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회 글알못 팬픽대회

망상증 - 스타폭스

패드쟝 2020. 6. 22. 16:22

 

나는 어릴 적부터 겁이 많았다. 또래 친구들에 비해 희한할 정도로 겁이 많았다. 남들은 구름을 귀여운 동물의 모습으로 보았지만 나는 하얀 보자기를 뒤집어 쓴 귀신으로 보았다. 부모님은 그런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 나에게 '망상증 있냐?'는 농을 자주 걸어왔었다. 덕분에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벌써 '망상증'이라는 어려운 단어를 배웠다.

 

그러나 어린아이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나의 밑도 끝도 없는 의심은 가만 두고 볼 만한 것이 아니었다. 부모님은 초등학교를 갓 마친 나를 정신병원으로 데려갔다. 나를 진찰한 의사는 머리를 뒤로 단정히 묶은 여의사였다. 그녀가 부모님에게 말했다. '부적절한 가정환경이 망상장애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의사를 앞에 두고, 부모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정직한 대답이었다. 부모님이 내게 조성한 환경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내가 왜 이런 장애를 가지고 있는지,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입을 열어 말하지는 않았다. 부모님은 내 말을 믿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 글을 보고 있는 여러분에게 묻겠다. 여러분의 아들, 혹은 딸이 보고 있던 물건이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사라졌어요.’ 라고 말한다면 과연 이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아마 누구도 그렇지 못할 것이다. 자식의 손바닥을 때리며 거짓말 하지 마라.’라고 엄포를 놓을 것이 분명하다. 내가 이 사건을 숨긴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10년 전. 그러니까 내가 10살 때 있었던 일이다. 여느 때처럼 침대에 누워있을 적에, 커튼이 한번 펄럭거렸다. 나는 달빛을 머금고 여인의 치마처럼 몽실 부풀어 오른 커튼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원단의 주름 사이로 내가 아끼던 휴대용 게임기가 얼핏 비쳐 보이는 것 또한 한순간이지만 분명히 확인했다. 그러나 커튼이 책장을 가볍게 어루만진 그 순간, 나는 부모님이 사 주신 휴대용 게임기가 바람처럼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책장 뒤의 빈틈을 살폈다. 창문 밖을 살폈다. 혹시 내가 꿈을 꾸었나 싶어 볼을 꼬집어도 보았다. 그러나 휴대용 게임기는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나는 그날 전혀 잠을 자지 못했다. 불투명한 원단 뒤로 정체모를 무엇인가가 숨어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불을 뒤집어써도 공포는 가시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마찬가지였다. 눈꺼풀 바깥에서 귀신 눈동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을 것만 같은 망상증이 나의 어린 정신을 좀먹었다.

 

비록 망상 장애가 있다고는 하지만, 나는 별다른 문제없이 학교를 다녔다. 물론 주변에서 배회하는 친구들과 사교적인 관계를 유지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아서 맨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공부했다. 불량한 놈들은 교사의 눈에 든 아이들을 건드릴 배짱이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항상 월등한 성적을 낸 것은 아니지만, 교사들은 나를 성실하다며 귀여워했다. - 나를 응원해서 좋은 성적을 받게 하고, 그것을 다른 반 교사들에게 자랑할 것이 분명하다 - 라고 당시의 나는 생각했다. 그들이 내게 말을 걸 때마다 너는 내 허영심을 위한 도구야.’라며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 했다. 그것이 너무 무서웠다. 망상이 만들어낸 목소리는 너무도 선연해서, 나는 내가 사람의 마음을 읽는 초능력을 갖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 적도 있었다.

 

시간은 흘러, 고등학교에 원서를 낼 시기가 다가왔다. 나는 어느 고등학교에도 원서를 넣지 않았다. 척추 카리에스라는 병이 생겼다. 한국어로는 결핵성척추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병이 내 몸을 벌레처럼 갉아먹기 시작했던 것이다. 의사는 치료를 받아도 평생 곱추가 될 것이고, 제때 치료 하더라도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병이라고 조심스레 덧붙였다. 나는 그때부터 내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았던 미래의 소박한 소망 역시 빛바랜 사진첩 속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침대에 누워 바라보는 풍경은 언제나 평이했다. 책장, 침대, 침대 식탁, 노트북, 휴지, 물티슈, 전동 휠체어.

 

.

 

정말 끝.

 

부모님은 내가 필요할 때 바로 꺼내볼 수 있도록 책장을 침대 옆에 바싹 붙여주었고, 앙증맞은 알람 벨도 침대 위에 달아주었다. 작은 노트북은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도록 충전 거치대에 꽂혀 있었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 삶은 그렇게까지 피폐하지는 않았다. 나를 감싼 가족의 틀은 물질적으로 부족하지도 않았거니와 정서적으로 메마르지도 않았다. 나에게 무슨 문제만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우리 가정은 썩 잘 굴러가는 축에 들었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뒤바꾸는 변화는 언제나 한 순간에 일어나는 법이다. 평소처럼 잠을 자고 일어난 어느 날, 난 주변이 칠흑같이 어둡다는 것을 깨달았다. 희끄무레한 아침노을도, 분주한 집안 소음도, 개똥지빠귀의 비명 소리도, 일상적으로 나를 찾아오던 모든 것들은 한 순간에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아마 너무 일찍 잠에서 깬 것이라 생각하며, 나는 침착하게 고개를 돌려 어두운 실내에서도 초록색으로 반짝거리는 자명종을 바라보았다.

 

7:30

 

시계가 멈춘 걸까? 나는 침대 책상을 끌어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인터넷 연결이 해제되었다는 알림이 스크린 위에 떠올랐다.

 

7:30

 

7:31

 

1분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자명종을 돌아보았다. 자명종의 숫자가 동시에 변했다.

 

 

 

7:31

 

시계는 고장 난 것이 아니었다. 고장 난 것은 시계가 아니라 나의 일상이었다. 나는 근본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무작정 어머니를 찾았다. 침대에 연결된 알람 벨이 새 소리를 내며 연신 삐익 거렸다.

 

엄마.”

 

찌르륵 짹

 

엄마...”

 

찌르륵 짹

 

엄마아...”

 

찌르륵 짹

 

어머니는 오지 않았다. 나는 다급히 고개를 돌려 반쯤 열린 문 사이를 바라보았다. 빛 한 점 없어 사물을 분간할 수는 없었지만, 텅 빈 복도에 으깨진 감자처럼 산산조각 난 물건들이 가족사진이라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벽에 걸려있어야 할 물건들이 어찌 된 일인지 모조리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엉망이 된 것은 복도뿐만이 아니었다. 지극히 평이한 내 방조차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사방으로 떨어진 책이 그러했고, 바닥에 남은 알 수 없는 거뭇거뭇한 자국들이 그러했다. 꼭 핏자국 같았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텅 빈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두 눈을 감았다.

 

이 시간에 불이 꺼져있고 사방이 어두컴컴한데다가, 부모님은 보이지 않는다. 이상한 핏자국이 보이고 물건도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다. 도둑인가? 아니, 도둑이라면 핏자국을 남길 리가 없다. 그렇다면 살인마인가? 그렇다. 살인마다. 틀림없다. 살인마가 온다. 집에 살인마가 들었다.

 

스으윽

 

두 손으로 눈을 감싸 쥔 순간, 복도에서부터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이불 속으로 머리를 반쯤 파묻은 채 눈을 살짝 떴다. 복도의 풍경이 눈에 맺혔다. 여러 물건들이 즐비한 가운데, 갈림길 끝에 걸쳐져있던 거뭇거뭇한 무엇인가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꼭 모퉁이 쪽으로 빨려 들어간 것만 같았다. 기억의 장막에 고요히 덮여 있던 10년 전의 악몽이 순식간에 되살아나 눈앞에 어른거렸다. 나는 온 힘을 끌어 모아 외쳤다.

 

누구야!”

 

“...”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여기서 다 봤어!”

 

“...”

 

내가 정체불명의 누군가에게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말을 건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복도 모퉁이에 있는 누군가가 살인마가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의 정체를 밝혀내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그것의 모습을 사람들 앞에 내 놓는다면 나를 망상 장애라 불렀던 의사도, 나를 안타까워하던 부모님도 내 진술을 믿어줄 것만 같았다.

 

어쩌면 이 생각 역시 허황된 망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내 발상이 지나친 망상이었는지, 올바른 추론이었는지 구분할 수가 없다. 단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당시의 내가 10년 전에 일어난 괴사건의 전모를 밝힐 생각에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진 내 게임기. 그것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누가 가져간 것인지...

 

나는 알고 싶었다.

 

미치도록 알고 싶었다.

 

그것이 내 망상에서 비롯된 일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입을 열어 외쳤다. 당장 나오라고, 정체를 밝히라고.

 

필사적으로 외쳤음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다시 한 번 소리쳤다.

 

네가 게임기를 가져간 거 맞지?”

 

“...게임기?”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녀리면서도 조용한 음성. 틀림없이 여성의 것이었다.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아무 상관없었다. 대답을 이끌어낸 것만으로도 온 몸에 희열이 끓어올랐다. 나는 넘쳐나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10년 전에, 네가 내 게임기를 가져갔어. 어떻게 가져갔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네가 가져갔어. 맞지?”

 

“...내가 그런 걸 가져갔었나?”

 

한참 뒤에 들려온 목소리는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어투를 품고 있었다. 우아하면서도 풋풋한,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기이한 목소리였다. 이런 목소리라면 분명 아가씨 같은 분위기를 품은 자가 아닐까? 거만하게 상대를 내려다보는 부잣집 아가씨라 하면 얼추 들어맞지 않을까? 나는 머릿속으로 그녀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아름다운 아가씨의 얼굴과 예쁘장한 드레스, 거만한 눈빛과 고고한 자태. 신비로운 환각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예전 같았으면 두 팔을 휘저어 안개처럼 흩어버렸을 환상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오히려 그 이미지에 심취하며 웃었다. 나는 틀리지 않았으니까. 내가 본 건 환상 같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10년간 꼬리표처럼 내 뒤를 따라온 망상장애의 틀에서, 비로소 해방된 느낌이었다. 셀 수 없는 고난의 시간동안 이 날이 오기만을 얼마나 기다렸는가. 나는 행복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너는 내 물건을 가져갔어. 눈 깜짝할 새에.”

 

“...흐응, 그래서?”

 

나는 물건이 사라지는 환상을 본 게 아니었어. 네가 그 물건을 가져간 거였으니까, 나는 망상장애가 있는 게 아니야. 진실을 본 거라고.”

 

망상...장애?”

 

알 필요 없어. 별로 설명하고 싶지 않은 병이니까. , 이제 나한테 모습을 보여줘. 아니, 이름을 먼저 물어봐야 할까?”

 

나는 복도를 향해 팔을 쭉 뻗었다. 그녀의 모습을 두 눈으로 보고 확실히 그녀의 존재를 입증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게 들려온 대답은 상상 외로 싸늘한 것이었다.

 

외부인과의 대화는 항상 재미있었어.”

 

?”

 

그런데 넌 아니야. 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심각하게 재미없거든.”

 

“...”

 

갈래. 잘 있어.”

 

? 간다고? 어디로? 나 혼자라니, 무슨 말이야?”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일시적인 희열에 가려져있던 차가운 현실이 비로소 수면 위로 떠오른 기분이었다. 나는 이상한 공간에 갇혀 있었고, 주변에는 부모님도 없었다. 빛 한 점 없는 어두운 집에 혼자 남아있는 것 또한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이대로 그녀마저 떠나보낸다면 나는 정말로 혼자가 될 것 같았다.  4년 동안 이어진 안락한 시중 생활은 고독에 대한 공포심을 배가시켰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 볼썽사납게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 가지 마!”

 

?”

 

, 난 혼자 있으면 안돼... 어머니, 아빠좀 불러줘. 제발...”

 

너희 부모님은 여기 없어.”

 

, 그럼 너라도 남아줘, ?”

 

안 돼.”

 

제발!!! 난 병이 있단 말야!!!!!!!!”

 

? 무슨 병?”

 

카리에스! 척추 카리에스! , 결핵성 척추염이 있어, 걷는 것도 힘든 병이야!”

 

“...하하,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나는 순간 두 귀를 의심했다. 복도에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는 틀림없이 호쾌하게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였다. 그래, 그녀는 나를 비웃고 있었다. 남의 고통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그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그녀는 나를 죽이려는 살인마인가? 아니면 내가 죽어가는 모습을 즐기려는 귀신일까?

 

나는 요동치는 감정을 제어할 수 없었다. 들쭉날쭉 터져 나오는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전혀 배운 적이 없거니와, 지금 내게 찾아온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딱 하나,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방법은 우는 것밖에 없었다. 나는 이내 코를 훌쩍이며 울음을 터뜨렸다. 아아아아 하는 뜨거운 울음소리가 가슴을 타고, 목을 타고 느리게 흘러나왔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5분정도 실컷 울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조금은 가라앉은 가슴을 부여잡고 남은 눈물을 쥐어짤 때 즈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보니까 너도 나름 재미있어 보여.”

 

“...”

 

나중에 다시 찾아올게. 하지만 지금은 가 봐야 해.”

 

정말 다시 올 거야?”

 

약속은 지켜.”

 

날 안심시키고 그냥 가려는 거 아냐?”

 

아냐.”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거만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미미한 동정이 섞여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동정을 받아왔던 나로선 그것을 쉬이 깨달을 수 있었다. 단지 동정이 섞여 있다는 것으로 그녀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나는 실날 같은 희망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파들파들 떨리는 목을 부여잡고, 숨을 가다듬었다.

 

“...정말 다시 올 거지?”

 

이제 그 질문은 다시 받지 않을 거야.”

 

그럼 얼굴을 보여줘.”

 

?”

 

마주보고 얘기하는 사람 아니면 안 믿어.”

 

너같은 인간한테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역시 거짓말 하는 거지? 난 다 알아.”

 

“...넌 너무 의심이 많아. 너도 알지?”

 

네가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니까 그래. 모습을 보여줄 수 없으면 이름이라도 알려줘.”

 

“... 유카리.”

 

유카리? 성은?”

 

... 야쿠모.”

 

야쿠모 유카리? 이상한 이름이잖아. 가짜 이름 아냐?”

 

더 이상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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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24시간이 흘렀을 무렵, 요괴는 약속대로 인간을 찾아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어제보다 한층 고고했다. 막힘이 없었고 뜻하는 바가 명쾌해 알아듣기도 쉬웠다. 빙빙 돌려서 뜻을 전달하는 인간과는 정 반대였다.

 

그러니까, 몇 년 동안 이 방에서만 살았다는 거지?”

 

맞아.”

 

비참하네. 나라면 미쳐버렸을 거야.”

 

나름... 재미있어. 혼자서 할 수 있는 것도 많고...”

 

혼자 이 작은 방에서 뭘 할 수 있는데?”

 

취미 생활이라던지... 예술쪽이라던지...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해. 사람들 초상화 말야.”

 

그림?”

 

네 모습도 그려줄 수 있어. 잘 그릴 자신 있어.”

 

필요 없어.”

 

?”

 

“... 필요 없다고 했잖아. 뭘 그렇게 캐묻는 건데?”

 

모습을 보여주기 싫은 거야?”

 

너 같은 평범한 인간한테 보여줄 생각은 없어.”

 

인간? 넌 진짜 귀신 같은 이상한... 그런 존재인 거야?”

 

잡귀신 따위가 아냐. 요괴라고.”

 

“... 그래도 네 모습을 그려보고 싶어. 어떻게 생겼는지 말해준다면 열심히 그려볼게. 그리게 해줘. ?”

 

인간이 애원했다. 요괴는 한동안 칼같이 거절하다가, 인간의 집착에 두손 두발 다 들고 말았다. 그녀는 벽모퉁이 너머에 선 채 떠오르는 모습을 하나하나 읊었다. 잠옷과도 같은 레이스 드레스, 하얀 우산, 온몸을 치장하는 우아한 보라색... 인간은 모든 것을 빼놓지 않고 작은 종이 두 장에 요괴의 모습을 기록했다.

 

한 식경이 흘렀을 때 즈음, 종이비행기 하나가 복도 모퉁이로 날아왔다. 요괴는 비행기를 주웠다.

 

펼쳐봐.”

 

“...”

 

종이비행기 속에는 요괴가 말해준 모든 것이 정교하게 담겨져 있었다. 요괴의 모습은 색연필을 쓰지 못한 탓에 흑색으로만 기록되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야쿠모 유카리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요괴는 새삼 감탄했다. 이런 재능을 가진 인간이 있구나 싶었다.

 

어때?”

 

“... 닮았네. 제법.”

 

그래? 틀린 곳은 없어? 더 정확하게 그리고 싶어.”

 

아냐. 이 정도면 됐어.”

 

고마워. 그리게 해줘서. 그건 네가 가져도 괜찮아.”

 

요괴는 받은 종이를 소중하게 접어 자신의 품에 넣었다. 그리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 나중에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가지고 있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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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요괴의 연은 좀처럼 끊기지 않았다. 요괴는 매일같이 인간을 찾았고, 인간은 어색하면서도 반가운 목소리를 내며 요괴를 맞았다. 처음에는 단지 어리숙한 모습이 재미있었을 뿐이었다. 그저 호기심을 채우려 인간을 만났고, 마음을 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자신을 띄워주고 가까이 끌어당기려는 어색한 모습이 도리어 마음에 들었다. 연회에 참석하고, 다른 이들과 수다를 떨어보아도 만족감을 얻을 수 없었지만, 이 인간은 어쩐지 만나는 재미가 있었다. 만나는 재미가 있으니 유대는 점점 깊어져만 갔고, 서로 숨기는 것도 적어지는 것만 같았다. 인간은 어떨지 몰라도 요괴는 그러했다.

 

 1주일이나 지났을까, 요괴는 결단을 내렸다. 그녀가 숨기고 있던 작은 진실부터 몸을 휘청거리게 할 만큼 거대한 진실까지, 모조리 밝히기로 마음먹었다. 인간이 아직 깨어나지 않았을 무렵, 요괴는 몰래 인간의 방으로 찾아갔다. 방은 빛이 들어오지 않아 항상 어두웠다. 습기가 많아 서늘하면서도 축축했고, 벽모퉁이에서는 벌써 곰팡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요괴는 깊은 심호흡을 내쉰 뒤, 용기를 내어 말했다.

 

일어나봐.”

 

“...”

 

일어나.”

 

... . 유카리야?”

 

“... 아니.”

 

에이, 유카리 목소린데? , 잠깐, 지금 가까이 있는 거야? 어디에? 어디에 있는 거야?”

 

인간은 요괴의 목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애타는 목소리로 요괴를 찾았다. 안쓰럽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요괴가 손에 작은 불을 지폈다. 새빨간 불꽃이 일렁이며 요괴와 인간의 모습을 드러냈다.

 

“... 유카리... 아니...?”

 

인간이 더듬거리며 겨우 내뱉었다. 하늘거리는 드레스, 하얀 우산, 온몸을 치장하는 보라색은 없었다. 붉은 머리카락과 투박한 수레, 기묘한 검은 원피스와 빨간 고양이 귀가 있었다. 인간이 머릿속으로 그리던 유카리는 이렇지 않았다. 그녀는 분명 우아하고 아름다운 아가씨였을 터다. 인간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다시 한 번 물었다.

 

, 유카리... 아니...?”

 

“... 여기에 타.”

 

카엔뵤 린이 수레를 가리켰다. 인간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는지,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난 일어설 수 없어. 너도 알잖아.”

 

네 병은 이제 사라졌을 거야. 일어날 수 있어.”

 

그게 무슨...”

 

넌 이미 죽었어.”

 

?”

 

넌 이미 죽어있었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고. 시신 세 구가 있어서 그걸 다 가져다가... 아니...”

 

그녀는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부모님의 시신까지 불구덩이에 내던졌다는 말을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인간이 넋나간 표정으로 물었다.

 

“... 내가... 죽었다고?”

 

“... 미안. 난 원래 그런 걸 알려주지 않아. 내 습관이라... 어쩔 수 없었어.”

 

“... 그러게.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어도 배가 안 고프더라. 몸도 안 아프고. 왜 그걸 모르고 있었을까.”

 

“... 미안.”

 

날 이제 어떡할 거야? ? 수레에 태워서 어떻게 하려는 거야?”

 

같이 살 수 있어. 넌 그림을 잘 그리니까, 널 찾아오는 요괴들도 많이 있을 거야. 널 퇴치하러 온다면 내가 막을 수 있어. 난 강하니까.”

 

“...”

 

그러니까 날 믿고 여기에 타. 널 어떻게 하려는 게 아니야.”

 

린이 손을 뻗었다. 인간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표정을 살필 수가 없었다.

 

알았어. 뭣 좀 챙기고, 바로 갈게.”

 

잘 생각했어.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인간이 무덤덤하게 일어나 무언가를 챙겼다. 린이 수레 앞으로 다가가자, 인간은 수레에 올라탔다. 활활 불타는 수레가 어두컴컴한 주택을 벗어났고, 맑게 개인 창공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뜨겁게 타오르는 바퀴가 하얀 구름을 만들며 린이 지나갔다는 흔적을 남겼다. 인간은 수레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고 하염없이 환상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절벽과도 같은 지하를 건너, 질투의 화신이 사는 다리를 건넜고, 오니가 누각에 앉아있는 기묘한 장소를 지났다. 인간들의 시신을 불태우는 작열지옥터에 다다를 무렵, 린이 문득 입을 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속여서 미안해. 나쁜 습관인 건 알지만 그게 너무 재미있었거든.”

 

“...”

 

이제 그런 짓은 안 할 거야. 정말로.”

 

“...”

 

사실 야쿠모 유카리라고 했던 거는... 네가 그 사람을 알고 있는 줄 알고 거짓...”

 

고개를 돌린 린은 그 자리에 돌처럼 굳었다. 인간이 하얗게 드러난 이를 악 물고 무언가를 내리찍으려 하고 있었다. 핏발선 흰자와 손에 들린 무언가가 작열지옥터의 불빛을 받아 주홍빛으로 번뜩였다.

 

수레가 멈췄다. 인간이 일순 덜컥이는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서서히 뒤로 넘어갔다. , 아 하는 비명과 함께, 인간은 손에 든 칼로 수레를 찍었다. 린이 기겁을 하며 비명을 질렀다.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되뇌고 있었다.

 

“... 죽일 거야, 죽일 거야, 박제를, 할거야, 죽일 거야, 죽여서, 의사한테도, 엄마 아빠한테도, 박제를...”

 

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수레에 홈이 파였다. 얇은 커터칼은 인간의 독기어린 영혼을 지탱하지 못했다. 인간은 일찍이 자신의 부모가 묻힌 작열지옥터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죽일거야 죽일거야 하는 신음같은 비명을 내며, 그는 끝까지 이를 악물고 발버둥 쳤다.

 

발갛게 타오르는 불꽃이 혀를 날름거리며 인간의 영혼을 쥐어짰다. 살색 피부가, 뻘건 근육이, 종잇장처럼 떨어져나갔다. 그러면서도 팔은 멈추지를 않았다. 하얀 뼈가 검게 타버려 바스라질 때까지, 커터칼을 든 손은 멈추지 않았다. 죽음과도 같은 그의 모습은 어느덧 늪에 잠긴 악귀처럼 녹아내리고 말았다.

 

 

 

모든 것을 지켜본 린은 바들바들 떨며 수레 위에 걸터앉았다. 인간이 수레에 남기고 간 것은 작은 종이 몇 장과 칼날자국밖에 없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뻗어 종이를 집어 들었다. 엉망진창으로 죽죽 그어진 유카리의 그림이 있었고, 휘갈기듯 그려진 카엔뵤 린의 모습이 있었다. 아마 숲에서 작열지옥터까지 날아오던 중 완성한 모양이었다. 린은 입술을 달싹이며 그 아래에 적인 문구를 읽어나갔다.

 

“... 야쿠모 유카리, 실제로 존재하는 요괴, 능력을 시연할 수 없으니... 박제로 만들어... 의사에게... 보여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