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of All Fears - 장기짝
1.츠쿠모가미
해가 지고 있다. 완전히 지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다. 나는 여유롭게 운하를 걷는다. 운하를 다니는 선박은 이제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운하를 걷기엔 퍽 좋은 시간이다. 어두워지기 전까진 요괴가 갑자기 나타나거나 하는 일은 없을 테지.
"그래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뭔가 이상하다. 운하 옆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버드나무들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그 나무 중 하나에 딱 봐도 이상한 우산이 숨어있다. 그냥 놓여있는 게 절대 아니다. 분명히 숨어있다. 행인의 눈에 보이지 않게 일부러 몸통을 나무 뒤에 기대놓고 슬쩍슬쩍 움직인다. 정작 너무 어설퍼서 내 눈에 다 보인다. 혹시 꼬마가 친구와 무슨 장난을 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무시하고 가던 길을 간다. 그리고 내가 그 앞을 지나는 순간.
"원~통~하~다~."
결국 버드나무에서 뛰쳐나와 내 앞을 가로막는다. 생각보다 날렵한 움직임에는 살짝 놀랐지만 무섭지는 않다. 가까이서 보니 이상한 혓바닥이 나 있고 군데군데 해져있다. 오히려 불쌍한 생각이 다 드는군.
"음... 혹시 겁주는 건가?"
"당연하지!"
원통하다고 했으면 이런 질문에 답하지 말고 계속 원통하다고 우겨야지. 너무 어설퍼서 오히려 무서울 지경이다.
"오, 무섭다."
"건성으로 무서운 척하지 마!"
우산 뒤편에서 소녀가 씩씩거리면서 나타난다. 서로 다른 색을 담은 눈동자. 아, 이 녀석 분명...
"츠쿠모가미구만."
"그래! 츠쿠모가미! 공포의 상징! 그런데 왜 안 무서워하는 거야?!"
츠쿠모가미는 딱히 공포의 상징이 아니다만.
"그렇게 말해도..."
나는 주위를 한 번 슬쩍 둘러본다.
"진짜 나를 겁주려고 한 거야?"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가 있어?!"
"그럼 나한테 들키면 안 되지. 저쪽에서부터 너 다 보였다고."
나는 친절하게 설명한다. 츠쿠모가미는 이해가 가질 않는단 표정이다.
"그...그래도! 우산이 갑자기 움직이면 놀라야 하는 거 아냐?! 게다가 원통하다는 대사까지 했잖아! 인간 소녀라면 당연히 꺄아아아악! 소리치면서 도망가야 정상 아니야?!"
"아하."
나는 그제야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깨닫는다. 사실 저쪽에서부터 움직이는 것까지 다 보였다고 지적하고 싶다. 원통하다는 대사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아, 그리고 밤에 하라는 조언도. 하지만 일단 오해부터 풀어야겠지.
"어디 보자..."
나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본다. 운하는 여전히 텅텅 비어있다. 배도 보이지 않고, 인적도 드물다. 그나마 아직 운하 근처에 남아있는 인간들도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해가 지기 전까진 들어가야 하니까. 적어도 여기를 주시하는 인간은 없다. 그렇게까지 난리를 쳤는데 주목도 못 받다니 이 츠쿠모가미도 불쌍하군.
"잘 봐."
나는 양손으로 머리를 붙잡았다. 츠쿠모가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나는 양팔을 쭉 뻗는다. 몸통에 붙어 있던 내 얼굴이 쓱 올라간다. 츠쿠모가미를 보기 위해 시선을 내린다. 동시에 츠쿠모가미의 짝짝이 눈동자가 점점 위로 향한다.
"어...?"
츠쿠모가미는 다시 눈을 내려 내 몸통을 확인한다. 그리고 눈을 올려 머리를 확인한다. 그다음엔 얼굴과 몸통 사이의 빈 공간을 확인한다. 들고 있는 우산으로 그 공간을 콕콕 찔러본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목이...목이 없어!"
요괴인 네가 놀라면 어쩌냐고.
그래, 내 이름은 세키반키. 운하에서 인간을 겁주는 로쿠로쿠비다. 듀라한이라고 해도 좋다. 그냥 머리로 공포를 주는 존재로 불러주면 족하다.
그나저나 내 눈앞의 우산 츠쿠모가미는 로쿠로쿠비를 처음 본 모양이다. 한심한 녀석 같으니.
***
"요즘 인간들은 요괴 무서운 줄 모른다니까!"
운하에서 날 겁주려 한 츠쿠모가미, 타타라 코가사가 쉴 새 없이 주절댄다. 해가 지고 난 뒤에도 나를 계속 따라오더니 갑자기 친한 척 별별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다. 나는 무시로 일관하는데도 지칠 줄을 모른다. 혹시 익숙한 건가?
"다들 너무 심각하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어! 인간들은 점점 요괴를 무서워하질 않고 있는데! 요괴의 공포도 이젠 옛말이야!"
"그냥 네가 겁을 못 주는 거 같은데."
"아니야!"
"암만 봐도 그런 거 같다만..."
슬쩍 뒤돌아보자 코가사의 그림자가 부들부들 떨고 있다. 어둠 속에서 표정은 안 보이지만 분명 분해서 눈에 눈물을 머금고 있겠지. 내가 얼굴을 들어 올렸을 때도 화들짝 놀라서 울먹이더구먼. 아무래도 울보인 모양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대체 왜 날 따라오는데?"
"라이벌이니까."
"뭐?"
"라이벌이라고! 세키반키 너도 인간마을에서 사람들을 겁주는 거지? 그럼 내 라이벌이야!"
살짝 기분이 나쁘다. 너 같은 거랑 경쟁하고 싶진 않다고. 서로 이름 정도만 아는 사이로 남으면 안 될까?
"라이벌인 거랑 졸졸 따라오는 건 대체 무슨 상관이냐?"
"라이벌을 분석하는 중이야!"
"아, 그러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코가사도 졸졸 따라온다. 이렇게 어두운 데 용케도 잘 따라오는군. 내 붉은 망토 덕인가?
"근데 여긴 죽림 아냐? 대체 여긴 왜 온 거야?"
"라이벌한테 대답을 기대하냐?"
"윽... 그 정도는 대답할 수 있잖아."
"친구 만나러 왔다."
"친구?"
그 순간 늑대 울음소리가 무성한 대나무 사이로 들려온다. 보름달이 떴다면 좀 더 그럴싸했겠지만 울음소리만으로도 분위기는 충분히 조성된다.
"그래. 네가 워낙 시끄럽게 떠들어댄 통에 아까부터 우릴 보고 있었을걸. 넌 처음 보는 녀석이니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진 않고 지켜보고 있겠지."
"...왜?"
코가사는 바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래 봐야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테지.
"바보야, 널 분석하는 거야. 라이벌을 분석한답시고 대놓고 따라붙는 건 너밖에 없을 거다."
"힉! 그... 그래서 어떡하려고?"
"어떡하냐고? 딱 봐서 네가 강한 녀석이면 그냥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겠지. 약한 녀석이라고 판단하면..."
"판단하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코가사를 바라본다. 물론 여전히 윤곽 정도만 보일 뿐이지만.
"야! 그렇게 판단하면 어쩐다는 거야?!"
"잡아먹을 거다, 어흥!"
코가사 바로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터진다.
"꺅! 자... 잡아먹힌다!"
"그래! 잡아먹는다! 한 입으로 충분하겠군!"
코가사는 바로 나한테 달려오다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상태로 미친 듯이 팔을 허우적대더니 내 발목을 겨우 붙잡고 나한테 기어온다.
"사... 살려줘! 살려줘! 잡아먹힌다!"
"라이벌한테 살려달라고 하냐?"
"그... 그래도! 살려줘!"
내 다리를 꼭 붙잡은 채 벌벌 떨고 있다. 다리가 촉촉한 게 또 울음보가 터진 모양이다. 이젠 네가 정말 요괴인지 의심스럽다...
"그래서 이 우산은 뭐야?"
코가사를 겁준 늑대인간, 이마이즈미 카게로가 뒤늦게 묻는다.
"츠쿠모가미란다. 거짓말 같다만..."
"츠쿠모가미야! 공포의 상징!"
"네 꼴을 보고 나서 그런 말을 해라."
아직도 내 다리에 달라붙은 주제에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구나.
"하하. 재밌는 녀석이네."
카게로는 배꼽을 잡고 깔깔 웃는다. 확실히 화려한 반응이긴 했다. 이렇게 무서워하면 겁주는 입장에서도 뿌듯하긴 하지.
"그래서 왜 여기까지 데려온 거야?"
"내가 따라온 거야! 라이벌이니까!"
"그렇단다."
"얘 진짜 재밌다."
카게로가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통에 이빨이 달빛에 반사돼서 반짝였다. 내 다리에 거머리처럼 꽉 매달린 한심한 츠쿠모가미는 지레 겁을 먹고 더 꽉 매달린다.
"야, 짜증 나니까 그만 떨어져."
"힉! 살려주세요! 잡아먹혀요!"
"아 진짜..."
"어흥!"
"꺅!"
***
"으악! 살려줘!"
코가사의 바보 같은 비명이 등 뒤에서 또 들린다. 나는 무시하고 가던 길을 가지만 카게로는 바로 코가사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몸을 돌린다. 떼어놓고 갈 좋은 기회였는데 아쉽군. 하여간 카게로는 너무 착해.
"코가사? 어딨어? 안 보여!"
"카게로! 여기! 여기! 구멍에 빠졌어!"
벌써 몇 번째냐. 미혹의 죽림에는 여기저기 토끼나 요정들이 장난으로 파놓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말은 그래도 조금만 조심하면 피할 수 있다. 대나무 숲에 갑자기 공터가 등장하면 당연히 의심이 가지. 그런데 이 바보는 공터가 보일 때마다 그쪽으로 쪼르르 달려가서 이 모양이다.
"괜찮아?"
카게로가 벌써 찾아낸 모양이다. 하긴 코가 좋으니 청각과 함께 활용하면 어둠 속에서도 별로 어렵지 않게 상대방을 찾아낼 수 있겠지.
"응! 근데..."
"이건..."
카게로가 함정으로 다가오자 코가사의 목소리는 다시 밝아졌다. 여러 방면으로 정말 단순한 녀석. 반면 카게로의 목소리는 제법 심각하다.
"세키반키! 이거 봐! 함정에 대나무가 자라고 있어!"
"아니, 코가사... 이건 대나무가 자라는 게 아니라..."
나도 뒤늦게 함정에 가보니 코가사의 다리 그림자 사이로 날카로운 기둥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너무 날카로운 나머지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것 같다.
"죽창이잖아. 바보야. 잎도 없이 자라는 대나무가 어딨어? 게다가 끝은 딱 봐도 뾰족하구먼."
"죽창...? 그런 게 왜 함정에...?"
"왜겠냐."
당연히 이딴 함정에 빠지는 바보를 죽이려고 그랬겠지.
"그래도 딱 하나만 꽂혀 있어서 다행이네."
카게로는 코가사를 끌어올리면서 말했다.
"토끼들이 원래 이렇게 살벌한 함정을 파던가?"
카게로가 의문을 품는다. 코가사는 남들 속도 모르고 그냥 자기 옷을 털고 있다.
"저번에 무슨 요력이 흘러들어왔을 때 기억나? 그때 토끼들도 이상한 쪽으로 신을 낸 거 같은데."
"아하. 부끄러운 기억이네."
내 추측에 카게로는 뺨을 살짝 긁적인다. 그때 나나 카게로나 괜히 신이 나서 날뛰다가 인간들에게 신나게 얻어맞은 기억이 있다. 이건 코가사를 한심하게 볼 처지가 못 되는군.
"그 상태가 계속됐으면 죽창 하나로 안 끝났겠지."
온몸을 죽창이 관통한 코가사를 떠올렸다. 잔인한 광경이지만 어쩐지 통쾌하다.
"음, 토끼들은 이런 식으로 공포를 주는군!"
지금 공포가 문제냐. 너 죽을 뻔 했다고.
우리는 모두 만신창이가 된 채 미혹의 죽림을 빠져나왔다. 정확히는 코가사의 옷이 만신창이가 됐다. 카게로와 나는 정신건강 쪽이. 그 뒤로도 코가사는 몇 번이나 함정에 빠져서 결국 우리 둘이 그 바보를 양쪽에서 붙잡은 채로 끌고 와야 했다. 코가사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죽림에서 나와 안개의 호수에 도착했을 텐데.
"와! 벌써 빠져나왔어! 이제 어디 가는 거야?"
"아, 저 녀석 죽여버릴 거야 진짜..."
"참아, 참아."
카게로는 내 등을 툭툭 건드리면서 위로한다.
"죽림은 대단하구나! 존재 자체도, 그 안에 사는 요괴들도 공포 그 자체야!"
"고마워."
카게로는 정말 성격이 좋구나. 물론 나는 아니다.
"네가 겁쟁이인 거야."
"아냐!"
"맞아."
"예전에 비하면 인간들이 덜 무서워하는 건 사실이니까 뭐."
카게로는 우리 둘을 말리면서 말했다. 꽤 의외다. 인간들이 미혹의 죽림을 예전만큼 두려워하진 않다니.
"길잡이가 생긴 지 꽤 됐거든. 강한 인간이라서 우리도 함부로 못 해."
"무녀 같은 부류인가."
"그 정도까진 아니야... 우리가 건드리지만 않으면 그냥 조용히 지나가기만 하니까."
"봐! 요즘 인간들 이렇다니까! 요괴에 대한 공포가 줄고 있어!"
코가사가 신이 나서 나한테 소리친다.
"네놈도 그 길잡이 때문에 인간들을 겁주지 못하신 모양입니다?"
"큭..."
적어도 자기 무덤 파는 재능은 훌륭해 보인다. 물론 요괴에겐 아무 도움도 되지 않겠지만 말이야.
***
"호수 크다!"
코가사는 안개의 호수를 보자마자 이렇게 외쳤다. 정작 아직 어두워서 크기는 제대로 알 수 없을 텐데. 설마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나?
"그래도 겨우 시간 맞춰서 왔네."
"한 번만 더 함정에 빠졌으면 진짜로 죽여버렸을지도 몰라."
"귀여운 데 왜 그래."
카게로는 코가사의 얼빠진 행동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정작 본인은 공포의 상징이 되고 싶어한다는 게 문제지.
"그래서 우리 여긴 왜 온 거야?"
코가사가 물을 바로 앞에 두고 우릴 돌아보며 묻는다.
"기다려 봐, 알게 될 테니."
"이번 반응도 기대된다."
카게로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속삭였다. 너도 못됐구먼.
"뭐 어때, 아까 함정처럼 위험하지도 않은걸."
"차라리 호수에 영영 수장시켜버렸으면 하는데."
"불쌍한 우산한테 너무하네."
그렇게 잡담을 늘어놓는 동안 어둠이 조금씩 가시고 있었다. 벌써 해가 뜨는 모양이다. 내 평생 가장 피곤한 밤을 보낸 것 같다. 어느 바보 츠쿠모가미 때문에...
"둘이서만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는 거야?"
"네놈이 이번엔 누구한테 살려달라고 빌까 내기하고 있었다."
"야! 너 날 계속 무시하는데 말이야!"
날이 밝아지니 코가사가 무슨 표정을 짓는지도 이젠 알아볼 수 있다. 예상대로 분해서 씩씩거리는군. 그리고 수면 밑에서 손목 한 쌍이 조용히 나타나더니 코가사의 발목을 향해 살그머니 움직인다.
"온다, 온다."
카게로가 웃음을 참으면서 나한테 속삭였다.
"야, 들키겠다. 아, 바보니까 상관없나."
"너 방금 나한테 바보라고 했... 꺄악!"
호수에서 떠오른 손 한 쌍이 코가사의 발목을 하나씩 붙잡았다. 저건 놀라는 게 당연하다. 나도 당했고, 카게로도 당했으니. 카게로는 놀라서 나중에 이빨로 깨물기까지 했다. 그걸로 놀리면 나도 물린다.
"으아아아아악! 뭐가 날 붙잡았어! 붙잡았다고!"
"오, 그렇구먼."
"코가사, 힘내!"
"보고만 있지 말고 도와줘!"
우리 둘은 불난 집에 불구경이다. 잘해보라고 공포의 상징씨.
"끌려간다! 끌려간다! 호수로 끌려간다고!"
역시나 바보 아니랄까 봐 호들갑이 심하다. 와카사기히메는 그냥 발목만 붙잡지 끌어당기진 않는다고.
"으악! 너무 쌔! 도와줘!"
혼자서 팔을 막 휘저으면서 바둥거리더니 결국 앞으로 넘어졌다. 넘어진 상태에서도 팔은 열심히 땅을 휘젓는다. 진짜로 자기가 호수로 끌려간다고 믿고 있는 모양이다. 마침내 두 손이 각각 카게로와 내 손을 붙잡는 데는 성공했다.
"악어야! 악어라고! 악어가 날 잡아먹는다아아아아! 뭘 보고만 있어! 도와줘!"
우리는 어느새 수면 위로 얼굴을 드러낸 와카사기히메를 바라본다. 그녀도 상대의 반응이 너무 예상외라 당황한 얼굴이다. 잠시 그 상태로 고민하더니 방긋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 난 악어다! 순순히 끌려오시지!"
그러면서 아주 살짝 발목을 잡아당긴다.
"으악! 난 잡아먹히기 싫어! 도와줘! 어서!"
카게로와 난 서로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둘의 생각이 일치한 모양이다.
"야, 귀찮아. 이 손 놔."
"에잇."
우리 둘은 냉정하게 코가사의 손을 뿌리친다.
"배신자들! 죽고 나서도 절대 잊지 않겠다!"
코가사의 절규가 새벽녘 호수에 울려 퍼진다. 나로서는 잊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죽어줬으면 해.
"미안해, 진짜 미안해. 응? 아직도 무서워?"
"안 무서워!"
코가사는 아직도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훌쩍거리고 있다. 와카사기히메는 그 옆에서 코가사를 계속 달래고 있다. 안 무섭다고 아직도 바득바득 우기는 걸 보니 아직 자존심은 남은 모양이다. 눈물샘에서 눈물이 무한하게 흘러나오는 거 같던데 자존심도 마찬가지일지도.
"우리도 다 겪은 환영회니까 기분 풀어."
카게로도 코가사의 등을 토닥이면서 말한다.
"맞아. 카게로도 세키반키도 다 놀랐어. 카게로는 날 깨물기까지 했다니까?"
"자..잠깐! 그건!"
미안 카게로, 내가 말한 건 아니니 나한테 뭐라 하진 않겠지.
"...정말?"
코가사가 울음을 그치고 카게로를 바라본다. 카게로는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음... 그래. 처음 당하면 다들 놀라."
카게로는 마지못해 인정한다. 울보를 달래느라 다들 필사적이구먼.
"그래도 악어라고 소리치는 건 너밖에 없어."
나는 울보 기분에 맞춰줄 생각이 없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를 정신적으로 피곤하게 만드니까.
"너! 아까부터 날 계속 무시하는데!"
코가사는 내 말을 듣자마자 바로 일어나서 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도 제대로 공포를 배워서 네 코를 납작하게 해줄 거야!"
"잘해보셔."
"무시하지 마!"
다시 활력을 찾은 코가사의 모습에 와카사기히메와 카게로는 쓴웃음을 짓는다. 여러 가지 의미로 무적에 가까운 녀석이다.
***
"그래서 난 깨달았지... 세키반키가 내 평생의 라이벌이 되리란 걸!"
코가사는 와카사기히메와 카게로에게 어제 저녁에 나를 겁주려다가 되려 자기만 겁먹은 이야기를 당당히 늘어놓는다. 그렇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내용이 절대 아니잖냐.
"그래서 미혹의 죽림까지 그렇게 열심히 따라왔구나. 대단해."
"그러게. 지치지도 않고 여기까지 따라오다니 대단한 집념이야."
오히려 이쪽이 정신적으로 훨씬 지쳤는데 말이지.
"내가 라이벌로 인정한 녀석이니까! 이 정도 수고는 별거 아니야!"
대체 누가 라이벌이란 거냐. 카게로와 와카사기히메는 코가사의 허풍이 재밌는지 연신 맞장구를 쳐주면서 이야기를 끌어내고 있다.
"라이벌 생겼네."
카게로는 음흉한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바라본다. 이걸로 날 잔뜩 놀려먹을 생각이 분명하다. 하여간 도움이 안 되는 츠쿠모가미 같으니.
"집념의 츠쿠모가미 코가사를 위해 건배!"
"건배!"
와카사기히메의 건배 제의에 카게로와 코가사도 덩달아 건배한다. 나는 당연히 건배하는 시늉만 한다. 이미 풀뿌리 네트워크 정식 구성원이라도 된 듯한 분위기다.
"그럼 코가사는 인간마을에서 여태까지 어떻게 겁준 거야?
"윽."
와카사기히메의 질문에 코가사는 술을 마시다가 움찔한다. 아무래도 제대로 약점을 찔린 모양이다. 잘한다 히메. 더 해라 더.
"그... 그게. 여태까지 묘지에서 인간들을 겁줬는데... 잘 안돼서..."
"아 맞다. 묘지에서 이제 시체가 움직인댔던가? 신문에서 읽었어."
카게로가 무언가를 떠올린다. 그나저나 신문은 어디서 구해서 읽은 건지. 텐구들은 신문을 그냥 아무 데나 막 뿌리고 다니는가 보다.
"으...응. 시체가 움직이니 다들 우산 따위엔 놀라지도 않더라고..."
"이제 기억난다. 코가사 너 신문에서 본 적이 있어."
"윽!"
이번엔 카게로의 말에 움찔한다. 잘 한다. 더 하라고 더.
"분명 요괴 베이비시터가 되려다가 인간 엄마들 사이에서 현상금이 붙어버렸다고..."
"절 잡아다 넘기지 말아주세요!"
현상금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바로 나한테 들러붙는다. 대체 왜 매번 나한테 들러붙냐고...
"걱정하지 마. 풀뿌리 네트워크의 일원으로서 같은 요괴를 팔아넘기지 않아!"
"맞아. 약한 요괴들끼리 뭉쳐야 하는 법이니까!"
난 팔아넘기고 싶은데. 그리고 약한 요괴도 약한 요괴 나름이지. 얜 요괴인지도 의심스러울 정도잖아.
"이런 대접... 받아본 적 없어..."
코가사의 눈에 눈물이 맺혀있다. 그렇게 쉽게 감격하지 말라고.
"이 한 몸 풀뿌리 네트워크에 바치겠어!"
"만세!"
"만세!"
나 빼고 셋이서 아주 신이 났다. 제발 난 빼줘.
"코가사의 말도 일리가 있어. 요즘 인간들은 예전보다 요괴를 두려워하지 않는 거 같아."
"히메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어라? 세키반키는 못 느끼는 거야?"
"글쎄, 예전부터 제일 만만한 놈들을 습격해서 그런가?"
"세키반키 너 아주 비겁한 놈이었구나?"
코가사가 옆에서 나를 콕콕 찌른다. 일단 너부터 인간들 겁을 제대로 주고 그런 말을 해라.
"코가사, 세키반키가 맞아. 두려움을 주려면 인간을 제대로 골라야 해."
"어?"
"맞아. 세키반키는 우리 중에서 제일 상대를 잘 고르는 거 같아."
코가사는 모두 나를 감싸자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넌 일단 시간대부터 잘 골라봐라. 제대로 숨지도 못하면서 해가 지기 전에 사람을 겁주려고 하니 잘 안되지."
"맞아. 빛이 없는 게 좋아. 그래야 제대로 기습할 수 있으니까. 아니면 이쪽에서 빛을 이용해 공포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나는 물 밑에 있으니 수면이 잘 안 비치는 시간을 노리지만 말이야."
코가사는 쏟아지는 조언에 정신이 혼미한 모양이다. 기본 중의 기본인데. 그나저나 카게로가 가져온 이 참새구이 맛있네.
"코가사는 아직 초짜구나?"
"내가 말했잖냐. 바보라고."
"이제부터 배워가면 돼."
"난 잘 모르겠다. 얜 별로 재능이 없어 보여."
흐름이 내게 유리하게 바뀌었으니 은근슬쩍 코가사를 비난한다. 그래도 진심으로 하는 소리다. 저 츠쿠모가미가 공포의 상징이 되는 일 따윈 없을 테다.
"밤에... 상대방을 골라서..."
코가사는 어느새 수첩을 꺼내 무언가를 적고 있다. 나름 공부를 하려는 모양이군.
"아니면 다른 요괴에게 얹혀가는 건 어때? 원래 약한 요괴들은 그랬잖아."
와카사기히메가 다른 제안을 내놓는다.
"얹혀간다고?"
"그래. 옛날 백귀야행도 약한 요괴들이 공포를 나눠 갖는 의미가 있었다나 봐."
코가사가 흥미를 보이자 히메는 차근차근 설명한다.
"옛날에는 공포를 모두 합치면 요괴들이 거의 모두를 차지했잖아. 그러니까 그중 일부만이라도 약한 요괴들이 나눠 가져도 그 양이 꽤 됐어. 그래서 약한 요괴들은 백귀야행에 합류해서 강한 요괴들의 공포에 조금씩 얹혀갔지. 강한 요괴들도 딱히 뭐라 안 했어. 공포 자체가 충분하기도 했고, 요괴의 세는 일단 강한 편이 좋으니까."
"그럼 나도 백귀야행에 끼면 되는 거야?"
"안타깝게도 이제 백귀야행은 없어."
카게로가 고개를 저었다. 코가사의 얼굴에 실망감이 떠오른다.
"왜?"
"글쎄, 이유는 잘 몰라. 그냥 언제부터인가 백귀야행이 사라졌어."
"바깥세상에서도 사라졌대."
"대체 왜일까?"
코가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 고민해봐야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제 공포가 요괴의 몫이 아니라는 모양이더라. 적어도 바깥세상은."
내가 말한다. 왜 말했는지 나도 모르겠다. 벌써 술에 취한 걸까?
"아, 그 너구리 요괴가 말한 거?"
"이제 요괴는 공포의 총합이 아니라 그중 일부에 불과하단 이야기였던가?"
"나는 무슨 소린지 잘 이해가 안 가지만 말이야."
며칠 전 회합에선 너구리 요괴도 은근슬쩍 껴들었다. 약한 녀석도 아니면서 말이지. 그러더니 바깥세상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여기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녀석인 모양이었다. 바깥세상은 이제 요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니 뭐라니. 솔직히 무슨 소린지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럼 풀뿌리 네트워크를 백귀야행으로 만들 순 없어?"
"그건 힘들 걸."
코가사의 질문에 카게로가 다시 고개를 젓는다.
"왜?"
"압도적으로 강한 요괴가 한둘은 있어야 통솔이 될 텐데 그런 요괴가 없거든. 여기선 정보 공유나 간단한 친목 도모 정도가 다야."
"그럴 수가..."
아무래도 헛된 희망을 품고 있던 모양이다. 슬슬 현실을 직시하게 해줘야겠군.
"지금 너 먹고 있는 게 뭐냐?"
"응? 참새구이...?"
"생각해 봐라. 만약 여기 요스즈메 같은 새 요괴가 있으면 이렇게 술이나 마실 거 같냐? 당장 뒤집어엎고 난리가 난다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강한 요괴가 없으면 숫자가 많아 봐야 의미가 없어. 처음엔 다 같이 모였을 때 뭘 먹을지를 가지고 싸움이 난다고. 난 새고기는 안 돼. 난 물고기는 싫어. 토끼 고기 절대 안 돼. 그럼 남는 게 풀이야. 그러면 이제 풀 따위나 먹자고 모이냐는 말이 나와."
코가사의 눈이 커진다. 아무래도 제대로 환상이 깨지고 있는 모양이군. 카게로와 히메도 딱히 나를 안 말리니 마저 해도 되겠지. 언제까지고 실상을 숨길 순 없는 노릇이다.
"먹는 건 어찌어찌 넘어갔다고 치자. 그럼 이제 백귀야행을 일단 따라나 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와서 일단 하기는 해. 그래 봐야 얼마나 모으겠어? 어중이떠중이들만 모였는데. 다 나누고 나면 오히려 각자 겁줄 때보다 더 적게 돌아갈걸? 그러면 고작 이 정도 받자고 백귀야행을 하냐, 내 몫은 너무 적다, 얹혀가는 놈들 때문에 손해 볼 순 없다 이런 불만이 슬슬 올라오지."
"그... 그런."
"풀뿌리 네트워크에 속하는 거야 내가 어쩔 수 없지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라. 결국 네가 적당히 얹혀 가거나 알아서 벌어가는 수밖에 없어."
나는 마지막 참새구이를 집어삼키면서 이야기를 끝맺었다. 아뿔싸, 풀뿌리 네트워크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들어오는 건 기정사실로 해버렸다. 통한의 실수.
"진짜야...?"
코가사는 카게로와 히메에게 시선을 돌린다. 둘 다 쓴웃음만 짓는다. 미안하지만 꿈에서 깰 시간이야.
"그래도 같이 이렇게 모이는 걸로도 도움이 돼. 우리가 하나하나 가르쳐 줄 수 있어."
"맞아. 코가사도 가능성이 있어! 강한 요괴와 친해질 수도 있고! 배우면 돼! 게다가 인간마을에 스승도 있는 걸!"
히메는 그러면서 나를 손으로 가리킨다. 그만둬...
"세키반키..."
코가사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뚫어지라 쳐다본다. 조금 불쌍해 보이는군. 이러면 내 대답은...
"싫어."
물론 거절이다.
"나도 너 같은 거 싫어! 라이벌은 무슨 라이벌! 나 혼자 잘할 수 있어!"
내 단호한 거절에 코가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제 분을 못 이겨 숨을 씩씩 몰아쉬고 얼굴은 홍당무처럼 빨갛다. 그렇게 쉽게 감정에 휩쓸리면 안 된다고.
"두고 봐! 내가 널 하나하나 분석해서 진짜 공포란 게 뭔지 알려주겠어!"
나한테 선전포고를 하고는 인간마을 방향으로 달려간다. 아깐 라이벌 아니라면서.
"세키반키!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너무 심했다."
히메와 카게로는 나를 나무란다. 그래도 싫은 건 싫다. 솔직히 짼 나를 너무 귀찮게 한다고.
"내버려 둬. 저러고선 또 쫄랑쫄랑 나 따라다닌다."
내가 한 말이지만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으악! 뭐야 이 구멍은?! 세키반키! 도와줘!"
코가사가 달려간 방향에서 또 비명이 들려온다. 이번엔 요정의 함정에 빠졌나 보다. 혼자 잘할 수 있다면서?
***
다시 밤이 찾아왔다. 차가운 바람이 운하에 불어온다. 버드나무가 흔들거린다. 해 질 녘의 운하는 걷기에 좋지만, 해가 지고 난 뒤의 운하는 인간을 겁주기에 좋다. 어제는 회합이 있어 불쌍한 인간 희생자가 나오지 않았지만 오늘까지 그럴 순 없다. 오늘은 특별히 더 공을 들였다.
"게다가 손님까지 있네!"
내 머리 하나가 외친다. 마찬가지로 회합 때문에 어제는 몸통에 얹힐 머리 빼고는 모두 집에 남아있어야 했다. 오늘은 평소처럼 각자 자기 위치에서 기다리고 있다. 지금 큰 소리로 외치는 이 머리는 조수 역할이다.
"시끄러워. 다 들리겠다."
"쟨 바보니까 괜찮아!"
그렇긴 하지. 지금도 내 등 뒤로 강렬한 시선이 느껴진다. 자칭 라이벌이라는 코가사는 버드나무 뒤에 숨어 저녁부터 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처음 만났을 때처럼 어설프기 그지없는 잠복이다. 우산 좀 잘 숨겨 봐라.
"바로 위에 있는데도 발견 못 하다니 정말 어설퍼!"
코가사가 숨어있는 버드나무 위에도 내 머리 하나가 배치되어있다. 덕분에 코가사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나도 볼 수 있다. '타도! 세키반키!'라는 문구가 적힌 머리띠를 두르고 수첩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다. 조금만 주위에 신경 써도 내 머리는 진작에 들켰을 텐데. 어설퍼도 너무 어설프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도 결국 나와 카게로가 인간마을까지 데려와야 했다. 귀찮은 녀석.
"공포의 일부라..."
아침에 회합에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더 정확히는 그 이상한 너구리 요괴가 예전에 했던 말.
'옛날에는 공포의 총합이 곧 요괴나 마찬가지였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공포는 거의 없었어. 나머지는 모두 요괴의 소행으로 치부된 게야.'
'근데 이제는 아녀. 공포를 다 합쳐보면 요괴는 끽해야 일부에 불과하네.'
옛날에는 공포를 요괴가 독점하다시피 했다. 그래서 그중 일부를 약한 요괴들이 나눠 가져도 충분한 몫이 돌아갔다.
하지만 이제 요괴는 공포의 일부만을 차지할 뿐이다. 일부의 일부를 나눠주면 모두가 만족할 만큼 돌아갈 리가 없다.
"복잡한 이야기야!"
"맞아, 복잡해. 말도 안 되고."
"그럼! 인간이 공포를 차지한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내 머리와 내 머리가 대화한다. 물론 모두 내 생각을 대변하고 있지만. 인간들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머릿속이 복잡할 땐 이런 대화가 생각보다 도움이 된다. 그러면서 운하에 돌을 던진다. 난 인간을 기다리면서 물수제비를 종종 즐겨왔다. 돌이 물에 튕기는 소리가 운하에 깔끔하게 퍼진다. 머릿속에 퍼지는 잔물결 사이사이로 너구리 요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인간들이 깨달았제. 자기들을 위협하는 게 요괴뿐이 아니란걸. 인간만큼 무서운 게 없단 걸 뒤늦게 배웠음세.'
인간이 요괴만큼, 아니 요괴보다 무섭다고? 물론 여기에도 환상향의 무녀 같은 이상한 존재가 있긴 하다. 하지만 인간들에게 위협이 되지도 않고, 인간들은 무녀를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인간들은 서로를 죽일 무기를 마구 만들어내더만. 심지어 나중에는 핵폭탄이라는 물건까지 만들어냈제. 그게 얼마나 웃긴 물건이냐면, 단추 하나만으로도 인류 전체가 뒈질 정도여. 그래서 어찌 됐냐고? 결국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네. 인간들은 누가 단추를 누르지 않을까 공포에 떨어서 누구도 누르지 않았음세.'
단추 하나에 공포에 떨다니, 인간들도 어지간히 이상하다. 요괴들이 단추 하나만도 못한 존재가 됐다는 것도 우습다. 다시 돌을 던진다. 아까보다 더 많이 수면에 튕겼는지 풍덩 소리가 더 길게 울린다.
'그러니 어찌 요괴가 공포를 독차지하겠는가? 인간은 요괴가 아니라 인간을 두려워하는데. 그래서 약한 요괴들이 가장 먼저 사라지기 시작했제. 더는 공포를 남에게 얹혀서 얻을 수가 없었으니께. 강한 요괴들은 그래도 조금 버텼어. 하지만 다들 점점 약해지고, 사라졌다네.'
약한 요괴.
너구리 말이 사실이라면, 단순한 허풍이 아니라면, 바깥세상에선 타타로 코가사 같은 요괴들이 가장 먼저 사라졌겠지.
그다음엔?
와카사키히메.
카게로.
세키반키.
그렇게 차례차례 사라지겠지.
요괴가 공포의 총합이 아니라 공포의 일부만을 차지할 뿐이라면, 내 몫도 줄어든다. 솔직히 그렇게 되면 스스로 공포를 얻을 수 있기나 할지 모르겠다.
"너무 부정적이야!"
"하지만 사실인걸. 지금도 그렇게 많이 얻는 건 아니잖아."
지금도 만만한 놈들을, 만만한 시간대에 노려서 얻는 정도다. 약소 요괴 중에선 나름 자랑할 정도는 되지만 결코 많은 편은 아니다. 코가사 앞에선 한껏 강한 척했지만 나도 이미 알고 있다. 인간들을 겁주는 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어쩌면 여기 환상향에서도 우리는 이미 공포의 총합이 아니라 그 일부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준비나 해! 오고 있으니까!"
"나도 알아."
앞쪽에 자리 잡은 머리가 첫 희생양을 발견했다. 동시에 모든 머리가 그 희생양을 발견한다. 모두 내 머리니까. 그러니까 굳이 말 안 해줘도 나도 다 보인다. 어둠을 틈타 애인과의 밀회를 즐기는 녀석이다. 방금 애인을 돌려보내고 한껏 달아올랐군. 어둠 속에서는 대략적인 윤곽만 보였지만 그래도 꽤 민망한 애정행각이었다.
"오랜만에 좋은 구경 했어."
"너 너무 솔직하다."
조수 역할을 하는 머리 하나가 통통 자기 위치로 가면서 솔직하게 말했다. 조수 역할이라곤 해도 사실상 말동무에 불과하다. 혼잣말을 도맡아 하는 머리인 셈이다. 하지만 오늘은 공을 좀 들여서 다른 역할을 맡게 됐다.
"특별한 손님이 있으니까!"
"거 참, 들킨다니까."
오늘은 특별히 조명도 준비했다. 두꺼운 천으로 잘 숨겨놔서 빛은 새지 않는다. 하지만 그 천을 드러내면 순간적인 빛으로 희생양은 깜짝 놀라겠지. 그때 내 머리를 날리면 된다. 목이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게 긴 천도 따로 준비했다. 순간적으로는 흐물흐물 거리는 목으로 착각하겠지.
"우리한테 얹혀가려는 손님!"
"그만 좀 해라. 게다가 저 바보 녀석이 얹혀가는 건 사절이고."
버드나무 뒤에서 나를 하나하나 분석하고 있는 츠쿠모가미. 아마 지금은 내 뒷모습도 잘 안 보이겠지. 하지만 내가 운하에 돌을 던지는 소리 정도는 들었을 테다. 그걸로 내가 여전히 여기 있는 걸 알 수 있겠지.
"훌륭한 스승님이야! 물고기 낚는 법도 자연스레 알려주고!"
"이상한 소리 그만해. 진짜 들키겠다. 거의 다 왔잖아."
나 참, 진짜로 스승이 되어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나 혼자 하기도 빡빡한데 말이지. 그러니 얹혀가게 내버려 두기보다는 혼자서도 겁을 줄 수 있을 정도로 가르치는 게 더 나을까? 그러면 얼른 가르칠 거 가르치고 떠나보내야겠다.
우리가 공포의 일부만 차지하게 되더라도, 둘 다 남아있는 편이 역시 좋을 테니까. 풀뿌리 네트워크도 마찬가지고.
"준비 완료!"
조수도 결국 내 머리니까 말할 필요 없는데 꼭 이렇게 말을 한다. 너무 오래 조수를 시켜서 뭐든지 입에 내는 게 습관이 된 모양이다. 조수는 입으로 천을 물었다. 희생양이 점점 다가온다.
"지금이다!"
이런, 정작 나도 입으로 신호를 보내버렸다. 사실 조수도 내 머리니까 그럴 필요 없는데. 하여간 조수는 등불을 덮고 있던 천을 입으로 당겼다. 천이 스르륵 미끄러져내리고 강렬한 빛이 순간적으로 희생양의 눈을 습격한다.
"으악! 뭐....뭐야!"
"낄낄낄!"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음산한 목소리로 웃는다. 목에는 천을 메단 채 머리를 날려보낸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로....로쿠로쿠비다!"
불쌍한 녀석. 엉덩방아를 찧더니 바로 뒷걸음질을 친다. 조금 더 강하게 나가볼까.
"낄낄낄!"
"낄낄낄!"
여기저기 숨어있던 내 머리들이 동시에 웃기 시작한다. 이 정도면 분명...
"사람 살려! 사람 살려! 로쿠로쿠비다!"
방금 전 애인과 뜨거운 연애행각을 벌이던 장소를 향해 줄행랑을 친다. 이 정도면 우리 손님도 많이 배웠겠지-
"꺄악! 모....목이 늘어난다! 목이 늘어난다고! 뭐야 저게! 도와줘 세키반키!"
그러니까, 요괴인 네가 놀라면 어쩌냐고. 게다가 넌 내가 준비하는 과정도 다 지켜봤잖아.
코가사는 다른 길을 찾아보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