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대동방학과님의 감평 모음
1. 무녀의 신앙 -TF141 作
동방프로젝트의 풀리지 않는 영원한 떡밥 중 하나인 하쿠레이 신사의 주신은 누구인가? 에 상상력을 가미하여 영나암이나 자가선 에피소드 하나 분량으로 재밌게 풀어나간 소설이었습니다. 주신이 [스포일러]와 [스포일러]의 신이었다는것, 썸썸달달한 마무리 등을 생각했을 때 살짝 동방청첩 시리즈가 떠오르는 느낌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툴툴대는 태도를 보이면서 도와줄 건 다 도와주는 주인공의 모습은 비봉구락부와 레이무의 모습이 합쳐져 있네요, 주인공다운 성격이었습니다. 아마 시간이 충분하여 내용이 더 길어졌다면 조사 과정에서 흥미로운 이벤트들이 더 많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생각되네요. 아쉬운 점이 있다면 중반부까지 결말에 드러난 주인공의 감정이 작중에서 한번도 드러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자료조사를 하는 씬에서 코스즈의 반응이나 주인공의 심리묘사를 통해 떡밥을 제시했으면 매끄러운 흐름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2. 사람을 사랑하다, 가을을 사랑하다 - 필첩 作
게임 내에서도 설정 상으로도 아웃사이더 취급을 받는 시즈하에 대한 포커싱과 자기 취급에 대해 고민하고 질투하는 시즈하의 내면 묘사가 인상깊은 작품이었습니다. 누라리횬의 손자라는 만화에서 단 한사람이라도 진심으로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신이 신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에피소드가 생각났습니다. 이 작품의 시즈하도 미노리코와 대비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지만 마지막의 만남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신앙심을 표현해줄 한 사람을 찾았기를 기원합니다. 사실 시즈하와 나무 앞의 A가 만난 후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을지 궁금했어요. 이 다음은? 이 다음은? 하는 순간에 딱 끊겨서 살짝 애타는 마음이었습니다. 다 읽고나서 후기에 적힌 조협종 노래를 찾아 재생하며 한번 더 읽으니 작품 전반에 쓸쓸한 정서, 그리고 그 쓸쓸한 정서가 해결되기 직전에 이르른 결말 부분의 몰입이 더욱 극대화되는 느낌이 들었네요.
3. 색을 칠하는 자 - 조각이 作
의외로 이번 대회에서 아키 시즈하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 놀랐습니다. 똑같이 아키 시즈하를 다뤘지만 이번 작품의 주제는 위의 작품과 정 반대로 신앙과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시즈하의 모습이 두드러졌습니다. 이 작품에서 신앙은 시즈하의 에고로 작용합니다. 신이기에 지켜야할 본분, 가을 단풍은 빨갛게 물든다는 자연이치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것을 시즈하에게 강요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시즈하가 자기 자신으로 남아있기 위한 본질이기도 하죠. 시즈하의 욕망(이드)는 이런 강압적인 에고를 거부하고 싶어합니다. 욕구와 자아/본질이 대립하고, 시즈하는 갈등에 빠집니다. 최종적으로 시즈하는 욕망을 택했습니다. 그런 그녀의 의지는 미노리코에게까지 이어지고요. 시원한 결말이었습니다. 내가 해야하는 것과 내가 하고싶은 것 사이에서 고민하는 일은 저도 실시간으로 겪고 있는 갈등인지라 이 작품의 시즈하에게 저 자신을 상당히 투영하게 되더라고요. 다만 저는 시즈하처럼 과감히 지금의 저를 내던질 수 없길래, 용감하게 하고 싶은 것을 택한 시즈하를 보며 대리만족할 뿐입니다. 언뜻 보기엔 자유로워 보여도 저마다의 위치와 본분을 지키라 요구하는 어항 같은 환상향의 현실도 얼핏 보였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습니다.
4. 루나틱 점쟁이 - 니와타리쿠타카 作
개그와 요즘 유행하는 밈을 이용한 좋은 타임킬링용 전생물이었습니다. 개그인줄 알았더니 에로였네! 하는 반전아닌 반전이 인상에 남았습니다. 반드시 진지하고 심오한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집착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동방 동인은 환상향이라는 재료를 마음대로 요리하는 재미가 있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읽었던 6작품 중에 가장 코미디+로맨스 일점돌파로 밀고나간 작품이라고 봅니다. 코가사가 귀여웠습니다. 작중에서도 홀로서기에 도전하는 모습이 보호본능을 자극하더라고요. 전생한 주인공을 반갈죽당한 점쟁이로 택했다는 것도 독특한 선택이네요. 시리즈로 나갔다면 그렇게 플래그를 꼽고, 그러면서 원랜 반갈죽 당할 미래를 피해나가고 이러쿵 저러쿵, 그런 전개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흔한 클리셰 스토리지만, 작품에 심오한 뭔가를 안넣을거라면 굳이 클리셰파괴니 넣지 않고 심플하게 밀고 나가는것도 좋죠. 잘 읽었습니다.
5. 불탄 부적 - 미마 作
구작 캐릭터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느껴졌습니다. 신키랑 미마, 엄청 강하다는 묘사나 압도적인 존재감, 주인공s와의 연결점에도 불구하고 재등장 확률이 월희 리메이크 확률과 비교해도 좋을 정도로 안타까운 캐릭터죠. 읽으면서 제대로 이해한건지는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신앙을 얻기 위해 미마가 깽판을 부린건가요? 레이무는 그걸 눈치채고 미리 마리사에게 부적을 장치한 것 같고. 대사로만 내용이 진행되어서 사건의 전말에 대해 명확히 알기 어려웠습니다. 일단 다짜고짜 어디 하나가 불타 없어지고 사라지는 전개는 개그 동인지에서 많이 보던 전개네요. 저는 글을 읽을때 영상이나 만화로 장면을 상상하며 읽는 편인데 이 글을 읽으면서 마리사 표정으로 그게 제일 많이 생각났습니다. 90년대 공포만화에서 애들 기겁하는 표정인데, 말로 표현하려니 어렵네요. 전개가 아쉽지만 나름대로 감정과 코미디성을 한껏 과장해서 상상하며 읽으면 괜찮은 작품이었습니다.
6. 하얀 연기 - 해권 作
한 편의 스님 에세이를 읽는 듯한 기분, 불교에 어울리는 자연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가 예술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자연물과 계절의 변화를 이용하여 이렇게 내면을 공감각적으로 표현하다니, 오히려 제 상상력이 빈약하여 토라마루의 감정에 아무리 이입하려고 해도 풍경 묘사가 가져다주는 색채와 소리를 100% 재현시키지 못하니 쉽지 않았습니다. 짧은 글이었지만 읽는 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이건 제 상상력과 묘사력이 떨어져서 그렇지 결코 작품의 단점은 아닙니다. 작품의 수준이 너무 높았던 것 뿐이에요.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확실히 전달되었습니다. 토라마루가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건 비사문천의 화신이라는 명예나 과업도, 도를 닦고 번뇌를 물리치고자 하는 정신도아닌 히지리와의 인연,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마음이었다는거죠? 작품 분위기는 절의 분위기처럼 잔잔함을 쭉 유지하고 있었지만 180도 달라진 토라마루의 기분으로부터 비록 번뇌를 벗어던지지는 못했지만 히지리로 인해 그녀가 구원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가님의 역량이 느껴지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7. 유일 신 - 쓸개천냥 作
믿어선 안 될 신을 믿었을 때 사람은 기분이 어떨까요? 신앙을 바쳐선 안 되는 신이라면 인간은 왜 그런 신을 만든걸까요? 종교에 대해 여러가지 궁금증이 생기는 작품이었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신앙의 형태 또한 신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앙 하면 믿씁니다! 하면서 나는 경외심을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옛날 신앙방식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죠. 어떤 신에겐 화를 내지 말아달라면서 절대적 복종을 표하기도 하고, 어떤 신은 재수없는 걸 다 가져가라면서 아랫것? 같은 취급을 하기도 합니다. 미연시 히로인 공략 같은거죠.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에서 악인은 없었지만 조온의 말대로 시온의 잘못이 컸다고 생각되네요. 은혜를 내림으로써 자신에게 신앙을 바치는 방법을 잘못 제시한 것이 첫 번째 잘못이요, 신이라고 스스로 밝힌 것이 두 번째 잘못입니다. 만약 그녀가 친절한 누나로만 남아있었다면 불행은 찾아오지 않았겠죠. 하지만 스스로 불행을 불러왔다는 점이 역설적으로 역신이라는 그녀의 본질에 맞는 짓을 행했다는 느낌도 듭니다. 참 싱숭생숭하네요. 유일한 위안이라면 죽어가는 순간에도 아이는 자신의 불행이 자신의 믿음, 그리고 믿음의 대상 때문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거겠죠. 아니면 알면서도 받아들인걸지도 모르고, 뒤늦게 알고 원망했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그나마 좀 더 희망적인 방향으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8. 사관은 논한다 - 초핫 作
문장 구성이나 선택한 단어, 문체 하나하나에서 고풍스러운 느낌이 드는 글이었습니다. 잘 짜여진 고전문학을 읽는 기분이었고, 점잖은 케이네의 말투로 외부에 밝히지 못할 자신의 과거와 모순을 담담히 해설하는 전개는 작의 무거운 분위기를 한층 강조해주고 있습니다. 환상향은 만들어진 낙원이라는 디스토피아적 관점도 잘 녹아 있었습니다. 만들어진 모형정원에서 창조자(현자)들이 원하는 대로 분위기를 연출해야하고, 필요에 의해 개체 수를 조절당하고, 늘 감시당하면서 진실은 알 지 못하게 눈가림 당하는 인간. 인간들에게 진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감추는 케이네는 부패한 언론을 생각게 합니다. 케이네는 인간의 피가 더 짙으면서 요괴의 편을 들어야 하는 자신의 모순된 처지를 비관하죠. 하지만 비슷한 상황에서 나치, 스탈린 등등 독재자들을 보조한 선동꾼이나 부패한 언론이 같은 말로 자신을 변호한다면 과연 납득할 수 있을까요? 마찬가지로 케이네도 스스로 선택한 행위를 모순이라는 이름으로 변명하며, 속죄를 하고 있다고 합리화 하고 있을 뿐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말하니 그 친절한 선생님의 이미지가 정 반대로 느껴지네요. 언뜻 보면 인간에게 해로운 역사를 감춰 행복을 유지한다는, 지극히 인간을 위한 능력이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어두운 진실을 작가분이 굉장히 냉정하게 끄집어내 전시한것 같습니다. 분명 다방면으로 캐릭터를 바라보고 입체적으로 해석하기 위한 많은 노력이 있었겠죠. 존경합니다.
9. sake L께서 강림하셨다 - 나는 미쳤다 作
성서의 내용, 그리고 종교가 어떻게 진리가 되는지를 유머러스하게 비꼬아 녹여낸 작품입니다. 기적과 은총을 베풀어 모든 존재가 자신을 경외하도록 하고 , 모두의 업보와 죄를 모두 지워주고, 종의 경계를 뛰어넘어 모두가 화합할 수 있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 그런 과업을 완수한 뒤에 다시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돌아가기 전 자신의 뜻을 이어나갈 사도를 점지하고. 예수의 행보와 흡사합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며 기독교/유대교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는 해석을 했습니다. 여러 신들이 존재하는 세상에 난입해 유일신 사상을 전파하고 신앙과 문화 모든 것을 흡수해 결과적으로 식민지처럼 만드는것, 그건 십자군이라든가 서구열강들의 행보를 떠올리게 하죠. 분명 결과적으론 모두가 행복해하고 구원을 받은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본질이 인간을 습격해야 하는 요괴가 신의 뜻을 따라 습격을 멈추고, 신앙을 받아야 유지되는 신들이 유일신에게 흘러가는 신앙 때문에 신앙이 끊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신이 없는 틈에 자신의 본분을 행하려 해도 12사도가 있으니 쉽진 않겠죠. 죽거나 다 같은 인간이 되거나 하지 않을까요? 또 모든 이가 믿는 종교는 더 이상 종교가 아닙니다. 과거 여러 과학 이론이 종교에 의해 진리가 아니라 부정당한 것처럼 환상향에서도 유일신의 말에 반하는 생각과 행동은 모두 부정당하고 말겁니다. 생각의 방향이 통일되고, 그럼 발전이란 더 이상 없게 되겠죠. 좀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한게 아닐까 싶지만 유일신, 구원, 만인의 행복이라는 키워드가 오히려 처음 신을 의심한 레이무처럼 부정적으로 다가오는 소설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읽으니 굉장히 재밌었어요.
10. 아래쪽이 가벼운 고구마 - 조져버리기 作
아키자매가 인기가 많네요. 이번이 아키 시즈하에 초점을 맞춘 세번째 작품인데, 세 작품 모두에서 신앙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는 방법이 다 다르다는 점이 재밌었습니다. 에로하면서 코미디고, 마지막엔 약간의 반전까지. 가벼운 분위기의 소설에서 너무 진지빠는것 같지만 풍년/풍요 라는 키워드는 순산, 다산과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 또한 자신의 대를 유지하는 것이 삶의 과업이었던 시절, 등따숩고 배가 부르게 해달라는 소원과 동시에 다산을 기원했던데는 다 이유가 있죠. 일손도 늘고, 열악한 환경에서 하나 둘 죽더라도 대를 이을 사람이 존재하고 등등 ...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미노리코에 섹스 마스터 설정을 부여한게 어울린다는 거에요. 그리고 또 자매는 닮는다고 했던가요? 복수의 방법으로 섹스를 택했던 시즈하도 결국 미노리코와 자매라는 사실을 더욱 부각시켜주고 있죠. 아무리 미워하고 시기하는 사이더라도 결국 생각이 비슷비슷한게 형제 자매 아니겠습니까. 마지막에 진실을 알게 된 시즈하가 미노리코와 잘 맺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여러 의미로. 얇은 책으로 나왔더라면 ㅗㅜㅑ ㅗㅜㅑ 했을 스토리였습니다.
11. 산딸기- 초록목도리 作
달달한 비봉구락부 스토리였습니다. 어제오늘 읽은 소설 중 첫 비봉 스토리네요. 겉으론 틱틱거려도 사실은 절절한 메리의 렌코에 대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마지막 결말은 산딸기처럼 새콤달콤하네요. 저는 처음에 괴물의 존재에 대해 꿈 속으로 렌코를 데리고 오고 싶어했던, 위험이 있는 곳이라면 렌코가 두말않고 따라올테니 그렇게 해서라도 렌코와 함께 있고 싶은 메리의 삐뚤어진 애정과 소유욕이 낳은 산물이 아닐까 했는데 정 반대였네요. 그래서 메리가 결국 자신의 손으로 렌코를 다치게 하는 비극이 일어나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면서 봤습니다. 어찌 되었든 작품은 달달한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풀리지 않은 모순이 있네요. 메리는 렌코를 지켜주고 싶어했지만 그녀가 막무가내로 사건에 뛰어들거란 사실을 내심 알고 있으면서 그녀에게 자신이 겪는 악몽에 대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면서 사건이 해결되지 않기를 또 내심 바라고 있었죠. 지켜주고 싶지만 나를 봐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인걸까요? 원래 사람 마음이라는게 항상 상반된 욕구들이 충돌하고 그러면서 성장하는 거니 제가 느낀 모순은 메리의 성장통 같은거였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여담으로 소설을 읽으며 궁금해져서 검색해 봤는데 산딸기의 꽃말이 [애정 결핍]이더군요. 예리한 독자들을 위해 산딸기를 메인 소재로 택하신거라면 정말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메인 소재에 결국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처음부터 담겨져 있다는 것이었으니, 이걸 좀 더 일찍 알아차렸으면 좋았을 법 했어요.
12. 라스트 리모트 - Enma 作
저는 다크한 환상향을 좋아합니다. 동방 시리즈를 접하면서 접한 동인작가가 도보이분, 아사츠키당, 조우노세 이런 서클들을 먼저 접하면서 빠져들었거든요. 그 중에서 조우노세의 스와코 해석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스와코 설정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의 스와코에선 조우노세 작품 같은데서 볼 수 있는 재앙신의 분위기가 확 와닿았습니다. 작품 내에서 야행 이라는 의식이 중요한 소재로 쓰였죠. 요괴를 퇴치하는 신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인간들의 경외와 신앙을 얻고 환상향의 질서 분위기를 확립한다... 하지만 스와코는 여기서 스스로 요괴가 되기를 자처했네요. 진정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라면 악이 될 수도 있다, 객관적으로 보면 좋은 방법이라곤 할 수 없는 비뚤어진 애정법이지만 신으로 살아오는 동안 재앙을 내리는 일이 본분이었던 스와코가 일반적인 애정표현 방법을 모르는건 당연한걸지도 모르겠네요. 또 비록 다수의 희생자를 내기는 했지만 스와코는 사나에라는 신이 자신이라는 악을 처단하게 함으로써 반영구적인 환상향의 질서를 확립하는데 성공합니다. 오오 빅픽쳐... ... 작품의 주제를 모순과 신앙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희생이라는 키워드가 더 머리에 남네요. 사나에는 인간일 적 아끼는 존재를 모두 잃고서야 신이 되었고, 환상향은 한 차례 피를 잔뜩 흘린 뒤 질서가 세워졌습니다. 오랜 시간 전쟁, 정복 등 피가 피를 씻는 역사를 보아온 스와코는 이런 희생의 필요성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겠죠. 희생을 통해 환상향 모두의 행복을 추구하려는 다소 극단적인 공리주의. 과연, 인간은 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스와코의 말이 이해가 됩니다. 이런 발상은 아무래도 인간이 하기 힘들죠. 결말 직전까지 내내 어둡고 비참한 분위기가 유지되다 마지막에 탁 먹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내리쬐는 일련의 구원 서사가 마음에 드는 이야기였습니다.
13. 2인자의 욕망 - (49.166) 作
과한 욕망은 파멸을 부른다, 항상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할 심플한 인생교훈 중 하나죠. 마리사의 파멸 과정을 그리면서 이런 교훈을 전달해주는 본 글은 전래동화, 특히 유럽지역 민담을 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옛날옛날 욕심쟁이 마법사가 있었는데- 자신의 친구들에게 질투심을 품고 최고가 되고 싶은 욕심이 지나쳐 그만 살인을 저지르고 사형당해버렸습니다- 이렇게 줄이면 민담 플롯과 비슷하지 않나요? 그러면서 다른 유명한 작품이 동시에 겹쳐보였습니다. 바로 에드가 앨런 포의 검은고양이입니다. 피해망상에 빠진 인간이 어떻게 그 마음 속에서 망상, 분노, 증오의 부정적인 감정을 키워나가는지, 그리고 그러다가 파멸에 이르게 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줬네요. 레이무는 마리사의 감시자일 뿐 이라는 설정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는 레이마리보단 견제하는 레이무와 열폭하는 마리사 이 구도를 더 좋아하거든요. 항상 가까이 지내지면 그 관계에 일말의 애정도 존재하지 않는, 서로의 목덜미만을 노리는 혐오관계 좋아요. 사나에는 여기서 마리사의 부정적인 감정을 더욱 증폭시키는 인물로 등장했는데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듭니다. 이 모든 과정이 마리사의 망상이었다면? 사나에의 도발적인 언행이나 레이무의 적대적인 발언, 이 모든 것이 금지된 행위를 시도하는 마리사의 죄책감과 피해망상, 그리고 열등감이 빚어낸 환상이었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재밌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마지막 비극의 임팩트가 더 강해지니까요.
14. 창천 - 비표면작용제 作
짧은 구연동화 느낌이 드는 로맨스 소설이었습니다. 문단 중간중간 삽입된 시구는 카게로가 와카사기히메를 사모하는 감정에 독자가 직접 이입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는 기분을 바로 체험하게 해주죠. 인어공주 이야기를 살짝 비틀었나요? 그런 시도가 느껴졌는데 본래 인어공주 이야기대로라면 인어공주는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비극을 맞이합니다. 어떠한 댓가라도 지불하겠다고 했지만 너무 사랑한 나머지 주어진 두 번의 기회를 모두 날려버렸기 때문이죠. 카게로 또한 어떤 짓을 해서라도 우리 인어공주에게 지상을 걷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고, 지상을 함께 거닐고자 합니다. 그 소원을 이루어준 주체가 마녀(지망생)이라는 것도 인어공주랑 비슷한 구도네요. 다행히 댓가를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인어공주의 전개와 비슷하지만 다르게 흘러가는 이 작품에선 해피엔딩을 기대할 수도 있겠죠? 중요한 순간에 열린 결말로 끝나 아쉽지만 마지막에 다리가 생긴 히메를 공주님안기로 안고 달빛 아래 서있는 카게로라던가 여러 상상을 할 수 있겠습니다. 다른 상상으로 호숫물에 약을 풀었으니까 모든 물고기들이 다 다리가 달려 나오는 이토 준지 결말도 떠오르긴 했는데 이러면 달달한 분위기가 너무 깨잖아요, 그냥 묻어두도록 하겠습니다. 이 소설을 읽을땐 분위기에 어울리게 장면 상상을 그림자연극으로 해봤었습니다. 잘 어울리더군요.
15. 비는 무심하게도 - 장기짝 作
비봉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기묘한이야기, 이렇게 표현하면 적당하려나요? 기승전결부터 이야기의 완급조절, 코즈믹 호러틱한 괴이와 해피엔딩도 새드엔딩도 아닌 뒷맛 찝찝한 결말까지 너무 완성도가 높아 이것은 진짜 기묘한이야기다! 라는 표현 이상의 찬사를 어떻게 꾸며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신도 요괴도 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사실이 참 안타깝게 다가오는 작품이었습니다. 필요할땐 신으로 모셨다가, 필요 없어지면 잊혀지고, 잊혀진 신은 요괴 비슷한 존재로 전락해 버립니다. 환상향 안이었다면 레이무가 적당히 중재를 하거나, 이변을 일으켜 존재감을 과시하거나 등등 신이 직접 커뮤니케이션을 하며 다른 존재로 변하는 걸 막을 수 있었을겁니다. 하지만 밖은 이미 신들의 무덤이 되어버려 환상향 처럼 존재를 알리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신들의 입장에선 디스토피아를 넘어 포스트 아포칼립스나 다름없는 세계겠네요. 살아도 신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니. 작품에 등장한 나츠키-호수의신은 모리야 신사의 배드엔딩 버전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유일한 연결고리인 사나에가 현실을 택하고 신들을 섬기기를 멀리 했다면? 신앙을 잃어가는 두 신들에게 극단적인 방법 - 흉작/재앙- 같은 것밖에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면? 그랬다면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개구리 요괴, 뱀 요괴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죠. 그래서 직접 모리야 멤버가 등장하진 않았지만, 극명하게 대비되는 무녀-신 페어를 통해 과학세기의 어두움을 조명해는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마침 신이 머무는 장소가 큰 호수이기도 하고, 농사와 연관되기도 했고. 비봉구락부가 직접 환상향과 연결고리를 찾거나 사건을 해결하는 쪽으로 등장하지 않고 괴이의 발생부터 해결까지 관찰하는 입장으로 등장하는 것도, 한 편의 비봉활동기록 애니메이션을 보는 느낌이 들어 좋았습니다. 탄탄히 구성한 스토리에 비봉클럽을 조화롭게 버무려 내는데 성공했다는 것이 제 감상입니다.
16. Qui, animi vi prope divina - 동프학선언 作
카나코가 겪은 두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신앙의 근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었습니다. 작품에서 카나코는 자신과 스와코를 각각 '과학자'와 '소립자'에 비유합니다. 카나코는 자신이 한 인격체의 일대기에 사람들이 보낸 신뢰가 점차 신앙으로 발전하여 신이 된 존재이며 , 이는 인간이 한 개인을 신격화 시킬 정도로 문명과 문화수준이 발달한 시대에야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스와코는 원래부터 있었던 현상 자체에 사람들이 신앙을 바친 존재이며, 문명과 무관하게 오랜 옛날부터 인간이 본능적으로 신앙을 품은 자연적 존재라 생각합니다. 만들어진 신이냐, 원래 있었던 신이냐의 차이겠네요. 그러면서 승격한 인격체인 자신과 자연 그 자체인 스와코 사이에 괴리감을 느낍니다. 조금 내용이 어려웠지만 이렇게 해석이 되었네요. 카나코와 스와코에 대해 해석한 작품은 많았지만, 현대적이고 과학적인 예시들을 이용하여 심도있게 접근한 철학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작가님의 의견엔 외람되지만, 저는 근본적으로 둘은 다르지 않은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앙은 무지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과학이 이만큼이나 발전한 세계인데도 이해가지 않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왜 과학은 하나의 종교가 되어가고 있는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과학자들은 왜 신의 존재를 믿는가? 사람은 자신의 지식이 닿지 않는 범위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를 이해하고 싶어하는 모순적인 동물입니다. 왜 농사를 망치는 자연재해가 일어나지? 역병은 왜 돌게 되는것이지? 만물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어떻게 태어나는 것이지? 인간은 어떻게 태어난거지? 등등.. 그런 지식이 닿지 않는 범위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신앙입니다. 자연재해 나 역병은 이들을 관장하는 초월적 존재가 화난것이고, 만물은 그런 초월적 존재에 의해 태어나고 본분을 수행한다... 이는 현상 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작용합니다.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비범함을 가진 존재, 천재라 불리는 존재들은 우리와 같은 핏줄이 아닐 것이다. 저들이 그 초월적인 존재일 것이다. 결국 카나코도 스와코도 인간이 비범한 재능을, 자연 현상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멋대로 숭상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과학자들이 신을 믿는것도 비슷한 이유에요. 우리의 과학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저 너머의 현상들에 대해 이 것은 단순히 확률과 물리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느껴 신이 존재한다 느끼는거죠. 저도 이공계 전공이고 신앙에 대한 생각이 이렇다지만 신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동방 성지순례를 다니기 시작하고서부터 인턴합격, 졸업논문 후속연구 결정, 원하는 기업 취직 등등 일이 잘풀리기 시작해서, 그 뒤로 반년~1년에 한 번 씩 스와대사 같은 데 가서 참배를 드리곤 하거든요. 기도를 드리니->일이 잘풀린다, 논리적으론 맞지 않는 인과임을 스스로도 알고 있지만 몇 번이나 겹쳐진 우연을 수학적으로 풀어내자니 지식의 한계를 느껴 그냥 편하게 생각하는거죠.
신앙은 무지로부터 비롯된다는 근거는 소설의 온도계 에피소드에서도 잘 드러나는데요, 리카코는 원자론에 대해 가르치는 교과서를 보며 '이렇게 맹목적으로 믿으라고 하는 것은 신앙이랑 다를 바 없지 않느냐' 하는 비판적인 시선을 보냅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현상에 대해 믿으라, 하면 그것은 신을 믿으라는 것과 다름 없죠. 하지만 그건 리카코가 원자론에 도달하기까지 있었던 수많은 과학실험을 몰라서 그렇게 생각한 것 뿐입니다. 분명 태초의 원자론은 단순히 추측이자 신앙에 불과했죠. 하지만 충돌실험, 이중 슬릿 실험, 맥스웰 방정식, 슈뢰딩거의 방정식 등등 ... 수많은 실험과 계산을 거쳐 기존 생각의 잘못된 점을 하나하나 고쳐나가며 지금과 같은 확률함수 모형까지 오게 되었죠. 그 일련의 과정을 전부 알고 있다면 소립자나 원자의 존재에 대해 '이건 믿음의 강요야!' 라고 말하지 못할겁니다. 알지 못하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거죠. 고도로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 다를 바 없다고 하지 않나요. 사이언톨로지나 일반 대중들이 맹신하는 최신기술, 과학세기도 그 원리를 따지고 보면 다 인간의 수준에서 거쳐온 길이고 충분히 논리적이고 미흡한 점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를 모두에게 이해시키는 건 무리겠죠. 여튼 후기가 꽤 길었네요. 살면서 한번쯤 생각해보기 좋은 소재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신기술을 수용하든, 과학적 발견을 접하든, 기도를 올리고 교회를 다니든 자신의 행동에 대해 납득할만한 이유를 부여해주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아직 안 읽어본 분들께 권해드리고 싶은 작품입니다.
17. 치르노는 치르노 일까요 - 촉촉한촉수 作
아, 이거 저도 생각해본 적 있는 떡밥인데, 노린 듯이 나온 소재네요. 힘을 추구하여 신이 되었지만 자신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잊어버린 두 존재에 대한 소설이었습니다. 원하는 강력한 힘을 손에 얻었지만 아무래도 두 동자들 모두 완전한 행복까지 손에 넣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하나는 과거와 현재의 자신 사이 괴리에 대해 판단하는 것을 포기하고 약쟁이처럼 되어버렸고, 하나는 종족 특성 상 절대 사라지지 않는 자신의 과거에 사로잡힌 망령이 되어버렸습니다. 좋은 생각거리를 제시해주네요.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이 동시에 있다면 좀 더 자신의 본질에 가까운 것은 어느쪽인가. 끊임없이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정신상태 환경과 학습의 영향을 받고 변해갑니다. 그러다보면 몇년 전의 자신이 이해되지 않기도 하고 혐오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면 과거의 자신을 계속 죽여대는 치르노처럼 그때 그시절 자신의 모습은 진짜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부정하게 되죠. 때론 과거보다 못난 자신을 보며 현재의 자신을 부정하기도 하고요. 이 경우 이루어지는 최악의 선택지가 자살이겠죠. 어느쪽이든 안타깝지만 소설 속 치르노는 특히 그렇습니다. 모두 시간의 흐름 속에 주변과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존재라는 것을, 과거의 경험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았으련만 그걸 깨닫기에 치르노는 부족했고 더욱이 마타라 신에 의해 기억마저 단절됨으로써 치르노는 자신의 본질을 파악할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말았습니다. 남은건 '강해지고 싶다'라는 욕망 뿐이네요. 허나 그 욕망마저 완벽히 이루어진건 아닌 모양이에요. 천공장에서 치르노를 척 보고 자아를 잃어가고 있다고 눈치챈 오키나가 이를 모를 리 없었을텐데, 이 작품에선 상당히 속이 시커먼 신인가 봅니다. 어차피 후임이야 구하면 되니 적당히 망가져가는 모습을 보다 폐품처럼 버릴 셈인가봐요. 절대 좋은 결말이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씁쓸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18. 천하제일인 치르노 - ㅁㄴㅇ 作
이번 대회에선 같은 캐릭터와 같은 주제를 두고 상반된 견해를 보이는 작품이 많아서 즐거워요. 작가는 작품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주장한다는데, 같이 읽고 있다보면 격렬한 토론의 장을 보는 기분이 들거든요. 이 작품의 치르노 또한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는 점에선 위의 작품과 비슷하지만 이쪽은 현실의 벽 앞에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고 현실과 타협하게 되었습니다. 충족되지 않는 욕망에 사로잡혀 망가지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결말이지만 쓴웃음이 지어질 수밖에 없죠. 존잘이 되고 싶은데 되지 못하는 재능이라든가 스페셜리스트가 되고 싶은데 그러기엔 의지도 머리도 부족한 자신을 깨닫고 포기하게 된다든가. 역시 저 자신의 처지를 이입하며 보게 되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래도 치르노의 자세는 보기 좋았습니다. 욕망을 이루기에 너무나 높은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고 하여 욕망을 포기하는 대신, 살짝만 허들을 낮추어 재도전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다보면 천하제삼...천하제사 ... 계속 허들이 낮아지긴 하겠지만 언젠가 최대의 만족은 아니더라도 최적의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위치를 찾아가지 않겠어요? 살아간다는 건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는 과정이에요. 또 일단 자신에게 맞는 위치를 찾아야 거기서 더 나아질 방법을 찾을 수 있죠. 현재 위치를 모르는 배는 항로를 설정할 수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이 상처입고 좌절을 겪긴 하겠지만, 그걸 이겨내야 합니다. 좋은 교훈을 담고 있는 작품이고, 읽으면서 여러번 그 교훈을 되새기게 되었어요. 치르노는 단순한 요정이니까 1억번 실패하더라도 1억번 이겨낼 수 있겠죠. 이런 단순함은 부럽네요, 저라면 그 전에 망가져 폐인이 되어버릴텐데.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의 치르노를 응원합니다. 언젠간 환상향 최강이 될 수 있을거에요, 아마도.
19. 들고양이 첸의 우울 - 문적문 作
첸의 어른스러움을 담고 있는 작품이네요. 요즘 첸을 세상만사 다 깨달은 하라구로로 그리는 작품이 많죠. 급식첸이라던가 순한맛이라던가, 공통적으론 병맛 계통 작품이었지만. 100살 먹은 고양이가 얼마나 똑똑해지고 인격이 완성될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래서 초등학생 수준의 아이이든, 속이 시커먼 어른이든 상상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천년 묵은 여우보다 영악한 고양이라 마음에 듭니다. 주인에게 길들여지는게 아니라 주인을 집사로 만들어 길들인다는 점에선 역시 고양이는 고양이네요. 또 짧은 글이었지만 다양한 욕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란에 대한 성욕, 소유욕 뿐 아니라 첸이 식신이 됨으로서 상실하게 된 권력과 힘에 대한 집착도 드러났죠. 첸의 인격이 성숙해지는 것과 정 반대로 욕구는 짐승의 본능에 가까워진것이 흥미로웠습니다. 예의를 배우고 법도를 배우고, 인간과 비슷한 행동양식을 가진 이성적인 존재가 되었는데 말입니다. 보통 사람이 성장하면 성욕이나 애욕 같은 일시적으로 타오르는 욕구 대신 자신의 이상을 이루기 위한 욕망을 가지게 되잖아요? 아마 이전에 가졌던 욕망은 더 이상 이룰 수 없는 것임을 깨닫고 일단 주변에서 더 쉽게 성취할 수 있을 노리기로 타협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휘발성 있지만 강렬히 타오르는, 본능에서 우러난 욕구를 충족시켜나가다보면 그 과정에서 또 새로운 이상을 추구하고 다른 목표를 수립할 수도 있겠죠. 천하제일 치르노에선 좌절된 욕망이 현실과 어떻게 타협하는지를 담고 있었죠. 이 작품에선 좌절된 욕망의 대체재를 어떻게 찾는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위치를 파악했지만 목적지가 사라져버렸을 때, 잠시 한숨 돌릴 장소를 먼저 찾고 거기서 새로운 목적지를 탐색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 잠시 쉬어가기로 하고 택한 대체재에 만족하여 영원히 거기 묶여있게 되지만 않는다면요. 이 이야기도 뒷 내용이 기대되는 작품이었습니다. 과연 첸은 란과 그렇고 그런 관계까지 가게 될것인가도 궁금하지만 그리고 나서 그 다음엔? 한 때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대장으로서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무슨 목표를 노릴 지 그게 더 궁금해지네요.
20. 미래를 보는 기계 - ㅋㅂ 作
뒷맛이 찝찝한 한 편의 단편 공포소설을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과한 욕망은 파멸을 불러온다는 주제의식에 맞춰, 미래를 보여주는 카메라 라는 소재를 적절히 잘 사용했습니다. 저라면 1년 후 미래가 깜깜하게 보이는 순간 기겁했을거에요. 온갖 생각이 들거고, 패닉에 빠졌을지도요. 최악의 미래를 상상하지 않고 당연히 사기이겠거니 생각한 주인공들의 태평한 생각이 직후 진짜로 다가오는 끔찍한 미래와 대비되어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더욱 잘 살려주네요. 다른 분의 리뷰에도 나왔었지만 왜 살인을 저질러야 되었는지까지 계기와 동기, 감정표현이 좀 더 있었으면 마리사의 처지에 더 몰입할 수 있었을 것 같네요. 동인에서 마리사는 레이무에게 열등감을 표하는 포지션으로 많이 나오네요. 정작 공식작에서 대우는 마리사가 더 좋은 것 같았는데 말이죠. 레이무는 무녀니까 그러려니 해도 마리사는 순수한 인간이 이 정도로 강할 수 있다는 사실에 관심가지는 신과 요괴들이 엄청 많았고, 관계에 선을 딱딱 긋는 레이무와 다르게 마리사는 여기저기 발을 걸치고 오지랖을 부리는 모습도 보여줬죠. 그럼에도 이렇게 레이무 하나에 집착하는 광기 넘치는 인물로 묘사되는 작품들이 꽤 된다는건 2인자가 느끼는 설움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겠죠. 2등도 잘한거야, 라고 마음 먹을 순 있지만 딱 1명, 1명만 제끼면 지금과 비교도 안되는 명예가 쏟아질텐데 그걸 포기하자니 마음이 안 따라주는게 현실이긴 합니다. 어리석은 집착이지만 동시에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1위로 올라설 수 있을지 없을지, 올라서더라도 그 영광이 얼마나 갈 지 모르는 불확실하면서 리스크만 높은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다니 지나치게 짧은 생각이었네요. 윤리적으로도, 계산적으로도 납득하기 힘든 결정이지만 그래서 작품이 주는 경고의 메시지가 더욱 잘 드러난 것 같습니다. 좋은 괴담 플롯이에요.
21. 사춘기의 뱀파이어 - Koakuma 作
예상치 못했던 커플링이네요. 레밀리아의 성욕은 플랑드르가 해결해주는 쪽이 아닐까 싶었는데 예상치 못한 소악마와의 커플링이라니. 성욕에 한해선 서큐버스가 흡혈귀보다 위라는 건가요? 성욕에 처음 눈 뜬 청소년기의 욕망이 재밌게 묘사된 작품이었습니다. 확실히 처음 성에 눈뜨면 온통 그것밖에 안보이게 되죠. 꼴린다 라는 느낌도 알게 되고, 이전엔 아무렇지도 않았던 상황이 급 부끄러워지기도 하고. 누구나 거쳐야 하는 성장과정이자 인생의 중요한 과도기가 아닐까 생각되네요. 에로의 영역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지만 근본적으론 어린이가 청소년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은 훈훈한 이야기로 읽혀집니다. 아, 결말은 잡아먹히는 내용이니 어른의 계단까지 풀악셀을 밟게 되겠네요. 처음으로 성에 대한 개념을 깨달은 나이가 180살이 되어서라니, 흡혈귀의 정신적 성장은 얼마나 느린걸까요. 그런 순수한 아이의 이미지가 거만하고 무력을 좋아하는 이미지와 갭을 불러일으켜 좋지만요. 이 글을 보면서 느낀건데, 홍마향 캐릭터 중 유일하게 레밀리아한테만 음란 속성을 부여해본 적이 없었네요. 남들이 저마다의 방법으로 아기가 생기는 방법을 설명할 때 혼자 아이가 어떻게 생기는 지 몰어보는 쪽, 그런게 레밀리아의 이미지 같다- 라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새하얀 캔버스 같이 순수한 아이한테 성에 관한 분홍빛 욕망이 탄생하여 발달하고 그 욕망이 이루어지는 과정까지 매끄럽게 보여준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22. 키신 사구메의 모순 - Kazador 作
사구메의 능력은 어떻게 발현되는 것인가, 신주님이 창작해놓고 방치한 모순에 대해 심도있게 고찰한 하나의 보고서 같은 작품이었습니다. 사실 사구메의 능력은 컨트롤 가능한 것이며 컨셉 때문에 비밀로 한다는 떡밥은 굉장히 흥미로운 해석이네요. 저는 사구메의 능력에서 해석되지 않는 모순에 대해 이미 확정된 결과나 의지에 대해 간섭이 불가능한게 아닌가 하는 해석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감주전에서 논란이 되었던 '적의 본거지인 고요의 바다로 가라!' 라는 말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에 대해, 적은 이미 고요의 바다에서 일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만약 순호가 고요의 바다에 진을 칠지 복숭아 숲에서 진을 칠지 고민 중인 상태였다면 사구메의 말로 인해 결과가 역전되어, 복숭아 숲에 진을 치는 결과를 낳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이변 해결조가 오기 전부터 적진은 정해져 있었으니 이는 변하지 않죠. 마찬가지로 주인공들은 이변의 원인을 때려잡기로 이미 결심한 상태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적의 본거지로 가라!'라고 한들 이미 확정된 의지를 뒤집지는 못하는거죠. 반대의 상황으로 탄막 축제에서 사구메는 '광기의 연회를 계속하라!'라고 말하고 이는 탄막대회가 얼마 안가 끝남으로서 역전이 실현됩니다. 이 말을 할 때까지만해도 축제는 언제 끝날지 몰랐죠. 1절로 못 끝내는 요괴들이 더 깽판을 칠지 해결사가 난입을 할지. 레이무가 끼어들 마음을 가졌지만 그 타이밍을 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서 1시간 뒤 연회가 끝날 확률은? 2시간 뒤 끝날 확률은? 무엇 하나 확정된 것이 없죠. 그런 상황에서 '연회를 계속하라!'라고 했으니 운명(가능성)이 역전되어 해결조의 난입과 함께 금세 마무리되는 결말을 낳은 것입니다.
도레미의 케이크를 이용한 해석도 비슷하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저 케이크는 맛있을거야/맛없을거야' 에서 주체를 '케이크'라고 했으나 오븐 속 내용물은 아직 밀가루 반죽이지 그것이 케이크가 될 건지는 아직 확률의 문제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케이크 라고 확률의 결과를 미리 말해버렸으니 오븐 속 내용물은 케이크가 아닌 숯덩이가 되겠죠. 신주님이 술 기운에 대충 슥슥 능력을 적어놨는데 그것 때문에 파워밸런스부터 능력의 해석까지 골머리를 앓는 건 늘 동덕들의 일이네요. 운명의 역전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 작가님의 생각을 확인하고 제 생각도 확인할 수 있었던 작품이었습니다. 이렇게 적고보니 소설 후기가 아니라 보고서 후기를 적은 기분이네요. 그러니까 마무리는 보고서를 평가하는 교수의 방식대로, A학점 드리겠습니다.
23. 독심독신 - 큘라마도마 作
사토리에 대한 신주님의 설정부여는 지극히 신주님 다웠어요. 동인계에서 능력때문에 미움을 받다니 불쌍해, 분명 상처가 많은 요괴겠지. 분명 멘탈이 여릴거야, 슬픈 과거때문에 항상 외롭고 쓸쓸할거야, 이런 식으로 해석하니까 공식에서 '이렇게 미움받는 내 능력 좀 쩌는듯. 11점 드립니다." 라며 180도 다른 이미지를 못박아버렸으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에선 그런 동인계의 인식과 신주님의 설정을 둘 다 파괴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연결해주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활발해보이고 스스로도 멘탈이 강하다 여기는 사람들도 뜯어보면 드러나지 않은 상처를 가리기에 급급한 경우가 많죠. 이 작품의 사토리도 그런 처지입니다. 쓸쓸하고 외롭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며 끊임없이 자신을 속이고 솔직해지지 못하는 가엾은 아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차별과 멸시가 당연한 요괴들의 세상에서 버텨내지 못했겠죠. 보통 사토리를 다루는 동인에선 사토리와 대비되는 존재로 코이시를 꺼내거나, 사토리의 심리상태나 감정을 표현하는 대상으로 펫들을 많이 꺼내곤 해요. 사토리 단독으로 나오는 작품은 잘 안보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선 오롯이 사토리 한 명의 심리상태에 집중하고 있어요. 그럼으로써 독자는 이 글을 읽어나가며 사토리와 같은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그녀의 입장에 이입할 수 있습니다. 그럼 금방 마음 한구석에서 의문이 떠올라요. '정말? 진짜 괜찮은거 맞나?' 그런 의문이 떠오를 때, 소설은 결말에서 사토리의 본심을 드러내주며 사실 그녀도 다른 여느 누구와 같이 상처받기 쉬운 마음을 가진 존재라는 걸 보여줍니다. 코이시와 대비를 시키다보면 그래도 사토리는 멘탈이 강한 편이라는 흐름이 되기 쉬운데 사토리에게만 집중한 덕분에 그녀 또한 언제든 코이시처럼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해줍니다. 마지막에 지령전 스토리와 연결짓는 동시에 지금까지의 비관적인 처지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제시하는 열린 결말까지, 절절한 감정흐름과 함께 서정적인 느낌이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24. 장미 - 잉딱 作
존재하는 듯 존재하지 않는 코이시의 존재에 대해 흥미로운 견해로 풀어나간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요괴가 본능을 거부하면 자기 자신을 잃게 되고 차츰 약해지다 결국 죽게 된다는 기존 소재에 덧붙여, 이와 동시에 본능을 거부하는 요괴의 마음은 새로운 요괴를 낳게 된다는 견해를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요괴는 본디 인간으로부터 만들어져 인간이 공포를 느껴야 하는 존재이니 요괴의 마음이 만들어낸 존재는 불완전한 환상향의 이레귤러로 남을 가능성이 크지만 말이에요.
이 작품에서 장미란 사토리의 욕망, 본능을 거부하고 미움받는 존재에서 벗어나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어하는 욕망을 상징하는 존재라 생각됩니다. 이 욕망은 본인의 트라우마로부터 파생되었고, 트라우마가 강해질수록 스스로를 거부하는 욕망 또한 강해져 코메이지 코이시 라는 새로운 요괴를 만들어내고 자신은 죽어가게 되었죠. 이 작품의 끝은 코이시의 존재는 배척되고 사토리는 기억을 잃었지만 욕망을 떨쳐내고 목숨을 건지는 해피엔딩처럼 보이는 형태로 끝을 맺습니다. 하지만 저는 참 안타까운 새드엔딩으로 읽혀졌어요. 본질과 이를 거부하는 욕망 사이에서 고통받는 사토리를 낫게 한 방법은 욕망을, 트라우마를 싹 없애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미코의 표현대로 사토리가 마음이 만들어낸 장미 화원에 스스로 갇혀 죽어가는 것이 문제였다면 그 장미를 싹 말려죽여버린 것이 해결책이었던 것입니다. 결말 부분에 모두에게 잊혀져 말라 죽어버린 장미 정원처럼요. 해결해줄 것처럼 멋지게 등장한 미코도 그 욕망의 본질만큼은 이해하지 못한 채 두루뭉실하게 겉핥기 식 해결책만 주었을 뿐이고, 환상향에 투영된 욕망은 이레귤러로 배척받아버렸죠. 결국 사토리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해준 존재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트라우마와 욕망은 우리를 상처주기도 하지만, 때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제 3자에 의해 욕망을 잊어버리게 된 사토리가 과연 앞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요? 또 몇십, 몇백년이 지나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되는것은 아닐까요? 환상향은 잊혀진 것들을 받아들이는 낙원이라고 흔히 묘사되곤 합니다. 하지만 요괴가 품은 마음의 상처 하나 받아들이지 못해서야 낙원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이곳에 존재하는 이상 무조건 행복해야한다는 룰을 강제하여 마약을 항상 입에 달고 살게 하고, 행복하지 않는 자는 국가에서 감시하고 탄압하는 디스토피아 세계를 다룬 We Happy Few라는 게임이 있습니다. 이 작품 속 환상향의 모습은 마치 그 게임 속 세계관을 보는 것 같네요.
25. 한식 - traditionalrock 作
아마 5번은 반복해서 읽어보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아직 이 작품의 전개를 완전히 이해했다고 단언하기 힘듭니다. 일단 주인공이 누군가에 대해서, 붉은 눈동자,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존재를 보고 지상으로부터 달려간 자, 두 발로 걷다가 또 네 발로 뛰기도 하는 자, 활동 영역은 아마도 죽림, 이런 요소들을 통해 제가 내린 결론은 이제 막 요괴화 된 카게로가 아닐까 했습니다. 검은 머리의 공주는 카구야일 것이며, 그 신하는 에이린, 노파나 자객들은 영원정의 요괴 토끼들일 것이고, 마지막에 카게로를 불태운 자는 모코우, 그렇게 잡으면 어느정도 스토리 라인의 틀이 잡히는데요. 제가 주인공이라 생각한 캐릭터들로 정리한 스토리는 아래와 같습니다.
카게로가 하늘에서 떨어진(에이린,카구야) 존재를 보며 어떤 기대를 품고 그들을 찾아갑니다. 그 기대는 막 인간의 모습이 되었지만 인간과 어울릴 수 없는 자신을 받아줄 존재를 찾기 위해서라든가, 하늘에서 떨어진 신성한 존재이니 어쩌면 자신의 처지를 구원해줄 신을 찾기 위해서라든가,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 때문이었을겁니다. 하지만 정작 찾아간 곳에서 카게로는 적으로 간주되고, 목숨을 노리며 쫓아오는 자객들을 피해 도망칩니다. 짐승이었을 때처럼 다시 네 발로 기기도 하고, 몸 여기저기가 베여나가면서도 필사적으로 살기 위해 도망칩니다. 그러던 와중 자신을 노리는 자객들의 공격이 뜸해지는 걸 깨닫습니다. 이 때야말로 살아나갈 수 있는 찬스라 여겼던 순간, 자신의 앞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존재에 의해 카게로는 온 몸이 불태워집니다. 이는 카구야를 찾아온 모코우의 짓입니다. 카구야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그 분노를 휘두르는 모코우에게 재수없게 걸린 것이고, 다른 토끼들은 그런 모코우의 존재를 눈치챘기에 추격을 포기한것이죠. 이렇게 카게로 쪽 스토리는 끝이납니다. 이후 휘침성 스토리를 생각하면 아마 목숨은 건졌겠죠. 그와 동시에 한편으론 모리야 신사에 관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인신공양으로 바쳐진 아이를 보며 스와코가 삐뚤어진 신앙에 대해 고뇌하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카게로가 영원정에 찾아갔다 도망치는 장면 사이에서 전개되죠. 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막연히 제물을 바치면 도와줄것이라 믿는 인간들의 모습을 카게로의 모습과 매치시켜, 영원정의 존재들이 무엇을 위해 지상에 온건지도 모르는 채 욕망에서 비롯된 신앙(신뢰)심을 품은 카게로를 비판하는 대목입니다. 인간의 신앙은 욕망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이 때문에 신앙이란 어리석고, 이기적이다 라는 것이 주제가 아닐까 합니다. 이 작품의 결말은 종교가 종교를 견제할 것이라는 미래를 암시하며 끝납니다.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 카게로처럼, 인간들은 새로이 등장하는 존재마다 어리석은 신앙을 바칠 것이고, 다른 종교들이 이를 견제함으로써 일은 해결되거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거나 하게 되겠죠. 그런 환상향의 미래를 카구야가 비웃는 시선으로 내다보는 것이 마지막 부분입니다.
위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제 추측입니다. 자세한 내용이나 기승전결, 주제의식은 작가님의 의도와 전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주변 풍경이나 인물들의 동작 등 세밀한 묘사는 한 장면 한 장면 굉장히 신경썼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어떤 행동을 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행동의 원인은 무엇이며 각 장면이 앞뒤 장면을 어떻게 이어주는지 알아채기 힘든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작가님이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나 등장인물들의 생각을 모두가 알겠거니 줄이지 말고 차라리 글이 너무 길어지더라도 전부 적는 편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26. 덜 지하로부터 - 1.218 作
치르노가 시위하는 소설이 진짜 있을 줄은 몰랐네요. 그래서 가벼운 개그물인가 하고 읽었는데 이럴수가, 굉장히 심오하고 어두운 작품이었습니다. 환상향의 어두운 면을 극대화 시켜 현대적인 디스토피아로 묘사하고 인물들의 심리나 상황은 우리가 흔히 아는 미소녀들의 연회천국이 아니라 사실주의, 계급주의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감자, 인력거꾼, 1984, 소일렌트 그린... 이런 작품들이 연상되더군요. 제가 동방 팬픽에 계실분이 아니라고 말했던 이유가 이거였습니다. 2차 창작에 연연할 필요 없이 본인만의 세계관, 캐릭터를 가진 창작물에 도전하셔도 될 법한 역량이 느껴집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하여 어디까지의 행위가 용납되는가, 세상을 바꾸는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 등등 우리 사회와 연관지어 생각해볼 문제가 상당히 많이 내포되어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제 주관은 있지만 차마 여기에 답인것마냥 적어놓기엔 너무 위험한 주제들이네요. 그래서 논란이 불거지지 않을 포인트만 조금 짚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중산층 이라는 키워드입니다. 굉장히 인상깊은 단어선정이었습니다. 자신들은 세상을 바꾸고 약자를 대변한다 믿지만 진정 약자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하여 위쪽으로 올라갈 수도 없는 애매함이 어두운 환상향에서 참 쓰라리게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려면 중간에서 먼저 나서는게 맞는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정말 밑바닥에 있는 약자는 저항할 힘도, 여유도 없습니다. 하루하루 먹고살기 급급한 상황 속에서 세상을 바꾼다는 건 어림 없는 얘기죠. 그런 이들과 공감하고 연대하는 동시에 위쪽에서 무시하거나 억누르지 못하게 견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중산층의 역할일거에요. 학생, 지식인, 상인 등등 역사 속 많은 혁명들은 그런 중산층이 연대에 큰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까. 작품 속에서도 시위 덕분에 결과적으로 인간과 요괴가 다시 한번 협상테이블에 앉는 이로운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했고요. 중산층으로서 혁명에 동참하는 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코가사와 BB, 츠쿠모가미 시위대의 실패 요인은 무엇인가, 적으로 돌리지 말아야 할 세력까지 적대하고 변화보단 자기 집단의 이익을 더 우선시 하는 태도가 그들을 몰락하게 만든 원인이라고 봅니다. 극단적인 시위 방식은 당장 이목을 끌기는 쉽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적을 만들죠. 약자를 대표한다고 나선 집단에서 약자를 적대한다면 누가 그들과 연대하려 들겠습니까. 고립되는 결과만 낳을 뿐입니다. 하기야, 처음부터 혁명은 명분이었을 뿐 자신들만의 낙원을 위해 약자들을 이용한 것이니 그들에겐 처음부터 아군이란 없던 것이나 마찬가지겠네요. 자업자득이라고 느끼는 동시에, 끝까지 자신이 옳은 줄 아는 이용당하는 코가사의 처지가 안쓰럽습니다. 결국 원하는 낙원은 오지 않을 것이고, 혼란만 오게 될터인데 이런 상황을 좋다고 할 수 있는건 세이자밖에 없지 않을까요. 물론 제가 생각하는 세이자라면 마지막까지 자기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추하게 합리화하지는 않겠지만요. 사회문제를 내포한 소설이라 후기가 좀 정치적으로 변한것 같은데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이렇게 현대적인 환상향도 마음에 들어요. 다음엔 어떤 환상향의 어둠을 보여줄지, 작가님의 후속작이 기대되는 작품이었습니다.
27. 영원의 저주 - 카라니아 作
모코우에 대한 카구야의 삐뚤어진 애정과 집착이 와닿는 작품이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카구야가 모코우를 키잡하는 스토리로 보이기도 해요. 아직 불사의 무서움을 모르는 아이가 죽을 수 없는 저주로 인한 온갖 불행과 슬픔을 다 겪도록 한 뒤, 마지막에 결국 영원한 동반자가 될 사람은 자신 밖에 없음을 깨닫게 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니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계획입니까. 영원히 사는 존재가 아니면 결코 할 수 없는 스케일의 키잡이네요. 케이네도, 스미레코도, 레이무도 소중한 모두를 잃고 폐인이 되어버린 모코우를 안아주며 위로해주는 카구야의 모습이 자동으로 그려집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증오의 마음은 흐려지고, 소중한 이를 잃는 슬픔의 감정이 너무나 커져 트라우마로 자리잡게 된 모코우가 그런 카구야에게 기대는 모습도. 잔혹하지만 아름답고, 씁쓸하지만 달콤한 장면이 될것이 틀림없습니다.
봉래인들이 엮인 동인 스토리에선 유난히 불로불사를 저주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네요. 불로불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건 대공마술의 렌코밖에 못 본것 같아요.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지 않나요? 불로불사 하면 사람들은 최악의 케이스를 주로 생각하더라고요. 모든 것이 멸망한 지구에 홀로 남는다던가, 어두운 심해나 블랙홀 같은 공간에서 죽지도 못하고 영원히 같은 곳에 갇혀 있게 된다던가. 하지만 아무리 죽어도 부활할 수 있는 몸이 있으면 유한한 생명으론 결코 알 수 없는 진리를 탐구할 수도 있고, 천천히 오랜 세월에 걸쳐 변화하는 우주의 탄생과 죽음을 바라볼 수도 있겠죠. 계속되는 삶과 죽음 속에 모든 욕망이 소멸하게 되지 않는 이상 저는 하고싶은걸 하며 계속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불사의 존재가 나 혼자만이 아니라면 더더욱 살 맛나겠죠, 경험과 지식을 공유할 대상이 있으니. 그래서 전 진짜로 불로불사의 약이 있었으면 해요.
영원이란 시간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 우주도 겨우 140억년정도밖에 안되었고, 그 속에서 인간의 역사는 몇백만년밖에 되지 않아요. 만, 억 단위는 무한을 논하기에 너무나 하찮은 단위입니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것, 혼자 남겨지는것, 지구가 멸망하는것, 어쩌면 블랙홀에 빨려들어 스파게티가 되는것까지도 다 하찮은 고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카구야는 이런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에 불로불사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겠죠? 의미없는 고민따위 하지 않고 오직 눈앞의 대상만을 바라보며 현재를 살아간다, 영원의 공주에 걸맞는 낭만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몇번의 우주가 멸망하고 재탄생하더라도 이 둘의 관계만큼은 계속되었으면 좋겠네요. 초월적인 스케일의 로맨스 소설이었습니다.
28. 매미는 여름에 생을 다한다 - 셰도우암 作
소름끼치면서도 아름다운 우화 이야기였습니다. 10년 넘는 시간을 땅 속에 처박혀 있다 단 2주, 화려하게 교미를 외치며 삶을 불태우는 매미의 삶과 우화에 빗대 타락하는 태자의 모습을 너무나 리얼하게 표현했습니다. 어떻게 자아성찰이 타락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과정을 이렇게 매끄럽게 묘사 하시는건지, 또 어떻게 사람이 망가져가는 과정을 이렇게 치밀하고 아름답게 묘사할 수 있는지 존경스럽더군요. 처음엔 야설인가? 하면서 꼴리는 장면을 상상하며 읽는 것이 맞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 작품은 파트마다 다른 이의 시선으로 읽어내려가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전반부는 세이가의 시선에서, 망가져가는 태자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녀의 욕구를 떠올려보았습니다. 마음 한가득 소유욕을 품고 성욕에 푹 젖어가는 태자의 모습을 문틈으로 엿보고 있다 생각하니 배덕적이면서 추잡하지만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허물을 벗고 나오는 벌레의 모습이, 그 순간엔 정말 지저분하고 끈적해보여도 실은 생명이 앞으로 한 단계 나아가는 자연미 가득한 순간인 것처럼요.
중반부는 욕망에 눈 뜬 히지리의 시선에서 사건을 바라보았습니다. 히지리가 얼마나 뻔뻔해보이던지요, 불교에서 가르치는 교리와 정 반대되는 짓을 하면서 다른 제자들조차 육욕에 파묻히게 만드는 모습이 참으로 요사스러웠습니다. 허나 곧 반대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는 모든 욕구를 떨쳐내고 오직 고행만으로 진리를 탐구하던 싯다르타가 식욕을 이기지 못하고 우유죽을 먹은 뒤 마침내 깨달음에 얻었다는 일화에서 비롯된 생각이었죠. 히지리의 입장에서 태자는 공양물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인간/요괴의 욕구를 떨쳐버리고 수행을 쌓는 그들에게 던져진 먹음직스러운 우유죽이나 다름 없는 존재였습니다. 또 태자는 타인의 욕망을 듣고 이를 풀어주고자 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 있었으니, 부처도 이겨내지 못한 욕망을 어찌 이들이 이겨내겠습니까. 그렇게 비록 명련사는 난교의 장이나 다름없는 곳이 되었지만, 이를 통해 명련사는 어떠한 진리를 깨달은건 아닐까요? 요괴와 인간이 화합하여 열반에 이르르자- 라는 뻔한 이상 말고, 그들의 본질과 연결된 요괴들의 진리를요. 진리라는 것이 꼭 우리가 보기에 깨끗하고 도덕적일수만은 없는 법. 태자가 스스로를 공양하고 이를 취함으로써 명련사는 낡은 이상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은 존재로 거듭난 걸지도 모른다 라는 해석을 해보았습니다.
후반부는 태자의 시선에서,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찾아 나가는 모습에 몰입하며 봤습니다. 비록 그 길이 제 3자의 시선에서 보기에 떳떳하거나 올바른 길이 아닐지는 몰라도 자신에게 솔직해진다는것은 참 후련하게 느껴지더군요. 애초에 우리의 행위는 8할이 타인의 시선에 의해 정해진다고 봐도 과장이 아니니까요. 지금의 제가 행복을 느끼고 있는 것이 정말 제가 바라는 행복일까요? 게임이나 먹는것, 성적 행위나 잠자는것 그런것들이 제 본능이 진정 바라는 행복이었다면 다른 행위들에 눈이 돌아가지 않았겠죠. 결국 제가 행복을 얻기 위해 이것저것 해본다는것 자체가 타인의 욕망과 시선 속에서 제 욕망을 완전히 펼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궁극의 행복을 느낀다면 정신병원에 온몸이 묶인채 있게 되거나 팔다리가 사라진채 나뒹굴어도 아무렇지 않을거에요. 물론 그 정도로 행복을 느낄만한 행위가 무엇인지 아직 저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언젠간 깨달을 기회가 오겠지만 그건 이 사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임종의 순간이나 뭐 그런 때가 되겠죠.
읽는데 오래 걸리긴 했지만 그 정도로 치밀한 심리묘사가 인상깊은 작품이었습니다. 영화로 비교하면 미드소마 같은 느낌도 조금 들었습니다. 공감은 가지만 공감가는 것이 위험한 것 아닌가 하는 감상이 공통적으로 들었으니까요. 읽는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크게 갈리겠지만, 적나라한 묘사나 망가져가는 모습 같은걸 잘 견디는 분이라면 길더라도 끝까지 읽어보길 권하는 작품입니다. 사족으로, 누에의 캐릭터성이 마음에 들어요. 귀여운 명련사의 이레귤러.
29. 육욕 - 물부포도 作
사람고기라는건 정말 맛있는걸까요? 인육의 맛에 빠져든다는 플롯은 동방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많이 보이는 내용이지만, 정말 그 인육이 다른 모든 고기를 버릴 정도로 맛있는 것인지에 대한 해답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족의 고기는 비리다는 이야기도 있고, 병에 걸리기 쉽다는 얘기도 있고 한데 ... 한 가지 확실한건 배고플 때 먹으면 뭐든 천상의 맛이 되겠죠.
이 작품의 분위기는 그런 기근이 닥친 환상향을 분위기로 전개됩니다. 풍작의 신이 사라지고, 끝없는 가뭄만이 계속되는 가운데 먹을 수 있는 재료 앞에서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요? 위에서 언급했듯, 부처도 배가 고프니까 눈앞에 바쳐진 우유죽을 덥썩 받아먹지 않았습니까. 식욕은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입니다. 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고, 허기는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키죠. 동물들도 배가고프면 동족을 잡아먹는다는 것은 이미 여러 실험이나 사례를 통해 보고된 바가 있습니다. 식물도 양분을 얻기 위해 주변을 말려죽이고 그들의 양분을 대신 취하기도 하죠. 자연의 법칙이란 그런겁니다. 절박한 상황에선 본능이 가장 우선시 되는 법이에요. 이 작품 속 후토는 결국 인육의 맛을 알아버렸습니다. 시체를 뜯어먹는 것은 요괴나 들짐승들과 다를 바 없는 짓, 하지만 상황이 절박하기에 그녀의 판단에 비윤리적이다, 비인간적이다 라고 비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배부르고 등따신 입장에서 절박한 이들에게 먹을 걸 가려먹으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이기적인 짓이에요.
그러고보니 이런 생각도 드네요. 상황에 따라 인육이 허용된다면, 네이버 웹툰 '금요일'의 에피소드처럼 봉래인이 자신의 살점을 모두에게 기부하면 되는 것은 아닐까? 꽤 괜찮은 방법 아닌가요? 굶어도 마를 일 없고 잘라내도 그 살점이 돋아나니 굶주린 인간들에게 자신의 살을 기부하면 식량문제도 해결되고 예수와 같은 신적 존재로 부상할 수 있었을텐데요. 불교니 도교니 하는 수행은 우리 근본 욕구를 채워주지 않습니다. 진짜 구원은 물질적인 형태로 드러나야죠. 이런 전개 속에서 모코우나 에이린, 카구야가 나섰더라면 꽤 상황이 재밌어질 수 있었을것 같은데 그랬다면 작품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흐려졌겠죠. 아쉽지만 등장하지 않는 것이 이해 갑니다. 후토가 느낀 갈등을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어버릴테니까요. 난잡한 선화를 이용해 공포 분위기를 한껏 살린 만화를 그려 표현한다면 좋을것만 같은 작품이었습니다.
번외 . 거짓말쟁이이야기(嘘吐き物語) 후일담
이 이야기를 쓰게 된 계기는 세이자의 작중 행보를 보고 피어난 의문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혁명한다며? 깽판치겠다며? 왜 저기가서 저렇게 인싸처럼 놀고있지? 유카리나 신묘마루랑은 언제 친해진거고? 뭐...신주님이 늘 그렇듯 설정에 구멍이 한 두개가 아니어서 어색함 투성이었죠. 분명 본인은 별 생각 없이 세이자가 마음에 드니까 넣자는 생각으로 썼을 겁니다.
그런 스토리의 허점을 연결하는 동시에, 저는 제가 생각하는 아마노자쿠의 이미지를 최대한 살려보고 싶었습니다. 무엇이든 반대로 하는 태생부터 사악한 존재가 과연 사람 하나에 마음이 변한다던가 애정이 생겨 열혈 혁명전사로 탈바꿈할 수 있을까요? 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세이자와 신묘마루를 엮은 작품에선 아무리 쓰레기여도 신묘마루에게 애착이 생겼다든가 해서 신묘마루를 도와주는 츤데레 이미지의 세이자가 대세였습니다. 아무래도 주요 커플링이기도 하다보니. 그러다보니 세이자의 이미지가 정의의 주인공처럼 보이는 면도 없지않아 있더군요. 그런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혁명을 일으키면 세상이 더 좋아지는 방향이 될텐데 그게 아마노자쿠에게 무엇이 이득이라는 것인지, 그러다 떠오른 것이 유명한 대사 '게임은 이기려고 하는게 아닙니다. 상대방 빡치라고 하는거지.' 였습니다.
세이자는 강해지는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녀석 같습니다. 환상향을 지배하겠다고 큰소리 뻥뻥치긴했어도 왕이 되는 것보다, 왕이 되어 나라를 불태우는걸 더 좋아할 녀석입니다. 원본 설화에서도 아마노사구메는 아무런 이득이 없음에도 거짓말을 해서 타락하게 되고, 별다른 이유 없이 잘 사는 여자애 하나를 다치거나 죽게 한 뒤 그 자리를 차지해 온몸이 갈려나가는 최후를 맞이합니다. 부, 명예 그런건 상관없을거에요. 그냥 남들 불타는 모습이 즐거운 진성 사도마조히즘 환자인거죠.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드는 캐릭터입니다.
오키나와 누에는 소설에서 해결사 역할을 맡고는 있지만, 이 둘도 작품의 주제인 모순을 담고 있는 캐릭터입니다. 숨겨진 신이라면서 왜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는가, 정체불명의 요괴라면서 왜 미소녀 모습으로 절에서 수행이나 하고 있는가, 그런 모순된 모습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습니다. 세이자에게 자신의 본질을 깨닫게 해주는 동시에 말이에요. 오키나의 경우엔 처음엔 어쩔 수 없이 등장시켰는데 조사하다보니 너무 매력적이어서 다음 소설에도 또 등장시켜보고 싶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의 메인 주제는 '나는 거짓말쟁이입니다.'라는 유명한 패러독스입니다. 진실을 말하면 거짓말쟁이가 아니게 되고, 거짓을 말하면 스스로 자신을 부정해버린 이 가엾은 거짓말쟁이의 처지를 혁명투사 세이자의 이미지와 매치시키고 싶었습니다. 처음엔 이발사의 역설이니, 제논의 역설 등등 다양한 패러독스를 이용해 논리싸움 구조로 만들고 싶었는데 쓰다보니 너무 Q.E.D-증명종료 틱해져서...갈아엎었습니다. 덕분에 더 환상향 다운 분위기가 유지된것 같아요.
이렇게 동방팬픽에 열중한건 거의 10년만이네요. 바쁘다고 현생에 찌들어 다시 펜을 잡을 생각은 지금껏 못하고 있었는데, 다시 펜을 잡을 좋은 기회를 만들어준 대회 주최자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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