한 것이 아니야...!"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녀는 변하고있다.
사선의 목소리는 점점 하나의 색으로만 비쳐지고 있다.
"어머, 아직도 불멸에 욕망을 바치고 계신 겁니까?
그렇다면, 영원히 여성의 쾌락에 빠져 사시는 게 어떻습니까?"
속옷마저 사선의 손놀림에 탈착되고난 후, 파란 악마는 소녀의 작은 가슴을 둥글게 만져올렸다.
이윽고 이곳에 또다시 퍼지는 소녀의 교성.
처음으로 닿아진 살결에 느껴지는 체온은 어떠할까.
뜻하지 않게 터지는 그녀의 응답은 그녀가 자신을 알아감에 있어 중요한 감미료이다.
"기분 좋은 목소리가 울려퍼지네요. 저도 기쁩니다.
소인의 봉사가 마음에 드십니까?"
사선은 기다리지 않지만 서두르지도 않는다.
소녀가 자신의 흐름에 참고 버틸 수 있도록 배려를 가한다.
그녀는 이내 답답히 적응해 나가고, 사선에게 반감을 드러낸다.
"자네의 욕망을 더이상 나에게 강요하지 말게나!... 더럽고 저급하구나!"
더이상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것일까.
자신의 새로운 몸에 적응해 나가기 위해서일까.
그녀에겐 아직 다음으로 향할 단계가 부족한 것 뿐이다.
"태자님...? 소인의 욕망만이 귀에 닿으신 겁니까...?
저의 다른 마음가짐은 들리지 않으시는 겁니까...?"
사선은 그녀가 어떻게 자신을 알아가게 하는지 잘 알고있다.
심중을 떠보는 건 과거의 태자가 아닌, 지금의 신하이다.
사선의 집요함은 그녀를 무너뜨리게 함에 있어서 중요한 도구이다.
"...! ..."
그녀는 들을 수 없다.
그녀는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아니,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눈 뜨기 전부터 이 사실을 알아야만 했다.
"당신의 총명함은 어디로 간 거죠? 당신의 천재적인 능력은 어디로 간 거죠?"
그녀는 자신이 눈을 뜨고 나서 이 사선으로부터 도망쳐야만 했다.
"소인 세이가, 당신에게 실망했습니다.
사선 세이가, 당신에게 감격했습니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다면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보여주면 된다.
그제야 사선이 처음으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
"드디어 제가 원하는 당신으로 변하신 거군요. 소인, 기쁩니다.
기쁨에 겨워 쾌재합니다!"
과거엔 단 한 번도 토로하지 않은 사선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린다.
지나침은 독이 된다. 하지만 그녀가 눈을 뜨게 하는 데에는 적당하다.
"세이가...?"
"드디어 당신을 더럽힐 수 있어!
드디어 당신을 마음대로 할 수 있어!
드디어, 드디어 당신을 나의 뜻대로 할 수 있게 되었어!"
손에 잡힌 감촉마저 사선의 욕망에 묻혀버린다.
가슴에 닿는 감각마저 그녀의 공포에 묻혀버린다.
자신이 그토록 능숙히 다뤄왔던 목소리들에 묻혀버린다.
"그만, 제발 그만 하게나...!"
힘 없는 저항. 표출할 수 없는 반감.
옷고름이 점점 더 풀어헤쳐간다.
소녀가 망설일 때마다 그녀의 새하얀 피부가 조금씩 드러난다.
하반신을 가리는 넓은 천마저도 열려 풀어진다.
"저항할 수 없게 된 기분은 어떠신가요?"
알고 싶지 않다.
"여성의 몸이긴 하지만, 이정도는 뿌리칠수 있지 않으신가요?"
뿌리칠 수가 없다.
"아니, 사실은 저항하고 싶지 않으신 건가요?"
오히려 진의를 묻는 건 사선쪽이었다.
"!"
목소리를 들었다.
그녀가 걸음을 뗀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그녀는 다음 단계로 왔다.
"그만, 더이상 내 생각을 독단하지 마!
아니야, 아니라고! 나는, 쾌락에 빠지고 싶지 않아!
그만해 세이가. 제발, 제발 그만해!"
말뿐인 저항. 반감마저 없는 호소.
필사적으로 부인하지만 그녀는 이미 발을 들였다.
그녀는 자신을 알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가, 당신의 약점입니다."
사선은 아래쪽의 속옷마저도 내려, 여성을 주장하는 부분을 다긋이 감싸눌렀다.
"!!!!!"
전기가 올라온다.
그녀의 머리가 붕 떠오른다.
그녀는 자신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도대체 뭐야, 이 감각은...?
너무 거세. 심각할 정도로 나를 잠식해가고 있어.
위험해, 정말로 위험해...
"처음으로 절정을 맛보신 소감은 어떻습니까?
당신의 예상을 너무 웃돌지 않으셨나요?"
"..."
대답을 할 겨를이 없어.
지금은 숨을 고르는 게 우선이야.
정신을, 차려야해...
그녀의 주박으로부터 빠져나가야해...
"맞아요. 여성은 남성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깊게 느낀답니다.
행복하지 않으신가요?
편안하지 않으신가요?
기분좋지 않으신가요?"
전혀 느낄 수 없는 감정이었어.
나도 내 자신을 모르겠어. 하지만 이 기분, 이 느낌...
조금 더 경험해보고 싶어...
...!
"아, 니야... 이건, 이건 내가 아냐..."
나는 여자가 아냐, 아니라고.
어서 원래 내 몸으로 돌아가야해.
어서 원래 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해.
"으음, 아무래도 태자님이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하셨는 지를 확실히 알려드려야겠어요."
끝난 게... 아니었어?
아직도 더 할 게 남아있어?
싫어, 나를 잊어버리기 싫어...
제발 그만ㄷ...
"!!!"
?!!!
뭐, 뭐가 들어온 거야?!
아파, 너무 아파.
몸을 관통한 것 같아.
뚫린 것 같다고.
"새하얀 피부, 역시 위인의 자태는 곱고 아름다워요.
물론 당신의 감춰진 부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달콤한 맛이랍니다."
마, 맞닿아진 거야...?
세이가 너와? 내가?
거짓말, 거짓말이야...
내 몸 속에 다른 사람의 것이...!
"제가 한 건 당신의 성만 옮겼을 뿐, 당신의 아름다움은 오로지 당신의 힘으로 이루어졌어요."
안쪽이 답답해.
억지로 벌려진 기분이야...
그만둬, 내가 더이상 남아있지 않아.
나를 잃어버려. 더 하게 되면 나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내가 사라지게 돼...
"이정도 여운이라면 잠깐의 고통이 가셨으려나요.
그럼 이제, 본격적인 교육을 시작할게요. 태자님을 위한 저의 진한 충언이랍니다."
제발, 그마...
"!!!..."
...
아앗...
... 좋아...
모르겠어...
... 기분 좋아...
내 모든 살들을 자극하고 있어.
천천히, 하지만 골고루 뒤덮이는 감각에 눌리고 있어.
쾌락이 너무 거세... 바뀌어진 몸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어...
그래, 이건 나약한 몸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그런 거야.
내가 아닌 이 몸뚱아리가 쾌락에 참을 수 없다고 말하는 거야.
괜찮겠지. 빠져버려도. 나의 몸이 아니니까.
이 쾌락에 몸을 맡겨도 되는 거야.
망설일 필요 없어.
아아,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교태어린 신음소리가 전부 내가 내는 거라니.
귀에 감미롭게 들려와. 내 목소리를 빼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그녀의 욕망도 사라지고, 내 안에 있는 건 오직 나의 목소리뿐.
내 목소리가 사랑스럽게만 느껴져.
... 그랬구나...
더이상 아니라고 발뺌할 수 없게 되었구나.
내 속에서 또다른 내가 들어옴이 느껴져.
나로 채워지는 것이 느껴져. 정말 이 몸은, 이 여자는 나였구나.
나는 여자가 되었구나.
앗...
맞닿아진 곳에서부터 행복이 흘러 들어오고 있어.
질척이는 교합에서부터 만족감이 부딪혀가며 커지고 있어.
참아낼 수... 없어...
허리가 꺾여져. 전부 받아들일 수 없어.
머리 끝까지 치밀어오르는 쾌감이라해도 나로는 전부 감당할 수가 없어.
아니, 더이상 감당하고 싶지 않아.
... 바보같아...
그녀의 욕망을 받아들일 수 없는 주제에 백성들의 목소리를 전부 들을 수 있다고 자부했어.
그녀의 거친 숨소리도 들을 수 없는 주제에 만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고 으스댔어.
이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던 거야, 나는.
이정도밖에 안 되는 위인이었던 거야, 나는.
나는 여자일 수밖에 없는 작디작은 아이였어.
그래서 난 소녀의 모습 그대로 태어난 거였어.
세이가, 나를 원하는 사선이여. 나를 거두어주시길.
나의 부끄러움, 나의 치부, 나의 교성도 표정도 가눌 수 없는 이 몸도 전부 가져가시길.
당신의 움직임에 이끌려 앙앙대는 이 계집애를 잡으시길.
이제서야 나를 알 것 같아. 원래의 나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이것이 진짜 나의 모습...
"태자님, 이것이 제 욕망입니다...!"
...! 으읏!
거세, 너무 거세. 더이상 세이가, 당신을 받아낼 체력이 없어.
무엇을 할 건지는 알고 있어. 나 역시 주는 쪽이었던 때가 있었으니까.
반대의 입장을 경험한다니, 그때엔 상상도 할 수 없었어.
하지만 지금은,
"윽!"
아... 앗!
"!!!!!..."
뜨... 거워...
몸 안에 들어오고 있어. 그녀의 욕망. 그녀의 불순한 계획들.
받아들이고 싶어. 이것이 원래 내가 할 수 있었던 받아들이는 행위.
가득 채워질 때까지, 이대로 조금만 더, 여운을 담아서 조금만 가까이.
힘이 들어가질 않아 당신을 안을 수는 없지만, 당신을 용서할게.
세이가, 조금 더 나를 끌어안아줄 수 있겠어?
조금만이라도 더 나에게 당신의 체온을 전해주지 않겠어?
나쁘지 않아. 이렇게 내가 강박적으로 매달려서 해야한다는 의무감을 벗어 던지는 게.
위인의 삶을 버리고 한 명의 어린 소녀가 되는 게.
나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내가 이상하지만...
사실... 기뻐...
눈물이 날 정도로 좋아.
이제서야 나의 욕심을 알 것 같아. 원래 내가 무엇을 원했는지.
나는 사라지고 싶었어.
사실 없어지고 싶었어...
"어떠십니까, 여자가 되신 소감은?"
정말로...
"... 행복해..."
"지금까지 당신을 섬겨왔던 시간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이십니다."
정말로...?
그렇다면 나...
"... 나, 이제 자유롭게 생을 이어나갈 수 있는 거야?
더이상, 더이상 남자로서의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집착하지 않아도 되지? 그렇지? 나도 행복을 위해 자유로울 수 있는 거지?"
"태자님, 환상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환상향은 사람들에게 잊혀진 자들을 받아들이는 곳.
저희는 이제 더이상 과거에, 백성에, 자신의 사명을 위해 자신을 버리지 않아도 됩니다.
말초적인 행복도 이렇게 감사하며 느낄 수 있어요."
...! 정말 이루어진 거야?
"세이가... 나... 그동안, 힘들었어...
내가 원하지 않아도 위인으로서 살아야하는 내 생이 너무 싫었어...
나를 억지로 밀어세우는 백성들도, 가문도, 왕위도 너무 싫었어...
떠나고 싶었어... 차라리 그들이 없는 곳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어..."
"전부 벗어 던지세요. 자신의 욕망을 자유롭게 털어놓으셔도 됩니다."
나는...
"세이가..."
행복해지고 싶어.
"이 달아오른 감각이 아직도 사그러들지가 않아..."
더 행복해지고 싶어.
"숨을 고르고 몸을 쉬어도 가슴이, 마음이 진정되지를 않아..."
더욱 더 쾌락에 빠져들고 싶어.
"태자님께 좋은 선물이 있습니다."
그러니 나에게 해줘,
"선물...?"
더욱더 나를 버릴 수 있게 해줘.
"후토님, 나오셔도 됩니다."
후토?!
"미, 미코님... 눈을 떴을 때 이런 게 있어서..."
너도, 세이가처럼?
"아까부터 아플 정도로 커져서, 너무 당황스러워요..."
후토, 당신도 늠름한 자태를 하고 있군요.
맛보고 싶어요, 당신의 욕망을.
알고 싶어요, 당신의 목소리를.
"할짝."
제가 어떻게 될지 정말 기대가 돼요...
생(往)을 위해 이(耳)를 버린 그녀
...
천근같은 몸이 정상적으로 돌아오고나서야 비로소 일어설 수 있었다.
"잠시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
현실을 즐기기 전에 잠깐 정리해야 할 것이 생각났다.
내가 누워있었던 곳에 같이 있었던 그것.
내가 시해선이 되기 위해 매개체가 되었던 물건.
보검.
장식은 여전히 깨끗한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자루를 쥐고 검집을 뽑아 칼날을 바라본다.
청아한 자태 그대로 예리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손을 가져다 대었다.
"...! ..."
상처가... 나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것일까. 이곳에 오고? 잠이 들기 전?
아니면 의식을 했었던 그때에...?
여자로 변했던 건 내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인 건가?
검이 검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처럼,
나도 내가 위인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해서인가?
내가 남자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해서인가...?
손바닥에 묻어나온다. 칼날에 묻어나온다.
이미 난 그녀에게 읽혔던 거다. 눈물이 답이 될 수밖에 없도록 한 거다.
그리고... 그런 나를 기다려줬다.
그녀의 속을 알 수 없다. 그녀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녀가 정말로 나를 원하는 건지조차도 알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그녀를 선택했다.
나는 나를 선택했다.
그래, 잊혀진 과거엔 더이상 연연하지 말자.
나는 소녀이다.
검을 다시 검집에 넣는다.
그리고 맨바닥에 떨어뜨린다.
"태자님...! 예전의 태자님이 들어있는 도구를 함부로 대하시면 위험합니다."
아니 후토, 반대야.
"더이상 필요없어."
과거의 나는 더이상 필요없어.
뒤돌아서 후토에게 다가갔다.
"오래 기다렸지...? 많이 아팠을 텐데, 미안해..."
변함없이 활기찬, 하지만 색욕에 눈을 뜬 그녀를 바라본다.
"아, 아닙니다 태자님. 저로서는 그저 황송할 뿐입니다."
무릎을 꿇고 그녀의 물건을 대하기 좋은 위치를 잡는다.
낯설... 지 않다. 크기도, 모양도, 그리고 핏줄이 도드라진 부분도...
나의 것이다.
"..."
중요치 않다.
남자였을 때보다 더 크고 무섭게 보인다.
이걸 능숙히 다룬 과거의 첩들이 굉장해 보일 지경이다.
하지만,
"하읍..."
"우앗?!..."
그녀의 욕망을 들어주고 싶다.
부족하지만 힘을 내서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다.
진한 남성의 향기... 형용하기 어려운 향취이다.
그렇지만 좋다. 내 안에 부족한 것이 채워지는 느낌이다.
이 몸이 받아들이길 원하고 있다.
혀로 입 안에 넣어진 부분을 조금씩 굴려간다.
"하으으... 자, 자극이 너무 세요오오..."
과거 그녀들이 나에게 했던 장난들이다.
유달리 약한 부분을 집요하게 매만지는 첩들이 미웠지만
지금은, 오히려 고맙다.
후토를 기분좋게 만들어줄 수 있다.
하지만 적당히, 그녀가 참아낼 수 있도록, 그녀가 느낄 수 있도록.
"우으으으..."
어느정도 익숙해진 모양이다.
슬슬 그녀를 담뿍 맛봐도 될 것 같다.
입안을 점점 그녀의 것으로 채워간다.
그녀의 것으로만 가득 차기를, 나의 것으로만 가득하기를.
"흐으으읏...!"
뿌리까지 가득 삼켰다.
... 이렇게 여린 몸으로는 너무 커서 안 되겠다.
타액을 듬뿍 묻히며 입에서 빼낸다.
"하아, 하아, 하아..."
목이 막혀서 너무 답답했지만, 숨을 고르고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그녀를 더이상 기다리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
다시 그녀를 삼킨다. 하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부분까지.
그리고, 적당한 압박으로 그녀의 물건을 사방에서 눌러간다.
"후아앗?!"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압각을 유지하며 그녀의 물건을 내었다 삼켰다를 반복한다.
빠르게 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녀가 안달이 날 정도로 달래주기만 한다.
"태, 태자님..."
그녀의 것은 정성어린 자극에 많이 약하다.
보드랍게 다루면 애태워진 물건이 스스로 자신을 표현하게 된다.
나를 너무할 정도로 많이 닮았다.
"너무 세요... 조금만 천천히 해주세요..."
조금 더 속도를 올린다. 허리에 힘이 들어간다.
처음의 약점을 괴롭히는 것도 잊지 않는다.
비록 할 수 있는 건 단순한 봉사일 뿐이지만, 그녀를 위해 최대한 노력한다.
"위, 위험해요..."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압박을 더한다. 물건 자체를 밀어 올리고 내린다.
맥동이 거세지는 박자에 맞춰 혀를 훑어 내려간다.
"태, 태자니임!!!"
"읍?!..."
뜨거운 욕망이 흘러들어온다.
옹글져 모아지는 걸쭉한 액체.
그녀의 탁하디 탁한 표현에 잠시 놀랐지만, 이내 마음을 추스른다.
그녀의 물건을 놓아준다.
"죄, 죄송합니다 태자님."
이상한 냄새, 이상한 점성, 그리고 이상한 맛.
과거의 내가 가지고 있었던 수많은 평가들.
코를 마비시킬 정도로 자신의 주장을 나타내고 있다.
... 맛있다...
그러한 평가가 좋다. 그렇게 보여지는 내가 좋다.
나는 원래 이런 여자이니깐.
"꿀꺽."
그녀의 욕망을 받아들인다.
"태, 태자님!"
놀랄 필요가 없다.
원래 나의 것이었던 욕망. 원래 나의 것이었던 과거.
다시 내가 가져감이 맞다.
달콤한 욕망은 내가 가져감이 맞다.
그리고 욕망이 채워져간다.
세이가의 욕망도, 후토의 욕망도 모두 내 안에 있다.
서로가 나에게 원하는 바가 모두 내 안에 들어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후토를 바라본다.
"아직 만족하지 않았나 보네. 아파하는 크기 그대로야."
만족하지 않은 쪽은 오히려 나다.
"태, 태자님, 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
"세이가도 와주겠어? 내 모습만 바라보고 있지만 말고."
그녀를 의식하고 있었던 쪽은 오히려 나다.
"어머, 괜찮겠어요? 둘이서라면 그 몸으로는 힘드실텐데."
내 욕망이 채워지기엔 아직 한참 부족하다.
"아직도 두근거리고 있어. 좀 더, 조금 더 내 욕망을 날뛰게 하고 싶어."
내 욕망으로 축축해진 바닥에 앉는다.
그리고 나의 욕망을 채워줄, 나에게 욕망을 내어줄 그들에게 손짓한다.
"나를 너희들의 것으로 해줘. 너희가 마음에 들 때까지, 내가 마음에 들 때까지."
서로의 욕망을 뒤섞어가며 놀아보자.
욕망이 점철된 소리를 내어가면서...
향기로 취하다
: 자신의 향기로 취하다
"사랑방이 준비되었습니다."
사선과 함께 바깥으로 첫 외출.
나를 가장 잘 이해해줄 귀인과의 만남을 가져다 준다는 그녀의 말에 졸졸 따라나섰다.
"제가 먼저 그 사람의 의향을 물어보러 가겠습니다. 태자님은 잠시 여기서 기다려주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저 기인은 내가 다시 깨어날 때까지 어떻게 지냈을까.
내가 환상향으로 오기까지 그녀는 어떻게 나의 거처를 지켰을까.
"응. 기다리고 있을게."
그녀의 행동이 점점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내 독단으로 결정한 안위가 아니다. 곱씹어 볼수록 그녀의 바람이 정당하다는 것을 느꼈다.
신발을 벗고 안채로 들어갔다. 나의 신하는 안내를 받고 발길을 옮겼다.
"..."
... 방 안에 혼자밖에 남지 않았다.
가부좌... 아니, 정좌하여 앉았다.
무엇이 필요할지도 모르니 내 곁에서 부름을 받아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나 문 밖으로 귀를 기울이면 들려오는 건 고요한 바람소리.
아무도 나의 목소리를 들어줄 수 없다.
나를 목적으로 하는 방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렇지. 더이상 나는 그러한 위치에 있지 않지.
나는 더이상 태자가 아니지 않는가.
화나지 않는다. 나의 현재의 모습에 걸맞은 대접이다.
내 모습을 봐라. 여자가 되었지 않는가.
이렇게 작고 가녀린 소녀가 되어버렸지 않는가.
옛 위엄은 내가 직접 던져버렸다. 과거의 미코는 보검에 담아보냈다.
... 토지코는 아직도 나를 그때의 위인으로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 아이에게 내가 나를 더이상 스스로 지킬 수 없다고 말을 하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화내려나...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려나...
"... 아직 여름인가보네. 오랜만의 바깥이라고는 해도 상당히 더운걸."
정적을 깨기위한 바람. 음의 흐름.
지하였기 때문에 선선하기만 했던 나의 거처하고는 전혀 다른 환상향의 날씨.
땀이 배어나온다. 옷이 뜨겁게 달라붙어 답답하다.
새로운 몸이 되었어도 이렇게 땀이 흐르는구나.
달라진 내가 인형과 같은 존재가 아닌, 정말 인간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내가 나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더이상의 의심은 나를 스스로 옭아맬 뿐이다.
"..."
... 아니, 내가 아니다. 내 기억속에 남겨진 나와는 다른 냄새가 났다.
여자의 냄새. 성별이 달라졌기 때문에 나오는 이질적인 냄새.
더운 땀에 젖어서 발산하는 건가. 방 공기도 더워서 그런지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째선지, 왠지 모르게 그 냄새를 더 맡고 싶다.
몸에서 퍼져나오는 뜨거운 공기를 맡았다.
... 여자의 페로몬인가...
전혀 몰랐던 나의 새로운 모습. 달라진 나에게서 느끼는 어색함.
하지만 그것이 좋았다. 내가 달라졌음을 책망하고 싶지 않았다.
점점 기분이 묘해지기 시작했다.
나를 점점 부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 나를 잘 모르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밑은 저릿저릿해서 뜨거운 느낌이 들었다.
좀 더 이 기분을 느끼고 싶다.
좀 더 나를 알아가고 싶다.
좀 더, 좀 더 뜨거운 숨을 들이마시고 싶다.
땀으로 달라붙은 옷을 떼었다.
더운 숨이 얼굴을 적시어 갔다.
나의 체온으로 데워진 숨결이, 나의 호흡이 나를 어루어 만졌다.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 좋아져만 갔다.
오히려 나에게 닿는 공기가 시원하게만 느껴졌다.
나의 숨이 덥기 때문에, 나의 체취가 뜨겁기 때문에.
기분에 이끌려졌다. 한 명의 소녀가 되어 분위기에 이끌려졌다.
저릿한 가슴을 만졌다. 조그맣게 감싸쥐었다.
"...! ..."
옷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느낌은 강렬하게 전달되었다.
... 덥다.
온 몸이 뜨겁다.
나의 공기가 더욱더 나를 뜨겁게 만들 것만 같았다.
옷을 벗었다.
단추를 하나씩 풀어 조금씩 공기를 통하게 했다.
상체가 방의 시원한 공기에 노출이 되었다.
나를 바라봤다.
봉긋 솟아오른 가슴, 아직 다 자라지 않은 가슴이다.
소녀가 된 감상이 어떠십니까?
사선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 나 스스로도 내가 너무 여려서, 바라보기만 해도 바스라 사라져버릴 것 같아.
내가 남자였을 때보다 몇 배는 더 작아진 것 같아.
하지만... 귀여워. 내 자신이 사랑스러워.
나를 표현함에 있어서 적당한 크기, 앙증맞은 사이즈.
나에게 닿는 나를 느낌에 있어서 부족하지가 않아.
여자의 피부는 정말 부드러웠다.
손끝, 손가락, 손바닥에 닿아지는 감각에 빠져들어갔다.
... 기분좋아...
더욱더 나를 들이마셨다.
나의 체취로 채워져갔다.
바라는 감정이 점점 커져갔다.
나를 점점 원해갔다.
원한다.
나를 원한다.
나를 더욱 더 원한다.
나를 주체할 수 없어졌다. 감정이 솟아올라갔다.
"..."
손바닥에 닿는 딱딱한 감각.
아까보다 더욱 강해진 욕망에 놀라 움직임을 멈췄다.
욕망의 방향이 궁금했다. 나에게서 나에게로 순환하는 것인가.
손바닥에 감각을 집중했다.
곧게 두드러진 유두. 손을 떼어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본다.
작다. 조그맣다. 하지만 귀엽다. 두근거리는 고동에 맞춰 자그맣게 떨리는 것이 귀엽다.
그리고... 야해보였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감정이 이렇게 불순하다니...
아니... 기쁘다. 드디어 내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나의 욕망을 나를 통해서 받아낼 수 있다.
솟아오른 감정을 어루만졌다.
"!..."
스치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같았다라는 의심은 저릿저릿 올라오는 신호에 모두 사라졌다.
동글동글 손끝으로도 움직여보고,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집어올리기도 했다.
욕망이 계속 흘러들어감에따라 머리도 점점 저릿저릿 울려가기 시작했다.
더 기분이 좋아지고 싶다.
좀 더 기분이 좋아지고 싶다.
나를 좀 더 기분좋게 해주고 싶다.
나를 어루만졌다.
채워져간다.
나를 주물러봤다.
더 채워져간다.
나를 세게 만졌다.
"...!!!"
채워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황홀경, 갑자기 물밀듯이 들이닥치는 감정에 휩쓸린다.
머릿속이 새하얘져간다.
온 몸이 찌릿찌릿 떨렸다.
여자의 몸으로 처음 경험해보는 절정.
이것이 여자가 느끼는 절정이구나.
이것이 "간다"라는 건가...
먹먹한 생각이 삐걱거리며 드러나진다.
황홀경에 젖은 몸은 의지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여전히 생각이 뭉뚱그려 표현된다.
제대로 생각할 수 없다.
그때, 옛 시절의 내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
어째서... 왜... 왜 내가 생각이 나는 거야...
갑자기 부끄러워진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지금까지 무엇을 한 거야.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어째서 내가 이런 짓을 벌이고 있었던 거야...
...
부끄럽다고? 내가?
나의 모습이?
아니, 부끄럽지 않다.
나를 원한다.
과거의 나도 나를 원하고 있다.
여자가 되었음을 행복해하고 있다.
내가, 바로 내가, 과거의 내가.
기분이 좋아지기를 바라고 있다.
더욱 더 절정에 다다르고 싶어한다.
멈추고 싶어하지 않다.
내가 나 자신답게 변했음을 알리는 나의 고백.
나의 욕망에 응하는 나의 목소리.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잖아.
그렇게 소극적으로 표현하기만 한다면 진정한 나의 바람을 나에게 말할 수 없을 거야.
들려줘, 나의 욕망을.
어서 들려줘,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남자였을 때의 나, 나를 어떻게 하고싶어?
입가에 드리우는 미소.
아랫도리가 축축해진 것을 느꼈다.
노골적으로 나의 욕망을 알려주고 있다.
치마를 벗었다.
어떤 액체로 축축해진 팬티가 보였다.
나를 적나라하게, 나를 음흉하게 원하고 있다.
애액으로 점철된 하반신.
별개로서 느껴졌던 감각이 하나로 합쳐진다.
나의 바람에 응한다.
팬티를 벗었다.
내가 여자가 되었음을 알 수밖에 없는 나의 모습.
인정했던 나의 본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보게된다.
여자의 그곳은 보는 것만으로도 매끈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맨들맨들하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귀여웠다.
그곳은 애액으로 젖어있었다.
... 조금만 나올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많이 나오는구나.
그녀에게 몸을 맡겼을 때도 이렇게 많았을까.
그녀에게 닿아지고싶은 욕망이 이렇게 많았을까.
여자의 행복을 느끼고 싶다는 욕망이 이렇게 많았을까.
나의 진정한 모습을 알아가는 시간이다.
둔부를 손으로 감싸봤다.
"...!"
여자의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마치 세상에서 제일 부드러운 것을 만진 듯 했다.
손의 따뜻한 느낌이 그곳을 더 저릿하게 만들었다.
좀 더 지릿지릿해지고 싶다.
나의 모든 걸 알아가고 싶다.
부끄러움으로 숨기고만 있었던 나의 본 모습을 알고 싶다.
손을 고간으로 옮겼다.
음부를 만졌다.
"읏...!"
그곳의 기분을 흠뻑 느꼈다.
강하다. 너무 강렬하다.
어루만졌을 뿐인데 몸은 주체를 못하고 떨었다.
마치 조금만 건드리면 바로 가버릴 것 같았다.
확실히 강한 쾌락이 느껴진다.
몸이 계속해서 위험하다는 신호를 보냈다.
너무 자극이 세다고. 지금의 감정으로는 버틸 수 없다고.
몸 전부가 저릿저릿 울렸지만, 그중 음부에서 가장 찌릿찌릿하게 감각을 받아들였다.
... 알고있다.
그래서 멈췄다.
좀 더 이 기분을 즐기고 싶어서.
벌써부터 가버리면 행복에 지쳐버린 몸에게 미안해서.
느긋하게 이 기분 좋음을 느끼고 싶어서.
나를 알아감에 있어서 여운을 가져도 되지 않는가.
음부를 위 아래로 비비기 시작했다.
"흣...! 으흡...!"
자위라는 행위를 하면서 입에서는 달콤한 소리가 나즈막히 흘렀다.
행복한 울림이다. 나에게서 나오는 교성이 전부 이 행복을 말하고 있다.
애액이 마찰되어 튀기는 소리가 나에게서 지기 싫다는 듯이 울려퍼진다.
나의 음성도 새어나오는 걸 벗어나서 자유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 점점 이성을 잃을 것 같다.
남자의 입장에서, 과거의 자신의 입장에서 지금의 나를 바라본다면 어떨까.
마치 나를 유혹하는 것만 같았다.
남성을 원하는 손짓으로 보였다.
그래서?
멈추려고?
아니, 기분 좋아질 거야.
자위행위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나를 알아간다.
내가 무엇인지 알아간다.
점점 알 것 같다.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 알 것 같다.
나를 느낀다.
감정이 격해진다.
뜨겁다. 너무 뜨겁다.
호흡이 가파진다.
오직 나의 음성, 나의 향기, 나의 촉감으로만 이루어진 세계.
아직 부족하다.
뭔가가 부족하다.
나의 눈은 무엇을 바라봐야 하는 것인가.
초점을 잃은 눈에게, 나의 욕망이 충족되지 않은 눈에게 어떠한 자극을 줘야할 것인가.
드르륵.
방문이 열린다.
"소승, 인사드립니다."
"...! 하아아아아아아아아아!!!"
가녀린 몸이 즐거움에 버티지 못하고 안녕을 고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까지 나의 목소리를 전해주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까지 나의 냄새를 흘려주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까지 나의 온기를 닿게하였다.
그리고...
저 사람에게 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가 가버린 모습을.
나의 절정을.
"..."
나의 눈은 여인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 충족되었다.
채워졌다.
나의 욕망이 채워졌다.
... 하지만 부족하다.
아직도 부족하다.
더이상 무엇을 채워넣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미코님."
여승의 입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미코님, 자신을 알게 되셨습니까?"
그녀는 세이가에게서 무엇을 들었을까.
"어째서 들어오지 않았나?"
궁금하다. 하지만 궁금증이 내가 원하는 갈증은 아니다.
"미코님의 행복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미소를 똑똑히 바라봤다.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는가?"
알고 싶다. 하지만 호기심이 내가 원하는 갈증은 아니다.
"세이가씨는 저에게 단 한마디만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녀가 나에게 다가온다.
알몸인 나에게, 어느것도 가려져있지 않은 나에게.
"성인임을 포기하고 행복을 선택하신 태자님께 모두의 사랑을 전해달라고요."
그녀가 나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온다.
얼굴이 가까워진다.
서로의 숨이 맞닿아진다.
그리고...
"...!"
입술이 포개어진다.
부드러운 감촉, 몽롱한 정신에 맑은 감각을 불어넣었다.
달콤한 맛이 느껴진다.
그녀의 맛이 느껴진다.
...! 알겠다. 이제야 알겠다.
충족되었다.
모두 채워졌다.
나를 알게 되었다.
내가 여자가 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여운을 남긴 촉감을 뒤로, 여승은 자신의 욕망을 말하기 시작한다.
"그럼 미코님, 저에게도 당신이 무엇을 깨달으셨는지 알려주시길 바라요."
여인은 자신의 긴 치마를 들췄다.
단단히 맥동하는 움직임이 내 눈 앞에 어른거렸다.
"... 자네도 받은 것인가?"
소녀에게 묻는 태도가 아니지 않는가.
"네. 세이가씨께서 제 욕망을 표현해주셨더라고요."
하지만 기분이 좋다.
"그럼 자네에게도 내가 알게된 행복을 알려주겠네."
이것이 나의 길이라면 받아들이겠다.
이것이 환상향에서 나의 역할이라면 행복하게 받아들이겠다.
"자네의 욕망을 알아가면서 말일세."
왜냐하면, 나는 진정으로 내가 되었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나를 알려주겠네.
: 향기로 자신을 취하다
매미는 여름에 생(泩)을 다한다
0
명련사를 가로질러 매미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여름도 이제 곧 막바지, 매미는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자신의 소리를 낸다.
"... 비사문천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경내에 뜻있는 자의 목소리가 가라앉는다.
설법을 듣기위해 모인 요괴들은 자신들의 이상향을 위해 귀를 기울여 듣는다.
뱌쿠렌, 그녀의 사상이 요괴들의 마음을 휘어잡는다.
완곡하지만 강한 음성, 자신의 주장에 확신이 있는 스님의 말은 가히 비사문천 그 위치에 서있는 것 같다.
하지만 숨겨진 잡음이 있다.
요괴들에게 들리지 않는 음성이 있다.
명련사의 안쪽, 가벼운 자라면 접근이 불허한 귀인을 위한 장소.
명련사의 사랑채에도 매미의 음성이 감싸인다.
"...! ..."
여자의 목소리가 방안을 채워나간다.
"...!"
여성의 교성이 메아리쳐 갇혀나간다.
요괴의 평화로운 앞날을 위한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불협화음.
인간과 요괴의 공존을 위한 명련사에는 있어서는 안 되는 불경한 소리.
귀인의 대접을 불허한다.
귀인을 자신들의 식솔들로 더럽힌다.
설법을 행하는 불가의 사상은 어디로 갔는가.
인간을 위하는 도가의 위인은 어디로 갔는가.
아, 그곳에 있구나. 태자님, 나의 태자님이여.
사랑스럽습니다. 그 모습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부디 저의 뜻대로 이루어 주시길 바랍니다.
부디 저의 원대로 태어나 주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목소리는 결국 저만을 위한 것이니깐요.
태자님, 나만을 위한 태자님.
... 큰스님의 설법이 끝났다.
요괴들은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문득 한 요괴가 불가의 귀의자에게 물음을 구한다.
"스님, 최근 스님의 얼굴이 한창 더 밝아지셨습니다."
뱌쿠렌이 그 요괴를 바라본다.
자애의 미소, 한 점 어두움이 없는 성인의 얼굴이다.
"어떤 깨달음을 얻으신 겁니까? 저희도 그 열반에 다다르고 싶습니다."
"..."
인간이 요괴에게 다가선다.
성인이 요괴에게 대답한다.
"조만간, 당신들에게도 저희들의 즐거움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위인은 웃으며 말한다.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으로요."
멋쩍이 웃는 요괴는 연꽃에 담긴 수수께끼를 들고 밖으로 나간다.
요괴들이 모두 명련사의 바깥으로 나간다.
"뱌쿠렌님, 요괴들이 모두 돌아갔습니다."
배웅을 끝낸 뉴도인이 소식을 전한다.
뱌쿠렌은 바깥으로 나간다.
"너도 같이 들어가지 않겠느냐?"
묻는다.
"아닙니다. 저는 아직 마음을 정하지 않았습니다."
답한다.
"... 그리고, 저는 이것이 정말 저희의 뜻과 맞는 것인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두건을 쓴 여인은 대답을 철회한다.
"머지않아 나의 바람을 이해해줄 수 있을 거라 믿네."
장발의 스님은 자신의 제자를 그 자리에 두고 걷기 시작한다.
"... 나의 뜻이 곧 불가의 뜻임을."
뱌쿠렌은 사랑방으로 향한다.
문을 연다.
"뱌, 뱌쿠렌님?!"
"!!!..."
이전에도 들었던 그녀의 목소리.
같은 크기, 같은 높이, 그리고 같은 길이.
절정에 다다른 목소리.
초대받은 손님의 몸이 축 늘어진다.
"여, 여기엔 어인 일로..."
인간의 또다른 제자가 묻는다.
"귀인께 오늘의 설법이 끝났음을 알리려고 온 거네."
뱌쿠렌은 안으로 들어온다.
위인의 반응을 살피러 얼굴을 바라보나, 그녀는 아직 대답을 정하지 못한 상태이다.
충분히 추스를 수 있는 시간이 지난 후, 소녀는 눈을 뜬다.
"오늘도 뱌쿠렌님의 설법이 듣고 싶어요."
담담한 성인의 눈, 어린 아이의 맑은 눈망울.
무겁게 가라앉은 불가의 눈으로 지긋이 확인한다.
"... 좋습니다."
뱌쿠렌은 정좌하여 앉는다.
"미나미츠, 미코님을 일으켜 세워주게."
요괴가 먼저 몸을 세우려고 했다.
아이는 자신을 두고 가려는 자의 등을 감싸 안았다.
"미, 미코님...?"
당황함을 한 몸에 받는다.
"도망가시려는 건가요?"
위인은 어리석은 자를 붙잡는다.
"이러시면 제가 나갈 수가..."
"..."
절레절레.
"그럼 미나미츠, 너도 여기서 같이 듣는게 낫겠구나."
뱌쿠렌이 입을 뗀다.
"뱌쿠렌님, 저도 같이 있게 된다면 미코님을 계속 눕게할 수밖에 없는데요..."
어리석은 대답.
"그분을 안아서 듣게 하시면 되지 않느냐?"
스님은 현답을 내린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자는 허리를 들어 소녀를 가볍게 들어올린다.
요괴의 품에 안긴 여자아이는 두둥실 몸이 떠올라 성인과 마주하게 된다.
두 목적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설법이 시작된다.
...
방 안을 가득히 교성으로 메워진다.
작은 성인의 목소리를 배경삼아 큰 성인의 말씀이 진행된다.
물기 어린 살들이 맞부딪히는 소리에도 설법은 중지되지 않는다.
새어나오는 침이 까끌거리며 비벼지는 소리에도 설법은 중지되지 않는다.
"그... 그렇... 군요... !..."
작은 성인은 스님의 발언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귀기울여 듣는다.
자신에게서 새어지는 발음을 들어가면서.
"궁금한 것이 있으신가요?"
뱌쿠렌이 묻는다.
"...! ... 없습... 니... 다..."
대답이 어려워지는 고조에서도 소녀는 자신을 잃지 않는다.
하지만,
"!!!..."
가녀린 그녀의 몸은 이내 버티지 못하고 경직하게 된다.
"... 후후."
뱌쿠렌이 웃는다.
"때마침 제가 행했던 설법도 여기까지였습니다."
미나미츠에게 안긴 상태에서 또다시 몸을 늘어뜨린다.
"그럼 미코님, 아침을 준비하겠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세요."
뱌쿠렌은 일어서서 바깥으로 나간다.
미나미츠도 작게 숨을 내쉬는 아이를 조심스레 눕히고 바깥으로 나간다.
"... 저기, 스님."
둘은 부엌을 향한다.
"왜 그런가?"
스승은 제자를 바라본다.
"최근 태자님께서 스님의 말씀에 첨언을 달지 않으신데, 어떤 일이 있었던 겁니까?"
미나미츠가 뱌쿠렌에게 물었다.
"..."
발걸음이 멈춘다.
"하하하하하. 알고 있었구나."
뱌쿠렌은 웃기 시작한다.
"저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이라면 분명 저희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계셨을 터. 헌데 어찌..."
그리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제자는 스승의 뒤를 쫓는다.
"아무래도 그분께서 우리의 뜻에 동의를 하기 시작하신 게 아닐까 싶네."
뱌쿠렌은 대답을 한다.
"아니면, 더이상 위인의 모습으로 살기를 원하지 않으시거나..."
"스님! 너무 빨리 걸어가십니다! 아직 밥이 다 지어지기엔 멀었다고요!"
듣지 못했다.
듣지 못하게 했을 수도.
매미가 명련사를 감싸안으며 울고있다.
조만간 그 매미는 사라지겠지. 여름이 다 가게 된다면.
명련사에 매미의 소리가 잦아든다.
1
그녀는 나를 놓지 않는다.
"...! ..."
놓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
나의 사정을 가리지 않고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주장만을 강요하고 있었다.
"비록... 제 몸엔 오랜 세월이 흘러들어왔지만... 지금의 저는 영락없는 어린아이입니다..."
숨을 쉬는 것조차 괴롭다.
삶을 위해 크게 들이마시려고 했지만,
"상관 없다."
그마저도 그녀에게 저지당했다.
괴로움에 미쳐 비명소리가 갈라져갔다.
그녀는 확고했다.
"저를... 죽이실 생각이십니까...?"
괴롭다. 이대로 숨이 끊어질 것 같아서 두렵다.
하지만... 숨이 막힐 정도로 거칠게 다뤄지는 이 자리가 도무지 미워지지가 않았다.
괴로움 마저도 모조리 쾌락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 몸이, 이 마음이 말이다.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몸이 먼저, 마음이 뒤따라 행복해지고 있었다.
"상관 없다. 네가 과거의 위인이든 도가의 수장이든 간에, 지금은 그저 적의 침소에 들어와 교태를 부리는 한낱 가벼운 여자일 뿐이다."
묵직한 일격.
크게 밀어올려졌다.
내장이 끊어지는 느낌.
비명이 쾌락이 되어 울려퍼졌다.
몇 번이나 이성을 잃어버렸는지 모르겠다.
"?!!!..."
세지 못했다.
이미 세어야 할 횟수를 넘어버렸다.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치를 넘어서는 행복감이 계속해서 나를 고꾸라지게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간신히 생을 부여잡는 것을 허락받은 기분.
"다... 당신들은... 적이 아닙니다..."
내 정신력이 이토록 가녀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단 여자이기 때문에만은 아니다.
나 자신이 나약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에, 이런 감각에, 그리고 이런 행복에 약했기 때문이다.
"아니, 적이어야만 한다. 그래야만이 너를 굴복시킬 수 있어. 이 힘으로 너를 우리 불계의 하인으로 만들 수가 있어."
욕망을 모조리 쏟아부은 그녀의 물건이 또다시 커져왔다.
이미 안은 포화상태다. 더는 들어갈 곳이 없다.
비워내야만 한다.
아주 잠깐이라도 휴식을 취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쉴새없이 비집어 들어오는 그녀의 우격다짐 앞에서 나는 또다시 사라져만 간다.
찢어질 것만 같은 고통이 도리어 내게 기쁨을 전해준다.
나는 사라지고 행복만이 남는다.
머리에 치밀어 오르는 행복감만이 내 모든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더 이상 너의 위치가 예전과 같다고는 생각하지 마라. 너는 그저 지금처럼 오로지 바닥만을 바라보고 있어라."
들썩거리는 잔상들이 희미해져간다.
사라져 간다...
눈에 보여지는 것은 아까와는 다른 공간.
정신이 끊어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숨이 아직도 가쁘다. 얼마나 의식을 잃어버렸는지 모르겠다.
여전히 내 몸은 한계의 한계라고 비상을 알린다.
이 이상은 위험하다고, 더 이상은 몸이 절대로 버티지 못할 거라고.
그렇지만,
"... 친구잖아요..."
"뭐...?"
하지만 당황하지 않는다.
매번 겪어왔던 일이다.
그들이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그들이 항상 자신들의 욕망만을 보여왔던 것처럼.
오히려 즐겁기만 하다. 그래서 더 좋기도 하다.
그들이 나를 키워주는 거다.
더 높은 한계점으로, 한계점을 넘어서면 새로이 만든 한계점으로.
"당신도 저도, 다른분들도 모두가 기분이 좋아지는 시간이잖아요...?"
그들과 내가 서로 행복해지는 것이다.
행복이 극에 달하면 나자신이 사라진다.
사라진 뒤엔 기쁨을 안고있는 나자신으로 되돌아온다.
결국엔 내가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다시 존재하게 되고, 그들은 모든 욕망을 해소하게 된다.
내게로, 뿌리의 끝까지.
"아직도 변명을 할 체력이 남아있는 모양이군. 두 번 다신 입도 뻥끗하지 못하게 만들어주겠다."
그녀의 지치지 않는 힘에 의해 몸이 들어올려졌다.
그래, 이 순간은 과정일 뿐이니까.
그저 길고 긴 행복의 과정일 뿐이니까.
강함만을 나타내는 그녀의 기세가 다시 박차를 가한다.
"?!!"
매번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낯선 감각.
오늘만 대체 몇 번의 역치를 넘어섰을까.
지금 이 순간에만 과연 몇 번의 한계를 찢고 올라섰을까.
내 몸은 이미 제 기능을 상실해 버린 게 아닐까.
아니, 아직 작동한다.
더위가 느껴지고, 맞닿아진 피부도 느껴지고, 아픔도 느껴지고, 그리고 쾌락도 느껴진다.
낯설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다.
낯설기 때문에 계속해서 원하는 것이다.
그들의 욕망을, 그들의 방황하는 움직임을 말이다.
비록 내 몸이 소모품처럼 깎여나가지만, 장난감처럼 망가지지만...
"당신은... 호랑이 요괴인가요... 호랑이를 대변하는 요괴인가요...?"
"...! ... 네 년, 나를 가르칠 셈이냐? 너는 더 이상 성인 뭐시기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거늘!"
나는 장난감이 아니잖아.
나는 인간이다. 요괴와 함께 하고 싶어 하는 인간이다.
"그럼 당신은... 비사문천을 대변하는 요괴인가요... 비사문천이길 바라는 요괴인가요...?"
"닥쳐라! 네 년이 업신여길 건 네 년의 도가 사상뿐이다! 색에 눈이 팔린 년에게 고상함과 철학이 있을 쏘냐?!"
윽!...
또다시 죽어간다.
더 이상 감상을 늘어놓을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이것도 잠깐의 여흥이다.
그녀가 화를 내는 것도, 내가 아파해야만 하는 것도 전부 하나의 놀이.
머지않아 아침은 올 것이다.
쾌락에 절여지더라도 언제나 장지문을 밝히는 햇살을 느끼며 일어날 것이다.
고통은 한순간이지만, 내 몸에 박혀있을 행복은 영원할 것이다.
그러니 그녀도 머지않아 자신의 행복에 솔직해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나를 이해해주겠지. 내가 행복한 이유를.
내가 그녀를 이해하는 것처럼 내 마음도 알아주겠지.
내가 이렇게 행복을 갈망하는 것처럼, 그녀도... 마찬가지로...
"하지만... 대답을 내리지 못하는 당신은 역시... 저처럼 행복해지는 걸 좋아하시는 거로밖에 보이질 않는걸요..."
그녀의 허리가 멈춘다.
이제와서 아니라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자신의 의무이기 때문에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기엔 우리는 이미 너무나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왔다.
그녀의 욕망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아직도 부풀어오른 그녀의 욕심이 이 순간을 증명하고 있다.
"... 우리들의 지고한 이상이, 네 년의 저급하고 문란한 생각과 똑같다고?..."
그리고 다시 격렬해진다.
"으윽?!!!"
하지만 그녀는 끝내 거짓말쟁이가 되기로 결정했다.
"네 년이 이곳에 오지 않았느냐, 네 년이 나를 부르지 않았느냐, 네 년이 꼬리를 치지 않았느냐! 그런 네 년이 나를 능멸해?! 업신여겨?!"
아...
더 이상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머리가 멍해져간다.
사고가 정지된다.
쏟아져내린다.
더 이상 그녀의 고함이 들리지 않는다.
나 자신마저도 들리지 않게 된다.
들려오는 건 오로지 저 멀리 닿아져 있는 나의 목소리뿐...
내가 바라보고 있는, 암전이 된 세상 너머로 내가 있는 곳은 어디일까...
"그럼에도 왜, 대체 왜 네 년은... 스님과 똑같은 말을 하는 게냐!!..."
듣지 못했다.
정신이 들었을 때엔 이미, 그녀는 이곳에 없었다.
이 사랑채에, 이 몸에 그녀의 흔적들만이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2
"... 실패했다. 면목이 없군..."
비사문천의 대리가 지친 몸을 이끌고 자리에 앉았다.
해는 벌써 환하게 이곳저곳을 밝히고 있었다.
매미가 덥게 데워진 하늘을 향해 시끄럽게 울어온다.
"...! 저 망할 매미들을!"
"워워, 애꿎은 매미에게 화 풀지 말라고. 네가 나무꾼이 아니기 때문에 나무를 못 넘어뜨린 거지."
감시자가 그녀를 바라보며 비웃는다.
"당신은 누구 편인겐가!"
"내 편이지. 네가 나의 편인 거고."
비사문천의 대리를 감시하는 작은 요괴는 서로의 위치를 다시 확인한다.
"... 그러는 당신도 성과가 없지 않는가. 이미 우리의 편으로 들어선 것 같은 그녀에게서 대체 무엇을 더 확인받아야 하는 것인가?"
호랑이 요괴가 물었다.
"그녀가 우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 그녀의 사상이 우리의 사상과 맞들어져야 하는 것이 중요하지."
쥐 요괴는 두 손을 마주잡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그래서 당신은 고고히, 한 번도 몸을 섞지 않았다 이건가?"
의심의 눈초리로 가득한 호랑이 요괴에게,
"물론. 비록 이 세치 혀로 그녀의 마음을 굴리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말이야."
쥐 요괴는 은근슬쩍 어깨를 으쓱한다.
"당신의 그곳이 볼품없이 작기 때문은 아니고?"
질 세 없이 비사문천의 대리가 밀어붙인다.
"이건 욕망의 발현이야. 각자의 욕망이 크면 클수록, 작으면 작을수록 거기에 걸맞는 크기로 형상화되는 거지. 결코 부끄러운 게 아냐."
하지만 감시하는 자는 물러서지 않는다.
"그만큼 너의 욕망이 무지막지하게 화려한 걸 테고."
쥐 요괴가 호랑이 요괴의 아랫도리를 힐끗 보며 웃는다.
"...! 그, 그런 게 아니다! 지금까지의 금욕생활이 지루하고 뻐근해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는 게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오히려 말려든 건 호랑이를 자처하는 요괴였다.
"네, 변명 잘 들었고요. 하지만 큰일이긴 큰일이네. 뱌쿠렌의 설법도 먹히지 않았고, 내 혀와 네 힘으로도 그녀를 꺾지 못했으니, 이제부턴 어떻게 해야 할지 당장은 떠오르지가 않는걸."
쥐 요괴는 고심하며 탁자를 두드렸다.
"... 응엌?! 저 안 잤어요!"
누군가가 잠꼬대를 했다.
"아냐, 넌 자고 있었어. 너란 녀석은 대체 할 마음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번에도 그녀의 품 안에서 실컷 아양이나 떨고 왔을 테지?"
비사문천의 대리에게 시시덕 거린 거와는 달리, 감시자는 물귀신에게 불만을 토로한다.
"아, 아니거든? 아양은 그녀가 했고, 아니아니, 나도 노력한 거거든? 그 노력이라는게... 맞다, 내가 뭐 때문에 미코에게 갔던 거였더라? 그냥 우리 모두 즐기려고 갔던 거 아니었어?"
역시 저 요괴는 생각이 없다.
"야!"
결국 작은 요괴가 폭발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나즈린, 참게나. 미나미츠는 색에 휘둘린 거지, 그녀에게 휘둘려버린 것이 아니잖는가."
큰 요괴가 방방 뛰는 쥐 요괴를 말린다.
"그거나 그거나! 그 어떤 주장으로도 그 성인은 행복이란 이상으로 귀결시키고 있잖아, 오히려 말려버리고 원래의 목적을 잃어버린 패배자는 저 망할 녀석이라고!"
"...zZZ..."
물귀신 요괴가 대놓고 자기 시작했다.
"그녀는 단지 뱌쿠렌님의 명령에 곧이곧대로 따랐을 뿐이다. 시간도 그리 촉박하지 않겠다,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가진 다음에 다시 시작해봐도 문제없지 않은가?"
더 화가 난 감시자를 비사문천의 대리가 설득한다.
"아니, 시간이 별로 없어."
쥐 요괴는 열을 식히며 자리에 앉았다.
"이제 곧 그녀의 행방에 대해 무녀도 의문을 품게 될 거야. 그녀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존재란 걸 그 귀찮은 녀석이 알아차리기 전에 그녀를 반드시 우리의 편으로 만들어야 해."
"... 미안하네..."
호랑이 요괴도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이치린은?"
쥐 요괴가 물었다.
"오늘은 기필코 그녀와 담판을 짓겠다며 사랑채로 나섰네."
호랑이 요괴가 답했다.
"소용없는 짓이라니까 그러네. 뱌쿠렌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풋내기가 어떻게 설득을 하겠다는 거야, 단순한 협박이겠지."
초조한 요괴는 고개를 숙여 탁자에 엎어졌다.
"이미 사라졌단 말이야, 네가 지금껏 생각하고 있었던 명련사는 이제 없다고."
한숨을 길게 내쉰다. 하지만 채워지는 건 들이마시는 공기뿐, 계속해서 쥐 요괴의 속은 허전했다.
"... 괜찮길 바랄 뿐이네."
비사문천의 대리는 말을 줄였다.
"그 녀석도 저 바보 멍청이처럼 휘둘리지나 말았음 좋겠네..."
감시자는 얼굴을 탁자에 파묻으며 피로함을 드러냈다.
"..."
두 요괴의 대화가 멈추자, 정적에 파묻혀 있었던 서글픈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이게 무슨 소리야?"
쥐 요괴가 물었다.
"아니 쿄코, 왜 울고 있는가?"
호랑이 요괴는 그제서야 야마비코 요괴도 같이 방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 요괴는 고개를 돌려 울고 있는 요괴를 바라봤다.
"그게... 호기심에 들어가 봤다가... 그 성인이란 분에게 붙잡혀서... 무섭고... 부끄러운 일을 당했어요..."
야마비코 요괴는 쭈뼛쭈뼛대며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필히 이런 일이 생길 것 같아서 주의를 줬거늘, 색에 대한 욕망이 없는 자들에겐 꽤나 충격적인 경험이었을 테지."
"우으으..."
호랑이 요괴가 꼬맹이 요괴를 다독였다.
"스님은 부재중이시고, 시간은 촉박하고... 큰일이군. 뾰족한 수를 생각하지 못하는 내가 참으로 원망스럽네."
그리고 인상을 찌푸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기었다.
"뭘 원망해, 부끄러운 일이지."
잠길 뻔했다.
"누에,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는가! 자네도 우리의 일에 협조해주지 않는다면 명련사는 이대로 끝일세!"
토라마루 쇼가 으르렁댔다.
"우리라니, 뱌쿠렌 그년 혼자만의 욕심이지. 도가의 사선 년의 꾐에 빠져 욕망을 얼씨구 좋구나 하고 덥썩 받아들이니까, 무녀도 현자도 전혀 두렵지 않나 보구만."
요괴가 말했다.
"스님의 뜻은 우리들의 뜻이기도 하네. 비록 그분이 잘못된 길로 빠져들었다 해도 스님의 선택을 따르는 것이 우리들의 정도란 말이다."
토라마루 쇼가 요괴를 향해 말했다.
"그렇게도 뱌쿠렌이 좋다면 그 비사문천이란 이름은 벗어 던지지 그래? 비사문천 말고 뱌쿠렌을 신으로 받들어 모시면 되잖아?"
요괴는 그들을 비웃으며 말했다.
"누에, 내 이렇게 부탁하네..."
토라마루 쇼는 요괴에게 부탁했지만,
"... 도와주려고 왔으면 좀 편하게 도와주라고. 그 까칠하지도 않은 투정을 언제까지 받아줘야 하는 건데?"
나즈린은 요괴의 퉁명스러움을 꼬집었다.
"... 김 샜어. 나 갈래."
요괴가 열어젖힌 문을 도로 닫으려고 했다.
"아 쫌!"
나즈린, 결국 역정.
"네, 알겠습니다. 시장에서 뱌쿠렌이 내가 부탁한 것들도 사다줬겠다, 다들 허리 그만 놀리고 평소대로 곡차에 경이나 외우라고. 갸테갸테."
문을 다시 연 요괴는 나즈막히 웃었다.
"너도 그녀와 재미 좀 보겠다고?"
나즈린이 비아냥거렸다.
"그래. 같이 목욕좀 하려고."
요괴는 뱀의 혀를 내밀며 말했다.
"너희들의 방법이 잘못된 거야. 그녀를 이곳으로만 붙잡아 두려고 하지 말고, 그녀의 마음이 가는 대로 놔주란 말이야, 자유롭게. 철장에 가둬두려고만 하니까 새가 지저귀지를 못하지."
"하지만 그녀를 놓으면 우리의 편으로 포섭시킬 수 없게 되지 않는가."
토라마루 쇼가 의문을 표했다.
"? 왜 포섭시키려고 해? 저절로 뱌쿠렌, 아니 모두에게 들어올 텐데."
오히려 요괴가 의문을 표했다.
"누에,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나. 우리는 지금 그녀의 생각이 우리의 뜻하고 맞아 떨어져야 한다는 걸 말하고 있지 않는가."
토라마루의 되물음을,
"그러니까, 왜 주체가 너희들인데. 그녀가 주체지."
요괴가 받아쳤다.
"그녀는 이미 우리를 받아들였잖아."
나즈린이 문제를 제기했다.
"받아들였다니, 아직도 마음을 다잡지 못한 상태지. 너희들이 그렇게나 성심성의껏 그녀를 만족시켜주고 있는데 왜 그녀가 달라지려고 하겠어, 그냥 가만히 누워서 너희들의 영양분을 쏙 빼먹기만 하지."
요괴는 나즈린을 비웃었다.
"아차차, 넌 그녀에게 줄 영양분도 없겠다."
"너 진짜,"
"흐흐, 약오르지?"
나즈린이 날린 탄막을 요괴는 잽싸게 피했다.
"아무튼, 잠자코 가만히나 있으라고. 내가 큰맘 먹고 도와주는 일에 초 치지나 말고."
"큰소리 쳤으니까 너가 다 해! 난 몰라!"
그리고 문을 닫고 사랑채를 향해 걸어갔다.
3
어두운 촛불의 빛으로 가득한 몽전대사묘.
그녀의 충신은 볕들지 않는 밤낮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속해서 서성이고 있었다.
또다른 충신이 잠에서 깨어난다.
"... 망령이어도 잠을 자두는게 어때? 그렇게 계속 몸을 혹사시키면 아무리 영이라고 해도 지쳐서 쓰러지게 될 거야."
"... 너는 걱정이 없어서 좋겠어. 태자님께서 아직도 돌아오시지 않았어.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 그분께 혹시라도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게 아닐까 생각하면 너처럼 태평하게 눈을 붙일 수도 없다고."
영으로 환생한 자가 말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래잖아."
"태자님께선 여자로 환생하셨다고! 비록 우리가 살았던 그 시절처럼 남녀의 존위가 차이가 나진 않지만서도, 그분께서 자기 몸 하나 성히 지키실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단 말이야!"
"... 여긴 환상향이잖아."
"그 환상이란 녀석이 안전해? 장담할 수 있어? 바깥엔 영생을 바라는 인요들로 득시글 거리고, 욕망에 이끌리는 대로 행하는 불한당들도 많다고! 불안하지도 않아? 이 무법하고 무질서한 환상향이란 곳을?"
망령의 거센 부르짖음에,
"... 토지코."
시해선이 된 자가 말했다.
"그때 나보다 먼저 일어났었잖아."
"그... 그건 왜?"
"왜 태자님께 가지 않았어?"
"뭐, 뭐라고?"
망령이 당황했다.
"왜 태자님의 욕망을, 태자님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냐고."
시해선이 물었다.
"..."
부끄러웠다.
"무서웠어."
시해선이 되지 못한 자가 조용히 말했다.
"그분이, 태자님이 무서웠어. 여자가 되신 그분이, 사선의 유혹에 잠식되어가는 그분이, 남성을 애타게 바라고 계신 그분이... 너무 무서웠어..."
"너는 언제나 도망가는구나."
그녀의 충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죽어서 시해선이 된 걸 보고서도, 왜 너는 시해선이 되기를 망설였니?"
"그건 그분의 뜻하고는 맞지 않아..."
"태자님께서 바라셨잖아."
"그건 그분의 뜻이 아니야..."
"토요사토미미노 미코님께서 말씀하셨잖아!"
모노노베노 후토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왜... 어째서..."
망령에게서 눈물이 맺혔다.
"너는, 태자님과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너란 아이는 왜, 왜!... 그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던 거니..."
시해선은 도망자에게 다가갔다.
"그래서 이게 네가 바라던 그분의 뜻이었니?..."
그리고 영이 되어버린 형체를 쥐어잡았다.
"... 저는... 소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모두를 위한 큰 뜻이 아니었습니다... 태자님, 그분 하나만을 위한 욕심이었다고요..."
소가노 토지코가 울음을 참아가며 말했다.
"너란 아이는 지금도, 그릇이 작구나."
작은 아이가 영이 된 자를 보듬어 안았다.
"왜 큰 뜻이 아니면 안 되는 거니. 그릇이 큰 자는 무조건 성인이 되어야만 해? 그녀는 그러한 선택을 하셨지만서도 여전히 우리의 성인이시란다."
"후토님... 저는... 미코님이 걱정돼요..."
아이는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괜찮을 거야. 그녀는 마침내 자유를 얻으셨으니까, 마침내 위인이란 족쇄로부터 해방되셨으니까. 지금껏 내가 봤던 그분 중에서 가장 해맑게 웃으셨던 그분이시니까."
"..."
후토는 토지코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등을 토닥여줬다.
여기서 이렇게 끝난다면 무척이나 괜찮아 보이겠지만,
"... 후토님."
"왜?"
"다리에 뭔가가 계속 닿아요."
"?! 아, 이... 이거, 단순한 생리현상일 뿐이야."
시해선은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굳건히 올라온 자신의 이중성을 손으로 감췄다.
"... 변태."
"아침이라서 일어선 것뿐이야."
이번엔 시해선이 당황한다.
"그때도 아침이라서 일어선 거였고요?"
"그, 그건... 함구할게..."
어린 아이가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린다.
"역시 저급해, 최악이야, 색골!"
"토지코, 진정해, 그래도 같은 여자잖아."
"여자는 그런 흉측한 물건이 안 달려있다고요!"
이번엔 망령이 화를 낸다.
"아무리 후토님께서 그분을 좋게 평가하려고 하셔도, 저흰 그분의 정치를 위해서 보필해 드리려고 환생했지 저급한 욕망에 이끌려 가는 걸 보려고 환생한 게 아니잖아요!"
"그러기엔, 이곳은 지나칠 정도로 평화롭잖아. 정치는 평화를 추구하기 위함이지 계급을 억지로 갈라세우려고 행하는 게 아니야."
시해선이 쭈뼛쭈뼛 고개를 든다.
"인간이 요괴에게 당하고 있는 이곳의 상황을 지금 평화롭다고 하시는 건가요?"
"토지코, 아까 뭐라고 했었지? 태자님께서 위험에 처하게 하는 대상을 비단 요괴 하나로만 잡지 않았지?"
"그, 그거와 이건 다르잖아요! 여자와 남자, 인간과 요괴는 다르게 봐야죠!"
"토지코."
모노노베토 후토는 헛기침을 한 후에 말을 계속 이어갔다.
"네가 생각하는 질서를 이곳에 적용시키려면, 너는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을 바꿔야 할 거야. 하지만 이곳은 그러기엔 체계가 너무나 잘 잡혀있어. 당장에 인간이 요괴에게 잡아먹혔다는 소식을 우린 듣지 못했잖니?"
"몰래 할 수도 있죠."
"요괴가 인간보다 높다면서. 왜 인간의 눈치를 봐야 하는데?"
"소식을 왜곡해서 보도할 수도 있잖아요."
"얼마나 많은 요괴들이 그렇게 번거로운 수를 써가면서 인간을 잡아먹을까?"
"그, 그래도 조금은 있겠죠."
"명련사에 찾아오는 요괴들도 조금이라고 할 수 있잖아."
"후토님! 지금 불가의 사상을 옹호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종교에 귀의한 신도는 항상 이런 발언에 민감하다.
"내 말은, 그 조금이란 단어로 이 환상향에 정치란 악행을 들여와야 하는지가 궁금하다는 거야. 정치는 이곳의 모든 인요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인데 그때처럼 굳이 대다수의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게끔 해야만 하니?"
하지만 종교에 몸을 담는 자들은 줄곧 평화를 바라왔다.
"그, 그건..."
"나는 더 이상 수많은 적들에게서부터 마음을 졸이고 계시는 미코님의 모습을 결코 보고 싶지가 않아."
비록 수단이 행복을 추구하려는 욕망에서부터 비롯되었지만 말이다.
"... 말은 그렇게 하셔도 오늘도 그저 놀러가실 궁리밖에 안 하시잖아요..."
토지코가 뾰루퉁하게 쳐다본다.
"히히, 기껏 새로운 몸에 새로운 시간과 장소로까지 왔는데 충분히 즐겨야 하잖아."
어린 아이는 해맑게 웃으면서 말했다.
"너무 태평하셔요. 저는 미코님을 이렇게나 걱정하고 있는데,"
"미코님께서도 우리에게 제2의 삶을 살게 해주기 위해서 환생을 종용하셨던 게 아닐까? 토지코, 너도 이곳에서만 있지 말고 바깥에 나와 다른 인요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어."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후토는 이내 바깥을 향해 걸어갔다.
"... 그래도 소녀는 과거의 미코님을 지키고 싶어요..."
멀어져 가는 시해선을 바라보며 망령이 조용히 말했다.
4
수증기를 머금은 천장에서부터 물이 떨어진다.
더없이 조용한, 그녀의 호의 이외에 들리는 건 벽을 두고 메아리치는 물방울 소리뿐.
몸은 그녀가 전해주는 보드라운 감촉을 즐기고 있지만, 신경은 오히려 더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이것은 나의 시간이 아니다.
내 시간은 본래 이렇게 쓰이지 않았다.
그녀들의 사랑으로 보듬어지고 있어야 할 시간을, 지금은 그저 거품에 흘려보내고 있다.
나는 왜 가만히 있는 거지?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거지?
"... 저를 그저 놀리시려는 것뿐인가요?"
그녀는 왜 나를 이곳으로 부른 거지?
"맞아. 나는 지금 당신을 가지고 놀고 있지."
호쥬 누에. 그녀는 비누칠을 한 타올로 내 몸을 닦아주고 있었다.
"어째서인가요?"
불안하다.
"어째서라니?"
몸이 오랜만의 편안함에 낯설어하고 있다.
행복의 길에서 엇나가고 말았다.
이곳은 나와는 거리가 멀다. 여기가 아니다.
갑자기 여유로 가득해진 마음에 불안감만 채워져간다.
"당신은 저를 어떻게 보고 계시나요?"
어째서 불안한 거지?
왜 나는 불안해하고 있는 거지?
"어떻게 보냐니, 나는 지금 당신이란 사람의 몸을 씻겨주고 있는 거잖아."
아무래도 그녀는 내게 흥미가 없는 것 같다.
... 기분이 나빠졌다.
"... 제가 싫으면 싫다고 하세요."
재미가 없다.
이곳에서 나가고 싶다.
그녀의 손길을 거부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안 싫어해. 오히려 당신을 좋아해."
"네...?"
그녀를 바라봤다.
... 모르겠다.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
그녀에게서부터 진심을 느낄 수 없었다.
"당신의 그 마음이 흥미로워.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게 한 마음가짐이기도 하거든."
그녀는 그저 내 몸을 닦아주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엔 감정이 나타나질 않았다.
"그것이, 제 몸에 손을 대지 않으시는 것과 관계가 있는 건가요?"
물었다.
"이렇게 손을 대고 있잖아?"
틀렸다.
"저는 당신의 진심을 읽을 수 있을만한 위인이 아니에요."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다.
"내 목소리가 이렇게 들리고 있잖아?"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하고 있지 않다.
"... 저는 이걸 바라는 게 아니에요."
... 그녀를 이길 수 없다.
처음이었다. 바라던 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은.
결국 내 쪽에서 먼저 진심을 보여야만 했다.
비누칠을 하는 손이 멈췄다.
"... 하하, 욕구불만이구나."
그녀는 그들과 같다.
"... 부끄러워요."
그들과 생각하는 방식이 같다.
"참는 건 몸에 좋지 않지, 만 나는 네가 원하는 상황을 절대로 만들지 않을 거야."
하지만 요지부동.
그녀는 그들과 다른 표현을 하고 있다.
모르겠다. 왜 그녀가 굳이 이렇게 나를 대하고 있는지를.
그들처럼 나를 안으면 해결되는 일이다.
그들처럼 내게 몸을 맡기면 되는 일이란 말이다.
하지만 묵묵부답.
그녀는 다시 내 몸에 비누를 묻혀갔다.
"제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으신 건가요?"
이번엔 그녀를 떠봤다.
"당신은 왜 계속해서 내 마음을 확인하려고 하는 거야? 행복하지 않은 거야?"
오히려 그녀가 나를 추궁했다.
"질문은 제가 먼저 했어요."
지고 싶지 않다. 계속해서 밀어붙인다.
"답은 이미 내려져 있잖아."
... 아니, 내려져 있지 않다.
그녀는 지나칠 정도로 나와 거리감을 두려고 했다.
앞뒤가 맞지 않다.
나를 좋아한다고 하지만 나를 싫어하고 있다.
나를 가까이하려고 하지만 내게서 멀어지려고 한다.
정체불명의 답만을 계속해서 내리고 있다.
"잘 모르겠어요. 마음은 편안한데, 이상하게 불안한 느낌이에요.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아요. 당신을 알 수 없어요."
나도 모르겠다. 나를 피하려고 하는 저 요괴에게, 왜 저 사람에게 모든 걸 말하고 싶다는 기분이 드는 건지.
마음이 이상해져 간다.
그동안 배워왔던 나의 마음가짐은?
그동안 행해왔던 나의 선택들은?
여기선 전부 쓸모가 없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작아진다.
내가 한없이 작아진다.
"들리지 않는 거야?"
들리지 않다.
"당신의 목소리는 잘 들려요."
아무것도 들리지가 않다.
"나는 당신이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는걸?"
나는 지금 공허한 마음을 듣고 있다.
"... 당신의 욕망이 들리지가 않아요."
모르겠다, 그녀의 정체를. 왜 그녀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면 노이즈만 들려오는지.
그녀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다.
"내 욕망?... 아하, 그게 당신을 이루고 있는 힘이었구나."
오히려 답을 알아낸 사람은 그녀이다.
그녀는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고 싶지 않다. 지면 안 된다. 불안하다. 내가 이곳에서 사라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사라지고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알아야 한다. 알아야만 한다.
"그럼 당신은,"
"안 알려줘."
... 들켰다.
"두렵지? 보이지 않는 것이, 들리지 않는 것이 말이야? 눈앞에 빤히 보이는 욕망에, 빤히 들려오는 욕망에 그동안 안심하고 그 욕망들에 이끌려 흘러왔었지?"
... 정답이다.
"... 가슴이 죄어들어와요... 부디 멈춰주세요..."
그녀는 나를 파악해간다.
안 돼, 더 이상 내가 보여지면 안 돼.
마음이 벗겨져 내린다.
내 마음이 꺼내어진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멈추지 않을 거야."
그녀는 내 몸을 돌렸다.
눈이 마주쳐 버렸다.
그녀의 눈을 피했다.
"돌리지 마."
그녀는 내 얼굴을 돌렸다.
"부끄러워요..."
알몸을 보였을 때보다 더 부끄럽다.
내 모든 것을 전부 보여져 버렸다.
지금까지 나를 가졌다고 으스댄 그들조차도 알아내지 못한 나의 모습이 전부 드러나 버렸다.
나의 원천을,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나의 근본을.
"내가 건네주는 여흥은 당신에겐 별로 행복하지 않은 거야?"
행복하지 않다.
정체불명에 몸을 맡기고 싶지 않다.
"당신을 알 수 없으면 저를, 제 마음을 맡길 수 없어요..."
몸을 움츠린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억지로 내 몸을 드러내 버린다.
"같은 여자잖아."
그녀는 여자가 아니다.
"익숙하지가 않아요..."
그녀를 정의할 수 없다.
"몸을 섞고 있을 때는 익숙하고?"
그녀 자신이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녀를 정의내릴 수 없다.
자신을 숨기고 있는 그녀는 단지 그녀로 보이는 요괴일 뿐이다.
"그때엔 저를 바라보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무섭다. 그녀가 무섭다.
허상을 마주하는 기분이다.
이곳이 현실임을 부정하게 만든다.
"네 자신을 마주하지도 못하면서 그동안 색만을 바라왔던 거였어?"
하지만 실체를 나타낸 허상은 나에게 끊임없이 물어온다.
"... 저를 잊어버릴 수 있으니까요..."
잊고 싶다. 나를 잊어버리고 싶다.
그녀를 만났다는 사실조차도 전부 잊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끌려질 뿐이었다.
몸도, 마음도 전부.
억지로 끌려다닐 뿐이었다.
그녀는 내 몸을 씻겨주고 있었지만, 내가 바라는 전희로까지는 잇지 않았다.
나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그 순간은, 그녀의 곁에서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너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무언가가 묻는다.
"아뇨, 여자로 새로 태어나서 기뻐요."
보이지 않는 대상에게 답한다.
"그런데?"
묻는다.
"...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에요. 아직도 꿈이라고 느껴져요. 오랜 시간 동안 꿈을 꾸고 일어났는데 또다시 꿈인 느낌, 제가 그동안 바라왔던 저의 모습을 체험할 수 있는 그런 꿈인 느낌. 그래서 망설여져요. 제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갈망하고 있는 건지를요."
나도 나에게 묻는다.
왜 채워나가는 건 내 몫이어야 하는 거지?
왜 저 요괴는 스스로 채워지려고 하지 않는 거지?
그건 원래 당신들이 해야 할 일이었잖아.
도리어 나를 채워주고 있었잖아.
"하지만 이곳은 현실이야."
그녀가 말했다.
"저에겐 꿈이에요."
소녀가 답했다.
"아니, 너는 이미 충분히 긴 꿈을 꾸었어."
그녀는 흐르는 물에 내 몸을 갖다 대었다.
"언제까지고 꿈으로 도망칠 수는 없을 거야. 나처럼."
거품이 따뜻한 감각에 밀려 씻겨내려간다.
"저는 도망치지 않았어요. 저는 지금 이곳에 있는 걸요."
그녀의 눈을 쳐다봤다.
초점이 없는 그녀의 눈동자는 내가 아닌 무언가를 향해있었다.
"지금도 도망치고 있어. 바로 네 자신으로부터 말이야."
비눗기가 사라지자 그녀는 물을 붓는 것을 멈췄다.
"물론 도망치는 것도 좋긴 하지만, 기왕이면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쪽으로 도망치라고. 망설임이 남지 않게, 일말의 후회가 남아있지 않게 말이야. 아주 약간의 흔들림이 앞으로의 너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 지를 이젠 깨달았으면 좋겠어."
"..."
... 그래서 내가 이 몸으로... 변했던 거려나...
"... 내 목적은 이미 다 이루어졌으니까 나는 이만 돌아갈게."
그녀는 나를 가만히 바라본 뒤에 일어서서 발길을 돌렸다.
거짓말...?
"자, 잠시만요. 욕탕엔 안 들어가실 건가요?"
그녀는 정말로 생각이 없었던 건가?
"난 이미 목욕했어."
그녀가 바깥으로 걸어간다.
"같이 안 들어가실 건가요?"
정말로 할 생각이 없었던 건가?
정말로?
"... 난 색이 싫어."
호쥬 누에는 그 한 마디만 남기고 목욕탕을 빠져나왔다.
... 최저야...
홀로 남겨진 소녀의 입에서 욕망이 배어나왔다.
5
"?! 이게 무슨 소리야?"
굉음과 함께 지진이 일어났다.
신사가 위아래로 흔들거렸다.
"스이카, 너어!"
마루에 앉아있었던 무녀는 찻잔을 놓고 부리나케 신사 안으로 들어갔다.
"나 아냐 나 아냐 나 아냐, 나 아니라고!"
조그마한 오니가 필사적으로 부인했다.
"내가 신사 안에서는 거대화하지 말라고 했지!"
"정말 아니라니까! 나도 되게 큰 소리에 놀라서 깼단 말이야!"
"자꾸 거짓말 할ㄹ,"
신사 안에서의 소란은 또다시 들려오는 굉음에 의해 잦아들었다.
"... 미안."
무녀가 오니에게 사과했다.
"오니는 거짓말 안 한다고 했지!"
억울한 요괴가 맹렬하게 결백을 호소했다.
"너는 하잖아, 이 오니 도망자야."
"도망친 게 아니야, 자유를 위해 떠난 거라고."
뾰루퉁해진 오니를 무녀가 살살 달랬다.
"네 자유의 화신님. 그렇다면,"
굉음이 지하에서 울려퍼졌다.
"이 현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사가 울렁울렁 흔들렸다.
"으음, 그러니까... 확실한 건 자연현상은 아니야."
오니는 골똘히 생각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
무녀가 단박에 잘랐다.
"혹시, 그러고 보니 그 천자 자식이 또...!"
그녀에겐 더 잘라야 할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아냐아냐, 그렇다면 일단 바위나 칼 같은 게 먼저 떨어져서 큰 소리가 났었겠지."
오니는 무녀의 다혈기질을 막아섰다,
"... 잠깐, 너 사실 깨어있었지?"
... 만 아무래도 다른 빌미를 제공해버린 것 같다.
"그,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잖아..."
뜨끔한 요괴가 상황을 얼버무리려고 했으나,
"그러니까 이상한 곳에 감을 쓰지 않게 오니님께서 도와주시란 말이야."
콩.
"에코,"
이상한 데에서 촉이 세워진 무녀였다.
무녀가 딱밤을 때렸다.
"우으, 한 가지 짐작이 가는 곳이 있어."
눈시울이 붉어진 오니가 혹을 매만지며 말했다.
"어딘데?"
굉음이 또다시 울려퍼졌다.
"여기 아래 말이야."
오니는 흔들리고 있는 땅을 가리켰다.
"신사 밑은 흙밖에 더 없다고."
"그보다 더 밑에 누군가가 살고 있지 않을까?"
오니는 일렁이는 땅 아래를 가리켰다.
"예를 들자면, 전에 돌길을 뚜껑 열듯이 열고 올라온 사람 말이야."
뭔가가 팟하고 스쳐지나간다.
"...! 맞다, 예전에 사선 녀석이 신사 밑에서 튀어나왔었지."
기억을 떠올린 무녀가 수긍했다.
"그때 어떤 여자아이를 데리고 명련사로 가는 길이 어디냐고 물었었지 참."
그녀는 기분 나쁜 사선과 정반대의 인상을 가지고 있는 여자아이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 사람들이 올라왔던 곳에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오니의 질문에 무녀는 신사 문을 열면서 답했다.
"확실히. 지하에 그 두 명만 있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무녀는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역시 이변이겠지?"
또다시 울려퍼지는 굉음을 흘려보내고 있는 오니가 물었다.
"가 봐야 알지. 안 따라올 거야?"
그녀는 불제봉을 손에 쥐고 격하게 흔들거리는 신사를 나섰다.
"사실 나, 아까까지 책을 좀 보느라 졸려가지고... 먼저 잘게..."
오니는 머리만 빼꼼 내밀었다.
"그럼 그렇지. 신사나 잘 지켜."
"네에."
하쿠레이의 무녀는 돌바닥을 열고 지하로 가는 입구를 탐색했다.
지하에서부터 굉음이 찢어지며 울려퍼졌다.
"지진이 아니고 천둥이었구만. 이변을 일으킨 녀석이 바로 너지?"
하늘을 향해 번개를 날리고 있는 망령을 향해 무녀가 말했다.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리자, 망령은 번개를 날리는 손을 멈췄다.
"무, 무녀다. 정말로 무녀가 왔어."
망령은 기력이 다했는지 몸을 후들거렸다.
"이변이 생겼으니까 당연히 무녀가 와야지. 그래, 너는 뭔 생각으로 이런 소동을 벌인 건데?"
무녀는 쥐고 있지 않는 왼손으로 불제봉의 끝을 잡았다.
"그 사람이 말했었어... 여기 환상향에서 큰 소동이 벌어지면 무녀가 와서 사건을 해결해준다고..."
망령은 아무래도 넋이 좀 나간 것 같다.
"근데 이번엔 해결해야 할 대상이 바로 너거든? 변명할 기회를 줬는데도 계속 횡설수설한다면 그냥 얌전하게 만들어 줄게."
무녀는 망령에게 다가가 불제봉을 크게 휘둘렀다.
망령이 무녀의 공격을 피했다.
"...?"
아니, 망령은 엎드려서 무녀의 다리를 붙잡았다.
"어이, 지금 뭐하자는 거야?"
무녀가 물었다.
"무녀님, 무녀님 맞으시죠? 제발 부탁드려요. 부디 저희 태자님을 찾아주세요. 태자님께서 며칠째 행방불명이세요. 혹시 그분께 무슨 일이 생겼을지..."
망령은 갑자기 필사적으로 무녀에게 애원했다.
"뭐야 너, 이변을 벌인 이유가 겨우 나를 부르려고 한 거였어?"
무녀는 불제봉을 내렸다.
"죄송해요,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망령은 무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직접 찾아오면 되잖아. 누가 내 신사까지 길을 만들어 놓기도 했으니까."
무녀는 망령의 손을 잡아올렸다.
"그게... 이 몸으로는 밖으로 나갈 수 없을 것 같아서요..."
망령은 자신의 하반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유령의 다리네. 그게 왜?"
무녀는 대수롭지 않듯이 말했다.
"제가 요괴로 보여질까봐 두려워요... 저는 사람인데, 사람이었는데 지금의 저를 보면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망령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너는 중요하고, 태자님이란 사람은 안 중요하다?"
무녀가 내리는 결론에,
"그, 그건 아녜요. 태자님이 더 중요해요."
망령은 부인했다.
"그런데 왜 밖으로 나오지 않았는데?"
"... 무서워요. 바깥이, 제가 알지 못하는 세상이... 너무 무서워요... 제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 그렇기 때문에 더 걱정돼요. 태자님도 분명히 큰 위험에 빠지셨을 거예요. 그 사선의 유혹에 빠져서,"
"먼저,"
망령의 기우에 무녀가 막아섰다.
"환상향은 쥬라기 시대가 아니거든? 네 말을 듣고나면 환상향이란 곳은 약육강식의 세계에 온갖 권모술수가 넘쳐날 것처럼 보여. 그러지 않거든? 도대체 어디서 들었길래 그런 망상을 품고 있는 건데?"
"모, 모르겠어요..."
"봐봐, 너 혼자만의 착각이잖아. 밖으로 나가는 건 무섭고 지하 동네방네에 천둥을 냅다 꽂는 건 안 무섭고? 바깥이 무서우면 그 천둥으로 니 몸을 지키면 되잖아."
"무서우면 몸까지 굳어져 버려서..."
"... 변명은 거기까지만 들어줄게."
무녀는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잠깐, 뭐라고? 사선의 유혹에 빠져?"
갑자기 위화감이 든 무녀는 망령에게 질문을 구했다.
"네..."
"너가 말하는 태자님 말야, 남자 맞지? 보통 태자란 호칭은 남자에게 붙는 거 아냐?"
"맞아요..."
"예전에 신사에 찾아온 그 사선 말야, 여자아이랑 같이 왔었거든? 너가 말한 태자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저기... 그 여자아이가 바로 저희 태자님이세요..."
"...??? 뭐야 그거, 애칭?"
무녀의 사고회로에 제동이 걸렸다.
"태자님께서 여자아이가 되어버리셨어요..."
"???"
무녀는 당최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있는 망령을 두고 생각하기를 멈췄다.
6
"사선님께서 여기엔 어인 일이신가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스님께선 제가 여기로 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나 봅니다."
두 사람이 안방에 있다.
조용히 우는 매미소리가 명련사의 주변을 휘감았다.
"더위가 많이 가셨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수박보다는 따뜻한 차를 내올 걸 그랬어요."
"그러네요. 세상이 더없이 조용해지는 기분입니다,"
탁자엔 차갑게 식혀진 수박이 올라와 있다.
"만, 이곳만은 예외로 여전히 시끌벅적하군요."
사선은 바깥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선님의 귀중한 선물 덕분에 저희들에게도 웃음꽃이 피었답니다."
"... 요괴의 절이라 그런지 사람은 생명으로 취급하지 아니하시군요."
스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장 소인만 하더라도 나약한 인간인걸요."
"지금도 그 웃음꽃이 여기에까지 들리고 있는 걸 보면 그 고귀하신 당신의 요괴 식솔들은 마치 원숭이와 같은 욕망을 가지고 있군요."
사선은 부채를 펴 자신의 입을 가렸다.
"... 사선님께서 바라신 바였으니까요."
"부디 책임을 저에게 돌리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저도 나약한 인간인지라 요괴님들의 깊으신 생각을 아직은 헤아릴 수가 없거든요."
스님의 미소가 끊어졌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저 같은 미물도 요괴님의 생각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생에 대한 욕망의 부산물입니까? 큰 스님이 되기까지엔 상당히 가벼운 조건이군요."
사선은 부채를 접었다.
"서로가 같은 욕망을 가진 입장이 아닙니까. 부디 업신여기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어머, 저도 모르게 저에 대한 반성을 해버렸네요, 후후. 제가 그래서 신선이 되지 못했나 봅니다."
스님은 두 손을 깍지 끼며 의자에 늘어지게 앉았다.
"될 생각이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군요."
사선은 다른 한 손으로 부채 끝을 잡았다.
"과거의 위인이셨던 분을 저희 절에 귀의시켜주셨으니까요."
"글쎄요, 저는 단지 태자님께서 견학을 하셨으면 해서 잠시 이곳에 맡겼던 거랍니다?"
스님이 조용히 웃었다.
"태자님이란 분은 도교의 사람이 아니셨습니까?"
"지금의 태자님께선 보다 다양한 문물을 익히셔야 하니까요. 불교도 예외는 아니랍니다."
사선은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그 사람에 대해서는 사선님께선 굉장히 팔불출이 되시나 봅니다."
"후후, 전부 태자님을 위해서니까요."
매미의 울음소리가 힘없이 명련사를 거쳐갔다.
스님은 사선을 똑바로 봤다.
"농담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용건이 무엇입니까?"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은 이곳을 꽤나 좋아하시는 모양이라서요."
"제가 생각하기엔 태자님께선 더 이상 이곳에 흥미가 없으실 것 같은데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요괴의 절이라 그런지 비인간적으로 약속을 손쉽게 파기하시는군요."
"비인간적이다, 좋은 말씀입니다. 요괴와 오랜 시간을 함께 해와서 그런지 저도 요괴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나쁜 요괴는 무녀가 퇴치할 겁니다?"
"그럼 저는 아직 인간이라고 변명하면 되겠군요."
"상당히 편리해 보이네요. 저도 불가에 귀의하고 싶을 정도로 말이죠."
"이런 혜택은 죄송하지만 저 혼자서 독점하고 싶습니다."
"아쉽군요, 저도 나름 뻔뻔하다고 생각했지만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아버렸네요."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으니 많이 섭섭하시나 보군요."
"그럴리가요. 저는 그렇게 다른 사람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랍니다."
"저를 여기까지 오게 하신 분은 다름 아닌 사선님이지 않습니까?"
"어머, 스님께서 원하셔서 이곳에 오신 것이 아니라요?"
"순수했다고 해야 할지 더 높은 경지에 다다르지 못했다고 해야 할지 설명하기가 어렵군요."
"몇 세기를 살아오신 분께서 순수란 단어를 입에 올리시다니, 정말 순수하시군요."
"덕분에 제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알게 되었으니까요."
"끝까지 자신에게 솔직해지지 않으시군요."
"솔직합니다. 제게 길을 알려주신 분은 바로 사선님이십니다."
"피차 자신의 목적을 위해 서로를 이용했다고 생각하는데요?"
"다르다고 봐야하는 게 옳습니다. 사선님께선 호기심이셨고, 저는 뒤이어 목적이 생긴 거니까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스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목적 말이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원합니다."
"..."
사선의 이마가 찌푸러졌다.
"정곡을 찔리셨나 보군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여서 조금 허탈했을 뿐이에요."
"번복은 없습니다. 저는 토요사토미미노 미코를 원합니다."
히지리 뱌쿠렌은 크게 자른 수박을 입에 물었다.
"보기보다 더 건방진 분이셨군요."
"본심을 숨겼을 뿐입니다."
"위선자와 같은 마음가짐, 한때의 태자님도 그러셨죠."
곽청아는 수박을 권하는 뱌쿠렌에게 손을 저으며 사양했다.
"지금의 그 사람은 어떠하다 생각하십니까?"
"저에게 맞는 분으로 다시 태어나셨죠. 당신의 방해만 없다면 더더욱 저를 위한 그분이 되실 거고요."
"보기보다 자만심이 더 크시군요."
뱌쿠렌은 수박껍질을 내려놓았다.
"자만심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계획했던 거고, 지금은 결실을 맺을 때일 뿐이에요."
"아직 방해자가 남아있습니다?"
"당신이 계속 붙잡고 있어도 끝내 무녀가 와서 원래대로 돌려놓을 테죠."
세이가는 돌아갈 채비를 하면서 말했다.
"아뇨, 이미 수를 썼습니다."
"무슨 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미코를 저의 것으로 만드는 마지막 수단을 썼습니다."
뱌쿠렌은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며 말했다.
"자신만만하시군요."
"피차 같은 목적일 뿐입니다."
"제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겠는데요?"
세이가는 다시 자리에 앉아 뱌쿠렌을 노려봤다.
"이번엔 숨기지 않습니다. 오늘 밤 미코의 침소엔 사선님을 초대하겠습니다."
"이미 자신의 것이다 호언장담하시는군요."
"오늘 밤이 되면 사선님께서도 마지못해 제 선물을 받아들이게 되실 테니까요."
뱌쿠렌은 손수건으로 자신의 손을 닦은 뒤에, 일어서서 세이가를 배웅했다.
"다시 말하지만 태자님은 소유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태자님께선 당신의 바람대로 움직이지 않으실 겁니다."
"뭐, 저는 미코의 의견을 존중할 뿐입니다. 미코가 사선님을 선택한다면 어쩔 수 없는 거고요."
"그렇다면,"
세이가는 문을 나서기 전에 뱌쿠렌에게 물었다.
"제 패인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한 가지를 콕 집어서 말하자면,"
뱌쿠렌이 답했다.
"가라앉아 있었던 제 욕망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는 점이겠지요."
7
가만히 있는다.
"미안, 이제 화 다 풀었지?"
"화난 거 아녜요..."
"화났네, 화났었어. 미안하다니까."
"화 안 났다니까요..."
집요하게 물어온다.
"사과의 의미로 지금부터 너에게 이것저것 할 생각인데, 혹시나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으면 지금이라도 정리하고 싶어서 말야."
그 요괴는 여러가지 도구들을 보여주면서 말했다.
"... 그게 뭐죠?"
"화장, 다른 말로는 메이크업을 하는 도구들이야."
여러가지 붓들과, 분이 담긴 갑들. 과거의 화장 도구들보다 더 다양하고 알록달록했다.
"그걸, 저를요...?"
"이걸, 너에게 말야."
요괴의 눈이 반짝거렸다.
왠지 장난감이 된 기분...
익숙하긴 하지만 이번과 같은 경우는 처음이다.
"저, 저는 괜찮은데..."
"모처럼 여자가 되었는데 여자가 누리는 행복을 담뿍 느껴봐야지. 궁금하지 않아? 화장을 하고 난 너의 모습이 어떨지?"
잘 모르겠다.
생각해보지 않았다.
지금의 나마저도 제대로 그려낼 수가 없는데, 하물며 처음 보게되는 나의 모습이라니...
"화장은 예전에도 해봤어요."
"그건 네가 남자였을 때잖아."
"똑같은 거 아닌가요? 분을 덕지덕지 발라봤자 제가 다른 모습이 되지는 않았다고요."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 하잖아. 지금의 자신이 어떻게 변하는지 기대해 보라고."
"자, 잠시만요!"
무작정 달려드는 요괴를 억지로 막아섰다.
"아직 모르겠단 말이에요. 제가 정말로 여자가 되었는지, 다시 남자로 돌아갈 수 있는지 말예요."
"그래서?"
"만약에 지금 당신에게 몸을 맡기게 되면, 정말로 남자로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아요..."
"너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과 같이 잠을 자왔었잖아? 그건 괜찮고 화장하는 건 안 괜찮고?"
"... 현실로서 다가와지지 않았어요..."
"비현실적으로 만연한 쾌락은 노카운트다 이거네."
요괴는 내 말을 들어줬다. 하지만,
"꿈이니까 도망치면 되는 거야? 꿈이니까 억지로 행복해지려고 하는 거야? 행복해지면 끝이야? 안 돼, 그러면 안 돼. 지금 네가 마주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꿈이라고 해도, 너는 용기를 내서 받아들여야만 해. 행복을 주는 주체는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너야. 여자가 되었으면 여자의 감각과 여자의 기쁨을 느끼면서 살아봐."
그녀는 나를 꿈에서 끄집어내려 하고 있었다.
내가 나로서 있게 해주는 마지막 희망으로부터.
"... 제가 여자가 될 수 있을까요...?"
무섭다. 나를 닫아두었던 나의 모든 것들을 전부 놓아버려야 한다니, 지금까지의 나를 전부 잊어버려야 한다니...
나는 과연 지금의 내 자신을 마주할 수 있을까.
새로워진 내 자신을 마주할 수 있을까.
"너는 충분히 여자인걸."
"몸으로 확인받아야만 깨닫게 되는, 그런 여자이진 않는 거죠...?"
정말 여자가 되어버린 내 자신을 바라볼 수 있을까.
그녀가 앞으로 보여주게 될 나의 모습은 과연 무엇일까.
"너가 계속 도망 치려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 지금까지 너의 욕망을 외면해와서 그런 거야. 위인이어야만 했던 너 자신만을 남기기 위해 다른 너는 사라지고 없어져야만 했지."
"제가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무서웠다. 내가 여자임을 인정하는 것이 무서웠다.
그저 쾌락에 이끌려 내 진심을 숨겨오면 내게 닥쳐온 현실을 부정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기분이 좋기 때문에 외면할 수 있었다.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에 나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아닌 나 자신이 거짓된 현실을 지저귀는 음성을.
하지만 돌이켜서 생각해보면, 나는 내 목소리를 공허하게 듣고만 있었다.
내 목소리엔 알맹이가 없었다.
"지금부터 알아가는게 어떨까? 잠시동안 눈을 감고 내게 모든 것을 맡겨봐."
"... 네..."
그녀의 손을 잡으며 눈을 감았다.
그녀를 받아들였다.
내가 어떤 걸 바라왔는지, 어떤 걸 소망해왔는지 지금도 깨닫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바란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기를.
내가 그토록 바라왔던 것이 무엇인지를.
...
그녀의 손이 멈췄다.
내 몸에 닿아지는 모든 감각들이 사라졌다.
다 끝난 건가? 나는 지금 여기에 있는 건가?
이곳은 현실인가? 내가 존재하는 곳인 건가?
"미코, 눈을 떠보렴."
그녀의 음성이 들렸다.
조심스럽게 눈을 뜬다.
"그리고 네 자신을 바라보렴."
몽실몽실하게 구체화되지 않은 나의 모습을 그리며 눈을 뜬다.
"..."
이게... 나...
내가 보인다.
내가 아닌, 내가 보인다.
눈 앞에 있는 나를 하염없이 쳐다본다.
"거울 속에 비친 너의 모습이 어때?"
"... 이게, 저인가요...? 제가 맞는 건가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눈치네. 맞아. 이게 바로 너의 본모습이야."
"저의... 진짜 모습이요...?"
거울 속에 있는 여인이 홍조를 드리웠다.
아름답다... 저 여인이 정말 나라는 사실이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다.
"화장이 정말 대단하지? 지금껏 봐왔던 네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낯선 너로 변해있다는 게."
"아뇨..."
"응?"
내 안에 잊혀져 있었던 소망이 지금에서야 다시금 피어 올라왔다.
저 멀리 보였던 나, 나의 모습.
암전이 되었던 세상 속에서만 존재해왔던 나의 모습이... 보였다...
"제가 그토록 바라왔던 저의 모습이었어요..."
눈물이 나왔다.
"아차차, 모처럼 공에 공을 들여서 만든 걸작품이었는데..."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아... 아하하하하..."
웃음이 나왔다.
"이제 알겠지? 네가 그토록 갈망해온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말야?"
눈물에 섞인 웃음이 배어나왔다.
"... 네, 이제야 알게 되었어요."
... 어린 소망을 품었던 적이 있었다.
아름다워지고 싶었다.
내 자신이 아름다워지고 고귀하게 변한 모습을 그려왔었다.
하지만 이 어린 몸이 견뎌야 할 가문의 무게는 나 자신만의 욕망을 감추고 숨겨와야 했었다.
아름답고 싶었다.
내 자신이 아름답고 고귀하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행복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것이 위인이라는 자가 가져야 할 덕목. 천하를 거머쥘 자가 베풀어야 하는 덕망. 백성을 위하는 자가 따라야 할 덕치.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그곳엔 나를 위한 행복은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깨닫지를 못했다.
나는 과연 위인이 되기에 적합한 사람이었을까.
위인이길 희망하는 존재는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만 하는 걸까.
정답을 내리지 못하는 쪽은 바로 이곳에 있었다.
바로 나. 나 혼자만의 잘못.
나는 내가 눈을 감기 전까지 내 안에 계속해서 멤돌고 있는 질문에 대해 답을 내리지 못했다.
위인이란 가면을 쓰고서도 끝내 백성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 아름다워질 것이다. 아름다운 내가 될 것이다.
더 이상 다른 이는 필요없다.
나 하나를 위한 나만의 욕망이 필요하다.
이제는 내 욕망만을 듣고 싶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나를 희생하고 싶지 않다.
어렸을 때의 꿈을 간직하고 있는, 지금의 내 몸에게서부터 눈을 돌리고 싶지 않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과거의 저에게, 위인이길 갈망하는 현실에, 그리고 저를 알고 있는 다른 누군가들에게조차도요."
"드디어 네 자신에게 솔직해졌구나."
요괴는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너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지금의 네 모습이 가장 아름다워."
"제 능력이 오직 저를 위한 것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저를 더 많이 알아가고 싶어요."
얼룩진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진실을 알게 해준 나의 모습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여러분들과 좀 더 행복해지고 싶어요. 저에게 더 많은 것들을 들려주시고, 또 속삭여주세요."
지금까지의 내 모습을 봐왔던 그들을 향해 말을 건넸다.
"그건 우리들을 위한 욕망이야, 아님 너를 위한 욕망이야?"
누에가 물었다.
"앞으로는 저의 목소리만을 들을 거예요. 단지 부족한 제 만족감을 여러분들을 통해 해소하고 싶을 뿐이에요."
"결국 어디에도 속하지 않겠다는 거구나. 우리와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서는 아쉽긴 하지만, 언제든지 너의 갈증을 해소시켜 줄게."
누에는 그들을 바라봤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선택을 환영해주었다.
"뱌쿠렌도 이정도면 수긍하겠지 뭐. 그런데 미코,"
"네?"
요괴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쉽지만 오늘 밤엔 너를 만나고 싶어 하는 손님이 있어서 말야."
미소가 가득 차 있었다.
"..."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화장, 다음 번에도 해주실 거죠...?"
"언제든지 해줄게. 네가 원한다면."
"그럼 여러분,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그들의 배웅을 받으며 사랑채로 떠났다.
8
"태자님,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녀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보고싶었는지 몰라요."
처음 눈을 떴을 때의 느낌이 이랬을까.
그녀는 그때도 이렇게나 나를 반가워했을까.
"... 저도 보고 싶었어요."
싫다는 건 아니다.
나를 변하게 만들어준 나의 스승님, 나를 새롭게 태어나게 해준 나의 어머니.
그리고 나에게 새로운 세계로 안내해준 나의 조력자이기 때문이다.
어찌 그녀를 미워하겠는가.
"세이가님, 저에게 어떤 볼 일이 있으셔서 오신 건가요?"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녀의 아이로서 살아가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그녀만을 바라보는 인형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품 안에서 울고 있었던 아이는 마침내 다 자란 성인이 되었다.
더 이상 그녀에게 응석을 부리지 않아도 된다.
그녀에게 있어야지만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되는 나이는 이미 지나버렸다.
"어떤 일이라뇨, 미코님을 데려가기 위해서 온 거예요. 돌아갑시다, 저희들의 집인 몽전대사묘로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들리지 않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세이가는 내 손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을 다소곳이 놓는다.
그리고 자리에 앉았다.
"미코님...?"
그녀가 나를 바라봤다.
"제게 돌아갈 곳은 이제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모두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이곳이 더 좋아요."
"미코님,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가요? 불가의 요괴들이, 파계승이 당신께 무슨 짓을 저질렀던 건가요?"
들리지 않는다.
그녀의 욕망이 들려오지 않는다.
"당신이 부탁하셨던 게 아니었나요?"
"태, 태자님...?"
"당신의 장난감이 되기에는 예전의 저로서는 만족하지 못하셨나요?"
"아니에요 태자님, 아니에요... 오해예요!"
그녀의 힘에 눌려 쓰러졌다.
그녀의 얼굴만이 보였다.
"태자님을 저의 태자님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태자님께서, 미코님께서 오직 저만을 바라봐 주셨으면 해서 이곳으로 온 거였어요. 태자님의 사상에 저항하는 불한당들이 태자님을 괴롭히면, 태자님을 욕보이면 태자님께서 저만을 생각해주실 줄 알았어요. 미코님께서 제 도움을 바라실 줄 알았어요."
그녀의 욕망이 들렸다.
하지만 마음으로서가 아닌, 말로서의 욕망이 들려왔다.
"부디 저만을 바라봐 주세요. 저에게 당신의 사랑을 속삭여주세요. 당신을 원해요, 태자님을, 미코님을 원해요."
하지만 그녀를 책망하고 싶지 않다.
그녀의 잘못을 추궁하고 싶지 않다.
"세이가님, 죄송해요. 당신의 욕망을 이해하지 못한 저는 지금의 제 모습으로 남게 되었어요."
그녀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니까. 그녀 덕분에 비로소 한 명의 여인이 된 거니까.
오히려 그녀에게 감사하다. 그토록 갈망했던, 그동안 숨겨왔었던 나의 욕망을 마침내 들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녀는 지금의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아녜요 태자님, 태자님께선 더럽혀지지 않으셨어요. 그때의 태자님도, 지금의 태자님도 저에겐 오직 아름다운 성인으로 보이십니다."
그녀의 호의에 감사한다.
그녀는 언제까지나 나를 바라봐 줄 것이다. 그래도,
"그러기에 더욱더 제 욕망에 귀를 기울이고 싶어요. 언제나 제 욕망만을 듣고 싶어요. 저는 이곳이 좋아요. 이곳에 있으면 당신에게서도, 명련사의 모두에게서도 진하고 탁한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되거든요."
내 욕심을 놓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누리고픈 행복을 쟁취하고 싶어졌다.
더 만족하고 싶다, 더 행복해지고 싶다, 더 여자가 되고 싶다.
나에게서부터 끊임없이 아이와 같은 욕망이 샘솟아난다.
"... 안 돼요. 미코님은, 당신은 오로지 저의 것이어야만 해요. 당신은 오직 저만을 바라보셔야 해요. 당신을 그렇게 만든 건 바로 나니까, 당신이 그렇게 원하도록 만든 건 바로 나니까, 당신이 그토록 바라왔었던 것을 이루어준 건 바로 나니까!"
그녀의 숨이 거칠어졌다.
... 할 생각이다.
지금도 그녀의 욕망이 들리지 않는다.
... 상관 없다.
이미 마음을 정했다.
"하고 싶으신 거죠? 지금 이 자리에서? 참지 마세요, 세이가님. 저는 도망가지 않을 거예요. 당신에게서도, 요괴에게서도, 모두에게서도 도망가지 않을 거예요."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얄궂지만 상냥한 요괴에게 선물 받은 옷이 얇은 종이처럼 찢겨져 버렸다.
...
... 아...
행복하다. 언제나 행복해왔다.
이 소리도, 이 고동도, 이 감각도, 내게 둘러싸여져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전부 다 만족스럽다.
하지만 부족하다.
"...!"
하지만 내 욕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허기지다, 아직도 목이 마르다.
내가 나임을 깨닫게 되자 더 많은 내가 내 욕망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더 많은 행복을 누리고 싶다. 더 기분이 좋아지고 싶다.
"미코님, 미코님. 제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시는 겁니까? 당신을 향한 제 목소리가, 당신을 부르는 제 목소리가 정녕 들리지 않으시는 겁니까...?"
들리지 않다. 그녀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다.
들리는 것은 오로지 내게서 새어 나오는 음성, 그리고 내 안에서 북받쳐 오르는 욕망뿐.
공허한 쾌락만이 나를 채워간다.
내 안을 가득히 채워나간다.
맞닿아진 가슴으로 그녀의 체온을 느끼지만, 그녀의 고동은 고독하게만 느껴질 뿐, 그녀의 숨소리도 그녀의 질척한 소리도 그녀의 심장 소리도 전부 들려오지 않는다.
... 미안... 더 이상 너에게서부터 나를 찾을 수 없게 되었어.
왜냐하면, 나는 이미 여기에 있는걸.
이미 여기서, 이곳에서 숨을 가쁘게 쉬면서, 초점이 없는 눈으로 너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주입당하는 쾌락을 받아들이고만 있는걸.
그리고...
"세이가님, 부디 이대로 계속, 계속 함께하고 싶어요."
부족해.
내 욕망을 채우기에는 아직 턱없이 부족해.
내 자신에게 솔직해졌기 때문인가, 마음속의 허기짐이 바깥으로까지 드러나게 되어버려.
좀 더 많이, 더욱더 많이 원해.
너를 원해, 너의 욕망을 원해, 너의 것을 원해.
너의 그 새하얀 진심을 원해.
그러니까 부탁이야, 끝내지 말아줘.
이 행복을 네가 먼저 끝내지 말아줘.
"... 미안해, 세이가."
"미코님...?"
그녀의 의지에 제동이 걸렸다.
하지만 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내렸어.
네가 원하는 답은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거야.
안녕, 세이가.
"더 이상 너만으로는 나를 만족시킬 수 없게 되어버렸어. 그래서 너에게 갈 수 없는 거야. 부족하니까, 갈증이 나니까 그래서 더욱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어. 요괴여도 좋아, 나와 다른 사상을 가진 자여도 좋아. 그저, 내가 그들에게 맞춰지고 뒤섞여서 전부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정말 미안해...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아.
"... 싫어. 싫습니다... 싫다고요!"
투명한 감각의 화가 피어올랐다.
그녀의 분노가 참을 수 없이 맥동한다.
그녀의 마지막 전력질주가 시작된다.
욕망이 새어 나온다. 소리가 새어 나온다. 기쁨에 겨운 목소리가 온 방안에 울려 퍼진다.
더욱더 거센 방황감이 나에게 채워져간다.
나마저도 숨이 가빠지게 하는 이 상태가 너무나 좋다.
내 숨마저도 행복으로 채워나가는 그 기분.
이대로가 정말 좋다.
그렇기에 그녀의 최후가 더더욱 아쉬워진다.
"미코님, 미코, 미코! 부족하지 않아, 부족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너를 절대로 놓지 않을 거야!"
끝이 다가온다.
"... 그래요 세이가님... 그 상태로, 그 욕망으로 부디 저를 채워주세요. 어린아이와 같은 저를 당신의 색으로 물들여주세요."
부탁이야 세이가, 이런 나를 온전히 만족시켜줘.
작별의 키스를 해줘.
"으윽!..."
"...! ..."
나는 그녀의 욕망과 함께 그녀의 새하얀 눈물까지도 받아들여야만 했다.
잘 있어, 세이가. 당신이 있어서 정말 행복했어.
9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청명한 하늘에 새로운 순환이 시작된다.
더위가 가시는 시간.
피부로부터 데워진 숨을 하늘이 가져가 버리는 시간이 찾아왔다.
두 사람이 이른 새벽부터 하늘을 활보한다.
"이번이 마지막이길 빈다만은, 아무래도 이번엔 내 촉이 잘못되었기를 바랄 뿐이야."
아직 햇빛이 온 환상향을 밝히지 못했다.
"그렇긴 해도, 제가 환상향의 지리를 훤히 꿸 정도로 이미 많은 곳들을 찾아다녔어요. 태자님께선 분명 저기에 계실 거라고요."
다급한 마음에 불만이 쌓여가는 망령을 달래어가며 무녀는 확신할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날아갔다.
"그래그래, 그랬으면 좋겠지. 근데 말이야,"
가을.
더 이상 매미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는 가을.
"명련사엔 요괴들밖에 없거든."
'부디 내 예상이 틀렸기를...'
매미는 더 이상 이곳에 남아있지 않다.
그녀의 사명은 이미 다했다.
그녀의 계절이 끝났다.
빈 공간 속으로 메아리는 바람만이 조용한 환상향에서 들려올 뿐이었다.
하쿠레이 레이무는 방구석 망령을 데리고 명련사에 도착했다.
누군가가 입구에 기대어 쓰러져 있었다.
"... 그 사선이에요."
망령이 말했다.
무녀는 조심히 다가가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 미코님..."
"... 누구에게 당한 건 아닌 건가."
그녀의 의식이 남아있었다.
말라붙은 눈물 속에 덮여진 망자는 자신의 비어버린 속을 향해서 말을 걸어가고 있었다.
"이젠... 더 이상... 내 품에... 내 품에서... 떠나버렸어... 미코님, 미코... 나의 행복, 나의 전부가..."
하지만 그녀의 눈 앞엔 보이지 않는 허무함만이 남았다.
"살아갈 수가 없게 되었어... 나의 새장 속에서... 더 이상... 하늘로 훨훨 날아가 버렸어..."
그녀는 초점이 없는 눈으로 그저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음... 정신이 붕괴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인데..."
"무녀님?"
망령은 무녀의 표정이 어두워져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필히 뱌쿠렌, 그년의 짓일 거야. 우려했던 상황도 이미 끝나버렸고."
무녀는 문을 박차고 성큼성큼 들어갔다.
망령은 자신의 걱정이 부디 자기 혼자만의 망상이기를 바라며 무녀를 쫓아갔다.
"뱌쿠렌, 어딨어! 니가 납치하고 있었지? 그 아이를? 어서 돌려내!"
명련사가 떠나가듯이 무녀의 거센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조용한 환상향에 단 하나의 소리만이 모습을 드러냈다.
"환상향의 무녀님은 역시나 엄청 시끄러우시네요."
사랑채의 문을 닫은 스님이 다짜고짜 절에 침입한 무녀를 맞이했다.
"어물쩍 넘길 생각은 하지 말고. 있지? 저기에 말야."
무녀는 불제봉으로 사랑채를 찌르듯이 가리켰다.
"... 정말 감이 좋으시네요. 아니면, 그 뒤꽁무니에 붙어있는 신하가 전부 다 일러바쳤으려나요."
스님은 웃음을 가리지 않았다.
보이라는 식의 웃음소리도 정적으로 얼기설기 짜인 하늘을 차곡차곡 채워나갔다.
마치 누군가의 빈자리를 억지로 채우려는 것처럼.
"아예 대놓고 우리가 늦었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무녀의 화가 점점 돋아났다.
"맞아요, 늦으셨어요 무녀님. 왜 이리 늦으셨나요? 공주를 납치한 마왕은 결국 공주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렸답니다. 용사란 작자가 끝내 마왕성으로 쳐들어오지 않아서요."
그녀의 웃음이 끊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무녀는 피부를 뚫고 삐죽하게 솟아나가는 화를 간신히 참아가며 악당을 노려봤다.
"그래, 내 그릇된 판단이 이 사단까지 오게 되었으니 내 잘못이야. 그러니까 비켜. 그 아이를 데려갈 테니까."
그리고 사랑채를 향해 걸어갔다.
"...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알아차리신 거죠?"
스님은 비켜서지 않았다.
무녀의 발걸음이 멈췄다.
"... 네 년의 짓이지?"
무녀는 불제봉의 방향을 악당에게로 돌렸다.
"그런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아녜요. 제가 그런 게 아니에요. 저는 당신에게 제 목적을 들키지 않게 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걸요."
그녀는 무녀를 비웃으며 말했다.
"네 년의 요력이잖아."
"저는 인간이에요."
"그만큼의 요력이 나오려면 네년 같은 능구렁이여야만 해."
"저는 아직 요괴가 될 생각이 없는걸요."
"끝까지 시치미를 뗄 셈..."
문득 스쳐지나가는 괴리감.
그녀의 의문스러운 한 마디에 무녀는 자신이 틀리길 바라왔던 그 예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평화가 깨졌다.
"... 너 이 자식이...!!!"
무녀는 악당을 밀치고 사랑채로 달려갔다.
스님은 뒤쫓아가는 망령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한 까닭은,
"인간이 요괴가 되었다는 거잖아!"
금기가, 환상향의 규칙이 깨졌기 때문이었다.
"이... 이럴수가..."
무녀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무녀, 님이시군요..."
이미 수많은 욕망들로 뒤덮여져있는 방이었다.
대체 몇 명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것일까.
밤 동안 도대체 몇 명의 요괴와 함께 해왔던 것일까.
그녀를 좋아하는 요괴, 싫어하는 요괴도 모두 그녀를 향해 얽어오고 있었다.
욕망의 향기가 안팎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진하게 배어 나왔다.
하지만 무녀는 자신의 코를 막을 수가 없었다.
"토지코, 미안..."
실패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틀렸기 때문이다.
금기가 퍼져나가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무녀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
"태, 태자님!..."
사랑채 안을 바라본 망령은 충격을 받고 털썩 주저앉았다.
"말도 안 돼... 어떻게, 과거에 태자라고 불렸던 사람이, 성인이라는 사람이 왜! 대체 왜 인간을 저버릴 수가 있어!"
무녀는 떨려오는 몸을 바로잡을 수 없었다.
믿고 싶었다. 악당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고, 이건 전부 다 그 악당의 잘못일 거라고.
하지만 그녀가 깨뜨렸다. 그녀 스스로 금기를 범해버렸다.
하쿠레이의 무녀는 그저 악당의 탈을 쓰고 있는 요괴들에게 둘러싸여진 그녀를, 욕망들이 그녀의 곁에서 맞부딪혀 요란하게 흘러내리는 그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뇨... 저는... 저버리지 않았어요... 저는 단지 작고 여린... 여자아이일 뿐이에요..."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몰려오는 수많은 불협화음들에 의해 묻혀져갔다.
저급한 소리, 비열한 음성, 그리고 희생자의 비명.
"아냐, 도망갔어. 당신이란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마지막 인간성마저도 저버리고 도망간 거야. 당신 그 자신의 의지로!..."
무녀는 요괴들의 아수라장을 외면하려고 애썼다.
떨려오는 두 다리로 마루를 딛고 서있기 위해 애를 썼다.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뭐...?"
그녀는 쾌락을 받아들이며 말했다.
"이거야말로 제가 진실로 원하는 것이었어요... 제가 행복해지는 것... 그거면 족해요... 다른 건,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건, 이제는 필요 없... 어...?!!!"
뒤늦게 알아버린 자신의 욕망에 잠식된 요괴는 자신의 목소리를 바깥으로 드러낸다.
요괴들 사이로 한 명의 소녀가 경련을 일으켰다.
하쿠레이의 무녀, 환상향의 대표자는 그저 버티고만 있을 뿐이었다.
"정말 그거면 족해? 너 하나만을 위한다면, 그렇게 모든 것을 전부 다 포기해버릴 수 있어?"
마지막 힘을 쥐어짠 무녀는 홀로 서서 요괴가 되어버린 아이를 향해 소리쳤다.
"... 아뇨... 부족해요... 아직 턱없이 부족해요..."
"?!"
여자아이는 팔을 벌리며 무녀를 불러들였고, 무녀는 휘청거리며 중심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다.
욕망의 소굴엔 오로지 요괴만이 있었다.
인간은 사라졌다.
"기왕 행복해질 거면... 모든 분들과, 환상향의 모든 분들과 함께 행복해지고 싶어요... 요괴도, 인간도, 그리고 당신도요..."
요괴는 미소를 지었다.
"... 나는 대체... 당신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하쿠레이 레이무는 자신도 모르게 불제봉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쥐고 있던 손의 힘이 다해 풀려 버렸기 때문일까, 손까지 타고 내려간 식은땀에 미끄러져 버렸기 때문일까.
무녀는 무릎을 꿇고 교성이 가득한 방안을 초점이 없는 눈으로 바라봐야만 했다.
한 번 죽고 난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
욕망의 실현은 자신을 저버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자신이 아니다.
그녀는 더 이상 제약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아름다워진 자신을 보며 만족하는 소녀일 뿐이다.
그렇기에 도망갔을 뿐이다.
인간이란 제약으로부터 빠져나왔을 뿐이다.
요괴가 되면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에, 요괴가 되면 더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요괴가 되면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무녀는 더 이상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녀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녀를 자신의 규칙에 놓을 수 없기 때문에.
그녀는 마침내 자유로운 성인이 되었기 때문에.
... 매미의 계절이 끝났다.
매미의 허물은 바스라 사라질 거고, 매미의 몸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매미의 목소리마저도 옅게 가리어지겠지.
그렇게 매미는 앞으로도 환상향을 향해 울지 못할 것이다.
(完)
'제 2회 글알못 팬픽대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춘기의 뱀파이어 - Koakuma (0) | 2020.07.04 |
---|---|
키신 사구메의 모순 - Kazador (0) | 2020.07.04 |
영원의 저주 - 카라니아 (0) | 2020.07.04 |
독심독신(讀心獨身) - 큘라마도마 (0) | 2020.07.04 |
제 2회 패드쟝배 글알못 팬픽대회 공지 (0) | 2020.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