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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회 글알못 팬픽대회

독(獨毒) - Ocsquirt

혼슈 본토의 북반부. 이름 모를 어느 험준한 고개.

그 일대에는 고동나무 고목들이 빽빽하게 자리 잡고 있어 한낮임에도 어두운 비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왜인지 그 일대에는 위험한 산짐승도. 지나가는 여행자를 습격하는 도적무리조차 없어서, 여행자들이나 상인들이 주로 다니며 그 고개 어딘가에는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감사한 마음을 담아 자그마한 참배당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고개보다 더 깊숙이 들어선 곳

눈보라 서리 내려서 하얗게 물든 심산의 외진 길을 그저 묵묵히 나아가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등에는 한보따리 가득 등짐을 메고 머리에는 눈이 소복히 쌓인 삿갓을 쓰고 있다. 허름한 행색에 무슨 일이 있어도 가지고 있는 물건을 놓지 않겠다는 듯 꽉 쥐고 있는 두 손. 어디를 가도 볼 수 있는 평범한 등짐 장사꾼. 보부상의 모습이었다.

이 가난하고 젊은 장사치. 이름은 고보우라고 한다. 고보우는 이래저래 쌓인 눈들을 헤치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몰아치는 눈서리에 눈을 뜨기조차 힘들다.

어서 조금이라도. 빨리...

애시당초 이 등짐장사라고 하는 것은 속도가 생명인 일이다. 속도는 즉 신용이다. 제 시간에 납품하지 못하면 그대로 끝. 물건도. 돈도. 일도. 모조리 잃어버리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에도에 가게에서 고용살이로 일하며 그런 일들을 자주 봐왔던 고보우 이기에, 내리던 눈길에도 발걸음은 멈출 수 없었다.

[일확천금이란 없다. 돈을 벌고 싶다면 열심히 일 하는 수밖에 없다. 욕심은 화를 부를 뿐이다.]

고용살이하던 가게의 대행수가 매일같이 하던 말이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하여 원래의 길이 아닌 산을 넘는 길을 선택한 것이 문제였다. 하늘이 심상치 않아 이리 폭설이 내릴 것임을 분명히 알았는데. 아니 애시 당초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겠다고 달려든 게 문제겠지만

고보우는 서둘렀다. 허나 망연히 멈추어 설 수 밖에 없었다. 어째서인지 개울은 얼어붙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폭설로 강이 불어난 탓일까. 아니면 애당초 물살이 거센 것일까. 시내는 마치 그를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건너가는 것은 무리겠지.’

등에 메고 있는 짐도 한 가득인데다가 이렇게 바람이세고 추운 날 저런 곳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얼어죽는 게 먼저일 테지. 그러면 이제 어쩌면 좋을 텐가. 고보우는 그 자리에 멈춰서서 생각에 빠졌다. 험준한 산길이다. 되돌아가면 산속에서 밤을 맞게된다.

이제 와서 돌아가는 것도 마땅치 않다. 그렇다면 건널 수밖에 없다. 이 시내를 건너기만 한다면 산 아래까지 이르는 거리는 지척에 불과하니 아마 한나절도 걸리지 않을 터. 산으로 들어서지 않는다면 고개를 넘어도 이틀. 지금 우회해서 돌아간다고 해도 나흘은 걸리는 거리다. 이 산길을 넘는다면 하루로 족하다. 못해도 하루. 잘하면 이틀이나 시간을 벌 수 있다. 고보우는 그러한 심산으로 걸음을 재촉해왔던 것이다.

실수했군.’

몸 구석구석까지 급격하게 피로감이 차오른다. 처음 향하는 길이었으니 만큼 가능한 무난한 길로 갔어야 했다. 그나마 가도를 따라왔다면 이처럼 오도 가도 못할 상황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새벽녘부터 구름의 형세가 심상치 않아, 고보우도 아침 출발 직전까지도 그러하리라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그럼에도 발은 저절로 산으로 향했다.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이. 돈을 벌수 있다는 그 욕심이 화를 자초했다. 기후를 잘못 읽은 것이다.

어쩔 수 없지.’

남는 수는 한가지 밖에 없었다. 분명 강어귀 어딘가에는 낡은 통나무다리 같은 것이 있겠지. 거기 까지만 간다면 강을 넘기만 하면 된다. 되돌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상책이다. 그렇게만 한다면야.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고보우는 무거운 다리를 애써 들어 올리며 개울을 따라 하류로 나아갔다. 눈이 녹아 옷이 젖었고 추운 날씨에 옷이 얼어붙는다. 눈서리가 새애액하고 몰아쳐와 삿갓도 몸도 짐도 모든 것을 덮는다.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걸을 때마다 푹푹 발이 눈에 파묻히며 종아리까지 쌓인 눈을 헤치자니 걷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휘이이잉쏴아아아

귀곡성과 같이 싸늘한 바람이 불어와 살을 베어버리듯 싸맨다. 주먹 만한 눈발이다.

휘이이잉쏴아아아

…….

‘....뭐지?’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라도 있는 걸까. 부드러운 목소리였는데.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저멀리 눈 속을. 하얀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남자...? 아니. 여자인가?

그녀를 바라보자 순식간에 머릿속이 먹을 푼 것처럼 흐릿해진다. 익숙한 기시감이 온몸을 뒤덮는다. 대체 뭐지. 내가 언제 어디서. 저런 여자를 봤었나? 눈바람이 세차 시야가 흐리다. 왼손으로 눈을 비비며 다시금 숲속을 바라본다.

‘.....사라졌다.’

그 여자는 마치 배경에 녹아들 듯이 흰 눈 속으로 녹아들었다. 아니.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백옥같이 흰 피부에 눈같이 하얀 머리칼. 게다가 옷도그저 순백. 조금의 탁한 잡티조차 섞이지 않은 그 이질적이게도 깨끗한 순백이 계속해서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발자국조차 없는가.’

그녀가 있던 자리에는 애초에 아무도 없었다는 듯이 눈이 쌓여있을 뿐이었다. 눈에 힘을 부릅주고 주위를 둘러본다지만 뿌연 눈안개 연무로 흐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저녁 무렵의 눈내리는 하늘은 더욱 어둡다.

밤이 슬금슬금 내려오고 있다.

눈발은 잦아들 기미조차 없다.

새애애앵콰르르륵.

손발이 떨어져 나가리만치 아프다. 기묘한 감각이 전신을 뒤덮는다. 고보우는 어깨너머로 등 뒤를 살피다가 삿갓을 들어 올리고서는 주위를 둘러본다. 그러자 또다시. 저 멀리 꼿꼿한 걸음걸이로 하류로 향하고 있는 아까전의 그 여인이 보인다.

귀신...아니. 여우에라도 홀린 것인가.’

고보우는 발길을 돌려 강줄기를 따라 내려갔다. 온 힘을 다해 그 여자를 쫓았음에도 사이의 간격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유키온나(설녀). 전설 속의 설녀가 저런 모습일까. 아니면 그저 내가 추위에 미쳐버려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일까. 이런 폭설 속에서 어찌 아낙네아녀자가 저리도 빨리 걸을 수 있는가.

이정표도 없었고 시야도 나쁘며 발조차 내 뜻대로 내딛을 수 없다.

대체 이 나는. 고보우는 어디로 가는 것인지.

콸콸대는 시내소리에 이끌리듯이 나아간다.

콰르르르콰르르르

순간.

미끄덩. 발이 미끄러졌다. 얼음을 밟은 것이다.

고보우의 몸이 휘청거린다. 등에 메고 있던 짐이 돌아간다.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몸을 틀었기 때문에 그 반동으로 엉덩이가 빠져 결국 균형을 잃고 쓰러지고 만다. 다행히도 눈이 수북이 쌓였기에 아프지도. 짐이 부서지지도 않았다.

....’

크게 한숨을 토했다. 입에서는 마치 연초를 한 것처럼 하얀 숨이 뿜어진다.

고보우는 몸에 힘이 빠져 그대로 자리에 누웠다.

왠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눈을 매개로 고보우는 산이나 대기와 풍경에 동화한다. 아까전의 그 여자처럼 풍경에 녹아들어 이내 색채를 잃어버리고 흰 색이 된다. 눈을 감고 호흡을. 숨을 들이쉬자 폐안의 썩은 악취가 전부 빠져나가며 차가운 겨울의 정수가 들어와 몸을 채운다. 심장이 박동하며 혈맥을 따라 혈액이 순환한다. 마침내 고보우와 세계는 하나가 되고 눈이 내리는 소리는. 바람이 부는 소리는. 흐르는 시내소리는. 쿵쾅대는 박동에 맞춰 분절되어 각인된다. 고보우는 그저 가만히. 소리를 들을 뿐이었다.

색 바랜 초상이 수면위로 떠오른다. 이 것은 기억이다. 누구의? 나의 기억은 아니다. 아니. 나의 기억인가. 모른다. 누군가의 기억일지. 아니면 그저 내 꿈상상일지. 비 내리는 산. 소녀와 남자는 손을 잡고 산을 넘는다. 내리는 비에 소녀는 미끄러지고 남자는 이를 붙잡아준다. 무엇 때문인지 그 둘은 바쁘다. 마치 무서운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듯이 도망치듯이 산 기슭을 타고 넘는다

왜지. 분명히 처음 볼 터인데.

이유모를 기시감이 계속해서 들었다. 하얀 머리. 붉은 천으로 한갈래로 머리를 묶은 소녀. 백옥같이 흰 피부. 그리고 그 소녀와 함께하는 사내.

쏴아아쏴아아

쏴아아

그리고 고보우는 불현 듯 현실로 돌아왔다.

얼마나 정신을 놓고 있었던 것일까.

한층 더 거세진 눈발이 온몸을 덮어 고보우를 바깥 세계로부터 완전히 배제하고 있었다. 마치 봉분처럼 온몸에는 차가운 눈의 감촉만이 느껴지고, 신체 끝의 감각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이대로 있으면 죽는다.’

고보우는 공포심에 쫓겨 일어났다. 널브러져 있는 짐을 둘러메고 머리의 삿갓을 고쳐 쓰며 몸에 묻은 눈을 털어낸다. 그리고는 귀신과 같이. 아무것에 얽매이지도 않은 바람처럼 시간을 거슬려 내려오듯 강줄기를 따라 내려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음에도 몸은 저절로 길을 골랐고, 고보우는 미끄러지고 구르기를 수번 반복하여 마치 처음부터 그 곳이 목적지였던 것처럼 그곳으로 향했다.

어떻게 인지 고보우는 그곳에 오두막이 있으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일말의 의심조차 없다. 그 오두막은 이미 고보의 관념 속에. 머릿속에 뚜렷이 서 있었다. 내리는 눈과. 산과 세계와 풍경에 들어가 버린 고 보우로서는 아무런 이상도 걸림 점도 없다. 무의식적으로. 그저 고보우는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너머에.

오두막.’

오두막은 그곳에 그림처럼 서 있었다.

산과 산 사이. 세차게 흐르는 시내의 옆에. 자갈과 바위 돌 위로 쌓인 눈들과 언제 지어졌을지 모를 다 쓰러져가는 초라한 오두막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서 있었다. 쌓인 눈에 지붕이 무너져 버리는 게 아닐까. 말 그대로 폐가. 오막살이 집이다.

고보우는 주저 없이 문 앞으로 달려나가 부닥치듯 문을 열었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듯이 그는 온몸에 힘을 확 주고서는 문을 힘껏 닫았다. 쾅 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렇다면 이제는.

뭐지?’

고보우는 멍청히 멈춰섰다. 방 안에는 그를 제외하고도 수명의 사람이 있었다. 모두 그처럼 폭설을 피해 이 집으로 들어온 것일까. 모두들 가운데에 화로를 끼고서는 몸을 덥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석에는 어떤 노인이마치 주위에서는 없다는 듯이 무시되는몸을 말고 누워있다. 한 사내가 고보우를 바라보며 싱긋이 미소를 지었다.

앉으시지요.”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번 웃었다.

그러고 계시면 법력 깊은 스님이더라도 오한이 들기 마련이지요. 묻은 눈을 털어버리고 자아. 이리로.”

사내는 살갑게 손짓을 하며 고보우를 불렀다. 고보우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근처에는 농부로 보이는 자가 몇 명. 등짐장수가 한명.

벽쪽에는 약재상. 약초꾼이기라도 한 것일까. 쓴 냄새나는 보따리를 끌어안고 있는 젊은 여인이 기대듯 옆으로 앉아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가장 상석. 이 쓰러져가는 오두막의 주인일까? 아니. 그 것은 아닐 것이다. 연령은 쉰이나 예순 줄. 정갈한 차림새로 보아 나름대로 이름 깨나 알린 상점의 주인 쯤 될 터이다. 짐작컨대 옷차림을 보아하니 그는 에도 사람이다. 이런 외진 곳에 오두막을 사 두었을 리는 없다.

그리곤 이 사내. 도저히 정체가 무엇일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여행차림이기는 하나 무심한 행동거지가 일반 백성으로는 보이지 않고, 손이나 체격을 봤을 때 장인의 부류도 아니다. 물론 무사도 아닐 것이다. 갑자기 나타난 고보우의 모습을 보고서도 동요하는 기척하나 없이 마치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일어났다.

기이하군.’

가장 상석에 가만히 누워있는 그 노인은 마치 죽은 것처럼 조용히 있었다. 노쇠해 바짝 말라버리고 여윈 작은 체구의 사내다. 고보우는 눈을 돌렸다. 더 이상 노인을 보고싶지 않다. 그는 이방인이다. 이 행렬에 껴서 안되는 이방인. 그런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양할 것 없소. 애시당초 주인도 없는 곳이고.”

그 사내는 훤히 내려다보는 듯한 강렬한 시선으로 고보우를 응시하며, 한편으로는 또 더 부드러운 어조로 그렇게 말해왔다. 이 기묘한 분위기. 마치 관측자나 이야기에 벗어나는 관찰자처럼 무시되는 저 노인에 대한 질문을 하려던 찰나. 그 사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끊는다.

저기. 누워있는 저 분은...”

자아. 자아. 짐부터 내리고. 앉아서 쉬십시다.”

아니....”

자아.자아. 자리는 내가 덥혀놓았으니까.”

고보우는 사내의 등쌀에 떠밀려 결국 자리에 앉고 말았다. 그 노인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아니 점점. 나도 그들처럼 그 노인의 모습이 안보이게 되는 것만 같았다. 노인은 일렁이는 불꽃에 사라지며 오두막에 녹아들었다. 삿갓에 눈이 녹아 내리며 얼굴을 타고 흐른다. 녹은 물이 눈에 들어가 눈을 깜빡거리며 삿갓을 벗는다. 고보우는 말했다.

그럼...그럼. 실례좀 지겠습니다.”

고보우는 따뜻한 화로에 몸을 맡겼다. 정신은 몽롱해지며 마치 눈처럼 녹아내린다.

-

악천후는 한밤에 이르러서도 진정될 기미가 없었다. 그저 어둡기만한 오두막집 안. 장작 타는 소리만이 잊을만하면 타닥타닥 들려와 고보우의 고막을 울렸다. 몸은 아직도 춥고 젖어있었다. 이 조그마한 화로로 몸이 마를리가 없지. 젖은 옷은 불쾌하게도 몸에 달라붙어 쩍. . 소리를 내었다.

이대로라면 어쩔 수 없이 여기서 하루를 보내야 하려나눈 속을 돌아 다니다가 얼어 죽는 것 보다는 낫다. 자리가 화기애애해진 것은 또 반각(1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 노인은 여전히 시체처럼 자리에 누워있었고 나머지 인물들이 화롯불 주위에 자리 잡고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고보우도 어느 샌가 자리에 앉아 이야기에 참여하고 있었다.

으음. 그러지 말고 우리 모두들 서로 아는 괴담이나 기담들을 이야기해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라고 누군가가 말을 꺼낸다. 누구였는지 확실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말을 꺼낸게 고보우이건. 약재상이건. 그 누군지 모를 사내이건 중요하지 않다.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무언가 잡담이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분위기 였음은 분명했던 것이다.

쏴아아아

폭설은 계속해서 내렸다.

 

 

 ..... 그렇다면.... 저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도 될까요. 저야. 산간 아래 마을에 묶인 듯이 살며 이래저래 산을 타서 밥벌이를 하니까요. 특별하게 무서운 이야기나 기이한 소문은 많이 모릅니다만...

? 제가 무엇으로 밥벌이를 하냐고요?

특별히 자랑할만큼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만.... 그저 미천한 심마니. 약재꾼이라고 생각해주셔요. 아아. 그래 혹시라도 몸이 으슬으슬 떨리기라도 하시는 분은 말씀하셔요. 오한이나 감기에 좋은 약초가 있으니까. 인연이기도하니 돈이고 받지 않을터이니까. 걱정하지는 마시고.

... 그래서.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말이죠. 제가 실제로 보고 들은 이야기니까. 손톱만한 거짓도 하나 없는, 아주 진실한 이야기니까요.

그래... 이래저래 한 십 수년 쯤 전의 일일까요.

제가 아직 젖내 나는 어린 계집애였을 때니까요. 한 열 살 쯤 되었으려나요.

저는 원래 저 마을 태생이 아니와요. 열 살 때 즈음에 이런 저런 일을 피해서 이 마을에 굴러들어오게 되었죠. 약초 캐는 기술은 이때 배워서 아직까지도 먹고살고 있기는 하다만.... 여하튼. 제가 어릴적 제가 살던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저는 부모 형제자매 없는 천애 고아였었는데 다 쓰러져가는 손바닥만 한 판잣집에서 살았어요. 하는 일이라곤 길거리 나가서 구걸이라던지 장작 때기. 물긷기 같은 일을 해서 하루하루 배 안 주리고 살아가고 있었지요.

저어. 그런데. 제가 살고 있던 마을에는 조금.... 이상한 언니가 살고 있었어요.

저도. 보기만하고 이야기를 나눈 적은 거의 없어서. 그런데. 정말이지. 인물이 고왔어요.

살결이 희면 일곱 가지 결점이 가려진다는 말도 있던데. 그 언니는. 굉장히. 굉장히 하얬어요. 피부도. 머리카락도 정말이지 하얬죠. 마치 저 밖에서 내리는 눈 처럼요. 막 음식을 먹으면 목구멍으로 넘어가면서 비춰 보일정도로 말이죠. 물론 과장이기는 하지만.

그 언니는 마치 일부러 사람을 피하기라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제는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것인지. 마을 외곽에 홀로 작은 모옥을 짓고 살고 있었어요. 조금.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마치 귀신이나 요괴가 아닐까할 정도로 이질적인 외모였긴 하지만 차가운 얼음 같은 그 모습과 왜인지 흘러나오는 그 고귀함. 마을 사내들은 그런 언니들을 보고 얼굴을 붉히기도 하더라구요. ... 뭐라고 해야 할지. 아가씨에게만 있는 광채 같은 것이 있다고나 할까.

그 언니는 가아끔씩 마을에 내려와서 필요한 것들을 사가곤 했는데 어디서 그런 돈이 나오는 것인지. 손가락만한 금덩이나 보석들을 가져왔었지요. 그래서 저는 이런 저런 일로 휴양차 내려온 세도가의 아가씨정도가 아닐까생각했어요.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그런 아가씨가 수행인 하나없이 그런 좁은 집에 있었을까 싶지만.

뭐어. 그렇다고 해서 막 냉혈한이라던지 온정이 없다는건 아니여요. 저어. 제가 예전에 예븐 꽃이 있어서. 무슨 용기였었는지 모르겠지만 절벽에 있는 꽃을 꺾으려고 한 적이 있었어요. 네에? 위험하지 않았냐고요? 뭐어. 위험하기야 굉장히 위험하죠. 삐끗하면 그대로 이 세상과는 안녕. 염라대왕님 안녕하세요이니까. 어린 저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절벽을. 돌을 밟으며. 딱 붙어 엉금엉금 걸어가 꽃을 뽑았어요. 이제 돌아오기만 하면 되는 길.

그러나 그러던 도중 삐끗.

저는 그대로 미끄러져서 저 아래로. 절벽 아래로 떨어졌어요.

화창한 여름날이었죠. 옆으로는 짙푸른 풀잎새들이 흔들리고 저어기 쪽물을 뿌려놓은 듯한 하늘에 새하얀 구름이 두둥실흘러가고 있었죠. 무섭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 으음. 그래 꿈이라도 꾸고 있는 듯이 저는 아무런 생각 없이 아래로 아래로.

그리고는 그때. 누군가가 저를 끌어안았어요. 눈부신 태양빛에 누군지 볼 순 없었지만. 그 품은 굉장히 포근했어요. 엄마가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저는 그 사람을 꽈악. 끌어안았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어요. 네에. 맞아요. 저를 구해주신 분은 바로 그 새하얀 언니였죠.

눈을 떴을 때는 푹신푹신한 이불 아래였어요.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중간에. 따뜻한 화로가 있었고 맛있는 냄새가 났어요. 얼마 있지 않아 언니는 돌아왔고 위험하게 그런 곳에서 놀지 말라면서. 그 꽃을. 그 꽃을 주셨어요. 제가 꽈악 쥐어서 망가진게 아닌. 싱그러운. 방금 뽑은 싱싱한 꽃이요. 뭐어. 어쨌던지간에 그렇게 친절한 사람이었죠. 그 언니는.

? 어떻게 안다치고 멀쩡할 수 있었느냐고요? 그거야 그 언니가 저를 감싸주셨으니 그런거겠죠? 그 언니는요? 흐음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그 언니는 평소처럼 아무렇지도 않았으니까. 아파하는 기색도. 다친 기색도 전혀 없었거든요.

뭐어어쨌든. 시간은 흐르고 가을이 되었죠. 기억하시는 분이 있으실지도 모르겠는데. 십여년쯤 전에 굉장한... 맞아요. 가뭄이 있었죠. 다른 지방은 괜찮았다던데 유독 저희 지방만 비가 내리지 않아서. 굉장한 기근이 일었거든요. 자기 먹고살기 힘들정도로 가난한 곳이라 쌓아놓은 곡물 따위가 있을 리가 없죠. 먹을 만한 것들은 진작에 떨어졌고. 겨울에 되었어요.

겨울이 되어서 그 언니는 또다시 마을에 내려왔어요. 마을 사람들은 가서 부디 먹을 것을 조금이라도 나눠달라고 빌었죠. 이런 기근 속에서 언니는 아무렇지도 않았거든요. 평소와 같은 모습 그대로였죠. 저 또한 저 멀리서 주린 배를 부여잡으며 언니를 바라보고 있었죠. 그러나 언니는. 말했어요. ‘저도 음식은 없어요라고.

저어. 그런게 있지요. 분명 사실도 아닐 터인데 막 이상한 헛소문이 퍼지고. 소문이 부풀려지고. 사람에 사람을 타서 결국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는 거 말이여요. 그으. 삼인성호라고 하던가요. 없는 호랑이도 세 명이서 거짓말을 하면 생기게 된다고.

. 어린 아이를 홀려서 잡아먹는다느니. 사실은 사람이 아닌 요괴나 귀신이라느니. 그 하얀 머리칼은 사람의 뼈를 갈아서 바른 것이라느니... 음식을 훔쳐서 산처럼 쌓아 놨다던지. 하는 말 말이여요. 저야... 당연히 그 언니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저 같이 어린 애가 뭐라 말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거든요. 평소에 마을 남자들이. 그 언니를 보고 얼굴을 붉힌다던지 일이 많았기 때문에 다른 마을의 여자들이 그 언니가 꼴 보기 싫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을 내지르며 마구마구 언니를 욕했거든요.

그러던 도중에. 그 오늘처럼 눈이 내리던 날이었어요. 먹을 것이 떨어진 마을 사람들은 결국. 이런 저런 무기들을... 무기라고는 해봤자 단순 농기구들 뿐 이지만요. 빼들고서는 그 언니의 집으로 향했어요. 저는 무서워서. 가만히 집 안에 들어가서 숨어 있었고요.

아아. 잠깐만요. 괜찮으세요? 고보우씨라고 하셨던가요? 표정이 안좋으신데...

으음.... 뭐어. 이야기를 다시 해보자면 말이죠. 시간이 흘러도 마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어요. 어떻게 인지. 저는 달달달 떨면서 언니의 집으로 향했죠. 기억은 잘 나지 않아요. 아무래도 옛날 이야기니까요. 저어기. 그래서. 언니의 집에 도착한 저는. 그 광경에. 아니지... 그 처참한 주위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어요.

눈은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고 땅에는 마을사람들이 쓰러져있었죠.

천천히.

구름이 서쪽으로 흘렀어요.

저는. 퍼뜩 고래를 들었어요.

그랬더니 언니가. 돌처럼 굳어서는. 서있지 뭐에요.

엄청난 표정을 하고서는. 정말. 석불이라도 된 듯이 움직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전. 꼼짝달싹도 하지않는 언니의 공허한 시선 끝을 따라가봈지요. 그랬더니...

그랬더니 말이에요.

시뻘건 덩어리가요.

거기에는 대체 무엇인지 모를 피반죽이. 고깃덩어리들이 마구 마구 놓여져 있었어요. 그 기분나쁜 냄새와 색깔은 닭이라던지 돼지라던지.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분명히 그건. 사람의 것이었거든요. 저는 토악질을 했어요. 고개를 숙이고 바로 속을 게웠죠. 먹은 것이 없어서인지. 목구멍만 따갑고. 나오는 것은 거의 없었지만.

토악질에. 흘린 눈물에. 꼴은 분명 말도 아니었을 거에요. 고개를 들자. 언니가. 제 앞에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죠. 마치 호랑이 같은 눈으로. 유리알 같은 눈으로요. 저는 그때 알아차렸어요. 저기 마을 사람들을 죽인건. 그 누구도 아닌. 분명히 이 언니라고. 이 언니는. 사람이 아니라고.

굉장히 무서웠어요. 아니 보통의 무섭다라고 하는 기분과는 완전히 달라요.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고 말았달까. 그랬던 거에요. 이상한 마력에 사로잡힌 것처럼. 꼼짝달싹 못하게 되었죠.

새하얀 머리카락. 새하얀 피부. 새하얀 의복에 누구의 피인지 모를 붉은 피가 한가득. 언니 뒤에 있는 눈밭. 그 위의 하늘이 싸악 다 붉은 빛으로 물들었어요. 그러니까... 꽤나. 오랜시간을 그렇게 있었던 거겠지요.

솔개인지 뭐인지가 울었을거에요.

제정신이 들어 쳐다보니 언니는 없었어요. 홀연히. 연기처럼 사라져버렸죠. 처음부터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시간을 훌쩍 지나가 있었고, 흔적도. 참상도. 모조리. 그대로 남아있었죠.

.

... 잠깐.”

.. 대체 무슨 일이시온지?”

방금. 그 이야기... 정말. 정말이지 그걸로 끝입니까?”

예에... 저도 어릴 때였으니까요. 전부다 정확히 기억나는 건 또 아니고.”

“....그런가.”

고보우는 말했다. 방금 전의 그 이야기. 분명히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이야기다. 서술자의 방향은 달랐지만. 분명히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다. 어디서였지? 아니. 그 보다도 누구에게 들었던거지? 머리가 아프다. 고보우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그 약초꾼을 바라보았다.

혹시... 어디 아프신것인지.”

왜인지 그녀의 모습은 흐릿하다. 그녀의 이야기는 무섭지 않았지만 어딘가 기묘했다. 그리고 왜인지- 어딘가 의도된 것처럼. 이야기가 곡해되어있다. 중간부터서 이야기는 아귀가 맞지 않아 붕 떠버렸다. 마치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덮어버리는 것처럼- 이야기의 아귀가 들어맞지 않았다.

고보우는 눈을 부라리며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머릿속에는 자꾸만 이상한 형상이. 누군가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그 하얀 그림자. 이야기를 해오는 그 소녀의 모습. 그 이름이. 자꾸 머릿속에서 기억 날듯말 듯 점멸한다. 잠깐. 아니. 그 전에.

“....저기. 혹시나해서 하는 말인데. 혹시 예전에 저와 어디선가 만나신 적이 있습니까?”

약초꾼은 웃었다.

. 그랬었던가. 잘 모르겠는걸요. 그건 그렇고. . 이야기에 어딘가 이상한 부분이라도 있는가요?”

아니.. 그건.”

고보우는 그녀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당황한 듯 얼굴을 찌푸리고 말을 흐렸다.

고보우는 손으로 이마를 쓸었다.

눈은 아니다. 땀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더울 리는 없다. 그럼 식은 땀인가. 진땀인가.

왜그러실까? 그런 표정을 짓다니. 내 이야기에 어딘가 불편한 점이라도 있으신지? 뭐어.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겠지만. . 내 얼굴에 뭔가 묻은 것이라도 있나요?”

그때까지 약초꾼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던 고보우는 그 말을 듣고서 허둥지둥 고개를 내렸다. 고보우. 이 보부상. 딱히 눈에 띄는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평범한 생김새의 소유자로 행동거지도 음울하고 굼뜨다.

어라. 눈발이 잦아들었군.” 창가에 다가섰던 행상 사내가 말했다.

그 도대체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가 고개를 든다.

예에. 조금 잦아든 것 같군요. 그래봐야 새발의 피이지요. 이대로 멎을 것 같지도 않으니. 여기서 밤을 세우는게 나을 듯 싶습니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사내가 이상하다는 듯이 창 밖을 바라본다.

뭔가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다.

고보우가 몸을 움찔 떨었다.

사내는 행상을 밀어 젖히고 밖을 보려했다.

무슨일이십니까?” 초로의 농부아마도 이지만로 보이는 사내가 말을 던졌다.

사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다고 중얼거리더니. 다시 반대쪽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뭔가... 누구를 부르기라도 하는듯한...”이라고 말했다.

바람소리에 섞여서는... 싸늘한... 아니지. 애틋한....이 어울릴지도 모르겠군. 목소리였는데.”

목소리...”

고보우는 경련하듯 말을 토했다.

그런소리가 들렸습니까?”

행상은 손을 귀에 가져갔다.

고보우에게는 들켰다.

아니, 들린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 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사내는. “분명히 들렸다.”라고 단언했다.

그러자 농부도 행상-등짐장수까지 그런 목소리다. 틀림없이 누군가의 말이다.”라고 말해오기 시작했다. 사내는 웃음 지었다. 고보우는 생각했다.

그가. 사내가 들었다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몇 사람에게나 들렸을까. 눈줄기가 잦아들었다지만 그친 것은 아니다. 바람은 여전히 세차고 개울물 소리도 들려온다. 갑자기 사람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올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설혹. 그 자들에게 들렸다고 해도. 고보우와 마찬가지로 그런 기분이 들었을 뿐이리라. 부화뇌동이라고 해야할지. 뭐라고 해야할지. 참으로 우스운 상황다. 그 사내는 그러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별스럽게도 실로 기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대체 뭘까? 이런 산속. 이런 시간에. 그것도 눈이 내리시는 가운데. 밖을 돌아다니는 얼간이가 있을 리 없을터인데. 환청이라 치기에는 모두가 들었고. 그렇지 않습니까?”

고보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참. 그 소리는. 당연히 유키온나. .”

약재상은 그렇게 말했다.

유키온나? 설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유키온나는 요괴여요. 대체 이런 산속에. 눈내리는 날 누가 돌아다니겠어요? 내일은 저어. 눈에 흘리지 않도록 애나 쓰라고.”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그 사내는 퉁명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행상인이 대답했다.

유키온나. 설녀라고 하는 것은 새하얀 여자 귀신. 요괴를 말하는 것이지요. 새하얀 눈속에서 사람의 이름을 애틋하게 부르며. 그 사람을 홀려서. 차가움 속에서. 홀로 지내는 그녀가 같이 살기위해. 사람을 데려간다고하는 요괴입니다. 뭐어. 눈이 많이 오는 지방이라면 어디에서나 쉽게볼 수 있는 미신이죠.”

예에? 미신이라니요. 설녀라는 건 정말로 있다니까.”

오호라. 그러고보니 아까전의 그 이야기. 그 여인의 모습이 설녀와 비슷하지 않은가.”

그건 아닙니다!”

고보우가 소리쳤다. 갑작스런 그의 외침에. 일순간 장내는 조용해졌다. 모두-누워있는 노인만 빼고-가 놀란듯한 표정으로 고보우의 얼굴을 바라보고있었다. 그리고는 수초. 말을 먼저 꺼낸 것은 고보우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갑자기..”

아닐세. 그럴 수도 있지.”

그 사내가 대답한다. 또다시 분위기는 얼어붙는다. 고보우는 아무런 말도 없이 일렁이는 화롯불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타닥타닥. 장작이 타오른다. 불똥이 튀며 시선을 어지럽힌다. 고보우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이제는 대체 무엇이 사실이고. 거짓인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저어. 열이 있으신 것 같은데.”

차가운 손이 이마에 닿는다. 고보우는 그 차가움에 정신을 차린다. 정신을 차린 고보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어... 죄송합니다만. 저는.. 먼저 자리에 눕겠습니다.”

그러십시오. 몸도 안좋아 보이는데. 저희도 조금만 더 이야기하다가. 자러가겠습니다.”

고보우는 그 노인의 근처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누웠다. 몸을 덮고잘 거적때기와 머리를 누일 옷가지는 있다. 자리에 누워서 고보우는. 아까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들의 이야기가 계속된다. 수명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속삭인다.

그저. 갑작스레 끌어 올랐을 뿐이다. 고보우는 기억의 편린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저 자들. 저자들이 나누고 있는 이야기들. 분명히 직접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이거나 이 기억 속에 있는. 직접 겪은 체험들이다. 의도적으로 삭제된 등장인물 와 그 자리를 메꾸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인물들. 아니면 이야기 뼈대자체만 남겨두고 아예 통째로 모든 것을 바꾸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들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마치 자신들이 겪은 것처럼 자세하고 상세하다.

그래서. 도망쳐나온 두 남녀는...”

사내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들려온다. 침낭으로 귀를 막아도 그 소리는 직접 영혼에 이야기하는 것처럼 또렷히 들려온다. 다이쇼의 손을 피해서 사랑의 도피를 한 남녀. 신비스러운 소녀와 함께 도망치는 한 남자. 옛날 이야기에서나 나올법한 우스운 이야기다 하지만.

두근. 두근.

계속해서 보이는 그 환영이 고보우를 미치게 만들었다. 갈기 갈기 찣어진 기억들이 헝겊 조각들처럼 그를 덮는다. 눈 속에서도 보았던 그 환영이 계속해서 고보우를 부르고 있었다. 고보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소녀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는다. 고보우는 소녀의 모습을 노려보았다.

[유키온나라고 하는 것은. 눈의 요괴로. 사람의 이름을 불러 홀린다고하는...]

아까전의 약재상의 말이 기억났다. 소녀는 나를 부른다. 아니 나를 부르는 것인가. 고보우를 바라보며 소녀는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사내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내리는 비를 피해. 둘은 산속의 작은 오두막으로 피했고.”

그리고는 오두막 안에서 또다른 이들을 만났지.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 오래된 도피 생활이 지쳤던 것일까. 아니면. 아까전의 말다툼이 화가 되었던 것일까. 남자는. 결국. 그 안의 모두를.

그 손으로. 죽여버리고 말았지요

그 손으로 죽여버리고 말았지.“

벌떡.

고보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몸을 틀어 사람들을. 방 안을 바라보았다. 고보우의 두 눈은. 흔들리지 않고서 방 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두 눈은 불처럼 일렁거린다. 고보우가 잘 들리지도 않는 의미불명의 말을 중얼대면서 젖은 옷을 휘두르던 통에 그러지 않아도 가물거리던 촛불이 꺼져 오두막 안은 캄캄해지고말았다.

빌어먹을! 뭐냐! 대체 네놈들의 정체가 무어냐 말이다!”

그런 말을 외치고 있었던 듯 한데, 물론 무슨 소리인지 정확히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어둠 속에서 짐작할 수 없는 촉촉한 덩어리가 움직이고 있었으므로 그것이 생리저그로 무서웠다. 그야말로 칠흑의 어둠 자체가 흉포한 기운을 뿌리며 출렁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고보우는 어둠 속을 노려보고 있었다. 대기가 꿀렁꿀렁 거리며 기분나쁠 정도로 축축하다. 설녀. 설녀란 바로 이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나를 홀리기 위해. 나를 빠뜨리기 위해. 저런 말들을 절대로 알 리가 없는 저 이야기를. 나와 그녀만이 아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시끄럽다! 닥쳐라!” 고보우는 소리쳤다. 어두움 속에서도 그녀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귀신처럼 새하얀 그녀는 빛을 내며 어둠 속에 서있다.

으아아아아아!!!!”

고보우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날뛰기 시작했다. 엉엉 통곡하듯 소리를 지르고 벽을 치고 바닥을 차며 날뛰더니 이내 곧 잠잠해졌다. 사람들도. 환영도. 그의 손이 닿자 마치 연기처럼 흐릿해지더니만 다시 그 모습이 뚜렷해진다.

뭐가!!!! 뭐가 죽지 않는다는 것이냐!!!”

휘익. 휘익.

이렇게.... 귀신이 되어서!!! 나를!!! 평생동안!!!”

콰아- 콰아-

쏴아아- 강 소리가 들린다.

쑤와아아- 눈이 내린다. 산이. 산이 울고 있다.

고보우.

고보...

잇시키.

모코우!”

엔카이는 그렇게 외친 후 으아아. 울부짖더니 문을 박찼다. 큰 소리에 이어 차단하는 문을 잃었기 때문에 쏴아아아. 하는 외부의 소리가 더욱 크게 밀려들었다. 고보우의 절규가. 세차게 내리는 눈소리인지. 개울소리인지에 섞여서 들렸다. 그것은 협곡에 울려 퍼지는 것인지. 아니면 기억 속에 반복 되는 것인지 짧게 간혈적으로 울려퍼진다.

.

콰아.

콰아아.

그들의 환영이. 약재상과. 사내와. 농부와. 행상의 환영이 그를 덮친다. 그는 공포심에 질려 비명을 지른다. 소리는 나지 않는다. 그들의 손이 그의 얼굴을 덮었다. 그는 손을 뻗었다. 저 멀리.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답은. 없었다.

 

 

-

 

 

쏴아아아-

눈이 들어와 그의 얼굴에 내리 앉는다. 그는 잠에서 깬다. 불은 꺼져있었다. 찬바람이 들어와 몸이 얼어버릴 것만 같다. 온몸은 식은땀으로 가득하다.

꿈인가.

그는 중얼거렸다. 그때의 꿈. 그때의 일. 모든 것이. 아직까지도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대체 왜였을까.

자신은 왜. 그토록 좋아하던 그녀와. 아무런 죄도 없는 그 사람들을 그렇게. 잔인하게 죽여버린 것일까. 말다툼을 했었기에. 기분이 나빴던 그 날. 비가 세차게 내리는 그날. 자신은 이 오두막에 왔고. 그 사람들을 만났다.

약재상. 그 사내. 농부. 행상. 그리고 고보우. 그 고보우는 자신이다.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그는 고보우가 아닌 잇시키라는 이름의 청년이었고 그의 옆에는 백발의 사랑하는 그녀가 있었다. 그들은 산을 넘다가 비를 피하기 위해 오두막을 찾았다.

벌써 몇 년이다.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씻지도 못한채 도망다닌지가 수 년. 더 이상 이 땅에서 도망칠 곳은 없다. 더 북쪽으로 가는 수 뿐이다. 다이쇼의 부하들이. 그들을 추격하고 있다. 그녀를 잡기 위해서. 나를 죽이기 위해서.

힘들고 지쳐버렸다. 그녀는 왜인지. 언제나 아무렇지도 않았다. 음식을 먹지 않아도. 잠을 자지 않아도. 혹시라도 다치기라도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연유인지 그녀와 말다툼을 했다. 서로에게 감정이 상했기에. 아무런 말없이. 그대로. 오두막에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속삭였다. 여성의 목소리였다.

파멸이다. 그녀는 파멸일 뿐이다. 결국 너는 파멸할 것이다. 그녀는 그대로. 아무렇지도 않은 채로 남을 것이고. 너만이 쓰러질 뿐이다.

대체 누구야.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도 없다. 모두들 자고 있을 뿐이었다.

자아. 내 말을 듣고. 그녀와 이 사람들을 죽여라.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는 부귀를 주마. 나를 대신해서. 그녀에게. 자아. 그러니까.

어느샌가. 그의 손에는. 칼이 들려있었다. 그 목소리의 정체가 누구인지 대체 자신이 왜 그랬었던 것인지는 모른다. 그저 귀신에라도 홀린 듯. 그래 여우에게라도 홀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대로 자신은. 그들을.

끄으으윽

그는 소리 내어 울었다. 피부가 거칠고 주름졌다. 그대로 미친 듯이 산을 내려 도망친지도 벌써 수십 년이 흘렀다. 어떻게인지. 정말로 그 목소리의 주인이 그에게 무언가를 준 것인지. 수년이 되지 않아 그는 에도에 이름 있는 가게를 얻을 수 있었고 아름다운 부인을 만나 똑똑한 아들과 귀여운 딸아이도 낳았다.

마치 과거의 일은 전부. 그가 꾸고 있던 꿈- 꿈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 그의 가게에서 일하는 고용살이들의 입을 통해.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 새하얀. 여자가. 있다고. 그리고 그는 꿈에서 깨어났다. 그때의 일들이 참상이. 자신이 저지른 죄가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는 이렇게 지금 여기에.

예전의 그 곳으로.

문은... 대체 누가 연 것인지....”

잇시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가 아프다. 밖에는 여전히 새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문을 닫으려 문 쪽으로 걸어가던 그는. 동상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잇시키는 신발도 신지 않은채로 눈밭을 향해 달렸다.

쏴아아-

콰아아-

저 멀리.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새하얀. 그녀의 모습. 사십년 전과 그대로다. 십대 후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그녀가. 저 멀리. 눈 속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숨을 토했다.

아아.

산을 구르며. 계속해서 넘어지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몰아붙여가며 그는 걸어갔다.

얼마지않아 그는 자리에 쓰러졌다. 차가운 눈이 온몸을 통해 느껴졌다. 그리고 소녀는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도 소녀를 향해 다가갔다. 나는 간신히 소녀에게로 손을 뻗는다. 소녀는 미소지으며 내게로 손을 뻗는다. 어둠은 회색빛으로 흩어지다가 점점 밝아져만 간다. 모든 것은 끝난 것이다. 이제는 어떻게 되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녀가 자신을 용서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아무런 상관 없다. 지나가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의식은 점점 어두워져만 갔다. 나는 지금 새하얀 대지 위에 누워있었다. 소녀는 나를 끌어안는다. 따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