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 - traditionalrock
샘처럼 왔던 봄은 채 영글지 못한 볕을 내어 뿌리어 주다 잠이 너무나도 깊이 든 이들에 싫증이라도 난 것인가, 어느새 더 이상 느껴지지가 않지만, 그 빛 아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포기하지 않고 자라왔던 초목은 제 명을 뒤늦게라도 완수하려는 듯이 어느새 온 산을 뒤덮고 푸르름을 장성한 몸으로 자랑한다. 무수히 쌓인 초목 그 제일 윗가지에 구름 위에 앉아가듯 살포시 내려다 앉아 귀 건드리는 어느 소리를 따라 날아가면 가 하나가 물 섞인 물감처럼 주변을 색칠하며 고고히 흐르고 있다. 거슬러 거친 바위틈을 스쳐 내려와 조밀한 자갈밭에 내려와 한 연못에 물 떨어지는 소리를 따라 내려오니 연꽃잎 위에 개구리 있어 그 소리를 들으며 노닌다.
바위들만이 덩그러니 놓인 옛 산성 터에 서다. 밤이 되면 아직은 여름이 아니라고 단언하려는 듯한 살갗을 에는 차가운 밤바람이 보드라운 털을 흩날리게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저 마음속으로 그러지 말았으면 하지만 몸이 행하려 하는 바는 생각의 의지로 완전히 막을 수 있는 게 아닌 지, 조금씩 소름은 직접 바람과 맞닿는 살갗에서부터 돋아 오른다. 깊은 밤 부엉이가 떠오르는 시간에, 깨어 있으려 한다는 것은 힘을 조금만 풀어도 비틀거릴 것이라 확신이 들 정도로 정신을 어지럽힌다. 눈을 감을 때마다 눈꺼풀은 천근만근 무거워지며 다시 뜨는 것이 무섭게 느껴질 정도로 버거움이 더해진다. 바위 아래로는 고경사의 산비탈에 족히 몇 십년은 자라왔을 굵기의 나무들이 뿌리를 깊게 박고 직립해 있다. 잠을 자지 않는 괴로움을 버티며 무언가가 오리라, 하는 근거 없는 직감 하나만 믿고 있는 채, 연이어 몇 번이고 다음 이 순간에 무언가가 나타나지 않으면 곧장 잠자러 펼친 이부자리에 들어가리라 다짐하며, 곧 다시 다짐한다. 그러다가 청색의 선 하나가 검은 밤하늘에 그어지는 걸 보고, 저것이 내가 기다리고 있노라라 해대던 것이라며 앞뒤도 가리지 않고 곧장 그 곳으로, 그 첩첩산중으로 뛰어나갔다.
어두컴컴한 볕이 드는 이른 아침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 이가 어떤 방의 문을 연다. 낡은 문은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방문객을 맞이해준다. 방 중앙의 아리따운 아가씨는 그 이를 바라보자마자, 어느 말을 할 것인지 대뜸 알아챈 듯이, “알겠노라.” 라고 말하며, 끊어진 식사를 이어 진행하려 한다. 그 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이지만, 그저 이해한 것처럼 문을 닫으려 든다.
“그대는 어인 일로 내게 왔느냐.”
“기분 나쁜 느낌이 들어 공주님께서 변이라도 당하옵셨나 하였사옵니다.”
“내가 그대에게 내린 직위는 중앙군의 통솔이지, 호위부대의 통솔이 아니지 않느냐.”
“아무리 임금을 위하는 충절이 중하다 할지라도 그 할고로 신하 한 명을 잃는다면 그것이 굶는 것보다 잘난 것은 없느니라. 만일 그것이 충절이라 한다면 그것은 귀속된 종이 주인에게 바치는 충절이지, 신하가 마땅히 해야 할 충절이 아니니라.”
널찍한 경연실의 한쪽 벽의 몇 보 앞에 위치한 나뭇걸상에서 소리가 난다. 걸상 위엔 바랬지만 질긴 종이로 된 두루마리가 늘어져 있었다. 그 옆엔 어느 머리 흰 노파가 무릎을 꿇은 채 말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것을 충절로 용인할 수 없다면 무엇이 용인되는 충절이옵나이까”
문창살에 발라진 흰 종이 너머 햇살에 표지된 어느 그림자는 크고 거대한 파도처럼 넘실댄다. 넘실대는 파도는 폭포처럼 점점 격한 박자를 따라가기 시작했고, 설익은 것처럼 고정된 마룻바닥은 조금씩 위아래로 커지는 진폭을 그려간다.
풀벌레 소리가 숨표를 거칠 때, 엇박자로 큰 소리가 들린다.
“웬 놈이냐!”
빨간 비단을 길게 두른 이가 칼을 겨누며 소리친다. 검은 상의의 천이 순간의 움직임에 구겨진다. 하늘 위에 홀로 떠 있는 것처럼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가 응시하는 그것은 조금씩 소리가 가라앉는 것을 서서히 느끼듯이, 적막에 이르자 어느 산중으로 향해 뛰쳐나갔다. 한층 강해진 햇볕에 그저 하얀 검은 검은 혁띠에 매여 있는 칼집에 조급히 들어가고, 어느 다급한 긴장이 몸을 이끌어, 길을 알 수 없는 숲 속으로 뜀박질을 이어간다.
무장이 점점 무겁게 느껴지는 터에 숨조차 가쁘게 목을 조여오고 사지는 한 보에 맞춰 휘두를 때마다 뽑혀져 나갈 것만 같았다. 이윽고 두 발을 포기하고 본래의 모습처럼 네 발로 뛰기 시작할 때, 마당과 문 앞의 이들이 가까이 있었음에도 어찌 이 이의 달음박질하는 모습을 바라보고서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일말의 미동도 아니 하였는지에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의문은 이미 너무 멀리 온 탓에 물어볼 사람도 보고할 사람도 없었고, 몇 초의 시간도 지나지 않아 곧 구겨진 종이 같은 기다란 귀처럼 공중으로 흩날려버렸다.
어느 밧줄도 연결되지 않은 수시 신사에, 다시 올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인간 소년이 농한기 텅 빈 시간이란 핑계에 마음은 초록 머리 무녀의 손에 이끌려, 인간이 가까이 가기도 위험하다는 소문이 자자한 어느 작지 않은 산을 타 당도하였다. 어떤, 의례적으로 보이면서 또한 느껴지기까지 하는 본질적으로 가식적인 두 여자의 대화와 웃음에 휩쓸려, 신사의 풍경을 감상하기도 전에 외진 곳의 누추한 방으로 떠밀리게 되었다. 오래된 듯이 꺼슬꺼슬하게 가시가 맺힌 문을 여니 노란 머리의 여아가 있었다. 복도로 머리를 빼니 그 둘은 아무데도 없었다.
“어서 들어오거라. 내 나이가 든 탓인지 아직도 시렵구나.”
코타츠 한 쪽을 들춰 주었다. 문은 금세 닫히고, 코타츠 속은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달궈놓은 듯이 따뜻했다. 나뭇탁상 위엔 방금까지 먹고 있던 듯한 감색 다과와 차가 놓여있었다. 그저 여아는 차 담긴 찻잔을 어디선가에서 출현시켜, 그것을 내 앞으로 놓고는 여느 사람 없는 때처럼 몇 달에 걸쳐 서서히 고조되는 무언가를 들으며 잔잔한 미소를 흘린다. 시간은 흐르고, 참을 수 없는 공기의 무거움에 입을 열었다.
“입교 절차를 하러 부른 것이라 들었는데...”
다시 정적은 그대로 흐르고, 수시 신사 근처 연못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가 조금씩 커져온다. 귓가로 한걸음씩 가까이 다가올 때 어느 신의 말소리가 다시 들린다.
“그랬었구나.”
김이 나는 찻잔이 들리며, 삼키는 소리가 느리게 들린다.
“나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지만, 어쩌면 너의 것을 빼앗아 가는 일이 생길 수 있겠구나. 손 쓸 새도 없이, 나의 신탁인 것처럼, 너의 가장 소중한 그것마저 내가 알지 못하는 채로 가져가버릴 수 있겠구나. 네가 그것을 거부하는 순간, 종교의 신인 나는 너를 보듬어주지만 정작 인간의 종교는 너를 수용하려 들지 않겠구나, 설령 내가 당도를 하여도. 물론 정말로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은 채, 그 행위 자체만을 위하는 사람이 있었긴 있었구나.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은 희생의 순간까지 나를 절박하게 바라보았구나. 그들을 위해 그들이 소중히 여긴 이들을 보살피고자 하였지만, 그 이들마저 하나둘 동일한 기로로 들어섰고, 나는 그들을 위한다는 게 무엇인지 고민하고만 있구나. 그래, 그럼...”
대나무가 무성한 길을 넘어 한 산 속으로 끊임없이 들어간다. 이 산이 어느 산이었는지도 모르고 들어와 무슨 볼일을 볼 일도 없을 산이다. 점차, 나무의 키는, 정말로 이마만큼 자랄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나게 할 정도로 거대하게 되었고, 주위는 낙엽 아래에서나 가끔씩 볼 수 있었던 벌레들로 성성했다.
눈앞의 발은 땅먼지가 짙게 깔릴 정도로 부산스러운 갑작스런 제동을 걸며, 눈앞의 등은 정면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비정상적으로 짙은 먼지는 서서히 걷히고, 익살스럽게만 느껴지는 어느 친숙하고도 익숙한 얼굴이 한 번도 지어 준 적 없는 표정을 지은 채 정면과 마주치려 한다.
아무 일도 아닌 일이라 말하는 것 같은 머리에 걸맞지 않는 마음의 위화감에, 그리고 알 수 없는 반감에, 주변의 식생을 살펴보던 주의는 멀리로 가버린 듯이 그 얼굴만을 바라보며 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를 더없이 충혈된 눈동자로 좇아가며, 바로 옆의 바스락 거리는 소리조차 듣지 못 하였다. 미간에서 흘러내려간 시선이 코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입가의 잔잔하면서도 잔혹한 선언을 보았을 때, 어쩌면 이라는 심정에 확장된 시야는 알 수 없는 그림자들이 나뭇가지 사이로 조금씩 들어오는 햇볕마저 가려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기워진 듯 닳은 듯 이미 버려진 듯 헤어진 넝마 가죽이 제 솜씨를 과신하는 과소한 촌락의 아낙네가 기운 듯이 꿰매놓은 듯 생긴 요정 크기의 물건들이 족히 수십은 될듯한 무리를 지어 전방을 거의 둘러싼 채 달려든다. 갑작스럽기만 한 상황은 그 이의 연륜에 맞게 파악되며 은실로 꽉 찬 둥근 원이 그려진 칼집에서 달빛이 은은히 나는 은백색 맥검을 점점 커지는 동작과 함께 꺼내어 바로 베어든다. 베어든 곳으로 며칠은 고여 흐르지 못한 듯 검붉은 끈적한 피가 역한 냄새를 내며 유황처럼 끓어대고, 벌레가 뜯어 먹고 난 듯, 베여진 곳에선 매끈한 살색 실이 장맛비 오듯 무수히 떨어져 내린다. 베고 난 뒤엔 또 다른 이들이 어딘가에서 다시 오고 있는 듯 그 뒤의 뒤를 채웠고, 단순히 지치기만을 기다리는 듯 베어줄 것을 기다리는 것만 같아 보였다.
붉은 눈은 제 머리가 떨어지지 못 하도록 공중에서 붙잡아두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점잖게 돌아가는 중에 오직 렌즈만이 가파르게 떠는 듯 그 눈만이 대나무의 잎처럼 흔들렸다. 그 눈이 여느 이와 무엇이 다른 바가 있어 도리어 생각하게끔 만드는 걸까, 하고 그는 생각한다. 타락한 중처럼 모든 바에 어긋나 모든 것에 어긋난 그 이는 어디로 갔기에 여지껏 그려져 오던 만년 천년의 복수의 대상은 사라지고 다시 재회하기만을 기다리던 이처럼 애달프기만 한 걸까. 머리는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손사래에 헝클어지고, 고개는 고해를 하듯 점점 괴로워질 정도로 숙여진다.
깊고 어두운 심연 속에서 첫 발을 내딛으며, 쓸데없는 고민에 휩싸이게 한 모든 것을 잊어버린 채 어쩌면 자신이 정말로 바라지 않을 일일 지도 모르는 일을 생각이 아닌 욕망이 속삭이는 대로 저 깊은 심해에서 말할 수 없는 감정에 벅찬 울음이 터져 나올 정도로 끌어올린다. 어쩌면, 어쩌면, 하는 마음은 곧 입으로 쏟아져 나오고, 결국 다시 오지 않을 외진 길가의 땅바닥에 전부 쏟아낸 채로 검은 후드를 다시 들어 고쳐 쓴다.
검이 쉬지 못할 정도만큼만 그들은 미치광이의 기분 나쁠 정도로 가슴을 찢는 소리를 내며 습격하고 다가오며 위협한다. 하지만, 어느 쉼이라도 부렸다간 변함없이 재빠른 몸놀림에 지금까지 유지해온 자세가 흐트러질 듯할 정도로 항시가 위급하고 급박한 상태였다. 옷 곳곳엔 끈적한 검붉음이 묻어 있었고, 무수히 쏟아지는 그것에 귀는 머릿결을 따라 누이며 접혀졌다. 검의 높이는 깨질 듯한 피로에 조금씩 조금씩 낮추어지며, 의식하지 않아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들 무리의 신경을 거스르는 짜증나는 공격도 드물어진다. 여유는 왜 여유가 생겼는지를 반문하지 않고, 왜 뒤를 공격하지 않는지에 대한 의문을 문득 들게 만든다.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뒤로 돌리려는 찰나, 누군가의 차가운 손이 등에 닿으며 회전은 멈춘다.
온 말단과 사지가 매우 괴로운 느낌을 동행하며 뼈 한 줌 안 남길 고온의 불에 타는 느낌이 드는 듯 얼굴은 점차 일그러지고, 불 속의 다리는 부들부들 떨리다가 곧 멈추며, 무수하고도 매캐한 짙은 회색 연기를 바람에 날린 재처럼 낳는다. 사그라들은 불 틈에서 그는 결국...
어느 방, 봄을 맞아 화창한 햇살이 방 안을 데운다. 데워지는 공기 속에서 어떤 이가 공기가 흐트러져 보일 정도로 뜨거운 차 한 잔을 마신다. 말끔히 비워진 찻잔은 또다시 뜨거운 채로 채워진다. 아직은 차가운 바람이 숲을 헤쳐 나가고, 수북히 꽂힌 대나뭇잎은 그 흐름에 몸을 맡긴 듯 객인과 한 몸이 되어 흔들려간다.
“새로운 종교의...”
“막지 않는다면 새로운 종교가 막아줄 것이니라.”
잉크병에 조명을 비춘 듯 윤기가 흐르는 검은 눈동자는 집의 하인들이 부산스레 거니는 모습을 주시하며 바삐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